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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불량거래-§3하부

— 이런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매체를 하여간 물성[1] 혹은 {감각적인 것이 말하고/지시하는 <이것>에 보편성이란 가상으로 항상 따르는?} 순수한 존재라고[2] 할 수 있겠다. 이 매체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앞에서 {감각적 확신이 말하고자/지시하고자 했던 것에 부정적인} 결과로 나타난 <여기>와 <지금>이다. 즉, {감각적 확신이 말하는/지시하는} 다수의 <여기> 혹은 <지금>이 [서로 무관하게] 단순히 [한데] 모여있는[3] 것이다. 근데 문제는[4] 이런 다수가 스스로 {즉자적으로만 규정된} 규정성에 머물기 때문에  {감각적 확신이 구체적인 것이라고 하는 여기 <이것>도  역시} 제각기 그저 {가상에 불과한??} 보편적인 것이란 데 있다[5].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여기 손끝에 있는 소금을 예로 하여 설명해 보자.} 여기 이 소금은 아무런 접힘이 없는 단순한 <여기>이면서 동시에 수많은 접힘을 갖는 다층.다각적인 것이다.[6] 그것은 하얗고 또한 찌르듯이 짜고, 또한 입방체이며, 또한 일정한 무게를 갖는 등 이렇게 계속 <또한>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이런 다수의 성질들은Eigenschaften 모두 단순한 <여기>라는 하나의 [테두리] 안에[7] 있는데, 이때 각 성질은 그런 하나의 일부만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온통 두루 속속들이 스며들어 있다. {그래서 소금이 일정 부분만 짜지 않고 온통 짜다.} 어떤 성질도 이 <여기>외 다른 <여기>를 갖지 않고, 모두가 이 <여기>안 어디에나 있고, 이 성질이 있는 곳에 다른 성질 또한 있다.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서로 다른 <여기>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각 성질이 하나의 <여기>에 온통 꽉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일이 없다. 흰색이 입방체에 영향을 주거나 변형을 가하는 일이 없다. 또 흰색과 입방체가 짠맛에 영향을 주는 일이 없다. 이렇게 어떤 성질도 다른 성질에 영향을 주는 법이 없고, 저마다 {아무런 구김 없이 순진하게 자기만을 드러내는, 그러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단순한 자기와의 관계 속에 침몰되어 있기[8] 때문에, 다른 성질을 가만히 놔두고, 관계한다 하더라도 아무런 구애가 없는 <또한>에[9] 의해서 일뿐이다. {이렇게 쭉 살펴보니 물성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또한>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래서 이 <또한>이 바로 순수한 보편적인 것, 달리 표현하면 매체이며 갖가지 성질을 앞에서 이야기한데로 총괄하는 물성이다.



[1]원문<Dingheit>

[2]원문<das reine Wesen>. „헤겔이 말하는 본질이란 변화하는 유한한 사물을 통해서 자기와 관계하는 존재이며,최종적으로는 절대자의 부정적인 운동이다. 그때 절대자는 가상으로서의 직접적인 존재로부터 내면적인 자기로서의 개념으로 귀환하고자 하는 것이다. [...] 다양한 존재의 구별은 그 다양성 때문에 진리의 통일성을 갖추고 있지 않는 것으로서 부정되며, 동시에 그것들을 매개로 함으로써... 본질이 다양한 구별을 총괄하는 내면적인 것으로서 분명하게 한다.“(헤겔사전, 본질(156쪽) 참조.)

[3]원문<ein einfaches Zusammen von vielen>. <Zusammen(함께)>이란 부사를 명사로 사용하고 있다.

[4]원문<aber>

[5]원문<aber die vielen sind in ihrer Bestimmtheit selbst einfach Allgemeine.>

[6]원문<vielfach>

[7]원문<in Einem einachen Hier>

[8]원문<einfaches Sichaufsichselbstbeziehen>

[9]언문<das gleichgültige Au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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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 남성의 눈길-대칭에서 비대칭으로 가는 역사

웨덜리님의 [비공식 연인들의 은밀한 사랑 -프라고나르<그네> 델리스파이스<고백>] 에 관련된 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의<그네>, 재미있는 그림이다. 박희수님의 그림 뒤에 숨겨진 이야기도 재미있다. 근데 그보다 그림 표면에 나타나 있는 ‘담론’이 더 재미있다.

