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말이를 만들었다.
이 음식의 묘미는 만드는 과정에 있지 않다. 지나가다 눈에 들어왔는데 마침 출출해서 들어선 노점에서, '떡볶이에 묻혀주랴 그냥주랴' 하는 질문에 미처 대답하기도 전, 옷소매에 간장 한점 흘려가며 먹는데에 있으련만. 이걸 집에서 직접 만들 거라는 생각은 한번도 못해봤다. 부지런한 친구 덕분에 어떻게 하는지 배웠다.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이미 다 먹어 없앤 이 김말이의 이름이 '마음의 당면'이라는 ㅋ.
여름이 간다.
마음이 어수선했던 모든 이들에게 선선하고 따뜻한 가을이 어서 오기를.
소개글을 세 줄로 요약한다면
전태일의 어머니,
같은 하늘 아래 서로 다른 길을 간다 해도
당신과 나의 어머니
라고 할 수 있으려나
태준식 감독 '어머니' 작업 블로그
아직 촬영중이라는데
벌써 포스터도 나왔고 트레일러도 공개한 지 오래.
근데 아래 포스터에 카피가 너무 많다
나중에 알아서 잘 가지치기 하시겠지
다섯병님의 [독립영화와 저작권] 을 읽고
[만화방 앞에서 망서리기]와 관련
* 인디플러그
아직 회원가입 못했다.
가까운 분이 아이디와 비번을 알려줘서 샘터분식을 내려받아 봤는데 그 뒤로는 접속할 겨를이 없다. 몇 년 전, 독립영화 제작자(감독) 몇몇과 함께 제작자들이 직접 배급하는 온라인 공간을 고민한 적이 있었지만 그 틀은 지금 인디플러그와 같은 형태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때 모인 이들은 저마다 배급방식이나 온라인 소통방식에 관해 각자의 의견을 분명하게 내놓기 어려운 입장이었으므로, 만약 뜻을 모아 공간을 마련했다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형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 모임은 결국 성과없이 끝났다.
모인 이들은 너무 바빠서 시간이 부족했고, 제작자들끼리 새 길을 내본 경험이 없어서 자신감도 부족했고, 무엇보다 '한독협이라는 공식 조직이 있는데 왜 샛길을 내려고 하는가'에 대해 의혹 혹은 부정적인/불안한 견해를 가진 다수의 눈총을 매끄럽게 받아들이지 못해 각자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흩어졌다. 여러 모로 아쉽고 아픈 경험 중 하나였다. 그 때 다큐야 쩜 넷의 온라인 설계를 맡아 수고하셨던 분께 (개인적으로 급히 마련한) 최소한의 수고비만 지불한 채 작업을 중단했던 것이 지금까지 두고 두고 죄송하고, 시간과 정성을 내놓고 마음을 열었던 몇몇 동료들에게도 일일이 만나서 매듭을 짓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린다.
시간이 흐른 지금, 인디플러그가 등장했다.
회원가입 할까 말까, 고민이 됐다. 이렇게 운영하는 거 맞나, 판단하기 어려웠다. 가까운 분이 그랬듯이, 나도 가입해서 여러 사람들과 아이디를 공유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겠다. 하지만 한 발 더 나아가서, 인디플러그의 존재이유와 운영방침, 그리고 그 다음에 대해 토론하고 합의하기 위해 움직이는 게 더 급한 듯 하다.
*관련기사1
미디어스 - 인디플러그의 활동과 독립영화계의 침묵 (2010. 8. 13)
기사 내용 중 같이 읽고 싶은 부분 발췌
독립영화계에서 저작권 문제가 거론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예전에 이미 <워낭소리>를 둘러싼 논란이 독립영화계를 한바탕 휩쓸었었다. <워낭소리>의 제작자였던 고영재는 영상이 인터넷에 유포되면서 해외 시장 진출의 통로가 막혔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며 저작권법을 위반한 불법 다운로드에 대해 강하게 성토했고, 이를 계기로 독립영화 진영에서 저작권과 관련된 논의가 일었었다.
그런데 그 때 MB의 <워낭소리> 관람과 독립 영화 진흥 정책에 관련된 것으로 주제가 확산되며, 저작권과 관련된 논의는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한 채 묻혀버렸다. 그러다 다시 고영재가 대표를 맡고 있는 인디플러그의 굿 다운로더 캠페인 동참과 불법 업로드 업체에 대한 법적 대응 선언으로 저작권 관련 문제가 독립영화계에 제기 되었다.
* 위 기사에서 언급한, '워낭소리' 고영재 피디의 발언을 담은 기사
한겨레 - 정보공유 한단계 성숙하는 계기 되길 (2009년 3월 5일 등록, 3월 13일 수정)
* 위 상황과 관련해서 [워낭소리 관련]에 보면
당시 고영재의 '디지털 악마' 발언을 비판하는 글이 여러 편 있었다
그리고 독립영화감독들이 연대서명을 받아 질의서를 전달하는 조직적 항의가 있었다
슈아 - [답답한데 졸려]
나루 - [연명을 부탁합니다]
이후 한독협 홈페이지 개편작업이 있었고, 공개질의서 및 관련논의가 올라왔던 게시판이 닫힘.
공개질의서 내용은, '워낭소리' 불법다운로드 사태에 대한 한독협 사무총장 고영재의 대응방식(수사 요청? 경찰에 고발?)과 언론사 기자들이 여럿 찾아온 가운데 어느 대학 강의실에서 공개적으로 발언한 내용에 대한 비판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대통령의 '워낭소리' 관람요청(감독 및 한독협 관계자 참석 하에)과 이후 장관의 대화요청에 응한 것에 대한 비판이 더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관련기사1 중에서 발췌 조금 더.
당연하지만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인디플러그가 독립영화계를 대표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갖가지 언론들에서는 인디플러그의 사업 정책을 독립영화계로 환원해 보도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문제적인 것은 언론의 보도형태가 아니라, 독립영화계의 반응이다. 그들은 마치 거대한 침묵을 통해 인디플러그의 입장에 암묵적으로 공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침묵은 때로 동의와 같은 것으로 보인다.
완전히 상업화된 방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립영화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생산, 유통, 소비 방식을 만들어 왔으며, 그 방식의 다양화를 이루어 왔다. 다시 말해, 독립영화는 획일화된 상업영화의 그것들과는 다른, 대안적인 방식들을 끊임없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만들어지고, 도입된 것이 퍼블릭 액세스이고 공동체 상영 등이다. 그것들이 성공적이었든 아니든, 그러한 기본적 취지와 의도만은 아직까지 지켜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작권은 상업영화가 가장 전형적으로 이익을 창출해 내는 통로이다. 게다가 그것은 직접적인 생산자나 창작자에게 보상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하기보다는 그것의 투자자들이나 거대 유통 기업들에 이익을 돌려주기 위한 장치이다. 물론 몇몇 이름난 생산자들이 저작권을 통해 엄청난 수익을 얻긴하지만, 대부분의 창작자들에게 그것은 신화적인 것일 뿐이다. 상업영화계에서도 그들은 대부분 영화사에서, 방송국에서 창작 노동을 하며 착취당하는 노동자일뿐이다. 게다가 그것은 문화의 향상발전을 도모하기 보다는 그 반대로 기능하고 있다. 저작권은 디지털 네트워크 환경에서 문화적 생산물들을 확산시키고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기회를 막고 있으며, (때문에) 풍부한 2차 창작물(소위 패러디나 키치 등)들이 산출될 수 있는 통로를 차단시키고 있다. 파생 창작물의 생산을 활성화 시키는 것은 문화(심지어는 산업)를 향상발전 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저작권이 가로 막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디플러그가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독립영화계가 침묵하고 있는 저작권 단속은 독립영화의 기반 정체성을 위협할 수 있는 중요한 사안이 된다. 그것은 상업 영화의 틀에 독립영화 스스로를 구속시키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만약 이 상태가 더욱 진행되어 독립영화가 저작권 산업에 기대어 생명을 유지해 나가게 된다면, 독립영화는 발명되어야할 미래의 가능성들(퍼블릭 액세스를 포함한 대안적인 영상의 생산, 유통, 소비 방식들)을 미리 포기하는 것이 될 것이다.
* 관련기사 2
무비위크 - 온라인 다운로드의 가능성을 보다 (2010. 3)
인터뷰 내용 중 다시 읽고 싶은 부분 발췌
고영재 대표의 답변 중 밑줄 친 부분은 같이 생각해보고 싶은 점들
아래 두번째 답변, 세번째 답변 등은 동의하기 어렵다.
- 유료 사이트라서 시장이나 유저들의 가격에 대한 저항도 예상된다.
