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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짧지만 내 활동을 써봅니다.

  • 등록일
    2004/09/14 22:10
  • 수정일
    2004/09/14 22:10

저의 인식을 기반으로 제가 기간 짧은 활동들을 정리해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져왔는데... 뜨문뜨문 드는 생각을 이어나가 짧게 정리해보고자 글을 써봅니다. 허접한 글이니 읽지 않으시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저의 오타의 경지를 아는 분들은.... 읽지 마셔오,,,,

 

오늘따라 웬지 학교 담벼락이 애타게 보고 싶습니다.

졸업식때 학교를 돌면서 내가 돌아다니면 붙였던 대자보가 나부끼는 캠퍼스 이곳저곳이 오늘따라 웬지 보고 싶습니다. 이유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마냥 그 담벼락이 보고 싶습니다.

 

학교때 웬 선전물은 그리도 많은지 붙혀도 붙혀도 끝이 없는 선전물과 청테이프를 들고 대자보를 부치던 그때가 세삼 그립습니다. 그 당시 고민은 배부른 자의 낭만이었습니다. 그 당시 고민을 나눠가질 이들이 있어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대자보를 부치던 때는 참 무모하였지만 자신감이 넘쳐 흘렀습니다. 운동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미래에 대한 막연한 확신과 동경을 그려보았습니다. 그리고 학교를 졸업할때 왜 이리도 학교건물이 측은해 보인건지 아니면 내 마음이 나약해 그 건물에 대한 애착심인지 이유야 모르겠지만 학교를 떠나는 날 새벽 학교를 우두커니 돌아보며 눈가엔 이슬이 과포화상태가 되어 내리더군요. 참 그때 뭐가 그리도 그리웠는지 뭐가 이리도 안타까웠는지.... 학교 건물을 보면서 그냥 흐느껴 보았습니다.



학교를 졸업(남들보다 학교를 오래다녀 졸업 정확히 말해 수료증을 받았음.)과 동시에 인천으로 갔습니다.

 

기대반 설레임반.... 그 기대를 갖고 인천이라는 낮설지만 희망의 땅인 곳에서 아무것도 없이 그냥 막연히 일을 찾아 다녔습니다. 단체를 만들고 해야 할 것은 자명하였지만, 지역에 기반이 없는지라 큰 고전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맞은 98년 IMF....  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인천지역시민연대에서 추진하는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에 결합하며, 상근활동을 진행하였습니다. 저와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이들이 많았지만 이 계기를 통해 많은 이들을 알게 되었고 노조와 지역사업에 일정정도 결합하여 사업을 집행할 수 있는 추진력을 갖추었습니다.

 

참 무모하였지만 행복했던 시기였습니다.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에서 부분적으로 일을 하면서 지역단체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인천에 내려갈 당시 컴퓨터 조립기술을 터득한 지라... 이 곳에서 사회활동가 컴퓨터를 제가 대략 한 50대를 맞춰준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잘 몰랐지만... 진보넷을 이용하여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참으로 노조나 지역시민사회단체들에게 있어 유용하였던 모양입니다. 다르 웹기반보다는 상업통신망을 이용하거나 통신보다는 활동에 있어 주요한 도구로서 팩스가 이용되던 시기이니 그리 세삼스러운 것도 아니지요... 서울만해도 많은 단체들에게 전용선 또는 ISDN, 56Kbps 팩스모뎀을 사용하여 통신을 이용하던 터라 인터넷은 낮설은 것이였을 것입니다. 이에 저는 팩스모뎀을 이용한 인터넷 이용법을 노조나 단체에 가르쳐 줄 기회도 많았습니다. 이를 통해 많은 노조의 상집간부나 노조전임자를 알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활동의 시작점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막연하게나마 배울 수 있었습니다. 무모하였지만 성과가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이는 곧바로 지역사업으로 이어졌습니다. 인천에선 인권운동사랑방에서 하는 인권영화제에 상영한 영화를 토대로 인천인권영화제를 희망터라는 지역교육센터에서 전문으로하여 진행하였는데... 제가 속하였던 인천지역 단체도 이 행사에 주관단체로 참여하여 주도적으로 진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인천 노동문화제 첫 행사또한 함께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아직도 기억납니다. 밥과 자유인가라는 주제로 인천 인하대에서 개최한 그 행사를...

