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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t beg for the right to live, take it.

* 이 글은 쭌모님의 [이런 멋진 길을 아무 두려움 없이 걸을 수 있다면...]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성매매가 없으면 여성이 성폭력에 노출될 것이란 이야기는 이미 오래전에 오류임이 밟혀졌다. 하지만 여전히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과 닮아 있다. 두려움을 조장하여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과.. 하지만 그 전쟁은 그들을 위한 것이지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이익을 찾아 봐야 한다. 포주들의 이야기, 보수 언론의 이야기, 일부 남성들의 이야기. 그 안에는 그들의 이익이 있다. 그 이익을 찾아내 소리내어 알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여성들은 그들의 말을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머리속으로 계속 계속 생각하다 메아리 마냥 울려 어느순간 아름다운 밤길을 봐도 그들이 이야기하는 두려움이 먼저 떠올라 어디에도 못 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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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반자라는 것.

일상의 소박함을 나눌 수 있는 사람. 그게 동반자가 아닌가 싶다. 기쁜 일, 슬픈 일, 소소한 작은 것들을 함께 나누는 사람. 세상의 흔들림에 버거워 할때 그래서 자신도 잊고 해맬때 이전의 자신의 생각을 기억해주고 한마디 해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고마운 사람...나의 시간을 함께 나누는 사람. 그게 동반자가 아닌가 싶다. 그런 고마운 마음을 표현할 길이 많진 않지만 길을 걷다 고마운 마음이 불쑥 뿔쑥 들땐 울어도 된다. 고마운 마음에 눈물이 난다. 한 친구가 아래 시를 보고 짠했단다. 그 친구는 아내가 있고 아이가 있다. 항상 바쁜 친구는 바쁘다는 말만해 온 것이 너무나 미안해서 눈물이 날뻔 했단다. 내게는 고마운 사람이 있다. 그래서 눈물이 난다. 고마움을 표현하지 못하고 산 것 같아서. 오늘은 꼭 고맙다고 해야지. 내 경험을 나누고 함께 해준 것이 고맙다고.


나의 남편은 이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작자 미상 월급은 많지 않아도 너무 늦지않게 퇴근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퇴근 길에 동네 슈퍼 야채코너에서 우연히 마주쳐 '핫~' 하고 웃으며 저녁거리와 수박 한 통을 사들고 집까지 같이 손잡고 걸어갈 수 있었음 좋겠다. 집까지 걸어오는 동안 그 날 있었던 열받는 사건이나 신나는 일 들부터 오늘 저녁엔 뭘 해 먹을지...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말 하고 들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들어와서 같이 후다닥 옷 갈아입고 손만 씻고, 한사람은 아침에 먹고 난 설겆이를 덜그럭덜그럭 하고 또한사람은 쌀을 씻고 양파를 까고 "배고파~" 해가며 찌게 간도 보는 싱거운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다 먹고나선 둘 다 퍼져서 서로 설겆이를 미루며 왜 니가 오늘은 설겆이를 해야하는지... 서로 따지다가 결판이 안 나면 가위바위보로 가끔은 일부러, 그러나 내가 모르게 져주는... 너그러운 남자였으면 좋겠다. 주말 저녁이면 늦게까지 티브이 채널 싸움을 하다가 오 밤중에 반바지에 슬리퍼를 끌고 약간은 서늘한 밤 바람을 맞으며 같이 비디오 빌리러 가다가 포장마차를 발견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뛰어가 떡볶이에 오뎅국물을 후룩후룩~ "너 더 먹어~" "나 배불러~" 해가며 게걸스레 먹고나서는 비디오 빌리러 나온 것도 잊어버린 채 도로 집으로 들어가는 가끔은 나처럼 단순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어떤 땐 귀찮게 부지런하기도 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일요일 아침... 아침잠에 쥐약인 나를 깨워 반바지 입혀서 눈도 안 떠지는 나를 끌고 공원으로 조깅하러가는 자상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오는 길에 베스킨라빈스에 들러 피스타치오 아몬드나... 체리 쥬빌레나... 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콘을 두 개 사들고 "두 개 중에 너 뭐 먹을래?" 묻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약간은 구식이거나 촌스러워도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어머님의 아들이었으면 좋겠다. 가끔 친 엄마한테하듯 농담도 하고, 장난쳐도 버릇없다 안 하시고, 당신 아들때문에 속상해하면 흉을 봐도 맞장구치며 들어주는 그런 시원시원한 어머니를 가진 사람. 피붙이같이 느껴져 내가 살갑게 정 붙일 수 있는 그런 어머니를 가진 사람. 나 처럼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를 닮은 듯 나를 닮고 날 닮은 듯 그를 닮은 아이를 같이 기다리고픈 그럼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아이의 의견을 끝까지 참고 들어주는 인내심만은 아빠가 될 수 있는 사람이었음 좋겠다. 어른이 보기엔 분명 잘 못된 선택이어도 미리 단정지어 말하기 보다 아이가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줄 수 있는 사람. 가끔씩 약해지기도 하는 사람이었음 좋겠다. 아이들이 잠 든 새벽 아내와 둘이 동네 포장마차에서 꼼장어에 소주 따라놓고 앉아 아직껏 품고있는 자기의 꿈 얘기라든지 그리움 담김 어릴적 이야기라든지 십 몇년을 같이 살면서도 몰랐던 저 깊이 묻어두었던 이야기들을... 이젠 눈가에 주름잡힌 아내와 두런두런 나누는 그런 소박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던져버리지 않는 고지식한 사람이었음 좋겠다. 무리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지켜나가는 사람. 술 자리가 이어지면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할 줄 아는 사람. 내가 그의 아내임을 의식하며 살 듯, 그도 나의 남편임을 항상 마음에 새기며 사는 사람, 내가 정말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사람.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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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소통해야지

