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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8/25
    목가와 소유
    ou_topia
  2. 2014/08/24
    보금자리(Zuhause)
    ou_topia
  3. 2014/08/21
    2014/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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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4/03/14
    2014/03/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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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4/03/05
    번역이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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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14/03/05
    번역이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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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4/03/04
    번역이란?(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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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4/03/01
    은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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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14/02/28
    독일의 복지제도가 한국 복지제도의 패러다임? -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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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14/02/27
    독일의 복지제도가 한국 복지제도의 패러다임? -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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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가와 소유

목가와 [배타적] 소유

 

가축 떼들의 [딸랑딸랑 멈추지 않는] 방울소리(Geläute)가 목가적이라고?  소박하고 평화로운 정경을 자아낸다고? 내 귀에는 그렇지 않다. 감각의 선입관이란 것도 있다.

우리가 말못하는 짐승을 어떤 상황에 묶어놓는지 그 형은 더할 나위없이 심하다. 그들은 발을 뗄 때마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풀을 한입 뜯을 때마다 조잡한 방울소리(Gebimmel)의 고통을 겪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리고 멈추지 않는 진동의 고통에 몽롱해져서 뼈가 앙상한 엉덩이에 내리치는 막대기의 때림 몇개 정도는 더이상 [아예] 감지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이게 아니다. 다만 우리의 감동의 근원에 대하여 말하고자 할 뿐이다.

소의 목에, 서정시적인 이유때문에 방울을 다는 농부는 없다. 단지, 그렇게 함으로써 소를 계속 청각적인 끈에 묶어 놓을 수 있기 때문일 뿐이다. 네다리로 걸어다니는 소유물이, 아주 먼 고산지대의 목장에 풀어 방목할지라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딸랑거리는 소리를 내고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한 농부는 그의 소유물이 어디에 있는지 듣게 된다. 그럴 수 있는 한 농부는 그의 소유를 걱정할 필요가 없고, 그런 걱정이 없는 한 편한 마음으로 다른 돈벌이에 전념할 수 있게 된다. 한마디로, 방울의 딸랑거림은 농부에게 정말 평온을 선사한다.

근데 우리는 어떤가? 왜 우리도 평온해 지는가? 왜 농부의 [배타적] 소유를 안전하게 하는 장치가 우리로 하여금 감동하게 하는가? 왜 이런 감동이 가장 자연적인 [자연과 일치하는] 자연감정이라고 우리 스스로 믿는가? 왜 [이성의 힘을] 느슨하게 하여 소유의 향유로 이해되는 것을 [다감다정한] 매력으로 왜곡하는가? 우리가 여기서 향유하는 건 대체 뭔가? 그리고 왜 뭔가를 향유하는가? 왜 그럴까? 조잡한 방울소리를 통해서 [‘나 도망가지 않고 여기 있어’하면서 자신의 소속을] 신고하고(sich melden) [‘나 네것이야’하면서 자신의 소속을] 확인하는(sich bestätigen)건 분명 우리 각자의 소유물이 절대 아닌데도 말이다.

질문이 잘못되었다. 그렇다. 그게 [바로] 우리의 소유다. 왜?

소유자와의 연대보다 더 강력한 연대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무산자조차 이 연대를 철회하지 않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면, 우리가 목가시인 혹은 세칭 자연애호가의 흉내를 내면서 향유하는 건 저기 저 산중턱에서 이리저리 조잡한 소리를 내는 것이야말로 자연이 아니라 [그 정반대로] 비-자연이라는 사실이다. 덧붙이자면 전혀 무소속(Fremdes)인 것 또는 주인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 세계로 엄습할까 주의해야 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대려 잘 길들여진 우리의 세계에 속한다는, 즉 우리의 소유라는 사실이다.

