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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6/26
    마지막 수업
    간장 오타맨...
  2. 2005/06/24
    날씨가 무덥다.
    간장 오타맨...
  3. 2005/06/24
    [신영복/더불어 숲] 복지국가 스웨덴
    간장 오타맨...
  4. 2005/06/23
    네팔의 카트만두에서(2)
    간장 오타맨...
  5. 2005/06/23
    서울경기인천이주노동자노동조합(이하 MTU) 출범은 이주운동의 새로운 도약이다.
    간장 오타맨...

마지막 수업

  • 등록일
    2005/06/26 13:42
  • 수정일
    2005/06/26 13:42
영상미디어센터에서 진행하였던 이주노동자 영상교육이 오늘 마지막 수업을 한단다. 짧으면 짧고, 길면 긴 시간이라 할 수 있는 2달간의 교육이 마무리 된다. 이 교육에 나는 자주 들어가지 않고, 몇번 지켜보기만 하였다. 그 지켜봄 속에서 때론 이주노동자 이야기를 듣거나 때론 그 이야기속에 그리움을 듣다 가슴이 아리고, 쓰리고, 아팠던 기억도 있고, 그 이야기 속에서 센터에 오는 이주노동자 스스로의 삶, 가족, 역사, 그리고 희망을 엿보기도 하였다. 그 강의가 오늘 마지막이다. 나야 모 그리 말할 것이 없지만, 이주노동자들 얼마나 아쉬움이 남을까? 사람이 만나는 자리 그게 바로 인연이고 관계인데.... 그 지난한 과정에서 서로가 서로를 알아나가면서 친구가 되었을 터인데 더 이상 프로그램이라는 이름으로 매주 봐았던 것이 이제는 시간을 내거나 아니면 내년 이와 같은 프로젝트가 진행되어야만 또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아쉬움이 남는다. 오시는 강사분들에게도 잘 대해주지 못한 것도 미안하다. 저번주 이주노동자 동지들이 이주노동자 영상교육 쫑파티를 해야하는데... 하면서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오늘은 어렵고 나중에 시간을 잡으라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중... 그러나 시간이 될런지.... 이어지는 한글교실... 그리고 프로젝트로 진행되는 노동교육 등등 만만치 않은 일이다. 다음에 꼭 시간을 내서 이주노동자 동지들과 강사분들이 서로 교육하면서 이야기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는 자리가 마련이 되었으면 좋겠다 생각만 가져본다. 그렇게 될거라 생각하지만 센터 일도 정신이 도통 없는 터여서.... 시간이 될런지.... 잘 모르겠지만 그 못다한 이야기들이 교차되고 서로가 친구로서 동지로서 관계가 맺어졌으면 좋겠다. 하여간 오늘 마지막 강의이다. 아쉬움이 남는다. 다음에도 이런 좋은 기회가 주어져 많은 다나라 이주노동자 동지들이 그 교육속에서 자신의 삶, 가족, 역사 그리고 희망과 슬픔을 이야기하며 고단한 한국에서의 상황을 이겨내는 계기가 부여되었으면 좋겠다. 강사님들 수고많으셨습니다. 이주노동자 동지들도 고생많았구요.... 아쉬움만 남는다.... 그냥 끌적여 본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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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무덥다.

