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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세미나를 한다. 한동안 끊었던 세미나를. 하도 공부를 안했더니..머리에서 통 소리가 난다. 아마 통 소리가 났어도 안했을 수도 있다. 오랫동안 그렇게 살았으니까. 하지만 뭔가 알고 싶어졌나 보다. 다큐에 대해 말이다. 그래서 세미나를 시작했다. 한텀이 끝나고 이제 새로운 커리로 시작한다. 역시 공부는 좋은 거다. 사랑하는 사람을 더 잘 알게 되었으니. 아주 오래전에 한 십년은 넘은 시간 전에 그를 알게 되었다. 아니 그의 다큐를 알게 되었다. 제목은 <베트남, 돼지의 해>. 처음 볼 때는 졸았다. 어찌나 인터뷰가 많고 게다가 영어로 말하니 뭔 소린지. 그런데 두번째 보고 잠이 깨고 세번째 보고 전 존재가 떨리는 경험을 했다. 전 존재가 떨린다. 그런데 다른 표현이 없는 거 같다. 69년에 만든 다큐인데 베트남전에서 미국이 질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거다. 조목 조목..여러 가지 사실들 중에서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고 알고 있는 것들을 하나둘 보여준다. 그 다큐는 68년 이후 조금씩 싹트고 있던 반전 열풍에 불을 지폈다. 기름에 불을 던진 셈이다. 그 역사의식에 박수를 쳤다. 아 이거 해보면 재미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포즈... 한동안 난 이러 저러한 것들을 하러 이리 저리 뛰어 다닌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그 다큐를 봤을 때의 떨림을 잊을 수가 없었던 듯 하다. 그러다 다큐를 시작하고... 그런데 그런 그를 만났다. 세미나 책에 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있었다. 한 십이년 만의 재회인 듯 하다. 그때는 그의 이름도 몰랐다. 이젠 그의 이름을 안다. 에밀 디 안토니오. 에밀 디 안토니오