가격은 2,000원으로 결정했다. 고민의 산물이다. 유저들은 싼 게 좋다고 하는데, 지금 개봉 영화 가격이 일반 유저들이 바라볼 때 비싸다고 인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디플러그는 그동안의 기술적 이슈였던 DRM(Digital Right Management)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DRM을 건다는 건 ‘대여’ 개념인 거고, 인디플러그는 ‘소장’ 개념이다. 이러한 정책들을 네티즌이 이해하고 인정해 주면 부가판권 시장에서 다운로드 시장이 연착륙될 수 있다.
-독립 영화 유통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온라인 구축을 통해 기대할 수 있는 효과가 있다면?
물론 수익성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철학적 배경으로 몇 가지 고민을 했다. 인디 음악이나 만화, 민중가요는 시장에서 다 실패했다. 적어도 유통의 영역에서는 말이다. 그들은 자기 작업은 열심히 하는데, 나머지 부분은 귀찮아한다. 개인적으로 그것이 불만이었다. 인디플러그는 자체 수익의 일정 부분을 포기했다. 수익의 50퍼센트를 제작사에 제공한다는 철학을 원칙적으로 시행하려고 한다. 그래야 온라인 배급을 통해서 제작자도 수익을 챙길 수 있고, 다양한 작품이 많이 나올 수 있다고 본다.
-온라인 내 독립 영화 활성화를 위한 전략이 있다면?
각각의 독립 영화가 지닌 장점을 가지고 관객들과 만날 수 있도록 그 포인트를 잘 찾아나갈 필요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독립 영화 진영이 한 단계 질적 도약을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제작 측면에서 장르를 개척하려는 노력을 할 수 있고, 마케팅도 더 적극적으로 모색할 수 있게 된다. 이번에 <경계도시 2>에 김C가 다큐프렌즈로 참여하는 게 좋은 예다.
나는 아직 한국독립영화협회에도 가입하지 못했다.
가입하려고 시도했다가 안됐던 그날부터, 가입하라고 권유받던 시간을 지나, 먼 곳에 혼자 떨어진 지금도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개인작업(이라고는 하나 다양한 형태로 수많은 분들이 참여했던) 하나, 여러 감독과 미디어 활동가들이 함께 제작했던 공동작업이 하나, 제작지원 한번 못받고(2007년부터는 응모하지 않기로 했다) 몇 년 동안 혼자 꼼지락거리다가 아프다는 이유로 중단한 작업이 하나 있을 뿐인 초라한 이력에 단 한 줄이라도 더 새기게 될까. 실패의 이력만 길고, 성과없는 시도만 계속하며, 고민만 많은 나같은 이가 과연 독립영화 계속할 수 있을까. 온라인 배급은 물론 독립영화에 관련해서 나같은 이는 더 이상 발언하지 않는 것이, 이 어려운 시절을 딛고 지금 열심히 작업하는 이들에 대한 예의일지도 모르겠다.
밑줄 등 강조는 옮겨오면서 제가 한 것임
말문이 막혀서 이 사태에 관해 따로 할 말은 없다.
* * * * *
출처 : 프레시안
독립·예술영화 제작 직접지원 폐지, 영진위 의도는?
[뉴스메이커] "특정단체 밀어주기 및 배제 노골적" 영화계 반발
기사입력 2010-07-02 오후 5:58:36
영화진흥위원회(위원장 조희문, 이하 '영진위')의 내년도 영화발전기금 운용계획안에서 독립영화 제작지원, 예술영화제작지원, 그리고 기획개발역량강화 사업의 예산이 전액 폐지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영화계가 또 한 차례 들썩일 전망이다. 또한 영진위 내에서 예산안을 의결하는 과정에서 위원들 간 충분한 논의를 거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져 더욱 논란이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한겨레가 오늘(2일) 오전 보도한 바에 따르면, 영진위가 최근 9인 위원회에서 통과시키고 문화부가 승인해 기획재정부로 넘어간 내년도 영화발전기금 운용계획안에서 올해 12억이 배정됐던 기획개발역량강화 사업과 독립영화제작지원(7억), 예술영화제작지원(32억 5천) 예산이 모두 폐지됐다. 영진위는 대신 이를 '영화유통 및 제작지원' 사업으로 통합해 현물지원으로 보완한다는 계획???이다. 현재 영진위가 작성한 발전기금 운용계획안은 영진위 9인위원회의 의결과 문화부의 승인을 거쳐 기획재정부에 제출된 상태다.
이에 대한 문화부의 입장은 "문화예술의 다른 분야에도 그렇듯 영화계에도 직접지원보다 간접지원과 인프라 구축 지원이 늘어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유병한 문화관광체육부 문화콘텐츠산업실장은 이러한 변화가 "갑자기 결정한 것이 아니라 정권 초기부터 영화계에 주문했던 내용"이 라고 밝히면서, "독립, 예술영화를 지원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지원하는 방식이 바뀌는 것일 뿐이다. 영화제작지원의 총예산은 오히려 올해 39억에서 내년 50억으로 늘어났다. 그간 나눠먹기, 편파시비로 잡음이 끊이지 않았던 만큼 이를 개선하자는 취지도 있다"라고 밝혔다.
그 러나 영화계에서는 영진위의 이러한 예산계획이 "특정세력을 배제하거나 밀어주면서 '길들이기'를 하겠다는 의도"라고 의심하는 분위기다. 그간 영진위 조희문 위원장을 비판하며 사퇴요구를 해온 영화인들의 선봉에 독립영화계가 있었던 만큼, 실제로 영진위의 이번 기금예산안은 상당 부분 의혹을 살 만한 구석이 있다. 본지가 추가로 입수한 발전기금 운용계획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제작지원' 항목이 통폐합된 것 외에도 영화단체사업지원 항목 중 공모사업선정지원 예산도 4억 6천 가량 줄었고, 시네마테크전용관 지원은 임대료에 해당하는 1억 7천을 삭제하고 2억 8천만 원만 책정됐다. 공교롭게도 영진위는 현재 인 디포럼과 인권영화제 측으로부터 '촛불단체라며 의도적으로 단체사업 지원에서 탈락시켰다'며 소송에 걸린 상태이며, 올해 시네마테크전용관 사업자 공모를 시도했다가 서울아트시네마와 마찰을 겪고 공모마저 유찰되자, 서울아트시네마에 임대료를 제외한 사업지원 부문만 지원하기로 한 바 있다.
반면 다양성영화 사업 중 독립영화 관람료지원 항목이 신설돼 3억 5천 가량이 책정됐다. 독립영화전용관의 관람료를 할인하고 이를 영진위에서 지원한다는 이 사업은, 결국 독립영화전용관의 수익을 일정부분 지원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된 다. 사업의 취지 자체야 바람직하지만, 현재 "심사조작까지 해가며 영진위가 특별히 밀어준 단체가 독립영화전용관의 사업자가 되었다"는 세간의 의혹이 풀리지 않고 있는 만큼 뒷말이 안 나올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올해 초 영진위는 사업자 공모를 통해 새로이 독립영화전용관의 사업자로 한국다양성영화발전협의회(한다협)를 선정했지만, 이 과정에서 논란과 잡음이 끊이지 않아 몇몇 단체가 영진위를 대상으로 '사업자 선정 취소' 소송을 행정법원에 제기한 상태이며, 국내 독립영화 감독 155인은 한다협이 운영하는 '제1독립영화전용관' 시네마루에 "나의 영화를 상영하지 않겠다"며 보이콧을 선언한 바 있다.
그런가 하면 '글로벌 스튜디오 건립'을 위해 새로이 35억이 설계비로 책정됐으나 이 '글로벌 스튜디오'라는 것의 정체를 아는 사람도 별로 없다. 유병한 실장은 "아시아 다른 국가에서도 한국에 로케이션을 하러 오는 상황이다. 남양주 종합촬영소의 규모를 뛰어넘는 대규모 스튜디오를 만들어 미래에 대비하자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중국에도 거대 스튜디오가 여럿 있는데 국내에는 없다. 오래 전부터 영화계가 요구해왔던 사항이며, 향후 아시아 시장 전체를 겨냥하자는 의도"라는 것. 그러나 영화계 일각에서는 조희문 위원장이 그토록 밀어부치고 있는 '3D 산업을 위한 스튜디오'일 것이라는 짐작이 떠돌고 있다. 유병한 실장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지만, 영화계에서 그런 루머가 떠도는 것 자체가 영화계와의 소통이 별로 없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다. 본지가 접촉한 영진위의 한 위원은 "나 역시 글로벌 스튜디오의 정체를 모른다. 글로벌 스튜디오는 물론이고, 예산안 전체가 위원들 사이에서 충분히 논의와 검토를 거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위원 3인이 예산안 편성을 위한 팀에 속해있기는 했지만 다른 위원들이 예산안을 리뷰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채 심의 의결 불과 3일 전에 안이 제출됐다는 것. 한 마디로 위원들은 그저 표결을 위한 '거수기'로만 동원됐다는 것이다.
