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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0/10/14
    진보넷과 여성(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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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0/10/08
    이북 3대 세습(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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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0/07/23
    비 내리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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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0/06/24
    너 진짜 노동자 맞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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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0/06/19
    이주노동자의 손님철학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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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10/06/12
    독감엔 약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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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0/06/04
    (모슬렘이 아님) 무슬림 아랍권에서 유태인이 평화롭게 살 수있는 전통이 있을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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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0/06/01
    "바람"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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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10/05/21
    좌파와 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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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10/05/15
    사회주의 새 세상은 내 마음 안에 생동하고 있는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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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넷과 여성

뒷북 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리고 무엇 하려고 뒷북 치는지 모르겠다. 돌아와 상한 것을 추스르라고 치는 북은 아니다. <나>는 어떻게 글 쓰고 있는가? 궁금해서 끄적거리는 것이다.

 

그리고 푸우님을 부르고 그에게 다가가는, 아니 다가가보고 싶어하는(ansprechen) 글이다.

 

“남성이 여성의 말하기를 억압하는 기능을 가지지 않을 수 없어 보인다.” (정말 부적절했나. http://blog.jinbo.net/kimpoo88/14)

 

푸우님, 저는 푸우님과 좀 다른 생각입니다. 저는 “남성 족보”에서 헤어나와 말하기/글쓰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을 논리적으로 전개하고 착착 쌓아 올려 <남근>처럼 우뚝 서게 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저 <늘어놓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러나>, <그와 반대로> 등의 접속사를 접촉제로 사용하여 탑을 쌓아가지 않고 오직 <그리고>라는 접속사에만 기대어 <늘어놓는> 것일 뿐입니다.

 

소통과 연대라는 진보넷 공간이 이렇게 <늘어놓는>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뭔가 하나를 집요하게 추적하고 축적하는 연구기관과 같은 공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남성>과<여성>을 재현하고, <탑>을 세운 <남근>이 지배하는 공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이 공간에 등장하는 블로거들이 <순수한Sexuality>로 등장합니다.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몰라서 이렇게 <순수한Sexuality>라고 표현했습니다. 푸우님이 “나는 남성이다”라고 자신을 노출시켰지만 저는 푸우님을 <남성>으로 상상할 수 없습니다. <여성>으로 상상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어루만지고 싶고, 어루만져 주었으면> 하는 감정이 전혀 거부감 없이 다가온다는 말입니다. 이런 감정은 <laron>님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진보넷 공간에서 저의 원초적인 구별은 <남성>과 <여성>이 아닙니다. 위와 같은 <Ζärtlichkeit>를 주고 받을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이것을 <순수한Sexuality>라고 표현해 보았습니다. 진보넷 공간을 이렇게

성 구별이 지양된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남성 족보>에서 헤어나와 글쓰기/말하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것을 할 수 없다면 해방을 지향하는 <학문>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글쓰기/말하기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생각입니다. 디오티마의 <Semen>, 디오티마의 씨로 임신하고 그 기호를 펄럭이는 소크라테스라는 패러다임을 갖는, 족보를 세우는 학문에서 벗어나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저의 화두이지만 언제 익을지 모르게 항상 덜 익은 상태로 <남성 족보>에서 헤어나와 글쓰기/말하기 하는 사람들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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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 3대 세습

행인님의 [배교(背敎)를 원하는 걸까?] 에 관련된 글.

 

이북3대 세습.

 

물론 말이 안 된다.

 

말이 안 되니까 말을 절제할 수도 있고, 말도 안 된다고 언성을 높일 수가 있겠다.

 

그런데 보편적인 시민사회이념을 받들어 언성을 높이면 어찌하겠다는 것인가? 이북선교라도 하겠다는 말인가? 물론, 언성을 높이는 사람에게 하늘천 했으니까 따지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하늘천하고 그만 두어도 할 말이 없다. 단지 실천적으로 연대하는(!) 국제시민사회이념을 운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면 시민사회가 안 보이는 이북에 국제시민사회이념의 체 게바라라도 보내겠다는 말인가? 이런 의미에서 자칭 진보의 이북 3대 세습에 대한 비판은 북한선교보다 못하다. 이북 3대 세습에 대한 비판이 단지 “진보임을 인정받기 위한 한마디”뿐이라는 역비판이 가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 말도 하지 말란 말인가? 그건 아니다. 단지 실천이 결여된 것은 진보란 이름을 적법하게 걸칠 수 없으니 그냥 내려놓으라는 이야기다.

