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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두번째] 지각행위가 이렇게 되어버린 마당에서[1] 의식은 [사물이 이런저런 규정성으로 나타나는 차이가 자기자신에 속한다는데 머무르지 않고, 달리 표현하면 갖가지 감각으로 {밖으로} 갈기갈기 찢어져나가지만 않고] 동시에 또한 자기자신을 간추려 자기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반성이라고 의식하기[2] 때문에[3] 자신을 [사물이라는 대상과 지각하는 의식이란 두 축으로 갈라져 있는] 지각행위에서 [갖가지 차이가 따로 노는] <또한>이라는 [공통매체로서의 사물에] 대립되는 축으로[4] 의식하고 있다. 이 힘은 {갈래갈래 찢어지는 감각을 하나로 묶는 힘으로써}[5] 사실[6] 사물이 {갖가지로 찢어져 짬뽕으로 녹아들지 않는 Eigenschaft들 때문에 자기정체성을 가질 수 없지만} 차이를 배제하는 {통.공시적인?} 통일을이루어 자기정체성을 가지게 하는 힘이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를 이루는 자기정체성은 의식이 감당해야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물이란 [<또한>이라는 공통매체일 뿐이지 자기정체성을 이루지 못한] 상이하고 독립적인 다수의 Eigenschaft들이 [한 보따리 안에서 그저] 병존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7] 그래서 사물이 이렇다저렇다라고 언명된다. 예컨대 사물은 희고, 또한 입체적이고, 그리고 또한 톡 쏘는 짠맛이 있다는 등 갖가지로 언명된다. 그러나 {이런 <또한>은 사물의 자기정체성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사물이 흰색인한 입체적이지 않고, 그리고 흰색이고 입체적인한 톡 쏘는 짠맛이 아니라는 등[8] 갖가지 언표행위가 보여주듯이 갈래갈래 찢어져 있다. 그래서 이런 Eigenschaften들을 하나로 묶어 [통일된 정체성을 이루는 것은] 오로지 의식이 떠맡아 해야 하는 일이다. 이때 의식은 이런 Eigenschaft들이 사물 그 자체에서 [사물의 자기정체성으로 통일된] 하나를 이루게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고있다.]
[1]원문<nun>
[2]원문<sich in sich selbst reflektieren>.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에 이어 칸트가 말한 <Einheit der Apperzeption>?
[3]원문<und>. 결과를 나타내는<und>
[4]원문<Moment>
[5]원문<dies Moment>. Apperzeption의 힘.
[6]원문<aber>
[7]의식하는 지각만으로는 사물의 자기정체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어제 보았던 그 나무가 오늘도 그 나무인지 알 수 없다는 이야기다. Hume의 Treatise를 다시 한번 꼼꼼히 읽어봐야 할 것 같다. 헤겔은 여기서 공시적으로도 사물의 자기정체성을 담보할 수 없다고 하는데 이해가 잘 안 된다.
[8]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pros ti>?
사물들은 이렇게 Eigenschaft들을 갖고, 이런 Eigenschaft들에 의해서 다른 사물들로부터 구별된다.[1] 그리고 Eigenschaft란 사물이 배타적으로 소유하는[2] Eigenschaft이기 때문에, 달리 표현하면 사물에서 [필연적으로] 드러나는 [대자적인] 규정성이기[3] 때문에, 사물은 다수의 Eigenschaft를 갖는다.[4] 왜냐하면, {의식이 지각을 이해하려는 두번째 시도의} 첫 디딤돌로[5] {자기는 변하지만} 사물은 불변하는것으로[6] 내놓았는데, 이것은 사물이 물자체(an sich selbst)가 된다는 말이다. 이런 물자체로서의 사물에서 [필연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하나의] 사물이 배타적으로 소유하는 것으로서 다른 사물을 떠받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만을 떠받치는 [꼰대]로[7] 드러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 살펴보면 [8] {위에서 이야기한} 사물과 사물을 구별하는 {공통매체가 되는 의식의} [대자적인] 규정성bestimmte Eigenschaft들은 {동/타종의??