한편 유병한 실장은 "이것은 그저 '안'일 뿐, 확정된 것은 아니며 일부 수정될 수도 있다. 9월 정기국회 전까지 계속 논의가 필요하며, 국회에서의 논의와 의결을 거쳐야 확정이 된다"고 밝혔다.
/김숙현 기자
* * * * *
출처:미디어오늘
문화부, 내년도 독립영화 지원금 전액 삭감
페미니즘과 관련한 논쟁, 그리고 어떤 충격적인 정보를 접한 뒤로 다시 찾지 않게 되었지만, 1998년과 1999년에 접한 김규항의 글은 가끔 가슴을 저몄고 충분히 재미있었다. 음악(특히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외치다 대중문화평론가가 된 이들에 대한 회고), 교회, 학교(특히 폭력적인 교사들에 대한 회상), 그리고 영화계에 대한 지적은 공감하기에 충분했다. 아래에 퍼온 어느 글에서처럼, 나도 아버지에게 태백산맥을 구해드린 적이 있는데 (그의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지만) 그렇게 비슷한 경험들이 떠올라서 그의 글이 잘 읽혔는지도 모르겠다. 특히 한대수에 관해서는, 독립영화를 제작하는 한 동료가 ' 박정희 정권의 한국에서 죄없는 사람들- 특히 시인, 소설가, 가수 등 - 이 잡혀가고 매맞을 때 미국으로 도망가서 편하게 음악한 인물' 이라고 거침없이 말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던 게 떠오른다. 한대수의 자서전을 구해 읽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씨네21에 연재하던 그의 짧은 글 한 편 정도는 접할 수 있었을텐데 어찌 그리 무서운 오해를 했던 걸까, 아쉬운 대목이다. 암튼, 문화운동에 관련된 몇 가지 자료를 뒤적이다가 그의 오래 전 글 몇 편을 남겨둔다.
그 즈음 내 생각이 어디로 어떻게 흘러갔는지 알 수 있는 몇 가지 흔적들 중 하나. 자신이 통렬하게 비판하던 어떤 무리들 속에 들어서버린 한 인간을 보는 것이 나인지 아니면 바로 그 인간이 나인지 생각해봐야할 지금.
* * * * *
90년대 들어 게임이 끝났음을 감지한 80년대의 문예활동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변신을 서둘렀다. 조직활동을 내세우던 사람들답게 청산 속도도 빨랐다. 문화예술 활동가들 가운데 순진한 몇몇은 절망감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기도 했으나 인생을 경영할 줄 아는 이들은 자신들이 버린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적당히 차용하는 대중예술 평론가로 명함을 바꿨다. 강철 같은 '사회주의 문예활동가'가 시침 뚝 떼고 '의식 있는 대중예술 평론가'로 변신하는 모습은 분명 보기 민망한 일이었지만 피차 살아보겠다고 작정을 하고 한 일이니 만큼 서로 지난 일을 언급하는 일은 금했다.
대중음악 부분은 틈새시장이었다. 김현식이 죽자 상황판단이 빠른 이가 재빨리 대중음악 평론이라는 아이디어 상품을 내놓았고 언더그라운드 음악이 각광을 받는 분위기와 맞물리며 히트상품이 되었다. 80년대 운동권 노래를 계속 부르기도 썰렁하고 무식하게 대중가요를 무작정 따라 부르기도 난처한 지식인들에게 대중음악 가수나 곡에 대해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의미를 부여해주는 평론과 연구들은 위안을 주었다.
언더그라운드 대중음악이라는 소재가 재탕 삼탕 되다가 대중음악계를 무협지로 묘사하는 과정을 거쳐 자연스럽게 록으로 옮겨갔다. 처음엔 '이승철과 다섯 손가락'하는 식의 실수가 빈번했지만 역시 고도의 지적 기능 훈련을 받은 사람들답게 금새 '문제는 록정신이다'라는 구호로 발전되었다(10여 년 전엔 '문제는 리얼리즘이다'였지 아마). 록의 불량함과 저항성은 사회적인 것으로만 해석되었고, 거기에 힘입어 텔레비전 카메라에 침을 뱉는 밴드가 나오고 음악은 엉망이지만 밴드의 존재 이유는 멋지게 설명하는 희한한 지식인용 밴드가 양산되었다.
그렇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70년대엔 탈춤과 마당극을, 80년대엔 소비에트나 북조선의 집체극을 진보적인 예술양식으로 선택했던 지식인들은 이번엔 록을 고르게 된 것이다. 이해하기 힘든 일은 지식인들의 끊임없는 변화에도 대중들은 한치의 동요나 불만이 없다는 것이다. 언제나 지식인들은 대중성의 문제를 고려해 왔고 대중을 선도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심지어는 대중성에 대한 의견 차이로 조직이 깨지는 것도 불사했건만 슬프게도 뒤에 따라오는 대중은 단 한 명도 없었던 모양이다.
알고 보니 대중예술 평론이란 실제 대중예술이나 대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 지식인이 쓰고 역시 지식인들이 읽기 위해 만들어 낸 대중예술의 해석판 같은 것이었던 모양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역사'가 아니라 '역사책'이었던 것이다.
논리적인 근거나 타당성 없이는 행동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지식인들이, 익숙하지 않은 대중예술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평론과 연구라는 고유의 해석판이 필요할 것이다. 또 한때 혁명을 꿈꾸던 사람들이니 만큼 끊임없이 '대중'을 이야기하고 연구하는 행위가 마음의 편안함을 준다는 것도 인간적으로 이해 안가는 바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로 대중을 선도하거나 아주 조금이라도 연관되어 있다는 기대는 버려라. 어차피 다시 혁명하자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 씨네21 1998년_3월
(의아한 표정의 아들)"왜, 재미없으세요?"/(조금 미안한 표정의 아버지)"응"/(의혹에 찬 표정의 아들)"왜요?"/(귀찮은 표정의 아버지)"조금 읽어 봤는데, 너무 뻔해..."/(이 양반이 보수성을 드러내는구나 하는 생각에 열 받은 아들)"뭐가 뻔해요."/(딴 데를 보며 그러나 단호한 목소리의 아버지)"아, 옛날에 다 본 얘기야"/"(아들)..."
아차, 아버지의 고향이 거기였구나. 일단 꼬리를 접긴 했지만 기분은 개운치 않았다. 400만이 넘는 사람들이 읽고 감동했고, 파시스트들의 집요한 공격으로 그 빼어난 '리얼리즘'이 방증되었다는 이 대작품이 뻔하고 재미없었다... 아버지의 반응은 나에게 오랜 의문으로 남았다.
"청년이라면 밤을 새워라/이제 대학생이 되셨다면/조국의 교과서로 불리는/조정래 대하소설/태백산맥과 아리랑을 읽어 주십시오." "끝없는 감동의 물결/독자 400만" "선배들이/인간을 사랑한 순정/태백산맥의 골짜기마다 숨어 있다./선배들의 조국에 대한 고뇌/태백산맥만이 증거 한다."
며칠 전 신문에서 본 <태백산맥>의 광고 덕에 나는 묵은 의문을 풀 수 있었다. 좀더 정확히 말해서 나는 리얼리즘에 대한 한 '편견'을 마련함으로써 내 속을 다스릴 수 있었다. 98년도 대학 새내기들에게 소설책을 팔기 위해 "조국의 교과서"라는 표현을 쓰는 업자들에 대한 언짢음 때문이었을까? '편견'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리얼리즘은 지식인을 위해 마련된 장치이다. 비록 책상에 앉아 담배나 빨고 있지만 마음만은 칼바람 부는 벌판과 총탄이 빗발치는 계곡을 달리고 싶은 지식인의 당연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가상현실 체험이다.
광고는 계속된다. "98년도 대학 새내기 여러분. 여기에 <미스트>나 <레이븐>을 능가하는 자랑스러운 우리의 리얼리즘, <태백산맥>과 <아리랑>이 있습니다. 누구든 책장만 펼치면 '선배들'과 함께 '태백산맥 골짜기와 만주벌판'을 누비며 그들의 '순정과 고뇌'를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신통한 리얼리즘도 아버지를 흥분시킬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짐작컨대, 열 권의 책을 받아든 아버지는 첫 권을 펼치자 이내 "옛날에 다 본" 이야기임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의식'에 어떤 형태로든 적극적일 수 없는 소시민인 아버지의 유일한 선택은 그 소설을 피하는 것이다. 결국 아버지는 <태백산맥>이 '뻔하고 재미없었던' 것이다. 어제 저녁에 구한 책을 날이 새기 무섭게 돌려 줄 만큼.
그러나 영상시대 지식인의 머리통은 그리 단순하지 않아서 <태백산맥> 같은 유장한 리얼리즘만으론 모자람이 있다. '책상 위의 역사'를 더욱 장엄무비하고 의미심장하게 만들기 위해선 바로 지식인 자신의 '일상의 진실'을 그린 리얼리즘이 곁들여져야 한다.
