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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마종기 - 우화의 강 1

평소에는 티비 앞에 앉아 있을  시간이 거의 없고

일요일 밤에는 개그콘서트나 콘서트 7080쯤 챙겨보곤 한다.

오늘 <콘서트 7080>을 보니까 녹화를 3주쯤 전에 했는데,

내가 초대권을 얻어 놓고서도 일정이 겹쳐서 못갔던 바로 그날의 것이다.

 

거기에 가수 한경애가 나오더니

노래와 노래 사이에 시 하나를 읽어 주었다.

마종기 시인의 <우화의 강1>,

오래 전에 읽었던 것인데도

새로운 느낌으로 잔잔하게 다가와 내 마음을 울려 주었다. 

 

사람을 사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음의 물길을 이으며

바다, 하늘, 또는 그 어딘가로 함께 가는 것이겠지.

 

같이 읽어 보자...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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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의 강 1

-마 종 기

 

사람이 사람을 만나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한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거리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여야겠지만

한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긴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보아 주고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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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그리고 전태일

원고 마감이 다음 월요일인 줄 알고 있다가

점심 먹으러 나서던 길에

혹시나 하고 확인했더니 오늘 오전까지란다.

허걱...화들짝 놀라서는 부리나케 써서 보낸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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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이 왔다. 추풍낙엽이라더니, 바람이 건듯 불 때마다 노란 은행잎과 플라타너스의 갈색 이파리들이 허공으로 나부낀다. 저 낭만적 풍경도 곧 황량한 겨울로 치달을 것이다. 사람들이 짐짓 가을을 타는 한편에서 겨울을 알리는 찬바람이 틈틈이 몰아치는 이맘때면 유난히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젊은 노동자 전태일을 기리는 노동자들이다.

노동자들뿐만 아니다. 정치의 민주화뿐만 아니라 이 땅의 경제․사회․문화의 민주화를 외치며 헌신했던 많은 사람들이 전태일을 기억하고 그의 뜻을 기리며 오늘을 살고, 해마다 11월을 숙연하게 맞이한다.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군사독재정권이 노동자들을 극단적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으로 착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종교, 학계, 사회단체 등 민주화운동에서는 노동자들의 실태를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전태일의 분신을 맞았고, 한국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다.

전태일은 '나를 죽이고', '나를 버리고', '나약한 나를 다 바치며' 그렇게 먼저 가고, 그가 가고 난 다음에 70년대는 새롭게 열렸다. 위수령, 휴교, 10월 유신, 계엄령으로 얼어붙은 시대를 가로지르며 그는 활활 불꽃이 되어 세상을 녹였다. 고시를 준비하던 대학생들이 그의 분신으로 말미암아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에 투신하였고, 노동자들의 삶이 얼마나 열악한지 미처 몰랐던 지식인들은 뒤늦게 피눈물로 오열했다. 오늘날 사람들이 전태일을 일러 '인간성의 원형', '나의 표상', '죽비'라고 표현하는 것은 전태일을 통해서 그 자신들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는 말과 다름없다.

그것은 80년대의 민주화운동의 자양분이 되었다. 감히 말하거니와 80년 5월의 광주민주항쟁부터 87년 6월항쟁, 그리고 7․8․9 노동자대투쟁은 전태일의 분신에서 싹이 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0년대 이후 '공돌이'와 '공순이'라는 이름으로 산업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던 노동자들이 87년 이후 마침내 역사의 한 주체로서 시민권을 획득하고 나서 전태일 정신을 내걸었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오는 11월 13일은 전태일이 분신한지 40주기가 되는 날이다. 지난 40년동안 우리 사회는 참 많이 변화하고 발전했다. 그러나 과연 모두가 함께 살맛나는 세상이 되었는지, 모든 사람들의 삶의 질이 골고루 높아졌는지, 되물어보면 대답이 무척 궁색하다. 국민소득이며 무역수지 따위, 정부가 내세우는 현란한 수치들이 무색하게, 사회 양극화가 매우 심각하여 가난은 대물림될 뿐만 아니라 갈수록 확대된다. 자랑할 것 없는 자살율과 저출산율 같은 것은 세계 1위이다. 노동자들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공장과 하청공장, 사무직과 생산직, 고학력과 저학력, 남성과 여성 등으로 갈기갈기 찢겨져 있다.

