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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7/14
    고추 심기(2)
    금자
  2. 2006/01/06
    .여.성.은.식.물.인.간.이.되.었.다.
    금자
  3. 2005/06/24
    .고.깃.덩.어.리.
    금자
  4. 2005/06/21
    .올.리.브.파.스.타.(3)
    금자
  5. 2005/06/16
    .T.a.l.k.i.n.'.t.a.l.k.
    금자
  6. 2005/06/12
    .부.엌.에.는.늘.엄.마.가.있.었.다(3)
    금자
  7. 2005/06/12
    .온.전.히.인.간(4)
    금자
  8. 2005/06/12
    물고기를 만나는 길
    금자
  9. 2005/06/12
    소하& 관계의 방
    금자
  10. 2005/06/12
    작.고.붉.은.덩.어.리(1)
    금자

고추 심기

도자기를 만드는 내 룸메이트 선주가

'흙을 만지는 기분' 어쩌고 저쩌고 했을 때는 별 실감도 안 났는데

난생 처음으로 작은 나무를 땅에 심고 고이고이 물을 주고 탱탱 영글어가는

고추를 보니 마음이, 간질간질해지면서 마구 좋아.

 

반육식주의자라고 떠들고다닌지 (그래야 비자발적으로라도 안 먹을 수 있으니까 -_-;;)

까무룩할만큼 오래되었지만

둘둘치킨 앞에서 '컹컹' 코를 낼름낼름거리고

미리 만들어진 1000원 김밥을 사 먹음시롱 '어쩔 수 없이' 햄을 먹는다고 하면서

(버리는 건 더 큰 환경오염이여, 뭐 이런 식으로)

'구공탄 굴뚝 연기에 향수를 느끼는' 비둘기처럼 햄 향기를 느끼던

나이지만,

 

내가 먹을 고추를 땅에 심고 바라보고 애정을 듬뿍 주고 함께 여름을 보내고 있자니

채식이 더 큰 기쁨!!

 

<체리 고추> 동그란 고추 속에 씨앗이 한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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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식.물.인.간.이.되.었.다.

.여.성.은.식.물.인.간.이.되.었.다. 남성의 여성의 차이는 동물과 식물간의 차이와 흡사하다. 남성은 동물에 대응하고 여성은 식물에 대응한다. 여성의 성장이 보다 조용하기 때문이다. -헤겔 국가수반이 되어 국가의 정상에서 공개적으로, 즉 모범적으로 채식주의자라고 선언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우리 지역에 있을까. 우두머리는 고기를 먹는 사람이다. -자크 데리다 절대적으로 남성의 전유물인 된 사회질서가 형성되기 전에는 여성과 남성은 성역할 없이 함께 사냥했다. 함께 식물을 채집하기도 했다. 남성들은 사냥꾼이 아니라 먹거리를 조달해 오는 일원 중 하나였다. 그러나 점차 사냥하는 일이 남성의 일이 되면서 여성과 아이들은 ‘힘없고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했다. 그들은 집에 남아 양육을 하고 식물을 채집하고 사냥나간 남편을 기다렸다. 성역할은 분화되었다. 사냥을 하는 남성과 육식, 채집을 하는 여성과 식물. 인류학자 페기 샌데이는 동물 중심 경제는 남성지배적인 것에 반해 식물 중심 경제는 훨씬 더 여성을 축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밝혀냈다. 동물 중심 경제는 남신, 부계, 사회적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남성이 포진하는 성별 계층 조직을 보인다. 여성들은 ‘그리 중요치 않은’ 온갖 천한 일을 도맡는다. 반면 식물 중심 경제는 훨씬 평등한 경향을 보인다. 고기가 성별을 구분하고 지위와 계층을 정하는데 사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고기의 붉은 피를 전통적으로 남성을 상징했다. 오랫동안 신화와 전통에서는 붉은 고기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체력, 공격, 정열, 성욕’의 상징으로 여겼다. 제레미 러프킨, 육식의 종말, 시공사 p285 남부 스페인에서는 아직도 투우가 끝나면 여성들이 지역 정육점을 찾아간다. 스테미너 보양식. 고기는 남성다움과 생명의 원기를 품고 있다. 그래서 남성들은 채소와 과일을 싫어한다. 서양에서 문제의 골자 meat of matter, 내용이 충실한 질문 a meaty question, 보강하다 beef up 같은 용어를 보라. 반면에 식물은 경멸적인 단어이다. 수동적이고 단조로운, 굼뜬 존재. <한 떨기 수선화 같군요. 그는 성난 황소처럼 덤벼들었다.> 여성을 수식할 때는 식물을 붙이고 남성을 수식할 때는 동물을 붙인다. 남성과 육류, 여성과 식물을 동등하게 놓음으로써 사회적 질서는 음식과 성별의 계층조직을 서로 강화한다. 여성은 식물처럼 항상 수동적이고 남에게 베푸는 존재이며 의욕이 없는 사람이다. 반면 남성과 육식은 피라미드의 정점이 된다. 수렵과 채집을 하는 종족인 ‘칼라하리의 꿍’ 부족은 아주 작은 부분만을 사냥을 통해서 해결한다. 그러나 여성이 채집해온 식량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라고 불리지만 고기는 ‘먹거리’라고 명명된다. 이제, 식물과 여성의 존재는 ‘배경화’ 되었다. 여성은 ‘식물인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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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깃.덩.어.리.

