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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거.세.된.희.망. <내용 요약>

책 내용 갈무리 아무리 오랜 시간을 일해도 생계를 꾸려나갈 수 없다면? 아등바등 살지 말고 인생을 즐기고 잘 먹어라, 그리고 돈을 지불하라. 안심하고 마시고, 아이들을 잘 놀게 하라. 다른 사람처럼 똑같이 소비하고 살아라. 그런데 만약 힘들고 중요한 일을 하는데도 빈곤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노동의 최상의 복지다” “도움이 아닌 자립을” 노동당이 노래하듯 외치는 구호들은 시대의 흐름과도 잘 어울리는 말이다. 하지만 최저임금에 의지해 사는 사람들은 여전히 소외되고 한계선 이하의 삶을 산다는 암담한 현실이 구호 이면에 숨어 있다면? P14 경영컨설턴트가 지나다니는 계단을 청소하거나 그의 양복을 세탁하고 그의 나이든 부모를 돌보거나, 그의 딸이 다니는 학교에서 보조교사를 하는 따위는 그가 하는 대단한 일에 비하면 ‘잡무’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가 원만히 굴러가기 위한 필수요소가 아니라 그저 보조수단에 불과하다고 여겨진다. ‘보조’라는 뜻의 영어단어 ‘ancillary’는 라틴어 ‘ancilla’ 즉 여자노예인 하녀에서 온 말이다. 하녀가 하던 일은 오늘날의 서비스 경제에 속하지만 서비스 산업은 여전히 비천하고, 여자가 하는, 따라서 전통적으로 남자가 해온 일보다 가치가 낮은 일로 인식된다. P26 중산층의 운명은 집만큼이나 안전해서, 하층민은 하층민의 운명이 따로 있고, 그들은 그들의 운명이 따로 있었다. …이 책은 수백만 명에 달하는 ‘정당한 대가를 받을 만한’ 빈곤층에 관한 이야기다. 이들은 앞으로도 집을 장만하지 못할 것이며, 저축할 수 있는 돈은 극히 적은 액수에 불과하고, 노후에도 연금 혜택을 받지 못한다. 자칫 병에 걸리거나 사고라도 나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병에 걸리지 않더라도 이들은 노동에 시달리다가 일찍 사망한다. 최상위에 속하는 남성의 평균수명은 78세인 반면, 최하위에 속하는 저임금 남성 노동자의 평균수명은 고작 71세에 불과했다. P31-32 수중에 돈이 없다면 돈을 빌리는 일도 그리 대수롭지 않다는 것을 알 만했다.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는 판국에 꺼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날 벌어 그날 먹고사는 사람들에게는 빚을 진다고 해서 더 문제될 것도 없었다. 주머니에 4펜스 밖에 없는데, 집세 70파운드와 다른 대금이 이미 연체되었는데 여기서 어떻게 더 나빠진단 말인가? 그렇다면 꺼릴 일이 없지 않은가? P93 선택의 범위가 넓을수록 삶은 더욱 풍성해지고 반대로 선택의 범위가 좁을수록, 즉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나 갈 수 있는 장소나 손을 뻗어 닿을 수 있는 기회 또는 범위가 제한적이라면 삶은 비참해진다. 부가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않지만, 풍요로움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그 풍요에서 차단되어 상대적 빈곤감을 느끼는 사람이 삶에 만족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빈곤감은 ‘상대적’이다. P144 …정말 건디기 힘든 일이지만 여기 사람들은 용케도 살아갔다. P147 텔레마케터의 수입은 평균노동자 수입의 약 40퍼센트 수준이다. ‘반복사용 긴장성 손상 증후군(RSI)’이 컴퓨터 사용자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신종 병이라면, ‘음향 충격’은 전화통화를 집중적으로 하는 사람들에게 생기는 신종 산업병으로, 우울증에 빠지거나 소음을 참지 못하는 증세를 보인다. 이 일을 몇 시간씩 하다보면 누구든지 기분이 우울해지곤 한다. 