노동탄압과 착취에 저항하는 분신과 투신이 끊이지 않는다. 지난 주말 KEC 구미 1공장에서 또 한 사람의 노동자가 몸에 불을 붙였다. 전태일은 자신의 결단이 끝이기를 바랐겠지만, 지금 민주노총에서 노동열사로 부르는 노동자만 150명이 넘는다. 2010년 11월은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40년 전으로 돌아가게 한다. 전태일 정신이 무엇인지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11월의 바람에 몸을 맡기고 가만히 귀기울여 본다. 전태일이 다시 살아나, 돈보다는 인간이 더없이 귀중하다고, 경쟁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것이 더 소중한 가치라고, 나에게 속삭이는 듯하다. '이 사람아, 당신이 전태일 목소리를 어떻게 알아?' 하고 따지고 싶으면, <전태일 평전>을 한번 읽기를 권한다. 사법시험을 준비하다가 전태일의 분신 소식을 접하고 자신의 인생행로를 바꾼 고 조영래 변호사가 전태일보다 더 생생하게 전태일의 삶과 목소리를 전하고 있다.(2010.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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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자람 밴드

해야 할 일이 

그것도 시간을 다투어 해야 할 일이

동시에 밀려들어올 때

어느 것을 먼저 해야 할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어차피 내 맘대로 순서를 정하면 되는 거지만

지금처럼 잠시 아득한 느낌이 들 때에는

엉뚱한 곳으로 잠깐 도망을 가곤 한다.

 

음, 오늘은

<아마도 이자람 밴드>에게로 가 볼까.

딱 30분만 놀자.

급한 일들, 모두 30분만 늦추도록 하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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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덕구이

더덕은 손질하기가 번거로울 것 같아서

선뜻 사다가 해먹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추석을 앞두고 주변의 몇 동지에게

작은 선물을 하나씩 했더니

그 중에 한 동지는 더덕 꾸러미로 되갚아 주더라.

 

덕분에

더덕구이를 두 번이나 해먹었다.

고추장 양념을 해서 재어두었다가

석쇠에 얹어 가스불로 구우니 더 맛있었다.

 

<재료>

더덕 400그람

 

고추장양념:

고추장 3큰술, 고춧가루 2작은술, 간장 2작은술, 다진파 1큰술, 매실엑기스 1큰술,

다진마늘 1/2큰술, 참기름 1/2큰술, 깨소금 1큰술

 

<만드는 법>

1. 더덕은 칼로 돌려가면서 껍질을 벗긴다.

2. 물에 잠깐 담갔다가 5-6cm 길이로 자르고 굵은 것은 반으로 길게 칼집을 넣는다.

3. 칼집을 넣은 더덕을 양쪽으로 벌려 자근자근 두들겨 납작하고 부드럽게 편다.

4. 앞뒤로 양념을 바르고 재어두었다가 팬이나 석쇠에 구워 먹는다.

 

* 참기름 2큰술, 간장 1작은술을 섞어 기름장을 만들어 발라 초벌구이를 한 다음에

  고추장 양념을 발라 구워도 좋다고 한다.

* 처음엔 고춧가루를 넣지 않았는데, 엄마는 그것이 맵지 않아서 좋다고 했고,

   나는 고춧가루를 넣은 쪽이 더 좋더라.

* 고추장 양념이 단맛이 약하면 설탕을 1작은술 정도 넣으면 되겠다.

