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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5)
“사물의 필연(개념)적인 관(계)성을 이루고 사물을 다른 것들로부터 구별하는 [단지] 관계에서[만] 드러나는 규정(성질)이란, 사물이 바로 그 [관계적/사회적] 규정을 통하여 다른 것과 한 쌍이 되는 [ta pros ti적인] 대립관계를 이루지만, 사물이 [그런 대립관계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대립관계 안에서 자신을 지켜 따로 유지할 수 있다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규정이다. 그러나 이것이(=이렇게 규정된 사물이) [의식이 말하는] 사물이 되는 것은, 달리 표현하면 홀로 뚝 떨어져 따로 존재하는 하나(für sich seinendes Eins)가 되는 것은 오직 다른 것들을 향하는 이런 관계 안에 들어서 있지 않는 한에서이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관계 안에서는 [홀로 있기 보다는] 오히려 다른 것과의 연계(der Zusammenhang mit anderem)가 [개념적으로] 정립되어 있고, 나아가 다른 것과의 연계란 홀로 있기의 존재[터전인 하나의] 소멸(das Aufhören des Fürsichseins)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물은 타자와의 관계를 임의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자존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절대적인(=대립하는 존재자의 자존성을 담보하는 존재자의 속성, 성질 등과 전혀 무관한] 관(계)성(Charakter)과 그런 [pros ti적인] 대립을 두루 이루면서(durch) 다른 것들과 관계하는 가운데 존재하는 것으로서 본질(개념)적으로 단지 이런 관계일 뿐이다. 이런 관계란 사물의 자립성에 대한 부정으로서 의식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aber) [사물의 <또한>과 <하나>라는 모순을 한꺼번에 해결해 주기 보다는] 오히려 사물이 자신의 본질적인 성질(wesentliche Eigenschaft=absoluter Charakter)을 두루 충족하는 가운데(durch) 푹 꺼지는 것이다.”
2021/05/15 |
2021/03/10 |
2021/03/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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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6 |
[앞의 문장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 몇 가지]
1. “soll”
앞의 문장에서 “soll”이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지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다.
여기서는 약간 조롱하는 의미가 있는 것 같다. “해봐. 네가 원하는 대로 될 것 같아?” 뭐 이 정도가 아닌가 한다.
sollen은 wollen과 함께 행위의 대상에 깊은 관심을 표현하는 조동사다. 이 관심은 의도하는 바가 현실화되는, 달리 표현하면 의도가 대상에 현실적으로 적용되고 관철되는 것에 삼투되어 있는 관여(Interesse)다. 단지 이렇게 관여하는 주체가 다를 뿐이다. wollen은 행위자가 스스로 그렇게 관여하는 것을 표현하는 반면 sollen은 제3자의 관여를 표현한다.
여기서 사물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하는 주체는 의식이다. 이건 <정신현상학>에서 진부한 사실이지만 매우 중요하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 하자면 세계와의 관계를 ‘sinnliche Gewissheit’(감각적 확신)으로 시작한 의식이다. 세계와의 관계를 ‘앎’(Wissen=지)의 관계로 시작한 의식이다. 바라보는 의식이다. 이건 세계와의 관계를 ‘감각적 확신’이 아니라 ‘sinnliche Tätigkeit’(감성적 활동)라고 규정하는 유물론과 대립된다. 이것 또한 진부한 사실이지만 매우 중요하다.
관념론과 유물론과의 관계가 ‘pros ti’적인 관계일까? 암튼, 양자에게 ‘형태규정성’(Formbestimmtheit)은 매우 중요하다. 이걸 간과하면 유물론에서도 ‘sinnliche Tätigkeit’와 함께 이른바 ‘추상노동’을 시․공과 무관한 존재론적인 것으로 오해/착각할 수 있다. 그래서 가치형태분석(Wertformanalyse)이 중요하다.
2. “nun”(이제)
우리말로 번역하기 좀 까다로운 시간부사다. 중요한 건 <정신현상학>의 규정들이 이런 시간지수(Zeitindex)를 갖는다는 점이다.
3. “von allen anderen”
왜 복수인지, 게다고 ‘모든’인지 모르겠다. 단수였으면 좋겠는데...