일요일에 부산에서 첫 상영을 했다.

관객과의 대화도 있었다.

 

부산 오기 전에 '이주노동자인터뷰프로젝트' 서류작업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여러명의 감독이랑 하다 보니 이래 저래 관련된 일들을 한데 몰아 해야했다.

거기다 '계속된다' 상영회가 이틀 연속 있어서 정말 제 정신이 아니었던듯..

역시 일을 몰아서 하면 안된다. 그게 다 몸으로 나타나니까.

부산에 오자 마자 콘디션 난조..결국 감기에 걸려버렸다.

그렇다고 쉴 수도 없고 그것도 부산에서 말이다. 엉엉..

그 최절정에 오른 날...관객와의 대화를 했다.

 

 



영화 상영하는 내내 난 잡생각 이빠이.

과연 사람들은 어떻게 볼까,

중간에 나가 버리면 어쩌나, 소심의 극치를 보이다

결국 저 장면을 왜 저렇게 찍었을까 자책까지 했다.

미쳤다...정말...

옆에서는 관객과의 대화 사회를 볼 오정훈 선배가 웃는다.

에공....이따 무슨 질문이 나올까..

감기 때문에 땀은 삐질삐질 몸은 으시시...

맘은 삐질, 으시시 동시다발.

긴 시간이었다.

 

'계속된다'는 선전선동을 위한 영화다.

짧은 시간에 후반작업을 하면서 오직 내가 하고자 했던 것은

내 분노를 나누는 것이었다.

이주투쟁을 함께 나눌 생각 밖에 없었다.

영화를 만들면서 관객에 대한 배려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부산영화제에 선정됐다고 했을 때 당황스러웠다.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은 것도 같고 불편하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반갑기도 하고..

작업의 완성도가 떨어짐에도 상영할 수 있었던 것은

이주노동자 때문일터인데..

 

생각 밖으로..

관객과의 대화는...좋았다.

'생각 밖으로' 라니..그러니 내가 편견이 많지.

사람들은 편견 없이 다큐를 보았는데

난 사람들이 불편해 할 거라 생각했으니...

그래서 그런지 난 아무래도 넘 수동적이었다.

말도 골라 쓰고 그런 내가 웃긴다.