내게는 이 증세가 ‘반복사용 뇌손상 증후군’처럼 느껴졌다. P245-246 나는 이제까지 인종에 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하층의 일을 찾아갔을 때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이 늘 흑인 일색이었다. 그렇지 않은 곳은 모두 백인 여자였다. 먹고살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다 해야 하는 아이를 둔 엄마들이었다. P314 참으로 이상하게도 고위관리자협회는 최저임금을 위협으로 간주해 그토록 강력히 반발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임금인상은 문제삼지 않았다. 고위 임원의 임금이 인플레를 얼마나 유발하고 경제안정을 얼마나 위협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이 없으면서, 최저임금을 50펜스 인상하면 국가경제가 흔들린다고 말한다. P334 현대의 평등은 오히려 하위 30퍼센트에 속하는 사람이 여전히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그들의 자녀 역시 타고난 빈곤을 탈출하기가 여전히 힘들다는 사실을 교묘히 가릴 뿐이다. 그러나 현대적 평등주의는 ‘제법 점잖은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신화이다. 평등주의 덕에 우리는 두 다리를 뻗고 잠을 잔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정당화하기에는 평등 외에 다른 수단이 없다. 나는 좋은 사람이라고, 스스로 흡족해 할 수 있는 변명거리가 필요하다. 특권층 역시 얼마나 자기 기만적이든 간에, 기회는 모두에게 주어진다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P337 임금이 얼마나 인상되면 실업자가 대량으로 발생할까? 경제학자에게 물어보라. 십중팔구는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할 것이다. 저임금관리위원회에서 일하는 워릭대학교의 마크 스튜어트 교수는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대답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P344 교육과 훈련은 저임금 노동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정치인들이 아슬아슬하게 피해가는 한 가지 분명한 이유 때문이다. 훈련을 받고 안 받고 간에 청소하고, 요리하고, 환자를 돌볼 수많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주머니에 국가자격증을 얼마나 많이 넣고 다니든 간에 밤낮없이, 때로는 오밤중까지도 이어지는 고된 노동은 기본이다. 도카스는 앞으로도 계속 그곳 요양원에서 매일 아침마다 여성 명의 노인을 침대에서 들어올려 욕실에 들여놓을 것이다. 하지만 그토록 중요한 일을 하면서도 생계비조차 벌 수 없는 현실을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한단 말인가? P356 1970년도 초에 자동차 생산업체인 복스홀과 노조 사이에 체결된 협정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 1)남성 인력을 사용할 수 있는 곳에는 여성 인력을 투입하지 않는다. 2)기존의 남성 피고용인을 여성으로 대체하지 않는다. 3)여성 인력은 광범위하게 합의된 특정직에만 고용한다. 합의된 일은 주방일이나 청소따위를 말하는 것으로, 이 회사에서는 유아용 카시트를 만드는 일이 여성에게 돌아갔다. P371 3c 업종- 여성과 관련 catering, cleaning, ca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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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글.게 by 이상은