 

이 그림의 소재는sexuality와 성차(sexual difference)다. 그리고 회화에서 나타나는 sexuality와 성차는 눈길로 표현된다.

 

중세이후sexuality와 성차를 소재로 하는 회화의 역사를 보면 남성의 [알]몸은 점차 사라져 결국 여성의 [알]몸만 남게 되고, 성차가 없었던 눈길이 오로지 남성의 눈길로만 남게 되는 남성과 여성간 비대칭을 이루는 눈길의 역사인 것 같다. 남성이 [알]몸으로 서술되는 경우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남성이 알몸으로 그려지는 경우는 sexuality를 욕망하는 눈길의 대상이 아니라 아무것에도 기대지 않고 홀로 우뚝 서있는 ‘남성적인 것’을 그린 것이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의(Valerius Maximus) 여러 권으로 엮어진 “기념할 만한 일들과 말들”(Factorum Dictorumque Memorabilium)이란 책을 보면 중세에서 남성과 여성이 발가벗고 함께 대중목욕탕에서 목욕하는 장면들이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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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눈길은 밖으로 향하지 않고, 또 밖에 있는 눈길이 그림 안에 있은 눈길을 마주하거나 아니면 그림 안의 눈길에 들어가 대상을 바라보는 상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림 안에 어울려 있은 남성과 여성이 서로 눈길을 주고받는 ‘대칭의 눈길’ 밖에 없다.

 

한스 복1세(der Ältere)의 그림 “로이크의 [대중]목욕탕”(Das Bad zu Leuk, 1597)에는 대칭의 구도가 흩트러져 있지만 그래도 아직 외부의 눈길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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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중세를 넘어 근대로 들어오면서 대칭의 눈길의 점차 비대칭의 눈길로 바뀐다. 이런 조짐은 루카스 크라나흐 1세(der Ältere)의 “청춘의 샘”(Jungbrummen, 1546)에서 역력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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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에서 알몸으로 목욕하는 사람들은 이제 단지 여성들일 뿐이다. 청춘의 샘에서 젊음을 회복한 여성들을 남성들이 맞이하는 장면이다. 남성과 여성이 나누던 눈길이 남성의 눈길로만 이동하고 있다.

 

이런 눈길의 비대칭화 프로세스는 골이 점점 더 깊어져서 남성은 그림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알렉상드르 카바넬의 그림 “비너스의 탄생”(1863)은 이런 과정의 한 대목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림 안에는 여성만 알몸으로 남아있고 여성은 그림 안에서 밖에서 쳐다보는 남성의 눈길에 대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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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대칭 눈길 역사의 끝에 가면 여성은 주체성, 즉 자기눈길을 완전히 상실하고 오직 사물화/타자화된 대상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1981년에 사망한 라캉이 생전에 아무도 모르게 소유했다는 구스타브 쿠베르의 그림 „세상의 기원“(1866)은 여성과 남성간 절대화된 비대칭의 눈길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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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오노레 프라나고르의 그림<그네>에 묘사되는 눈길은 대칭과 절대 비대칭 중간에 있는 것 같다. 중세 대중목욕탕에서와 같이 서로 마주하면서 눈길을 나주고 있지는 않다. 남성의 눈길은 여성의 sexuality/음부를 훔쳐보는, 여성의 몸을 장악하려는 ‚눈의 쿠데타’(coup d’oeil)이고 여성의 눈길은 이런 남성의 눈길을 즐기는 것 같다. 이 엇갈리는 눈길에 남성의 쾌감을 즐기는 주체가 여성이 될 수 있는 가능성도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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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불량거래-§3 중중부

