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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3/18
    단테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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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쿠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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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0/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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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10/10/20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키케로의 "국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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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가 그립다

후쿠시마 - ‘하나님을 멀리한 데 대한 하나님의 경고’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다.

 

검색에 뜨는 그 목사의 이름.

 

이럴 때면 단테가 그립다. 단테는 저런 목사들이 지옥에서 불타는 것을 어떻게 그렸을까?

 

기독교에서 가장 무서운 교만의 죄를 지었으니, 필히 지옥에 떨어졌을 것이고 그 형벌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뒤에 서서 하나님이 들고 있는 카드를 보고 훈수하는 저들. 저 작태보다 더 교만한 행동과 혓바닥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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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후쿠시마 2011년 3월 12일 15시 36분. 원자력 시대의 종말”. 이번주 월요일 <슈피겔>지의 표지.

 

아무 일에도 집중이 안된다. 거의 비슷한 내용의 뉴스가 온종일 반복되지만 그래도 뉴스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다.

 

독일에서 후쿠시마 원전사태의 파장은 크다. 적.녹연정(1998-2005)이 관철한 <원자력 하차/Atomausstieg> 정책을 의기양양하게 철회한 흑.황연정이 후쿠시마 원전사태를 두고 입장을 하루아침에 바꿀 정도다. “하차”에서 “하차”한 다음 다시 “하차”한다는 것이다. 물론 야당의 빗발치는 비판을 받고 있다. 믿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도 그럴 것이 엊그제까지만 해도 독일 원자로는 안전하고 저렴한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해서는 필수라고 침 튀기지 않았던가? 적.녹연정의 정책에 항의하여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전력기업과 협상하여 어렵게 따낸2000년6월14일 <원자력 중단합의/Atomkompromiss>와 이에 따른 제반 법령을 메르켈 정부는 일방적으로 철회하고, 관련 법률을 개정하여 최근 시행한 것이다. 원자력법 실행권한이 주 정부에 있기 때문에 관련 법률개정은 연방상원을 통과해야 한다는 지적 및 항의에도 불구하고 연방상원의 찬성이 필요 없는 법이라고 우기고 발효한 것이다. NRW 주에 좌파당이 암묵적으로 지원하는 적.녹 소수정당이 들어섬에 따라 연방상원에서 과반수를 상실한 흑.황연정의 우회정책이었다. (이 문제는 물론 헌재소에 걸려있다.) 메르켈 정부 법개정의 골자는 원자로 가동을 평균12년 연장한다는 것이고, 이에 따라 가동중단조치에 해당되는 30년 이상 되는 원전들이 계속 가동하게 되었다. 근데, 이 원전들의 시한연장을 3개월 유보한다는것이다. 그리고 7개 원전의 가동을 중단시켰다. 얼마 전까지의 작태를 보면 믿기지 않는 조치라는 비판이다. 2주 후에 있을 바텐-뷔르템베르크의 주총선을 염두한 조치라는 것. 이 주에서는 독일연방공화국 건국이래 줄곧 기민당이 집권하여 왔는데, 현재 <슈트트가르트 21> 중앙역 신설계획에 대한 주민의 대대적인 저항운동 등으로 정권상실위험에 빠져있다. 적.녹연정의 <원자력중단합의>의 번복을 앞장서서 밀어부친 마푸스 주총리가 메르켈의 원전정책으로 불거지고 후쿠시마 사태에 더욱 거세게 진행될 반핵운동에 견딜 수 없다는 것. 이런 상황에서 반핵운동에 뿌리를 둔 녹색당이 득세하여 정권을 창출하는 것은 불 보듯이 뻔하다는 것. 이런 정세판단이 메르켈로 하여금 “하차”에서의 “하차정책”을 채택하게 했다는 비판이다.

 

 

후쿠시마는 이런 정치적인 이슈로만 끝나지 않을 문제다.