  • 등록일
    2005/06/24 13:56
  • 수정일
    2005/06/24 13:56
날씨가 무더운 날이다. 그래도 다솜공동체 건물이 시원하여 그럭저럭 바람을 맞으며 일을 하고 있다. 오늘 바람을 맞을 겸 어린이 집 아이들을 데리고 오산천 변으로 나갔다. 길가에는 햇볕이 내리 쬐여서 날씨가 덥더니만... 오산천 변으로 내려가니 내천에 흐르는 바람이 물과 함께 시원하게 바람을 선사하였다. 어린이 집 아이들에게 백로를 가르키니 아이들이 ㅤㄲㅝㄱㅤㄲㅝㄱ이라 말한다. 그래 ㅤㄲㅝㄱㅤㄲㅝㄱ이 하얀 깃털의 자태를 폼내며, 이 더운 날씨에도 유유히 물고기를 사냥하고 있는 그 백로가 마냥 부럽게 다가온다. 그 백로가 날개짓을 하며 이리저리 싸돌아 다니는 것을 몇분 구경을 하다가 횡하니 돌로 개울을 건널수 있게 만든 돌다리로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지금 오산천 변은 동탄 신도시에서 흘려내려올 폐수를 정제할 페수처리장을 만들기 위해 공원을 없애고 공사를 진행중이다. 그래서 공원엔 가질 못하고 아이들과 오산천을 거닐다. 오산천변에 살고 있는 백로들을 구경하였다. 아이들 마냥 신나한다. 날씨가 더운데도 아랑곳 없이 오산천변 흐르는 물을 보면서 마냥 신기하지 그냥 물 속을 내다본다. 물빛은 그리 맑지는 않지만 백로가 오고 낙시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만으로도 오산천이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종종 오산천변에 가서 새들 사진을 찍어보고, 아이들과 놀아도 본다. 가까이 산은 없지만 물이 흐르고 자연생태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이전 한강변이 인접해 있어 자전거를 타고 한강변에 나가서 자연생태 늪지와 버드나무 군락지를 볼 수 있는 행복감을 여기 오산에서는 오산천변을 보고 느낀다. 다만, 한강변을 자전거로 달리면 원효대교의 아름다운 형광불빛 같은 운치는 확인 할 수 없고, 사람들이 분주히 달리거나 인라인을 타거나 자전거를 타는 풍경을 구경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살아있는 생명과 시원한 바람으로 위안을 삼아 본다. 오늘도 저녁 시간이 되면 오산천변을 혼가 거닐며... 그냥 시원한 바람을 맞고 싶다. 오늘 신문기사를 보니 오산대학 재단 사학비리가 한겨레 기사에 나와있다. 또 이 문제를 오산민주단체 연석회의에서 분주히 다뤄지겠군.... 수청동 가대위 활동과 오산시 공무원노조의 오산시장 사태와 오산시 민주화 문제 그리고 오산대학 사학비리문제 등 산재한 문제들이 다시금 오산시를 들끓기를 바램해 본다. 그러나 오산천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유유히 흐른다. 오늘 오산천변 나가 그 오산천변에 위치한 오산대학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세상이 돌아가는 것엔 온통 신경을 쓰지 못하는지 마냥 신나 뛰어논다. 아이들에게 오산천에게 장난삼아 말 안듣고, ㅤㄸㅒㅤ쓰면 오산천변에 빠트린다고 어름장을 놓았는데.... 이에 아랑곳 없이 뛰어노는 아이들이 마냥 순박하게 다가온다. 고즈넉한 오후를 보냈다. 세상이 고즈넉한 오후 처럼 평온한 날이었으면 좋겠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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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더불어 숲] 복지국가 스웨덴

