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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앗이가 아닌 나의 투쟁, 우리의 투쟁을 위한 연대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은 흔히 ‘77일간의 영웅적 투쟁’으로 표현된다. ‘영웅적인 투쟁’이라고 말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정말 잘 싸웠다. 그들의 투쟁은 협상의 결과와 상관없이 노동자 민중운동진영에 많은 교훈과 가르침을 남겨주었다. 특히 연대투쟁에 대한 중요성과 무너진 지역연대전선을 시급히 복원해야 한다는 중차대한 과제를 안겨주었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수많은 투쟁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많은 투쟁에서 지역대책위, 지원대책위, 공투본 등 시민사회단체와 진보정당 등이 함께 하는 연대체를 꾸리고 공동의 대응을 모색하며 함께 싸워왔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대책위, 공투본 등의 연대체는 투쟁을 단순지원하고, 지지를 표명하는 선언적 의미로서의 연대체가 되거나 정책자문단위 혹은 정치적으로 문제를 풀기위한 창구의 역할을 하기 일쑤가 되었다.
우리가 쌍용자동차투쟁에 함께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중 하나는 앞서 말한 것처럼 강력한 지역연대전선을 구축하고 위력적인 지역투쟁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쌍용자동차투쟁이 갖는 사회적, 정치적 의미는 엄청나게 커다란 것이었고, 이명박정권의 탄압과 폭력적 공세가 얼마나 거셀지 예측되는 상황에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만의 투쟁으로 방치해서는 승산이 없다는 판단을 대부분의 운동진영이 내렸다.
따라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하고 지원하고 정당함을 호소하는 정도의 대책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쌍용자동차 노동자들과 똑같은 마음으로 일주체가 되어 함께 투쟁할 공동투쟁본부가 필요했다. 여기서 쌍용자동차 공동투쟁본부가 어떻게 활동했는지 일일이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끊임없이 투쟁의 주체로 서기위해 노력했고 지지, 지원이 아닌 하나의 주체로 투쟁을 만들어가고자 힘썼음을 밝히고 싶다.
그러나 투쟁의 막바지, 학살에 가까운 폭력침탈 속에서도 위력적인 지역투쟁전선은 만들어내지 못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거리에서의 강력한 투쟁으로 경찰과 구사대, 그리고 용역깡패가 함부로 도발할 수 없도록 해줄 것을 수없이 주문하고 갈구했었지만 우리의 연대는 고작 헬기로 최루액을 들이붓는 상황과 경찰이 도장공장 옥상위에서 살인폭력을 저지르는 것을 밖에서 바라보고 발만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상황이었다.
올 봄 쌍용자동차의 대량해고와 구조조정 이야기가 가시화될 때, 2646명의 정리해고계획이 발표되었을 때, 그리고 77일간의 처절한 투쟁을 벌여나갈 때, 운동진영에서는 쌍용자동차 투쟁을 전대미문의 투쟁이라 말했고, 이명박정권의 무덤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으며, 노동자계급의 투쟁전선을 형성하여 이후에 전국적으로 벌어질 구조조정을 막아내야 한다고 했었다. 그러나 결국 지역연대전선, 전국적 연대투쟁은 위력적이지 못했고 오히려 초라하기까지 했었다.
우리의 투쟁은 계급간의 투쟁이다. 자본주의를 지배하는 자본가들과 노동자, 민중들 사이의 투쟁이다. 그러하기에 정치적 연대가 아니라 계급적 연대, 남의 투쟁에 품앗이 하는 연대가 아니라 나의 투쟁, 우리의 투쟁을 하기 위한 연대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전선이 확장되어 가는 초석은 바로 강력한 지역연대전선이며 이를 통해 계급적 투쟁전선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쌍용자동차 투쟁에는 그 어느 투쟁보다 많은 연대가 있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절실했던 거리에서의 연대는 턱없이 부족했다. 쌍용자동차 투쟁을 거울삼아 우리는 지금부터 계급적 지역연대전선의 복원에 대하여 고민하고 토론해야 한다. 썩어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욱 심화될 노동탄압과 민중생존권 말살에 대하여 우리는 계급적 연대투쟁으로 맞서야 승리할 수 있다. 쌍용자동차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금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연대’를 바라고 있다. 지금 당장 계급적 지역연대전선을 복원하자.