 

오리엔탈리즘의 핵심은 오리엔트에 오리엔트 양식이 있다는 것보다 서양이 오리엔트를 겉에서 바라보기만 하는 인식형태라는 점이다. 민주노동당이나 이를 비판하는 자칭 진보나 이 오리엔탈리즘에 빠져있다.

 

행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추구하는 것은 “위대한 나라”의 헌법에 명시될 만큼 가시화된 보편적인 이념이다. 통과. 문제는 둘 다 이북에 3대세습을 비판하는/반대하는 이북시민사회를 명시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최소한 왜 그런가 이론이라도 내 놓아야 하지 않는가? 탄압이 심해서, 이북체제와 이북인민이 사이비종교집단과 같이 뭉쳐있어서, 아니면 지하시민사회가 있는데 공개하기 곤란하다든지…

 

내정간섭 배제 논리도 만찬가지다. 내정간섭 배제 논리는 국가간 모든 국가의 주권을 상대화한다는 논리다. 30년 종교전쟁의 결산이다. 요지는 어는 특정 국가가 절대적인 위치에 있지 않다는 점이다. 아직도 유효하지만 “위대한 나라”가 종종 위반하는 국제법이다. 한 국가와 그 시민간의 관계에는 다른 국가가 간섭할 수가 없다. 단지 시민사회만, 그 시민사회가 어떤 국가의 틀 안에 있든지 간섭할 수 있다. 아니 시민사회의 속성상 실천적으로 간섭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앞의 문제와 똑 같은 문제다. 평양에 가서, 아니면 어느 나라 이북대사관 앞에서 1인 데모라도 해야 한다. 아니면 진보란 이름을 내려놓고 비판하면 된다.

 

이런 맥락에서 이북선교를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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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소리


비가 온다. 비 내리는 소리. 바람에 휘날리지 않고 그저 중력의 법칙에 순종하듯 차분히 내린다. 의식과 무의식간의 경계를 씻어버리는 비 내리는 소리를 타고 무의식은 의식이 되고 의식은 무의식이 되어 아무것도 가눌 수 없는 혼미한 것으로 배회한다.

 

문득 잠에서 깨어 보니 비가 내리고 있다. 오랜만에 내리는 비다. 차분하게 내리고 있다. 독일의 기후가 아열대가 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올 여름은 무덥다.

 

 

거실로 자리를 옮겨 창문을 열어놓고 비 내리는 소리를 듣는다. 참 좋다. 평화란 것이 있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자연의 이치에 순종하는 것이 있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비 내리는 소리

 

 

작년, 사람의 체온이 부족해 이젠 말라 비틀어지고 더 이상 반들거리지 않는 마루턱에 앉아서 앞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것이 변했다. 산허리를 갈라 만든 길에는 남도의 황토가 상처에서 흐르는 피와 같이 붉었다.

 

 

살며시 내리는 보슬비 소리만 변함없이 나를 찾아오고 차분히 내리는 비 내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무더위 한여름 마루턱에서 낮잠을 자던 어린 아이를 잊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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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진짜 노동자 맞어?

보르디가님의 [유시민 지지 문화예술인 ] 에 관련된 글.

너 진짜 노동자 맞아?

 

겁나는 질문이다.

 

숨기고 싶은 것이 들통날까 봐서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글쟁이 흉내를 내고 또 글을 가지고 먹고 살려고 바둥대는 쁘띠지만, 두려우면 언어분석철학이라도 들이대고 노동자개념의 외연이니 내연이니 하면서, 육체 노동자니 지적 노동자니 하면서 어떻게든 <나도 노동자다>라고 할 수가 있겠다. 또 펜 돌리는 방법을 조금 배운 쁘띠는 상황이 주어지면 얼마든지 저쪽 편에 서서 그 상황에 맞게 펜을 돌리는 자질이 충분하다는 추궁이 사실무근하지 않고 충분히 내 안에도 존재한다는 것이 뽀록날까봐 두려워하는 것도 아니다.

 

겁나는 이유는 나를 향한 이 질문이 나의 계급성을 묻기 때문이다. 계급성을 원론적으로 따지자면야 겁날 것이 없다. 겁나는 이유는 계급성을 이야기하면 그것과 떼어 놀 수 없는 경험 두개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광주혁명과 연관이 있고 다른 하나는 내가 직접 경험한 일과 연관되어 있다.