} 다른 사물을 떠받치고[9] 그리고 다른 사물과의 관계에서만[10]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인 물자체로서의] 사물에서도 [필연적으로] 드러나는 것들이다. 이런 것들이 [하나인 물자체로서의] 사물에서 드러나는 bestimmte Eigenschaft들이 되려면 서로 [확실히] 갈라져 있는[11] 다수여야 한다. 그리고 셋째로 bestimmte Eigenschaft들이 이렇게 {an sich/물자체로서의??} 물성[12]안에 있음으로써 {우리/헤겔이 보기에 아니면 지각하는 의식이 보기에??} {즉자적인 것 안에서 대자적으로 규정된??} 즉자대자적인?? 것이 되고 그렇기 때문에[13] 서로 무관한 것이 된다. 그래서 [지각을 이해하려는 의식이 두번째 시도로 사물은 하나이고 Eigenschaft들은 자신의 반성(Reflexion)에 속하는 것이라고 한 것과는 반대로] 사물이 희고, 또한 입체적이고, 또한 톡 쏘는 짠맛이고, 이렇게 또한으로 이어지는 여러 Eigenschaft들을 갖는 것은 사실 사물자체가 그래서 그렇다. 달리 표현하면, [지각하는 의식이 아니라] 사물이<또한>, 혹은 공통매체가[14] 된다는 말이다. 이런 공통매체 안에서 Eigenschaft들은 서로 겹치는 일이 없어서[15][ 다른 Eigenschaft들과 함께 달달 끓어] 짬뽕으로[16] 녹아 들어가는[17] 법이 없다. 사물을 이렇게 받아들여야 그것을 참답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1]원문< Sie [die Dinge] haben Eigenschaften, wodurch sie sich von andern unterscheiden.> 뭔 말인지 불분명하다. 종차(differentia specifica)를 이야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갑돌이와 차돌이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종차를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뭐가 이렇게 복잡한지 알 수가 없고, 갑돌이와 차돌이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Eigenschaft란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이것은 <von andern>을 <von andern gleicher Art/동종의 다른 사물>로 이해해야 하는지 아니면 <von andern anderer Art/타종의 다른 사물>로 이해해야 하는지 불분명하다는 말이다. <수적 하나>가 이야기되는 것을 미루어보아 <동종의 다른 사물>이 최소한 동시에 이야기되는 것은 분명하다. 근데 문제는 어떤 사물이 동종의 다른 사물과 구별되는 것은 <본질적인 성질>에 의해서가 아니지 않는가?
[2]원문<eigene>. <Eigentum>이란 법적 개념에 기대어 번역해 보았다.
[3]원문<eine Bestimmtheit an ihm selbst>. 여기서 <an ihm>이란 표현에는 <Es liegt an dir, dies zu tun./이것을 하고 안 하는 것은 너의 몫이다.=이것은 네가 결정해서 해야 할 일이다.>란 문장에서와 같이 필연적인Moment가 있는 것 같다. 이것이 어떤 필연성인지는 더 물어봐야 할 것 같다. 갑돌이와 차돌이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차원에서의 필연성이라면 [개인이] 삶을 살아가는 동안 엮어진 <역사적인 아프리오리/historisches Apriori>와 같은 것이 아닌가 한다.
[4]뭔 말인지 모르겠다. 왜 다수의Eigenschaft를 갖지? 필연적으로??
[5]원문<vors erste>
[6]원문<das Wahre/참다운 것>
[7]원문<sein eigenes Wesen>
[8]원문<zweitens/둘째로>
[9]원문<um anderer Dinge willen>
[10]원문<fuer andere Dinge>
[11]원문<mehrere sich von einander unterschiedene>
[12]원문<Dingheit>
[13]원문<und>. 설명하는<und/그리고>로 이해하고 번역했다.