 

후쿠시마 원전사태는 1755년11월1일 리사본 대지진이 유럽 정신사에 미쳤던 영향을 넘어서는 사태가 아닌가 한다. 리사본의 지진은 <가능한 세계 중 가장 좋은 세계>라는 라이프니츠의 테오디체에 일격을 가하고, 볼테르의<칸디드> 등을 비롯하여 계몽주의를 돌이킬 수 없는 이념으로 완착시킨 사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 후쿠시마 원전사태가 우리 뇌에 각인하는 계몽은 무엇일까? 우리가 온갖 제물을 갖다 바쳐놓고 엎드려 절하는, 우리가 만들어 놓은 신은 무엇이고, 어떻게 거기서 빠져 나갈 수 있을까? 거기서 빠져 나간, 빠져 나가고 있는 사람들이 그립다. 그리고 그 신전 앞에 합장하는 사람보다 똥물을 찌끄르는 사람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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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이상’을 어떻게 알파벳으로 표기하지? Isang, Yisang, Leesang, Lichan, Rheesang 등 어지럽다. 붙임표를     ‘이‘와 ‘상‘사이에 삽입하거나 ‘상‘을 대문자로 시작하면 그 변화의 폭은 더욱 넓어진다.

 

게다가 ‘이상‘을 ‘스모모하코‘로 읽고 무슨 말인지 갸우뚱하듯이, ‘이상‘을 이상(理想)으로 읽고 <꾿빠이, 이상>은 도대체 뭘 말하는지 어리둥절해 할 수도 있겠다. 동독이 붕괴되기 직전 혼수상태에 빠지고 레닌의 동상이 크레인에 들려 병실 창문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다시 깨어나는 엄마를, 갑작스런 시대변화에 의한 충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아들의 노력을 소재로 한 <Goodbye, Lenin>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떠올리고 ‘사상의 종말‘에 접한 사회상을 그린 소설 제목인가하고 영 엉뚱한 길로 빠질 수도 있겠다. 내친 걸음 더 나아가면, ‘Goodbye‘가 ‘꾿바이‘로 넘어왔다가 다시 알파벳으로 넘어가면, 넘어오기 전의 ‘Goodbye‘로 다시 넘어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도 가능하겠다. ‘꾿빠이‘로서의 ‘Goodbye‘와 ‘Goodbye‘ 사이에 차이가 있느냐는 말이다. ‘Ringwanderung’이 한국에 착륙하여 ‘링반데룽‘이 되었다가 되돌아가면 ‘Ringwanderung’이 되는지 아니면 ‘Ringwandelung‘이 되는지 궁금하다. (물론 ‘Ringwandelung‘이 독어에 없는 말이란 전제아래 그렇다. 독일에서도 산행하는 사람들 사이에 통용되는 말인데 나만 모르고 있을 수도 있겠다. 만약 독어에 없는 말이라면 ‘링반데룽‘이란 말을 만든 (한국의? 일본의?) 독어감각은 과연 뛰어났다고 할 수가 있겠다. ‘Schlafwandeln‘(몽유병)에서의 의미로서의 ‘wandeln’을 ‘Ringwanderung‘에 접목하여 새로운 낱말을 창조한 것이 아닌가.)

 

Traduttore/Traditore – ‘Schiboleth’이 ‘Siboleth‘이 되면 목을 내놓고 강을 건너야 한다. Schiboleth이 Siboleth이 되지 않게 하는 일이 쉬운 일같이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알러(Aller)강에서 그랬던가, 칼 대제에 패배한 작센족은 ‘아멘‘하고 세례를 받으면 살았고, 그렇지 않으면 목을 잃었다. 강에 물이 흐르지 않고 피가 흘렀단다. 그냥 배반하고(거짓말하고) 넘어갈 수 없었을까? 목을 내놓은 사람들은 ‘번역‘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다른 것과의 등가교환은 고사하고 소통조차 불가능한 소유(Eigentum)가 낱말에는 있다. 그것이 (목)소리라고 폴 드 망은 니체에 기대어 설명한다(„Allegories of Reading“). 연인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 있다. <꾿빠이, 이상>의 김연 기자는 정희의 깔깔거리고 „어머“하는 소리에 사랑에 빠졌을 것이라고 상상해 본다. 근데 깔깔거리는 소리와 „어머“하는 소리가 번역이 안 된다. 한독사전을 뒤적거려보니 ‘어머‘는 ‘ach!; ach Gott!; Wehe mir; du meine Güte!‘ 등이란다. ‚ach‘가 그래도 가장 가까운 것 같은데, ‘어머‘하는 소리에 겹치는 정희의 모습은 ‘ach!‘하는 소리에 겹치는 여인의 모습이 아니다.