 

저는 그리고 지역단체를 떠났습니다. 무엇이 그리도 급했는지 저는 전망이라는 이름을 내세우고, 운동의 희망을 위해 인천이 아닌 서울로 내려왔습니다.

지금은 없어졌는지 있는지 모르는 나름데로 어떤 음악이라는 곳에 저의 고민을 남겨놓고 인천을 떠나와... 용산구 갈월동 진보넷 옆사무실에 저의 상근활동 보금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참 그 당시 행복하였습니다. 부족한 제가 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 행복하였습니다.

 

인천에서 내려와 몸담앗던 단체 그곳에서 언 4년하고도 1개월이 넘는 세월을 몸담았던 곳.... 아직도 애정이 있고 희망을 갈망하지만 제가 있을 자리가 아닌 것 같아 마음을 졸이며 고민하였습니다. 애정과 희망만으론 운동을 할 수 없다는 개인적 판단을 갖고 애정이 깃든 곳을 먼발치에서나마 잘되기를 빌면서 새로운 일을 찾기 위해 떠날 생각을 하였고, 떠나기로 입장을 정리하엿습니다... 전 인천에서 내려와 들어가게 된 단체에서 평생운동의 포부를 갖고 새롭게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부족한 제가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배려로 이 자리에서 길면 길고 짧으면 짧다는 4년하고도 1개월이라는 시간동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처음 뭣도 모르는 저는 진보넷과 사무실을 같이 쓰던터라 진보넷 주관하고 한국정보보호진흥원인가?에서 후원하는 정보화 지원사업의 일환인 홈페이지 제작, 포토샵 교육을 무료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이때만 해도 저의 상근비가 진보넷에서 부분네트워크 지원으로 상근비를 받았으니까요. 2002년 6월까지.. 나머지 부족분은 또 다른곳에서 받았구요... 상근비 없이 인천에서 활동하던터라 주머니가 두둑했습니다.)그러나 홈페이지 제작에 워낙 이해도가 부족한 저는 교육을 받아도 뭔 소리인지 모르겠더군요... 이에 저는 홈페이지 제작은 포기하고 그냥 단체 사무국 간사의 일에만 전념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2000년 10월 진보넷과 함께 정보통신검열반대 공동행동 활동을 하면서 본격적인 정보통신운동에 발을 담게 되었습니다. 진보넷이 있어 계속해 덕보게되는 출발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곳에서 운동을 함께 지향하는 벗들과 같은 존재를 알게되었습니다.(나의 소심함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나 다들 잘 받아주었고, 참 고맙게 대해주었습니다. 이 은혜 어찌 값을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공동행동이 해소되기 전까지 정말 밤세워 술도 먹어보고, 명동성당에서 일일 릴레이단식도 해보고, 별 지랄 날리부스는 다 쳐보았던 것 같습니다. 이때가 내 사회운동에 몸담게 되면서 맞이한 생애 최고로 행복하였던 시기로 기억될 것입니다. 다들 각 단체일로 바삐 움직여 공동행동이 공대위로 전환되고 난 후 잦은 만남의 기회를 갖을 수 없었지만 그때의 사람들이 아직도 연락을 할 수 있는 이들이 되었습니다.

참 술많이 먹고 어떻게 하면 사고 한번 칠까 고민하는 날의 연속이 었습니다. 지금 하라면 그 당시 활동은 다시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공대위 운동에 비판적이었던 저로서는 참 공동으로 행동하고 실천하는 활동이었기에 참 좋았답니다. 앞으로 이런 기회가 저에게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함께 들더군요.