History is the Theme of All my Films AN INTERVIEW WITH EMILE DE ANTONIO - source : From an interview by Gary Crowdus and Dan Georgakas, in Cineaste, 1982 Emil De Antonio(1920~1989)는 펜실베니아의 태어났고 일찍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했다. 바지선 선장, 선생님, 부두 노동자 등 몇 가지 직업을 전전한 후 1964년, 그는 맥카시 공청회에 대한 편집물, Point of Order!를 들고 영화 영역에 발을 디딘다. 그 후 그는 다수의 자신의 좌파적 견해를 반영한 다큐를 제작했다. In The Year of the Pig(1969) : 베트남 전쟁에 대한 Milhouse : A White Comedy(1971) : 닉슨 대통령을 풍자한 영화 Underground(1976) : 급진적인 반자본주의자의 지하활동에 대한 영화 Painters Painting(1972) : 전후 뉴욕 화가 학교에 대한 전형적이지 않은 다큐멘터리 Mr. Hoover and I : 그가 죽기 전에 마친 이 영화는 자화상 같은 것이다. 만 페이지 달하는 그에 대한 FBI의 문건, 그는 그것을 정보의 자유 법령을 기반으로 해서 법정 소송 끝에 회수했다. Q: 어떻게 In the Year of the Pig 와 같은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되었는가? 당신은 당신이 설명하고 싶은 정치적 논제를 기반으로 출발하는가 아니면 먼저 조사를 하고 입수할 수 있는 소재들을 가지고 구성을 해본 다음에 시작하는가? De Antonio : 좌파적 입장을 견지하며 모든 작업을 한다. 그 영화는 분노, 분개, 열정이 동기였다. 그 열정은 결국 전쟁의 전체 역사에 걸친 조사를 하게 하고 그 범위는 전쟁의 초기에서부터 영화를 마친 해 신년 공격까지를 포괄하게 된다. 영화제작은 그 자체로 역사이다. 솔직히 말한다면 역사는 내 작업의 주제이다. Q : 관련 자료들을 모두 읽은 후에 당신의 얻은 대체적인 윤곽을 바탕으로 이미지들을 찾는 것에 당신은 흥미를 느낀다는 것이죠? 요컨대 어떤 영화 제작자들은 많은 영상 자료들을 뒤지고 거기서 영화를 찾아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 반해서. A : 네 그렇습니다. 맞아요. 나는 책들을 읽고 나서 주제에 관한 혼란스러운 초안들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연대기적인 방식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역사적 윤곽을 따라 가려 했다. 친구 중에 하나가 박스 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는데 그 친구한테 큰 종이를 얻어 와 사무실 벽에 붙이고 중국의‘한나라’에 대해서 쓰기 시작했다. 비록 ‘한나라’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나의 영화에 없지만‘한나라’는 베트남이 중국을 경험한 처음 시기여서 의미 있었다. 내가 명확하게 ‘Dien Bien Phu, 1954, May 8th’를 벽에 썼을 때 거기에는 추상적인 개념들이 있었다. ‘고문’, ‘무자비’. 때로는 몇 개의 사진들을 아무렇게 붙였다. 비쥬얼한 이미지들은 내겐 단지 벽에 쓰인 단어들과 같다. 대략의 윤곽이 잡히면 난 필름 조사로 넓힌다. 이를테면 나는 NLF의 메인 사무실이 있는 프라하에 갔다. 그들은 내게 많은 양의 영상들을 줬다. 내가 독일에 갔을 때 거기에서 난 소련 사람을 만났다. 그는 나에게 로만 카르멘의 Dien Bien Phu 전투에 대한 영상의 재사용권을 주었다. 또한 나는 프랑스 군대 필름 도서관에도 갔다. 그곳은 존재하는 베트남 영상 자료실 중 최고이다. Pierre Schoendoerffer 의 1902년 영상도 있다. 그것은 아무도 보지 않은 영상이다. 나에게 두 명의 군인이 붙었는데 그 중 한 명이 내게 말했다. ‘여기 관련자들이 당신에게서 그것을 뺏어 갈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당신이 누군지 안다. 아마 당신은 이것들 중에서 한 프레임도 못 얻을 거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했을 때 나는 이미 그 필름을 통째로 집은 상태였다. 미국에서는 구할 수 없는 아름다운 영상이 the Pig에는 있다. 베트남의 프랑스 통치자와 함께 호치민이 전투함에 있는 장면 같은. 그 영상은 매우 중요하고 상징적인 장면이다. 왜냐하면 지금 전쟁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매우 상징적인 장면이다. 호치민이 그 배를 떠날 때 프랑스식 경례를 하면서 담배를 입에 물고 있다가 무심결에 툭 던지는 그런 장면, 나는 그 장면을 가져야만 했다. 나는 애새끼에게 이야기를 했다. '나는 이걸 훔칠꺼야. 밖에 나가 있을래. 나는 니가 휩쓸리는 것이 싫어.’ 그래서 난 그 장면을 35mm 필름 속에서 잘라서 내 호주머니에 넣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들이 현재 내가 뭘 하는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나서부터 그 건물의 정문에서 총 들고 있는 몇 몇 사람들이 나를 제지할 좋은 기회가 있었다. 그들이 날 체포했다면 프랑스에서 오 년형 정도 받아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훔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영화를 만드는 것은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Q : 영화를 프로파간다로 만들어 버리는 것에 대해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A : 영화 안에서 밖으로 표출되는 프로파간다가 있다. 분명히, 근데 난 프로파간다와 열정의 차이, 프로파간다와 정치의 차이를 잘 모르겠다. 하지만 표출되는 프로파간다가 있다. 호치민을 좋게 보이게 하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한 무리의 어린이들에게 둘러 쌓여 있는 호치민의 사랑스러운 장면이 있는데 댄 베리건은 나레이션을 한다. ‘베트남 인민들은 소박한 생활을 하는 지도자를 갖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나는 호가 살았던 장면도 사용을 했다. 그곳은 작은 타자기가 있고 여벌의 베트남 옷이 걸려 있는 그런 작은 소박한 공간이었다. 내가 1969년 콜롬비아 대학에서 이 영화에 대해서 강의를 할 때에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영화에서 샘3 미사일이 미국 비행기를 때려 버리는 장면이 영화에 있었는데 비행기 안에 있는 미군이라는 표시가 선명하게 보이는 체로 첫 번째 비행기가 날아 올랐는데, 그 비행기가 격추되자 거기에 있는 관중들이 박수를 보냈다. 나는 시발 이상하다. 안 그냐? 내가 뭐 한 거지? 내가 만약 공군에 있었고 비행도 해봤고 그리고 그 장면을 그냥 편집책상에서 봤다면 박수 같은 것은 안 쳤을 거다. 내 반응은 복잡했지만 그 사람들이 옳았다. Q : 편집에 대한 당신의 접근법은 무엇입니까? A : 나는 굉장히 느리다. 2주만에 새로운 편집을 한다. 그렇다면 그건 내 영화가 아니다. 난 편집할 때 정말 열심히 한다. 만족할 때까지 한다. 나는 편집할 때 항상 전체 그림을 그려놓고 한다. 내가 어떤 한 장면을 끝냈을 때 그 장면이 어떻게 보이는지 처음부터 다시 돌려본다. 그래서 그 장면에서 내가 만족할 때까지 계속 작업을 한다. 예를 들어, Pig 에 적절한 엔딩을 찾는 것은 진짜 문제가 뭔지를 보여줬다. 원래 내가 쓸려고 했던 엔딩 장면은 하노이 사람들이 나에게 줬던 몇 영상들이었다. 나는 그 영상을 몇 주 동안 봤다. 그 장면 동안 그것은 북 베트남의 어떤 길거리를 찍은 조용한 장면이었는데 갑자기 길 주변의 숲풀들이 일어났다. 베트민(호지명을 지도자로 하는 1941~1954년의 베트남 독립 동맹(군), 그 일원)이었다. 베트민이 돌격해 왔다. 나는 생각했다. '나는 재수 없게도 미국인이다. 무슨 말이냐면 나는 북베트남이 이기기를 바란다. 나는 미군이 비도덕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난 맑시스트이다. 하지만 난 베트남 사람이 아니다. 그 장면을 쓰는 것은 베트남인의 영화에게는 적당할 수가 있다. 하지만 나는 미국인이다.' 그래서 나는 결정했다. 우리가 비록 미국임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사람들이 우리를 단죄할 수 있음을 보여줘야겠다고 결정했다. 그래서 나는 눈 주위에 붕대를 한 부상당한 미군들 죽은 미군들, 실명한 미군들 빠져 나오는 미군인들을 찍은 모든 영상을 썼다. 그러고 나서 그 장면이 있음 다음에 남북 전쟁의 어떤 상황 하나를 이어서 붙였다. 게티스 버그에서 죽은 어떤 청년의 모습을 담은 영상 하나를 넣었다. 그리고 그것을 뒤집어서 네거티브 필름에 넣었다. 그래서 보여줬어. 베트남에서의 우리의 이상이 1863년에 죽었던 그 청년의 이상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리고 그 장면에다가 'The Battle of Hymn of the Republic'의 스크래치 버전을 거기에 추가시켰다. 나에게 있어서 그것이 적절한 엔딩이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결론이었다. Q : 당신은 당신의 관객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당신은 누구를 위해서 영화를 만드느냐? 당신은 어떤 종류의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느냐? A : 위대한 미국인 월트 휘트만이 말했다. 니가 위대한 시를 쓴다면 너는 위대한 독자를 만날 거다 라고 이야기를 했다. 나는 역사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내 영화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관심이 많다.(역사가 어떻게 내 영화를 평가할지 관심이 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들이 보길 원한다. 나도 더 많은 관객을 만날 수 있다면 내 영화를 바꾸는 것말고는 뭐든지 할거다. 하지만 미국과 대부분의 서구 자본주의 국가에서 영화는 엔터테인먼트처럼 일종의 아편으로 보여졌다. 나는 결코 헐리우드에 영화를 보내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다큐멘터리를 헐리우드에서 영화를 만들기 위해 거쳐야 하는 길목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재수 없다. 나는 언제나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것을 선택했다. 나는 다큐멘터리를 사랑한다. 나는 다큐멘터리의 정치적 전통을 사랑하고 그리고 다큐멘터리 영화가 다루는 그 주제들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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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는 것은 없나...있겠지