.고.깃.덩.어.리. ‘ 사창가’는 식육점으로 불린다. 식육점 불빛 아래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성이 섹시하더냐. 나와의 동침 시 빨간 조명을 켜는 여자랑은 안 잘란다. 촌스러운 여자는 상상력이 부족할지도 모르니까. 어쨌든 갈보집 maisons of abattage은 직역하면 도살장이 된다. ‘사창가’의 불빛은 언제고 식육점의 조명이다. 강간당한 여성들은 “저는 제 자신이 고기 덩어리 같다고 생각했어요.”라고 말한다. -체인, 소몰이 막대, 올가미, 개 목걸이, 로프 등은 동물을 통제하는 데에 쓰인다. 동물에게 폭력을 사용하는 기구가 변태 성행위에 사용되는 것이다. (변태 성행위에 사용되는 도구들 새디즘과 매저키즘을 마냥 변태 성행위로 모는 것은 아니다. 합의가 가능하다면 다양한 섹스체위 중 하나로 볼 수 있을 테니까. 문제는 ‘진정한’ 새디즘과 매저키즘의 경우 합의가 가능하지 않다는 데에 있다. 새디즘은 고통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 고통에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느낀다. 고통을 즐기는 사람의 고통은 새디스트에게 쾌락을 제공하지 못한다.) 포르노에서 여성은 암코기 덩어리처럼 비춰진다. 남성들은 유방, 다리, 질, 엉덩이 부위가 성적 흥분을 가져온다고 말한다. 그 놈의 페니스가 날 달아오르게 해, 라고 말하는 여성은 거의 없다. 그 남자 참 실해라는 말을 하기는 해도. 한 손아귀에 잡히지 않을 정도의 유방, 탱탱한 엉덩이, 매끈한 다리. 여성의 ‘조각난 몸’이 섹시하단다. 몸만이 존재하는 여성은 고깃덩어리가 된다. 최초의 은유는 동물이었으니, 동물의 이름과 신체는 도살당한 고기의 이름 속에 부재한다. <캐롤 아담스, 프랑케슈타인은 고기를 먹지 않았다. p82> 살아 숨쉬는 동물은 고기의 개념에서 부재한다. 부재지시대상은 독립된 실체로서 동물을 망각하도록 만들고, 그런 동물을 떠올리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든다. 애완동물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그 날 저녁을 삼겹살로 먹는 사람에게 그렇다. 돼지고기 집 간판에서 웃고 있는 돼지나 치킨 체인점 박스에 붙어있는 까불대는 닭의 모습도 그렇다. 혹은 갈갈이 부위별로 나뉘어 피도 흐르지 않고, 잘 포장된 상품이 된 마트에 걸려있는 고기 덩어리들이 그렇다. 왜 폭력에 노출된 여성들은 스스로를 고깃덩어리라고 하는가, 혹은 ‘사창가’는 식육점으로 불리는가. ‘고기’라는 것은 폭력적으로 모든 것을 박탈당한 것을 의미한다. 그녀들은 얼굴과 팔과 다리가 잘라나간 ‘토르소’의 존재이다. 여성이 아니라 고깃덩어리의 묶음. 다만 여성은 자신을 고깃덩어리로 여길 수 있고 그렇게 취급당할 수 있지만 동물은 실제로 고깃덩어리가 될 뿐이다. 산채로 학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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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파.스.타.