2021/05/15 |
2021/03/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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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8 |
2021/02/06 |
[im Gegensatz mit]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im Gegensatz mit’는 좀 이상한 표현이다. 보통 ‘im Gegensatz zu’라고 한다. 헤겔 당시엔 ‘im Gegensatz mit’란 표현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나? 그랬다면 왜? ‘대립’에 대한 이해가 당시 지금과 좀 달라서?
그건 잘 모르겠고, 관계자(pros ti)상의 대립에 어떤 특성이 있는지 살펴보자.
아리스토텔레스한테 또 물어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론> 10장에서 대립(antikeimenon)을 분석한다. 여기서 우리에게 중요한 점은 ‘관계자의 대립’이 다른 대립으로 설명되지 않는 고유한 대립이란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대립을 ‘이것이 저것에’(‘heteron heterōi’) 대립하는(antikeisthai) 것으로서 한 쌍을 이루는 것이라고 시사하고 대립을 네 가지로 구분한다. 관계자의 대립(ta pros ti), (흑백과 같은) 반대항의 대립(ta enantia), (시력이 없음과 있음과 같은) 결여와 가짐(sterēsis kai hexis)의 대립, 그리고 긍정과 부정의 대립(kataphasis kai apophasis) 이 네 가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관계자의 대립과 그 외의 다른 대립들과의 차이는 ‘한 쌍’을 이루는 양식에 있다고 말하는 것 갔다. 관계자의 대립은 한 쌍을 이루는 그 어는 한쪽의 {성질}과 관계하는 대립이 아닌 반면 다른 대립들은 대립관계의 한쪽과 연계되어 있다. 결여와 가짐의 대립과 반대항의 대립은 [일개] 존재자의 존재양식을 전제하는 대립이고, 긍정과 부정의 대립은 존재자와 무관하지만 한 사람이 동시에 ‘예’ ‘아니다’ 할 수 없는, 한 주어에 동시에 긍정(앉아 있다)과 부정(앉아 있지 않다)을 부여할 수 없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한 쌍’이다.
이런 관계자의 특유한 대립을 표현하기 위해서 ‘im Gegensatz zu’하지 않고
‘im Gegensatz mit’라고 했나?
암튼, 문제의 문장을 계속해서 이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 같다.
“Diese Bestimmtheit, welche den wesentlichen Charakter des Dings ausmacht und es von allen andern unterscheidet, ist nun so bestimmt, daß das Ding dadurch im Gegensatze mit andern ist, aber sich darin für sich erhalten soll.”
“사물의 필연(개념)적인 관(계)성을 이루고 사물을 다른 것들로부터 구별하는 [단지] 관계에서[만] 드러나는 규정(성질)이란, 사물이 바로 그 [관계적/사회적] 규정을 통하여 다른 것과 한 쌍이 되는 [ta pros ti적인] 대립관계를 이루지만, 사물이 [그런 대립관계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대립관계 안에서 자신을 지켜 따로 유지할 수 있다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erhalten soll”) 규정이다.”
2021/05/15 |
2021/03/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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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8 |
2021/02/06 |
[범주론에 대한 추가 토론과 가치형태분석은 뒤로 하고 다시 번역으로 되돌아 가 보자.]
“Diese Bestimmtheit, welche den wesentlichen Charakter des Dings ausmacht und es von allen andern unterscheidet, ist nun so bestimmt, daß das Ding dadurch im Gegensatze mit andern ist, aber sich darin für sich erhalten soll.”
‘diese Bestimmtheit’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존재론적인] pros ti와 같은 것으로 읽을 수 있겠다. 처음에 ‘(피)규정성’으로 번역했는데, ‘관계적인 규정성’혹은 ‘관계에서[만] 드러나는 성질’ 정도로 번역될 수 있겠다.
이런 ‘관계에서[만] 드러나는 성질’이 사물의 ‘wesentlicher Charakter’를 이룬다고 하는데, 여기서 ‘wesentlich’란 말이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잡히지 않는다. 본질적인? 여기서 ‘본질’이란 게 뭘 의미하지?