얼마전에 이라크 관련 책을 다섯권이나 샀다 그 중 제일 편한 책 한권을 읽고서는 손도 안됐는데..오늘 다른 책을 시작했다. 그런데..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언제적 것이든 다 똑같다.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항상 같다. 옷만 다르게 입는다. 그래서 참 환장하겠다. 물론 국민은 전쟁을 원하지 않습니다. ......... 하지만 결국 정책을 결정하는 건 그 나라의 지도자들입니다. 그리고 국민을 끌고 가는 건 언제나 간단한 문제입니다. ........국민들에게 공격을 받고 있다고 말하기만 하면, 그리고 평화주의자들은 애국심이 없고 나라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고 비난하기만 하면 됩니다. 어느 나라에서나 똑같이 효과가 있습니다. (헤르만 괴링, 1946년 뉘른 베르크 재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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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치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한참 접영을 하고 있었을 텐데.. 다치지만 않았어도 이주동지들이랑 영화를 하나 찍었을 텐데 이주동지들이 시나리오 쓴다고 비즐리가 찍어 했는데.. 다치지만 않았어도 이라크에 갈 준비를 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다고 열심히 자료들을 찾고 사람들을 만나고 그 전에 몰랐던 나의 새로운 면들을 보면서 반갑게 일했을 텐데... 다치지만 않았어도 정말 다치지만 않았어도 자전거 신나게 타면서 이 가을을 한껏 느꼈을 텐데.. 아..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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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 part 3

