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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호 타고 서울로 유학오다.

  • 등록일
    2004/09/01 03:00
  • 수정일
    2004/09/01 03:00

초등학교를 깡촌인 전남 영암군 시종면 구산리 1리(원구산) 영산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는 고장에서 살았고, 이 곳 면소재지에 위치해 있는 시종국민학교(지금은 초등학교) 졸업하고 서울로 중학교를 유학 왔다.

 

형이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누나가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어서 나는 광주로 학교를 가지 않고 서울로 상경하였다. 외가집이 서울에 있어서 부모님은 광주보다는 서울이 낮다고 판단하고 서울에서 중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촌놈의 서울상경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부모님 왈 니 중학교 여기서 다니면 농사꾼밖에 못될 것 같으니 서울가서 서울 물좀 먹고 공부좀 하라고 신신당부하며 서울에서 형과 누나와 함께 유학생활을 하였다. 우리는 주로 외가에 늘 주말마다 눈도장 찍으로 가야했고, 외숙모는 우리가 잘 살고 있는지 늘 불시에 검문을 하였다. 그래서 형과 누나 나는 늘 외가의 감시속에서 자취생활을 하였다. 도시락은 외숙모가 종종 저녁에 와서 싸주고 가셨다. 반찬은 떨어질만 하면 외숙모가 갖다 놓아서 먹을 거리는 늘 풍성하였다. 쌀은 집에서 올라오지 과일도 집에서 올라오지... 부족함이 없는 유학생활을 하였던 기억이 난다.

 

촌놈의 상경....



주로 서울에 외가에 방학때 종종 올라왔다. 주로 교통수단은 비둘기호였다.

비둘기호를 타고 여행을 가거나 시골에서 올라와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비둘기호는 통일호와 무궁화호와 다르게 역마다 다 썼다. 그래서 비둘기호는 말 그대로 비둘기집과 같이 시골사람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기차였다.

 

언제든가 방송에서 기차안에서 시암닭이있고, 참기름, 시골할머니와 아낙네들의 개나리 봇짐이 있는 풍경의 광고를 본 기억이 난다. 거의 그랬다. 시골 인심은 서울에 있는 자식들에게 줄 농산물이 가득히 싸가지고 비둘기호를 타고 서울로 상경하는 이들의 모습은 아직도 추억저편 잊혀지지 않는다.

 

비둘기호 장장 12시간을 타고서야 용산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서울에 이때만 해도 대중교통이 그리 좋지 않았다. 지금이야 대중교통이 발달하였고, 자가용이 많아서 흔하게 어디든지 갈 수 있었지만 그 당시만 해도 시골에서 서울로 상경하기 위해서는 일단 우체국에다 물건을 우체국에서 송달하고, 몸만 챙겨가지고 서울로 상경하여야 했다. 우체국을 이용하는 것이 화물운송이 운송수단이였다.

 

비둘기호를 타면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도시에 꿈을 갖고 가출한 형들의 모습, 서울 자식집으로 가는 이들.... 시골 농촌삶으로 도저히 희망이 없어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는 어른들... 그들 모습엔 다들 희망의 포부가 있었다. 나도 서울이라는 곳에 올라가서 성공을 꿈꾸는 사람중에 하나였으니까? 그 당시 순박하였던 것 같다. 비둘기호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면 잠을 자도 시간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부모님이 가방 깊숙한 곳에 넣어준 500원 짜리 지폐(이순신장군과 거북선이 표기된 500원 짜리 지폐...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 당시 나에게 정말 큰 돈이였다. 내가 상경 당신 비둘기호 요금이 2500원 정도 하였으니까...) 몇장을 꺼내어 기차에서 사이다를 사먹었다. 집에서 삶아준 달걀과 감자를 먹으면서 사이다를 마시는 기분이라는 것은 기차여행의 백미였다. 사이다가 비싸서 사이다를 아껴먹었다, 그 당시 냉장고가 막 출시되었던 터라 시골에는 냉장고가 있는 집은 거의 지주정도 되는 집안 아니고서는 냉장고 구입을 엄두에도 못냈다. 그래도 시원하지 않는 사이다를 마시는 것은 참으로 행복하였던 기억이 난다. 달걀과 감자에 사이다를 먹으면서 기차 창밖으로 비치는 시골 풍경을 보면서 서울로 상경하는 것은 참 꿈만 같은 행운이라고 난 생각했다. 그 당시만 해도 국민학교(초등학교_를 졸업한 후 중학교까지 마치면 거의 집안 일 또는 공장일로 도외지로 나가는 일이 다반사였기였기에 집안이 풍족하지 않은 우리집에서 형은 대학생 누나는 고등학교 나는 중학생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의 교육열 이외에는 설명할 수 없다. 비둘기호 창밖을 통해 수 많은 별(지금은 공해로 인해 보이지 않지만... 그때는 기차 창밖으로 무수히 많은 별들이 보였다. 한마디로 쌀가마니로 떨어지는 별들이 보였다. 지금은 지리산 산장이나 설악산 대청봉 산장에서나 봄직한 별을 시골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었고, 서울에서도 시골 보다는 못하지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80년대 초반만 해도 서울에도 공동 우물까가 있었고, 외갓집에 놀러오면 물장수가 물을 길러 파는 것도 보았고, 말을 끌고 연탄을 나르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서울과 시골의 경계를 사람의 많고 적음과 공장이 있고 없음이 경계였지,,,, 시골보다 더럽지는 않았다, 공단지역은 가보지 못해 모르겠지만....)들이 보였고 

 