 

친구가 사다준 리본형 파스트 한 웅큼을 그릇에 붓고 한참 보기, 참 귀엽고나 고것참.

한 쪽에서는 파스타를 삶을 냄비에 물을 넣고 팔팔 끊인다.

옆에는 넓적구리한 후라이팬을 꺼내 올리브 오일을 적당히 붓고 간 마늘을 넣기,

아아 마늘 볶는 냄새는 마늘빵 냄새보다 좋다.

올리브 오일은 마트 세일할 때 사거나 무슨 새끼들이 많이 붙어나오는 놈으로 사야지,아니면

옥수수기름이나 콩기름에 비해 좀 비싸다.- -;;;

채식 벙개 할 때 돈 모아서 만원짜리 올리브 오일 사오라고 부탁하고서

두고두고 먹든지, 업 투유 ~~

 

볶은 올리브 기름에 냉장고 속에 있는 야채를 막 넣는다.

난 양파와 새송이 버섯, 고추를 넣었다. 새송이가 상할 것 같기에 몽신 넣었다. 아아, 칭찬받아 마땅하다.

캐나다에서 온 친구가 베지터블 소스같은 것을 사왔는데,

바로 은박지에 싸인 '호랑이 고약' 스타일이 바로 고것이다.

고것을 꺼내 올리브 오일에 살짝꿍 넣어준다.

없으면 안넣어도 무방,

야채랑 볶은 올리브 기름에 삶은 리본 파스타를 넣어서 비빈다. 다음은 완성본!!


김과 김치찌게를 곁들인다.

아아, 맛나 ^0^

 

가사노동을 '가내노예노동'쯤으로 알았는데 ... 동거녀들과 살다보니까

음식을 함께 해서 나눠먹는 것, 장을 보는 것, 한 번씩 뜨건물로 설겆이 하는 거,

이런 것들이 뻐쩍지근하게 다가와서...

참 사는 것처럼 산다고 스스로 대견해하게 된다.

 

이계경 의원이 가사노동 가치를 쳐 주겠다고 그 가치를 남편 소득공제에 포함시킨다는데 ...

그러면 혼내야 쓴다.

남편 있는 여자들만 가사노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또, 가치를 쳐 줄 거시면 가사노동을 직접 한 사람에게 직접 해줘야 한다. 

게다가 여성의 소득이 연간 1200만원 이하일 경우로 한정한다.

1300만원 버는 부인은 그냥 남편 소득에서 공제받는 것이 더 편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아니면 1200만원 이하로 버는 파트타임 잡으로 옮기던가. 

 

 

노동시간이 단축돼서 집에서 좀 빈둥거릴 시간이 많아져야 한다.

시건방지게 가사노동 지가 하면 팔 뿌러지는 줄 아는 놈들은 팔 똑 뿌러져불어야 한다.

 

대신

... 뽀드득 소리나게 자기 삶을 꾸리고 예뻐하고,뭐 그런 거 하고 싶은 사람들이

그럴 기회를 가져야 한다. 집에서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맛난 거 나눠먹고 자기 삶과 다른 삶을 보듬어 케어하는 것,

그런 것들을 '쉽게'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그러니까,

가사노동을 즐길 만한 삶을 위한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노동시간은 6시간 이하, 그러고도 간단하게 살면 살만한 돈,

어느 한 사람에게만 부과되지 않는 (특히 엄마와 여성) 골고루 함께하는 가사활동,

자기 삶을 충실하고 복스럽게 만들기 위해서 하는 가사활동들.