 

‘이상‘은 어떤 소리지? 그 소리가 들릴 듯 말 듯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다른 도시의 대학에 진학하여 어느 식당에서 아르바이트 하는 어느 날 기억 속에서 사라진 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남도의 소리였다. 알파벳소리에 익숙해진 내 안에 다른 소리가 있었다. 내 이름을 남도의 소리로 부르던 그 목소리는 나를 뒤집어 놓았고, 나는 헤매다 그 소리로 돌아왔다. 그 소리가 내 짝지가 되어 지금 내 팔을 베고 고르게 숨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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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반델룽

심심풀이로 김연수의<꾿빠이, 이상>을 번역하고 있다. 매일 조금씩 번역해 나가는데, 오늘 한 단어에 꽉 막혔다. 있는 사전을 다 뒤적거려보고, 거기다 구글검색을 더했지만 속 시원하지 않다. ‘링반델룽’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건 어원이 분명 독어다. ‘Ringwandelung’이라 번역해 놓고 뭔가 석연치 않아 백과사전을 뒤져본다. 근데 없다. 두덴(Duden)에도 나오지 않는다. 인터넷을 쳐보니 한국 사이트만 잔뜩 나온다. 어떤 이는 ‘링반델룽’을 독어표기로 ‘Ringwanderung’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Ringwandelung’이라고 한다. R 와 L의 차이다.

 

검색범위를 독일지역과 독어로만 좁혀 다시 검색해 본다. Ringwanderung만 뜨지 Ringwandelung은 뜨지 않는다. 근데Ringwanderung의 의미는 링반델룽의 의미와 좀 다르다. Ringwanderung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원점으로 돌아가게 해놓고 산행한다는 의미다.

 

그럼 링반델룽은 어디서 온 말이지? 독일을 좋아하는 일본이 만들어 논 일본식 독어가 한국에서 사용되는 것인가? 그럼 이건 어떻게 번역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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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식?

이 모든 일은 한 혼동에서 시작되었다. 검지손가락과 약손가락의 혼동으로. ‘열린 공부방’을 친 사람은 ‘열린 공부방’을 치지 않았고 ‘열린 공부방’을 치지 않은 사람은 ‘열린 공부방’을 쳤다. 이상을, 더욱이 김 연수를 흉내낼 생각은 전혀 없는데 결국 흉내내고 말았다.

 

화면에 뜬 문구는 ‘열릴 공부방’이었다. 며칠 후에 알게 되었지만 그럴듯해서 그냥 두었다. 내가 진정 치려고 했던 문구가 ‘열린 공부방’이었는지 아니면 ‘열릴 공부방’이었는지 알 길이 없다. 어쩌면 이런 복잡한 물음 그 자체가 부질없는 짓인지도 모른다. 키보드에 올려진 열손가락 중에서 왼손의 약손가락이 저도 모르게 검지손가락에 앞서 키보드를 눌렀는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오식일 수도 있단 말이다.

 

파우스트의 <헌사>에 등장하는 ‘Leid’가 ‘Lied’인지, 아니면 ‘Lied’가 ‘Leid’인지 구별할 수 없다. 원래는 ‘Lied’였었는데 인쇄판을 뜨는 과정에서 <i> 와 <e>가 도치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러나 그 오식이 그럴듯해서 그냥 두었다는 것.

 

왜 ‘열릴 공부방’이 되었는지 그 바탕을 파 헤쳐 볼 순 없지만, 아무튼 이 문구는 나름대로 나의 게으름에 박차를 가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비교적 꾸준하게 진보넷에 포스팅를 하게 되었다. 무슨 약속이나 지키듯이. 어쩌면 ‘Leid’와 ‘Lied’는, 우리 생각에 앞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밀통로를 통해서 이미 내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열릴’과 ‘열린’이 문법의 엄연함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결부되어 있듯이.