[14]원문<das allgemeine Medium>
[15]원문<auseinander bestehen>
[16]원문<berühren/만지다, 접촉하다>. <rühren>는 인도게르만 어원적으로 <휘저어 섞다>라는 의미다. <끓이다, 볶다>라는 고대인도어와 어원을 같이 한다. (Duden 어원사전 참조)
[17]원문<aufheben>
(§ 10) 이어 의식이 [자기탓으로] 돌리는 이와 같은 상이한 측면들은 공통매체안에서 발견되는 것으로[1] 간주되지만 {함께 있지 않고} 각자가 이렇게 따로따로 대자적으로[2] 규정되어 있다. 여기서 흰 것은 오로지 검은 것에 대립되는 것으로 있을 뿐이다. 다른 측면들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리고 사물이 [수적] 하나가 되는 것은 바로 {이렇게} 자기를 다른 것들에게 대립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자적인 규정성을 빼고} 사물이 [수적] 하나인 것 그 자체만을 놓고 보면, 하나인 사물은 다른 {하나인} 사물들을 배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수적 하나로 있음>은[3] {모든 하나에게} 공통되는 {즉자적인} 자기자신과의 관계이기 때문에 사물이 하나가 됨으로써 {독특한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하나인 사물과 똑 같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인 사물은 {오직} {대자적인} 규정성에 의해서 다른 하나인 사물을 배제한다. 이렇게 사물들은 온전히[4] 즉자대자적으로 {즉자적인 하나임과 동시에 여러 대자적인 규정성을 갖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 9) 이제 나는 [지각을 Aufnehmen과 Reflexion으로 갈라놓고 사물을 지각하는데][1] 맨처음 내 시야에 들어온 사물을 하나로 [하나 외의 것이 아닌 것으로] 구별해 낸다[2]. 여기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내 시야에 이렇게 하나로 걸린 사물을[3] 그대로 유지하는 일이다. [그리고 또 내가 해야 할 일은] 지각행위의 운동 속에서 이와 모순되는 것이 발견되는 경우 그것을 나의 반성으로 인식하는 일이다. [이렇게 사물을 하나라고 해놓고 지각행위를 계속하는데] 지각 안에서는 [하나로서의 사물 외에] 사물의 성질인듯이 보이는 차별된verschiedene 성질들도 발견된다.[4] [뭔가 다른 것이 발견되든 말든] 사물은 오로지 하나일 뿐이다. 이런 차이가Verschiedenheit 사물의 것이라면 사물은 더 이상 하나일 수 없으므로 우리는 이런 차이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의식한다.[5]
[1]원문<also>
[2]원문<gewahr werden>
[3]원문<in dieser wahren Bestimmung>. §3 역자주에서 언급한 <Wahr>라는 명사의 의미를 살려 번역해 보았다. <wahr/참다운>라는 형용사는 라틴어<verus>와 어원이 같다. <severus/엄격한>하면 <verus>가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wahr>에는 어원적으로 <상대를 받아들이는, 친절한, 상냥한>이란 의미가 있다. 이런 의미의 연장선에서 <상대를 믿는>이란 의미도 있다. (Duden 어원사전 참조)
[4]원문<vorkommen>
[5]뭔 말인지 이해가 안 간다. 왜 <하나/Eins>와 <성질/Eigenschaft>간 모순이 있는지 모르겠다. 플라톤의 <오이튀데모스/Euthydemos>를 보면 소피스트들이 “하나”와 “성질”간의 “모순”을 가지고 말장난질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근데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하였듯이 “pros ti”, 즉 어떤 특정한 관계에서 그 하나가 그렇게 나타나는 것을 빼놓고 말장난질 하는 것이다. 이것을 헤겔이 모를 리가 없고. <Eins>와 <Eigenschaft>간의 모순을 이해 못하는 것이 그 관계를 <Hypokeimenon/바탕>과 거기에 따라 붙는 성질과의 관계로, 즉 <이것은 이렇다>라고 말하는 <로고스 아포판티코스/logos apophantikos>에 나타나는 관계로 이해해서 그런가? 그런 관계가 아니라면 그럼 <Eins>와 <Eigenschaft>의 관계는 어떻게 생겨먹은 것인가? 그리고 <Eins>와 <Eigenschaft>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여기서 <Eins>를 사물의 [논리적인/존재론적인/명제적인] 것이 아니라 <Eins sein>이라는 존재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그럼 <Eins sein>이란 무슨 말인가? <Eins sein>이 이런저런 <Eigenschaft>라면 <Eins sein>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기 때문에 <Eigenschaft>가 의식에 속한다고 하는 것인가? 그럼 <Eins sein>에 존재적으로 속하는 <Eigenschaft>란 뭐고 왜 <Eins sein>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는가? 헷갈린다.