여성의 가사노동을 가치로 환산하는 일은 단지 'home economics'나 여성학에서만

논의돼서는 안된다.

노동시간을 줄이고 기업문화를 바꾸고 삶의 패턴을 다시 재조정하는 것,

그 안에서 가사노동이 여가와 노동의 버물림으로 변하는 것...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읽는 삶보다 '가사노동'을 즐길 수 있는 삶을 갖고 싶다.

 

p.s

^^ 죽으면 내가 젤 좋아하는 사람들이 내 고기를 맛나게 요리해서 먹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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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l.k.i.n.'.t.a.l.k.

.T.a.l.k.i.n.'.t.a.l.k. 나도 이런 도덕적인 글은 쓰고 싶지 않다. 누군가에게 ‘정치적으로 올바른’ 소리를 해야 하는 것도 귀찮아. 입바른 소리라는 것이 대부분 ‘7박 8일 500원’ 비디오처럼 한 물간 스타일이지. 사실 저의 취향은 ‘1박 2일 신간 빠른 반납을 부탁드립니다‘ 입니다. 섹스를 하지 않을 자유처럼 육식을 하지 않을 자유도 있다, 꼭 섹스를 해야 하나, 버나드 쇼나 니체, 랄프 네이더처럼 무성애자로 살아가는 것도 성적취향의 한 방법인디, 마찬가지로 채식도 한 가지 방법이야, 그러니 먹을 취향의 자유를 인정하라, 여기서 끝나면 좋을 것인데. 당신은 이성애자거나 동성애자이다. 무성애자일수도 있다. 무성애자를 성적취향의 하나로 인정하라는 것은 당신의 성적 취향을 건드리지는 않는다. 하루키 소설에 나오는 나카다상처럼 고양이상과 대화로써 합의를 할 수 있다면 수간도 상관없다. 하지만 육식과 ‘정치적 채식’은 다르다. 나는 B사감처럼 당신들을 닦달해야 한다. 채식을 인정하라는 차원에서 벗어나 구질구질하게 왜 당신들이 하고 있는 ‘육식 취향의 자유’가 나쁜 것인지를 공격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채식주의자를 싫어한다. 생 까고 고깃집에 와도 애꿎은 된장국만 퍼먹는 그들이 짜증나고, 엘레강스한 프랑스 사람처럼 동물권을 인정하라는 말도 맹랑하다. 지들이 금욕주의자야, 뭐야, 요샌 도덕적으로 난척하는 것만큼 촌스런 것도 없지. 음식골라먹는 것만큼 인간 추접해보이고 깐깐하게 보이게 만드는 것도 없다. 그리고 , 먹을 것만큼 보수적인 것도 없다. 입맛으로 따지자면 나 역시 꼴통보수이다. 이해하는 것이 때로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경우도 있다. (채식에 공감하지만 실천하지 못한다는 말을, 나는 그래서 잘 이해는 한다) talkin-talk is not just talk. if you wanna know yourself you gotta do the talkin'talk Talkin' Talk -D'sound의 노래-taklin'talk (아아, 최고 좋아) 중. ‘나는 채식주의자로소이다’를 talkin'talk 하루키, 나는 왜 당신처럼 쿨 할 수 없을까요? 그래도 talkin'talk. 힘 없는 자가 할 수 있는 비폭력 저항의 실천 talkin'talk 권력을 가진 자만이 쿨 할 수 있다. 자발적인 채식주의자는 신선한 고기를 원하는 사람의 0.2%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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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에.는.늘.엄.마.가.있.었.다