우리 각자의 소유는 아니다. 시인한다. 아니, 시인할뿐만 아니라 아주 명확하게 재차 강조한다. 이것이 바로 결정적인 요점이기 때문이다. 조잡한 방울소리가 농부의 귀에는 앞에서 보앗듯이 분명 서정시를 읊을만큼 [우아한] 소리로 들리지 않고 어디까지나 실용적으로 그리고 신경을 안정시키는 소리로 들릴뿐이다. 반면 우리의 귀에는 분명 [우아하게] 들린다. 그 이유는 우리의 향유가 소유에 대한 향유라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한편으로는 ‘소유 일반’을, 다른 한편으로는 ‘이해관계가 없는 즐거움’을 향유할 수 있는 희귀한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이 알리바이가 없다면 조잡한 방울소리가 우리의 귀에 절대 서정시를 읊을만큼 우아한 소리로 들리지 않을 것이다. 아름다운 것의(des Ästhetischen) 우회로는 [우리의 감각을 뒤집어 놓는 것으로서] 역겨운(widerwärtig) [길이다].

나를 가득 채우는 여기 이 반감은 수년 전부터 ‘영가’를 들을 때마다 치밀어 오르는 반감과 똑 같은 반감이다. 니그로 노예의 입술은 [아예] 겸손을 말하게 강요되었다. 그가 노래를 함으로써 겸손을 표현하는 한 그는 그의 소유자로부터 벗어나 도주하지 않았다. ‘영가’가 과거에 무엇보다 감미로운 걸로 여겨지고 오늘날에 와서도 아직 그렇게 여겨지는데 (심지어 노예소유[제도]를 진정으로 혐오하는 사람들의 귀에조차 그렇게 들리고 내 귀에도 역시 그렇게 들린다. 나도 역시 아직 [이런 감정의] 상속자다.) 이건 말못하는 짐승의 조잡한 방울소리가 우리 귀에 정취가 넘치는 소리로 들리는 게 우연이 아닌 것처럼 우연이라 할 수 없다. 두 경우 다 목가적인 향유가 지배 및 소유의 향유를 은폐하고 있다. 두 경우 다 우리로 하여금 감동하게 하는 건 두말할 나위없이 우리에 속한 것들의 의지할데 없는 [가엾은] 상황이다. 여기서 눈시울을 적시지 않는 사람은 없다. 나도 역시 눈시울을 적신다.

제우스 신은 노래하지 않고 치터(Zither)도 치지 않는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노래하기는 어디까지나 노예의 의무에 속한다. 이건 노예가 제우스보다 노래를 더 잘해서가 아니라 – 제우스가 가끔 사교적인 차원에서 노예가 노래를 더 잘한다고 겸손을 떨기도 하지만 – 어디까지나 지배의 향유가 오직 밑에 깔린 자의 노래를 통해서만 실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가’는 분명 감미롭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감미로움은 밑에 깔린 자의 목소리를 거친 우회로를 통해서 권력자의 귀로 회귀하는 [불가항력적인] 권력(Uebermacht)의 감미로움 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이제 저기 산중턱에 정적이 감돈다. 조잡한 방울소리를 냈던 [소들이] 이제 외양간에서 서로 배를 맞대고 서 있다. 소유[물]이 소유자의 곁에 있고, 외양간의 문은 굳게 잠겨있고, 조잡한 방울소리는 필요없게 되었다. 전원극이 막을 내렸다. 어둠이 깔리고, 뭔가 내 뒤에서 바삭거렸다. 그게 뭔지 하늘이야 알 수 있겠지만, 그게 동물인지 혹은 [뜬금없이 지나가는] 바람소린지, 암튼 우리 세계가 아닌, 우리 소유[물]이 아닌 그 무엇이 바삭거렸다. 스산한 분위기가 맴돈다.  Nachhause.     