이 노래, 착하다. 그리고 마구마구 행복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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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깃.덩.어.리.

.고.깃.덩.어.리. ‘ 사창가’는 식육점으로 불린다. 식육점 불빛 아래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성이 섹시하더냐. 나와의 동침 시 빨간 조명을 켜는 여자랑은 안 잘란다. 촌스러운 여자는 상상력이 부족할지도 모르니까. 어쨌든 갈보집 maisons of abattage은 직역하면 도살장이 된다. ‘사창가’의 불빛은 언제고 식육점의 조명이다. 강간당한 여성들은 “저는 제 자신이 고기 덩어리 같다고 생각했어요.”라고 말한다. -체인, 소몰이 막대, 올가미, 개 목걸이, 로프 등은 동물을 통제하는 데에 쓰인다. 동물에게 폭력을 사용하는 기구가 변태 성행위에 사용되는 것이다. (변태 성행위에 사용되는 도구들 새디즘과 매저키즘을 마냥 변태 성행위로 모는 것은 아니다. 합의가 가능하다면 다양한 섹스체위 중 하나로 볼 수 있을 테니까. 문제는 ‘진정한’ 새디즘과 매저키즘의 경우 합의가 가능하지 않다는 데에 있다. 새디즘은 고통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 고통에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느낀다. 고통을 즐기는 사람의 고통은 새디스트에게 쾌락을 제공하지 못한다.) 포르노에서 여성은 암코기 덩어리처럼 비춰진다. 남성들은 유방, 다리, 질, 엉덩이 부위가 성적 흥분을 가져온다고 말한다. 그 놈의 페니스가 날 달아오르게 해, 라고 말하는 여성은 거의 없다. 그 남자 참 실해라는 말을 하기는 해도. 한 손아귀에 잡히지 않을 정도의 유방, 탱탱한 엉덩이, 매끈한 다리. 여성의 ‘조각난 몸’이 섹시하단다. 몸만이 존재하는 여성은 고깃덩어리가 된다. 최초의 은유는 동물이었으니, 동물의 이름과 신체는 도살당한 고기의 이름 속에 부재한다. <캐롤 아담스, 프랑케슈타인은 고기를 먹지 않았다. p82> 살아 숨쉬는 동물은 고기의 개념에서 부재한다. 부재지시대상은 독립된 실체로서 동물을 망각하도록 만들고, 그런 동물을 떠올리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든다. 애완동물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그 날 저녁을 삼겹살로 먹는 사람에게 그렇다. 돼지고기 집 간판에서 웃고 있는 돼지나 치킨 체인점 박스에 붙어있는 까불대는 닭의 모습도 그렇다. 혹은 갈갈이 부위별로 나뉘어 피도 흐르지 않고, 잘 포장된 상품이 된 마트에 걸려있는 고기 덩어리들이 그렇다. 왜 폭력에 노출된 여성들은 스스로를 고깃덩어리라고 하는가, 혹은 ‘사창가’는 식육점으로 불리는가. ‘고기’라는 것은 폭력적으로 모든 것을 박탈당한 것을 의미한다. 그녀들은 얼굴과 팔과 다리가 잘라나간 ‘토르소’의 존재이다. 여성이 아니라 고깃덩어리의 묶음. 다만 여성은 자신을 고깃덩어리로 여길 수 있고 그렇게 취급당할 수 있지만 동물은 실제로 고깃덩어리가 될 뿐이다. 산채로 학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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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파.스.타.


 

친구가 사다준 리본형 파스트 한 웅큼을 그릇에 붓고 한참 보기, 참 귀엽고나 고것참.

한 쪽에서는 파스타를 삶을 냄비에 물을 넣고 팔팔 끊인다.

옆에는 넓적구리한 후라이팬을 꺼내 올리브 오일을 적당히 붓고 간 마늘을 넣기,

아아 마늘 볶는 냄새는 마늘빵 냄새보다 좋다.

올리브 오일은 마트 세일할 때 사거나 무슨 새끼들이 많이 붙어나오는 놈으로 사야지,아니면

옥수수기름이나 콩기름에 비해 좀 비싸다.- -;;;

채식 벙개 할 때 돈 모아서 만원짜리 올리브 오일 사오라고 부탁하고서

두고두고 먹든지, 업 투유 ~~

 

볶은 올리브 기름에 냉장고 속에 있는 야채를 막 넣는다.

난 양파와 새송이 버섯, 고추를 넣었다. 새송이가 상할 것 같기에 몽신 넣었다. 아아, 칭찬받아 마땅하다.

캐나다에서 온 친구가 베지터블 소스같은 것을 사왔는데,

바로 은박지에 싸인 '호랑이 고약' 스타일이 바로 고것이다.

고것을 꺼내 올리브 오일에 살짝꿍 넣어준다.

없으면 안넣어도 무방,

야채랑 볶은 올리브 기름에 삶은 리본 파스타를 넣어서 비빈다. 다음은 완성본!!


김과 김치찌게를 곁들인다.

아아, 맛나 ^0^

 

가사노동을 '가내노예노동'쯤으로 알았는데 ... 동거녀들과 살다보니까

음식을 함께 해서 나눠먹는 것, 장을 보는 것, 한 번씩 뜨건물로 설겆이 하는 거,

이런 것들이 뻐쩍지근하게 다가와서...

참 사는 것처럼 산다고 스스로 대견해하게 된다.

 

이계경 의원이 가사노동 가치를 쳐 주겠다고 그 가치를 남편 소득공제에 포함시킨다는데 ...

그러면 혼내야 쓴다.

남편 있는 여자들만 가사노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또, 가치를 쳐 줄 거시면 가사노동을 직접 한 사람에게 직접 해줘야 한다. 

게다가 여성의 소득이 연간 1200만원 이하일 경우로 한정한다.

1300만원 버는 부인은 그냥 남편 소득에서 공제받는 것이 더 편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아니면 1200만원 이하로 버는 파트타임 잡으로 옮기던가. 

 

 

노동시간이 단축돼서 집에서 좀 빈둥거릴 시간이 많아져야 한다.