사람들에 대한 배려도 좋지만 그 안에 내 편견이 부끄럽다.

 

난 소심의 극치였지만

사람들은 이주노동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투쟁을 지지했다.

고마운 일이다.

 

일관된 모습, 어디서도 당당한 모습.

내겐 그게 필요했던 것 같다.

이주노동자의 투쟁을 알리는 것이 목표였다면

관객과의 대화도 그렇게 했어야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소심했다.

반성해야지!!!!!

 

계속해서 소통해야지.

소통을 하기 위해서라도 당당해야지.

정말 진부한 이야기지만

내가 선명해야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이번 경험이 날 더 성숙시키겠지.

그래서 다음에는 작업안에서도 배려할 수 있겠지.

그리고 난 더 선명해지겠지.

 

얻은 것이 많은 시간이었다.

배려 하기 위해서

더 당당해져야지. 

더 열심히 공부하고 더 열심히 살아야지.

방어적이지 말아야지.

자유로와야지.

여유로와야지.

그래서 소통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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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신세 좋게 부산에 와있다.

온통 영화 관련된 사람들만 있는 것 같고 신기하고 신기하다.

<계속된다>는 10일 일요일에 상영한다.

표가 다 매진 됐다고 한다.

영화제 기간 중 주말에 상영하다 보니 그럴만도 한데..

영 긴장되고 걱정된다.

여러번 상영을 하긴 했지만

대부분은 이주노동자 투쟁에 참여했던 대학생들이나 관련 단체들에서

상영한 것이라 내가 전하려는 이야기를 편히 이야기할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오는 사람들이 이전과는 다를 것 같아서 걱정이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곰곰히 잘 생각해서

이주노동자 상황과 투쟁을 잘 알려야 하는데

내게 대중들을 설득하고 감동을 줄 힘이 있는 지 걱정이다.

다시 한번 자료들을 찾아 보고 연구를 해야 할 것 같다.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지도 정리해 보고...

그리고 노동허가제 입법 청원 서명전도 해야 하는데

약 장수 마냥 잘 선전을 해야 할 터인데

그래서 서명도 많이 받아야 할 터인데..

걱정이 태산이다.

 

하지만 부산에 온 것은 좋다.

오늘도 좋은 다큐를 보았다.

<검문소>라는 다큐였는데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의 검문소에 대한 이야기다.

팔레스타인 이야기는 여전히 핫 이슈다.

그러면서도 이스라엘의 폭력들이 단편적으로 그려질 때가 많았던 것 같다.

물론 그것도 충분히 중요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폭력도 폭력이지만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군인이 일상적으로

접하게 되는 검문소의 일상을 담으면서 그 안의 일상적인 폭력과 그러면서도 유머 등을

담고 있다. 그 안에 막막하게만 보였던 팔레스타인 문제의 해결책도 보인다.

그래서 반갑고 즐겁고 여유롭다.

그런 내공이 되려면 난 아주 많이 열심히 살아야 할 것 같다.

아자!!!

 

<검문소>에 대한 이야기는 담에 꼼꼼히 적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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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말의 편지