1. 방글라데시 방글라데시...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무대뽀였던 듯 하다. 그냥 간다란 생각으로 가긴 갔는데 짧은 기간 동안 원하는 그림을 찍어야 한단 생각에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외국에 나가면 느끼는 해방감이 있다. 그래서 은근히 외국에 나가는 것을 즐겼던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난 그 사회의 구성원이 아니기 때문에 예외가 되는 상황. 난 아마도 그런 '이방인이 되는 것'을 즐겼던 것 같다. 사람들의 걸음 속도와는 다른 속도로 걸어도 되고 길 가다 한쪽 층계에 앉아 물줄기 처럼 흘러 어디론가 가버리는 사람들을 쳐다 봐도 누가 뭐라 하는 사람이 없는.. 그런데 방글라데시는 그게 아니다. 혼자서는 밖에 못나갈 수도 없었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밖에 한번 나갈라치면 온동네 사람들이 다 쳐다 본다. 여자 혼자 잘 다니지도 않거니와 외국여자이기 때문에 멀리서도 잘 보였나 보다. 같이 지내던 사람들도 그런 상황때문에 날 혼자 절대로 내보내지 않았다. 누군가 같이 갈 사람이 있거나 아니면 누군가 와서 데려 가는 상황이 되지 않으면 아에 밖에 나가게 하질 않았다. 이야기로 들으면 무슨 감옥 같겠지만 그게 그 사회의 소통이니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그 자연스러움을 자연스럽게 느끼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이 답답한 것뿐이지. 2. 또이모르, 이주 그래도 인복은 있었던 것인지 얼굴 한번 본 적도 없는 날 기꺼이 기거하게 해준 사람이 있었다. 한국에 7년 있다 돌아 간지 3개월 된 이주노동자 또이모르. 한국에서 출발 할 때 얼굴도 모르는 그에게 무슨 선물을 해야하는 지 다른 이주노동자들에게 물어 보니 '소주' 란다. 이슬람권 나라다 보니 술은 안된다. 그럼에도 이미 한국에서, 술 없이는 안되는 사회에서 십년 가까이 살고 간 이주노동자들에게 소주는 이미 금기가 아니다. 다른 분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네팔에서는 개고기를 먹는 것이 불법이란다. 아니 사람으로도 생각 안하는 듯 하다. 그런데 한국에서 이주를 경험했던 이주노동자들이 네팔에 돌아가서도 그 맛이 생각이 나 동네에 많이 돌아다니는 개를 잡아 먹다 들켜서 신문에 났단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이 어디서 이런 걸 배웠냐 하니 '한국에서 배웠다고' 하드란다. 웃긴 이야기지만 이주란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다른 곳에 가서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가서 사는 것이라는 사는 것은 서로 서로를 물들이고 스며드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스며들다..그래서 내가 아닌 내가 되어서 당혹스러워도 여전히 그게 나인걸 확이해야 하는 것, 그러다 그 당혹스러움도 어느새 일상이 되어 버려 이젠 또 다른 내가 되는 것... 그런데 한국에서의 이주는 그게 일방적이다. 이주노동자만 그렇게 살아야 하고 우린 여전히 그들과 살지 않는다. 3. 또이모르, 옥상 여하튼 또이모르씨도 소주가 반갑지만 부인에 어머니에 보는 눈이 너무 많았던 것인지 가방에서 꺼내 보여준 소주를 다시 집어 넣으면서 웃기만 한다. 또이모르씨는 내가 약속을 잡을 때도 약속 잡은 집을 갈 때도 항상 같이 했다. 그러니 그와는 이야기 할 기회가 많았다. 거기다 그의 한국어 실력은 대단하다. 마치 친구 마냥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말에 뉘앙스도 있다. 반가운 일이다. 거기다 생각도 깊고 감성도 풍부하며 예민하다. 이런..아주 좋은 주인공 감인데... 그런데 그는 카메라가 싫단다. 그래서 그 많은 시간 동안 같이 있었는데도 그를 촬영할 수 없었다. 그는 카메라가 조금이라도 자기를 향할 것 같으면 돌아 앉거나 돌아서버린다. 참말로... 옥상... 40도 가까이 되는 더운 날에 유일하게 시원한 시간이 있었는데 그건 옥상에 올라 갔을 때다 해가 뉘엇뉘엇 지는 시간에 그곳에 가면 어찌나 시원한지... 또이모르씨도 한국에 있는 동안 유일하게 그리운 곳이 옥상이었다고 한다. 그 옥상에 해가 지는 시간에 올라가 별이 총총 보일 때까지 있곤했다. 그러면 그는 참 많은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이주에 대한 그의 생각.. 뭐가 그리웠는지. 왜 이주를 하게 되었는지.. 그런데 그 이야기를 담을 수 없었다. 이야기를 하면 할 수록 그 이야기를 담고 싶어 난 아쉽고 아쉬웠다. 그러다 한국으로 출발하는 그날..몇시간 전 그는 인터뷰에 응해줬다. 얼굴은 나오지 않게 해달라는 조건이 있었지만 그는 이제 나의 친구였다. 친구에게 이야기를 하는 거였다. 나는 소중히 담았다. 그는 이주를 통해 얻은 것과 잃은 것에 대해 이야기 해달라는 나의 말에 얻은 것은 뭔가를 얻으려면 무언가를 잃어야 한다는 것이고 잃은 것은 자기 나라를 잃었다고 했다. 20대라는 시간...그 시간은 한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를 배우는 시간이라고 그런데 그 시간에 다른 나라에 가서 살고 왔으니 자기 나라가 자기 나라 같지 않은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어떻게 적응을 해서 살아가야 하는 지 막막하다고.. 막막했다. 이주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멀리 방글라데시 까지 왔지만 난 이주에 대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자기 나라가 자기 나라 같지 않다니..그럼 그는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한국에서는 불법체류자, 자기 나라에서도 구성원으로서 소속감이 없고. 이게 이주란 생각이 들었다. 어디를 가도 소속감이 없는 그래서 영원히 부유해야 하는 상황...그게 이주의 경험이 아닌가... 지금도 그를 생각하면 가슴이 막막하다. 그는 잘 적응해 가며 살고 있나. 그는 이제 방글라데시 사람이 되었나... 만나 보고 싶다. 하지만 그게 또 그를 더 더디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가 잘지내길 바란다. 좋은 친구, 내게 이주에 대해 이주의 본질에 대해 온존히 알게 해준 좋은 친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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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회를 마치면

