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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terra(e)strema: 전태일, 그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La terra(e)strema.

 

"흰 고개
검은 고개"

 

이 추상의 길에 하얀 점으로 사라진 이모와 함께 고개 넘어 서울로 향했던 모든 사람들이 겹쳐진다.

 

EU 경계선을 넘으면서 바다 한 가운데서 사막에서 셀 수 없이 죽으면서 몸 팔러 가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겹쳐진다.

 

미국 멕시코 철조망을 넘어 몸 팔러 가는 사람들이 겹쳐진다.

 

이 길은. “국경을 넘어 인류 전체의 삶의 문제를 끌어안고 두 발로 직접 현장을 뛰며 지구마을 민초들과 가슴으로 통한” 길이 아니다.

 

갑순이가 넘어가던 흰 고개 검은 고개 길인데, 온 인류가 아니라 인류로 취급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는 길을 담고 있다.

 

전태일,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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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의 사유 - 3번째 걸음

ou_topia님의 [IN MEMORIAM GILLES DELEUZE] 에 관련된 글.

 

잠잘 때 뇌는 무슨 일을 할까. 의식과 함께 김 지하의 <서울길>이 찾아왔다.

 

간다
울지 마라 간다
흰 고개 검은 고개 목마른 고개 넘어
팍팍한 서울 길
몸 팔러 간다.

 

아침저녁으로 쌀랑해진, 나락 베기가 다 끝난 가을이었다. 아이는 그날 좀 늦게 일어났다. 전날 저녁 늦게까지 먼 길 떠나 다시 오지 않을 이모는 보따리 짐을 쌌다. 저 멀리 산허리에서 하얀 점 하나가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계곡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시 시야로 들어왔다 하면서 움직이고 있다. 집은 바래다주려고 사람들이 다 나가있어서 텅 비어있었고 아이는 혼자였다. 아이는 처음으로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다. 하얀 점은 고개를 넘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 눈물의 원천은 마르지 않았다.

 

침대에 누운 채 <서울길>을 떠 올려본다. 다 떠오르지 않고 <흰 고개 검은 고개>만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흰 고개 검은 고개>할 때마다 눈물이 나온다. 왜 그러지?

 

율동이 있는 시(!)이기 때문이다. 대상으로 스며들어가 자아와 대상이 일체를 이루고 양자가 오직 운동으로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자는 자아[시인]와 대상이 일체를 이룬 운동으로 들어갈 수 있는 [시적] 공간을 얻었기 때문이다.

 

흐인 고개

거믄 고개

 

“ㅡ ㅣ, ㅓ ㅡ”. 엇갈리는 모음에 구불구불한 산길에서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는 하얀 점이 지금 여기 내 눈앞에 어른거린다. 다시 아이가 되어, 눈물을 흘린다.

 

이런 운동을 박노해의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자아>의 운동으로 꽉 차있어서 그의 추종자가 되거나 그를 멀리하거나 양자택일 할 수 밖에 없다. 김지하의 <흰 고개 검은 고개>는 추상의 고개지만 <서울>로 가는 구체적인 길인데, 반면 박노해의 <안데스 산맥>은 시공간의 실체이지만, 원천(Arche>와 최후<Eschaton>를 찾아 나서는 형이상학적이고 초월적인 자아의 추상이다.

 

그리고 호롱불 하나를 들고 있는 께로족 청년이 시인의 다른 자기(alter ego)가 되고 시인은 존재의 망루에서 마치 구원자를 기다리는 듯이 엄숙한 표정을 짖고 있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는 시인을 향한 말이고,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한 말이다.

 

엮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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