* 껍질을 벗긴 더덕을 물에 오래 담가두면 맛과 향이 약해진다는 말도 있으니 참고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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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윤선의 정선아리랑

휴일에도 학교 가는 고3 가문비에게 김밥으로 도시락 싸주고

저녁에 오는 부모님과 동생에게 차려내려고 우족탕 끓이면서

내일 차례상에 올릴 식혜 만들려고 불린 찹쌀을 찌면서

잠시 소파에 앉아서 이렇게 놀고 있다.

 

아흔이 넘은 이모부님이 돌아가셔서

내일은 차례를 지내자마자 서울로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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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 친구여, 이제 네가 점심 사라

<전문노련> 기관지 1993년 3월호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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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여, 이제 네가 점심 사라

-이 성 우(유전공학연구소노조 조합원)

 

얼마 전의 일이다. 고교 동창 녀석이 우리 연구소를 찾은 적이 있다.

반갑게 악수를 하고, 손님 대접한답시고 유성에 가서 점심을 사고,

커피 한잔 마시며 지난 얘기들과 다른 친구들의 소식을 나누고 있던 중에,

그 친구가 불쑥 물었다.

 

"여기서 월급은 얼마나 받냐?"

"......"

"먹고 살 만큼은 주니?"

 

우물쭈물하다가, 이윽고 궁색한 답변,

"월급에다 보너스에다 이것저것 잡다한 것 합쳐서 대략 천 삼, 사백 될 것 같애.

 먹고 살 만큼 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둘다 실험실에서 지내다 보면 생활비가

 서울보다는 덜 드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럭저럭 사는 거지 뭐. 3년 전, 1500만원에

 세들어 살던 서울 상도동의 전셋값이 지금 아마 3000만원 정도 할텐데, 난

 그보다 넒은 집에 아직도 천오백에 살고 있거든."

 

이런, 목소리가 점점 기어드는 것이 답변이라기보다는 숫제 변명에 가까왔다.

친구가 덧붙이기를,

"쬐금 힘들겠다!"

 

-그래 힘들다, 임마, 어쩔래, 그나저나 내 작년 연봉이 정말 1300이나 되었나 모르겠다.

적당히 둘러붙인 건데...

 

그리고 얼마 있다가 문득 그 생각이 나서 서랍 속에 간직해 둔, 정말이지 받고 나서

그 동안 한번도 눈여겨 보지 않은 연말정산서(공식 이름은 '소득자별 근로소득 원천

징수부'라고 되어 있다)를 꺼내 보게 되었다. 그 서슬퍼런 문서에 가로되,

"KIST 유전공학연구소에 다니는 주민등록번호 6*****-1******인 이성우는 1993년

 한해동안 급여총액 11,307,868원, 상여총액 1,880,000원으로 계 13,087,868원의

 소득을 올려 513,352원의 세금을 국가에 충실히 납부하였음"

을 훌륭히도 증명하고 있었다.

 

흐음, 그래도, 1300만원대는 되는구나, 하고 짐짓 흡족(?)해 하고 있다가, 아니 50만원

이라니, 내 세금이 50만원이라니? 벌떡 일어나서 지난 해의 같은 문서를 꺼내어 비교해

보았다. 역시 가로되,

"위 이성우는 91년 한해동안 급여총액+상여총액 = 계 11,362,600의 소득으로

 130,791원의 세금을 냈노라!"

 

뒤늦게 꼼꼼히 계산해 보았다. 내 연봉은 작년에 15.2%가 올랐다. 총액 5% 지침에

저항하여 92년도 기본급을 동결했는데도 15%나 올랐다는 건, 내가 일을 잘한건지

(능률평가수당 등), 출근이라도 열심히 한 건지(연월차수당), 아니면 호봉 승급이

그만큼 되었다는 건지(?!) 아무튼 잘 모르겠지만, 올랐으니 흐뭇하다치고, 그 오른

금액 170만원(정확히 1,725,268원)의 22.2%(382.561원)를 세금으로 거두어가는

정부의 횡포는 도대체 뭐냐? 말이 인상분의 22.2%이지 91년도 세금에 비해 무려

292.5%가 오른 것 아닌가, 이런......(이하 줄임, 고운 말을 써야 할 것 아니오.)