.부.엌.에.는.늘.엄.마.가.있.었.다. 하루키가 내 부엌으로 들어왔다, 라는 요리책을 본다. 파락호같은 자식, 이 멜랑꼬리한 재료들의 이름은 아마 그가 좋아하는 그리스 남부 섬에서나 세계화시대를 온 몸으로 껴안은 ‘갤러리아’ 백화점 지하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듯. 남자들이 쓴 요리책은 애증을 불러일으킨다. 이현우나 하루키의 요리책, 구질구질하지 않다. 요리책에서 ‘폴로스포츠’ 향이 난다. 그 책들은 서점의 ‘여성’ 코너 중 한 부분인 ‘요리섹션’에 앉아있다. 귀여운 것들. 하선정이나 서정희의 요리책은 구질구질하다. 20대의 젊은 언니에게(나 말이다;;) 그들의 책은 구구절절한 감정을 맹근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간식을 만들어보아요. 남편의 생일날 만드는 특별한 요리. 스테미너를 보강해주는 요리는 무엇일까. 그녀들의 요리책에선 부엌냄새가 난다. 엄마의 ‘방’ 부엌냄새-비린내, 젓갈냄새, 김치냄새, 마늘냄새, 그리고 엄마의 손 냄새. ‘꽃보다 아름다워’에 나오는 고두심 엄마의 냄새가 난다. 유희로서의 음식, 노동으로서의 음식. 산뜻한 얼굴로 앉아있는 ‘하루키가 내 부엌으로 들어왔다’를 집어 든다. 기왕 돈쓰는 바에야 보보스 흉내라도 내보고 싶었다. 상실의 시대에서 미도리가 브래지어 살 돈을 털어 요리기계를 샀을 때 나는 화가 났다. 엄마가 아팠을 때, 아빠의 아침밥을 차리기 위해 부엌에 들어갔었다. 밥을 먹는 시간보다 잠자는 시간이 아쉬웠던 어린 시절이었다. 브래지어를 하지는 않지만 부엌에게 요리기계를 선물할 만큼 마음 씀씀이가 좋지는 않다. 미도리가 부러워서 화가 났다. 엄마처럼 살지 않아야지, 라는 말은 평생을 부엌데기로 살지는 않을 거라는 다짐이었는데. 이 땅의 윤똑똑이 여성으로 태어난 이상 부엌은 게토였다. 그 곳에 빠지면 엄마처럼 된단다. 자식을 낳지 말아야지, 란 생각이 처음 든 것은 새벽에 일어나 도시락 여섯 개를 싸는 엄마가 꿀꿀해서였다. 하여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요리를 노동으로 여기지 않는 여성과 테러를 당할 여성의 수 중 어느 것이 더 많을까. 그 노동은 남성을 위한 것이다. 떠꺼머리를 한 아들놈이던지, 옆구리에 러브핸들이 잡히는 남편이던지. 여성은 먹을 것을 탐내서는 안 된다. 가지지 못한 것은 늘 사람을 미치게 한다. 아, 골룸을 보라. 섭식장애 진단을 받은 사람들의 95%가 여성이다. 왜 여성은 자신의 굶주림에 대해서 과잉보상하려고 하는가, 아니면 분노에 사로잡혀 더 이상 어떤 음식도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넓은 어깨, 밋밋한 허리, 좁은 엉덩이, 납작한 아랫배... 우리는 남성의 선천적 몸매를 만들기 위해서 먹을 것을 조절해야만 한다. 남성의 몸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무와 먹을 것에 대한 욕구과잉 사이. 내면의 여성성을 밀어내고 음식을 꾸역꾸역 채운다. 그리고선 자신을 짓이긴다. ‘겨우’ 먹을 것 하나 통제 못하는 밥벌레 같은 나. 자궁이 들어있는 배는 아랫배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여성의 지방층은 남성의 그것보다 두껍다. 배우지 않았던가. 속옷을 안 입었다고 등짝을 후려치던 가정선생님에게서.
자신의 몸을 능욕하기 위해서 여성은 자신이 생산한 것을 부정해야만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먹는 일은 단순한 물리적 영양섭취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사랑받지 못했을 때, 용서받고자 할 때 음식은 그 대용품이 된다. 외.로.운. 것 같아, 그래서 전화기를 드는 대신 치즈케ㅤㅇㅣㅋ을 먹어. 김나인의 미니홈피에서 무단 도용했다. 사랑받고 있다는 최초의 경험은 대개 엄마 품에 안겨 젖을 먹던 기억과 관련된다. 아이가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으면 사탕을 준다. 화이트데이와 발렌타이데이에 사랑을 전하는 기계는 사탕과 초콜렛이다. 어느 레즈비언 영화의 끝은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먹으면서 그 사람과 일체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남자들은 성적욕구를 표현하면서 널, 먹고 싶어 라고 말한다. 먹는 것이란 그런 것이다. 여성들은 먹을 것을 가지고 티격태격 싸운다. 남성은 그럴 필요가 없다. 먹는 것 이상의 먹는 것, 그 의미도 여성에게는 노동이다. 관계를 이어가는 수단으로서의 음식은 감정노동을 떠맡은 여성에게는 노동인 탓이다. 여보, 오늘 회사에서 피곤했지? 이것 먹고 힘내요.(박카스 선전 같군, 미안하다) 아가, 모유가 좋다던데, 분유만 먹는 아가 짠하지도 않냐? 직장 그만 둘 생각은 없는겨? 여성은 먹을 것을 만드는 사람이지 결코 먹는 사람은 될 수 없다 나는 널 먹고 싶어, 라고 말하는 여성을 난 도무지 본 적이 없다. (채식주의자인 내가 그런 말을 쓸 수 없지 않은가.) 아아, 골이 난 것뿐이에요. 더 이상 여성이 배고픈 이야기는 안 할란다. 오늘은 ‘여성이 먹는 이야기’를 한다. 나를 위해서 먹을 것을 만든다. 덧붙여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까지도 강매할 것이다. 이왕 꼴통 페미년이 되어서 한 세상 살아가겠다는데 ‘제대로’ 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남성과 다른 방식으로, 다른 무엇을 먹는다. 채식주의자가 된 후, 여성의 정체성이 그랬듯 먹는 것도 하나의 혁명일 수 있음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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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히.인.간

