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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21

(§21) {말하거나 보여주는 순간 사념하는 것과 대립되는 것을 말하고 보여주는 것은 감각적 확신만 그러는 것이 아니다. 감각적 확신을 옹호하면서}[1] 이와 같이 [감각적인<이것>이 의식이 마주하는 진리이고 이것을 경험하는 것이 보편적인 경험이라는] 주장을 네세우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앞 문단에서 관찰한 바에 의하면 자기가 사념하는 것을 말로 표현하는 순간 스스로 그것과 대립되는 것을 말한다. 어쩌면 이런 현상이 감각적 확신의 속성에 대하여 숙고해보도록 하는데 가장 적합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의식 저편에[2]있다는 대상들의 [내 감성에 와 닿는 거기 그자리/그때에 있다는] 현존을[3]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렇게 [현존하는] 대상들을 더 정확히 규정하여 실재적이고, 절재적으로 개별적이며, 온통 개성적이고 개체적인 사물들이라고 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 어는 것도 다른 것과 전적으로[4]동일할 수 없다고 한다. 이런 현존이 절대적인 확신과 진리의 대상이란다. [절대적인 확신과 진리를 이야기하면서] 그들이 기대고[5]있는 것은 [말하자면]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아니 이미 다 써버린 이 한 조각의 종이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사념하는/기대고 있는 것을 말한다고 하지만 그들의 말은 [사실] 안 그런다.[6] 그들이 사념하는/기대고 있는 이 한 조각의 종이를 정말 말하기를 원하고, 그리고 그들의 언사행위의 참뜻이 거기에 있다고 해도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기대고/사념한다고 하는 감각적인 <이것>은 애당초 보편성이란 터전에 둥지를 튼[7]의식의 친족인[8]언어를 가지고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각적인 <이것>의 진리를 확신하는] 의식이 감각적인 <이것>을 정말로 말하려고 시도한다면, 의식은 그러는 동안 썩어 문드러져버릴 것이다.[9] 그래서 감각적인 <이것>의 기술을 시작한 사람은 [그 동안 썩어 문드러지기 때문에] 이를 완성하지 못하고 그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고, 넘겨 받은 사람들도 모두다 [썩어 문드러지기] 직전에[10]결국 존재하는 것으로 붙잡을 수 없는 사물에 관하여[11]지금까지 말해 왔다고 자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12] 그들이 바로 <여기> 이 한 조각의 종이를 사념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것은 <여기>에 와서 보면 위의 것과 전혀 다른 것이 되어있다. 그래도 그들은 고집하여 “실재하는 사물, 의식 저편의 있는 혹은 감각에 와 닿는 대상, 절대적인 개별존재[13]” 등을 [계속] 운운한다. 그러나 그들이 감각적인 사물에 대하여 말로 표현하는 것은 사실 보편적인 것일 뿐이다. 그래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14]일컬어지는 것은 [사실] 별다른 것이 아니라 비진리적인 것, 비이성적인 것, 사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 뭔가에 관하여 말할 때, 그것이 진짜 있는[15]사물, {의식 저편} 외부에 엄연히 있는 대상이라는 것 외 더 이상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면, 이때 그 사물은 가장 보편적인 것으로 이야기되고 그럼으로써 다른 것과의 차이보다는 오히려 그 사물이 모든 것과 동일함을 표현할 뿐이다. 내가 <일개의 개별적인 사물>을 말한다고 하자. 이와 동시에 내가 [사실] 말하는 것은 [사념된 일개의 개별적인 사물이기 보다는] 오히려 전적으로 보편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물이 일개의 개별적인 사물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것>이라는 말은 아무것에나 상관없이 다 적용된다. [적용 범위를 좁히려는 의도로] 좀더 정확하게 <이 종이 조각>이라고 해도 모든 종이가 예외 없이 하나의<이 종이 조각>이 되는 바, 내가 말하는 것은 언제나 보편적인 것일 뿐이다. 언사행위란 사념을 말이 되어 나오는 순간 뒤집어 놓고 뭔가 다른 것으로 만들고 이렇게 사념의 말문을 틀어막는 신적인 속성을 갖는다는 것을 알아차린 <나>라는 자아는 말문상실의 보안책으로 사념하는 종이조각을 들어 보여줄 것이지만 이때 자아는 실로 감각적 확신의 진리가 무엇인지 경험하게 될 것이다. 자아가 [봐라 하면서] <이> 종이조각을 <여기>로 들어 보여 줄 때 이 <여기>는 다른 <여기>의 <여기>이기도 하는, 달리 표현하면 <이 여기>라고 보여주는 행위 자체에 다수의 <여기>가 {서로 관계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굽힘/접힘/주름이 없이} 단순하게 그저 한군데 모아져 있음이 드러나는[16]보편적인 것임을 들어 보여주는 것이다. [언사행위에 이어 지시행위의] 진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아는 이제 [나와 떼어 놀 수 없는/내가 찰싹 붙어있는] 직접적인 것을 안다고 하지 않고 [눈을 뜨고] 지각하게 된다.



[1]원문의 <auch/역시>를 풀어서 번역하였다. 여기서 감각적 확신을 옹호하는 사람은 일상의식을 옹호하는 사람이 아닌가 한다.