 

다시 그 친구와 먹은 점심값을 생각해 보았다. 돌솥밥 1인분에 5000원, 그래 삼년 전에

우리가 대덕벌에 처음 왔을 때, 그 때는 3000원이었어. 세금보다는 덜 올랐군, 어디

다른 집들 한번 보자. 가끔 들러서 소주 한잔에 곁들이는 할매낙지, 그 매콤한 낚지볶음

한접시에 3000원이다(삼년 전에는 1500원), 먹는 것만 그러냐, 서울가는 고속버스는

2000원도 안했는데 3년만에 3000원이 넘어섰고, 우리 집에서 연구단지 들어오는

택시비는 작년만 해도 3000원이면 떡을 쳤는데, 이제는 5000원, 그나마 교통이 막히던

어느 날에는 8000원을 주었다는 내 아내의 푸념도 있다.

 

그러고 보니, 에고에고 친구야, 이게 내가 그럭저럭 사는 거냐, 정말 3%만 올려받고도

백일도 안된 딸까지 먹여 살릴 수 있는 거냐? 조용한 웃음 뒤에 안스러워하던 그 표정의

의미, 이제야 바로 알겠구나. 이제 니가 점심 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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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

대학교 2학년 때 친구에게서 받은 엽서.

 

옛날 편지들을 정리하다가 발견했다.

쑥스럽기는 하지만

세월이 좀 더 가면 되찾아볼 기회도 쉽지 않을 것 같아서

여기 올려 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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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강부회의 멍에를 벗어라

누가 쓰라고 해서 급하게 쓴 거.

무슨 얘기를 하고자 했는지 나도 헷갈리네....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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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의 정권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특히 이명박 정권에서 공공기관 노조들의 수난은 일찌감치 예고된 것이었다. 실제로 2008년 8월 이후 6차례나 발표된 공공기관 선진화방안은 노동조합 때려잡기라고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지난 3년 가까이 공공기관 노조들은 참 모질게 싸워왔고 투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9월 1일부터 시작된 공공서비스노조 위원장과 몇몇 지부장들의 단식투쟁은 그것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그러한 단식투쟁에 9월 8일부터 공공연구노조 위원장이 가세했다. 발표가 임박한 과학기술계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에 대한 선진화 방안과 안전성평가연구소 민영화, 그리고 한국건설기술연구원(건기연) 조용주 원장의 가공할만한 노동조합 탄압에 맞서는 투쟁이다. 노조 탄압이 사실상 공공기관 선진화방안의 내용이며, 건기연 말고도 다른 출연연에서 이미 노조 탈퇴공작을 파상적으로 벌여왔다는 것을 감안하면 기실 세 가지 현안이 모두 출연연 선진화방안에 집약되어 있다.

 

출연연 선진화 방안은 2008년 4월에 정부가 KAIST와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을 통합하려고 기도했을 때 이미 시작된 것이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에서 노조와 직원들의 결집된 투쟁에 밀리고 촛불정국에 둘러싸여 통합논의는 그해 가을에 중단되었지만, 정부는 3년간 충분한 연구와 논의를 거쳐서 출연연의 거버넌스를 개편하겠다고 발표했다. 올해는 그 3년의 마지막 해이다. 때맞추어 기획재정부는 올해 초에 업무계획을 보고하면서 출연연을 중대형연구소로 재편하겠다고 했다.

 

물론 출연연 현장에서 보더라도 출연연의 거버넌스는 개편해야 한다. 문제는 연구기관의 독립성을 확보하고 연구자율성을 확보하는 방향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의 출연연 거버넌스 개편의 기조는 구시대로 되돌아가려는 것이다. 공공연구노조가 미리 입수하여 지난 8월 10일에 발표했던 정부의 출연연 선진화 방안을 보면 현재 교과부와 지경부가 13개씩 나누어 관리하고 있는 과학기술계 출연연을 여러 부처로 분산 배치하고, 교육과학기술부 산하 5개 출연연과 지식경제부 산하 7개 출연연을 각각 하나의 연구소로 통합하는 것이 핵심이다.