.온.전.히.인.간. 해방의 사상은 해방의 이론을 필요로 한다. 우에노 치즈코 그래서 마르크스가 여태껏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솔로레타리아 선언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의 오류는 시장이 모든 영역에 미친다고 생각했던 것에 있다. 시장 외부에는 자연과 가족이 있다. 여성은 ‘사람 아닌 사람’을 돌보는 이류시민으로, 자연은 알토란같은 부의 원천으로. 인간의 개념은 ‘인간이 아닌 것’을 맹글어 배제하는 데에 있나니. 자연과 여성 및 소수자는 ‘생사길이 예 있으매 나는 가는다 하는 말도 못 이르고’ 인간의 개념에서 팽 당했다. 그러므로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가진 가장 큰 오류는 이것이다. 여자도 인간이다, 라고 소리 지른 것. 온정을 기대했더냐. 동정심을 자극하고 싶었더냐. 떨이라도 되고 싶었더냐. ‘나는 그대를 인간이 아닌 단지 거의 원숭이 등급의 종족으로 밖에 간주할 수밖에 없다’, 거나 ‘여성은 단지 동물일 뿐이며 그것도 최상위 등급이 아닌 동물이다’, 에 맞선 페미니스트의 반격은 나는 동물이 아닌 인간이로소이다, 였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짐승에 대한 인간의 우위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라고 물으며 이성과 열정으로 인간은 짐승을 뛰어넘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여성도 이성과 열정을 가진 ‘짐승보다 우월한’ 인간임을 주장했다. 그 시절, 울스턴크래프트는 ‘페미니스트’였다. 인간동물원이란 책에는 아프리카 원시족(원시족이란 말 쓰기 싫어;;) 가족을 동물원에 가둬놓고 서유럽 사람들에게 구경시켰던 일화가 나온다. 성기가 큰 여성을 구경시켰던 것처럼. 동물과 인간의 구별은 근대 초기에 인간의 사회성을 강조하면서 도입된 것이었다. 키스 토마스에 따르면 근대 이전에는 유아, 젊은이, 가난한 사람들, 흑인, 아일랜드 인, 미친 사람들, 여성이 모두 짐승으로 간주되었다. 토마스 왈, “인간이 짐승으로 한번 인식되자, 짐승 취급을 받는 상태에서 빠져나오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인간 지배의 윤리는 인간의 관심 영역에서 동물을 제거해버렸다. 결국 이렇게 해서 동물과 비슷한 상태에 처해있는 인간을 학대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캐롤 아담스, 프랑케슈타인은 고기를 먹지 않았다. p87 그러니까, 인간의 개념은 유동적이라는 거다. 인간과 1%정도만 유전자가 다른 침팬지를 모기와 묶어 동물이라고 칭하고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니, 호랑말코 같은 기준이다. 여성할당제에 혹해서 세상 좋아졌다 자위할지 모른다. 박근혜와 전여옥이 설치니 여성도 사람취급 받는 것 같더냐. 지역구에 나오는 여성후보는 전체의 5%에도 못 미친다. 교토의정서가 통과됐다 해도 여전히 자연은 ‘침묵의 봄’이듯이 여성은 아직 인간이 아니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그저 휴머니스트일 뿐. 다음 미디어, 김윤아와의 인터뷰 중에서. ‘휴먼’에 여성이 끼어있었던 들 이런 말이 나올까. 쓸데없이 쿨 한척 하지 말 것. 여성은 여전히 환경이며 자연이다. 그 길을 질러가는 길은 여성과 자연의 선긋기가 아니다. ‘온전히 인간적’이란 말을 의심하는 것 뿐. 물론 이 말은 여성은 자연이며 남성은 문화라는 이분법을 껴안는 과정이 아니다. 남성과 여성 모두 자연과 문화의 일부이며 양자가 모두 자연과 병행할 수 있다. 단, 이러한 작업에 있어서 그들은 상이한 역사적 지위에서 출발하며 그들 각자가 기여할 수 있는 바가 서로 상이할 수 있다. 여성 특유의 자연 영역적 위치와 대립문화로부터의 배제로 인해 여성들에게 할당된 몫이 좀 더 의미심장할 뿐이다. 자연, 여성, 환경, 한신문화사 p134 생태여성주의는 자연과의 관계에 대한 논의를 페미니즘 논의 속으로 끌어들인다. 자연의 이분법적 정의, 그리고 자연의 열등한 지위를 지지하거나 도전하지 않는 여성해방은 거부한다. 정치적 운동의 일환으로서 생태여성주의는 자신들과 자연의 관계를 ‘배경화’ 내지 ‘배제’하는 단계를 넘어, 능동적이고 의도적이며 반성적으로 위치 지운다. 나는 생태여성주의의 관점에서 채식을 시작했다. 그것은 내가 여성으로서 자연과 관계를 맺는 가장 진정한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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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를 만나는 길