아리스토텔레스가 뭐라고 하는지 물어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론> 7장에서 pros ti를 존재론적으로 제한하여 정의하기 전에 pros ti의 성질을 살펴본다. 네 가지로 구분되는데, [한 쌍을 이루는 관계자들 간의] 반대 항으로서의 대립(enantiotēs), [극과 극간에 연속성으로 이어지는] 단계성(to mãllon/더 많음-to hētton/더 적음), [한 쌍을 이루는 관계자들의] 가역성, 그리고 [한 쌍을 이루는 관계자들의] 동근원성을 토론한다. 근데 가역성이 ‘wesentlicher Charakter’이란 표현에서 ‘본질적’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철수는 노예다. 왜? 철수가 노예가 되는 것은 그가 노예라는 고유의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 아니다. 필연적으로 주인의 노예다. 주인이 사라지면 노예가 있을 수 없고, 역으로 노예가 사라지면 주인이 있을 수 없다. 관계자는 [개념적으로!] [한 쌍을 이루는] 다른 관계자를 마주하고 있다. 주인과 노예는 주․노의 사회적 관계의 파기와 함께 필연적으로 사라지는 관계자들이다.
철수는 [어떤] 사람의 노예다. 이건 필연이 아니라 우연이다. [어떤] 사람과의 관계는 관계자(pros ti)의 ‘본질’이 아니다. 노예가 사라진다고 해서 사람이 사라지는 게 아니고, [어떤] 사람이 사라진다고 해서 노예가 사라지는 게 아니다. 이런 우연적인(비본질적인) 관계에서는 앞에서와 같은 가역성이 성립되지 않는다.
이런 가역성은 pros ti의 존재론적 정의에서 이미 엿볼 수 있다.
“esti ta pros ti hois to einai tauton esti tōi pros ti pōs echein.”
정의대상(definiendum, 즉 pros ti)이 정의하는 항(definiens)에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정의의 법칙을 어긴 정의다.
<범주론> 주석자 안드로니코스는 이런 ‘오류’를 지적하고 위의 정의에서 두 번째 pros ti를 pros heteron으로 대치하는 걸 제안한다. (참조: Richard Sorabji(간행인), Aristotle Transformed, The Ancient Commentators and Their Influence, New York 1990, 72쪽, 주석 95)
근데 아리스토텔레스가 그걸 몰랐을까? 알았다면, 왜 그런 ‘오류’를 범하면서까지 재귀적인(recursive) 정의를 했을까?
(노예 -> 주인) -> (주인 -> 노예)
이 관계가 기호논리학적으로 매끈하게 설명될 수 있을까? 아니면 ‘역사’로 내려가야 하나?
암튼, 번역으로 되돌아 가 보자.
“Diese Bestimmtheit, welche den wesentlichen Charakter des Dings ausmacht und es von allen andern unterscheidet, ist nun so bestimmt, daß das Ding dadurch im Gegensatze mit andern ist, aber sich darin für sich erhalten soll.”
이 문장의 첫 부분은 우선 다음과 같이 번역될 수 있을 것 같다.
“사물의 필연적인(개념적인) 관(계)성을 이루고 사물을 다른 것들로부터 구별하는 관계에서[만] 드러나는 성질은 이렇게 규정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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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s ti]
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론> 7장에서 pros ti를 두 번 정의한다.
첫 번째 정의는 말을 주고받을 때 필요한 논리적인 것과 존재론적인 것이 혼합된 포괄적인 정의다. 근데 pros ti를 고유한 카테고리로 정립하고자 하는 아리스토텔레스는 문제에 부딪힌다. 논리적인 차원에서의 pros ti와 존재론적 차원에서의 pros ti가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pros ti를 존재론적으로 제한해서 두 번째 정의를 내린다.
첫 번째 정의는 다음과 같다.