 

각 부처가 나누어 관리하고 있던 출연연을 3개의 연구회 체제로 묶어서 부처로부터 독립시킨 것이 1999년의 일이니까 11년 전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출연연을 부처 산하에 두느냐 독립적으로 관리하느냐 하는 것은 정치적 입장의 차이를 떠나서 출연연에서 더 이상 논란거리가 아니다. 인문사회계 출연연에 대해서도 2008년에 잠시 개편시도가 있었지만 역시 부처 소속으로 되돌리는 것은 연구자율성에 역행한다는 것이 현장의 여론이었고 노조의 공식 입장이었다.

 

출연연을 부처에서 직접 관리하면 기관의 독립성과 연구자율성이 실제로 후퇴하는가? 그렇다! 얼마나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통제하느냐 하는 강도의 문제만 남을 뿐이다. 기관장 선출 과정에 부처는 가장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기관의 예산도 부처가 직접 통제할 수 있다. 연구과제 선정에 부처가 갖는 권한도 막강할 수밖에 없다. 특히 96년에 PBS(Project Base System, 연구과제중심운영제도)가 도입되고 나서 과학기술계 출연연의 연구자들은 연구비 수주와 인건비 확보라는 이중삼중의 굴레에 매여 신음하였고, 그러한 폐해를 완화하려고 도입한 것이 99년 김대중 정권에서의 연구회(연합이사회) 체제였다.

 

그 당시 노조(과기노조)는 연구회 체제가 전문가 집단에 의한 자율적 관리기구로 기능해야만 성공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옥상옥의 통제장치로 전락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노조의 우려는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연구회는 출연연에 대한 통제와 간섭을 완화시키는 기구가 되지 못하고 정부의 지침을 충실하게 출연연에 전달하는 옥상옥이라는 지적을 끊임없이 받아왔다. 급기야 이번 출연연 선진화방안이 추진되면 연구회는 해체되게 된다.

 

정부 부처의 통제와 연구회의 간섭이 외부의 권력으로 연구자들에게 작동한다면 기관장은 내부의 살아있는 권력으로 연구자들을 구속한다. 어찌 보면 기관장들은 출연연 내부에서는 영주와 같은 신분이지만, 이명박 정권 출범 초기에 임기와 무관하게 물갈이된 것처럼 권력 앞에 무기력하기 짝이 없다. 기관장의 연봉은 기관장 평가에 의해서 좌우되는데, 기관평가와 기관장평가의 세부 기준이 같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오기도 하니 기관장들의 입장에서 보면 참 미칠 노릇이다. 얼마 전에는 산업기술연구회 이사장이 점수를 조작하여 특정 기관의 평가 등위를 11위에서 4위로 올려주었다는 사실이 감사원 감사에서 드러나기도 했다. 표면적으로는 연구실적의 가중치가 엄연히 크지만 기관장들이 노사관계나 선진화지수를 더 크게 받아들이고 노조 탄압에 자신의 생사가 달린 듯이 행세하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일찍이 송(宋)나라의 정초(鄭樵)는 '통지총서(通志總序)'에서, 사관들이 일식과 같은 순수한 자연현상의 이변을 길흉의 조짐 따위로 해독하여 붙이는 것을 견강부회(牽强附會)라고 비판했다. 이명박 정권이 출범한 이후 연구데이타 조작이나 보고서 조작 등 특히 지식노동자(출연연 연구자들을 통칭함)의 견강부회와 혹세무민이 두드러졌고, 그에 맞서 2009년에 공공연구노조에서는 연구자율성 침해사례를 공개적으로 접수하기도 했다. 이명박 정권이 출연연에 요구하는 것은 온순한 지식시녀집단이 되라는 것이니 공공연구노조는 태생적으로 그것에 맞서서 투쟁할 수밖에 없다.