우리에게 지역정치 활동은 무엇인가
지역은 생산과 재생산이 복합적으로 존재하고, 생활의 습성과 인식을 형성하는 곳이다. 어떤 이에게는 생산현장이지만, 동시에 어떤 이에게는 소비의 공간이고, 재생산의 현장이기도 하다. 지역은 공간적 의미를 넘는 삶의 환경이며 토대다. 생산/재생산, 소비의 유형을 규정하고 삶의 양태와 질을 확정하기까지도 하는 지역은 직접적인 정치투쟁의 장이다.
우리가 상정하는 지역에서의 정치활동은 삶의 양태와 질을 반자본/사회주의로 전화하려는 것이다. 삶의 양태와 질을 반자본/사회주의적 질서를 구축하려는 시도와 노력에 대한 장애와 탄압을 제거하는 것이 우리가 상정하는 지역운동이다. 이를 통해 능동적이고 민주적인 주체가 형성될 것이다.
반자본/사회주의적 지역 활동은 인민의 보편적 욕구를 기반 하면서도 동시에 이를 넘는 욕구를 형성하는 것이다. 현재의 보편적 욕구는 지극히 정당하나, 이 요구는 자본주의 질서 안에서 형성된 것이며, 이것이 보편적 욕구의 확정을 제한하고 있다. 예컨대 안정된 삶의 욕구 - 안정된 직장, 공공교육, 공공의료, 공공주택, 공공교통 등에 대한 욕구는 지극히 정당하나, 이 욕구 속에는 있는 경쟁에서의 승리, 소유 또는 투기적 욕구가 같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보편적 욕구에 부흥하면서도 자본주의 질서가 이식한 욕구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한 지점이다.
지역의 삶이 생산과 재생산의 총체적 삶으로 구성되고 인식되는 것이 중요한 지점이다. 직장 따로, 일상 따로 인 삶의 방식과 인식은 자본이 의도하는 구도이다. 노동과 일상의 종합적인 인식이 지역에서 노동현장을 분리시키지 않을 것이다.
지역민의 건강한 노동이, 안락한 노동이 지역 전체를 풍요롭게 만드는 것임은 너무도 자명한 것이다. 지역민이 노동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야만 지역의 현안에 관심을 가질 수 있고, 개입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생산현장의 문제는 지역에서 고립된 섬이고, 지역의 문제는 재생산 영역으로 정식화되고, 지역의 일은 주부나 자영업자의 문제로 협소화된다.
생산영역과 재생산의 영역이 통일적으로 합치되지 않으면 지역활동은 제한적인 자족이거나, 스스로를 기망할 가능성이 높다. 권력은 생산과 재생산영역을 통일적으로 관리하고, 계획하고 있다.
우리의 우군은 어떻게 형성될 것인가? 우리의 우군은 현재 자본주의가 진저리처지거나, 아니면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이 아니더라도 삶을 유지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 존재여야 한다. 자본주의 발전으로 인한 배제와 양극화가 존재한다하여 앞의 의식과 희망이 저절로 형성될 것인가? 단언하건데 아니다. 계급의 가능성은 가능성일 뿐이다.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와 노동력의 매매, 상품시장을 극복하는 현재의 노력과 조직화가 동반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모든 지역에서 동일한 양식을 고집할 이유는 없다. 해당 지역에서의 가장 절실한 보편적 욕구가 무엇인가를 우선 민감하게 파악해야 하고, 실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도 살펴야 한다.
목표는 지역에서 반자본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는 생산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의 과제이다)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것은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그 양태가 대부분의 생활 방식을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노동이건, 소비문제이건, 환경/교육/의료/이동의 문제이건 간에 연결된 고리에서 상호작용하고 인식과 행위를 상승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과정과 운영의 민주주의다. 지역의 어떠한 시도를 하건 운영과 활동에 있어서 성원의 자기표현을 확대하는 기제를 확보해야 한다. ‘최대한의 직접민주주의, 최소한의 간접민주주의’는 매우 중요하다.
지역활동을 한다는 것은 현장운동에 대한 반작용이 아니라, 변혁을 향한 삶에 대한 총체적 접근임을 잊지 말자.