먼저 책장을 넘겨 태백산맥이나 만주를 달려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뭔가를 한껏 느낀 다음, 바로 리모콘을 눌러 힘있는 강원도나 우물에 빠진 돼지에 낄낄거리며 담배연기를 길게 뿜는다. 비로소 지식인은 비분강개에다 나약한 자신을 자조하는 웃음마저 곁들인 완벽한 지성미를 갖추게 된다. 리얼리즘은 리얼하다. | 씨네21 1998년_3월
1985년의 청년은 하드록을 들을 수 없었다. 식민지에는 민족적인 문화와 매판문화가 존재할 뿐이었다. 나는 하드록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의 오염된 육체와 정서가 부끄러웠다. 어느 날 밤, 나는 책상 옆에 놓여져 있던 스네어 드럼을 치우고 분연히 일어나 민족음악을 찾아 나섰다. 맨 먼저 한 일은 마샬 앰프의 살인적인 출력에 늘어나 버린 나의 귓구멍을 대나무와 오동나무 그리고 쇠가죽 따위에서 내는 단출한 소리에 맞춰 다시 뚫는 것이었다. 휴학생이었고 시간은 많았다. 매일 밤 FM의 국악 프로그램을 듣고 또 그걸 녹음해선 온종일 듣기를 여러 달, 내 귀는 드디어 새로운 음악을 즐겁게 수용하기 시작했다.
내 귀는 민속악보다는 정악을 좇았다. 김성진의 정악 대금은 나를 사로잡았다. 몇십 년을 주인의 침에 삭은 쌍골대가 어떤 관념적인 틈새도 없는 윤기로 <상령산>을 울리자 나는 전율했다. 얼마간의 미장 데모도 노릇으로 나는 대금을 살 수 있었다. 단단하고 묵직한 몸에 삼현육각이 새겨진 놋쇠 덮개가 덮인 대금을 손에 넣고는 감격의 눈물을 찔끔거렸다. 입대가 한달 앞으로 다가오자 나는 최선을 다했다. 국악원에 출근하다시피 열심히 강습을 받고 밤새 혼자 연습하고 대금의 조카뻘인 단소를 수십 개씩 만들어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도서관을 뒤져 대금에 관한 온갖 문헌을 찾아내기를 계속했다.
군대 내무반에서 대금 연습을 하리라는 내 계획은 대한민국 육군을 졸로 보는 꿈이었음이 입대하던 날 밤 밝혀졌다. 무슨 운명인지 대금 연습을 포기한 건 저 산밑의 일이고 나는 다시 드럼을 치게 되었다. 사병들의 춤을 위해선 <젊은 그대>, <아파트>, <배드 케이스 오브 러빙 유> 따위를 연주하고 이따금 지원되는 스트립걸을 위해선 <모나코>를 깔았으며 장교놈들 회식을 위해서는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로 봉사했다. 군부정권하의 군대를 위해 문선대 노릇을 하는 일에 대한 거리낌은 없었다. 나 또한 군바리였고 나는 나의 드럼에 맞춰 미치게 몸을 경련하는 불쌍한 전우들을 위해 기꺼이 팔다리에 쥐가 나도록 드럼을 두들기고 또 밟았다.
3년을 총 대신 드럼스틱으로 때우고 나와선 이른바 노동자 문화운동 하는 조직에 들어가 보니 음악팀에선 놀랍게도 전기기타 신디사이저 드럼을 사용하고 있었다. 몇 차례 공연을 따라다니며 드럼을 치기도 했지만 내 생애에 가장 불편한 드럼이었다. 나의 음악정신은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얼마 후에 거길 그만두고 다시 한 해를 놀 때는 또 대금을 만지작거렸다. 90년대로 넘어와 이른바 진보적 영화도서 출판을 시작하고부터는 맥없이 여러 음악을 전전했다. 퓨전재즈, 다음에 블루스, 다음에 서양 고전음악, 그 다음에 재즈 하는 식이었다. 그리고 1998년, 나는 다시 하드록을 듣는다.
대금을 꺼내는 일은 드물어졌고 <영산회상>도 일주일에 한번 들을까 말까다. 대금을 꺼내고 <영산회상> 시디를 넣고 하는 일이 피곤하기 그지없고 그 이유를 생각하면 더욱 피곤해질 뿐이다. 하여간 당분간 '우리 것'은 그다지 듣고 싶지 않다. <서편제>가 뜨고 이른바 국악붐이 일면 명절날 방문객을 맞는 고아가 된 것 같고 쇠락한 고향을 밝히기를 부끄러워하는 잡놈이 된 것 같다. 나의 음악유전이 이 나라의 역사와 조금이라도 관련을 맺어왔을 거라는 공상을 하면서, 파시즘이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이 염병할 나라에서 정악처럼 사람을 정갈하게 만드는 음악을 듣는 일은 코미디이고 잔혹극이라는 생각도 든다.
나에게 아직도 한줌의 음악 정신이 남아 있다면 얼마간 어질러진 채로 놔두고 싶고 그래서 거듭하는 게 하드록이다. 한없이 몽롱해 하면서도 머리와 입으로 록에 붙어먹으려는 놈들에 대한 살의를 풀지 않는 걸 보면 아무래도 나의 음악유전은 몹시 피곤했고 음악에 관한 한 나는 임포 증세를 보이는 것 같다. | 씨네21 1998년_4월
파시즘은 어디에 있는가. 파시즘은 이른바 5,6공 인사나 한국논단 같은 극우집단에만 남아 있는가. 천만에, 파시즘은 우리 안에도 남아 있다. 파시스트 치하에서 몇십 년을 보내면서 우리는 파시스트와 닮아 갔고 파시즘은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다. 구제금융을 부른 '국가'가 그 원인을 '국민의 과소비'라 둘러대면 '국민'은 가슴을 치며 금가락지를 빼들고 방송국에 간다. '국민'의 대다수인 근로대중들이, 30여 년을 경제개발 현장에서 뼈빠지게 고생만 하던 사람들이 요 몇 년 아이들과 놀이동산 몇 번 가고 갈비도 사먹고 한 것이 구제금융의 원인인가. 우리 안의 파시즘은 우리를 한없이 비굴하게 만든다.
한 대중음악 평론가가 말한다. "우리 나라에서 뜨는 노래 절반이 일본 곡 표절인데 지금 전면 개방하면 그게 다 밝혀질 거고 그러면 국민들은 배신감 때문에 우리 가요에 등을 돌릴 거다. 개방을 미뤄야 한다." 이런 게 바로 우리 안에 남은 파시즘이다. 여당 쪽에서 일하는 선배가 개인 의견임을 전제로 물었다. "미국영화 막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잖아, 자생력을 길러야 한다고 하지만 개방해서 경쟁하게 하는 게 근본적으로 자생력 기르는 거 아니냐?" 그 선배는 나를 일종의 영화인으로 보고 물었지만 그다지 영화인이 아닌 나는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러고 얼마 동안 만나는 사람마다 그 문제를 물었다. 놀랍게도(아무래도 나만 놀란 것 같다) 하나같이 개방이 바람직하지만 그걸 '주장'할 순 없다고 답했다. 이런 게 바로 우리 안에 남은 파시즘이다. 이젠 물어야 한다. 이른바 '민족'의 이름 하에 덮어 둔 한국 대중문화 '업자'들의 '무능'과 '배신'에 대해 물어야 한다. 그들의 정조가 과연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정조인지 따져봐야 한다.
세상의 모든 파시즘은 언제나 '민족'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강북에 가본 강남의 중딩이 통신에다 소감을 썼다. "강북 형들 넘 무섭게 생겼당. 다신 안 간당..." 이 중딩과 점심을 거르는 강북의 고딩이 과연 같은 민족인가? 오늘 아침 농성장에 출근하는 노동자와 반성하지 않는 자본가가 굳이 같은 민족이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이라는 테두리 안에 사는 사람은 무조건 같은 민족이라는, '한국'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생겨나는 것은 모두 민족적인 것이고 보호할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파시즘을 부른다. 전두환이 광주를 토벌하며 더러운 집권욕을 드러낼 무렵 주한미군 사령관 위컴이 지껄였다. "한국인들은 들쥐와 같다. 들쥐의 습성은 한 마리가 맨 앞에서 뛰면 덮어놓고 뒤따라가는 것이다." 위컴은 '망언'을 사과했지만 '들쥐들'은 18년 동안 덮어놓고 맨 앞에서 뛰는 놈만 따라다녀 왔다. 파시즘은 우리 안에 남아 있다. | 씨네21 1998년_5월
초등학교 5학년 때던가. 나이에 걸맞지 않은 실존적 고민에 빠져 꼬박 1년을 가위눌려 살았던 일이 있었다. 어느 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고 '낭만적인 힘'을 얻었다. 누구 노랜지 제목이 뭔지 알 도리가 없었지만 그 노래에 감사했다. 그 노래는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였다. 10년쯤 전. 열정의 음악사가들(모든 음악 생산물에 역사적 의미를 잣대로 별을 매기는 사람들. 신중현에게 '이제 보니 위대한 록'이라고 적힌 별을, 산울림에게는 '다시 보니 창조적 록'이라는 별을 달아준 바 있다. 이제 그들은 한대수에게 '돌아온 포크록의 생부'라고 적힌 별을 달아 준다.)이 한대수를 "이 땅의 현실에 뿌리박지 못하고 행복의 나라(미국)로 떠나 버린" 쪼다로 폄하한 글을 읽었다. '반동으로 몰린 은인'을 바라보며 나는 절망했다. 그리고 지난 해, 이소라 숀가 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드디어 한대수가 노래하고 자기 얘기를 하는 걸 볼 수 있었다.