샤말씨는 출입국 관리소 직원의 추적 단속에 걸려 연행 되고 나서 서울에서 가장 멀리 있는 여수의 외국인 보호소에 감금되었다. 샤말씨는 연행된 그날 부터 단식을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열흘이 지나 샤말씨에게서 편지가 왔다. 그러니 대략 2004년 2월 25일 정도쯤에 쓴 편지 같다. 참고로 샤말씨는 한국말은 잘하는데 글은...소리나는 대로 쓴다. 상상력을 발동해 보시라. ------------------------------ To 비즐리 (슈아의 네팔 이름이다. 뜻은 번개) 얻에요? 잘 진해죠!! 아라요 항상 잘 진해는고 멀리 여수에서 'Namaste(네팔 인사, 안녕하세요)' 여기 저는 잘 진해고 있어요. 오늘 단식 10일째. 와...벌서 10일 됀내! 만희 배 골아요. TV애 음식 프로그램 열심히 보고 있어요. 진자 먹얼수 업어라도 눈에서 보고, 눈으로 먹어야지. 모 여기 보호소 옆에 먹얼게 마니 있어요. 장문에서 박에 보면 식당 아주 마니 있어요. 갠자나....팔리 나와서 맛이는고 만히 먹어야지....아 먹자 먹고 싶어.... 안이....라면....안이 지긴....oh no 힘들어 하....하....하... 동담이요. 아직 몸은 갠자나요. 여기 의사가 맬 맬 와서 걱정 없어요. 그리고 보호소 직은들 긇어개 남어지 안타요. 저에 대해 걱전 만히 해요. 걱정은 화성에 대요. 거기는 직은들 아주 "사가지 없어요" 파리 "박살"내야지 암래요. 아 좋은 소식 있어요!! 살 팢아서요. 그런대 거울 좀 볼 수 있어야 얼굴 얺어개 대냐 알수가 이는대...여기 보호소라서 거울 안주내. OKAY 비즐리씨 더구맨트리 잘 짖고 나중에 훌륭한 감독 대기 발에요. 알아지... 다음에 만나요. Good Bye. 샤말이... ------------------------------ 참 훌륭한 활동가였다. 아마 지금 네팔에서도 훌륭하게 활동하고 있을 것이다. 이주노동운동이 힘든 것은 이런 것이 아닌가 싶다. 투쟁을 하면서 남는 것은 동지이고 주체인데 그 주체가 동지가 사라져 버리니... 정신 없는 날 샤말의 편지를 다시 읽는다. 정말 훌륭한 감독이 되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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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시기 여성과 직업 - 2

이중착취: 그러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식민지 시기 여성과 직업-2 손유경 기자 2004-09-26 23:31:24 <일다는 퍼슨웹(www.personweb.com)과 공동기획으로 ‘신여성’에 관한 기사를 연재합니다. ‘신여성’의 연애와 사상, 직업과 지위 등을 중심으로 당시 사회를 살펴보는 과정은 여성의 역사를 복원하고 현재를 비추어보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연재기사의 필자는 김미지님(퍼슨웹 기획위원, 성공회대 강사)과 손유경님(퍼슨웹 기획위원, 아주대 강사, <대담한 책읽기> 공저자)입니다. -편집자 주> 남편 전용 창기(娼妓)가 되고 싶지 않다면 1920년대 초중반 <신여성> 주요 필진들은 경제적 자립을 이루어야만 여성도 하나의 인격체로 대접 받을 수 있다는 데 대해 별다른 이견을 보이지 않았다. 특히 1925년을 고비로 해서 <신여성>에는 사회주의적 색채를 띤 이론적 분석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여성도 적당한 직업을 구해 자기의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당위적 목소리는 여성으로 하여금 ‘기생충’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게 만든 사회, 역사적 조건을 탐색해 보아야 한다는 유물론적 입장과 만나게 된다. 이는 자유주의적 참정권 운동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사회주의적 페미니즘이 잡지 <신여성>에 남긴 궤적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사회적 직업을 갖고 있는 않은데다가 유모, 식모, 침모를 집에 두고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않는 여성들, 특히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생활하는 “소위 공부한다는 여자들”은 자기 남편에게 자기의 “생식기를 팔고 얻어먹는 매음녀”에 불과하다는 협박에 가까운 주장도 심심치 않게 들렸다. “하룻밤에도 여러 남자에게 생식기를 일원 혹은 오원씩 받고 팔아서 생애하는 창기나 매음녀와 이렇게 한집에 들어앉아서 다만 한 남편에게 한 주일에 두 번 혹은 세 번씩 팔아서 그것으로 매일매일 먹고 입고 마실 것을 얻는 이런 종류의 아내와는 결코 다른 점이 없을 것입니다. … 다만 서로 다른 점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는 공개적이요 하나는 다만 한 남자의 전용물임 외에는 없을 것입니다.” (주요섭, “결혼 생활은 이렇게 할 것”, <신여성> 1924년 5월호) <신여성> 1925년 1월 을축신년호는 “개인주의적 해방 즉 해방운동의 첫 계단에서 민중적 사회적 제 이 계단으로 넘어서는 노력”이 필요함을 역설하는 의미심장한 권두언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말하는 여성의 사회적 해방이란 경제적 자립을 통한 여성의 사회적 지위 상승을 뜻한다. 같은 권호의 독자논단에서 이경숙이라는 한 독자는 조선 여성의 해방을 “정신적 해방”과 “경제적 해방”으로 각각 구분하고, 후자가 훨씬 실제적이며 긴요한 사안이라고 주장했다. ‘이론’보다는 ‘실천’이, ‘정신적 개조’보다는 ‘물적(物的) 개조’가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논리다. 물적 개조, 즉 여성의 경제적 해방이 선행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의 여성이 ‘기생충’처럼 살 수밖에 없게 된 것은 그녀의 선천적 결함 때문이 아니라 물질적, 경제적 조건이라는 외부 환경이 그녀의 삶을 그렇게 강제했기 때문이었다. 바뀌어야 할 것은 ‘경제’고 ‘제도’였다. “사회가 가정을 이룬 부인의 생활보장을 해주기 전에는 결국 여자는 그 가정에 매달리게 됩니다. 따라서 남편에게 매달린 물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 이것이 고치어지려면 먼저 그 근본인 경제적, 물질적 조건이 변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는 동시에 또한 거기에 따른 사회적, 도덕적, 법률적 조건도 변동이 될 것이요 또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주요한, “처녀독본”, <신여성> 1931년 3월호)