시건방지게 가사노동 지가 하면 팔 뿌러지는 줄 아는 놈들은 팔 똑 뿌러져불어야 한다.

 

대신

... 뽀드득 소리나게 자기 삶을 꾸리고 예뻐하고,뭐 그런 거 하고 싶은 사람들이

그럴 기회를 가져야 한다. 집에서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맛난 거 나눠먹고 자기 삶과 다른 삶을 보듬어 케어하는 것,

그런 것들을 '쉽게'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그러니까,

가사노동을 즐길 만한 삶을 위한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노동시간은 6시간 이하, 그러고도 간단하게 살면 살만한 돈,

어느 한 사람에게만 부과되지 않는 (특히 엄마와 여성) 골고루 함께하는 가사활동,

자기 삶을 충실하고 복스럽게 만들기 위해서 하는 가사활동들.

여성의 가사노동을 가치로 환산하는 일은 단지 'home economics'나 여성학에서만

논의돼서는 안된다.

노동시간을 줄이고 기업문화를 바꾸고 삶의 패턴을 다시 재조정하는 것,

그 안에서 가사노동이 여가와 노동의 버물림으로 변하는 것...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읽는 삶보다 '가사노동'을 즐길 수 있는 삶을 갖고 싶다.

 

p.s

^^ 죽으면 내가 젤 좋아하는 사람들이 내 고기를 맛나게 요리해서 먹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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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l.k.i.n.'.t.a.l.k.

.T.a.l.k.i.n.'.t.a.l.k. 나도 이런 도덕적인 글은 쓰고 싶지 않다. 누군가에게 ‘정치적으로 올바른’ 소리를 해야 하는 것도 귀찮아. 입바른 소리라는 것이 대부분 ‘7박 8일 500원’ 비디오처럼 한 물간 스타일이지. 사실 저의 취향은 ‘1박 2일 신간 빠른 반납을 부탁드립니다‘ 입니다. 섹스를 하지 않을 자유처럼 육식을 하지 않을 자유도 있다, 꼭 섹스를 해야 하나, 버나드 쇼나 니체, 랄프 네이더처럼 무성애자로 살아가는 것도 성적취향의 한 방법인디, 마찬가지로 채식도 한 가지 방법이야, 그러니 먹을 취향의 자유를 인정하라, 여기서 끝나면 좋을 것인데. 당신은 이성애자거나 동성애자이다. 무성애자일수도 있다. 무성애자를 성적취향의 하나로 인정하라는 것은 당신의 성적 취향을 건드리지는 않는다. 하루키 소설에 나오는 나카다상처럼 고양이상과 대화로써 합의를 할 수 있다면 수간도 상관없다. 하지만 육식과 ‘정치적 채식’은 다르다. 나는 B사감처럼 당신들을 닦달해야 한다. 채식을 인정하라는 차원에서 벗어나 구질구질하게 왜 당신들이 하고 있는 ‘육식 취향의 자유’가 나쁜 것인지를 공격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채식주의자를 싫어한다. 생 까고 고깃집에 와도 애꿎은 된장국만 퍼먹는 그들이 짜증나고, 엘레강스한 프랑스 사람처럼 동물권을 인정하라는 말도 맹랑하다. 지들이 금욕주의자야, 뭐야, 요샌 도덕적으로 난척하는 것만큼 촌스런 것도 없지. 음식골라먹는 것만큼 인간 추접해보이고 깐깐하게 보이게 만드는 것도 없다. 그리고 , 먹을 것만큼 보수적인 것도 없다. 입맛으로 따지자면 나 역시 꼴통보수이다. 이해하는 것이 때로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경우도 있다. (채식에 공감하지만 실천하지 못한다는 말을, 나는 그래서 잘 이해는 한다) talkin-talk is not just talk. if you wanna know yourself you gotta do the talkin'talk Talkin' Talk -D'sound의 노래-taklin'talk (아아, 최고 좋아) 중. ‘나는 채식주의자로소이다’를 talkin'talk 하루키, 나는 왜 당신처럼 쿨 할 수 없을까요? 그래도 talkin'talk. 힘 없는 자가 할 수 있는 비폭력 저항의 실천 talkin'talk 권력을 가진 자만이 쿨 할 수 있다. 자발적인 채식주의자는 신선한 고기를 원하는 사람의 0.2%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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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본.디.시.간.을.포.함.하.는.일.이.다.