[사유에 의해서 파악되는 보편적인 것을 보편자(Allgemeines)라고 일컫는 것에 기대여 사물들 간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pros ti’(무엇에 대하여)를 "관계자'(=Relatives)로 번역한다. - 역자]
“관계자(pros ti)는 다음과 같이 생겨먹은 것을 두고 사용하는 말인데, [어떤 말인가 하면],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 그렇게 생겨먹은 것으로 존재함이 다른 것에 귀속되는(다른 것에 의해서 각인되는) 식으로 존재한다고(heterōn einai) 말하거나 또는 그 외의 어떤 식으로든 다른 것에 대하여(pros heteron/다른 것과의 관계에서) 그렇다고 말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예컨대, <더 큼>이란 [성질]은 [하나로서의 그것에 대하여 그것이 그렇게 생겨먹었다는 식으로 사용되는 말이 아니라] [한 쌍을 이루는] 다른 것에 의해 각인되는 식으로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저것보다 더 크다고 말하는 식이다. 마찬가지로 <두 배됨>이란 [성질] 역시 다른 것에 의해서 각인되는 식으로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다. 이것은 저것의 두 배다고 말하는 식이다.”
두 번째 정의는 이렇다.
“관계자(ta pros ti)의 [존재양식은] 그에게 존재함(to einai)이란 어떤 식으로든 무엇을 대하는(tōi pros ti pōs echein=무엇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하는) 것과 일치하는 것이다(=존재가 다름 아닌 오직 관계함일 뿐이다).
(ἔστι τὰ πρός τι οἷς τὸ εἶναι ταὐτόν ἐστι τῷ πρός τί πως ἔχειν)
2021/05/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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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akter] - 이어서
앞서 인용한 곳에서 심플리키우스는 ‘pros ti'는 그 자체(kathauta)로 있지도 않고, 뚝 떨어져 홀로(apolyta=absolut/절대적) 있지도 않으며, 필히 차이의 관계에(kata diaphoran) 있는 것으로서 이런저런 Charakter를 통해서(meta tinos characteros) 인식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pros ti란 고유한 charakter에 따라서 상호관계에 놓인 것들이(hosa kata oikeion charactera diakeimena) 어떤 식으로든 [자기 자신으로부터 고개를 돌려/aponeuei] [특정한] 다른 것을 향할/대할(pros heteron) 때, 즉 다른 것을 마주할 때(aponeuei) 생기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한다. (원문 참조: Theologisches Wörterbuch zum Neuen Testament, Band IX, S. 409)
Charaktēr에는 도구적인 의미가 있다. χαρασσειν(뾰쪽하게 하다)에서 파생되어 ‘나무나 돌 판에 글자를 파 새기다’란 의미에서 ‘동전 주조’의 용어로 발전한 말이다. 접미어 -ηρ(ēr)는 행위자를 명시한다. 그래서 Charakter는 어원적으로 charassein하는 행위자다. 그러나 동전을 주조하기 시작한 시기에 이르러 행위자를 명시하는 접미어가 -ηρ(ēr)에서 -ης(ēs)로 (예: politēs=폴리스에 참여하는 사람/시민) 변한 후 -ηρ는 도구적인 의미를 명시하게 된 것으로 간주된다. 이런 관계로 Charakter는 ‘뭔가에 뭔가를 각인하는 도구’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동전 주조에서 동전의 의미로 발전하고, 복수로 사용하면 재산이란 의미까지 갖게 된다. 나아가 소유를 명시하는 ‘도장 찍기’(예컨대 가축이나 노예), 혹은 소속을 명시하는 ‘도장 찍기’(예컨대 용병)에서 뭔가를 증명하는 ‘도장 찍기’로까지 발전한다. 이런 맥락에서 Charakter는 기호(Zeichen)란 의미까지 갖게 되는데, 뭔가를 명시하는 기호(=도장)에서 유래된 기호(=각인된 자국)라는 면에서 찍힌 형태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Charakter는 또한 사본(복제)이 되기도 한다. (참조 같은 곳, 407f.)
2021/05/15 |
2021/03/10 |
2021/03/09 |
2021/03/08 |
2021/02/06 |
[Charakter]
‘성격(性格)’으로 번역해 놓고 무슨 말인지 잘 안 잡혀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소갈머리’(=속알머리)로 번역했다.