가정은 아늑하지 않다 경제권을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사이에 피할 수 없는 예속 관계가 성립된다고 한다면, 남녀문제 역시도 결국은 넓은 의미의 계급문제라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김경재는, 전적으로 사적 공간이라 간주되는 가정 안에서의 부부관계가 사실은 ‘사유’ 관념을 바탕으로 한 경제, 사회제도를 그 모델로 하고 있음을 밝히면서, 경제적 실권을 가진 남성과 그렇지 못한 여성 사이에 형성된 주인-노예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오늘의 세상은 남자의 세상이니 국가의 조직이 남자를 본위로 하고 되었다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소위 법률이란 것이나 도덕, 풍속, 습관에 이르기까지 전부가 남자를 위하여 존재되어 있다. … 경제적으로 우월한 자가 세상에서 권력계급이 되고 경제적으로 아무런 힘을 가지지 못한 자는 사회적으로 보아 아무런 권력을 못 가지게 됨과 같이 남자와 여자의 관계도 즉 부부의 사이에서도 경제적으로 실권을 잡고 있는 남자에겐 여자가 정복을 당하게 된 것이다. … 재산을 본위로 한 자본주의의 세상이 되자 더욱 더욱 여자는 남자의 노예로 化하였고 유린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세상은 언제까지나 제한하고 지속되라는 법은 없다. 세상은 진화하는 그 법칙에 의하여 무한히 진화하고 있다. 거기에 사람이 살았다는 참된 의미가 있고 역사가 지여지는 것이다.” (김경재, “여학생 여러분에게 고하노라”, <신여성> 1926년 4월호) 여기서 김경재는 근대의 공공 분야가 지극히 성별화된 배타적 체계라는 사실과 그것을 형성시킨 사회, 역사적 조건을 함께 폭로함으로써, 근대의 공/사 구획 논리, 특히 공=남성/사=여성이라는 이분법적 논리가 덮어 쓴 자명성의 가면을 벗겨내고 있다. 이런 논리라면 여성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사유재산제도에 기반한 자본주의 제도 자체가 해소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제도 자체가 해소되어야 한다는 것은 원리적 차원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언제까지나 가만히 앉아 자본주의여 망해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현 상태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남성에게 양도한 경제권을 회수하는 것이었다. “여성의 적은 남편이 아닌 자본가” 이와 같이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자들은 여성에게도 사회적 노동을 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는 것, 그리고 여성해방은 궁극적으로 사회구조의 혁파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시키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직업여성의 최후의 적은 남편이 아닌 자본가임을 강조하는 논의는 자칫 성별모순을 계급모순으로 흡수, 환원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한 한계를 지닌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무엇보다도 조선의 여성해방운동은 자본가를 타깃으로 삼아야 한다는 논조의 글들이 많이 발표되었다. “금후의 여성운동은 노동자계급의 계급투쟁과 합류하는 노동부녀의 대중적 활동이 활발히 진전되는 것”(윤형식, “1931년의 여성운동과 금후 전망”, <신여성> 1931년 12월호)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직업을 가진다 해도 경제권을 찾을 수는 없으리라는 위기의식을 불어넣음으로써 직업부인의 계급의식은 한층 효과적으로 고취될 수 있었다. 여성도 무조건 경제적으로 자립해야 하니 직업전선에서 부대끼자고 선동하는 일과, 일터에서 이루어지는 자본가에 의한 착취를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는 작업은 동시에 진행되었다. “어떤 엄정한 의미에서 말하면 직업부인이 된다는 것도 역시 돈 있는 사람에게 공공연하게 팔리는 것”(일기자, “여성평단 - 부인직업문제”, <신여성> 1926년 2월호)임이 누차 강조된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자본주의 사회는 어떤 경우에도 ‘노동자’에게 경제권을 양도하지 않는다는 새삼스런 진리를 깨닫는다면, 조선의 직업부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도 계급모순의 해결을 일차적 과제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여성 - 이때껏 우리는 막연히 조선여성 조선여성 하여왔다. 그러나 구체적으로는 조선여성에도 아래 위 두 층이 있다”(한철호, “사회시평”, <신여성> 1933년 3월호)는 것이다. 조금도 신성하지 않은 사회적 노동 그렇다면 직업부인이 가야 할 길은 무엇인가. 사회에서까지 착취를 당하느니 집에 머물며 사회적 노동보다 훨씬 ‘신성한’ 일을 전담하라는 것인가? 좌절하지 말고 직업전선에 부대끼라는 것인가?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은 대체로 전자의 입장을 위해 손을 들어 주고 있다. 사회주의적 색채가 짙은 글들의 궁극적 귀결점이 직업부인으로 하여금 밖에서도 착취를 당하느니 차라리 집에서 가사와 육아를 담당하는 것이 현실적 해결책이라는 데로 이르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메리카의 수백만 여자는 가정과 자녀의 보호를 단체 사업에 맡기고 자기는 사회적으로 유익한 직업인 상업에 종사한다. 그러하나 … 부인이 아무리 훌륭한 의논을 평화회에서 토할지라도 그 자녀가 육아실에서 서로 치고 서로 때리면 그 탁론이 무슨 힘이 있으랴? 또 부인이 윤리회의에서 첩첩요설의 이구(利口)를 부릴지라도 그 부인이 참혹한 독신생활을 하는 남자 하나도 구하지 못한다 하면 그 윤리회에서 요설을 부림이 무슨 유익이 있으랴?” (김윤경, “부인문제 其三 - 부인직업문제”, <신여성> 1924년 11월호) 위의 기사는 자유주의 여성운동가 엘렌 케이의 사상을 소개하고 있는 글이다. 그러나 어머니 노릇과 아내 노릇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려 한 엘렌 케이의 한계는 여성에게 남성의 보조자 내지는 자녀 양육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할 것을 권유한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자들에 의해서도 고스란히 반복되고 있었다. “몇 푼 받는 직업 때문에 가정의 풍파가 일어나고 집안 꼴이 말이 아니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한 주부로서 사회의 기초가 되는 가정만을 완전히 만들어 나가는 것만 같지 못하다. 자녀가 있는 이로 직업을 가지는 것은 자녀에 대한 죄악이다.”(김자혜, “직업여성과 가정”, <신여성> 1933년 4월호) “자본가의 미끼”가 되고 있는 부인의 사회적 노동은 “착취가 따르는 직업노동. 정조를 위협하는 직업노동”이기에 “조금도 신성치 않다”(石南, “권두언 - 직업(노동)은 신성한가?”, <신여성> 1933년 4월호)고 폄하되었던 반면 가사노동과 출산, 육아의 가치는 적극적으로 격상되었다. ⓒ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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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들갑^^