[2]원문 <äußerer>. <외부>로 번역하지 않았다. <의식 저편>이라 해야 정확하게 이해되는 것 같다.

[3]원문 <Dasein>

[4]원문 <absolut>

[5]원문 <meinen>

[6]원문 <Aber was sie meinen, sagen sie nicht.> 좀 애매모호한 표현이다. 헤겔이 어쩌면 의도적으로 이런 애매모호한 표현을 선택했을 수도 있겠다. 여기서 <nicht>는 물론 <sagen/말하다>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말하는 행위의 대상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말은 하면서도 말하려고 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라는 의미지만, <nicht>를 말하는 행위 자체를 아예 부정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라는 생각이다. 헤겔과 감각적 확신을 옹호하는 사람간 대화가 끊길 개연성이 있다는 말이다.

[7]원문 <dem an sich allgemeinen>. 의식의 <an sich>가 정말 보편성인가? 프로이드가 말하는 <언사행위상의 실수/Fehlleistung>를 보면 의식도 자기도 모르게 <이것>에서 떨어 나오지 못하고 달라 붙어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외부 대상이라는 의식의 저편과 무의식이라는 의식의 저편이 있는 것 같다. 감각적 확신의 옹호자가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외부대상과 무의식간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이 관계를 조명하는 것이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언어가 보편성을 담보하는 것이라면 언사행위의 결과는 바닥이 드러나고 또 그 바닥이 보이는 투명성(Luziditaet)을 견지해야 하는데 사실 안 그런다. 언사행위의 결과를 보면 외부대상과 직접(!) 관계하는 무의식이 교차한 흔적을 안고 있기 때문에 투명하다기보다는 대려 꾸정꾸정하다. 아니면 언어도 변증법적 운동을 하여 <an sich>, <fuer sich>, 그리고 <an und fuer sich>로 이어지는 과정을 거쳐 완벽하게 된다는 말인가? 아무튼 프로이드의 등장은 괜한 것이 아닌 것 같다.

[8]원문 <angehören>. 동사를 <Angehörige>로 명사화하여 번역하였다.

[9]원문 <Unter dem wirklichen Versuche, es zu sagen, würde es vermodern.> 좀 애매모호한 문장이다. <es>가 두 번 등장하기 때문이다. 첫번째 <es>는 분명 감각적인 <이것>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두 번째 <es>가 지시하는 것은 무엇인지 좀 불분명하다. 두 번째 <es>가 첫번째 <es>와 같은 것이라면 {역자의 언어감각으로는} 두 번째 <es> 대신 첫번째 <es>를 지시하는 <dieses>가 와야 하는데 안 그런다. 그래서 역자는 두 번째 <es>를 감각적 확신을 주장하는 <의식>을 지시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번역하였다. 문맥상으로도 맞는 것 같다.

[10]원문 <zuletzt/최후에>

[11]원문 <von einem Ding, das nicht ist>

[12]<vermodern/썩어 문드러지다>란 표현에서 로빈슨 제퍼스(Robinson Jeffers)의 생애 일부와 <Sigé>란 두 단편으로 엮어진 보토 슈트라우스의 <Fragmente der Undeutlichkeit/깨지고 깨져 불분명한 글들, {우아하게 표현하자면} 불분명의 단장들>이란 책이 생각난다. 특히 로빈슨 제퍼스의 <메데아> 마지막 부분에서 메데아가 야존에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해변에 가서 니가 타고 다니던 배에 기대여 썩어 문드러져 백골이 될 때까지 니가 무슨 짓을 했는지 생각해봐라.”라고 번역했던 것 같다. 이 책이 옆에 없어서 장담은 못하겠다. 민주주의를 멀리하고 민주주의적 일상생활을 피해 외지에서 부인과 단둘이서 삶을 개척한 제퍼스에 기대어 보토 슈트라우스는 이 책에서 좀 반민주주의적이고 반학문적인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불가해한 전체”를 이야기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구해서 다시 읽어보고 더 말할까 한다. 그리고 문학이 존재하는 터전이 사라지는 이슬과 같은 <목소리>에 주목하고 그 목소리를 건져 구원하려고 하는 것이라면 문학은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그것을 기술하는 것이 아닐까?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에서 보면 개별자에 대한 학문이란 있을 수 없지만 개별자를 구원하는 문학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다.

[13]원문 <einzelne Wesen>

[14]원문 <das Unaussprechliche>. 니콜라우스 쿠자누스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Unum igitur verum nomen cuiusque imparticipabile atque, uti est, ineffabile esse necesse est. “그래서 모든 사물의 참다운 이름은 하나로서 나누어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존재가 말할 수 없는/말로 표현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필연이라는 말이다.”(De coniecturis, 2부 6장, www.hs-augsburg.de/~harsch/Chronologia/Lspost15/Cusa/cus_c206.html 참조). 이어 <Idioda de mente> 등 쿠자누스의 언어철학을 살펴봐야 할 것 같다. <부정변증법>을 이야기한 아도르노의 <{부르는} 이름>에 관한 묵상과 함께. 읽어 볼 것이 넘 많다.

[15]원문 <wirklich>

[16]원문 <an ihm selbst ein einfaches Zusammen vieler H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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