한대수는 좀더 살이 붙고 좀더 이마가 벗겨졌지만 여전한 장발과 부츠 차림이었다. 그는 특유의 걸걸하고 강한 경상도 억양으로 자신의 옛 노래들과 <노 릴리전>, <에이즈 송> 같은 새 노래들을 불렀고 사회자의 질문에 따라 예술과 자유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바람'처럼 '자유'롭게 그러나 기품 있게 말함으로써 깊은 울림을 얻고 있었다. 나는 지식인이 혹은 예술가가 입을 벌린다는 게 발언한다는 게 저런 거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 깨달음은 내가 서른 일곱 해 동안 이 나라의 사람들로부터 전혀 얻을 수 없었던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나의 초등학교 1학년 담임은 자기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잃어버리자 아이들을 하루 종일 변소에도 못 가게 하고 교탁에 엎드려 울었다. 울다가 한번씩 우리를 노려보던 그 추한 눈빛을 난 잊을 수 없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선생들은 언제나 자기 한 몸 건사하기 힘든 인격을 폭력으로 벌충하는 그런 인간들이었다. 학교 다니는 일이 끝나고 문화계 언저리에서 건달 노릇을 하게 된 후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사회의 선생'이 학교 선생과 다른 건 때리지 않는다는 점뿐이었다. 장엄한 예술가 선생은 알고 보면 장엄한 정신지체아였고 존경받는 인격자 선생은 실은 공명심과 출세욕만으로 채워진 인격장애자였고 입만 열면 역사를 말하는 열혈지사 선생은 자기 아내와 자식한테서조차 존경받지 못하는 불쌍한 생쥐였다. 이 나라의 더러운 역사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기로 했지만 그들 덕분에 나는 적을 보며 비분강개하는 일보다는 우리 안의 위선을 조롱하는 일을 더 즐기는 비틀린 사람이 되었다.
한대수의 자서전은 정직했다. 그는 쪼다가 아니었다. 그가 이 나라에서만 살던 사람들보다 먼저 '자유'와 '바람'을 먹었다는 게 언제나 문제였지만 그 역시 그의 죄는 아니었다. 그는 가슴 아픈 성장기를 거친 한국 소년이었고 '빳다'를 치는 한국 군대에 다녀 온 유일한 뉴요커였다. 한대수는 남자가 생겨 자기를 떠난 전처의 '그 남자'가 곤경에 처하자 그를 집으로 데려와 먹이고, 나중엔 '그 남자'와 헤어지고 신경쇠약에 걸린 전처를 새 아내와 사는 집으로 데려와 보살피는 어처구니없는 사람이었다. 불의 열정으로 인생을 채워 온 그 '야수'가 말이다. 한대수의 50여 년 생애의 얼개가 한 조각씩 드러날 때마다 나는 '인간 한대수'에게 한걸음씩 다가가고 있었다. 최영미는 죽은 김남주에게 "선생님 차라리 잘 돌아가셨어요"라고 적었지만 나는 여전히 살아 있는 이 멋진 사나이에게 무릎 꿇고 말한다. "형님, 절 거두어 주십시오." | 씨네21 1998년_7월
"7년 살고 박노해처럼 된다는 보장만 있다면 감옥살이 못할 놈이 누가 있냐." 초장에 한대 패서 재우는 건데. 친구는 민망하게도 장세동이 옥살이할 때마다 전두환으로부터 위로금을 받았다는 얘기를 박노해한테 빗댄다.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건 박노해만 몰랐던 거 아냐." "농촌 공동체? 소리 없이 하고 있는 양반들 많아. 하루 다섯 시간 노동? 쌍팔년에 러셀이 한 얘기고. 도대체 새로울 게 하나도 없잖아." 틀린 얘기는 아니었다. '돌아온' 박노해는 '변화'가 가장 주요하다고 했지만, 정작 그가 정색을 하고 하는 얘기들 가운데 새로운 건 없어 보였다. 나는 십오 년 전의 김지하를 떠올렸다. 오늘 김지하와 그의 생명사상은 어디 가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주인이 서비스라며 비단조개를 몇 개 갖다주자 친구의 목소리는 한 단계 높아지고, 소주잔만 비우며 "조개나 먹어 자식아" 하던 나도 왠지 울컥해서 거들기 시작했다. "<노동해방문학>하던 아무개는 종적을 모른다더라. 그래도 염치를 아는 사람이지." "사노맹도 다 나온 게 아냐. 한 명은 안 썼어." "준법서약서 얘긴 하지마 자식아." "썼다고 욕하는 게 아니라, 쓴 게 자랑은 아니지 않느냐는 거야. 안 쓴 사람들이 엄연히 있는데 말야." "강용주라고 우리하고 동갑내기 장기수 말야. 자기 어머니한테 쓴 편지 읽어봐라. 너나 나나 대가리 박고 칵 죽어야 돼." "이상해. 독립운동이고 민주화운동이고 어떤 놈은 3대가 망하고 어떤 놈은 혜택받는단 말야." "그게 바로 인생 경영 아니겠냐. 그것만 되면 맑스주의 아니라 친일 경력도 일생에 보탬이 되는 거야." 우리의 삶이 버려진 조개 껍질보다 시시해서였을까. 우리는 점점 취해만 갔고 주장은 주정으로, 주정은 다시 공전해갔다.
돌아오는 길. 사지를 못 가누며 연신 "조개나 먹어라 새끼들아"만 되내이는 친구를 부축하다가 나도 힘이 빠져 주저앉았고 이내 둘은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별이 총총하게 박힌 하늘을 보며 친구가 중얼거렸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었다. 망할 자식. "하나님의 나라는 여러분 마음속에 있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싸우는 사람의 영혼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랬다. 유토피아는 점심을 거르는 아이들을 알면서도 오늘 점심은 뭐로 때우나 고민하는 시민들의 구차한 삶 속에도,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전직 혁명가의 새삼스러운 외침 속에도 없다. 유토피아는 "아무 것도 아닌" 준법서약서 한 장 못 쓰고, 아들을 기다리는 칠순 어머니에게 "오래 사셔야 돼요."라고 말하는 내 동갑내기 장기수의 영혼 속에, 사람들이 '미망'이라 비웃는 그 고결한 영혼 속에나 있다. 주여, 갇힌 자에게 은총을. | 씨네21 1998년_9월
외할아버지는 도벌꾼을 막기 위해 산골마을을 찾아다니면서 실사를 벌이다가 트럭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고 결국 늑막염이 되어 돌아갔다. 전라도의 덕망 있는 유학자였던 외증조 할아버지는 공부를 작파하고 돈놀이로 연명하기 시작했다. 남편의 모든 것을 불태운 외할머니는 어린 자식들에게 당신의 처지를 한탄했고 아버지의 무덤에 못 가게 했다. 감성적이고 예민한 어머니에게 그것은 그대로 상처가 되었다. 다섯 해 후 내려온 인민군은 '지주이자 고리대금업자'인 외증조 할아버지를 가두고 재산을 몰수했다. 집안의 젊은이들이 모조리 좌익이었음에도 외증조 할아버지를 빼주진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 산사람이 되어 싸우다 죽었다. 토벌대에 잡힌 몇몇은 '와이로'(우익 고유의 생활문화인)를 써서 살아남았다. 외증조 할아버지는 얼마 못 가 화병으로 돌아갔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어머니가 나를 당신 아버지와 닮았다고 한 얘기에 '닮기를 바라는' 소망이 더 깊게 베어 있음을 깨달은 건 서른이 다 되어였다. 어머니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지만 좌익에 대해 뿌리 깊은 선망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간 다음 의지하고 따랐던 집안의 좌익 오빠들 때문이다. 그들이 인간적으로 얼마나 멋진 사람들이었는지 떠올리는 어머니의 눈은 꿈을 꾸는 듯 하다. 어머니는 그렇게 외할아버지의 추억에 좌익 오빠들의 추억을 보태 놓고 당신 아들이 그리 되기를 바랬던 것 같다. 자라면서 어머니로부터 뭘 하라거나 하지 말라거나 하는 말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어머니의 가르침은 언제나 같았다.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 불의를 보고도 참는다면 남자가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비굴해지면 안 된다." 그 말을 매일 같이 들을 무렵엔 그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그 말을 충분히 이해하는 나이가 된 나는 그렇게 살지 않는다.