블로그홈을 보는데 익숙한 사진이 있었는데 그래도 습관 처럼 그냥 넘어 갔는데 다시 보니 옆에 있는 사진이군요. 우앙...신기합니다. 추천블로그가 되다니... 우앙... 아마도 블러그 관리 안한다고 열심히 하라고 추천블로그에 올라 간 것이 아닌가....뜨끔하네요. ^^ 깁스를 풀었습니다. 사실 그래서 앉아 있는 것 보다는 나다니는 것에 흥미를 느껴서 컴 앞에 잘 앉아 있지도 않습니다. 집에 있을 때도 걸어 다니는 제 자신이 넘 신기하거든요. 제가 낼 수 있는 걸음걸이의 속도의 발전에 쾌감을 느낍니다. ㅋㅋ...아이 같죠.^^ 그래도 생각했던 것 보다는 빨리 걸을 수 있어서 기쁨니다. 하하하... 사실은 아직 제가 블로그를 통해서 어떤 것을 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형태가 안 잡히니까 뭐라도 하나 올리기가 힘들고 그러네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어떤 것이 있는지 여전히 고민 중입니다. 추천 소개에 나와 있는 것 처럼 다큐를 통해 세상을 자알 볼 수 있을까요? 아마도 다큐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런 소통을 함께 나누는 공간이 되었으면 하는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지... 다큐를 하면서 알게 된 것들...느낌...생각...여러가지..등을 나누고 싶은데...그러한 것들이 정말 많은데... 느낀 것 만큼 글로는 안나오는 거 같아요. 글짓기 재능도 없고.. 그래서 아직은 일로 다가오네요. 그래도 조금씩 조금씩 노력하려고 하는데... 노력이 부족하죠...^^헤헤.. 에공...추천 블러그된 거 자축 글을 쓰려다가 변명만해버렸네요. 아자...열심히 해야지... 많은 이야기 같이 나눠요오~~~쑥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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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 ~ 하지만 평화로웠던 시간