이와 같은 일개의 독립체(Eigenschaft)가 정립됨과 동시에 {중세 독일 땅에 수많은 “Eigenschaft”가 널려있었던 것과 같이} 다수의 이런 독립체들이 정립된다. 이때 이들은 {부정 운동을 하는 감각적 확신이 meinen하는} 서로 부정하는 관계에 있다. {그러나 감각적 확신의 언사/지시행위의 결과를 보면} 이 모든 독립체들이 [아무런 접힘/주름이 없는] 보편이라는 단순성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엄밀하게 따지자면[1] {대타존재적인} 규정이[2] 하나 더 추가되어야만 {단일체를 넘어서 진정한} 독립체가 되는, {그런데 아직 즉자존재적인 규정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타자와 관계하지 않는 단일체일 뿐이지 다른 단일체와 경계를 이루는 독립체가 아닌} 이런 규정성들은[3] 각기 자기와만 관계하고[4] 서로 무관하고[5], 홀로[6] 다른 이로부터 자유롭게[7]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단순한/아무런 접힘이 없이 자기동일을 유지하는 보편성도 역시 그 안에 포함된 {즉자존재적으로만 규정된 단일체란} 규정성들과도 구별되고 그들에 얽매어 있지 않다[8]. 이 보편성은 순수한 자기자신과[만]의 관계함[9], 달리 표현하면 이와 같은 [즉자존재적으로만 규정된] 규정성들이 모두 함께 널려있는 매체다. 그래서 이런 규정성들은 아무런 접힘이 없는/단순한 통일체인 보편성 안에서 {자기한계를 모르기 때문에 오직 자기만을 이 보편성 안에서 두루 펼쳐 몽땅 자기 것으로 찬탈하는 식으로} 제각기 두루 속속들이 꽉 차있지만[10] 서로 접촉하는 법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참여하는 보편성이란 순수한 자기자신과의 관계함일 뿐이기 때문에 그 안에 서로 무관하게 각기 홀로 있기 때문이다.



[1] 원문 <eigentlich>

[2]원문<Bestimmung>. 헤겔사전, 이신철 역, 49쪽 참조

[3]원문<Bestimmtheiten>. 같은 책 같은 곳 참조

[4]원문<auf sich selbst>

[5]원문<gleichgültig gegeneinander>

[6]원문<für sich>

[7]원문<frei von der andern>

[8]원문<unterschieden und frei>

[9]원문<das reine Sichaufsichbeziehen>

[10]원문<durchdring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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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불량거래-§3 중부

— {그럼 이제 이 보편적인 직접성이[1]뭔지 논리적인 필연성에 따라 전개해 보자.}[2]존재란 매개를 거쳐서, 달리 표현하면 [언사/지시행위가 meinen하는 <이것>을] 부정하는 가운데 [<이것>의 흔적을 담고 또 그 흔적이 밖으로 드러나는[3]일개의 보편적인 것이 된다. {존재의 직접적인 면을 보면} 존재는 그가 말하는 직접성에 나타나는[4]이런 매개 혹은 부정의 운동을 표현하기 때문에 {<이것>과 어우러진 상태에 있고, 그럼으로써 다른 <이것>과} 구별되는 [자기 규정으로] 규정된 일개의 [독립] 체가[5] 된다.