의식이 자기가 하는 지각행위란게 뭔지 경험한 것이다. 지각행위의 결과로 훤하게 드러난 것이[1]{시시포스의 애씀을 다 무효로 만든 것처럼} 지각행위를 해체하는[2]것, 달리 표현하면 의식이 {점진적으로} 훤하게 드러난 대상에서 떨어져 나와 마침내 자기 안으로 꺾여 들어가 자기자신을 마주하는 반성이란[3]것을 경험한 것이다. 이것은 의식이 자기가 말하는 지각행위란게 어떻게 생겨먹은 것인지[4]스스로 알아차리고 거기에 알맞게 행동하게 된다는 말이다. {의식은 처음에} 지각행위란 아무런 {접힘/굽힘/주름이 없는 대상을 일대일로 받아들이는} 단순하고 순수한 받아들임이라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행동했다. 근데 그게 아니란게 결과에서 드러났다. 지각행위란 뭔가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이런 받아들임의 결과로} 훤하게 드러나는 것으로 인해서[5]자기 안에서 자기를 마주하는 반성이란 것을 알게된 것이다. {meinen/사념을 넘어서 오로지 밖으로 향한 눈길이 되었던 지각행위로서의} 의식이 {다시} 자기 안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결과로] 훤히드러난 것을[6]그대로 가만 두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젠 의식이 자기 안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지각행위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이런 되돌아감/반성이 순수한 받아들임에 뗄 수 없게 찰싹 붙어있는 것으로[7]순수한 받아들임에 개입해 있기 때문이다. 의식은 지각행위의 이 다른 면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자기 것으로 인식하고 자기 탓으로 돌리고 이렇게 {내죄 올시다} 함으로써 {지각행위에 개입되어 있는 의식의 자기반성행위로 대상을 더럽히지 않고 순수하고 참다운 것으로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 이렇게 되면 일이 감각적 확신에서 그랬던 것처럼 {지각하는} 의식의 {눈길이 밖으로 쭉 뻗어나가지 못하고 뒤로 밀려} 자기 안으로 꺾여 들어가는 면이 지각행위에서도 드러나게 된다. {이렇게 지각행위에서도 의식과 대상간의 구별이 발생하는데} 근데 [이 구별의] 첫단계에서는[8] 감각적 확신과 좀 다른 점이 있다. 의식과 대상간의 구별로 {감각적 확신에서는 진리가 의식[안]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지각행위에서는 그렇지 않다. [지각행위의 양면을 인식한] 의식은 [진리가 자기 안에 있다고 하지 않고] 지각행위에서 발견되는 [9]비진리란 자기 안으로 {잘못 반사되어??} 떨어진 것이라고[10]인식한다. {지각행위에서 발견되는 비진리가 이렇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의식은 동시에 그 비진리를 파기할 수있는 능력을 갖게된다. 의식은 자신의 지각행위의 비진리[성]에서 참다운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을 구별해 내어 그 비진리를 정정한다. 이렇게 비진리가 의식의 몫이 되지만, 의식이 이런 수정을 스스로 수행하는 한에서, 지각행위의 참모습이 뭔가라는 진리로서의 진리는 의식 안에서 벌어지는일이 된다. 그래서 우리가/헤겔이 이제 살펴볼 의식의 태도는 어떻게 생겨먹었는가 하면 더 이상 [밖으로 향하는 눈길만 되는] 몰아지경의[11]지각행위만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자기를 마주하는 반성으로도 의식하고 이런 반성을 [접힘/구김없는] 단순한 받아들임 그자체에서 떼어 갈라낸 태도가 된다.
[1]원문<das Wahre>
[2]원문<seine Auflösung>. <해체>된 상태에서 다음 단계로 아래 <aus>란 전치사에 스며있는<Ablösung/떼어 냄>이 이루어 진다.