물고기를 만나는 길 "이른 봄의 저녁공기는 여전히 쌀쌀했다. 전철 출구로 올라온 사람들은 빠른 발걸음으로 나를 앞질러 걸어갔다." 하루가 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늘 지나던 횟집 앞을 지나간다. 수조 속에는 커다란 도미 한 마리가 기울어 진 채로 떠 있다.
도미는 점점 기울어져 이내 뒤집어져, 죽는다. 살아있던 것이 죽어 하나의 덩어리가 되는 순간.
집으로 돌아와 방 안에 들어섰을 때, 침대 위에는 아침에 버린 덩어리가 다시 놓여져 있다. 조금 마르고 검붉어진 채로. 이번에는 그것을 안고 잠이 든다. 다음날 아침 덩어리는 사라지고 그녀는 자신의 몸 안에 작은 살덩어리 하나를 느낀다. 이야기는 하나의 작은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도미에 대한 에피소드는 실제로 경험했던 일이다. 어느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정말로 거대한 도미가 뒤집어져 죽어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사람 머리만큼이나 큰 분홍색의 도미가 뒤집혀 떠다니는 모습은 일단 참 기괴했는데, 그래도 그 때는‘다 죽어가는 물고기? 횟집 수조 안에 그대로 놔두다니 저 집 장사 다했네.’ 라고 생각 했을 뿐이었다.
나중이 되어서야 그 장면이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는데 그렇게 된 건 채식을 하면서부터였다. 그것은 굉장히 신기한 변화였다. 그러려고 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몸이 채식이라는 경험을 통해서 스스로 하나의 관점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 예전엔 생각해보지 않았던 일들을 조금 생각하고, 느끼게 되었다. 작업을 진행하면서 나의 직접적인 경험으로, 좀더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이야기를 좁혀 나가다 보니 결과적으로 이야기가 ‘먹는 것’에 대한 이야기 쪽으로 많이 흘러가기는 했지만, 단지 우리가 먹는 고기-살-이 우리 자신의 살과 같은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니다. 또 나의 변화의 계기는 채식이었지만 몸으로 느끼는 감각의 변화라는 것이 그 방식으로만 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그 변화가 생각이 아닌 몸의 변화와 감각의 변화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에 중심을 두고 싶었다. 말하자면 그녀에게 나타난 덩어리는 몸에 일어난 어떤 변화와 경험이면서 나의 일부가 되어 세상을 다르게 보고 느낄 수 있는 관점과 감각이다.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부터 시작되어 생각을 변화시키는 일. 미약했지만 그런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여덟개의 방, 여덟개의 시선 중 작가 소하의 그림과 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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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하& 관계의 방