어머니는 (요즘 말로 하면) 당신 아들이 좌익 인텔리가 되기를 바랬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좌익도 인텔리도 되지 못했다. 좌익인 듯할 뿐 좌익이 아니며 인텔리인 듯할 뿐 인텔리가 아니다. 글만 쓰면 파시스트를 저주하고 중산층을 까고 지식인을 비꼬고 근로대중을 한없이 지지하지만, 그 글은 방구석에 앉아 세상을 재단하는 부도덕을 깔고 있다. 어머니의 가르침은 실패했다. 이제 늙고 병든 어머니는 아들의 곤궁함에 노심초사하면서 출근한 며느리를 대신해 조용히 아이를 본다. 어머니는 더 이상 '불의'나 '비굴'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대신 나는 일용할 양식을 벌기 위해 거의 매일 그 '불의'와 '비굴'과 교접한다. 돈이 된다면 재벌에도 몸을 팔고 파시스트에게도 웃음을 판다. 다만 이따금, 아주 이따금씩만 더러운 꼴에 생지랄을 할 뿐이다. 어머니의 가르침은 흔적으로만 남아있다.
정말이지 어머니의 가르침은 실패했다. 그 가르침을 떠올리면 눈물이 난다. 그럴 때면 나는 다섯 살 짜리 딸, 김단을 방으로 부른다. 그리고 김단을 안아 올려 입을 맞춘 후 말한다. "단아, 힘없는 동생들한테는 친절하고 나쁜 오빠들하고는 용감하게 싸울 줄 알아야 훌륭한 언니가 되는 거야." 김단은 그 말을 할 때면 세 번에 두 번은 딴전을 피우고 한번쯤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본다. "그럼 용감한 사람이야, 아빠?" 김단은 겁이 많지만 그 겁만큼이나 용감하다는 말을 좋아한다. 나는 비로소 안도한다. "이 아이가 나보다는 낫겠구나." 가르침은 계속된다. | 씨네21 1998년_10월
저녁 무렵 대학로에서 만난 그 녀석은 살이 붙고 안색이 안 좋았지만 지적인 분위기를 더하고 있었다. 밥 대신 맥주를 먹기로 하고 골뱅이 집에 들어갔다. 일 이야기에 간간이 '깃발 꼽는 지식인들'을 안주(참으로 질긴 안주) 삼아 네댓 시간을 보냈다. 그 녀석은 내가 말을 하면 조금은 부끄럼 타는 듯한 얼굴로 잠자코 듣고 있다가 선량하게 웃었으며 이따금씩 손뼉을 쳤다. 그날 그 녀석으로부터 받은 느낌은 특별했다. 처음엔 '매력 있군' 했지만, 며칠 후 나는 그 '매력'이 성적인 지점에 닿아 있음을 깨달았다. 성적 취향의 경계란 얇디얇은 것이었다.
그 후론 그 녀석한테서 그런 느낌을 받은 기억이 없다. 그 녀석은 내 앞에서 더 이상 부끄럼을 타지 않았고 술만 먹으면 악을 쓰고 차도에 오줌을 갈기곤 했다. "형, 나 남자 좋아해요." 한달 쯤 지났을까. 그 녀석은 포장마차에서 만취한 채 내게 커밍아웃했다. 나는 그제야 내가 받은 느낌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 그 녀석은 제 애인을 나에게 소개했고 며칠 후 생일파티에 초대했다. 낙원동의 아담한 게이 카페에서 열린 생일파티엔 열댓 명이 참석했다. 열 명 남짓한 게이들이 짝을 이루어 참석했고 '일반'(그들은 이성애자들을 '일반'이라고 자기들은 '이반'이라고 부르더라)은 그 녀석의 여자 친구 둘과 나, 그 녀석의 남자 친구 그렇게 넷이었다. 게이들의 생일파티(네 가지 성이 참석한)는 유쾌했다. 적극적인 이성애자일 뿐인 나로선 그들 가운데 이정섭씨처럼 간드러지게 말하는 친구가 없다는 것부터 신기해 보였다. 돌아가면서 준비한 선물을 내놓고 덕담을 하는 식당 지배인, PD, 철인 경기 선수, 스튜어드, 학생에 백수까지 그들은 그저 건강하고 예의바른 남자들이었다. 그들의 짝짓기가 가진 원시성은 나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들은 성적 매력(육체적 의미만이 아닌)을 기반으로 짝짓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짝짓기에 돈과 계급은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정말이지 그들에게 결혼이 없는 것은 축복이었다.
그 녀석은 첫 키스를 초등학교 5학년 때 했다고 했다. 남자와 말이다. 내가 여자에게 느끼는 성욕과 안타까움을 그 녀석은 남자에게 느끼는 것이다. 그 녀석과 내가 다른 건 단지 그것뿐이다. 그 녀석은 엑스포만 피는 나를 '변태'라고 놀리곤 했다. 맞는 말이다. 게이가 변태라면 남들 디스 필 때 엑스포 피는, 딱 그만큼의 변태다. 그 녀석은 아직 공식적으로 커밍아웃하지 못했다. 그 녀석이 난 남자가 좋다라고 맘놓고 얘기할 수 있는 세상은 올 것인가. 퀴어 영화제가 번듯하게 열리고 게이 담론이 늘어나는 건 그런 세상이 오고 있는 징표다. 하지만 이미 찬성하거나 이해할 채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끼리 생각을 재확인하고 학습을 늘리는 일이 세상을 개선시키는 건 아니다. 퀴어의 세계는 문화 담론으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과연 누가 변태인가. 꼴리면 하고 땅기면 살고 싫어지면 헤어지는 그들이 변태인가, 돈 때문에 하고 계급 때문에 살고 싫어져도 못 헤어지는 우리가 변태인가. 정말이지 누가 더 변태인가. | 씨네21 1998년_11월
내가 처음 교회에 나간 건 중학 2학년 때였다. 교회는 나더러 믿으면 축복 받는다고 약속했는데 그 믿음의 세기와 축복의 양은 정비례한다고 했다. 믿음이란 교회에 열심 하는 것이고 축복이란 돈이나 명예, 건강 따위의 것들이었다. 교회는 욕망으로 물든 담장 밖을 말했지만 실은 담장 밖의 욕망에 찌들어 있었다. 교회는 언제나 영혼을 말했지만 영혼을 얻는 일이 돈을 잃는 일이라면 그마저도 없었을 거였다. 머리가 커가면서 나는 교회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나는 제 새끼만 챙기는, 내 아버지보다 더 이기적인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여전히 교회에 다녔지만 교회가 내 삶에 끼치는 영향은 적어져 갔다. 교회에 다님으로써 일어나는 삶의 변화란 교회에 다니는 일 외엔 없었다.
내가 한신에 들어간 건 우연이었다. 나는 그곳이 문익환이나 장준하 같은 거인을 배출한 곳이라는 것, 인권운동의 젖줄이자 민중신학의 본산지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고등학교를 마쳤을 때 내 관심은 오토바이와 음악, 그리고 여자에만 있었다. 내일이 없는 삶을 하루하루 태워가던 건달이 그래도 대학은 다니라는 권고를 받아들였을 때 나는 한신에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머리통이 뒤집히는 충격을 받았다. 교회의 사회 참여. 정의의 하나님. 비천한 자들의 예수. 한 소년의 삶에조차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던 교회가 세상의 한 가운데서 세상의 바닥을 갈아엎고 있었다. 나는 비로소 내가 기독교임을 사랑하게 되었다.
보수 교회의 건물에 진보 교회를 칠하는 일은 무리였다. 경악한 목사와 장로들은 내게서 청년부 회보를 만드는 권한을 빼앗았고 나는 교회를 나왔다. 아버지가 눈물을 보였지만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친구 소개로 찾아간 교회는 작았다. 목사는 알려진 소설가였고 50명 남짓한 신도는 지식인들이었다. 나는 지쳐 있었고 새로운 교회의 진보적이고 지적인 분위기는 잠시 나를 편안하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다시 교회를 의심하게 되었다. 광주항쟁 3주기가 되는 예배 시간. 목사는 감동적으로 설교했다. 목사가 눈물을 흘리자 신도들도 울기 시작했다. 예배가 끝나도 흐느낌은 그치지 않았다. 땡. 교단의 종이 울리고 목사는 웃으며 야유회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신도들은 이제 야유회에 맞는 얼굴이 되었다. 장소에다 회비까지 정해지고 드디어 신도들은 개운한 얼굴로 집으로 돌아갔다. 교회는 한줌의 양심과 사회의식을 마스터베이션하고 있었다. 징그러웠다. 나는 교회 문 앞까지 왔다가 되돌아가기를 거듭했다. 나는 청년부 총무였고 두 달만에 교회에 나갔을 때 회원들은 해명을 요구했다. 내가 그들을 바라보았을 때 그들은 모두 내 눈길을 피했다.
