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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54-수정

{어제 올린 정신현상학 서설 §54 번역이 충분한 이해가 없는,  원문에 대한 충분한 이해보다는 앞뒤가 맞는/읽는 사람이, 읽는 사람이 아니라면 역자라도,  [원문이 말하는 것이 아닐지라도] 뭔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제공하는 번역이 아니었다. 그래서 다시 올린다.} 

 

 

§54) [이런 풍부한 내용이 뭔지 하나하나 따져보지 않고] 통틀어서 이야기 하자면[1]앞에서 표현한 바와 같이 [주어로 사용되는] 실체[2]그 자체에 [애당초부터] 주체가/[생동하는 주체로서의 힘이] 스며들어 있기[3]때문에 [모든 규정이 부정된 이 실체가 갖는] 형형색색의 내용은 [밖에서 누군가가 구별해 내는 것이 아니라] 주체로서의 실체가 자기반성을 통해서 스스로 구별짖는 것이다.[4]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뭔가로 존재하는} 현존재에서 한번 살펴보자.] 현존재가 존속하는 터전/본질, 즉 실체는[5]자기동일성[6]이다. 왜냐하면, 자기자신과 동일하지 않는 현존재는 해체되기 때문에 존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7] 더 살펴보면[8]이런 자기동일성이란 순수한 추상이며, 그리고 바로[9]이런 추상이 사유가 되는 것이다.[10] 내가 여기서 질이라는 말을 사용할땐 [다른 모든 규정은 제쳐놓고 현존재를 {셀 수 있는} 하나로 규정하는] 단순한 규정이란 의미로 사용한다. 현존재는 이런 의미의 질을 통해서 다른 현존재와 구별된다. 다시 말해서 현존재란 것 자체가 성립된다. [하나로서의] 현존재란 독자성을 통해서, 달리 표현하면 [그것외 다른 것이 아니고 또 다른 것이 있다면 다 추상한/ 아무런 분열이 없이 해맑은] 자기와 일체를 이루는 가운데[11]존속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존재의 본질이 [사유의 산물인] 사상인 것이다.[12] — 바로 여기에 <존재는 사유다>라는 명제의 근거가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통찰은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을 상투적이고 몰개념적으로 운운하는 것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 현존재는  자기동일성을 주장하면서 존속하고, 자기동일성은 순수한 추상성이기 때문에 [결국] 현존재의 터전/본질이란 현존재가 스스로 자기로부터 추상한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현존재의 터전/본질은 현존재와 불일치를 이루고 헤체되어 현존재를 바깥으로부터 거두어 들여 자기 안으로 들어간 내면성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현존재가 생성되어가는 모습이다. [이젠 현존재를 떠난 존재자 전반을 살펴보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와 같은 [사상규정을] 본질로 하고 있다. 존재자의 본질이 이렇기 때문에 그리고 이런 본질이 지의 대상이 되다는 면에서 지가 하는 일이난 낯선 것을 다루는, 즉 반성하는 순간 내용에서 벗어나는 자위행위하는 반성이 아니라 [내용 안에 머무르는 반성이다.][13] 학문은 [내용적인 차원에서 <이것이다>, <저것이다> 라고] 다투기 만을 일삼는 독단론 대신 [단지 반성의 차원에서, 즉 데카르트와 같이 내용 안으로 침강하지 않고 편안하게 앉아서 자기 안으로만 들어가는 반성을 통한] 자기 확신과 같은 것을 단언하는 독단론을 운운하는 관념주의가 아니다. 학문은 이와 맥을 달리하는[14]것이다. — 지가 하는 일이란 [대상이 되는] 내용이 스스로 자기 내면으로 복귀하는 것을 관조하는 가운데 내용 안으로 침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가 하는 활동은 내용에 내재하는 [자기운동하는] 자기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지의 활동은 동시에 자기 안으로 복귀하는 운동이다. 왜냐하면, 지가 하는 활동은 [대상이 되는 내용인] 타자존재 안으로 침강하지만 또 순수한 자기동일성을 견지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가 하는 활동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듯해 보이는 간계와 같은 면이 있다. 여기서 지가 하는 일이란[자기동일성이란] 규정성이 자기보존이나 특수한 이해를 염두에 두고 뭔가를 한다고 생각하면서 구체적인 삶을 전개해 가지만, 그 일의 결과는 정반대로 스스로를 해체하여 전체의 한 마디가[15]되는 행위임을 그저 지켜보는 것이다.