개별인의 인품/성품이란 의미로서의 ‘Charakter’는 독일에서, 특히 공론장에서, 이제 거의 사용되지 않고 ‘Persönlichkeit’(personality)로 대치된 것 같다. 나치가 게르만 ‘민족의 성품’(‘Volkscharkater’)과 함께 그 구성원 하나하나 ‘성품’의 우월성을 운운하고, 반면 게르만 민족 외 타 민족과 그 구성원들을 ‘charakterlos’(‘Charakter’가 없는)로 규정하고 다 싹 쓸어버리려고 했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한다. ‘Charakter’란 말의 맛이 비리다.
이젠 축구 선수들이 즐겨 쓰는 단어가 된 것 같다. ‘이번 경기에서 우린 Charakter'를 보여주었다.’ 흔히 듣는 문구다. 상대의 월등한 실력 혹은 자기 팀 선수의 퇴장 또는 부상 등으로 힘겨운 경기였지만 투혼했다는 정도의 의미다.
암튼, ‘Charakter’란 말은 이렇게 상대와의 겨루기 상황에서 나타나는 그 ‘무엇’을 명시하는 것 같다.
‘Charakter’가 이렇게 겨루기 등 상대/타자와의 관계에서[만] 드러나는/나타나는 것이라면, 흔한 의미로서의 ‘성질’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나쁜 것을 보고 분노하는 사람을 두고 ‘저 사람 성질 더럽다’하면 뭔가 좀 이상하다. 분노하는 사람이 분노하는 것은 그 사람의 속성이 ‘분노’여서가 아니라, 나쁜 것을 대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나쁜 것을 대하는, 나쁜 것과 관계하는 상황에서[만] 표출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표출은 일반적인 ‘기체-본질/성질’이란 서술구조(predicative structure)로 설명이 안 된다. [기독교]신학적으로 이야기하자면 Manifestation(현현)에 가까운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엔치클로페디아>에서 헤겔은 정신을 Manifestation이라고 하기도 한다. [벤야민이 말하는 <신적 폭력>도 이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겠다.]
이런 구조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어쩜 <자본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가치형태분석(Wertformanalyse)을 참조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한 개 사물의 속성이 아니라 두 개 사물의 관계에서[만] 드러나는 것을 처음으로 명확하게 분석한 사람은 주지하다시피 아리스토텔레스다. <범주론> 7장에서 ‘관계자’(pros ti)를 분석한다.
헤겔이 이야기하는 ‘Charakter’와 아리스토텔레스가 <범주론>에서 이야기하는 ‘pros ti’는 내용상 같은 것 같다. 양자가 같다는 힌트는 <범주론>을 주해한 심플리키우스에서 얻을 수 있다. 그는 ‘pros ti’와 ‘χαρακτήρ’(Charaktér)를 동의어로 사용한다(Karl Kalbfleisch (Hrsg.): Simplicii in Aristotelis categorias commentarium. Berlin 1907, S. 166 14ff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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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원문]
“Diese Bestimmtheit, welche den wesentlichen Charakter des Dings ausmacht und es von allen andern unterscheidet, ist nun so bestimmt, daß das Ding dadurch im Gegensatze mit andern ist, aber sich darin für sich erhalten soll. Ding aber, oder für sich seiendes Eins ist es nur, insofern es nicht in dieser Beziehung auf andere steht; denn in dieser Beziehung ist vielmehr der Zusammenhang mit anderem gesetzt, und Zusammenhang mit anderem ist das Aufhören des Fürsichseins. Durch den absoluten Charakter gerade und seine Entgegensetzung verhält es sich zu andern, und ist wesentlich nur dies Verhalten; das Verhältnis aber ist die Negation seiner Selbstständigkeit und das Ding geht vielmehr durch seine wesentliche Eigenschaft zugrunde.”
1. 첫 문장
“Diese Bestimmtheit, welche den wesentlichen Charakter des Dings ausmacht und es von allen andern unterscheidet, ist nun so bestimmt, daß das Ding dadurch im Gegensatze mit andern ist, aber sich darin für sich erhalten soll.”