교회에는 예수 대신 맞춤식 예수상(像)들만 모셔져 있었다. 나는 신학을 공부하려던 나의 소망을 접고 입대했다. 그곳에서 세 번의 살인과 세 번의 자살을 생각했고 김씨 성을 가진 여자를 떠나보냈으며 김씨 성을 가진 창녀에게 구혼했다. 이제 십 년이 더 흘러 나는 며칠 후면 서른 여덟이다. 나는 이제 나보다 다섯 살이 적어진 예수라는 청년의 삶을 담은 마가복음을 읽는다. 내가 일년에 한번쯤 마음이라도 편해 보자고 청년의 손을 잡고 교회를 찾을 때 청년은 교회 입구에 다다라 내 손을 슬그머니 놓는다. 내가 신도들에 파묻혀 한시간 가량의 공허에 내 영혼을 내맡기고 나오면 그 청년은 교회 담장 밑에 고단한 새처럼 앉아 있다. | 씨네21 1998년_12월
알다시피, 엘리아 카잔은 빨갱이 사냥이 극에 달한 1952년, 이른바 하원 반미행동조사위원회에 나가 자신이 좌파임을 시인하고 동료 8명을 밀고했다. 카잔은 54년 <워터프론트>로 오스카 감독상을 받는 등, 영화와 연극을 넘나들며 활동을 계속했지만 '밀고자'로 손가락질 받아왔다. 그를 불리한 처지로 몰아넣은 건 그 자신이었다. 카잔은 52년 하원 증언을 마친 직후 '공산주의는 위험천만한 적들의 음모'라는 광고를 <뉴욕타임스>에 싣는가 하면, 88년 발간한 회고록에선 "그런 기회가 또 다시 오더라도 똑같이 명예로운 행동을 하겠다"고 밝히는 배 째라 식의 행태를 보여왔다.
72년, 좌파라는 이유로 미국에서 쫓겨나 20년 동안 망명생활을 해오던 찰리 채플린이 '영화를 20세기의 예술이게 한 공적'으로 오스카 공로상을 받았다. 채플린의 공적은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그 상은 할리우드가 매카시즘의 피해자에게 정중하게 용서를 구하는 절차이기도 했다. 영화 <채플린>에 묘사된 대로, 채플린이 83세의 노구를 끌고 입장하자 할리우드 영화인들은 열광적인 기립 박수를 보냈고 채플린은 눈물을 흘렸다.
오스카가 FBI에 의뢰해서 좌석 배분을 한 걸까. 카잔이 입장했을 때, 객석의 오른쪽은 거개가 기립했지만 왼쪽은 팔짱을 끼고 있거나 박수치지 않았다. 머리가 비었을 거라 여겨지던 할리우드 영화인들의 만만치 않은 사회의식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일이었고, 역사 속에서 '이미 확보된 이성'이 '우상이 남긴 상처'를 지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일이었다. 카잔은 "아카데미의 용기와 관용에 감사한다"는 짤막한 인사말을 하고 서둘러 퇴장했다.
<조선일보>는 그 일을 두 번 언급했다. "엊그제 열린 71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엘리아 카잔 감독이 특별공로상을 받았다. 매카시 광풍에 의해 채플린이 추방된 1952년, 카잔 감독은 자신의 동료였던 공산당원들의 이름을 의회 청문회에 밝혀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카잔의 원죄는 '마녀 (공산주의자) 사냥'이 극에 달했던 52년, 한때 공산주의자였던 동료 영화인 8명을 밀고한 것."
도무지 <한겨레>와 구분할 수 없는 이 공평무사한 표현은 <조선일보>와 그들의 보수 사상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그들은 왜 52년 미국의 메카시즘을 '광풍'이며 '마녀사냥'이라고 하면서, 오늘 한국의 '광풍'과 '마녀사상'을 요구하는 걸까. 그것은 그들의 보수 사상이 세상을 판단하는 신념체계가 아니라, 가진 것을 내놓지 않으려는 혹은 더 많이 가지려는 동물적인 욕망 체계이기 때문이다. 52년 미국의 메카시즘은 내 돈궤하고 아무 상관이 없지만, 오늘 한국의 메카시즘은 내 돈궤를 보존하거나 늘리는 일인 것이다. 새삼스런 얘기지만, 보수 사상이 진보 사상과 대립한다 해서 보수 사상을 진보 사상과 같은 층위에 놓는 일은 터무니없다. 그것은 순수한, 매우 순수한 욕망이다. | 씨네21 1999년_3월
영화인들은 전례 없이 단결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들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싸웠냐 하면 '자신들의 모습에 자신들이 놀랄 정도'라고 했다. 두 달이 넘게 계속된 영화인들의 싸움은 공무원들이 꼬리를 빼고 국회 결의안이 관철되고서야 일차 마무리되었다. 농성을 풀며 영화인들은 "국민의 지지를 얻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영화인들이 제아무리 열심히 싸웠던들 국민들이 외면했다면 결과는 전혀 달랐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이 왜 이리도 민망한가.
과연 한국 영화인들은 '국민의 지지'를 받을 만한 사람들인가. 제 밥그릇이 걸린 일에는 '자신들이 놀랄 정도'로 열심인 영화인들은 남의 밥그릇에는 어떤 관심을 보였던가. 자신들의 불행을 언제나 민족이라는 이름에 호소하는 영화인들은 정작 민족이 불행할 때 어디에 있었던가. 이번 싸움에서 할리우드 영화를 '독점 자본'으로 해석하는 참신함을 보인 영화인들은 다른 업종의 노동자들이 진짜 독점자본과 싸울 때 무엇을 도왔던가. 이번 싸움에서 한국 영화를 '민족 고유의 것'으로 해석하던 영화인들은 농민들이 신토불이를 외치며 미국쌀과 싸울 때 어떤 지지를 보냈던가. 이 나라의 유한 계급을 뺀 모든 백성들이 불행해진 구제금융 시대가 일년을 넘기고 있지만 그 동안 영화인들은 그 잘난 영화 예술로 세상의 어떤 모습을 그려냈던가. '경쟁력'을 이유로 직장에서 쫓겨나고 가정이 풍비박산이 나고 길거리를 헤매는 이 나라의 백성들이 그런 염치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경쟁력'을 유보하는 아량을 베풀 이유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한번도 사회적이지 않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사회적 혜택은 과연 공정한가.
이번 싸움을 통해 개발된 영화인들의 자기 논리가 전례 없이 정교함에도, 이번 싸움의 열기가 밥그릇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체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냉소하고 일상의 우연에 천착한다는 지성파 감독까지 연단에 오르는 이변이 생길 리 있었겠는가.('정치 의식'을 초월한 듯 행동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경제 의식' 아래에 머물 뿐이다.) 나는 영화인들의 '경제 투쟁'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 다만 그 경제투쟁이 경제투쟁에 머물지 않기를, 제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그들의 열정이 남의 밥그릇도 함께 생각하는 사회적 지평으로 확대되기를 바란다. 영화인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억울함과 고통을 이 나라의 백성들이 겪는 보편적인 억울함과 고통 속에서 재발견하여야 한다. 영화인들은 이번 싸움을 통해 지켜낸 스크린쿼터가 오로지 영화라는 업종에만 주어지는 소중한 혜택임을, 그들의 장사가 매우 특별한 장사임을 다시금 생각하여야 한다. 그것은 산업의 문제이자 예술의 문제지만, 오히려 '염치'의 문제이기도 하다.