  • 등록일
    2005/06/24 10:40
  • 수정일
    2005/06/24 10:40
집이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눌리게 됩니다. "만약 완전한 자본주의 국가가 있다면 그 국가의 세금은 0%입니다. 그리고 완벽한 공산주의 국가가 있다면 그 국가의 세금은 1백%입니다. 스웨덴의 세금은 75%수준입니다. 그런 점에서 '마지막 남은 사회주의'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스웨덴은 결코 사회주의 국가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스웨덴 사람들이 자기나라를 소개하는 방식의 하나입니다. 세금이 너무 많다는 불평같기도 하고 그들이 누리는 사회복지의 수준에 대한 자랑같기도 합니다. 한 국가의 성 격을 담세율(擔稅率)로 설명할 수 없음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한 나라가 누리고 있는 복지수준이 공공지출의 비율로서 설명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복지국가라는 개념은 그 자체가 참으로 복잡한 우여곡절을 겪어 왔으며 그만큼 복잡한 내용 을 가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복지국가는 20세기가 지향해가야 할 가장 궁극적인 목 표로 제시되기도 하였으며, 또 한편으로 사회주의로 이행해 가는 대안적(代案的) 개념으로 해석되기도 하였습니다. 반대로 자본주의의 모순을 유화(宥和)함으로써 자본주의 그 자체를 유지하는 보정적(補整的) 개념으로 해석되기도 하였습니다. 복지는 그만큼 다양한 시각을 허 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나는 스웨덴에 있는 동안 이러한 시각에 관한 그들의 견해가 궁금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웨 덴에서는 그러한 시각이 없었습니다. 복지국가개념을 그러한 시각으로 접근한다는 것이 어 쩌면 냉전 이데올로기의 도식이었는지도 모른다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답변은 우회적인 것이면서도 이러한 틀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테면 목표에 관 한 논의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목표와 방법에 관한 논의가 없다는 것이 그 사회 에 대 한 사회구성원들의 신뢰를 확인하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무성한 개념규정과 복잡한 논의 는 실상 불신(不信)이 낳는 거대한 정신의 소모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스웨덴에서 가장 부러운 것과 가장 부럽지 않은 것을 엽서로 띄워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가장'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스웨덴에서 몹시 부러운 것이 바로 이러한 사람들의 신뢰(信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침 스웨덴 조간신문에는 스웨덴 남자와 결혼한 미국인 부인이 미국에 전 남편과 살고 있 는 자녀를 보러가는데 필요한 여비를 스톡홀름시에서 지급하라는 판결문을 싣고 있었습니 다. 이것은 스웨덴의 복지수준을 짐작할 수 있는 작은 예에 불과한 것입니다. 정부의 공공지 출은 국내총생산(GDP)의 67%에 이르는 규모로서 OECD 24개 회원국중에서 가장 높습니다. 그러나 부러운 것은 이러한 복지의 량보다 국가와 사회에 대한 신뢰입니다. 실업, 노후, 의 료, 주택 그리고 자녀들의 교육에 대한 걱정이 생활의 대부분인 우리들로서는 무척 낯선 것 입니다. 빈(貧)과 부(富), 귀(貴)와 천(賤)의 의미가 극히 왜소한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 니다. 스웨덴에서 가장 경멸되는 것이 축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최근에는 실업률의 증대, 정부지출의 급증 그리고 세수(稅收)의 감소 등 스웨덴이 당면한 경 제적 위기감이 거론되고 따라서 당연히 더 많은 세금을 부담해야할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스웨덴사람들의 믿음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낸 세금은 언젠가는 다시 그들을 위하여 쓰여진다는 생각을 그들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스웨덴의 이러한 사회복지는 스웨덴이 축적한 경제적 잉여를 토대로 하고 있는 것은 물론입 니다. 스웨덴은 1, 2차대전의 피해를 입지 않은 유일한 유럽국가였습니다. 전쟁특수(特需)와 전후복구과정에서 누릴 수 있었던 경제성장이 일찌감치 스웨덴의 물적 토대를 만들어 내었 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바로 그 시기에 수많은 인명과 재산을 빼앗기고 다시 모든 것을 전화에 불태우고 말았던 우리들과는 참으로 대조적이었습니다. 물론 경제적 잉여는 복지사회의 가장 기본적 물적 토대임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물질적 여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빈부의 격차만 더 크게 벌여놓음으로써 빈익빈 부익 부의 첨예한 사회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스웨덴에도 물론 재벌이 있지만 스웨덴 제1의 재벌의 총재산이 우리돈으로 8백억원이라고 하였습니다. 8백억원이 물론 적은 액수가 아니 라 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와 비교가 안될 정도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경제성장과 경제 적 잉여의 축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이러한 물적 부의 사회적 관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웨덴은 이 물적 부의 사회적 관리에서, 특히 사회적 합의에서 성공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합의과정은 노동연합(LO)을 중심으로 한 노동부문의 강력한 정치력에 뒷받침되어 있고 이 러한 정치력이 1930년대부터 근 반세기에 걸친 사회민주당 정권의 기반이 되어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 사회민주당의 복지정책이 오늘날의 복지국가 스웨덴의 골격을 만들 어내었음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입니다. 