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정신현상학 서설 § 53

§53) 학문이란 자기를 스스로 조직해 나가는 것으로서 생동하는 개념의 고유한 삶을 두루 거치면서 체계화해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1] 그래서[자기 제한적인] 규정이[형식주의에서는] 도식이란 외부에서 골라내어 현존재의 외부에 갖다 붙이는 이름표와[2]같은 것이지만 학문 안에서는[더 이상 바랄 것 없이 삶이] 내용으로 충만하게 하는 자발적으로 운동하는 혼이다.[3] 존재자가[살아나가는] 운동이란 한편으로는 [자신을 알아볼 수 없는] 다른 그 무엇이[4]되는 것으로서[이렇게 자기 내재적인 운동으로 발생한 타자를 자기내용으로 갖는 것이고[5],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전개된 것, 즉 타자화된 자신의 현존재를 자기 안으로,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걷어들이는 것으로서, [활짝 전개된 내용으로 충만한 자신의 현존재를 가다듬어 전체의] 한 마디를 이루는 것으로 응집시키고, 이렇게 하여[추상적으로 부풀어 있는] 자신을[별것이 아니라 이렇게 제한된] 규정으로 단순화하는 것이다. 부정성은, 타자가 되는 운동이라는 면에서, [분투하여 자신을 쪼개] 차이가 나게 하여 [자기]현존재를 정립하는[힘]이고, 자기 안으로 다시 걷어들이는 운동이라는 면에서는  엄연하게 규정된 단순성이 생성되는[힘]이다. 이렇기 때문에 내용은[자기제한적인] 규정이 되는데 있어서, 타자로부터 뭔가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이름표로 붙이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자기제한적인 엄연한] 규정을 스스로 부여하고, 외부의 힘으로 가지런히 정돈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신을 가다듬어 일개의 마디가 되어 전체 안에서 자기자리를 잡는 것이다. 일람표에 따라서 사물을 가지런히 정돈하는 오성은 사물의 구체성, 즉 실재하고 생동하는 운동이 핵심이 되는 내용의 필연성과 개념을 멋모르고[6]차리고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내용의 필연성과 개념을 자각하지는[7]못하고 있다. [목전에 있는 것만 감지하는] 오성이 내용의 필연성과 개념을 알 리가 없다. 왜냐하면, [감지한 것을 보여주기 좋아하는] 오성이 내용의 필연성과 개념을[느닷없는] 통찰력을 발휘해서 한번 보게 되었다면 분명 보여 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뿐인가? 오성은 자기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통찰이 필요하다는 욕구를 느끼지조차 못한다. 이런 부족함을 느꼈다면, 도식에 따라 사물을 가지런히 정돈하는 일은 그만두었을 것이다. 이것이 아니라면 최소한 자신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도식을 따라 정돈하는 일이 내용의 목록을 표시하는 것 이상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통찰했을 것이다. 오성은 이렇게 내용의 목록만 제시할 뿐, [약속한] 내용 자체는 제공하지 않는다. — 오성이 다루는 규정성이란, 자기(磁氣)라는 규정성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자체로는 구체적인, 달리 표현하면 실재적인 규정성일 수 있다. 그리고 오성은 그렇다고 내세우지만 따져보면 사실 뼈다귀만 앙상한 죽은 퇴적물일 뿐이다. 그 이유는 여기서 말하는 규정성은 단지 타 현존재의 술어로 사용될 뿐, 그 현존재에 내재하는 생명으로, 달리 표현하면 그 규정성이 그 현존재를 터전으로 하여 그 토양에서 자라나고 거기에 어울리는 독특한 것으로 스스로를 산출하고 자기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이다.[8] 이것이 진정 해야 할 일이고 떠맡아야 할 일인데 형식적인 오성은 이것을 타자의 몫으로 내버려 둔다. — 오성은 사물의 내재적인 내용 안으로 들어가기 보다는 항상 밖에 머물면서 겉모양만 한번 쓱 훑어보기 때문에 전체를 간과할 뿐만 아니라[9]언급의 대상이 되는 개별적인 현존재 위에 괴리되어 있다. 그래서 오성은 결국 현존재를 보지 못한다. 학문적 인식이 요구하는 것은 이와 반대로 대상의 살아 움직임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으로서 바로 대상의 내적 필연성을 마주하고 이를 표현해 내는 것이다. 이렇게 대상에 몰입하다 보면 학문적 인식은 내용 안에 머물지 않고 내용에 대한 자기 안에서의 자기반성에 지나지 않는 일람표의 일목요연성은 하나하나 잊어버리게[10]된다. 소재에 깊숙이 들어가/침강하여[자신을 망각한 체] 소재의 운동을 따라가는 가운데 학문적 인식은 자기 자신으로 복귀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11]이런 학문적 인식의 반성으로서의 복귀는 형식적인 지의 반성과는 달리[인식이 알아서 하는 반성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밖으로 힘껏 뻗어나가] 충만해진 내용이 자기를 다시 자기 안으로 거두어 들임으로써[12][엄연한 자기제한적인] 규정으로 단순화하고 자신을 낮춰 현존재의 일면을 이루는 자리로 들어가서 보다 높은 현존재의 진리로 이행하기 전에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과정을 두루 거치는 가운데 단순한, 자신의 온갖 모습을 스스로 통찰하는[투명하고 겹침이 없는] 전체가 반성이 갈피를 잡을 수 없다고 느꼈던 풍부한 내용을 토대로 하여 부상하는 것이다.