사족 : 이 만큼 말하고도, 내 속은 여전히 찜찜하다. 한국 영화인들이 농성장에서 함께 흘린 눈물은 모두 같은가. 영화 자본가의 눈물과 영화 노동자의 눈물은 싸움이 끝난 다음에도 연대하는가. 싸움의 성과로 얻어지는 산업적 이익은 함께 흘린 눈물처럼 공정하게 분배되는가. 한국영화인들은 같은 민족인 동시에 같은 계급인가. 한국 영화인들에게는 '상식선'의 정치의식이 필요하다. | 씨네21 1999년_3월
사정이 그러한데 그 아줌마들, 이른바 낮은 울타리 아줌마들이 교인인 건 되레 당연했다. 낮은 울타리의 모태는 '수요 봉사회'라 하며, '수요 봉사회'란 박정희 시절 만들어진 장관집 아줌마들의 사회봉사모임으로 매주 수요일에 모여 "주머니를 만들고 그 안에 치약이나 칫솔을 넣어 일선 장병한테 보내는"(한겨레) 식의 활동을 해왔다고 했다. 고매한 장관집 아줌마들이 하잘것없는 군바리에게 보낼 치약 칫솔을 주머니에 담는 일을 주마다 해왔다니 건국 이래 이런 갸륵한 미담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 아줌마들이 라스포사니 앙드레 김이니 하는 옷가게에서 50% 할인 혜택을 받았다거나 그마저 다른 돈 많은 이들이 내주곤 했다는 건 그런 노고에 대한 당연한 사회적 보상이라 할 만하다. 하여튼 낮은 울타리는 '수요 봉사회' 아줌마들 가운데서도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아줌마들의 모임이라 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말하길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어찌 그럴 수 있냐지만 그 말씀은 교회가 어떤 곳인지를 몰라서 하는 말씀일 뿐이다. 예수는 부자가 천국에 가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가는 일보다 어렵다고 했지만, 교회는 물질축복은 성실한 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가르치지 않는가. 예수는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언제나 세상에서 천대받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았지만, 교회는 세상에서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어선 안 된다고 가르치지 않는가. 예수는 세상으로 나가 세상을 섬기는 빛과 소금이 되라 했지만, 교회는 세상의 더러운 죄를 들어와서 씻어라 하지 않는가. 예수는 집도 절도 없이 동산과 벌판에서 하느님 말씀을 전했지만, 교회는 성전을 짓고 찬란하게 치장하는 일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라 가르치지 않는가. 그 아줌마들, 이른바 낮은 울타리 아줌마들은 결단코 교회에서 가르치는 대로 지키고 실천한 참 신자들인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또 말하길 교회의 가르침이 세상의 욕망과 다를 게 무어냐 하고 심지어는 예수와 가르침과 교회의 가르침이 온통 거꾸로라고도 하지만, 그 말씀 역시 참 신앙의 경지가 무언지 몰라 하는 말씀일 뿐이다. 2천년 전 이스라엘의 가르침은 오늘 대한민국의 생활 형편에 맞추어 살아 숨쉬는 가르침으로 재해석되는 게 당연하며, 백 번을 양보하여 대개의 한국 교회가 수천만을 상대로 하는 거대한 사기조직일 가능성이 있다손 치더라도 하더라도, 진실을 밝히는 게 언제나 은혜가 되는 건 아니다. 만일 기독교인의 삶, 예수를 따르는 삶이 돈과 명예 권력 따위를 얻는 일과는 애당초 거리가 먼 삶이라는 사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롱 당하며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죽기 십상인 삶이라는 사실이 밝혀질 때의 대혼란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하느님을 경배 드리는 거룩한 성전에 날품팔이 거지 양아치 장애자 매춘부 따위들이 예수의 동무랍시고 몰려들고, 대를 이어 뜨겁게 믿고 정확히 바쳐 온 집사 권사 장로 목사들의 신앙적 프리미엄이 하루아침에 깡통주가 된다면 그 억울함을 무슨 수로 보상할 것인가. 근대 이후 교회를 핍박한 건 언제나 빨갱이들이었고, 성도들은 순교자의 본을 받아 죽음으로 교회를 지키고 또 지켜낼 뿐이다. 할렐루야. | 씨네21 1999년_6월
그날 이후, 그들은 나를 형이라 불렀고 이따금씩 자신들의 근황을 알려오곤 했다. 올해 초 그들은 <애국자 게임>을 잠시 접고 유가협(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목숨을 잃었거나 의문의 죽음으로 세상을 떠난 자식들의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을 위해 1986년 발족되어 10년이 넘게 싸워 온 사람들)의 여의도 천막 농성을 다큐멘터리로 만들고 있다고 알려왔다.
올해 5월, 그들은 인디 포럼에서 다큐멘터리 <민들레>를 상영했고 나는 얼마간의 의무감을 안고 그 영화를 보러갔다. 푸른영상의 김동원 선배나 눈에 띨까, 300석 규모의 극장 객석은 거개가 비어 있고 그나마 한편은 유가협 어머니 아버지들이 메우고 있었다.(하긴 90년대 후반의 한국에서 유가협 농성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를 보러 올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민들레>는, 정확히 말해 <민들레>의 소재는 이른바 90년대 후반의 미감을 거스른다.)
<민들레>가 시작되자 이내 나는 그 영화에 빠져들었다. 그것은 영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내가 잊고 살던 '현실'이었다. 내레이션도 어떤 종류의 연출이나 기교도 생략한 채 피사체의 일상을 차갑게 담아낸(이런 걸 두고 다이렉트 시네마라 하던가. 현실을 단독 유치하기 위해 모든 형식적 가능성을 포기하는 영화 말이다.) <민들레>는 내게 치명적인 고통을 주었다. 물론 그 고통은 영화보다는 영화 속에 담긴 현실로부터 오는 것이었다.
나는 잊고 살았다. 전태일의 어머니가 차디찬 여의도 천막 속에서 한군데도 빠짐없이 골병이 든 육신을 한으로 견뎌가며 일년 째 농성중이라는 사실을. 이른바 지식인 사회(이런 게 있긴 한 걸까)에선 이미 세 번쯤 유행이 지난 그 전태일의 어머니가 말이다. 나는 잊고 살았다. 우리가 달라진 세상을 구가하며 달라진 세상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지껄이는 이 순간, 그 달라진 세상을 만들다 죽어나간 자식을 안고 여의도 길바닥에 화석으로 남은 사람들을.
<민들레>가 상영되는 내내 나는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웠고, 이 영화가 끝난 후엔 이 고통이 내내 계속되기를 기도했다. 나는 내가 얻은 고통에 어떤 식으로든 보답하고 싶었고 다음 날 가장 신뢰하는 녹음기사 친구에게 <민들레>의 사운드 보정을 부탁했다. 친구는 한푼의 대가도 없이 동료들이 모두 퇴근한 밤시간을 몇 번씩이나 투자하여 정성스레 <민들레>의 사운드를 다듬어주었다.
며칠 전, 어느 대학에 강연을 갔던 나는 전날 <민들레> 상영에 단 한 명의 관객이 왔었음을 알았다. 그 한 명의 관객은 행복했고 그 영화를 볼 것을 고려하지 않은 수많은 관객들은 불행했다. 나는 독자들께 <민들레>를 볼 것을 권한다. '삭발 시퀀스' 혹은 <민들레>의 다른 모든 시퀀스에 대한 설명을 부러 생략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민들레>를 보는 우리는 90년대 후반의 정신적 더께를 벗겨낼 수 있다. <민들레>는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다. 우리가 잊고 사는 바로 그 현실 말이다.
추신 1 : 축하 전화 없음에 항의하는 '빨간 눈사람'의 연락을 받고서야 나는 <민들레>가 제4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을 받았음을 알았다. 3년 전 그 영화제의 머슴 노릇을 하던 나는 이런 몰개성한 국제 영화제가 하나 더 존재할 필요란 주최자들의 문화적 허영이나 위한 것이려니 했는데, 어느새 그 영화제는 이 나라의 평균정신을 넘어서고 있다.
추신 2 : 11월 4일은 유가협의 여의도 천막 농성 1주년이 되는 날이다. 우리는 그날 여의도에 가는 게 좋겠다. 가서 전태일의 어머니나 이한열의 어머니나 박종철의 아버지, 아니 그들보다 덜 알려진 자식들을 담고 화석으로 남은 어머니 아버지들의 손을 잡고 "힘내세요."라고 말하는 게 좋겠다. 그 순간 우리는 우리가 한번 더 힘을 내 살아야 하는 이유를 깨닫게 될 것이다. | 씨네21 1999년_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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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가 만들면.
설렁설렁 하는 것 같아도 무척이나 맛있던 기억이...
난 김말이 그닥인데
마음의 당면. 꽤나 먹고 싶게 생겼수. 큭.
잘 지내지?
요며칠 잠이 좀 부족하긴 하지만 그럭저럭. 딸이랑 같이 찍은 사진 좀 보내줘.
마음의 당면이라니 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이런 글 메인에 좀 올려주시면 안 되나요?? ㅜㅜㅜㅜㅜ
홈에 올리는 걸로 변경했어요. 아직 스킨편집은 불가능? 폰트나 컬러를 수정하고 싶은데 좀 더 기다려야겠지요? 이것 저것 달아보다가 이 스킨으로 결정했는데 블로그 제목이, 제목이, 음 ㅋ. 암튼 개편 작업 하시느라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스킨 편집 됩니다,편집하기까지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어서..ㅜㅜ
그 과정까지는 방명록을 쓰고 싶지 않다면?! 이란 글을 참조해 주시구, 스킨 고치기는 스킨 고르기 + 스킨 수정하기를 봐주세요!!!!
오호, 개편 후 할 일이 더 많아진 듯? 고맙습니다. 친절한 설명 잘 보고 있습네다. 설명 올라오기 전부터도 짬내서 자주 들어와 스킨편집을 시도했는데 잘 안되네요. 눈도 침침하구 ㅋ. 다시 해볼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