일류정치가 일류경제, 일류사회의 기본임을 실감하게 됩니다. 스웨덴에서 당신이 궁금해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합의를 바탕으로 한 사회적 신뢰 (信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궁금해하는 '부럽지 않은 것'도 물론 있었습니다. 그것은 피곤함입니다. 스웨 덴의 수도 스톡홀름은 깨끗하고 반듯한 도시입니다. 도로, 건물, 자동차는 물론이고, 보도불 럭이나 크고 작은 간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고급품이면서 잘 관리되고 있음을 한눈에 느낄 수 있는 도시입니다. 잘 사는 나라의 모습입니다. 넓고 푸른 공원에는 햇볕을 받고 있는 사 람들이 무척 한가롭습니다. 그들의 여유와 느긋함이 부럽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한가로운 풍 경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것은 60대의 노년(老年)입니다. 스웨덴에는 물론 노인이 많기도 하지만 곳곳에 고여 있는 피곤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많은 사 람들이 알콜과 마약중독자가 되기도 하고 취업보다는 차라리 실업연금 수혜자로 안주하기도 합니다. 작년 한 해동안 3만 3천쌍이 결혼하고 2만 1천쌍이 이혼하고 있기도 합니다. 스웨덴 에서 부럽지 않은 것이 바로 이러한 노년같은 피곤함이었습니다. 그것이 어디에서 온 것인 지는 단언할 수 없지만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 넓게 고여 있는 무관심과 피곤함 때문에 나는 이 도시가 갖고 있는 부러운 하드웨어에도 불구하고 결코 정다운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부럽지 않다는 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부(富)의 관리보다 더욱 중 요한 것이 사람의 관리이고 인간관계의 관리입니다. '집이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집에 눌리 게 된다'는 옛말이 생각났습니다. 그 사람을 늘푸른 청년으로 세우는 문화가 이곳에서는 퍽 아쉽습니다. '베리야 노인센터'에서 받은 인상 역시 매우 착찹한 것이었습니다. 훌륭한 시설 과 간호를 받고 있는 노인들의 모습에서 가득히 풍겨오는 공허감은 비단 노인이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의 관계로부터 아득히 먼 곳으로 물러나 있는 그들의 외로움은 마치 '앞당겨진 죽음'같이 느껴지기도 하였습니다. 한국의 어린 남매가 입양해 있는 가정을 찾아가면서 느꼈던 심정도 내게는 아픔이었습니다. 자식을 키울 수 없어 먼 이역땅으로 떠나보낸 부모의 심정을 헤아리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 이었습니다. 나의 우려와는 달리 그들이 입양된 집은 매우 훌륭한 가정이었습니다. 양아버지 는 의사이며 양어머니는 연극연출자로서 그들 내외는 예쁜 친딸을 하나 두고 있었습니다. 나의 상식으로 볼 때 입양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가정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의 자식이 아니더라도 사람을 키우는 일의 아름다움을 귀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생각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훌륭한 부모와 언니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리고 다행스러운 것 은 한국에서 온 어린 남매가 아름답게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아마 한국에서보다 더 아름답게 자라고 있으며 또 앞으로도 그렇게 자라날 것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한 몇시간동안이 나로서는 매우 어색하고 착잡한 것이었습니다. 나의 착잡함은 우리사회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가혹한가를 잘 알면서도 머지 않아 이곳에 만연하고 있는 피곤함속에 던져질 그들의 삶 역시 흔쾌히 수긍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우리사회가 해내지 못하고 있는 일을 이역만리의 낯선 사람들이 하고 있다는 부끄러 움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햇빛 가득한 정원에서 다정한 커피를 나누면서도 나는 내 내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부(富)를 만들어야 하는 세월을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을 키우기에 앞 서 물건을 만들어내야 하는 우리의 현실이 각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인 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들 남매가 우리나라에서보다는 잘 자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잘 자라리라고 믿습니다. 그 러나 '잘 자란다'는 것의 의미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다가왔던 것 또한 사실이었습니 다. 우리는 아직도 '잘 자란다'는 의미에 마음을 쏟을 여력이 없는 지도 모릅니다. 경쟁과 효율 성등 사람을 헤치고 사람과의 관계를 갈라놓는 일의 엄청난 잘못을 미처 돌이켜볼 여유가 없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들의 관계는 일찍부터 생각하지 않으면 언제나 후회 하게 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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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의 카트만두에서