지역정치활동에 대한 테제
지역정치활동은 무엇보다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조직하는 것이어야 한다. 지역정치활동은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하에 민중들과 역사적블럭을 형성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기존의 지배적인 상식을 뒤짚어 우리의 방식으로 재전유하며 대중의 언어로 자본주의의 근본모순에 전면적으로 도전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노동자계급이 표를 던지는 수동적 대상이 아니라 정치의 주체로 자신의 일상 삶의 모든 문제에 발생하는 의제들에 대해 발언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지역정치활동은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근본적으로 문제제기하고 공격하는 운동이어야 한다. 그것은 비록 최초의 출발점은 조야한 조합주의적 경제적 이해에서 근거하나 점진적 혹은 극적 계기가 상호 복합적으로 작동하면서 자본주의 생산관계 특히 생산수단에 대한 배타적 독점적 사적소유에 대한 문제제기로 진전시킬 수 있는 끈질긴 정치활동을 요구한다.
지역정치활동은 생산영역과 함께 재생산의 영역에 대해 개입하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유지되는 진정한 힘은 재생산의 영역에 있다. 임금은 노동자가 생계를 유지하는 재생산 비용이나 그 대부분은 다시 자본의 이윤추구의 대상이 된다. 때문에 의식주 는 물론 교육, 의료, 성, 환경, 물, 에너지 등 일상적인 모든 것이 곧 자본과 노동이 충돌하는 계급투쟁의 영역이다. 생산영역에서의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는 것이야 말로 위력적인 무기이다. 그러나 동시에 재생산 영역에서의 전투가 요구된다. 더욱이 혁명은 다수자 혁명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보편적 권리를 둘러싼 공동투쟁은 그 자체로 계급동맹이다. 때문에 노동자, 학생, 청년, 실업자, 하층 농민 모두가 공통으로 절감하고 요구하는 것 바로 보편적인 권리를 중심으로 단결해 투쟁을 조직해야 한다.
지역정치활동은 기존의 게토화된 제도영역을 넘어서는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당은 착취의 결과에 맞서는 조직인 노동조합 등 자본주의안에서 게토화된 영역으로부터 선진적인 활동가들을 탈출시켜야 하며, 동시에 그들이 다시 게토안으로 들어가 게토를 허무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훈련하고 안내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은 상대적으로 제도화되고 안락한 국가안의 국가가 된 조합주의적이며 관료주의적 일상으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하며, 작업장 안에서 계급적대를 조직하는 것과 동시에 노동자대중의 일상의 공간 즉 삶의 전반에서 부딪치는 계급적대의 지점들에서 투쟁을 조직하는 운동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지역정치활동은 의제에서 형식에서 모두 우리의 프레임을 만들어야 한다. 자본주의 대중문화에 찌든 계급대중을 바꾸기 위해서는 생존권투쟁 등 경제적 물질적 이해관계에 근거하는 투쟁을 출발점으로 삼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생존권적인 투쟁 그 자체가 승리하기 위해서도 이제는 이데올로기투쟁에서 승리해야 한다. 우리는 자본의 언어, 자본의 논리가 아닌 우리의 언어와 논리를 제출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며, 맞대응의 논리를 넘어서 반자본주의 대안의 전망을 내용적으로 담을 수 있는 의제와 프레임들을 제시해야 한다.
지역정치활동에 있어 실제적인 생활단위에 주목하고 진지와 참호를 구축해야 한다. 현재의 지방자치는 소수의 기득권세력(토호, 지방언론 등)이 이른바 지역여론을 조작하고 그들끼리 이익을 나누어 갖는 것에 불과하다. 이것이 대중으로 하여금 정치에 대해 냉소적으로 만든다. 이제 지역을 노동자 민중의 자치의 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 계급대중의 일상속에서 가장 절실히 부딪치는 문제들을 중심으로 부르주아 지방자치를 넘어서는 다차원적인 실천을 조직해야 한다. 이를 위해 진지와 참호의 구축에 매진해야 한다. 지방의회나 자치단체장에 이른바 좌파가 당선되었다 하더라도, 그 한계는 분명하다. 그럼에도 만일 그것이 전술적 의미를 가지려면 바로 노동자 민중의 개입과 투쟁이 동력이 되어야 한다. 또한 결정적인 국면에서의 최종적인 승리를 위해 중간지대를 재구조화해야 한다. 즉 기존의 것을 재구성하는 것과 전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실험정신이 동시에 요구된다. 특히 계급대중을 향해 직접적인 선전과 선동 그리고 접촉면을 확대하기 위한 연단(매체)의 확보에 착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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