 

80년대 한국 운동권 인사들의 독일방문이 잦았다. 그 중 광주혁명 자리에 있었던 분들이 몇 있었다. 한 목사님은 계엄군이 혁명대열에 발포하자 그 사이에 뛰어들었던 어떤 아주머님을 이야기하면서 자기가 뛰어들어 서있어야 했던 자리에 그 아주머님이 뛰어 들으셨다고 자신을 반성했다. 뒷골목으로 도망쳤던 자신을 회상하면서. 다른 한 분은 광주도청사수 마지막 밤의 상황을 전달했다. 한 여고생이 확성기를 들고 도청사수 혁명군 지원을 애타게 간청하면서 시내를 돌아다녔다는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를 전달한 분도 나서지 못하고 숨어 있었다고 한다.

 

한동안 하청청소업체에서 일했다. 시가 운영하는 청소업체 였다. 직원은 약 1000명 정도였다. 노숙자, 알코올 중독자, 마약 중독자, 난민, 외국인 등 사회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을 모아 일을 시키는 회사였다. 일을 거부하면 사회수당이 감축되는 약간 강제적인 일을 시키는 회사였다. 물론 외국인이 대다수였다. 주로 하는 일은 여름엔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잔디깍는 일이었고 겨울엔 지하철역 등을 청소하는 일이었다. 외국인에 대한 처우는 말이 아니었다. 말이 아닌 처우라 말로 표현하기도 힘들다. 난민이지만 가장이고 자기나라에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했던 외국인들이 일하는 동안 내내 술만 처먹고 대마초만 빨아대지만 독일사람이라는 것 하나로 십장이 된 놈들 밑에서 온갖 행패를 다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힘들었다. 처음엔 거리에서 밥 먹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총이 힘들었지만, 그것은 어느 정도 심정적으로 해소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회사의 구조적인 행패는 날이 갈수록 분노가 쌓이게 했다. 마메드와 공원에서 대마초 피우고 술 먹고 난 다음 날 이었던가? 일이 끝나면 늘 맘이 맞는 서너 명과 어울려 길거리에서, 시내 공원에서 술판을 벌였다. 터기 슈퍼에서 라키(페르노와 같은 터기 독주) 서너 병, 수죽(터기 소시지), 야채, 빵 등을 사가지고 공원에서 고래고래 목청 높여 노래 부르면서 술에 얼큰하게 취할 때까지 먹고 마셨다. 그날 나는 대마초와 라키에 완전히 뻗어서 잠이 들었다. 한기가 등을 타고 스며든다. 한 친구는 어두워졌으니 가야 겠다고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난다. 서투른 독어로 마메드가 말한다. 00 혼자 둘 수 없어. 나 알아. 00 완전히 혼자인 것 알아. 00 내 아르카다쉬(형제)야. 00 머리 상했어. 그러면서 늘 부르던 노래를 부른다. 안네 카립.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내용이다. 마메드의 노래를 들으면서 무지의 세계로 빠져 들었다. 깨어나 보니 자정이 다 되었다. 마메드는 아직 내 곁에 앉은 체 꾸벅꾸벅하고 있다. 자리를 털고 지하철 역으로 갔다. 헤어지기 전에 마메드가 나를 꼭 껴안으면서 입을 맞춘다. 까실까실한 수염이 살을 그리워하는 내 몸에 포근함으로 다가온다.

 

회사 경영진에 장황한 편지를 썼다. 조목조목. 기록해놓은 날날의 상황을 다 들이대면서. 이런저런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내 몸에 불을 질러서라고 너희들의 행패를 폭로하겠다고 썼다.

 

이름도 성도 없었던 내가 갑자기 00씨라고 불린다. 긴급종업원평의회가 소집되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 간다. 경영진이 불러 대화를 요구한다. 종업원평의회위원장이 참관하고 그런데 이상하다. 역겨운 감정이 올라온다. 정말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경영진이니 종업원평의회이니 하는 자리에 있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줄이고

 

나는 계급성을 사선에서 나타나는 행위이고 한때 느껴보았던 분노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겁나는 질문이다. 가끔 아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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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의 손님철학이란?

님의 [10년 이주노동의 땀보다 5억원을 귀하게 여기는 사회 ] 에 관련된 글.

<손님의 철학>을 이야기하면 한약에 감초같이 꼭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다. 호메로스 일리아드의 6번째 노래에 나오는 토로이편의 장수 글라우코스와 그리스편 장수 디오메데스에 관한 이야기다.