‘그날 아침. 잠에서 깨어났을 때, 다리 사이엔 작고 붉은 덩어리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야기는 한 사람이 아침에 깨어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축축하게 비 내리는 아침, 그녀는 다리 사이에 조그마한 덩어리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다.
작고 붉은 덩어리 하나. 그녀는 그것을 화장실 변기 속으로 내려 보내버린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리고는 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밥을 먹고 집을 나선다.
하지만 이미 어떤 변화는 시작되었다. 익숙하던 거리는 어딘가 낯설고 지나치는 낯선 사람들은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든다.
친구를 만나 고기를 구워먹으며 나누는 이야기들과 고기의 붉은 빛은 그날따라 쉽게 흘려버릴 수 없다. 입술 "어느 순간 부터 인지 친구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주위가 너무 시끄러웠던 탓이다.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던
그녀의 움직이는 입술과 혀인지 고기인지 모를 조그만 덩어리가 하나 보일 뿐 이었다.." 여덟개의 방, 여덟개의 시선 중 작가, 소하의 그림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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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붉.은.덩.어.리

서로를 전부 다 알지 않아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여러 가지 말들에 결정되거나 편갈리지 않고, 너의 아픔과 슬픔을 나의 아픔과 슬픔처럼 느낄 수 있다면. ‘그날 아침. 잠에서 깨어났을 때, 다리 사이엔 작고 붉은 덩어리 하나가 놓여 있었다.’ 물컹하고, 단단하고, 부드러운 나의 ‘살’에 대해 민감해 짐으로써 다른 여러 가지 감각에 민감해지고, 나아가 다른 존재의 고통에 민감해지는 것.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에 호소함으로써 살아있거나 살아 있었던 것들의 감각들을 좀더 나와 가까이 느끼는 것. ... 누군가 이 이야기를 볼 때, 머리보다 몸이 이야기하는 것에 좀더 귀 기울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의 몸이 느끼는 것이 전부 진실이라고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머리보다는 좀더 솔직하고 보편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거부하거나 간과하지 말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느끼는 것만큼 다른 사람들도, 살아있는 다른 존재들도 느낀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몸의 감각에 기반해서 다른 이들을 바라본다면 좀더 쉽게 그들과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이해는 해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 보다는 이해하지 못해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마음으로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노력만 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런 방식의 소통. 그것이 여성성의 한 측면이 아닌가 생각한다. - 여덟 개의 방, 여덟 개의 시간 전시회 중 작가 소하의 그림과 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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