  • 등록일
    2005/06/23 10:33
  • 수정일
    2005/06/23 10:33

문화는 공산품이 아니라 대지에 심고 손으로 가꾸는 농작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에게서 결실되는 것입니다.

 
네팔왕국의 수도 카트만두는 옛날에 산으로 둘러싸인 해발 1천4백여미터의 산상호수였습니다. 만쥬슈리(文珠寶薩)가 큰 칼로 산허리를 잘라 물을 흘려보내고 사람들이 살 수 있는 땅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신(神)이 카트만두를 사람들의 마을로 만들어주었다고 구전되어오듯이 막상 카트만두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바로 신입니다. 사원이나 탑에 신상이 있는 것은 물론이고 골목에도 있고 시장거리에도 있고 지붕에도 있고 처마 밑에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연못 속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신상들의 모습은 가난한 네팔 사람들의 차림새와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공포의 시바신이 그의 처 팔비티와 함께 듀버광장 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은 마치 창문열고 구경하는 여염집 부부같습니다. 네팔의 신은 근엄하거 나 숭고하지 않습니다. 쿠마리라는 살아 있는 여신이 있지만 이 여신은 어린 소녀입니다. 그리고 여신의 역할이 끝난 뒤에는 보통사람들 속으로 돌아와서 대체로 보통사람들보다 못한 삶을 살게 됩니다. 당신이 카트만두에 오면 가장 먼저 수많은 신을 만나게 됩니다. 신은 신이되 사람들과 가 까운 자리에 내려와 있는 신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만나는 것은 사람들의 손길입니다. 오랜 세월과 풍상에 젖어 갈색빛을 띠고 있는 목조의 사원이나 궁궐건물에 배어 있는 사람들의 손길을 보게 됩니다. 아무리 허술한 건물에도 창틀과 기둥에는 어김없이 정교하게 조각된 갖가지 문양들이 사람들의 정성스런 손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점의 좌판위에서 햇볕에 따뜻이 익은 자잘한 기념품들에서도 구석 구석 사람들의 손길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아마 신상이나 손길보다 먼저 사람들을 만날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의 순박한 얼굴을 만나게 됩니다. 수줍고 어색해하는 사람들의 눈길과 마주치게 됩니다. 이 순박한 눈길은 험악하게 변해버린 우리들의 얼굴을 반성하게 합니다. 이처럼 카트만두에서 만나는 것은 신상과 사람, 물건과 사람들의 손길이 혼연히 무르녹아 있는 다 정한 분위기입니다. 그리고 이 다정함이 사람들의 표정과 마음으로 완성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 니다. 그래서 카트만두의 타멜거리에서는 유년시절(幼年時節)을 만난다고 합니다. 비단 타멜거리뿐만 아 닙니다. 카트만두의 곳곳에서 우리들의 지나간 유년시절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산광장에서 어느 골목을 접어들더라도 그 좁은 골목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뒷모습에서 우리는 유년시절을 만 나게 됩니다. 그것은 가난했던 어린시절의 추억이기도 하고 산업화되기 이전의 우리의 삶의 모습 이기도 합니다. 시간을 숫자로 계산하며 직선과 격식에 갇혀 있던 심신이 그 틀에서 해방되어 맨 발과 땅의 접촉에서 건져올리는 편안함. 그것이 바로 우리의 과거이고 우리의 유년시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곳 카트만두의 분지(盆地)에 고여 있는 유적과 사람들은 이처럼 커다란 거울이 되어 잃어버린 우리의 유년시절을 보여줍니다. 카트만두가 호수였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리게 됩니다. 비단 유년시절뿐만이 아닙니다. 카트만두에는 도처에 삶의 원형을 보여주는 거울이 있습니다. 파 슈파티나트의 화장터 풍경이 그렇습니다. 장작더미 위에서 타고 있는 시체나 그 시체를 뒤적여 고루 태우는 사람이나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가족이나 그리고 임종을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나 어느 한 사람 슬퍼하는 이가 없습니다. 바로 그 밑을 흐르는 강가에서는 빨래하고 물긷 고 식기를 닦고 머리를 감는 일상이 태연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관광객들만이 이 태연한 광경으 로부터 충격을 받고 있을뿐입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무너뜨리면서 삶의 찰나성과 삶의 영원성 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닥신카리사원에서 보는 암흑의 여신 칼리에게 바치는 번제(燔祭)도 그렇습니다. 짐승을 산채로 목 을 베고 솟아나는 피를 신상(神像)에 바르고 자기의 얼굴에도 바릅니다. 짐승의 체온과 비명소리 가 채 가시지 않은 피와 그 피로서 행하는 제의(祭儀)는 보는 사람을 당황하게 합니다. 은은한 파 이프 올겐의 성가속에서 보았던 성체미사의 포도주와는 극명한 대조를 보입니다. 그 적라라한 원 시성이 우리의 생각을 압도합니다.