부모님은 우리를 공부시키기 위해 소를 많이 키우셨다. 난 그런 소 키우는 일이 싫었다. 내가 소 여물을 쓸어야하고 여물을 줘여 하기에 참 싫었다. 내가 서울로 뜨고 이건 내 동생몫이 되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없는 살림에 소(오늘따라 우리집 누렁이가 기억난다. 시골에 상경하여 공부중인 형과 누나 학비를 내던 날이면 어김없이 누렁이 새끼 송아지를 장에 나가 파는 날이다. 누렁이는 음메 음메~~~~ 소리를 내가며 자기 자식이 팔려감은 알고 그 큰 눈동자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모습.... 이 모습은 연중행사였다. 누렁이가 낳은 새끼들은 몇마리 남기고는 거의 팔려나갔다. 매년 자식을 낳고 팔고 하기를 반복 누렁이의 생명탄생은 우리의 공부에 죄다 사용되었다. 참 고마운 우리집 소.... 지금은 죽어 없지만 참 고맙다. 부모님은 형들과 누나 나까지 공부시킨 누렁이를 잡아 먹지 못하고 우리집 뒷산에 뭍었다. 소에 대한 예의였을 것이다. 집안 농사일에 불평불만 없이 기꺼이 자신의 노동력을 주었고, 자신이 생명분신인 자식을 우리에게 기꺼이 헌납하였던 누렁이.... 아니지 우리가 강제로 빼앗은 것이 맞겠지.... 그런 누렁이에 대한 예의였을 것이다.)까지 없었으면 어떻게 형, 누나, 나, 동생까지 대학은 커녕 고등학교 보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누렁이와 부모님에게 그래서 감사한 마음이 든다. 남들보다 먹물을 더 먹게 해주어서....

 

서울 생활은 그리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시골에 비해서는 좋았다. 시골 생활보다 안락하게 공부를 할 수 있어서 좋았다. 무엇보다 형이 애지중지해 하는 라디오가 있어서 좋았다. 이 라디오를 들으면서 밤에 공부도 하고 노래도 듣고 참 좋았다. 라디오를 통해서 나는 외국 노래를 접하게 된 계기로 서울로 상경하여 중학생이었던 때였다. 형은 거의 대학생이라서 술먹는 날이 많아서 라디오를 거의 듣지 않았고, 누나는 집에 돈을 보태기 위해 과외를 해서 학교를 파하고 온 집에는 거의 나 혼자 있었다, 간혹 외숙모(외숙모가 오는 날이면 나는 외숙모를 따라서 외식을 하였다. 서울에 뭐 이리도 맛난 것이 많은지... 외숙모는 우리들에게 어머니 존재였던 것으로 기억난다. 어머니는 농사일과 우리 막내 여동생을 낳아서 거의 움직이지 못하였다. 막내여동생과 나와의 나이 차이는 13살차...^^)가 오면 반찬과 도시락 꺼리를 가지고 오시는 날 이외에는 거의 혼자였다.난 라디오가 중학교 1학년때 제일 친한 친구였다. 친구가 생겼어도 라디오와 친구사이는 끝질 못했다. 좋은 노래도 듣고 가슴아픈 사연 많이 들었다. 중학생인 내가 이해하기는 어려운 글들의 사연이 많았는데... 가슴 뭉클함은 이해와는 상관없이 내 가슴을 때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참 라디오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비둘기호를 타지 않고 고속버스를 타면 그 당시는 고속버스에도 안내양 언니가 있었다. 참 예뻣던 것으로 기억난다. 난 주로 광주고속을 타고 내려갔다. 영산포까지는 고속버스를 타고 시종까지는 하루 3번밖에 없는 버스를 타고 읍내에서는 걸어서 집에 갔다. 그래도 집에 내려가면 좋았다, 우리 막내여동생이 있어서도 그렇지만 부모님이 시골에 있을때보다 더 잘 챙겨주셔서 고마웠다. 형과 누나는 자주 내려가지 않았지만 난 부모님 보고 싶다고 형과 누나에게 땡깡을 부려 달에 한번씩은 내려갔던 것으로 기억된다. 부모사랑 제일 많이 받을 나이에 서울에서 공부한답시고 올라왔으니 얼마나 부모님이 보고 싶었으랴... 공부보다 집에 있을 걸.... 내가 올라가기전에 태어난 막내 여동생도 볼 수 있어서 좋았다.(지금은 웬수이지만...) 

 

비둘기호는 나에게 있어서 또다른 추억거리이다. 서울에 처음상경하였을때도 비둘기호를 탔고, 집에 내려갈때도 고속버스보다는 시간이 걸리는 비둘기호를 탔다. 참 좋았던 기억이 난다. 내 또래 어여쁜 여학생들도 볼 수 있었고, 시골의 어르신들의 자식에 대한 내리사랑도 볼 수 있었고, 서울에 성공의 꿈을 갖고 상경하는 이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지금은 고속철도라는 것이 생겨 비둘기호의 12시간 거리는 불과 몇시간으로 단축되었지만, 그 당시 비둘기호에 담겨있던 풍경은 재연해 내지 못하리라.... 비둘기호가 없어지듯 통일호(비둘기호가 담당하던 지역구간 운행을 통일호로 대체되고) 또한 없어진다고 한다. 내가 서울에 올때만 해도 최고급 기차였던 무궁화도는 세월의 흐름에 최고의 자리를 새마을호에 내주고 이제는 고속철에게도 밀려 자신의 자리를 언제까지 보전할 수 있을지 미지수인 기차로 전락하였다. 새마을호도 고속철도도 마찬가지 이겠지... 발전이라는 미명하에서는.....

 

그러나 내 추억에 머물러 있는 비둘기호는 아직도 달리고 있다. 시골내음 진하게 풍기며....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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