     

(귄터 안더스, Philosophische Stenogramme, Muenchen 1965, S.23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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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금자리(Zuhause)

죽음에 대한 불안을 가장 큰 불안으로, 그리고 영생을 얻기 위한 소망을 가장 강력한 소망으로 팔아 먹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어제 종합병원 대기실에서 어느 한 돌팔이 의사가 사람은 죽은 후에도 어딘가에서 계속 살게 된다고, 지구는 아니지만 다른 위성으로 옮겨져서 계속 살게  된다고 소란스럽게 주장하자 거기서 기다리던 할머니들은 더할 수 없는 근심걱정에 사로잡혔다. 한 할머니는 심지어 격분하기까지 했다. 마치 관청에서 그녀에게 죽은 후에 다른 구로 혹은 비엔나의 신개발도시로 아니면 린츠와 같은 [휘황찬란한] 이국적인 도시로 이주하라고 터무니없는 요구를 한 것처럼 말이다. 타향에 대한 불안에 맞선 상황에서 죽음에 대한 불안은 전혀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일이 정 그렇다면 난 기꺼이 여기에 묻혀 누워있겠다. 이 자리는 내가 잘 아는 자리로서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는 자리가 아닌가.” 라고 말했다. 그러자 기다리던 할머니들이 다 갑자기 그런 죽음은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귄터 안더스: Philosophische Stenogramme, Muenchen 1965, S.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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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21

"고향을 주제로 삼으면 쉽게 입에 거품을 무는 사람들이 있다. 향토학자들은 한동안 아편을 피우는 사람처럼 [멸종의] 위기에 처해있었다. 그런가하면  아직 오늘날까지 알프스 영양 수컷의 등털[로 꾸민 고유복장 모자]를 보면 칼날같이 예리한 지식인이 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고향은 특히 남부독일에 있는 것 같다. (…) 고향, 이건 분명 [따라가기 싫은?] 뒤처짐을 일겉는 데 사용되는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다.

그래, 함부르크에 면방센티미터당 대졸자[Abiture/고졸]가 더 많고, 베를린에 안경당 책이 더 많고, 뒤셀도르프에 두당 20세기가 더 많다고 기꺼이 시인한다. 허나, 베를린함부르크뒤셀도르프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너무 많은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곧 따라갈 거다. 따져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역의 현지시간이 70년전에야 비로소 중앙유럽표준시에 종속되지 않았던가. 반면 이곳 시민들의 [행진]드럼은 [독일제국건국의 마지막 전투인] 세당[전투] 후에도 25년동안이나 [프랑스 혁명] 트리콜로르의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25년이 지나 후에야 비로소 [프로이센 주도 북부독일연맹/독일제국/나치제국 기의 색인] 흑백적에 장단을 마췄다. 덧붙이자면 슈바벤 짜이퉁에는 아주 오래 전부터 독일민주공화국[DDR-동독]이 인용부호없이 [떠떳하게] 등장했다. 물론, 이 지역에서 이런 걸 말할 때 저 일간지를 주교에 밀고한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는게 사실이지만 말이다."

(마르틴 발저의 1968년 에세이 "향토학"에서 발췌)

 

Wenn es sich um Heimat handelt, wird man leicht bedenkenlos. Volkskundler waren eine Zeit lang gefährdet wie Opium-Raucher. Andererseits gibt es heute noch Leute, die können keinen Gamsbart sehen, ohne sich gleich als schneidige Intellektuelle zu fühlen. Heimat scheint es vor allem in Süddeutschland zu geben. (...) Heimat, das ist sicher der schönste Name für Zurückgebliebenheit. Ach wir geben es doch zu, Hamburg hat mehr Abiture pro Quadratzentimeter, Berlin mehr Bücher pro Brille, Düsseldorf mehr 20. Jahrhundert pro Kopf. Trotzdem sollte man sich in Berlinhamburgdüsseldorf nicht zu viele Sorgen um uns machen. Wir kommen schon nach. Schließlich wurden unsere Ortszeiten erst vor 70 Jahren der mitteleuropäischen Zeit unterworfen. Dafür waren aber auch hiesige Stadttrommeln noch 25 Jahre nach Sedan mit den Farben der Trikolore bemalt; dann erst wurde hier schwarweißrot getrommelt. In der Schwäbischen Zeitung wiederum steht seit Jahr und Tag DDR ohne Anführungszeichen. Allerdings, man kann so etwas hier nicht notieren, ohne das Gefühl zu haben, man hätte die Zeitung dadurch beim Bischof denunziert. (Martin Walzer: „Heimatkunde“, in: Heimatkunde. Aufsätze und Reden, Frankfurt a. M. 1968, S.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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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14

착수한 일을 쭉 진행하여 마무리 지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우선 정리부터 좀 해야겠다.