 

2000년 내가 상근하고 처음 맞이한 노동미디어 행사.... 제가 준비하지는 않았지만... 참 낮설고 어색하였지만... 그 행사가 무사히 잘 취로졌습니다. 진보넷 2주년 행사도 대학로 서울대병원 부근 5000원 부패에서 하였고, 술과 고기를 많이 먹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2001년 대우자동차 해외매각 투쟁은 정말 전국 노동자연대의 흐름과 전지구 노동자연대의 가능성을 가늠케 하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그 당시 인터넷의 급속한 확장은 전국적으로 인터넷 망 이용한 온라인 상의 전국노동자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저희 단체는 대우자동차공투본 홈페이지를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미디어활동단이라는 정보통신, 미디어 초기단계 활동가 네트워크를 구성하여 맞이하였습니다. 이 사건투쟁에 대한 영상과 사진 그리고 소식을 홈페이지에 고스란히 옮겨 이 투쟁의 정당성을 알려나갔습니다. 그리고 Wanted 김우중(김우중 체포조가 프랑스까지 가서 전지구적 연대를 한 사례도 남겼구요)를 통해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영국, 미국 등 주요 노동넷이 이 사안을 전지구적으로 확산시키는 성과를 가져왔습니다. 무엇보다 미디어활동단의 활약상은 가히 폭발적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영상이 전국을 넘어 전지구적으로 확대되면서 경찰폭력의 실상과 탄압받고 있는 노동자들의 생생한 모습을 타전할 수 있었으니까요.... 대우자동차 노동자 1951명 해고라는 건국이례 최대의 정리해고 단행과 대우그룹 해체 대우자동차 해외매각 등 굵직한 사안을 남기고 끝난 싸움... 그들의 투쟁은 기나긴 겨울까지 이어져 갔습니다. 그러나 지금 대우자동차는 GM 대우차로 해외매각되어 상호가 바뀌었고, 대우그룹은 해체되고, 부평 대우자동차 공장은 운명은 GM에 넘겨졌습니다.

 

2001년 무모하지만 대우자동차 해외매각 저지투쟁을 발판으로 노동진영 공동미디어서버를 구축하는 소기의 성과도 달성하였습니다. 진보넷과 참세상방송국(현 미디어참세상)이 Real Streming Server를 참세상방송국과 연계하여 무료버전인 25 user가  동시접속이 가능한 스트리밍서버를 갖추고 있었는데, 저희는 이를 조금 넘는 60 user가 동시접속 가능한 real 스트리밍 서버를 구축하였습니다.(회선은 진보넷에서 전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배려해 주었습니다.)목소리를 전국노동자와 전지구노동자에게 생생히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였습니다. 노동진영 공동미디어 서버 구축 사업은 잊을 수 없는 사업중에 하나게 되었습니다. 현재 노동진영과 사회운동진영에서 전반적으로 노동진영 공동미디어 서버를 이용하여 동영상 서비스로 확대되었져 노동사회운동 물적인프라 구축에 주요한 기반이 되어 지금도 운영되고 있습니다.

 

2001년 또 다시 정보통신운동의 이슈가 검열반대 운동을 넘어서 다분화되는 계기를 맞이하는 해였습니다.(진보넷과 정보통신운동단체 주도의 정보운동포럼의 개최... 정보통신운동의 사회의제 확장의 계기로 작용하는 첫 단추를 끼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도 참여했구요.) 

 

2001년 세계노동절 행사 비정규직 주간행사에서 저는 취재원으로서 디지털카메라와 취재수첩을 들고 이리저리 집회와 거리 그리고 게임방을 활보하면서 활동하던 기억이 생생하게 납니다. 참 집회에서 거리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호흡한다는 것이 마냥 신났던 시기입니다.

 

2001년 제3회 국제노동미디어 행사... 버겁지만 그래도 행복한 순간을 머금을 수 있게 하는 행사였습니다. 제가 상근하고 처음으로 맞이한 국제행사 조직하는 것도 힘들었고, 무엇보다 장소섭외에 애로가 많았는데.... 다행히 중앙대(룸메이트 도움으로... 룸메이트가 중앙대 출신이라.. 중앙대 대학원총학생회에서 힘을 많이 써주셨답니다.)에서 행사가 무사히 마쳤습니다. 제가 아니었으면 좀 더 잘 할 수 있었을 텐데... 국내 조직화에 신경을 쓰지 못하고 국제행사 개최하는데 온 집중을 한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이후 누가 이 행사를 진행할지 모르겠지만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개인적으로 가져봅니다.