 

골이 깨지고 창자가 터져 나오는 전투가 한참 벌어지고 있다. 정신 없이 싸우는 가운데 신들까지도 부상시킨 디오메데스와 글라우코스가 맞서게 된다. 디오메데스 이놈 입이 상당히 큰 놈이다. 하는 말을 좀 들어보자.


너 좀 있어 보인다. 추풍낙엽 같은 인간들 중에서 제법 앞으로 나오는데 네놈은 대체 누구냐? 내 창 맛 좀 볼래? 니 애미가 불쌍하다.” 이렇게 까면서도 글라우코스가 혹시 인간의 형상을 입은 신이 아닌가 뒤숭숭한 디오메데스는 글라우코스의 정체를 묻는다.  

 

글라우코스가 대답하기를 내 족보 알아서 뭐 할래? 숲의 나뭇잎 같은 인간의 족보를 따져서 뭐 할래? 어차피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인간의 족보를? 따스한 봄이 오면 싹이 터 나뭇잎이 되었다가 다시 사라지는 족보를?”

 

이렇게 말하면서도 글라우코스는 족보를 차근차근 제시하여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글라우코스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디오메데스는 창을 땅에 꽂고 글라우코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 너 그러고 보니 우리 양가 할아버지 때부터 피를 나눈 가족과 같이 절친한 사이가 아닌가? 반갑다.“

 

글라우코스의 할아버지가 디오메데스의 할아버지를 20일 동안이나 집에 모시고 대접했단다. 귀한 선물을 서로 교환하고. 당시의 관습을 보면 글라우코스의 할아버지가 디오메데스의 할아버지에게 부인까지 내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글라우코스와 디오메데스는 피가 섞인 한속이다.

 

아무튼 디오메데스는 서로 싸우지 말자고 한다. „내가 작살낼 수 있는 트로이인이 무수히 있고, 또 네가 그럴 수 있는 그리스인이 무수히 있는데 우리 둘이 서로 죽이고 살리고 싸울 필요가 있어? 우리 둘인 그러지 말자.“고 한다. 그리고 우리 서로 무기를 교환하여 다른 사람이 우린 한속인 것을 다 알아볼 수 있게 하자고 한다. 무기를 교환하면서 글라우코스가 엄청난 손해를 보긴 하지만. 100마리 가치의 금장무기를 소 9마리 가치밖에 되지 않은 청동무기와 바꿨으니. 5억원도 청동무기일 뿐 아닌가?

 

단님의 글 <10년 이주노동의 땀보다 5억원을 귀하게 여기는 사회>를 읽으면서 이 이야기가 생각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호메로스식 손님철학이 서로 알아보고 다 팔아 넘기는 자본의 "손님철학"이 아닌가 해서 그런가? 그럼 우리 이주노동자의 손님철학은 대체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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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감엔 약이 없다?

에헤야님의 [약사 일기1-독한 약이란 무얼까?] 에 관련된 글.

오래전 일이다. 한 번은 서울에 볼일이 있었다. 근데, 하루는 몸이 으스스해지고 맥이 풀리고 영 기운이 없다. <볼일 보려면 이러면 안 되는데.> 주변에서 약방에 왜 안 가느냐는 권고에 밀려 큰맘 먹고 약방에 같다. 폐결핵에 걸려 오래 투병생활을 하고 약을 디지게 먹어서 그런지 약이라면 딱 질색이다. 그리고 여기선(독일), 최소한 내가 찾아가는 의사는, 감기나 독감 걸려 찾아오면 물 많이 마시고 일주일 푹 쉬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감기나 독감 때문에 의사를 찾아가는 일이 없다. 더구나 의사의 처방 없이 약방에 간다는 것은 없고. 처방해도 기침이나 콧물 정도를 다루는 것이다.

 

그래서 약방에 찾아갔는데 약을 한 주먹 주더니 한꺼번에 털어 넣으라고 한다. 감기가 뚝 떨어진다고 한다. <왠 사기꾼 약사>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많은 양의 약을 털어 넣었다. 감기나 독감 걸리면 독일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는데, <약 먹으면 1주일, 약 안 먹으면 7> 고생하는 병이 감기고 독감이라는 말이다.

 

근데 웬걸, 감기가 정말 귀신같이 뚝 떨어졌다. 몸이 홀가분해지고, 맥이 살아나고.. 마약도 집어넣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몸이 상쾌해졌다.