 

내가 글을 쓰는 것인지, 아니면 글이 나를 찾아오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글이 손님으로 나에게 오는지, 아니면 내가 글의 손님이 되는지. 내가 내 자신이 아니라 단지 내 자신이라고 말하는 그 무엇의 손님일 뿐이 아닌지. 그리고 손님이 주인행세하게 내버려두는 그 무엇은 도대체 무엇인지. ‘열린 공부방’을 키보드에 내리치는 동시에 ‘열린 공부방’을 내리치지 않는 나와 나 사이에 진실이 있을 것 같다.

 

한밤에 찾아온 글을 깨어나 다듬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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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다임 생성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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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AkalN MEDI Coordinacion

 

 

 

근데 pps 파일은 어떻게 올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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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 남성의 눈길-대칭에서 비대칭으로 가는 역사

웨덜리님의 [비공식 연인들의 은밀한 사랑 -프라고나르<그네> 델리스파이스<고백>] 에 관련된 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의<그네>, 재미있는 그림이다. 박희수님의 그림 뒤에 숨겨진 이야기도 재미있다. 근데 그보다 그림 표면에 나타나 있는 ‘담론’이 더 재미있다.

 

이 그림의 소재는sexuality와 성차(sexual difference)다. 그리고 회화에서 나타나는 sexuality와 성차는 눈길로 표현된다.

 

중세이후sexuality와 성차를 소재로 하는 회화의 역사를 보면 남성의 [알]몸은 점차 사라져 결국 여성의 [알]몸만 남게 되고, 성차가 없었던 눈길이 오로지 남성의 눈길로만 남게 되는 남성과 여성간 비대칭을 이루는 눈길의 역사인 것 같다. 남성이 [알]몸으로 서술되는 경우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남성이 알몸으로 그려지는 경우는 sexuality를 욕망하는 눈길의 대상이 아니라 아무것에도 기대지 않고 홀로 우뚝 서있는 ‘남성적인 것’을 그린 것이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의(Valerius Maximus) 여러 권으로 엮어진 “기념할 만한 일들과 말들”(Factorum Dictorumque Memorabilium)이란 책을 보면 중세에서 남성과 여성이 발가벗고 함께 대중목욕탕에서 목욕하는 장면들이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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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눈길은 밖으로 향하지 않고, 또 밖에 있는 눈길이 그림 안에 있은 눈길을 마주하거나 아니면 그림 안의 눈길에 들어가 대상을 바라보는 상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림 안에 어울려 있은 남성과 여성이 서로 눈길을 주고받는 ‘대칭의 눈길’ 밖에 없다.

 

한스 복1세(der Ältere)의 그림 “로이크의 [대중]목욕탕”(Das Bad zu Leuk, 1597)에는 대칭의 구도가 흩트러져 있지만 그래도 아직 외부의 눈길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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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중세를 넘어 근대로 들어오면서 대칭의 눈길의 점차 비대칭의 눈길로 바뀐다. 이런 조짐은 루카스 크라나흐 1세(der Ältere)의 “청춘의 샘”(Jungbrummen, 1546)에서 역력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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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에서 알몸으로 목욕하는 사람들은 이제 단지 여성들일 뿐이다. 청춘의 샘에서 젊음을 회복한 여성들을 남성들이 맞이하는 장면이다. 남성과 여성이 나누던 눈길이 남성의 눈길로만 이동하고 있다.

 