[번역 첫 시도]
“이와 같은 사물의 (피)규정성(Bestimmtheit)은 이제 사물의 주된(wesentlich) 소갈머리(Charakter)를 이루고 사물을 모든 다른 사물들로부터 구별해 주는 [재귀적] 규정성으로서 다음과 같은 두 갈래의 축을 충족하도록 규정된 것인데, 바로 그 (피)규정성을 통하여 사물이 다른 사물들과 대립하는 한 쌍을 이루지만 그 대립 안에서 자기 자신을 독자적으로 지켜 유지하도록 하는 (피)규정성이다.”
[문법적으로 이상한 표현]
- “im Gegensatz mit”
이 표현이 생소하다. 일반적으로 ‘im Gegensatz zu’을 사용한다. 영어에서는 ‘in contrast with’와 ‘in contrast to’란 표현이 둘 다 문법적으로 맞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의미상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im Gegensatz mit’란 표현이 단지 문법적으로 좀 이상한 표현인지, 아니면 전치사 ‘zu’가 ‘mit’로 대치된 배후에는 사태적인 이유가 있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문장구조상 좀 이상한 것]
‘A가 B가 되게 하는 게 C인데, C는 다시 A가 B가 되게끔 규정되어야 한다.’란 구조다. 뭔가 뱀이 자기꼬리를 먹어 들어가는 것 같다.
[여기서 헤겔이 말하는 ‘정신’이란 것이 태동하나?]
헤겔은 <엔치클로페디아> 3권 <정신철학> §381/382에서 정신을 “im anderen bei sich selbst sein”이라고 한다. 타자 속에서 자기를 상실하지 않고 그 안에서 자기를 대하듯 있는 상태다. 이걸 자유라고 하고. 이런 정신과 유사한 구조가 위 문장에서 엿보인다.
첨언하자며 미샤엘 토이니쎈(Michael Theunissen)은 위의 표현에서 자유와 함께 사랑의 구조를 읽는다. “im anderen bei sich selbst sein”에서 타자를 강조하면 ‘타자 속에서 [비로소] 자기를 찾는 사랑’이란 해석이 가능하고, 자기 자신을 강조하면 ‘타자 속에서[도] 자기를 대하는 자유’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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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
아, 이제 똥 싸고 x 까는 짓이 펼쳐지겠네. [이런 쌍욕은 항상 품위를 유지하는 아도르노가 절대 하지 않았겠지만...]. 의식아, 넌 사물을 순수한 하나로 고수하기 위해서 사물로 하여금 ‘Das Anderssein’(=‘Nichtidentische’)을 배설하게(absondern) 하지만, 사물이 똥 싸고 아무리 뒤를 닦아도 똥이 떨어지지 않는다. 의식이(헤겔이?) 사물로 하여금 똥 닦기를 어떻게 하게 하는지 보자. 역겨운 ‘본질-비본질’을 운운하겠지, 꼬리에 계급장 딱지를 달아주듯이 ...
[의식과 이중창을 하기 시작하는 보이스 오버]
이제 [의식 내재적으로] 실재하는 대상의(gegenständliches Wesen) 모순은, 갈라져, [두 개의] 분리/차별된 사물들에게로 할당된 상태다. [이렇게 모순이 하나의 사물에서 말소된 걸 두고 구별까지 말소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구별은 분명(doch) [사물이 자기를 순수한 하나로 고수하기 위해서 구별을 자기를 ‘더럽히는’ 모순(물)로 간주하고 배설해(absondern) 버렸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darum) [그 배설물은 말소되지 않고] 유리되어(absondern) 고립된(einzeln) 사물(=Anderssein)에게 뚝(selbst)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 과정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보자(also). 분리/차별된(verschieden) 사물들은 대자적으로 정립된 것들로서(=따로따로 노는 것들로서) [이들 간에] 충돌이 일어나기 마련인데, 이때 충돌은 각 사물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분리/차별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물과 분리/차별된 것이 되게 하여 서로(자기 자신과의 대립이 아니라 타자와) 대립하게 하는 충돌이다. 