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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조작의 달인인 언론, 오호통재(嗚呼痛哉)라!

김영수의 세상뒤집기

여기는 대한뉴스입니다. 오늘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땡전뉴스입니다. 저녁 9시 정각을 알리는 소리가 울리자마자, 전두환 대통령은 오늘......! 1970-80년대 우리나라 TV방송이나 라디오 뉴스의 자화상이다. 이명박 정부는 불법투표 혹은 대리투표의 의혹을 사면서까지 방송과 미디어를 장악하였다. 대한늬우스와 땡B뉴스를 되살리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조작의 날개를 달았다. 최시중은 이 뉴스를 위해 매일 아침 청와대를 향해 문안인사를 한다. 밤새 무탈하신지요? 오늘은 어떤 행차를 하시나이까? 오늘은 MB를 어떻게 조작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최시중의 충정이다.
그들은 정치를 조작으로 간주하면서 국민을 매우 우매하고 무식한 사람으로 치부한다. 국민은 그저 조작의 대상에 불과하다. 국민은 그저 조변석개(朝變夕改)의 달인이란다. 아침엔 저항했더라도 저녁에는 동의하는 사람으로 변한단다. 훌륭한 정치인은 이러한 달인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 이명박 정부는 이를 절체절명의 과제로 삼고 있다. 이명박과 최시중은 효율적 수단인 방송과 미디어를 장악했으니 정말로 훌륭한 통치자로서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
언론은 최소한 객관성과 공정성을 자신의 생명보다 중하게 여긴다고 강조한다. 언론이 존재하는 가치란다. 오호통재(嗚呼痛哉)라! 언론이 언제 그 가치를 실현한 적이 있었던가? 언론은 그저 지배세력의 통치수단이 아니었던가? 국민은 언론에 의해 조작되는 여론의 희생양이었다. 언론은 그저 국민의 의식과 행동을 동원하면 그만이었다.
국가권력은 이러한 비난의 화살을 피하기 위해 공영방송체제를 유지한다. 소위 국민과 시청자를 위해 존재하는 방송체제다. 그런데 우리나라 공영방송은 공영으로 둔갑한 코드방송의 귀재다. 대통령의 마음이 아플 땐 어루만져주고 두려워할 땐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다. 자신들이 국민의 의식과 행동을 조작하겠다고 하면서 대통령을 안심시킨다. 어느덧 대통령은 언론의 하수인으로 전락한다. 이젠 자본언론의 노예가 되겠다고 선언하였다. 언론권력이 정치권력을 전복하는 수단이다. 언론권력이 땡B 뉴스를 보내는 이유이다. ‘오늘도 이명박 대통령은 서민행보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떡볶이 집에, 마을 슈퍼에, 동네 식당 등.’ 몸은 재래시장이지만 마음은 자본시장에 있는 이명박 대통령을 조작한다. 국민과 시청자의 방송이라고 하면서 방송을 마감하는 그들이 가증스러울 뿐이다.
공영방송은 말 그대로 국민과 시청자가 공공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소수 언론권력 엘리트들이 국민을 조작하는 것은 공영이 아니다. 가장 쉬운 방법이 있다. 제한적인 개방접근(open access) 방식의 제작/편집을 전면적인 개방접근 방식의 제작/편집으로 바꾸어 내는 것이다. 국민이 직접 제작/편집한 것만을 방송하는 방식이다. 언론권력의 엘리트들이 없어도 언론사들이 운영될 수 있다. 국민은 이것 말고도 언론사들을 폐간하거나 그 기능을 일시적으로 중지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면 된다. 어떤 방송과 신문이 국민의 의식을 조작했을 경우, 국민이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언론은 종종 정정보도나 사과보도로 자신의 악행을 덮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국민 개개인이 언론을 상대로 1인 당 수천만 원 이상의 경제적인 손해배상청구권을 갖는 것도 권리를 행사하는 방식 중에 하나가 될 수 있다.   
 
김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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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박의 대한늬우스, 거 참 안습이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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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뉴스(대한 늬우스에서 넘어옴)

 

대한뉴스는 1953년부터 1994년까지 매주마다 대한민국 정부가 제작하여 영화관에서 상영했던 영상 보도물이다.

1945년 해방 이후에 조선시보로 시작해서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한전진보, 1953년 대한늬우스로 이름이 바뀌었고, 외래어 표기법 개정에 따라 대한뉴우스를 거쳐 대한뉴스로 바뀌었다.
1994년 12월 31일 2040호를 끝으로 마지막 방영해서 TV 채널인 국립방송으로 바뀌었다.
 