내 하우스 메이트인 휴지, 시간강사, 룸펜 쁘띠 부르조아,43살 (내게 전세집 중 한 방칸을 마련해줄 수 있는 재력이란!!) 그리고 곰이라고 불리우는 휴지의 남자친구, 28살. (곰의 액면가 40살 - -;;; 외모상 나이 차이 없음-사진을 참조하시라) 그리고 나, 스물여덟의 그럭저럭 젊은 언니. 내 파트너 52살,그럭저럭 늙은 나이. ['정이은혜의 미니홈피서'서 훔쳐보니 우에노 치즈코 정도는 무섭지 않다, 라는 책마저 나올 정도로 '무서븐' 일본의 치즈코씨께서 개호운동을 한참하고 있다고. 개호운동이란 '늙은 나 자신을 대비하는것.' 사람은 아주 어릴때와 아주 늙었을때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동물이다. 그래서 그걸 가족의 의무로부터 분리해서 곁에 둔 사람에게서 도움받을 권리로 풀어가는 것이다]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것. 혈연가족에 기대지 않아도 언제든 친밀한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고, 늙어서도 친구를 사귈수 있다는 기대감, 의존이 부끄럽지 않은 유대의 네트워크가 있다는 것. 정치적, 사회적 장치인 복지시설이 해 줄 수없는 뜨끈한 그 관계들을 마련해주는 것.] 15년 뒤, 그 사람의 똥 오줌을 받아내야 하는 처지가 되면 뭐 어쩌랴, 라는 마음이 들었다. 침해가 온 들 뭐 어쩌랴, 라는 마음도 들었다. 우리, 의존이 부끄럽지 않은 관계를 만들면 좋겠다. 내 로망이야.ㅎㅎ 그리고 나서... 나는 그 사람이 지나간 자리에서 이제 52살의 나이에 예전의 나같은 28살의 파트너를 만나 늙는 것 정도는 무섭지 않다, 라고 말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연속적 1:1 관계 (serial monogamy) 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데, 20살차이면 경제적차원을 뺀 정서적차원의 복지까지 해결할 수 있다. 그런다고.. 합의된 1:다 관계나 다:다 관계도 말리지 않겠다.(그럴 권리도 없다) 사실 그런 분들의 에너지를 나름대로 존중하고, 부러워한 적도 많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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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에.는.늘.엄.마.가.있.었.다