깁스를 한채로 진주까지 갔다 왔다. 화요일에는 공주교대, 오늘은 진주교대. 일주일에 지방에 두번씩이나 불편한 몸으로 왔다 갔다 하려니.. 몸이 불편한 것도 불편한 것이지만 주변 사람들이 깁스를 한 나 때문에 이래 저래 신경 쓰는 것이 너무나 미안했다. 하지만 그래도 상영회를 하고 나면 난 마음이 편안해 진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은 열한시간 왔다 갔다 한 사람치곤 그런 대로 생생하다. 다큐 상영이 끝나고 나면 두가지 맘이 든다. 너무 사람들을 답답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지기도 하고 사람들이 갑갑해 하는 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미안한 마음은 다큐가 끝나고 나면 사람들의 숨소리가 거칠고 낮아 지는 것 때문이다. 워낙에 불편한 분위기를 즐기지 못하는 사람인 나는 사람들이 막막해 하는 것이 힘들다. 그래서 조용히 이야기한다. "막막하시죠. 죄송해요. 하지만 제가 원래는 웃기는 사람이거든요. 근데 워낙에 다큐를 만들 때 화가 나있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그런다. 그러면 더 썰렁.. 하지만 그게 사실인걸... 다큐를 만들때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화가 나면 화를 내면 되는 데 어디 화를 낼 때도 없고 그리고 화를 낸다고 바뀔 상황도 아니니...그런 현실 속에서 이주동지들이 살아 왔다는 것이 화가 나기도 하고...막막했던 것 같다. 농성단 대표인 샤말씨가 잡혀 가고 나서의 그 막막함이란... 샤말씨가 대표라서가 아니라 한국 정부가 행동이 뭘 의미하는 지. 그렇게 열심히 외쳤던 것들이 모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현실이 화가 났다. 그럼 이 투쟁은 뭔가. 한 겨울 그 추운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농성한 사람들은 뭔가. 정말 십여년을 이 땅에서 열심히 당당히 살아온 이 사람들은 뭔가. 왜 눈 앞에 있는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는 건가. 그때 분노가 뭔지 알게 된 것도 같다. 편집하는 내내 울었던 기억이 난다. 마우스를 쥐고 비두씨가 '나 권리 있어'외치던 클립을 트랙에 올리면서도 케이비씨와 헉씨가 잡혀 가던 상황에서 카메라를 들고 막지 못한 내가 싫어서, 샤말씨가 조용히 '저는 이 투쟁 책임 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도, 라디카 언니가 '마지막까지 동지들이랑 같이 있고 싶다'고 할 때도, 그 말에 '저도 라디카 누나랑 끝가지 할 겁니다' 라고 답하는 굽다씨를 볼때도,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이 이리떼 처럼 달려와 굽다씨를 연행하는 클립을 올릴 때도 울었던 것 같다. 한참을 울고 나면 지쳐서 한동안 편집 할 수가 있는데 그러다 그게 서러워 또 울었던 것 같다. 참 노골적이다. 그래서 지금 보면 참 옹졸하고 호흡도 가파른 다큐가 되었고 그런 호흡 때문에 보는 사람이 힘들어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다. 내가 좀 여유로운 사람이었거나 아니면 경험이라도 많거나 아니면 내공이라도 쎈 사람이었다면 호흡을 조절해 가면서 이주동지들이 가지고 있는 사는 힘들을 다 보여주면서 했을 텐데 그랬으면 더 인간적이고 보는 사람이 더 가슴 깊이 이주동지들에게 혹은 투쟁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가득 남는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때 난 누군가가에게 도발하고 싶었다. '이 봐라 어쩔래 주체가 있는데 이제는 뭔가 좀 다르게 해야 하지 않아. 이 현실을 바꿔야 하지 않아.' 하면서 나의 화를 나누고 싶었다. 보는 사람이 막막해져서 같이 싸울 수 있기를 바랬다. 그래서 다큐가 끝나고 불이 켜지기 전의 사람들의 막막해지는 숨소리를 들으면 미안하면서도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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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 part 2