이런 관계상 각 사물 자체는 일개의 구별된 것으로 규정된 상태이며 [이런 상태에서 구별이 실재한다면] 이 실재하는 [꼰대-들러리라는] 구별은(wesentlicher Unterschied) [사물 자체에서 기인할 수 없고 단지] [마치 갓난아이가 똥 싸고 자신을 똥으로 범벅되게 하듯이] 사물이 [배설하고/absondern] 직접 거느리는 다른 사물들로부터(von den andern an ihm) 취한 것이다. 그래서 이 취함은 사물 자체에(an ihm selbst) 대립이 있는 것처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대자적인 사물이 [독자적인 하나라는] 단순한 규정으로 고수(유지)되게 취하는 것이며, 이런 단순한 규정은 [주시하다시피] [배설하는] 사물을 [배설된] 사물들로부터 구별하는 [배설하는] 사물의 꼰대적인(wesentlich) 성격을 이루는 것이다. 사실 그렇다. [배설하는] 사물에 차이(Verschiedenheit)가 [직접] 안겨져(an ihm) 있기 때문에, 바로 그 차이가 필연적으로 형형색색한 짜임새(Beschaffenheit)를 갖춘 현실적인(wirklich) 구별로 [배설하는] 사물에서 드러나야 한다. 단(allein), [하나라는] 규정성이 [배설하는] 사물의 꼰대(Wesen)를 이루고, 또 바로 이 규정성에 기대어 [배설하는] 사물이 자신을 다른 사물들과 구별하고 독존하므로 위와 같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sonstig:<=>umsonst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염두(念頭)한’(für nichts)이란 의미임), 형형색색한 짜임새(Beschaffenheit)는 [아도르노가 주목하고 눈을 떼지 않았던 ‘하루살이 존재’(ephemeroi)와 같은] 있으나마나한 것(das Unwesentliche)이다. 이런 관계로 [배설하는] 사물이 그의 통일성 안에서 이중의 <하는 한에서>(das gedoppelte Insofern)를 직접 거느리는(an ihm) 게 틀림없지만 단지 그 둘은 서로 다른 가치를 갖는다[!!!]. 이렇게 가치를 [마치 worth ⊥ value로 대립시키듯이] [이리저리] 달리 함으로써 이중의 <하는 한에서> 간의 대립관계(Entgegengesetztsein)가 결국 [배설하는] 사물 자체 [안에서 일어나는] 진정한(wirklich) 대립(Entgegensetzung)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배설하는] 사물이 대립관계를 빗는 것은 절 대 적인 구별(a b s o l u t e r Unterschied=극으로 치닫는 Für sich/‘독자성’)에 의해서 대립[관계]에 들어가는 한에서만 그렇고, 이때 [배설하는] 사물은 이런 대립을 그 밖의 다른 사물과의 관계에서 갖는 것이 된다. 아무런 가치가 없는(sonstig:<=>value상) 형형색색함(Mannigfaltigkeit:<=> 사용가치상)은 사물의 필연적인 [구성요소]로서, [마치 교환관계에서 교환이 이루어지게 하는 사용가치가 필연적이듯이] 사물에 없어서는 안 되지만, [value상] 있으나마나한(unwesentlich) 것이 된다.
2021/05/15 |
2021/03/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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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8 |
2021/02/06 |
[보이스 오버]
(aside)
불쌍한 의식. 네가 가는 길은 필히 정신분열증으로 가는 길이다. 봐라. 네가 자기동일성이라고 했던 사물이 자기 안에서 분열을 일으키고 있다. Il n'est pas comme il est. Il est l'autre. 이건 사실 네 분열이다. 넌 아직 네 안의 분열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기다려. 너도 ‘Je suis l'autre.’할 날이 머지않다. 그때 네가 어떻게 처신할지 궁금하다. 당당하게 나 정신분열환자 할지, 네 정신분열증을 ‘건강한 생각’(gesunder Menschenverstand/상식)으로 가장할지, 아니면 ‘내가 아닌 것으로 존재해야 하고 나인 것으로 존재하지 못하는’(zu sein, was man nicht ist, und nicht zu sein, was man ist) 실존의 구렁텅이 앞에서 공포에 질린 나머지 키에르케고르와 같이 믿음으로 도주할지, 아니면 공포에 질린 뒷걸음질(Rückkehr)이 아니라 네 자신을 뒤집어(Umkehr:<=>복음서에서는 ‘회개’, 유물론적으로는 머리로 걷지 않고 발로 걷게 하는 뒤집기) 역사적인 유적존재로 널 바로 세울지 궁금하다.
