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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

* 이 글은 쭌모님의 [전 막스를 읽은적이 없습니다만..]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원제 : Monster
감독 : 패티 젠킨스
주연 : 샤를리즈 테론, 크리스티나 리치


몬스터

한 인간이 괴물이 되어가는 과정.
성매매가 노동으로 규정될 수 있는가 이전에 고민되어져야 할 지점.
자신의 몸이 섹스(여러가지 의미의 섹스행위가 해당가능하다)를 통해 돈으로 가치환원시키게 되는데는 여러가지 사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과정중에 겪게되는 인간성의 황폐화.
이것에 대해서 한번 정도 살펴보는 것은 어떨까?

 

<몬스터>
가족을 지키기 위해 어쩔수 없이 선택했던 매춘행위.
돈을 벌수 있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는가라는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기는 쉬울수도 있겠지만 빠른 시간안에 고액을 벌기에는 어린나이의 여성에게는 또는 다른 방법을 찾는 것조차 모르는 무지한 여자아이에게는 합리적 이유가 가능하지 않을는지...과연 그녀의 선택이 옳은가 그른가의 답을 내리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영화가 잘못된 선택의 결말에 대해서만 얘기하는건 아니겠지만 매춘을 바라보는 사회와 그로 인해 황폐화되어가는 인간에 대한 얘기라는 것.
 
좀더 영화를 들여다보자.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한 행위로 인해 가족에게 버림받는다면...?
가족을 위한 자신의 희생의 (분명 희생이다. 매춘행위가 좋았을리 만무. 그건 곧 밝혀진다)대가는 곧 가족의 배신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가족과의 관계는 유지 되기 힘들다.
그녀에게 그건 어떤 의미였을까?

 

끊임없이 남성에게 버림받고 상처받는 여성. 괴물이 되다
여성을 만나다.
동성애에 대한 편견에 휩싸인 그녀지만 자신에게 인간으로 다가오는 셀비는 때로는 따뜻한 친구로, 때로는 연인으로 사랑스러움을 지닌 여성이었다.
그들의 고결한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는 추하고 더러운 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녀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사랑하는 그녀와의 여행경비를 구하기 위해 선택한 마지막 매춘행위는 그녀에게 괴물로 변신하는 신호탄이 된다. 폭력적 남성, 변태적 섹스행위. 겉으로는 멀쩡하나 한적하고 조용한 뒤안길로만 가면 괴물로 돌변하는 남성에게 그녀는 더 무서운 괴물로 변신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잠깐 샛길.
샤를레즈 테론. 그녀의 연기는 정말 압권이다.
그 빛나는 금발을 우스꽝스럽게 뒤로 빗어올리며 울퉁불퉁한 얼굴선을 만들기위해 입을 최대한 아래로 과묵하게 쓸어내리는 표정은 그녀의 아름다운 눈과 코도 묻혀버릴만큼 흉물스런 외모로 변경가능하다. 그건 정말 놀라운 변신이었다. 연기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에게 빠져있다보면 아름다운 그녀는 보이지 않고 세상사에 찌든 허수룩한 듯 흉물스럽고 일그러진 괴물이 보인다.


 

평범하게 남들처럼 집도 사고 번듯한 직업도 가지며 살아보고자 선택한 마지막 매춘. 그러나 남성은 그녀의 숨겨진 분노를 끌어내는 매개체가 되고... 자신의 폭력적 분노로 인해 내질르는 그녀의 절규는 세상이 환상적이지도 희망적이도 않은 처절하고 냉정한 현실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는 한탄이었고, 원하지 않게 발생하는 부조리한 현상에 대한 반항의 몸짓이었던 같다. 그래서 그녀의 순간적 비명은 온몸을 전율케 하는 처절한 절규였던 것이다.
그녀를 나락으로 떨어지게 하는 건 과연 무엇일까?
그건 돈으로 성을 사고파는 행위를 할 수밖에 없었던 지지리 못사는 부모를 만난 한 개인의 피할 수 없는 거대한 운명 때문만일까? 물론 아니다.
개인만의 능력부족이 아닌 조직화되고 견고한 사회구조적인 문제들...
부자가 있으면 빈자가 있는 것이 자본주의 생존원리이고,
몸파는 여성이 있으면 몸을 돈으로 주고 사는 남성이 있는 것이고(역의 가능성도 존재하겠지만…),
매춘이 아닌 다른 방식의 삶을 선택하기 쉽지 않은 사회시스템. 모 그런것들이 전제되어 있는 거지.

 

권력관계의 역전
억압과 소외로 점철된 자아는 욕망의 극단적 표출로 살인이라는 기제를 선택한다.
남성에 의해, 혹은 가족과 이웃에 의해 위축된 자아는 살인을 행함으로 인해 권력관계가 역전될 수 있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한번이 어렵지 두번세번째는 즐기게 되는 것이 중독의 쾌감인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은 상대적인 건가.
매춘여성에게서 처음으로 섹스를 경험하는 남성에게는 아름답지는 않지만 본능해결에 기꺼이 도움을 주는데 충실하고, 가족에 헌신적인 나이든 가장은 어쨌든 피해버린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궁지의 사각에서는 괴물로 변신한 자신을 완성시켜버린다.
선한 인간으로서의 본성과 후천적으로 길들여진 괴물로서의 본능을 끄집어 내고자하는 자아사이에서 절규하는 그녀는 결국 괴물로서의 자아를 완성시킨 것이다.

 

 

성매매로 인해 황폐화되어가는 그녀가 보이다
사랑하는 그녀와의 도피여행은 현실이다.
잠자리를 유지해야하고, 주린 배를 채워야 하는 현실이다.
사랑하는 그녀를 위해 경제력을 지녀야 하는건 그녀의 선택이기도 하지만 사랑하는 그녀, 셀비가 원하는 것이기도 한다. 사랑하는 그녀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야 한다.
남들처럼 평범한 삶을 꾸리려면 버젓한 직업이 있어야 하지만 그녀가 배운건,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결국 매춘이 된다.
그녀는 읊조린다.
매춘이 쉽지 않다는 것. 그녀의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 선택한 어쩔 수 없는 수단이지만 그녀는 점점 여성으로서, 사랑하는 이로서, 인간으로서의 자신에게 괴롭다.
매번 괴롭다.
흐흠…
신중한 생각이 필요한 지점이다.

 

성매매가 노동인가?
성매매여성=성노동자?
성매매=성노동?
인간=상품?

그렇다면 성행위는 생산이고 인간의 몸은 생산도구인가?
상품의 가치는 무엇으로 매길까? 서로의 합의에 의해? 임금 가이드라인이라도 만들어야 하나?
흐흠…
재미없는 상상을 해본다.
“전세계 성노동자여 단결하라”
성을 사는 소비자가 줄어들거나 착취자의 부당함에 항거하여 성노동자들이 파업이라도 하면?

허허.. 강간이 판칠꺼라고 협박하며 어여 파업을 접으라고 할건가?

 

>>사족
한가지 추천.
샤를레즈 테론의 감동적인 연기는 한번정도 봐주어야 한다.
두번째 의문.
성(性)을 바라보는 우리 시대의 의미는 무얼까 하는거?
세번째 제언.
논리적이고 진보적 논쟁은 좋다.
하지만 억지스럽고 말꼬리잡기식의 논쟁은 별루다. 논쟁을 위한 논쟁으로 보인다.
보는이에겐 측은함으로, 당사자들에게는 낭비가 된다.
서로의 발전을 위한 건설적인 논쟁은 가끔 상대방을 인정하는거 그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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