이런 눈길의 비대칭화 프로세스는 골이 점점 더 깊어져서 남성은 그림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알렉상드르 카바넬의 그림 “비너스의 탄생”(1863)은 이런 과정의 한 대목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림 안에는 여성만 알몸으로 남아있고 여성은 그림 안에서 밖에서 쳐다보는 남성의 눈길에 대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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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대칭 눈길 역사의 끝에 가면 여성은 주체성, 즉 자기눈길을 완전히 상실하고 오직 사물화/타자화된 대상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1981년에 사망한 라캉이 생전에 아무도 모르게 소유했다는 구스타브 쿠베르의 그림 „세상의 기원“(1866)은 여성과 남성간 절대화된 비대칭의 눈길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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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오노레 프라나고르의 그림<그네>에 묘사되는 눈길은 대칭과 절대 비대칭 중간에 있는 것 같다. 중세 대중목욕탕에서와 같이 서로 마주하면서 눈길을 나주고 있지는 않다. 남성의 눈길은 여성의 sexuality/음부를 훔쳐보는, 여성의 몸을 장악하려는 ‚눈의 쿠데타’(coup d’oeil)이고 여성의 눈길은 이런 남성의 눈길을 즐기는 것 같다. 이 엇갈리는 눈길에 남성의 쾌감을 즐기는 주체가 여성이 될 수 있는 가능성도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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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싶은 것

삶의 생수 - 이런 거 있어? - 보다 두리반 칼국수가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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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의 사유 - 3번째 걸음

ou_topia님의 [IN MEMORIAM GILLES DELEUZE] 에 관련된 글.

 

잠잘 때 뇌는 무슨 일을 할까. 의식과 함께 김 지하의 <서울길>이 찾아왔다.

 

간다
울지 마라 간다
흰 고개 검은 고개 목마른 고개 넘어
팍팍한 서울 길
몸 팔러 간다.

 

아침저녁으로 쌀랑해진, 나락 베기가 다 끝난 가을이었다. 아이는 그날 좀 늦게 일어났다. 전날 저녁 늦게까지 먼 길 떠나 다시 오지 않을 이모는 보따리 짐을 쌌다. 저 멀리 산허리에서 하얀 점 하나가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계곡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시 시야로 들어왔다 하면서 움직이고 있다. 집은 바래다주려고 사람들이 다 나가있어서 텅 비어있었고 아이는 혼자였다. 아이는 처음으로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다. 하얀 점은 고개를 넘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 눈물의 원천은 마르지 않았다.

 

침대에 누운 채 <서울길>을 떠 올려본다. 다 떠오르지 않고 <흰 고개 검은 고개>만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흰 고개 검은 고개>할 때마다 눈물이 나온다. 왜 그러지?

 

율동이 있는 시(!)이기 때문이다. 대상으로 스며들어가 자아와 대상이 일체를 이루고 양자가 오직 운동으로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자는 자아[시인]와 대상이 일체를 이룬 운동으로 들어갈 수 있는 [시적] 공간을 얻었기 때문이다.

 

흐인 고개

거믄 고개

 

“ㅡ ㅣ, ㅓ ㅡ”. 엇갈리는 모음에 구불구불한 산길에서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는 하얀 점이 지금 여기 내 눈앞에 어른거린다. 다시 아이가 되어, 눈물을 흘린다.

 

이런 운동을 박노해의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자아>의 운동으로 꽉 차있어서 그의 추종자가 되거나 그를 멀리하거나 양자택일 할 수 밖에 없다. 김지하의 <흰 고개 검은 고개>는 추상의 고개지만 <서울>로 가는 구체적인 길인데, 반면 박노해의 <안데스 산맥>은 시공간의 실체이지만, 원천(Arche>와 최후<Eschaton>를 찾아 나서는 형이상학적이고 초월적인 자아의 추상이다.

 

그리고 호롱불 하나를 들고 있는 께로족 청년이 시인의 다른 자기(alter ego)가 되고 시인은 존재의 망루에서 마치 구원자를 기다리는 듯이 엄숙한 표정을 짖고 있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는 시인을 향한 말이고,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한 말이다.

 

엮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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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키케로의 "국가론"

marishin님의 [핵심 비껴간 세습 비판] 에 관련된 글.

 

marishin님의 [핵심 비껴간 세습 비판]에 lois님이 올린 덧글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고 싶어서 태크를 날린다.

 

키케로의 “국가론”(De re publica)에 기대어 이북을 한번 살펴볼 수도 있겠다.

 

우선 lois님이 참조한 키케로의 “국가론” (De re publica, 1,39-1,41; http://www.gottwein.de/Lat/cic_rep/Cic_rep138.php 참조. 그리고 아래 내용은 이 웹사이트에 게재된 내용을 상당부분 참조한 것이다.)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겠다.