 

나는 카트만두에서 만나는 이 모든 것이 한마디로 '문화의 원형'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오늘날의 문화가 치장하고 있는 복잡한 장식을 하나 하나 제거해갔을 때 최후로 남는 가장 원초적인 문화 의 모습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삶과 그 삶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으로 구성되어 있는 '문화의 자연'(Nature of Culture)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산업(Cultural Industry)란 말이 있지만 문화란 그 본질에 있어서 공산품(工産品)이 아니라 농 작물(農作物)입니다. 우리가 이룩해내는 모든 문화의 본질은 대지(大地)에 심고 손으로 가꾸어 가 는 것.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사람에게서 결실(結實)되는 것입니다. 문화가 농작물이란 사실이 네 팔에서처럼 분명하게 확인되는 곳도 드물다고 생각됩니다. 오늘도 잘 사는 나라에서 이곳을 찾아 온 수많은 관광객들이 카트만두의 골목을 거닐며 네팔의 나즈막한 삶을 싼 값으로 구경하며 부담없이 지나갑니다. 그러나 걱정되는 것은 혹시나 그들이 네팔에서 문화의 원형을 만나고, 그 문화의 원형에 비추어 그들의 문화를 반성하는 대신에 네팔의 나즈막한 삶을 업수이 여기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입니다. 우리가 문화의 원형을 만난다는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대이후의 산업화의 과 정은 한마디로 탈신화(脫神話)와 물신화(物神化)의 과정이었습니다. 인간의 내부에 있는 '자연'(自然)을 파괴하는 과정이었으며 동시에 외부의 자연을 허물고 그 자리에 '과자로 된 산'을 쌓아 온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앞으로 예상되는 영상문화와 가상문화(cyber culture)에 이 르면 문화란 과연 무엇이며 우리의 삶과 사람에게 무엇이 될 것인가를 심각하게 묻지 않을 수 없 게 됩니다. 진정한 문화란 사람들의 바깥에 쌓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심성속에 씨를 뿌리고 사 람들의 관계속에서 성숙해가는 것이라 믿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때문에 나는 네팔에서 만나는 유년시절을 통하여 지나간 과거를 만나고, 사람을 만나고,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는 일이 어느때보 다 깊은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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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경기인천이주노동자노동조합(이하 MTU) 출범은 이주운동의 새로운 도약이다.

  • 등록일
    2005/06/23 00:40
  • 수정일
    2005/06/23 00:40

*** 질라라비(해방자)에 쓴 원고 글을 옮겨 본다. 거의 정신없이 써서 내용이 부실한 글이다.

 

고용허가제 폐지와 노동비자 쟁취! 단속추방 반대를 외치며 명동성당에서 모였던 이주노동자 동지들이 지난한 투쟁을 끝낸 후 긴 동면에 잠에서 깨어나 4월 24일 서울경기인천 이주노동자노동조합을 출범을 통해 이주노동자 권리 투쟁에 나섰다. 이 처럼 MTU 출범은 이주노동자 주체 스스로가 노동자로 당당히 서기 위한 선언이며, 이를 계기로 한국사회 노동운동세력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이주노동자들의 선택이기도 하다.

 

기계로 살아가야 하는 이주노동자 현실
이주노동자들에게 노동기본권은 빛 좋은 개살구다. 연수생으로 들어와 고용주에 의한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다 못해 회사를 박차고 나와 스스로 미등록이주노동자로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대부분의 이주노동자들은 연수생으로 들어왔을 당시를 회상하면 눈가에 눈물을 글썽인다.

 

코리안 드림을 꿈꾸고 온 이주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보다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한국인의 편협 된 시선이라 말한다. 그/녀들은 장시간 저임금과 노동 기본권 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주야 2대교에 하루에 12시간 넘는 장시간 노동으로 살아가고 있다.

 

기계가 아니고서야 결코 할 수 없는 일하기 힘든 작업장에서 이주노동자 그/녀들은 작업을 하고 있다. 주 8시간 노동은커녕 잔업수당 또한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고 대부분 총액임금에 임금을 계약하거나 이도 여의치 않아 체불퇴거나 퇴직금 떼이는 상황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 땅에서 고단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녀들은 기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는 기계로서 대접받고 있다.