[1]원문 <eine allgemeine Unmittelbarkeit>

[2]원문 <aber>

[3]원문 <an ihm>

[4]원문 <an seiner Unmittelbarkeit>

[5]원문<eine unterschiedene, bestimmte Eingenschaft>. 여기서 <Eigenschaft>를 <성질>로 번역하지 않았다. 역자는 „Eigenschaft“를 페터 블리클레(Peter Blickle)에 기대에 번역하였다. 그는 <Von der Leibeigenschaft zu den Menschenrechten: eine Geschichte der Freiheit in Deutschland/농도제도에서 인권들로: 자유의 유래에 대한 독일역사를 달리 보는 시각>이란 책에서 중세의 체제를 „한정된 지역“(„Eigen“)의 „독립체제“(„Eigenschaft“)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이 „Eigen“이란 전근대적인 개념이 아직 학문적으로 철저히 연구되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이어 법학과 역사학이 사용하는 <Grundherrschaft/장원제도>란 개념은 단지 학문적인 상위개념일 뿐 중세가 스스로 사용하지 않은 개념이며, 중세 문건에서 볼 수 있는 „Eigenschaft“란 개념을 다 담아내지 못하는 개념이라고 지적한다. 페터 블리클레는 „Eigen“이란 것이 무엇인지, 관련 자세한 연구의 대상이 된 바이에른과 슈바벤의 근접지역의 과거현실을 근거로 하여 설명한다. 특히 로텐부흐(Rottenbuch)에 있는 „Chorherrenstift“(대성당 참사회가 관리하는 재단)에 딸린 „Eigen“에 대한 연구결과를 소개한다. 이 „Eigen“은 수백 년 동안 존속하였는데 1400년 이후의 기록에 따르면 약 200내지 250개의 농경지+농가(Hof)가 속해 있었다. „Eigen“에 딸린 농경지를 일구는 농민들에게는 대성당 수석신부(Propst, 보통 참사회 최고 대표자)와 재단에 농경지 사용의 대가로 일정량의 수확물과 현금을 납부할 의무 및 „Scharwerke“이란 부역(Frondienst)을 해야 하는 의무가 부과되었다. „Eigen“에 딸린 농부들은 „Eigenleute“라고 불렸다. 그들은 그 „Eigen“내에서 [대성당 수석신부의 허락아래] 결혼했어야 했었고 그들의 자녀들에게도 일정한 의무가 부과되었다. 중세에 살았던 독일 농부들은 이렇게 농경지+농가와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었다. 이런 관계의 총체가 중세에 사용되었던 개념인 "독립체제"로서의 „Eigenschaft“란 것이다. 참사회 혹은 대성당 수석신부가 수장이었다는 면에서 „Eigenschaft“는 지배와 관련하고 있지만, 여기서 지배란 „Eigenschaft“를 보충하는 요소일 뿐이다. 구체적인 „지배행위“는 매년 추수가 끝난 다음 소집되는 „Bauding“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이날 „Eigenleute“들은 납부할 곡물과 세금을 갖다  바쳤다. 그리고 이듬해 일굴 농경지의 규모를 당년 실적을  감안하여 새로 책정하였다. 병, 사망 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 즉 이듬해 누가 농경지를 일굴 것인가 등의 문제도 다루어졌다. 그 외 „Bauding“에서는 실정법을 낭독하여 그것을 공포하거나, 혹은 그것이 불분명한 경우 대성당 수석신부가 모인 „Eigenleute“들이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물어 확인하는 절차를 밟았다. 이렇게 실정법을 확인한 후 „Dinggericht“가 열렸다. „Eigenschaft“는 이렇게 일정한 사람과 일정한 땅과 함께 거기에 속한 물건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총체적으로 관철되는 동일한 법현실의 공간이 도려져 구별되었다는(markieren) 것을 의미한다. (같은 책19쪽 이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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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싶은 것

삶의 생수 - 이런 거 있어? - 보다 두리반 칼국수가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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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terra(e)strema: 전태일, 그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La terra(e)strema.

 

"흰 고개
검은 고개"

 

이 추상의 길에 하얀 점으로 사라진 이모와 함께 고개 넘어 서울로 향했던 모든 사람들이 겹쳐진다.

 

EU 경계선을 넘으면서 바다 한 가운데서 사막에서 셀 수 없이 죽으면서 몸 팔러 가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겹쳐진다.

 

미국 멕시코 철조망을 넘어 몸 팔러 가는 사람들이 겹쳐진다.

 

이 길은. “국경을 넘어 인류 전체의 삶의 문제를 끌어안고 두 발로 직접 현장을 뛰며 지구마을 민초들과 가슴으로 통한” 길이 아니다.

 

갑순이가 넘어가던 흰 고개 검은 고개 길인데, 온 인류가 아니라 인류로 취급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는 길을 담고 있다.

 

전태일,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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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의 사유 - 3번째 걸음

ou_topia님의 [IN MEMORIAM GILLES DELEUZE] 에 관련된 글.

 

잠잘 때 뇌는 무슨 일을 할까. 의식과 함께 김 지하의 <서울길>이 찾아왔다.

 

간다
울지 마라 간다
흰 고개 검은 고개 목마른 고개 넘어
팍팍한 서울 길
몸 팔러 간다.

 

아침저녁으로 쌀랑해진, 나락 베기가 다 끝난 가을이었다. 아이는 그날 좀 늦게 일어났다. 전날 저녁 늦게까지 먼 길 떠나 다시 오지 않을 이모는 보따리 짐을 쌌다. 저 멀리 산허리에서 하얀 점 하나가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계곡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시 시야로 들어왔다 하면서 움직이고 있다. 집은 바래다주려고 사람들이 다 나가있어서 텅 비어있었고 아이는 혼자였다. 아이는 처음으로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다. 하얀 점은 고개를 넘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 눈물의 원천은 마르지 않았다.