[3]원문<die Reflexion in sich selbst aus dem Wahren>. 전치사 <in>과 <aus>의 의미가 어렵다. <in>과 <aus>가 한 쌍으로 사용된 것을 보면 분명 방향을 나타내는 공간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컨대 이렇다. <Ich fuhr aus dem Bett hoch./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Ich fiel ins Bett./나는 침대로 몸을 떨어 뜨렸다.> 근데 지각행위가 총체적인 과정을 이룬다는 것을 놓고 보면 여기서 <aus>는 < Aus der häßlichen Raupe ist ein hübscher Schmetterling geworden./징그러운 애벌레가 {점진적으로 성장하여 마침내 [애벌레가 아닌] 어여쁜 나비가 되었다.>란 문장에서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 같다. [Harald Weinrich, Textgrammatik der deutschen Sprache, 4. Auflage, Hildesheim 2007, S. 648 f. 참조]
[4]원문<beschaffen>
[5]원문<aus dem Wahren>
[6]원문<das Wahre>
[7]원문<unmittelbar>
[8]원문<zunächst>
[9]원문<vorhanden>
[10]원문<in es fällt>
[11]원문<bloß>
그런데 이렇게 절단되어 있는 일개에서 지각하는 의식은 다수의 Eingenschaft들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들은 서로 간섭하기 보다는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도 발견한다. 그래서 지각하는 의식은 대상을 {Eigenschaft를 독립체라고 하면서 그것을} 배타적인 것으로 파악한 것은 잘못 지각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대상은 {다시} 오히려 앞에서 이야기된 두루뭉실한 연속성과[1]같은 것이 된다. 단지 대상이 이젠 다수의 Eigenschaft들이 Gemeinschaft를 이루는 보편적인 매체가[2]된다. {배타적인 Moment는 이런 {울타리} 안에 병존하는 다수의 Eigenschaft들에게 있게 된다.} 이런 울타리 안에 병존하는 다수의 Eigenschaft들은 감각적인 보편성으로서 각자 홀로 있고, 이렇게 {대자적으로} 규정된 것으로서 배타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내가 {실로} 지각하는 것은 {무슨 보이지 않는 귀신과 같은 Gemeinschaft/공동체가 아니라} 단순하고 {훤하게} 드러나 있는 것으로서[3] 보편적인 매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따로따로 있는[4]하나하나의[5] Eigenschaft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Eigenschaft는 {속성으로서의??} Eigenschaft가 아닐 뿐만 아니라 규정된 존재도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지각하는 따로따로 있는 하나하나로서의} Eigenschaft는 이제 어떤 일개에서 드러나는 것이[6]아닐 뿐만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안에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속성으로서의??} Eigenschaft란 오로지 일개에서만 드러나는 것이고 오로지 타자와의 관계 안에서만 규정되는[7]것이다. {내가 지각하는 따로따로 있는 하나하나로서의} Eigenschaft에는 이제 더 이상 부정[운동]이란 성격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오로지 순전히 자기자신과만 관계하는[8]것으로 머무르는 어떤 감각적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 의식은 {결국} 감각적 존재를 대하고 되고 단지 meinen할 뿐이다. 다시 말해서 의식은 결국 지각행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기 안으로 되돌아 간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일이 따 끝나지 않고} {한 쌍을 이루는} 감각적 존재와 Meinen이 스스로 다시 지각행위에 들어간다는데 있다. 자아는 이렇게 {시시포스가 애써 정상에 굴려 올려다 놓은 돌이 원점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과 같이} {애써 지각한 것이 결국 감각적 존재가 되어 다시 지각의 원점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과 함께} 원점으로 굴러 떨어져 다시 처음부터 똑 같은 운동을 반복해야 하는 걷잡을 수 없는 되풀이에[9]휘말려 들어가 {시시포스가 다음에 돌을 굴려 올라갈 때에 처음의 경험을 되살려 여기서는 이렇게 하면 되고 저기서는 저렇게 하면 되고 전체적으로는 이렇게 하면 된다는 것을 알고 좀 쉽게 할 수 없듯이} 매 순간마다의 애씀과 모든 애씀이 아무런 흔적과 결과를 허용하지 않는 파기에 의해 남김없이 사라지는 것을 맛보게 된다.
[1]원문<die Kontinuitaet ueberhaupt>
[2]원문<ein allgemeines gemeinschaftliches Medium>
[3]원문<das Einfache und das Wahre>. 데카르트의 제3성찰에 나오는 <clara et distincta>란 표현이 연상된다. <wahr>를 하이데거의<aletheia/진리>해석에 기대어 번역해 보았다. <wahr>에 어원적으로<aletheia>란 의미가 스며있는지는 모르겠다.
[4]원문<fuer sich>
[5]원문<einzelne>
[6]원문<an einem Eins>
[7]Strawson이 말하는 “Sortal”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가?