 

2002년 공공3사(철도, 가스, 발전) 노조의 공동파업투쟁이 새해벽두부터 준비가 되어 2월 14일 총파업투쟁이 선언되기 전까지 지난한 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철도 노민추의 노조민주화가 결실을 맺고 그리고 더 나아가 철도, 가스, 발전 등 한국노총 사업장에서 발전노조가 민주노총 사업장으로 상급단체를 옮겨 맞이한 첫 파업.... 생각에서는 철도가 오래 투쟁을 진행할 줄 알았지만 예상외로 발전노조의 38일간의 산개투쟁... 한국노동운동사의 희망으로 자리매김되는 사건에 제가 주체로서 참여하였다는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져보았답니다. 민주노총의 교섭의 잘못으로 파업이 끝났지만... 21세기 노동자 투쟁의 새로운 희망으로 자리매김한 사건인 것만은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2002년 6월 진보넷 사무실의 사정으로 인해 저희 단체 사무실을 영등포 당산동으로 이사하였습니다. 새 보금자리는 이전 사무실보다 확장되어 참 안락하고 좋은 공간으로 사무실을 이사하게 되어 좋았답니다.

 

2002년 6월인가 9월경 노동진영 공동미디어 서버의 확산을 위하여 윈도우2000 Media 스트리밍 서버를 구축하였습니다. 이 서버를 통하여 노동운동의 미디어 자원의 소통과 공유를 위한 초벌적 인프라를 구축하였습니다. 리눅스 기반의 리얼은 보는 이의 제약과 남한 전국적으로 보급된 컴퓨터 기반이 MS 윈도우의 끼워팔기 상술에 말려 많은 노동자들이 리얼보다는 윈도우 미디어플레이어로는 환경에 익숙해져 저희도 정보통신운동에 있어 리얼과 GUN 취지는 동의하나 전국 노동자들이 볼 수 있는 환경에 맟춰가며 서서히 리눅스와 GUN의 의미를 알려나가는 것이 올바르지 않은가라는 자체판단을 통해 구축하였습니다. 이 서버를 통해 노조 주요 행사에 대한 인터넷생중계를 본격적으로 추진할 물적 인프라를 구축하였고, 이 서버를 통해 기아, 민주노총, 공공연맹, 철도노조, 금융산별노조 조흥은행지부, 한국노총 대의원 대회 등 인터넷 생중계를 기간 진행하였습니다.

 

2002년 9월 경으로 기억하는데...  WSIS(정보사회세계정상회의)에 대한 준비모임을 진보넷과 함께 진행하였습니다. 무엇인지 잘 모르는 WSIS 관련 내용에 귀를 세우고 들어가면서 배웠고, 영문의 글자로 된 듬성듬성 단어들을 조합해가며 난해한 것들을 이해볼려구 해보았지만 참 난 감하더군요. 영어에 대해 읽기는 좀 되기만 잘 읽히지 않더군요... 영어 잘하는 사람이 부럽다... 

 

2002년 노동자감시근절을위한연대모임 복구.... 작업장 감시모임이 단절을 이어내기 위해 진보넷과 민주노총이 주축이되어 노동자감시근절을위한연대모임을 발족하여 이에 대한 자료수집 및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 사업의 결과물로 소원이었던 2003년 노동자감시실태조사보고서를 한길리서치에 의뢰해 초벌적 통계자료를 확보한 성과를 낳았습니다. 참 가슴벅찼습니다. 그리고 2002년 11월 2일 워크샵에서 또한 노동자 감시의 사회적 경각심을 전국 노동자에게 알리는 성과와 2004년 1월 13일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노동자 감시 매뉴얼을 만든 것 또한 제가 참여할 수 있었던 만으로도 행복하였답니다.