[1]원문 <Die Wissenschaft darf sich nur durch das eigne Leben des Begriffs organisieren.> 단어와 문장구조가 어렵지 않고 또 지금까지 이야기된 것을 종합하기 때문에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는 문장 같은데 뭔가 아리달송하다. 특히 <개념의 고유한 삶/das eigne Leben des Begriffs>이란 표현이 무슨 말인지 명확하게 잡히지 않는다. <개념의 삶>이란 것이 개념도 먹고 싸고, 아침에 일어날 땐 몸이 뻐끈하고, 일하려 나가고, 섹스하고, 울고 웃고, 자식을 키우고, 등짝이 간지럽고 등등 이런 일을 하고 느끼는 것이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개념의 삶>이란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이란 것과 전혀 관계가 없고 그저 은유적으로 사용된 것만은 또 아닌 것 같다. 여기서 이야기되는 학문은 논리학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여러 번 언급하였듯이 역자는 의식이 운동하는 힘에 주목하고 있으며, 이와 관련된 질문제기의 연장선에서 논리학과 정신현상학의 관계에 주목하고 있다. 이 문제의식은 <개념의 삶>, 즉 논리학=학문을 이야기할 때 <정신의 삶/Leben des Geistes>, 즉 정신현상학에 기대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이야 어떻든 이 문단에서 헤겔은 <정신의 삶>과 <삶의 이념/Idee des Lebens>에 기대어 <개념의 삶>을 서술하는 것 같다. 그럼 정신의 삶이란 것은 뭘 말하는 것이고, 또 삶의 이념이란 뭘 말하는 것인가? 우선 이와 관련하여 헤겔이 논리학에서 뭐라고 말하는지 한번 살펴보자. “[밖의 것에 매달리는 자연적인 삶과 달리] 삶을 이렇게 논리적으로 [즉, 개념의 고유한 삶에 따라] 서술하는 연관성에는 삶의 이념(Idee des Lebens)이 자리하고 있고, 정신의 이념(Idee des Geistes)이란 바로 이런 삶의 이념에서 생성되어 나온 것이다. [...]삶이란것은 [위에서] 알아본바와 같이 [명확하게 완성된] 이념인데, 살펴보니 아직 참된 서술 혹은 이념이 현존하는양식으로존재하지 않는것으로 드러났다. 왜냐하면, 삶에서는 [밖으로 드러난] 이념의 현실이 [그저] 개별적인 것이고, 일반성 혹은 유적인 것 [역시 그저] 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부정을 통해서 통일을 이루는] 절대적이고 부정적인 통일로서의 삶의 진실은 추상적인, 같은 말이지만 달리 표현하면, 직접적인 개별성을 지양하고 [밖으로 드러난 현실과 내적인 것이] 동일한 것으로서 [항상] 자신과 동일한 것, 즉 유적존재로 자기를 완성하여 [진정] 자신과 동일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완성된] 이념이 바로 정신이다. 지금 이야기된 것에 덧붙이자면 정신은 여기서 [즉, 논리학에서] 이와 같은 이념이 갖는 논리적인 형식에 따라 관찰되는 것이다. [삶의] 이념이 갖는 논리적 형식을 이렇게 따로 언급한 이유는 삶의 이념이 논리적 형식 외 다른 형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이런 형태를 [논리적 형식에] 부수적인 것으로 대충 훑어보고 지나가겠다. 삶의 이념을 이런 부수적인 형태에 따라 다루는 곳은 구체적인 정신학문이 되겠는데, 혼, 의식, 그리고 정신 그 자체를 다루는 것이다.”(“In diesem Zusammenhang dieser logischen Darstellung ist es die Idee des Lebens, aus der die Idee des Geistes hervorgegangen. [...] Von dem Leben haben wir gesehen, daß es die Idee ist, aber es hat sich zugleich gezeigt, noch nicht die wahrhafte Darstellung oder Art und Weise ihres Daseyns zu seyn. Denn im Leben ist die Realität der Idee als Einzelnheit, die Allgemeinheit oder die Gattung ist das Innere; die Wahrheit des Lebens als absolute negative Einheit ist daher, die abstrakte, oder was dasselbe ist, die unmittelbare Einzelnheit aufzuheben, und als Identisches mit sich identisch, als Gattung sich selbst gleich zu seyn. Diese Idee ist nun der Geist. - Es kann aber hierüber noch bemerkt werden, daß er hier in derjenigen Form betrachtet wird, welche dieser Idee als logische zukommt. Die hat nämlich noch andere Gestalten, die hier beiläufig angeführt werden können, in welchen sie in den konkreten Wissenschaften des Geistes zu betrachten ist, nämlich als Seele, Bewußtseyn und Geist als solcher.“) 이어 헤겔은 혼(Seele)을 설명하는데 혼이란 [뭔가를 해부해서 찾아낼 수 있는 물건과 같은 것(„Seelending“)이 아니라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자각하면서 존재하는 개념“(der für sich selbst seyende Begriff „)이라고 한다. 그러나 혼은 필연적으로(!!)„직접적인 현존재 안“(in unmittelbarem Daseyn)에 있다고 한다. 직접적인 현존재 안에 있는 것으로서 혼은 삶과 실체적인 동일성을 이루며(„in dieser substantiellen Identität mit dem Leben“), 이렇게  자신의 외형에 푹 빠져 있는 것(„in seinem Versenktseyn in seine Aeußerlichkeit“)으로서 혼은 인류학이 다루는 것이 된다고 한다. 이것이 삶의 이념의 가장 낮은 단계이고 다음 단계인 의식은 정신현상학이 다룬다고 하고, 이런 정신현상학은 자연정신의 학문과 정신 그 자체를 다루는 학문의 중간에 있는 학문이라고 한다. 여기서 정신 그 자체란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자각하는 가운데 존재하는 것(„der für sich seyende Geist“)이지만 자신의 타자와의 관계 안에서(in seiner Beziehung auf sein Anderes/강조 역자), 즉 [다른 것이 아니라 온통] 자신의 부정된 모습으로 등장하고, 이렇게 자신을 스스로 서술하는 것(„erscheinend am Gegentheil seiner selbst sich darstellend“)이라고 한다. (논리학, 마이너 판2003년,  233쪽 이하 참조). 인류학이 다루는 삶과 정신현상학이 다루는 의식이 정말 부수적인(beiläufig), 마라톤에서 주자의 박자를 맞춰주기 위해서 잠깐 뛰는 들러리(Beiläufer)와 같이 없어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헤겔이 여기서 이야기하는 논리학과 정신현상학의 관계가 왠지 중세철학에서 철학을 신학의 시녀로 보는 것과 비교할 수 있는 것 같다. 관련 <학과 간의 논쟁/Der Streit der Fakultäten>(1798)에서 칸트가 신학이 철학을 시녀로 보는 것이야 내버려 둘 수 밖에 없지만, 시녀가 안주인의 치마폭을 정리하면서 뒤따라 가는지 아니면 안주인을 앞서가면서 어둔 길을 밝히는지 이 문제는 따져봐야 한다고 한 대목이 생각난다 (학과 간의 논쟁, 1장, I, 2절). 헤겔이 폄하하는 인류학의 소재가 되는 삶이, 브레히트가 <독서하는 한 노동자의 질문/Fragen eines lesenden Arbeiters>에서 „만리장성이 완성되던 날, 이젠 더 이상 할 일이 없게 된 날 저녁에 장성을 쌓던 노동자들은 어디로 갖을까?/Wohin gingen an dem Abend, wo die chinesische Mauer fertig war, die Maurer?“라고 노래하면서 관심을 가졌던 삶이 이젠 학문의 대상이 아닌가 한다.