 

침대에 누운 채 <서울길>을 떠 올려본다. 다 떠오르지 않고 <흰 고개 검은 고개>만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흰 고개 검은 고개>할 때마다 눈물이 나온다. 왜 그러지?

 

율동이 있는 시(!)이기 때문이다. 대상으로 스며들어가 자아와 대상이 일체를 이루고 양자가 오직 운동으로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자는 자아[시인]와 대상이 일체를 이룬 운동으로 들어갈 수 있는 [시적] 공간을 얻었기 때문이다.

 

흐인 고개

거믄 고개

 

“ㅡ ㅣ, ㅓ ㅡ”. 엇갈리는 모음에 구불구불한 산길에서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는 하얀 점이 지금 여기 내 눈앞에 어른거린다. 다시 아이가 되어, 눈물을 흘린다.

 

이런 운동을 박노해의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자아>의 운동으로 꽉 차있어서 그의 추종자가 되거나 그를 멀리하거나 양자택일 할 수 밖에 없다. 김지하의 <흰 고개 검은 고개>는 추상의 고개지만 <서울>로 가는 구체적인 길인데, 반면 박노해의 <안데스 산맥>은 시공간의 실체이지만, 원천(Arche>와 최후<Eschaton>를 찾아 나서는 형이상학적이고 초월적인 자아의 추상이다.

 

그리고 호롱불 하나를 들고 있는 께로족 청년이 시인의 다른 자기(alter ego)가 되고 시인은 존재의 망루에서 마치 구원자를 기다리는 듯이 엄숙한 표정을 짖고 있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는 시인을 향한 말이고,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한 말이다.

 

엮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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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EMORIAM GILLES DELEUZE

지난 밤 정말 오랜만에 "IN MEMORIAM GILLES DELEUZE" 들었다.  한때 한밤의 친구가 되어 주었는데.  박노해의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란 시를 읽고 또 읽으면서 하고 싶은 말들이  이리저리 교차한다. 지문이 사라진, 자본의 지배에 완전히 예속되어, 오직 근육과 힘줄의 작동으로만 존재하는, 완전히 사물화된 존재가 주체로 일어서는 강인함을 갇다 주었던 분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데, 말이 잘 안된다.

 

YouTube에 두 번째 CD 9번째 소리 "Fetischpark" 가 있다. 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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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불량거래-§3 상부

(§3) {그럼, 이제 그 필연성에 따라 대상을 전개해 보겠는데, 먼저 감각적 확신이 하는 행위의 결과를 보자.}[1] [감각적 확신이 말하고 지시하는] <이것>은 항상 <이것이 아닌 것>, 달리 표현하면 <이것>을 지양한 것으로[2] 정립된다. 이렇게 지양되기 때문에 이 부정의 결과는 [아무런 둘레 없이 그냥 흩어지는]  무(無)가 아니라, [어디엔가 속했다는 흔적으로 한정되어 자기 정체성을 갖는] 규정된 무[3], 달리 표현하면 한가지 내용, 즉 [지시된] <이것>의 무인[4] 것이다. 이 무(無)는 이렇게 감각적인 <이것>을 지양한 것이기 때문에 이 무에는 감각적인 것이 아직 남아 있다. 다만, [목전에 있는 것에 찰싹 붙어있는] 직접적인 확신이 손가락으로 찍어올리려고 하는[5] 개별적인 것으로 남아있지 않고 보편적인 것으로 남아있게 된다. [나중에 보겠지만] 이런 보편적인 것이 바로 성질로 규정되는 것이다.<거두다/das Aufheben>는 우리가 보았듯이 부정적인 것에서 드러나는 부정행위가 갖는[6] 이중의 의미를 충실하게 담아내는 표현이다. <거두다>는 <거두어치워 없애버리다>라는 부정임과 동시에 <거두어치워 두다>라는 간직이다.[7] <이것이 아니다>라는 부정행위의 결과로 나타난 무는 <이것>의 직접성을 {소홀히 하지 않고 소중히} 간직하는 것으로서 스스로 감각적인 것이다. 다만, 이 무(無)가 간직하는 직접성은 {모든 <이것>을 품는} 보편적인 직접성일 뿐이다.



[1]원문 <also>

[2]<aufheben>이 갖는 <거두어치워 [없애]버리다, 거두어치워 [선반에] 올려 두다/간직하다, 한단계 업그레이드하다>란  세가지 의미로서의 지양.