.부.엌.에.는.늘.엄.마.가.있.었.다. 하루키가 내 부엌으로 들어왔다, 라는 요리책을 본다. 파락호같은 자식, 이 멜랑꼬리한 재료들의 이름은 아마 그가 좋아하는 그리스 남부 섬에서나 세계화시대를 온 몸으로 껴안은 ‘갤러리아’ 백화점 지하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듯. 남자들이 쓴 요리책은 애증을 불러일으킨다. 이현우나 하루키의 요리책, 구질구질하지 않다. 요리책에서 ‘폴로스포츠’ 향이 난다. 그 책들은 서점의 ‘여성’ 코너 중 한 부분인 ‘요리섹션’에 앉아있다. 귀여운 것들. 하선정이나 서정희의 요리책은 구질구질하다. 20대의 젊은 언니에게(나 말이다;;) 그들의 책은 구구절절한 감정을 맹근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간식을 만들어보아요. 남편의 생일날 만드는 특별한 요리. 스테미너를 보강해주는 요리는 무엇일까. 그녀들의 요리책에선 부엌냄새가 난다. 엄마의 ‘방’ 부엌냄새-비린내, 젓갈냄새, 김치냄새, 마늘냄새, 그리고 엄마의 손 냄새. ‘꽃보다 아름다워’에 나오는 고두심 엄마의 냄새가 난다. 유희로서의 음식, 노동으로서의 음식. 산뜻한 얼굴로 앉아있는 ‘하루키가 내 부엌으로 들어왔다’를 집어 든다. 기왕 돈쓰는 바에야 보보스 흉내라도 내보고 싶었다. 상실의 시대에서 미도리가 브래지어 살 돈을 털어 요리기계를 샀을 때 나는 화가 났다. 엄마가 아팠을 때, 아빠의 아침밥을 차리기 위해 부엌에 들어갔었다. 밥을 먹는 시간보다 잠자는 시간이 아쉬웠던 어린 시절이었다. 브래지어를 하지는 않지만 부엌에게 요리기계를 선물할 만큼 마음 씀씀이가 좋지는 않다. 미도리가 부러워서 화가 났다. 엄마처럼 살지 않아야지, 라는 말은 평생을 부엌데기로 살지는 않을 거라는 다짐이었는데. 이 땅의 윤똑똑이 여성으로 태어난 이상 부엌은 게토였다. 그 곳에 빠지면 엄마처럼 된단다. 자식을 낳지 말아야지, 란 생각이 처음 든 것은 새벽에 일어나 도시락 여섯 개를 싸는 엄마가 꿀꿀해서였다. 하여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요리를 노동으로 여기지 않는 여성과 테러를 당할 여성의 수 중 어느 것이 더 많을까. 그 노동은 남성을 위한 것이다. 떠꺼머리를 한 아들놈이던지, 옆구리에 러브핸들이 잡히는 남편이던지. 여성은 먹을 것을 탐내서는 안 된다. 가지지 못한 것은 늘 사람을 미치게 한다. 아, 골룸을 보라. 섭식장애 진단을 받은 사람들의 95%가 여성이다. 왜 여성은 자신의 굶주림에 대해서 과잉보상하려고 하는가, 아니면 분노에 사로잡혀 더 이상 어떤 음식도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넓은 어깨, 밋밋한 허리, 좁은 엉덩이, 납작한 아랫배... 우리는 남성의 선천적 몸매를 만들기 위해서 먹을 것을 조절해야만 한다. 남성의 몸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무와 먹을 것에 대한 욕구과잉 사이. 내면의 여성성을 밀어내고 음식을 꾸역꾸역 채운다. 그리고선 자신을 짓이긴다. ‘겨우’ 먹을 것 하나 통제 못하는 밥벌레 같은 나. 자궁이 들어있는 배는 아랫배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여성의 지방층은 남성의 그것보다 두껍다. 배우지 않았던가. 속옷을 안 입었다고 등짝을 후려치던 가정선생님에게서.
자신의 몸을 능욕하기 위해서 여성은 자신이 생산한 것을 부정해야만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먹는 일은 단순한 물리적 영양섭취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사랑받지 못했을 때, 용서받고자 할 때 음식은 그 대용품이 된다. 외.로.운. 것 같아, 그래서 전화기를 드는 대신 치즈케ㅤㅇㅣㅋ을 먹어. 김나인의 미니홈피에서 무단 도용했다. 사랑받고 있다는 최초의 경험은 대개 엄마 품에 안겨 젖을 먹던 기억과 관련된다. 아이가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으면 사탕을 준다. 화이트데이와 발렌타이데이에 사랑을 전하는 기계는 사탕과 초콜렛이다. 어느 레즈비언 영화의 끝은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먹으면서 그 사람과 일체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남자들은 성적욕구를 표현하면서 널, 먹고 싶어 라고 말한다. 먹는 것이란 그런 것이다. 여성들은 먹을 것을 가지고 티격태격 싸운다. 남성은 그럴 필요가 없다. 먹는 것 이상의 먹는 것, 그 의미도 여성에게는 노동이다. 관계를 이어가는 수단으로서의 음식은 감정노동을 떠맡은 여성에게는 노동인 탓이다. 여보, 오늘 회사에서 피곤했지? 이것 먹고 힘내요.(박카스 선전 같군, 미안하다) 아가, 모유가 좋다던데, 분유만 먹는 아가 짠하지도 않냐? 직장 그만 둘 생각은 없는겨? 여성은 먹을 것을 만드는 사람이지 결코 먹는 사람은 될 수 없다 나는 널 먹고 싶어, 라고 말하는 여성을 난 도무지 본 적이 없다. (채식주의자인 내가 그런 말을 쓸 수 없지 않은가.) 아아, 골이 난 것뿐이에요. 더 이상 여성이 배고픈 이야기는 안 할란다. 오늘은 ‘여성이 먹는 이야기’를 한다. 나를 위해서 먹을 것을 만든다. 덧붙여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까지도 강매할 것이다. 이왕 꼴통 페미년이 되어서 한 세상 살아가겠다는데 ‘제대로’ 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남성과 다른 방식으로, 다른 무엇을 먹는다. 채식주의자가 된 후, 여성의 정체성이 그랬듯 먹는 것도 하나의 혁명일 수 있음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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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히.인.간