 

위에 제시된 "국가론" 부분에서 아프리카누스는 <res publica>대한 정의를 한다. 이 정의과정은 2단계로 구분된다.

 

아프리카누스는 우선<res publica>=<res populi>라는 명목 정의를 한다. 이런 정의는 사실 동의어 반복으로서 내용적으로 얻어진 것이 없다. 하지만 <res publica>의 <publica>라는 형용사를 <populus>라는 명사의 소유격으로 대치함으로써 <res publica>란 것이 과연 무엇인지 좀더 명확하게 물어볼 수 있게 해준다.

 

문제는<populus>에 달려 있다. 우선 <res populi>에서 <populi>라는 소유격을 다양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소유격을 주격 소유격으로 이해하면 “인민”이 주체로 등장하여 뭔가를 다룬다는 이야기가 되겠고, 이런 의미의 연장선에서 인민이 소유하는 그 무엇이 되겠다. 막역한 “그 무엇”은 영역을 표현하는 소유격으로 이해하면 “인민”이 활동하는 공간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리고 설명하는 소유격으로 이해하면 “국가”=”인민”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을 종합해보면 <res publica>는 “인민”이 정치적으로 활동하는 무대로서, “인민”은 그 무대에 타자로 등장하지 않고 주체로 등장하고, 이렇게 등장함으로써 <res publica>가 실재하는 모습을 스스로 규정하는, 헤겔을 따르자면, “인민”의 인륜적(sittlich) 상태라고 할 수가 있겠다.

 

여기에<populus>란 것이 무엇인지 아프리카누스는 근류와 종차를 포함하는 정의방식을 사용해서 <populus>를 설명한다.

 

근류로는<hominum coetus>를 제시한다. [coetus는 coitus, 즉 성교와 어원이 같다. 어쩌면 여기에 <populus>를 “성교”를 바탕으로 하여 끈끈하게 이어진 것으로 이해하는 오류의 원천이 있을 수도 있겠다. 허나 분명한 것은 그리스와 로마가 <populus>를 이렇게 이해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민족”과 “인민”은 구별되어야 한다. 그리고 “민족”하면 왠지 고리타분한 느낌이다.] 여기서 <coetus>가 사람들을 한군데 모아 놓은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한 곳에 모인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그 다음 종차로 두 가지를 제시한다. 하나는 <iuris consensus>, 즉 일정한 법에 대한 합의를 이룬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utilitatis communio>, 이익공동체를 이루는 모임이라는 것이다.

 

이렇게<populus>를 정의한 다음 <populus>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살펴본다.지형적으로 알맞은 곳에 어울려 살다가 언제가 그 거주지역을 “울타리”로 구별하여 (oppidus/[영어 town/시의 어원은 독어 Zaun/울타리와 같다]) “고을”을 형성하였다는 것이다. [그리스와 더불어 로마의 “국가”개념은 이렇게 “고을”에 기반하고 있다.] 이런 원초적 구별을 바탕으로 하여 “도시”라는 거주영토는 자연.지형적인 요소보다는 공동체 삶의 영역, 예컨대 종교활동, 문화활동, 정치활동 등을 담는 공간으로 분절된다.

 

아프리카누스는 이렇게 [개념적으로 그리고 시공간적으로 분절되어] 구성된 (“constitutio”) <populus>를 <civitas>라고 호명한다. 문제가 있지만 <civitas>를 ”시민사회”라고 번역해 본다. [이것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이 말하는 공민과 같은 것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의 <res populi/인민의 것/공간, 공화국, 국가>에는 항상 <consilium>이 우두머리로 있어야(“regere”/조정하다; 지배하다; 지배자, 즉 왕이 되다) 한다고 한다. 여기서 <consilium>은 독어 <Rat>, 즉 평의회, 위원회와 같은 의미로 번역하는 것이 제일 좋겠다. 독어로 시청을 <Rathaus>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consilium>이 항상 “시민사회”가 생성된 이유와 관계가 있어야 하고 반성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점을 바탕으로 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살펴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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