 

구체적 사례를 보자. 공공연구노조 건기연지부 김이태 동지가 4대강 사업은 곧 대운하사업이라는 양심선언을 했던 것은 2008년 5월이었다. 연구자의 양심에 따른 행동이라 징계할 수 없다고 공언했던 건기연은 그 후 조용주 원장이 오고 나서 김이태 박사를 중징계에 처했다. 그 당시 연간 7억원의 연구과제를 수행하고 있던 김이태 박사는 지금은 소속 부서에서 왕따 신세로 전락했고, 그의 징계를 막고자 했던 노조 지부장과 부지부장은 해고되었다. 출연연의 독립성과 연구자율성이 무참히 파괴된 현장이 지금 건기연이고, 출연연 선진화방안이 노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견강부회의 사슬을 끊고 연구자율성을 쟁취하기 위해 공공연구노조는 더 굳세게 투쟁하기를 기대하고, 지식노동자가 자신의 양심을 저버리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모든 노동자들이 그 투쟁에 함께 연대하기를 바란다.(2010.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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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우렁각시 이야기

오늘 아침에 금강일보에 보낸 글.

내일 날짜로 나갈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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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우렁각시 이야기

 

옛날 옛적에 가난한 나무꾼이 나무를 베러 갔다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우렁이 한 마리를 발견했다. 나무꾼은 그 우렁이를 집으로 갖고 가서 항아리에 넣어 두었다. 그 날부터 나무꾼의 집에는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날마다 누군가 나무꾼의 집에 찾아와 음식을 차려놓고, 청소와 빨래까지 해놓고는 홀연히 사라지는 것이다. 나무꾼이 못내 궁금해서 집을 나가는 척하고는 집안을 살폈더니, 항아리 속 우렁이가 사람으로 변해서 하는 일이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담 가운데 하나인 우렁각시 이야기이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로 치부하면서도 우리는 생활 속에서 곧잘 우렁각시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가령 이런 식이다. 몸이 고달프고 힘들 때, '집에 우렁각시 하나 키웠으면 좋겠다'고 너스레를 떤다. 맞벌이를 하는 동료의 집에 청소와 정리정돈이 잘 되어있는 걸 보고는 '우아, 우렁각시라도 키워?' 하고 농을 건네며 웃는다.

 

요즘 시대에 실제로 우렁각시가 있다면? 남들이 보지 않을 때 우리 주변 청소를 말끔히 하고,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흔적도 없이 생활하고, 일하는 모습이 혹여 사람들에게 발견될까 싶어서 몸을 사리는 사람들, 영락없이 민담 속 우렁각시의 모습이다. 그런데 우리 시대의 우렁각시들의 모습은 영 말이 아니다. 그들은 대부분 비정규직 청소노동자들로 산다. 임금 수준은 426개 직업 중에서 419위, 대부분 5~60대(평균 나이 57.2세), 다섯 중에 넷은 여성(여성 81.6%), 혼자서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는 사람들이 절반(49.7%), 이것이 청소노동자의 모습이다.

 

우리나라 임금노동자 가운데 청소노동자는 43만명으로 상점판매원, 경리, 총무에 이어 네 번째로 많다. 대전지역은 1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일주일에 남성은 62.5시간 일하고 여성은 52.7시간 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이 일을 하거나 쉬거나 밥을 먹는 모습을 좀처럼 볼 수 없다. 자신의 신분을 스스로 감추었던 민담 속 우렁각시와는 달리 우리 시대의 우렁각시들은 자신이 일하는 모습을 드러내지 말도록 강요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들이 출근하기 전에 청소를 모두 끝내야 하니까 새벽 일찍 집을 나서야 한다. 초라한 행색을 남들한테 들키면 안되니까 쉬는 곳도 지하실이나 화장실 구석 자리이다. 최저임금(시급 4,110원)으로 구내식당에서 밥을 사먹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어서 어두컴컴한 지하실이나 화장실 근처에서 차가운 도시락을 먹는다.