 

2009 대한늬우스

 

2009년 6월 25일부터 전국 극장에서 상영중이다. 아직까지 정기적으로 제작해 상영할지 여부는 결정되지 않았다.

한국방송공사의 개그콘서트 "대화가 필요해"코너의 형식을 빌려 해당 코너에 출연했던 김대희, 장동민이 출연하며 신봉선 역할에는 양희성이 출연한다. 1편 '가족여행'에서는 4대강 살리기 사업의 관광산업적 측면을, 2편 '목욕물'편에서는 수자원 관리 측면을 다루었다. 이처럼 영화관에서 정책홍보 광고를 상영하자는 아이디어는 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생과 경험과 소신이 안습~

 

이명박은 안 해본 것이 없고 모르는 것이 없는 듯하다. 일찍이 비정규직의 슬픔을 몸소 느끼기도 하고, 청소 미화원도 해봤다고 한다. 드러내놓고 자랑하진 않지만 전과가 14개나 되니, 범죄계도 빠싹할 것이다. 대통령이 풍부한 경험을 가진 것은 일단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명박의 얼토당토 않는 경험들을 들을라치면 화가 치밀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너무 안습한 나머지 불쌍하단 생각이 들기도 한다.

 

‘2009 대한늬우스’의 부활은 이명박이 서울시장 시절에 청계천 복원사업에서 극장 광고로 재미봤다며 4대강 거시기 사업에도 추진할 것을 직접 지시한 결과다.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 의문은, 평소 인생의 경험과 소신을 앞세운 이명박의 사업추진 방식을 고려할 때, ‘대한늬우스 부활’이란 구체적인 아이디어까지 이명박이 내지 않았을까? 

 

이왕 만드는 거 재밌게 만들지

 

2009 대한늬우스가 나왔다고 하니 일단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부러 극장까지 갈 순 없고 검색해서 보니, “이거 뭐야?” 라는 대실망의 한탄이 튀어나왔다. 4대강 거시기를 저지하려는 결의를 높여볼 요량으로 봤더니, 그럴 필요가 없겠더라. 아니 혹시 대중의 짜증을 유발해 4대강에 대한 관심을 아예 끊게 만드는 기대효과를 노린걸까? 기대효과가 뭐든 이명박의 목적은 4대강 거시기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다. 

 

어쨌든 완전 재미없는 대한늬우스 때문에 실망했다면, 인내심을 가지고 잠시 기다려 볼 필요가 있다. 모 블로거는 이 재미없는 대한늬우스의 재기발랄한 패러디물이 분명히 제작되고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포스트를 게제하기도 했다.


 


 

파시즘의 예술화

 

히틀러는 예술을 사랑했고, 특히 레니 리펜슈탈 감독의 나치선전 영화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해 대대적인 성공과 재미를 본 것은 잘 알려진 끔찍한 사실이다. 

 

이명박의 대한늬우스를 놓고 파시즘의 예술화란 말을 붙이기도 참 안습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무서운 사실이다. 대한늬우스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이명박은 영화산업 전반에 파시즘의 마수를 뻗치고 있다. 어느 영화제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문광부는 문광부와 산하 영진위 지원을 받는 영화제들에게 4대강 관련 작품을 선정할 것을 요구했고, 프로그램 앞에 ‘그린’이란 단어를 붙여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예산지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영화제들은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그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아마도 부산국제영화제에 가서 녹색 안내책자로 녹색 영화표를 고르고 낙동강을 배경으로 험난한 비즈니스를 신앙으로 극복하는 과정에 피어난 사랑과 우정을 그린 성령이 충만한 영화를 보게 될지도… 씨박샬랄라~

 

아니나 다를까 역시 치사하게 대한늬우스 배급(?) 과정에서도 문광부는 극장에 지불하는 광고료를 반값에 억지로 떠넘겼다는 보도도 나왔다. 

 

부활한 대한늬우스 두편이 재미없다고 방심하다가는 큰코 다칠 수 있다. 대중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4대강 정도가 아니라 유람선타고 전국 보신관광 하고 싶은 욕망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예술의 정치화

 

언제나 마찬가지지만 정치적 중립은 파시스트들이 좋아하는 말이다. 이명박이 내놓고 파시스트 짓을 하는 지금, 미래에 대한 파괴를 예찬하는 지금, 정치적 중립은 적극적 파시즘을 의미한다. 

 

예술은 정치적 판단을 정확히 해야 한다. 모 블로거가 기대하고 있는 대한늬우스의 그 재기발랄할 패러디물처럼. 용산 참사 현장의 예술가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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