 

한달에 2번 쉬는 것이 소원이라는 이주노동자 그/녀들 이야기 속에서 중소영세사업장 현실 단면을 살펴 볼 수 있다. 산재, 폭행, 그리고 부당노동행위가 판쳐도 연수생보다 났다고 미소를 지으며 일하는 이주노동자들 미소에서 과거 우리 노동 형제의 구릿빛 얼굴이 떠올려 본다.  그러나 지금 이주노동자 그/녀들에게 있어서 잘못된 시선 오로지 돈을 벌어 자신의 고국에 돌아가 부귀영화를 꿈꾸며 살아가겠지 쉽게 이야기하지만 그/녀들 삶의 단면을 들여다보면 결코 녹녹치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녀들 살기위해 왔다고 하소연 하는 모습이 이와 대조적이다. 이들은 불안정한 자국의 노동시장으로 인해 자국에서 또한 내몰린 노동자의 절규이다. 그러나 그/녀들에게 우리는 기계로서 한국의 3D 현장으로 내몰리는 상황 그리고 노동자로서 인정받고 있지 못한 현실에서 그/녀들은 지난 3년간의 투쟁을 통해서 기계가 아니라 노동자라는 당당한 선언이 작지만 크게 한국사회에 울려 퍼지고 있다.

 

이주노동자 인권을 넘어 이주노동자 권리투쟁으로....
이주노동자 인권을 시작으로 이 땅에 이주노동자 지원단체가 출범하였다.
IMF금융위기가 한창인 시기 이주노동자들 또한 한국으로 대거 이주해온다. 이에 김대중 정부는 이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급기야 민주당은 고용허가제 입법을 시도한다. 이로 인해 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이하 외노협)에서 불협화음을 통한 이주운동의 골간이라 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다. 고용허가제는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궁극적 해결책이 아닌 미봉책이라 판단한 외노협 몇 명의 상근활동가들은 이주투쟁본부를 결성한다. 이를 통해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고용허가제 문제를 지적함과 더불어 이주노동자 운동의 단초를 마련하였다. 이를 통해 인권을 넘어 이주노동자 투쟁을 위한 한국인과의 연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주투쟁본부는 외국인이라는 차별적 언어를 철폐하고, 이주노동자(Migrant Workers')라는 용어를 통해 이주노동자 권리에 있어서 그/녀들 사회적 지위를 한 단계 끌어올림과 동시에 그/녀들 투쟁의 중요성을 한국 노동운동가들에게 알리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는 평등노조 이주지부의 출범을 통해 독자적 노조는 아니더라도 이주노동자 운동을 직간접적으로 민주노총 내에서 끌어가고자 하는 노력을 시도하였고, 이를 통한 다양한 이주운동연대단위들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차차 이주노동자 중심의 평등노조 이주지부가 안착되었다. 그리고 지난 3년간 이주노동자 투쟁의 서막이 시작이 되었다 할 수 있다. 이주노동자 운동이 초기 인권이라는 미명하에 그들에 대한 지원과 수혜를 바탕으로 진행되었던 투쟁이 이주노동운동을 한국의 이주노동운동 활동가와 이주노동자들이 만나 이주노동운동의 굳건한 연대로 이주노동자 운동의 지난 3년간 투쟁들을 만들어 내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는 이주노동자 운동을 인권이 아닌 노동운동임을 명확히 하였고, 명동성당 투쟁이 비록 승리로 끝나지는 않았지만 이주노동자 활동가들이 이 땅에서 스스로 주체로 서기 위한 지난하지만 값진 시간들이었다 할 수 있다.

 

이제 우리에게 있어 이주노동자운동은 주요한 사회적 화두로 던져졌고, 많은 현장의 활동가들에게 아직은 공감 가지는 않겠지만 노동운동 범위로 이주노동자들 스스로가 다가와 있다는 사실은 그 지난한 투쟁성과의 한 측면이 아니었는지 판단을 가져본다. 현재 비록 이주노동자 운동의 주요한 의제로서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지는 못하고 있으나 이주노동자 권리투쟁의 메아리는 한국사회에서 작지만 소중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

 

이주노동자 독자노동조합 설립의 의의
이주노동자 운동은 아직은 미약하지만 그 기간의 활동을 보았을 때 지난한 과정 속에서 한국 활동가들과 이주노동자들이 함께 하면서 만들어낸 중요한 운동영역이라 할 수 있다.