 

바쁜 세상에, 한 순간 처지면 마치 <생의> 버스를 놓치는 것처럼 뛰어야 하는 세상에 어쩌면 그런 약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감기로 일주일씩 병가를 낼 수는 더욱 없을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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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슬렘이 아님) 무슬림 아랍권에서 유태인이 평화롭게 살 수있는 전통이 있을까?

관련 Robert Satloff의 다큐 "Among the righteous" (www.pbs.org/newshour/among-the-righteous)

를 참조해 볼 수도 있겠다. 2차대전시 위험을 무릅쓰고 유태인을 구출한 아랍인에 대한 다큐다. 유태인 학살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야드바셈"은 이 아랍사람들을 "정의로운 이방인"으로 기념하기를 거부하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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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바람&quot;이 보고 싶다.

뜬금없이 <바람>이 보고싶다. 아직 살아있는지 모르겠다. 좁은 집에서 기를 수 없어서 집 없는 동물을 보호하는 에 넘겼는데, 그날 <바람>은 잡혀가지 않으려고 침대 밑에 숨어서 마지막까지 발광(?)했다.

 

<고양이>는 - 기르던 암컷 고양이를 이렇게 불렀다 지하고 싶은 데로 했다. 지 맘에 내키면 다가와 죽 늘어져서 주물러 달라고 했다가도 딴데 가고 싶으면 훌쩍 가버리곤 했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나갔다가 아침에 되면 대문 앞에서 문 열어 달라고 <야옹>하기 일쑤였다.

 

어느날 집 앞에서 유난히도 <야옹, 야옹> 하던 수컷을 따라 나가더니 근 한 달이 다되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별 걱정을 다 했지만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 외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근데 어느날 아침 <고양이>는 대문 앞에서 문 열어 달라고 <야옹>했다.

 

얼마 후 <고양이>는 옷장에서 새끼 고양이 다섯 마리를 낳았다. 그 중 하나가 <바람>이다. 제일 약해보여서 그랬던지 내가 각별한 정성을 드린 놈이었다. 그래서 그랬던지 아침에 일어나보면 <바람>은 늘 내 머리맡, 아니면 발 밑에서 자고 있었다.

 

(제일 앞에 있는 놈이 "바람"이다.)

 

("고양이" 가족. "고양이"가 야단을 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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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와 겸손

상대방을 존중하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겸손은 대인관계를 원만하게 하는 덕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겸손이란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또 누가 겸손을 지적하면 좀 역겨운 느낌을 갖는다. 그리고 좌파의 논쟁을 보면 겸손이란 덕이 끼어 들 틈이 없이 살벌하게 진행되는 경우를 접한다. 여기 진보넷의 블로거들도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겸손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나도 좌파에 속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좌파와 좌파가 아닌 것을 가르는 경계선에는 실천이라는 개념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겸손을 가지고 좌파여부를 운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실천하는 가운데 실재하는 좌파의 요구에 따라 글쟁이행세를 하는 것도 좌파의 실천으로 쳐 준다면 좌파에 속하려고 노력하는 있을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좌파와 겸손>이라는 표제가 이젠 <좌파적인 실천과 겸손>간에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구체화 되었다.

 

실천하는 좌파가 겸손을 멀리하는 것은 인격수양이 부족하여 인격적인 결함이 있어서 그런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실천하는 좌파가 갖추고 있는 덕이 흔히 이야기되는 겸손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겸손을 멀리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겸손을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은 독어권에서 사회화가 되었기 때문에 겸손을 이야기할 때 Demut란 개념을 연상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우리말에서 겸손을 이야기하는 맥락을 보면 독어의 Bescheidenheit와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 되는 것 같은데, Bescheidenheit란 중세에서 법원의 판결과 지시를 두말없이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바탕으로 하여 어쩔 수 없는 현실을 통찰하고 지혜롭게 대응한다는 의미로 발전하였다. 이런 차원에서 현실에 만족하는 자세를 의미하기도 한다.

 

Demut의 어원을 보면 주인이 시키는 일을 두말없이 이행하는 노예의 자세라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 의미는 기독교가 강점하여 독점으로 삼고 절대 순종을 이야기하는 근거가 되었다. 바로 이것이 니체가 기독교의 도덕을 노예의 도덕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는 근거이기도 한다.

 

목사들의 설교에 등장하는 겸손은 네 자신을 낮춰라인데, 이것이 전제하는 것은 사회적 지위의 높고 낮음이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혹은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자세를 낮추라는 것이다.