 

1. 정신현상학 번역.

번역이 멈춰진 지점에서 전치사 "durch"의 번역에 고민하게 되었다. "durch"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번역하기 위해서는 피히테를 읽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래서 피히테 전집을 샀다. 근데 아직 한 줄도 읽지 못했다.

 

2. HKWM(Historisch-Kritisches Wörterbuch des Marxismus/마르크스주의의 역사적-비판적 사전)에서 몇 개 article을 번역하는 일. “일반지성”에 이어 “일반노동”에 착수했지만 방치해 두고 있다.

 

3. “프로클라”(계급투쟁의 문제들)의 포스트모던 관련 논문 번역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4. 벤야민의 메시아주의를 ‘저항의 미학’의 ‘기억의 여신’에 대조하는 일이 머릿속에서만 진행 중이다.

 

5. 아젠다 2010 서술 및 비판

 

6. 독일 통일관련 발제, 연설 등 전환점을 이뤘던 사료 번역

 

7. 번역에 대한 숙고

 

8. 뮌헨 축구클럽 회장 울리히 회네스의 탈세와 자유형선고 관련
 신자유주의가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독일 엘리트들이 어떻게 재구성되고, 어떤 심성이 형성되었는지 서술하는 일.

 

9. 우크라이나 문제를 민중(das Volk)과 민족(ein Volk/Nation)이 어긋나는 걸로 이해하고 서술하는 일. 관련 우크라이나 민족의 형성과정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는  일.

 

헤겔의 diktum "Die Kraft des Geistes ist nur so groß als ihre Äußerung, seine Tiefe nur so tief, als er in seiner Auslegung sich auszubreiten und sich zu verlieren getraut.(정신현상학 서론)에 기대어 폼을 잡고 “괜찮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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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이란? -3

Sprachliche Darstellung ist ein Kontinuum von Momentaufnahmen. Sie nimmt von dem, was je und je Geschichte (Geschichtetes) ist, jene Momente auf, die zusammen ein ganzes Bild ergeben. In der Übersetzung geschieht, ausgehend von diesem ganzen Bild, notwendigerweise eine gewisse Verschiebung dieser Momente. Denn erst in der Übersetzung wird durchsichtig,  wie viel der Momente durchgefallen sind. In der Übersetzung tauchen sie wieder auf, Geister gleich und Ermächtigung erheischend. Als Gastgeberin nimmt die Übersetzung diese  durchgefallenen Momente auf, und eine gewisse Verschiebung der Momente geschieht.

 

Das Ganze wird auch verschoben, sodass das zu übersetzende und das übersetzte Ganze nicht mehr übereinstimmen können. Sie sind nicht mehr fügsam.

 

Die Utopie der Übersetzung wäre keine Entsprechung, sondern bestünde darin, dass beide, das zu übersetzende und übersetzte Ganze ihrerseits zu Momenten herab sinken und so ein größeres Ganzes bil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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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이란? -2

Sprache ist ein Kontinuum von Momentaufnahmen. Sie nimmt von dem, was je und je Geschichte (Geschichtetes) ist, jene Momente auf, die zusammen ein ganzes Bild ergeben. In der Übersetzung geschieht, ausgehend von diesem ganzen Bild, notwendigerweise eine gewisse Verschiebung jener Momente. Darum ist eine wortwörtliche Übersetzung eine blinde Übersetz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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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이란?

Übersetzen ist eine Praxis, die das Übersetzte so negiert, dass es gleichsam genötigt wird, den Rückweg zurück zum Zu-Übersetzenden anzutreten. In dieser rückwärtsgewandten Wiederholung des Übergangs wird das Übersetzte als eine Entscheidung gewahr, die dem diesseitigen Grenz-Regime des territorialisierten Verstehens dient. In dieser Erkenntnis wird der Übergang negativ als ein solcher freigelegt, den der Materien-schwangere Geist hat nicht überwinden können. In der Fortführung dieser Kritik wird auch das Lesen des Zu-Übersetzenden als eine Praxis gewahr, die ein Grenz-Regime aufrichtet.