결국 의식은 두 번째 (첫 번째 되풀이) 지각함에서의 처신(태도)양식, 즉 참다운 것으로서의 사물은 자기 동일한 것으로, 반면 자기 자신은 자기 비동일적인 것으로, 즉 [지각함에 ‘feeling’으로 찰싹 붙어 지각함과 무분별한 상태인] 자기동일성에서 벗어나 자기 안으로 뒷걸음질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에서도 역시 스스로 벗어난 상태로서 이제 사물이란 그에게(의식에게) 이전에는 사물의 몫과 의식의 몫으로 분리되어 나뉘어졌던 운동의 전체가 된다. 사물은 자기 안으로 반성된 하나다. [그래서] 사물은 대자적이다. 나아가(aber) 사물은 동시에(auch/또한:<=>동시에) 대타적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und zwar) [내가 내 자신을 바라볼 때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이 내가 내 자신에게 낯선(=다른) 사람이 되듯이] 사물은 자기가 마치 타자에 대하여 있듯이(als es für Anderes ist/대타적) 자기 자신에게(대자적으로) 타자가(ein Anderes für sich) 된다. 따라서 사물은 대자적이면서 동시에(auch) 대타적인 이중의 분리된(=‘이중’간 아무런 매개가 없는) 존재다. 근데 사물은 하나이지 않았던가? 하나(로)있음(Einssein)은 분명(aber) 이와 같은 사물의 분리(Verschiedenheit)와 모순을 빗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의식이 [사물의 이런 모순을 파기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이와 같은 하나-안으로-정립함(In-eins-setzen)을 자기 탓으로 돌려 사물에서 멀리 해야 하지 않는가? 그래서 의식은 이렇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 즉 사물이 대자적으로 있는 한(insofern) 대타적으로 있지 않다고? 그러나 [의식이 사물을 이런 모순에서 구제하기 위해서 아무리 요리저리 빠져나갈 궁리를 해도] 이것 하나에 걸리는데(allein), 그건 아무튼 사물 자체에 역시, 의식이 [스스로] 경험한 것처럼, 하나(로)있음(Einssein)이 귀속된다는 점이다. [즉] 사물은 자기 안으로 반성된 것을 [의식의 것이 아니라] 자기 것으로(wesentlich) 소유한다(Das Ding ist wesentlich in sich reflektiert). [그래서] 결국 서로 아랑곳하지 않는(무관한) 구별, 즉 <또한>은 틀림없이 하나(로)있음(Einssein)으로서의 사물과 맞닿는 것이다. 그러나 양자(=Einssein ⊥ das Auch)가 [전체 안에서 통일체를 이루는 Momente로서 서로 구별된 것이 아니라] 차별된/분리된(verschieden) 것이므로 똑같은(=일개의) 사물과 맞닿아 떨어질 수 없고, 어디까지나 차별된/분리된 사물들과 맞닿아 떨어진다. [의식 내재적으로] 실재하는 대상(an dem gegenständlichen Wesen)에서 추상적으로(überhaupt) 드러나는 모순은 [두 갈래로] 찢어져서 두 개의 대상에 할당된 모순이다. 다시 말해서(also) 사물은 즉자대자적, 즉 자기 자신과 동일한 것임이 틀림없지만 이런 자기 자신과의 통일(Einheit mit sich selbst)이 다른 사물들에 의해서 [요동되어] 파괴되는(stören/‘어지럽게 하다’, '흩어지게 하다', '파괴하다'등의 어원적 의미가 있음) 것이다. 이렇게 사물의 통일성(Einheit)이 고수(유지)되고, 동시에 [추상적인] 통일성을 파괴하는 [자기 자신과의 통일이 아닌 모습으로 현존(할 수밖에 없는)하는] 다른 존재(das Anderssein)도 허락(유지)되는데, [단지] [추상적인 대상인] 사물 밖으로뿐만 아니라 의식 밖으로까지 [추방된] 상태로(만) 허락(유지)되는 것이다.
2021/05/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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