[3]원문 <ein bestimmtes Nichts>. 부정관사 <ein>을 한가지/하나라는 <자기정체성>으로 받았다.

[4]원문 <ein Nichts von einem Inhalte, nämlich dem Diesen>

[5]원문 <meinen>

[6]원문 <an dem Negativen>

[7]원문 <aufbewahren>. 그냥 <보관하다, 보존하다/konservieren>란 의미가 아니다. 남이 보기야 보잘 것 없는 엄마의 사진을 가려 소중히 간직한다는 의미다. <aufbewahren>란 낱말은 지금은 사라진 <Wahr>라는 명사에서 파생된 낱말인데, <Wahr>는 양치기가 수백의 양을 세세히 구분하는 주의력(Aufmerksamkeit)으로 그들을 품어 보호하는(Obhut) 것과 비교되는 의미를 갖고 있다. <wahrnehmen/지각하다>의 <Wahr>도 이와 마찬가진데 <in Wahr nehmen/뭔가를 비호하다>란 말이 줄어든 것이다. 이 <비호/보호>란 의미는 <verwahrlosen>이란 낱말에서 잘 드러난다. 예를 들어 <Wahr>가 없어서 몸과 마음이 황폐해진 어린이들을 <verwahrloste Kinder>라고 한다. 그래서 <bewahren>에서 <wahren>은 사실 <in Wahr nehmen>과 같은 의미다. <wahren/비호하다>와 <wahrnehmen/지각하다>는 한속이다. <Wahr>는 또한 영어 <aware>, <to warn>등의 어원이기도 하다. 적이 오는지 구원병이 오는지 경각심을 갖고 망을 보기 위해 세운 <Warte/망루>란 낱말과 친족관계를 이루고, 이들은 다시 <wehren>과 함께 인도게르만어 <uer >에 어원을 두고 있다. <werden/되다>란 조동사에서 살펴보았듯이 <uer>는 <지렁이/Wurm>의 어원이기도 하다. <꼬다, 엮다>란 기본의미에서 <보호하다>란 의미까지 갖는다. 그래서 <bewehren>은 <나뭇가지 등을 꼬아 엮어서 울타리를 쳐서 보호하다>란 의미다. 독어 <Bürger/시민>에는 <citoyen>과 <bourgeois>가 혼탁하게 스며있는데, <Bürger>는 <Burg/성, Ville>를 <보호하는/방어하는/uer)> 사람을 가리키는 낱말이다. (Duden, Das Herkunftswoerterbuch, 198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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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불량거래-§2

(§2) 이제 이 대상을 좀더 자세히 규정해야 할 차례다. 이 규정은 {감각적 확신에서와 같이 등장하는 것을 그대로 수용하는 규정이 아니라} [감각적 확신에서 얻은] 결과에서 {필연성에 따라} 간단하게나마 전개해야 하는 것이다. 보다 완벽한 전개는 이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이 아니다. 대상을 지배하는 보편성이란 원리는 {[보편적인] [교환]가치를 창조하는 단순노동이 다양한 사용가치를 지니는 상품체를 생산하는 구체노동으로 매개된 것과 같이} 단순성이란 터전에서 {꼰대를 세우고 있지만} 그 단순성이란 [<이것, 저것>하는 구체적인 언사행위와 지시행위로] 매개된 것이므로, 대상은 이런 관계를 자신의 속성으로 하고 이 속성을 {밖의 다른 것과 교환관계에 들어가는 상황에서와 같이} 밖으로 드러내지[1]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대상은 다양한 성질을 지닌 사물로 자기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게 [우리가] 감각적인 지에서 보았던 풍부함은 지각에 속하는 것이지 마주하는 것에 찰싹 붙어있는 확신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후자에 있어서는 그 풍부함이 자기도 모르게 밖으로 드러나는 들러리에 불과한 것이었다. 지각이 [사물이 지니는 다양한 성질로서의] 풍부성을 갖는 까닭은 오직 지각만이 그의 꼰대가 되는 [ein vermitteltes Einfaches란] 대상에서 드러나는[2] 부정 혹은 차이, 달리 표현하면 다양성을 [알아보고] 갖기 때문이다.



[1]원문 <an ihm>

[2]원문 <an ihrem We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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