.온.전.히.인.간. 해방의 사상은 해방의 이론을 필요로 한다. 우에노 치즈코 그래서 마르크스가 여태껏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솔로레타리아 선언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의 오류는 시장이 모든 영역에 미친다고 생각했던 것에 있다. 시장 외부에는 자연과 가족이 있다. 여성은 ‘사람 아닌 사람’을 돌보는 이류시민으로, 자연은 알토란같은 부의 원천으로. 인간의 개념은 ‘인간이 아닌 것’을 맹글어 배제하는 데에 있나니. 자연과 여성 및 소수자는 ‘생사길이 예 있으매 나는 가는다 하는 말도 못 이르고’ 인간의 개념에서 팽 당했다. 그러므로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가진 가장 큰 오류는 이것이다. 여자도 인간이다, 라고 소리 지른 것. 온정을 기대했더냐. 동정심을 자극하고 싶었더냐. 떨이라도 되고 싶었더냐. ‘나는 그대를 인간이 아닌 단지 거의 원숭이 등급의 종족으로 밖에 간주할 수밖에 없다’, 거나 ‘여성은 단지 동물일 뿐이며 그것도 최상위 등급이 아닌 동물이다’, 에 맞선 페미니스트의 반격은 나는 동물이 아닌 인간이로소이다, 였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짐승에 대한 인간의 우위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라고 물으며 이성과 열정으로 인간은 짐승을 뛰어넘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여성도 이성과 열정을 가진 ‘짐승보다 우월한’ 인간임을 주장했다. 그 시절, 울스턴크래프트는 ‘페미니스트’였다. 인간동물원이란 책에는 아프리카 원시족(원시족이란 말 쓰기 싫어;;) 가족을 동물원에 가둬놓고 서유럽 사람들에게 구경시켰던 일화가 나온다. 성기가 큰 여성을 구경시켰던 것처럼. 동물과 인간의 구별은 근대 초기에 인간의 사회성을 강조하면서 도입된 것이었다. 키스 토마스에 따르면 근대 이전에는 유아, 젊은이, 가난한 사람들, 흑인, 아일랜드 인, 미친 사람들, 여성이 모두 짐승으로 간주되었다. 토마스 왈, “인간이 짐승으로 한번 인식되자, 짐승 취급을 받는 상태에서 빠져나오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인간 지배의 윤리는 인간의 관심 영역에서 동물을 제거해버렸다. 결국 이렇게 해서 동물과 비슷한 상태에 처해있는 인간을 학대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캐롤 아담스, 프랑케슈타인은 고기를 먹지 않았다. p87 그러니까, 인간의 개념은 유동적이라는 거다. 인간과 1%정도만 유전자가 다른 침팬지를 모기와 묶어 동물이라고 칭하고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니, 호랑말코 같은 기준이다. 여성할당제에 혹해서 세상 좋아졌다 자위할지 모른다. 박근혜와 전여옥이 설치니 여성도 사람취급 받는 것 같더냐. 지역구에 나오는 여성후보는 전체의 5%에도 못 미친다. 교토의정서가 통과됐다 해도 여전히 자연은 ‘침묵의 봄’이듯이 여성은 아직 인간이 아니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그저 휴머니스트일 뿐. 다음 미디어, 김윤아와의 인터뷰 중에서. ‘휴먼’에 여성이 끼어있었던 들 이런 말이 나올까. 쓸데없이 쿨 한척 하지 말 것. 여성은 여전히 환경이며 자연이다. 그 길을 질러가는 길은 여성과 자연의 선긋기가 아니다. ‘온전히 인간적’이란 말을 의심하는 것 뿐. 물론 이 말은 여성은 자연이며 남성은 문화라는 이분법을 껴안는 과정이 아니다. 남성과 여성 모두 자연과 문화의 일부이며 양자가 모두 자연과 병행할 수 있다. 단, 이러한 작업에 있어서 그들은 상이한 역사적 지위에서 출발하며 그들 각자가 기여할 수 있는 바가 서로 상이할 수 있다. 여성 특유의 자연 영역적 위치와 대립문화로부터의 배제로 인해 여성들에게 할당된 몫이 좀 더 의미심장할 뿐이다. 자연, 여성, 환경, 한신문화사 p134 생태여성주의는 자연과의 관계에 대한 논의를 페미니즘 논의 속으로 끌어들인다. 자연의 이분법적 정의, 그리고 자연의 열등한 지위를 지지하거나 도전하지 않는 여성해방은 거부한다. 정치적 운동의 일환으로서 생태여성주의는 자신들과 자연의 관계를 ‘배경화’ 내지 ‘배제’하는 단계를 넘어, 능동적이고 의도적이며 반성적으로 위치 지운다. 나는 생태여성주의의 관점에서 채식을 시작했다. 그것은 내가 여성으로서 자연과 관계를 맺는 가장 진정한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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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를 만나는 길