노동자감시근절연대모임은 현재 주요하게 진행될 개인정보보호법제정(개인정보보호위원회인지 프라이버시보호위원회가 될 지 모르는 법제정 및 기구 설치)을 위한 주요한 활동창구로 발전하게 된다 

 

2002년 프라이버시연석회의라는 틀에서 프라이버시보호법(현 개인정보보호법)제정과 프라이버시보호윈원회(현 개인정보보호위원회) 설치를 위한 TF(Task Force)팀을 구성하여 초기적 고민에 대한 논의를 가져가며 운동을 전개하는 발판을 마련하였습니다. 현재 갈 길은 멀지만 첫 스타트인 개인정보보호법 초안이 2004년도 8월경에 나와 향후 입법운동의 전개에 있어 방향성이 나올 예정입니다. 어떻게 될지 기대가 됩니다. 제가 더이상 같이하지 못함이 아쉬움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큰 비중도 역활도 없었던 부담없이 나왔답니다. 내가 정보통신운동을 하면서 운동을 가르쳐 주었던 사람들인지라... 그분들은 다 잘해낼거라는 믿음과 확신이 있습니다. 다 쟁쟁하고 기라성 같은 분들이기에 마음쓰지 않고 나올 수 있었답니다.  

 

2003년 금속노조 두산중공업지회에서 가슴 미어터지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배달호 열사 분신.... 현장에 와도 재미가 없다로 이어지는 그의 유서에는... 자본의 악랄함이 스며져 있었습니다. 한 노동자의 분신은 우리에게 노동자는 투쟁만이 살길임을 각인시켜 주었지만, 우리는 배달호 열사의 분신에 대한 화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사회적으로 부부문운동과 시민운동이 확장되어 외연적으로 사회적 민주화와 진보를 이루어냈지만, 노동자들의 삶은 80년대로 회귀하고 있습니다.(대기업노조가 임금을 많이 받는다고 하지만... 그들은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지불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현재 한국노총 이용득위원장은 비정규직의 처우개선의 방편으로 대기업노조가 임금을 많이 받고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금융노조이외에 어디 한번 제조업 노동자들의 임금 명세표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과연 얼마나 많은 임금을 받고 있는가? 중소영세사업장의 임금수준을 높이고 동일임금동일노동을 위해 투쟁하여야할 노총의 우두머리가 하는 말이 노조가 임금을 많이 받고 있으니 임금인상을 자제해야 한다는 발언은 저로서는 용납이 되지 않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노동자가 정당한 자신의 노동의 대가를 지불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금융산업은 어떠할 지 모르나 제조업은 월급제가 아닌 일급 한달급여제(저의 표현)입니다. 그들은 주야 맞교대에서 잔업 특근 야간수당으로 임금을 받고 있습니다. 비정규직 중소영세사업장에 비해 일급이 조금 높고, 상여금과 복지후생 그리고 성과급에서 더 많이 받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비정규직은 차별이 아닌 철폐가 되어야 하며, 중소영세사업장은 하청, 도급, 파견제를 철폐하고 그들이 정당한 대가를 산정하여 실질임금을 인상시켜야 할 또다른 투쟁이라 생각이 됩니다.제가 알고 있는 기아자동차 조합원은 15년 이상 근속자인데 하루 일급이 4,5000원이라고 합니다. 잔업, 특근, 야간근로수당을 합해야 겨우 4,000만원 조금 넘는 임금을 보전받고 있습니다. 과연 그들이 임금을 많이 받고 있는 것인지 저는 반문하고 싶습니다.)

배달호 열사... 투쟁에 우린 무기력함을 나타냈습니다. 아무런 투쟁의 불씨도 지피지 못하고 금속노조만의 투쟁으로 두산중공업지회의 문제로... 우린 해결하지 않았나 씁씁함이 들더군요. 열사여 고이잠드소서.... 부디 투쟁하지 못한 우리를 용서하고 영면하소서....  

 

2003년 한해를 넘기고 노동미디어 국내행사를 진행하였습니다. 이전 노동미디어 행사가 정보통신 미디어 활동가의 결합이 어려웠던 점을 감안하여 2박3일 기간을 설정하여 노동미디어 노동정보캠프로 행사를 진행하였습니다. 캠프로 진행한 행사에 많은 활동가들이 참여하여 주요한 논의를 이끌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초기인지라 이전에 비해 그래도 초기 캠프는 성과가 있었다고 봅니다. 노동정보화에 목말라 하는 활동가들에게 구체적인 방향성은 제시해 주지는 못하였지만, 1년의 평가와 2003년도 정보통신 미디어활동가들이 방향성 논의에 있어 유의미한 역활을 수행하지 않았난 자임해 봅니다.