 

Was ist nun Übersetzen? Es ist eine Magd, die ein Licht anzündet und vors Haus tritt, damit der [ungebetene] Geist herein treten möge, als ein willkommener Gast in der Gestalt eines [eines einer] Verachteten, in der Gestalt der bösen Mater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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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머나먼 옛날, 그니까 통신과 교통이 아직 대중화되지 않았던 시대에, 그니까 불과 몇 10년 전에, 동국(同國)이 아닌 이국(異國) -  내 나라가 있나? - 에 사는 사람들은 두고 온 것에 대한 서러움이 컸다.

 


독일에 사는 한국 사람들은 이젠 아무런 경제적 어려움 없이 한국을 드나들 수 있지만, 가버린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어버이날 예배에는 옛날이면 할머니라 불릴 나이에 들어선 여성들이 훌쩍거린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시작한 “나실 때 괴로움 다 잊으시고 ...”의 음률이 단절되는 틈에 훌쩍거림과 흐느낌이 들어서 박자를 이어간다.

 

커튼을 치지 않고 산다. 근데 보름달이 뜨면 커튼을 치기에 바쁘다. 짝지가 보면 또 발동을 걸 거여서 그런다. ‘달아, 달아 너는 좋겠다. 너는 내 강아지 볼 수 있어서 좋겠다.’ 가지 말라고 사정했지만 다다를 수 없는 먼 곳으로 가 버린 철부지 딸아이가 보고 싶어서 딸아이를 볼 수 있을 거라는 달을 부러워했던 어머니. 그 그리움이 보름달에 붙어서 이젠 짝지를 찾아온다.

 

발동이 걸리면 한 두 시간 간다. 옛날 시골에서 타작에 사용했던 발동기의 소리다. 처음엔 느릿느릿 시작했다가 한번 발동이 걸리면 그칠 줄 모른다. 어린아이가 되어 엄마를 찾는다. 어린아이의 울음이다. 엄마 얼굴을 한번만 봤으면, 한번만 만져 봤으면.

 

어쩌다 한번 찾아온 딸아이를 다시 보내면서 뒷골목에서 발을 띠지 못하셨던 어머니. 이젠 나에게도 어머니의 그리움과 뒷골목에서 서성거리시던 모습이 보름달에 붙어있다.

 

은혜.

 

하산하는 인생의 길어 접어들고 나서 어렴풋이 은혜가 뭔지 깨달았다. 언젠가 아버지와 불똥 튀기는 언쟁을 하는 중 “니가 내 x에서 떨어져서 그렇다.”라고 한 말이 생각난다. 뭣 땜에 언쟁을 했는지는 까마득하지만 너무나 적나라한 표현에 말문이 콱 막혀버린 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자기, 자기실현, 내가 나로부터 나온다는 담론이 횡행하는 시대에 내가 나로부터 나오지 않고 타자로부터 나왔다는 아버지의 적나라한 표현이 마음에 와 닿는다. 나의 기원이 ‘나’에 있지 않고 타자에 있다는 것.

 

나를 만들어준 모든 것에 감사하면서 은혜가 뭔지 생각해 보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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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복지제도가 한국 복지제도의 패러다임? - 5

아젠다 2010 개혁 이전의 독일 복지제도

 

1. 기본법에 준거한 법적 강제력을 갖는 제도


0 기본법 20조 1항

- “독일 연방공화국은 민주적‧사회적 연방국가”라고 규정

 

0 복지수급을 사회적 기본권으로 규정하여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함

- 총 12권으로 편성된 사회법전에 세세한 내용이 규정되어 있음

- 사회복지수급관련 쟁의를 전담하는 기초단체, 주, 그리고 연방차원의 사회법원을 둠

- 사회복지관련 법규의 위헌여부에 관한 최종 판결은 연방헌법재판소의 소관임

 

2. 기본 구조 :  3축 복지제도

 

① 법적 사회보험(gesetzliche Sozialversicherung)