물고기를 만나는 길 "이른 봄의 저녁공기는 여전히 쌀쌀했다. 전철 출구로 올라온 사람들은 빠른 발걸음으로 나를 앞질러 걸어갔다." 하루가 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늘 지나던 횟집 앞을 지나간다. 수조 속에는 커다란 도미 한 마리가 기울어 진 채로 떠 있다.
도미는 점점 기울어져 이내 뒤집어져, 죽는다. 살아있던 것이 죽어 하나의 덩어리가 되는 순간.
집으로 돌아와 방 안에 들어섰을 때, 침대 위에는 아침에 버린 덩어리가 다시 놓여져 있다. 조금 마르고 검붉어진 채로. 이번에는 그것을 안고 잠이 든다. 다음날 아침 덩어리는 사라지고 그녀는 자신의 몸 안에 작은 살덩어리 하나를 느낀다. 이야기는 하나의 작은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도미에 대한 에피소드는 실제로 경험했던 일이다. 어느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정말로 거대한 도미가 뒤집어져 죽어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사람 머리만큼이나 큰 분홍색의 도미가 뒤집혀 떠다니는 모습은 일단 참 기괴했는데, 그래도 그 때는‘다 죽어가는 물고기? 횟집 수조 안에 그대로 놔두다니 저 집 장사 다했네.’ 라고 생각 했을 뿐이었다.
나중이 되어서야 그 장면이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는데 그렇게 된 건 채식을 하면서부터였다. 그것은 굉장히 신기한 변화였다. 그러려고 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몸이 채식이라는 경험을 통해서 스스로 하나의 관점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 예전엔 생각해보지 않았던 일들을 조금 생각하고, 느끼게 되었다. 작업을 진행하면서 나의 직접적인 경험으로, 좀더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이야기를 좁혀 나가다 보니 결과적으로 이야기가 ‘먹는 것’에 대한 이야기 쪽으로 많이 흘러가기는 했지만, 단지 우리가 먹는 고기-살-이 우리 자신의 살과 같은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니다. 또 나의 변화의 계기는 채식이었지만 몸으로 느끼는 감각의 변화라는 것이 그 방식으로만 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그 변화가 생각이 아닌 몸의 변화와 감각의 변화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에 중심을 두고 싶었다. 말하자면 그녀에게 나타난 덩어리는 몸에 일어난 어떤 변화와 경험이면서 나의 일부가 되어 세상을 다르게 보고 느낄 수 있는 관점과 감각이다.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부터 시작되어 생각을 변화시키는 일. 미약했지만 그런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여덟개의 방, 여덟개의 시선 중 작가 소하의 그림과 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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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하& 관계의 방

‘그날 아침. 잠에서 깨어났을 때, 다리 사이엔 작고 붉은 덩어리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야기는 한 사람이 아침에 깨어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축축하게 비 내리는 아침, 그녀는 다리 사이에 조그마한 덩어리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다.
작고 붉은 덩어리 하나. 그녀는 그것을 화장실 변기 속으로 내려 보내버린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리고는 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밥을 먹고 집을 나선다.
하지만 이미 어떤 변화는 시작되었다. 익숙하던 거리는 어딘가 낯설고 지나치는 낯선 사람들은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든다.
친구를 만나 고기를 구워먹으며 나누는 이야기들과 고기의 붉은 빛은 그날따라 쉽게 흘려버릴 수 없다. 입술 "어느 순간 부터 인지 친구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주위가 너무 시끄러웠던 탓이다.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던
그녀의 움직이는 입술과 혀인지 고기인지 모를 조그만 덩어리가 하나 보일 뿐 이었다.." 여덟개의 방, 여덟개의 시선 중 작가, 소하의 그림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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