 

그들이 일하는 곳은 대학교, 정부청사, 공기업, 연구소 등 겉보기에도 제법 번듯한 곳인데, 근무환경이 이토록 열악한 이유는 무엇일까? 비용절감을 내세워 청소 업무를 용역업체에 위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용역업체는 최저가 낙찰제로 정해지고 거기에서 최대의 이윤을 뽑아내기 위해서 인건비는 최소한으로 지출하는 것이다. 그러니 인권이며 복지가 자리잡을 틈새는 없고 오로지 청소노동자에 대한 착취만이 존재한다.

 

보다 못한 노동시민사회단체들이 청소노동자들에게 따뜻한 밥 한끼의 권리를 보장하자는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다. 청소노동자들이 따뜻한 밥 한끼를 먹을 수 있도록 원청 사용자가 식권과 휴게공간을 제공하라는 것이다. 최근에는 대전에서 민주노총과 여러 시민사회단체들이 모여서 대전지역 캠페인단을 결성했고 때맞추어 지역 언론들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따뜻한 밥 한끼의 권리에만 머물러서는 안된다. 청소노동자들의 임금을 현실화하고 근무환경을 개선해야 한다. 2007년에 국가인권위원회가 청소노동자의 외주화에 따른 문제 확산을 막기 위해 준공영화 방안 등 공공부문 청소노동자 인권개선 권고를 한 적이 있지만 3년이 지나도록 정부는 묵묵부답이다. 우리 시대 우렁각시 이야기는 정부가 법과 제도 개선으로 끝맺어주기를 촉구한다.(2010.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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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박

우리 아파트는 1992년 12월엔가 입주를 시작했고

내가 들어와서 살기 시작한 것은 1993년 3월부터이다.

아파트를 지은지 어언 18년이 지났고

몇 년전에 주민들 사이에 큰 분쟁이 있기도 했지만

낡은 중앙난방을 지역난방으로 교체하기로 했다.

 

3천 세대가 넘는 규모 있는 아파트 단지라서

공사기간만 하더라도 석달쯤 되는 모양인데,

드디어 이번 주가 우리 집 차례이다.

주방과 주방에 연결된 발코니에 구멍을 뚫고

새로운 난방관을 집어넣고 계량기도 설치하는가 본데

문제는 주방과 연결된 발코니를 비우는 일이었다.

 

지난 일요일 밤새

발코니에 설치된 붙박이 책장에 있던 것들과

그 앞을 가리고 있던 케케묵은 박스들을 정리하느라 땀 꽤나 쏟았다.

대학 이후 30년간 내가 살았던 흔적들이

수첩, 노트, 메모지, 소식지 따위에 즐비하다.

 

거기에서 발견된 것들,

내 것이기도 하면서 낯설기도 한 옛날 옛적의 흔적들을

틈틈이 여기에 정리해 보자.

이번 공사가 아니었으면

이것들을 언제 한번 들여다 봤을까 싶다.

 

우선, 아래 수첩들은 81년, 84년, 86년에 내가 썼던 메모장들이다.

여기에 적힌 내용에 대해서는 천천히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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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아래 술병들은 생각지도 못한 것들이었다.

묵직한 박스가 하나 있어서 열어봤더니

95년인가 다른 연구소에 다니던 친구가 프랑스로 2년간 포닥을 나가면서

나한테 맡긴 술인데, 다 마셔 버려도 상관없다면서 그냥 준거나 다름없었다.

(그 친구는 술을 거의 마시지 않으니 아마 시골 부모님이나 친척이 주신 거 아닌가 싶다.)

 

근데 받아서 보관만 하고는

세월이 지나면서 이 술병들의 존재 자체를 깡그리 잊고 살았던 거다.

라벨을 보니 1991년 2월 8일로 되어 있다.

더덕주 2병, 그리고 매실 비스무리하게 생긴 2병.

20년 가까운 세월을 저 혼자 익어간 이 술들은 맛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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