 

2003년 WSIS 대응을 위한 회의를 성공회대에서 진행하였습니다.

여기서 난 중요한 사실 하나를 알 수 있었다. 미국 장애인들이 MS를 상대로 투쟁을 통해 인터넷 환경에 있어 접근적 설계 방편으로 제어판 "내게 필요한 옵션"이 만들어졌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의제에 대해 인식할 수 있었던 주요한 행사였습니다. 이 행사가 전국정보운동포럼 행사 대체로 진행되었다는 것은 2004년 전국정보운동포럼에 참가하고 나서 알았습니다.

 

2003년 부산 한진중공업노조에서 김주익위원장이 타워크레인에서 목매달아 자살한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위원장의 월급명세서를 보면서 손배가압류의 가혹성을 느꼈습니다. 태품 매미때에도 28호 크레인에서 태풍의 모진 바람을 이겨내며 투쟁을 굽히지 않았건만... 그러나 자본가의 악랄한 탄압과 노조탄압을 온몸으로 지키기 위해 그는 자신의 한몸을 노동해방 불꽃으로 피워내었다. 배달호 열사가 분신한지 꼭 10개월만의 입니다.(사회가 변화였다지만 노동자에게 과연 무엇이 변하였단 말인가? 노동자들이 생활수준이 나아졌다지만 그 월급명세서를 보면 과연 노동자들의 생활이 낳아졌단 말인가? 노동조합활동이 과격하다고 하는데 과연 노동조합이 과격한가? 왜 자본가들의 비열하고 악랄함은 언론엔 보도되지 않는가? 다들 한통 속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요구에 부당노동행위로 일삼는 그들이 아직도 판을 치고 한국노총 민주노총 합해야 20만도 못미치는 노조가입률... 이게 이땅의 노동의 현실이다. 1500만 노동자라고 하지만 조직된 노동자가 20만도 되지 않는 이 현실에 과연 노동해방의 갈길은 멀구도 험하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절규.... 그리고 투쟁.... 시청앞에서 벌어진 전국노동자대회... 그러나 우린 또다시 투쟁을 조직하지 못하고 김주익열사를 솔밭산에 뭍어야 했습니다. 열사력에 한사람한사람의 노동자, 농민, 빈민 들의 이름이 명부처럼 올라갈때마다 우린 우두커니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과거 국민대회니 하면서 온 사회를 요동쳤던 혁명의 기운은 어디로 사라졌단 말입니까... 땅을 치고 통곡해도 시원찮을 판에 우린 우리들의 그 쇳덩이 같은 기운을 어디로 팔아먹었단 말입니까?..... 이 투쟁 지켜보면서 이후 머리가 온통 백지통 같았던 기억이 납니다....

 

2003년 한진중공업 김주익 열사에 이어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노조 아름다운 청년의 분신을 동영상으로 보고 마음이 찌저질듯한 절규를 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비정규직/정규직으로 갈라치기 하며 간혹 노동조합 내에서 노-노 갈등이라는 중앙일간지들의 보도를 보면서 자본과 정권에 대한 적개심이 들때가 많았습니다. 비정규직을 누가 양산하였는데.... 민주노총이 98년 정리해고 조인한 것이 비정규직의 양산이라고 어처구니 없다. 정리해고는 불가피한 상황에서 회사를 회생하기 위한 수단이라구.... 자본과 정권은 로비로 몇조에 달하는 공적자금(국민의 혈세를...)을 자신의 돈인냥 펑펑 써대면서... 회사를 회생하기 위해서 노동자들의 정리해고를 통한 구조조정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거짓말을 당당하게 언론을 통해 보도한다. 누가 믿겠는가 자본과 정권의 거짓말을.... 정작 정리해고 대상인 기업주와 임원들은 그대로 두고 왜 노동자가 정리해고의 우선대상인가... 기업을 잘못 운영한 그들이 정작 정리해고의 대상이지.... 양산되는 비정규직 문제를 사회에 화두로 던진 아름다운 청년의 산화는 의미하는 바가 크지만 우리 노동형제들이 노동해방의 횃불을 들고 투쟁하기에 우리들의 힘이 미약함을 느꼈습니다. 투쟁이 진행되면 아무리 노조가 의지가 높다손 치더라도 이제 민주노조는 엄호지지 보다는 교섭과 타협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투쟁은 이제 과거의 추억으로 묻어야 하는지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교섭은 최후의 보루이지만 이제 투쟁에서 교섭은 최선의 선택이 되고 있음에 분노가 치밀던 기억이 납니다. 남들은 대책없이 투쟁만을 말한다지만... 노동자 투쟁이 어찌 생존권이란 경제투쟁만이겠습니다. 노동자 투쟁은 엄밀히 말해 정치투쟁이지 않습니까... 우리 노동형제들은 정치투쟁의 긴박성을 놓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보았답니다.