이주노동자들 문제에 있어서 한국 학생활동가들에게 있어 “차이와 차별을 넘어선 연대”라는 말이 2000년대 초반 이주노동자 연대활동의 주요한 모토였다. 그러나 이 차이와 차별을 넘어선 연대는 이제 직접적으로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연대라는 용어로 일축되어진 것을 보더라도 상황은 급반적 되었다 할 수 있다. 또한 명동성당 투쟁을 통해 미등록이주노동자들의 당당한 주장이 고용허가제 폐지, 노동비자 쟁취, 단속추방반대를 내걸고 투쟁하면서 스스로 노동자임을 각인하면서 맞이하였을 소중한 경험들.... 그리고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35명이라는 열사들을 배출해내면서 굳건하게 노동자로서 투쟁의지를 불태웠고, 서로가 동지임을 확인한 그 지루하였지만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명동투쟁에서 이주노동자들 스스로 조직주체로 섰다.

 

이 결과 올해 MTU 출범을 통한 이주노동자 스스로의 독자적 노동조합을 건설하는 계기점이다. 이 땅에서 정부에 대한 투쟁을 할 것임을 천명하고, 스스로가 주체로서 한국동지들과 연대를 하기 위한 힘찬 선언이기도 하다. 이주노동자 독자노동조합을 바라보며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져본다.

 

이주운동에 있어서 이주노동자들 스스로가 주축이 되어 한국 노동운동가들에게 이주노동자의 시선으로 이주노동자의 현실에서 이주노동자 투쟁을 함께 연대하고, 투쟁을 만들어가야 하는 시기를 맞이하였다. 비록 언어적 소통의 문제 다 나라 사람들이기에 소통의 어려움은 있지만 투쟁이라는 당위 속에서 소소한 문제는 극복될 것이다. 그리고 이주노동자 운동에 있어서 이주활동가들이 수도권을 중심으로 점차 전국적 이주노동자 단일노조 건설의 기치를 높여야 한다. 그리고 명동성당 투쟁에서 보여준 대구 성서공단, 부산, 창원 이주노동자들의 연대에서 이주노동자 전국 단일노조 건설의 기운을 이주노동자 동지들은 보았다.

 

그러나 이주노동자 운동을 전개함에 있어서 주요하게 바라봐야 할 지점이 있다. 이주노동자 운동에 있어서 현실 노동계와 다른 특수한 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일단은 이주노동자들에게 있어 한국노동자들과 다른 차이점은 이들에게 노동3권이 보장되고 있지 못한 실정이며, 단속추방으로 인해 불투명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한국노동자들이 투쟁의 경우 단위사업장 중심의 파업투쟁 또는 단체교섭투쟁 그리고 대정부 투쟁의 수순을 밟고 투쟁을 전개하지만, 이주노동자 투쟁 자체부터가 정부의 탄압에 의한 투쟁이기에 직간접적으로 사측에 대한 투쟁을 통한 압박이기 보다는 정부의 정책에 의한 일방적 탄압에 대한 대정부투쟁임을 우리는 주지할 필요가 있다.

 

이에 이주노동자 출범은 정부에 대한 이주노동자들의 투쟁선포이며, 끝까지 투쟁하여 단속추방 반대, 고용허가제 폐지, 노동3권 쟁취, 전면 합법화라는 요구안을 제시하고 투쟁의 선포라 의미라 할 수 있다. 이제 이주노동자 출범에 따른 지역 차원에 있어 이주노동자 주도와 중심으로 이주운동 지역별 단위 형성과 조직보위와 확대를 위한 지원대책이 시급히 마련되어야 한다.

 

MTU 활동을 통한 아시아 노동연대를 위한 모색 및 한국노동운동의 새로운 도약이다.
MTU 활동은 아시아 전체 노동자 민중과 함께하고자 하는 연대이며, 투쟁이기도 하다. 현 시기 노동자투쟁을 통한 전지구적 연대활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지 못한 현실에서 MTU 활동은 한국노동운동이 지구적 시야를 확보하고 전체 아시아 노동자 민중과의 발걸음을 공동으로 하기 위한 시작이기도 하다.

 

전지구적으로 보았을 때 한국운동이 복무할 지점이 있고, 한국운동이 아시아와 태평양 노동운동에 대해 이해하고 연대할 측면이 있다. 이 시작의 첫 단추가 MTU를 통한 아시아 연대가 단초가 되지 않을까? 판단을 가져본다. ‘MTU 활동은 비록 지금 시작은 미약하지만 한국노동운동진영에 머무른 운동이 아니라 각 아시아 그리고 태평양 노동자 민중과의 공동으로 활동을 하기 위한 주요한 고리이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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