[8]원문<dies reine Sichaufsichselbstbeziehen>
[9]원문<Kreislauf>
(§4) [감각적 확신의 결과에 나타난 관계를 놓고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보편성의 모습을 다 드러낸 것은 아니다.] 이 단계에선 오로지 {주체의 계기가 전혀 없는 실정성으로서의} 그저 있는[1]보편성의 성격만이 겨우 관찰되고 전개되었다. 그러나 보편성의 성격에는 {보편성의 [논리적인] 서술에} 포함해야 하는 다른 면도 드러나 있다. 이를 살펴보자.[2]다수의 {즉자적으로만} 규정된 성질들이 정말 그렇게 단순한 관계에서 서로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고, 전적으로 자신과의 관계 안에만 침몰되어 있다면, 그 성질들은 <규정된> 성질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규정된> 성질이란 다른 성질과 대립관계를 이루는 가운데 서로 구별되는 {대타적으로 규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 대립이 이루어지고 난 다음에는 {<또한>이라는} 매체 안에 있는 다수의 성질들이 단순한 통일을 이룰 수가 없다. {즉자적으로 규정된 성질들에게는 <또한>이라는 추상적인 매체가 순수한 본질이었다.} 그런데 이젠 부정[운동]이라는 대립도 똑같이 성질들에게 본질적인 것이 된다. {일이 이렇게 되면 다수의 성질이 서로 대립하는 가운데 함께 있는 것은 단순한 통일이 아니라} 이와 구별되는, 즉 다수가 너나 할 것 없이 아무렇게나 모여있는[3]그런 통일이 아니라, 배타적인, 다른 것을 부정하는 통일이다. 그래서 이 통일은 [<또한>이라는] 단순한 매체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단순한 매체란 단지 <또한>이라는 아무런 구애와 속박이 없는 통일일 뿐만 아니라, 둘을 허용하지 않는 배타적인 하나로서의 통일이기도 하다. — 하나, 이것은 부정의 힘으로서[4]자기와 단순하게[5]관계하는 가운데 다른 것을 배척하는 하나가 될 때 작용하는 힘이다. 이런 작용을 통해서 물성이 일개 사물로 규정된다. {An der Eigenschaft ist die Negation als Bestimmtheit, die unmittelbar eins ist mit der Unmittelbarkeit des Seins, welche durch diese Einheit mit der Negation Allgemeines ist; als Eins aber ist sie, wie sie von dieser Einheit mit dem Gegenteil befreit und an und für sich ist.}[6]{문제는 부정 인데} 성질Eigenschaft에서는 부정이 존재의 직접성과 직접적으로 하나를 이루는{즉자적인} 규정성으로 있다. 존재의 이런 직접성은 부정과의 이런 통일에 의해서 {모두가 자기 것만으로 꽉 채우는 대자적인} 보편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하나로서의 성질은 이런 [자기와만 관계하는 자위행위로서의] 통일에서 벗어나 대립하는 대상과 짝이 지어진[7]즉자대자적인 존재다.
[1]원문<positiv>. 어원<ponere>을 살려 번역하였다. 청년헤겔의 사상형성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실정성/Positivität>에 관해서는<헤겔철학사전, 실정성, 240쪽 참조>.
[2]원문<nämlich>
[3]원문<gleichgültig>
[4]원문<das Moment der Negation>
[5]원문<auf eine einfache Weise>. 빈켈만이 말하는<edle Einfalt>가 이런 것인가?
[6]원문을 올려 보았다.
[7]원문<von dieser Einheit mit dem Gegenteil befreit>. 재미있는 표현이다. <befreien/해방시키다>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즉 무엇으로부터(von) 무엇으로(zu) 해방하는 것이다. 근데 헤겔은 여기서<von>과<zu> 대신<von>과<mit>를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mit>는 지금까지 이야기된 내용에 비춰보아 수단이나 도구의 의미일 수 없다. 그럼 여기서<mit>는 어떤 의미인가. 헤겔이 사용한<befreien/해방하다>에는<freien/짝을 찾다, 아내를 구하려 다니다>라는 의미가 스며있는 것 같다. 참고로<frei/자유로운>는<보호하다>란 의미에서<사랑하다>란 의미까지 있는<prāi>라는 인도게르만 낱말에 그 어원을 두고있다. <Liebe>에는 순수한 사랑뿐만 아니라 몸으로 성행위/성관계를 맺는 의미가 있는바, <von dieser Einheit mit dem Gegenteil befreit>은 사람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성적쾌감을 자위행위에서 알게 되지만 짝과의 성관계에서 정말 알게 되는 것과 비교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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