세상의 변혁의 주체는 여전 노동자입니다. 유럽과 다르게 제3세계 노동자들의 현실... 한국의 노동자들의 현실이 말입니다. 코민테른에서 일국적운동의 중요성이 부각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사회 정치 문화적 다양성과 국가의 형태가 다른 노동자들이 어찌 동일한 깃발을 들 수 있겠습니까?... 전지구적 투쟁에 있어서 구심을 갖추어야 되지만.... 다국적 기업이 국가마다 다른 노동법을 갖고 노동자들에게 직격탄을 날리는데 동일임금동일노동의 조건을 내걸겠습니까?(일국적 차원에서도 어려운 문제이건만...) 노동자 정치투쟁에선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구호가 맞지만 자본과 정권의 처해있는 억압과 착취와 고리가 동일하지 않는 조건에서 노동자 투쟁의 전술과 전략은 각 나라마다 다르게 적용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에 각 국가별 정치노선과 조직노선의 차이가 여기서 나타나기에.... 노동자들의 투쟁은 일국적 투쟁을 통하여 전지구적 연대로 발돋음 할 수 밖에 없는 필연적 투쟁의 과정을 갖고 있지 않나 개인적 판단을 해봅니다.

2003년 서롭고 슬프고 분노했던 한해는 나는 이렇게 흘려 보냈습니다.

 

2004년은 별로 한 것 없이 보냈습니다.

일상사업과 6월 보건의료산별 파업, 7월 궤도연대 파업 등을 하면서 저는 이제 저의 역활이 다했음을 직시하였습니다. 초기 공장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으나... 어떻게 할지는 9월달 생각을 해보고 결정하기로 하였습니다.

 

활동이라는 시간 속에서 제가 별로 한것 없이 보냈지만 그래도 희망과 아픔을 딛고 설 수 있었던 것은 주변에 많은 좋은 이들을 알고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봅니다. 이에 더이상 좋은 이들에게 얹혀 살면 안되겠다는 생각 이제 홀로서기를 시작하기로 마음먹고 가벼운 마음으로 저의 일을 무엇이 되었던 시작할까 합니다.

 

막상 쉬고 나니 만나보고 싶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저의 지금 모습으론 만나는 것이 결코 올바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에 연락은 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괴변만 늘어놓을 것 같아서.... 그런데도 저에게 먼저 연락을 해주시고 자신의 인생의 여로를 저에게 들려주면 삶의 방향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신 장목사님에게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혼자 있는 저에게 손을 내밀며 힘내라는 위로의 말보다 값진 이야기를 해주시고 격려해주시고 무엇을 할 지 곰곰히 생각해보라는 충고에 힘입어 다시금 무언가를 시작해 보고자 합니다.

 

이 공간을 통해 저에게 격려해주신 여러분께도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이 빚 열심히 사는 것으로 보답할 생각입니다.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알고 있는 분과 짧지만 긴 인연은 언젠가는 이어지겠지요.... 언젠가는 볼 수 있을거라 믿습니다. 같은 길을 간다면....

제가 정리가 되는데로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떠나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그동안 부족한 저에게 신심어린 동지애로 감싸주신 분들께 감사하다는 짧은 말 남겨봅니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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