- 의료보험, 연금보험, 산재보험, 실업보험, 간호(요양)보험

- 행위 주체: 노·사·정 (연방정부: 법제정, 노·사: 부과금 납부)

- 수혜대상: 보험가입자

- 재원: 고용주와 피고용주가 50대 50 비율로 분담하여 납부하는 “임금부대비용”(Lohnnebenkosten)

 

② 사회정책적인 차원에서의 정부의 사회부양(soziale Versorgung)

- 출산장려 등 가족정책, 대학 교육비지원 등 교육장려, 저소득층 주거보조 및 전쟁희생자 돌보기

- 행위주체 : 정부(연방, 주, 기초단체)

- 수혜대상 : 시민

- 재원 : 세금

 

③ 사회적 배려(Sozialfürsorge) [Sozialhilfe/일반적으로 ‘사회수당’이라고 함]

- 최저생계비에 준하는 기본[생활]보장(Grundsicherung) 및 청소년부조(Jugendhilfe)

- 수혜대상 : 경제활동을 할 수 없는 시민

- 행위주체 : 연방, 주, 기초단체 (+정부지원을 받는 각종 복지단체)

- 재원 : 세금

 

► 독일 복지제도 총지출의 구성은 크게 ①, ②, ③ 이 각 1/3을 차지함. 그러나  신자유주의적인 수정에 따라 고용주 부담비율은 감소되는 반면 정부와 피고용자의 부담비율은 점진적으로 상승.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회복지 지출의 재원구조, 출처: 연방사회노동부, Sozialbudget 2012)

 

맨 위가 정부지출(지원), 중간이 고용주 부담, 그리고 맨 아래가 피고용자부담비율. 고용주의 부담은  1991년 39.8%에서 2008년 33.3%로 감소. 반면 피고용자의 부담은 1991년 26.4%에서 2012년 29.9%로 증가. 동시에 정부지출(지원)이 1991년 31.2%에서 2007년 38%로 늘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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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복지제도가 한국 복지제도의 패러다임? - 4

임금이란?

 

자본주의하에서의 임금이란 죽지 않고 다음날에도 와서 일할 수 있게 생활에 필요한 걸 살 수 있게 주는 돈이다. 노동의 등가교환이 아니다. 노동의 대가가 아니다. 이걸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주인의 비유다. 자본가들도 이걸 안다. 그래서 죽지 않을 만큼은 항상 주었다.

 

근데 자본은 언제부터인지 이것도 아깝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임금을 먹고 살 수 있는 수준이하로 낮춰서 일하게 만들 수 없을까?” 이런 질문을 하기 시작하고 대책을 마련했다. 내가 보기엔 여기에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핵심이 있다. 세금으로 마련된 금고로 최저생계비 이하 수준의 임금을 보충하자는 것.

 

바로 이것이 또한 아젠다 2010의 핵심내용이다.

 

기본소득과 연동되어 있는 문제다. 자민당의 아젠다 2010에 대한 비판을 보면 더욱 그렀다. 자민당은 아젠다 2010개혁을 기본소득의 한 형식인 시민수당(Bürgergeld)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본소득을 이론적으로까지 지지하는 입장은 최저생계비를 밑도는 임금지불을 원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윤활하게 해주는 모종의 계기(Moment)일 뿐이다.

 

기본소득론자들은 앞 포도원 비유를 인용하면서 휴머니즘과 보편적 복지를 운운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인은 단호히 이야기 할 것이다. 아침부터 일을 했던, 저녁 무렵에야 비로소 일자리를 찾았던, 모든 일꾼 개개인들이 하루의 생활을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1 데나리온이 필요하다고. 이것이 모든 사람이 더불어 사람답게 살아가야 하는 우리네 공동체 속의 공정한 정의이며, 21세기의 휴머니즘인 것이다. 그리고 지금 보편주의 복지국가가 우리의 시대정신으로 등장한 이유이다.” (프레시안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36154)

 

진부한 건 그 1 데나리온이 이젠 주인의 호주머니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옛날엔 그래도 지 호주머니에서 꺼냈는데. 자본가가 양손들고 “할렐루야” 하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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