 

바로 이점이 역겨운 느낌을 충동시키는 점이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고 또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데, 바로 이런 사람들만이 또 겸손이란 덕을 둘러쓸 수 있는 무리가 된다는 점이 역겨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모모 장로는 사장인데, 대기업의 이사인데 교회에 와선 화장실 청소를 하는 겸손을 보인다고 말한다. 거꾸로 말하면 화장실 청소로 생계를 이어가는 누구는 교회에서 화장실청소를 해도 겸손이란 덕을 둘러쓸 기회가 없다는 말이다. 어차피 그런 현실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겸손은 사회적 현실을 바꾸지 않고 그것을 더욱 견고하게 하는 개념이다.

 

목사들이 말하는 이런 겸손과 대조적인 겸손이 있다. 마리아와 예수가 보인 겸손이다.

 

마리아의 사건에서 그 사건 자체만을 보면 이렇다. 가부장제가 철저한 근동에서 혼인을 약속한 한 여성이 남편이 될 사람과 동침하지 않았는데 임신을 하게 된 것이다. 당시의 법에 따르면 돌로 쳐 죽일 사건이다. 그런데 마리아와 그 남편이 될 요셉은 임신을 받아들였다. 당시의 현실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을 두고 중세의 참신한 신자들은 마리아의 겸손을 이야기하는데 “Niederträchtige Maria라는 표현을 쓴다. 모든 사람이 깔보고 돌로 쳐 죽일 행위를 한 비천한 마리아라는 것이다. 당시의 여성으로서는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데까지 현실적으로 떨어진 마리아를 두고 겸손한 마리아라고 한 것이다.

 

예수는 어떤가? 내 생각으론 예수는 겸손한 사람으로 불리는 것을 꺼려했다.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자 그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한다(20).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을 낮춰 세상에 온 것이 되면, 이것은 흔히 이야기되는 겸손의 사건의 되어 예수사건의 본질을 간과하기 때문에 그랬지 않나 싶다. 예수의 사건이 단지 겸손의 사건이 아니라 정말 비천한 죄인이 되는 사건이었다는 점은 마태복음 27 54절에서 예수가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는 진짜 죄인이 되어 죽은 다음 백부장이 예수를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하는 대목이 뒷받침하지 않나 한다.

 

실재하는 좌파의 실천은 이와 유사한 것이기 때문에 흔히 이야기되는 겸손을 멀리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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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새 세상은 내 마음 안에 생동하고 있는가?


몇 달 전 일이다. 소시민 자영업 형태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는 형편이라 부가가치세 신고 관계로 세무소에 들일 일이 있었다.

 

자리에 새로운 세무직원이 앉아있다. 보기에 50세를 넘어선 여성이다. 굉장히 불안해 하는 모습이다. 볼펜을 잡고 있는 손이 약간 떨리는 듯 하다.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그런데 동문서답이다. 내가 말하는 요지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엉뚱한 소리만 계속한다. 언성이 높아진다. 세무직원의 불안은 더해가고 손을 더 떤다. 결국 나는 불친절하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화가 났다. 나는 속으로 , 저런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을 자리에 앉혀났담.” 이렇게 생각하고 내 행동은 아마 이런 생각에 어울리게 거칠고 상대를 깔아뭉개는 행동이었을 것이다.

 

며칠 후 세무소에서 편지가 왔다. 몇 월 몇 일까지 이런저런 문제를 해명하라는 것이었다. 나를 상담하던 그 세무직원이 뭔가를 잘못 이해하고 엉뚱하게 보고한 모양이었다. 화가 더 치밀었다. 그 직원이 반쯤 죽여놓겠다는 생각으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글은 마력이 있다. 내 모습을 보여주는, 내 모습을 반사하는 거울과 같은 마력이 있다. 그 직원을 깔아뭉개는 글을 써 내려가는 동안 내 모습이 내 눈에 들어온다. 그 모습은 어느 누군가가 신랄하게 비판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아도르노가 위로는 굽실거리고 밑으로는 짓밟는 소시민의 행동을 가장 약한 대상을 덮쳐 찢어 죽이는 맹수와 비교하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 세무직원을 다시 떠올렸다. 그리고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았다. 직업재교육을 받고 세무소로 온 것이 분명했다. 내가 너무 잘못했다. 소시민의 마음이 내 안에 있었다.

 

편지를 고쳐 잘못과 용서를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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