벌써 달이 바뀌고 추석의 흔적이 없어지긴 했지만 명절에 대한 한가지 추억... 우리집은 기본적으로 여자들이 강하다. 엄마를 시작으로 아래로 이모들이 넷있고 그 우두머리에 할머니가 있는데 다들 강하다. 강하다기 보단...자신들의 의견을 숨기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그런지 명절 날에도 시집간 여자들이 버젖이 친정에 모이는 일이 자주 있다. 사실 어렸을 때는 그게 너무 당연해서 잘 몰랐는데 점점 나이들면서 흔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한번은 할머니, 엄마, 이모들, 이모 딸, 나, 여동생 등 이렇게 여자 삼대가 모여 있었다. 나이로 치면 할머닌 70살이 넘으셨고 조카는 초등학교를 들어 갔나 그렇지 않았나 하는 그 언저리 였다. 나이 차이 어마어마했다. 참 신기한 것은 모든게 자연스러웠다는 거다. 할 일이 많긴 했던 것 같은데 억울하다거나 피곤하단 느낌이 없었다. 다들 모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일을 했던 거 같다. 밥을 차릴 때도 누구는 국을 데우면 누군가는 상을 피고 누군가는 상을 차리고 누군가는 반찬을 그릇에 담고 누군가는 수저를 놓고 누군가는 밥을 푸고 누군가는 그것들을 나르고 각자 자연스럽게 누가 누구 보러 어떻게 해라 뭐 해라 그런 이야기 없이 계속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웃고 떠들면서 그런 것들을 해내는 것이다. 참 편한 느낌이었다. 각자 자기 일을 알아서 하는 상황.... 나도 식사 끝내고 싱크대에 수북이 쌓인 설거지 거리를 보면서 억울하지 않게 오히려 저 여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있군 하며 설거지를 했던 거 같다. 여하튼 그때 분위기는 평화롭기 까지 했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그 평화는 나이도 얼마 안 먹은 이모부가 오면서 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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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오늘 부산영화제에 상영할 자막을 대략 마치고 시간이 남았다. 남았다고 말하면 뭐하고.. 일이 손에 안 잡히는 것을 꾸역꾸역하고는 시간이 남았다. 근데... 이런... 갑자기 한가해져 버리니까 멍해져 버렸다. 막상 할일은 많은데 급한 불만 끄는 스타일이라 급한 불 끄고 나니... 갑자기 뭘 해야 할 지 모르게 되었다. 이런... 옛날에는 친구들이랑 잘 놀았던 거 같은데.. 아니 혼자서도 자알 놀았던 것 같은데... 이제 기억이 안난다. 뭘 하고 놀았는지.. 그래서 괴롭다. 술 먹는 취미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 능력도 없고.. 왜 이렇게 됐나 모르겠다. 아 아 아 아 아..고 괴롭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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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름을 기억하다...