[1]원문 <dadurch überhaupt>

[2]원문 <Substanz>. <실체>란 것이 알 것 같았는데 가면 갈수록 아리달송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본질/Ousia, To ti en einai>, <바탕/Hypokeimenon> 등에 이어 스피노자가 말한 <모든 부정을 앞서가는 그 무엇> 등 헷갈린다. 이런 헷갈린 상태로 이 문단을 다시 읽어 내려간다. 스피노자를 따라 실체를 <모든 부정을 앞서가는 그 무엇> - 스피노자는 이것이 신이라고 한다 – 으로 이해한다면 실체란 모든 규정을 부정한 추상적인 존재가 아닌가? 그리고 실체가 주체란 면에서, 그리고 주체가 하는 일이 부정운동이란 면에서 자기부정이 아닌가?

[3]원문 <Die Substanz [ist] an ihr selbst Subjekt.> <정신현상학> 서설 §17에서 이야기된 것이 재개되고 있다. <an ihr selbst>라는 표현과 관련 <정신현상학> 서론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문법적으로 틀린 표현이다. 왜냐햐면, <ihr>가 주어인 <Substanz>를 가르키기 때문에 재귀대명사 <sich>가 사용되어야 한다. <an sich> 대신<an ihr>를 사용한 이유는Terminus Technicus로 사용되는<an sich>와 구별하기 위해서 일 수가 있겠다. 그런데 이것이 주된 원인은 아닌 것 같다. <실체가 주체다>라는 사실은 주어가 되는 실체가 아직 모르고 있다. 그래서 주체로서의 주어라 할 수가 없다. 단지 실체를 외부에서 관찰하는 [철학]자만 그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상태다. 그래서 서론 §17에서 실체를 주체로 파악해야 한다고 했던 것 같다. <an ihr>라는 표현에는 이렇게 실체가 주체라는 것이 처음에 외부에서만 파악된다는 의미가 스며있는 것 같다. 실체가 스스로 주체라고 인식할 때, 즉 외부에서 관찰하는 [철학]자의 파악과 같아질 때 <정신현상학>이 완성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정말 같아지냐가 문제다.

[4]원문 <Aller Inhalt [ist] seine eigene Reflexion in sich.> 처음엔 <모든 내용은 내용이 스스로 행하는 자기 안으로의 반성이다.>라고 번역했는데, 원문이 무슨 말인지, 번역해 놓은 말이 무슨 말인지 영 알아 잡을 수가 없다. 그래서 생각을 고쳐 문장을 다시 한번 살펴보고, 헤겔이 소유대명사를 좀 헷갈리게 사용한다는 점에 기대어 소유대명사 <sein/그것의>이 이 문장의 주어로 사용된<aller Inhalt>를 가리키지 않고, 부속문장의 술어로 사용된 <Subjekt/주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고 번역해 보았다. 이 문장을 이렇게 이해하니 스피노자가 했던 이야기를 헤겔이 반복하는 것 같다. <aller>는<allerlei>란의미로번역했다.

[5]원문 <das Bestehen oder die Substanz eines Daseins>. 실체가 여기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Hypokeimenon/바탕>과 같은 것인가?

[6]원문 <die Sichselbstgleichheit>. 이<자기 동일성>이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to ti en einai>와 같은 것인가?

[7]정말 해체되는가? 그리고 자기동일성이란 것이 정말 [애초부터 있는] 바탕/본질인가. 키에르케고르에 기대어 현존재로서의 인간의 삶을 서술하자면 <자기가 아닌 것으로 존재해야 하고, 또 자기로 존재하지 못하는 것>(“Zu sein, was man nicht ist, und nicht zu sein, was man ist.”/Michael Theunissen, Negative Theologie der Zeit, 참조)이 아닌가 한다. 해체되어 정신분열을 일으킬 소지가 다분하다. 그러나 정신분열증은 자기, 또는 자기동일성의 해체라기 보다는 이런 미칠지경인 상황을<종합해 내는 능력/synthetische Leistung)이 결여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자기동일성이란 애초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종합해 내는 능력>의 결과인 것 같다.

[8]원문 <aber>

[9]원문 <aber>

[10]오성이 하는 일이 원래 현존재에서 공통점을 찾아내는 일이라는 것, 곧 추상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것인데, 헤겔은 이 추상을 별다르게 이해하는 것 같다. 관련 아리스토텔레스를 다시 한번 꼼꼼히 읽어봐야 할 것 같다. 맑스가 <Grundrisse>에서 이야기한 <Abstraktionsverfahren>도 살펴봐야 하고…

[11]원문  <durch diese Einfachheit mit sich selbst>. 이건 정말 사유의 규정이지 현존재가 현존하는 모습은 아닌 것같다.

[12]원문 <Aber dadurch ist es wesentlich der Gedanke>.

[13]자위행위가 아니라고 하는데 맑스가 이야기한 <실천> 개념에 견주어 보면 자위행위인 것 같다.

[14]원문<sondern>

[15]원문<Mo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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