# 방글라데시 part 2 1. 방글라데시에 대한 경험을 제대로 정리하려고 하면 참 할 일이 많을 것 같다. 가슴도 아파야 할 것 같고 공부도 많이 해야 할 것 같고...하지만 조금씩 해야지. 그래야지. 2. 우문 현답 사람들은 쉽게 돈 벌러 왔지 한다. 나도 그렇게 쉽게 이야기한다. 그리고는 그 다음 이곳에서 벌어지는 막막한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급급했던 듯 하다. 그것도 맞다. 현실이 막막하니...그걸 바꾸는 데 노력하는 것이 뭐 잘못인가... 하지만 난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주노동자는 불법체류자도 아니고 그냥 노동자도 아니고 이주노동자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내가 그냥 여성이 아니듯 그냥 노동자가 아니듯 여성노동자이듯 말이다. 그러니 '이주'란 뭔가 알아야했다. '이주' 하면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외로움', '그리움' 이었다. 얼마나 그리울까? 얼마나 외로울까? 난 이 질문을 머리 속에서 몇번이고 몇번이고 되뇌었던 듯 하다. 그 질문이 머리 속에 있을 때 부터 이주노동자들이 안타깝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애뜻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아마 동정까지는 양심상 못하고 연민 엇비슷한 것이 느껴져 가슴이 타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리움에 대한, 외로움에 대한 징후라도 보일라치면 소스라치게 오버해서 슬퍼하고 안타까워했던 것 같다. 그때는 그랬다. 그런 내가 방글라데시에 들어 서서 이주노동자의 가족을 만나니 턱하니 나온 질문이 보고 싶지 않냐는 거였다. 지금 생각하면 뻔뻔하단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그때는 진지했다. 얼마나 보고 싶을까? 떠난지 7년, 혹은 10년 된 가족이 얼마나 보고 싶을까?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이해해 달라는 거였다. 보고 싶긴한데 여기 오면 다시 한국에 갈 수가 없으니까 어쩔 수 없다고. 그리고 덫붙인다. 돈문제 말고 일 거리가 없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아냐고. 목이 부어오는 것 같았다. 그 말이 준 외면과 내면이 한꺼번에 다가와 뜨끕했다. 외면은 아무렇지도 않게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사람의 어림을 꼬집는 것 같았다. 세상 물정, 모르지...몰라도 한참 모르지... 그러니 비싼 비행기 값 쳐들여 와서는 보고 싶지 않냐고 묻지. 이주노동자들이 어떤 지형에 있는지. 무엇이 그들을 만들었는지. 나는 아직도 이주노동자에 대해 아는 게 없었던 거다. 먹고 살기 힘드니 왔지 일자리가 없으니 왔지. 난 대답할 수 있었지만 그게 정말 뭔지 모르고 있었던 거다. 산다는 것은 먹고 자고 입는 것이 아닌데, 산다는 것은 에너지를 가지고 뭔가를 하는 것인데 그들은 그걸 할 수 없다는 것이 괴로운 거고 그게 그리움 보다 먼저였단 생각이 들었다. 그 뭔가에는 물론 돈 버는 것도 포함된다. 그것도 아니라고 하면 진짜 세상 물정 모르는 거지. 그리고 그 내면의 그리움.. 이주 노동자의 그리움은, 순간 같다. 하지만 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런 그리움이 아니라 내면에 흐르고 있는 강 같은...그렇게 일상은 쿨하지만 ...그러다 문뜩 수면위로 떠올라 찢어 놓고 가는 그리움... 그리고는 이해해달라는 말을 한다. 나 같으면 가서 공부 좀 더 하고 와라 라고 이야기했을 터인데 이해해 달란다. 난 한국인이고 그건 권력이다. 난 아무것도 안했지만 이미 그건 권력이다. 난 그것만 가지고는 나눌 수도 없고 같이 할 수도 없다. 그 관계가 엿 같았고 그 관계를 변화시킬 장치를 하지 않았단 생각이 들어 창피했다. 제발 그 말만은 하지 말지. 이해해 달라니... 나의 이해력의 한계. 나의 미성숙의 한계. 나의 게으름의 한계. 3. 저개발된... 저개발국 아니 우린 개발도상국이란 말을 더 많이 쓴다. 듣기 좋으니까. 개발 중이라고 하니까. 하지만 그건 하늘을 손바닥으로 덮는 격이다. 방글라데시 혹은 네팔 혹은 인도네시아...그곳은 저개발된 곳이다. 누군가에 의해서 저개발된 곳. 저개발된 상태가 누군가에게는 더 많은 이익을 주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상태를 자신의 능력의 한계라고 여기며 살아야 한다. 한국이 그보다 낫다고 절대로 말하지 않았다. 단지 난 '저개발된' 이유가 뭔지 생각해봐야 하지 않나라고 이야기하고 싶은가 보다. 누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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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끔찔끔....