이주노동자 인터뷰 프로젝트에 대한 대략의 평가를 해야 할 때가 된 거 같다. 한여름을 통으로 인터뷰 프로젝트와 보냈다... 평가를 하려니.. 덥기도 하고 비냄새가 나기도 하고.. 인터뷰 촬영 내내 비가 내렸다. 밤이면 도둑고양이 마냥 이주노동자와 함께 미디액트에서 인터뷰를 했다. 하루 하루 인터뷰가 잘 진행 될까 걱정하면서 지냈던 기억이 난다. 인터뷰가 시작하면 난 할 일이 없다. 이주노동자를 믿고 연출자들을 믿고 그저 기다려야 한다. 그럴때면 광화문 네거리 가로등 그리고 비가 있었던 거 같다. 참 무모한 프로젝트였단 생각이 아직도 든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정말 프로젝트 참가자들이 너무 착했다는 거다. 성질 나쁜 나를 참 잘 참아주고 열심히 이주노동자와 함께 하려고 했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참 착한 사람들이다. 평가를 하려고 함께한 사람들을 어림 잡아 보니.. 50여명이나 된다. 이주노동자, 독립영화 만드는 사람들, 학생, 공익요원, 프로덕션에 다니는 사람, 영화기획사에 다니는 사람, 스틸 찍어 준 사람 등 참 많은 사람이 함께 했다. 난 그들 모두와 열심히 소통했나.. 내 욕심에 잘해야지 하는 내 욕심에 누군가를 소외시키지는 않았나.. 에공 자신이 없다.^^;; 이주노동자 프로젝트, 이주노동자의 이야기와 그들과 여름을 함께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인터뷰 프로젝트 페이지로 가시려면 위 사진을 살짝 눌러 주세요^^


그 모든 사람들이 아직도 진행 되고 있지만 인터뷰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함께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뭘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주노동자들 때문이다. 이제 삼백일 넘게 투쟁하고 있는 그들 때문이다. 처음 시작한 투쟁이긴 하지만 그들은 지금 삼백일을 넘게 명동성당에서 투쟁하고 있다. 한국의 겨울을 바람 골목에서 보내고 새해를 맞고 봄을 맞고 여름을 보내고 이제 가을이다. 언제 잡혀서 이곳의 삶이 송두리체 빼앗길지 모르는 상황에서 동지들을 하나 둘 잃으면서 그들은 사계절을, 한국의 지금을 누구 보다 격렬하게 겪으면서 왔다. 그리고 외치고 있다. 이주노동자도 노동자고 이 사회의 한 구성원이라고.. 그 온전한 삶에 대해 누가 연대를 보내지 않을까.. 누가 그들과 함께 하고 싶어 하지 않을까.. 그런데 우린 정말 준비 되어 있나. 한국의 노동자들은 준비 되어 있나. 이주노동운동의 주체는 이주노동자다. 그들은 자신의 운동을 더 앞으로 끌고 나갈 거다. 하지만 우린 그들과 연대할 준비가 되어 있나. 나의 다음 질문이 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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