[2]원문<Bestimmtheit>

[3]원문<die sich selbst bewegende Seele des erfüllten Inhalts>. „삶에 충만해서“(“lebenssatt”) 죽었다는 아브라함의 삶에 대한 평가(창세기25.7)를 연상시키는 대목이다(맑스 베버, 직업으로서의 학문 참조).

[4]원문<ein Anderes>. 존재의 운동, 즉 의식의 운동을 이야기하고 있다.  정신 혹은 개념의 운동이라면 <sein Anderes>라고 해야 한다. 이 <ein Anderes>가 <sein Anderes>가 되어야 소위 변증법이란 것이 성립되는데, 관련 역자는 주인과 손님 간의 관계 등에서 언급하였듯이 좀 회의적이다.

[5]원문<zu seinem immanenten Inhalt>. 강조 역자. <내재적/immanent>을 원문과는 달리<내용/Inhalt>이 아니라 운동을 서술하는 것으로 번역하였다. 

[6]원문<für sich>

[7]원문<für sich>

[8]이것이 바로 인류학이 하는 일이 아닌가?

[9]원문<übersehen>. 두 갈래 의미가 있다. <통틀어 보다>와 <간과하다>라는 의미다. 통틀어 보기 때문에 보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10]원문 <vergisst es jener Übersicht>. 여기서 <jener Übersicht>는 부분을 이야기하는 소유격(Genitivus partitivus)이 목적격으로 사용된 것 같다. 일람표를 다 잊어버릴 때까지 그 항목항목 하나하나를 잊어버리는 과정을 표현하는 것 같다.

[11]원문 <aber>

[12]서론에서 언급된 <Reflexion des Gegenstandes in sich/대상의 자기 안에서의 반성>을 이야기하는것 같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