할 일이 많을 때는 질서를 잘 잡아야 한다. 이것 저것 할 일이 많은데 손에 제대로 잡히는 것은 없고 막막하다. 이것 저것 찔끔찔금.. 오늘에 대해 이야기하라면 찔끔찔금...일거다. 이번주는 너무 바쁠 것 같다. 지방에서 하는 상영회에 가야하고 그것도 두군데나 ㅠㅠ 회의도 가야하고 세미나 계획도 세워야 하고 새로 시작하는 세미나 준비도 해야하고 다큐 기획서도 써야 한다. 한주에 하기에는 너무 많은 일들이다. 거기다 left leg를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그래도 어찌 해보면 되겠지 싶다. 가끔 이럴때는 내가 무모하다 못해 좀 모자란 것이 아닌가 한다. 모자란 미친년. ㅠㅠ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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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 part 1

# 방글라데시 part 1 1. 방글라데시 이야기는 두번으로 나눠야 할 것 같다. 아무래도 이야기꾼이 아니다 보니 한번에 쌈박하게 잘 정리하지 못할 것 같다. 글이 너무 길면 읽는 사람이나 쓰는 사람이나 정신이 혼란스럽기도 하고... 2. 의문들 이주노동자 작업을 하면서 정말 끊임 없이 들었던 질문이.. "왜 이들은 본국을 떠날까" 였다. 쉽게 이야기하면 먹고 살기 힘들어서 일 자리가 없어서.. 그것 말고 다른 이유는? 혹은 그것이 가지는 의미는 뭘까? 왠지 그것만 가지고는 설득이 되지 않는 뭔가 석연찮은 것이 있었다. 먹고 살기 힘들다고 다 자기 나라를 떠나지는 않으니까. 떠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렇다고 그 의문만 가지고 어디에 붙었는지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지는 않지. 3. 다른 정체성 다른 정체성... 이주노동자가 아닌 내가 이주노동자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다른 대상과는 아주 다른 맥락에 있었던 것 같다. 잘 지내다가도 카메라만 들면 말을 멈춰버리거나 몸을 움추리는 사람들 앞에서 나도 그만큼 움추려 들고 당황스럽고 기가 죽기도 했다. '왜 나를 못 믿을까?' 어휴...이런 흉칙한 질문을 했던 기억도 난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철 없이 쪽팔린다. 그때 존 버거 아저씨의 '제 7의 인간'을 읽게 되었다. 거기에는 뭐랄까? 다른 정체성을 가진 것이 뭔지... 이주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 둘 풀어 나간 글에서 난 다른 정체성, 다른 경험이 뭔지를 느끼게 된 거 같다. 출발, 일, 돌아감 이주가 겪게 되는 각 시점 마다 정확하게 표현해낸 글과 사진에 난 머리를 쳐야했고 가슴을 쳐야했다. 확인하고 싶었다. 정말 그러한지. 4. 떠나기로 맘 먹자 관계트기, 의문들, '제 7의 인간' 확인하기 방글라데시에 간다는 이야기가 나자 알고 지내던 이주노동자분들이 본국의 식구들에게 가져다 달라면서 하나 둘 짐 보따리를 맞기기 시작했다. 자꾸 들어오는 짐 때문에 나는 한 사람 당 1kg으로 제한해야했다. 그런데 한번은 한 친구가 한 보따리 뭔가를 주는데 그 안에는 비누, 치약, 화장품, 머리핀, 심지어는 화장품 샘플까지 5kg 정도 됐던 거 같다. 난 '어휴 1kg만 받는 다니까요' 하며 외로 꼬아 보았지만 식구들에게 이런 것들을 전해 주고 싶은 마음, 그걸 전해 주려고 하나 둘 모았던 마음들이 전해져 그저 서글프기만 했다. 하지만 더 서글푼 건 그의 가족을 만난 이후였던 것 같다. 본국의 식구들은 너무나 당연하단 듯이 그가 몇날을 모았을 것들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그가 어찌 지내는 지는 상관 없다는 듯이 그저 그곳의 생활에 대한 이야기만 했다. 난 괜시리 속이 상했다. 난 그 집에 있으면 있을 수록 한국에 있는 그 이주노동자가 생각 났고 그는 이 식구들에게 뭔가 생각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이주노동자 중엔 이런 경우가 많다. 이제는 그만 돌아가고 싶은데 이미 본국의 식구들은 그가 혹은 그녀가 벌어다 준 돈으로 일정정도 생활 수준이 높아졌고 그 생활 수준을 유지하려면 누군가 끊임 없이 그 돈을 벌어야한다. 그러니 누군가는 계속 이주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는 거고 그래서 돌아가고 싶다는 사람에게 조금만 더 있지 그러니...하는 거다. 그도 그러한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잔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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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더 참아야 하나...

<계속된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더 이야기를 하겠지만

 

이주노동자 작업을 하면서 알게된 언니가 있다.

 

나에겐 동지요. 친구요. 애인 같은...

 

이주노동자, 라디카.

 

그녀와  좀전에 통화를 했다. 

 

명동농성단에서 농성을 하느라고 월세 보증금을 다 까먹은 언니는 요즘

 

집주인의 성화에 못 이겨 일당치기를 하고 있다. 

 

목소리가 안좋아서 오늘 일이 힘들었나 싶었더니 이내 울어버린다.

 

오늘 오전에 네팔 이주노동자들이 이라크에서 참수당했다고.

 

이 더러운 세상 싫다고. 나쁜 것은 절대로 안 바뀐다고.

 

이제 더 이상 살기 싫다고......운다.

 

이라크 그 전쟁터에 이주노동자들이 있다.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은 1000명이나 된다고 하더라.

 

필리핀은 기본적으로 한 가정에 한 명은 이주노동자인

 

이주노동자가 많은 나라다.

 

필리핀 이주노동자가 인질이 되었을 때

 

필리핀 정부는 미국의 치졸한 압력이 있었음에도 그러한 국민정서를 위해  

 

인질을 빼내왔다.

 

난 막막하다.

 

그 전쟁터에 '살기 위해서' 가는 사람들.

 

끊임 없이 빼앗겨도 불안정한 삶인줄 알면서 갈 수 밖에 없는 사람들.

 

거기에 무기력하게 전쟁터에서 죽어야 하는 사람들.

 

난 정말 이 전쟁이...아니 이 자본주의가 얼마나 더 사람들의 피를 먹어야

 

만족할까 싶다.

 

이제는 정말 지겹다.

 

무엇이든 간에 해야만 하지 않을까?

 

누구나  살아야 하지 않을까?

 

누구나  평화로운 환경에서 평화롭게 살 권리가 있지 않을까?

 

누구나 누구로 부터 혹은 무엇으로 부터 소외 되지 않고 살 권리가 있지 않을까?

 

왜 소외 당해야 하고 왜 평화를 빼앗겨야 하고 왜 죽어야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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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어쩌나..

하늘이 바로 그 색이네요.

하늘색에 파란기 조금 있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색...구름 한 점 없고..

아니 있으려나...

 

Left leg 만 있어놔서...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꼼짝 없이 책상앞에 앉아 일을 하고 있는데

이런...친구녀석이 하늘이 파랗다고 이쁘다고 알려주네요.

아하...근데 이 곳에서 보이는 하늘은 너무 좁아...구름이 있는지 없는지

여하튼 내가 보이는 만큼은 하늘에 구름이 없고 그저 깊이만 있네요.

 

어쩜 인생도 그런 건가...보이는 것만큼만 보고 사는 거..

에공....다리가 아프니...별스럽네..

비슷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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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아치 같은 의사한테 인사하러 가야겠습니다.

병원 갈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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