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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제 의식이 지각행위를 펼쳐가는 가운데 실지로 어떤 경험을 하는지 지켜보자. 다만, 지켜보는 우리들은/헤겔은 바로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상이 전개되는 과정과 또 그 대상을 대하는 의식의 태도에서 이미 의식이 하는 경험을 내다보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의식이 어떤 모순에 빠지고 어떻게 [허기적 허우적거리면서] 앞으로 나아가는지} 이런 의식의 경험[도정]에 널려있는[1]모순의 전개과정만 살펴보면 된다. —[2]지각으로서의 자아가 파악하는 대상은 순수한 일개의 것으로 제시된다. 의식은 또한 일개로 제시되는 대상에서 드러나는 {거기에 갇혀있는} 성질을 지각한다[3]. 그런데 성질은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일개성[4]안에 머무를 수 없고 일개성을 넘어 밖으로 향한다. 그 결과 의식은 처음에 대상으로 자기 곁에 와 있는 것의[5] 존재가 하나로 분리된 어떤 하나의 존재라고 파악했는데, 그것이 대상의 참다운 존재가 아니었다고 하게 된다. 그리고 의식은 대상이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참다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긋나는 일은[6]자기 안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결론 짖고 자기가 대상을 잘못 파악하였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되면 의식은 성질의 보편성을 담아내기 위해서 대상으로 그 곁에 와 있는 것을[7][일개라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두루뭉실한 공동체로[8]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렇게 자리를 만들어 다리 좀 쭉 펴려고 하는데 의식은 성질을 달리 파악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자리에서[9]의식은 Eigenschaft를[10]다시 살펴보고 Eigenschaft는 이제 대상으로 그 곁에 와 있는 다른 것과 대립하고 그것을 배제하는 독립체라고 지각하게 된다.[11]그 결과 의식은 대상으로 그 곁에 와 있는 것을 다른 것들과의 공동체로, 달리 표현하면 다른 것들과 이어지는 연속성으로 규정했을 때 사실 잘못 파악했다고 하고, 오히려 독립체로서의 성질을[12]담아내기 위해서는 연속성을 절단하고 대상으로 그 곁에 와 있는 것을 배타적인 하나로 자리매김할 수 밖에 없게 된다.
[1]원문<vorhanden>
[2]이하 내용은 지각하는 의식이 무대에 등장하여 독백하는 내용이다. 제대로 번역하려면 드라마를 쓰는 것이 좋겠다.
[3]원문<gewahrwerden/알아보다, 인식하다>. <gewahr>에 스며있는<Gewahrsam/보호, 구류>란 의미의 Moment를 <갇혀있는>으로 옮겨보았다.
[4]원문<Einzelheit>. <개별성>이라 하지 않고 <일개성>으로 번역하였다. 이 낱말이 통용되는지 모르겠다.
[5]원문<das gegenständliche Wesen>. 여기서<Wesen>을<Anwesenheit>란 의미로 번역하였다.
[6]원문<das Unwahre>
[7]원문<das gegenständliche Wesen>. 위와 마찬가지로 <Wesen>을 <Anwesenheit>란 의미로 번역하였다. <Wesenheit>와 함께<귀신>이란 의미도 있는 것 같다.
[8]원문<eine Gemeinschaft überhaupt>
[9]원문<ferner>
[10]여기서<Eigenschaft>는 무슨 말인가?
[11]원문<Ich nehme nun ferner die Eigenschaft wahr als bestimmte, anderem entgegengesetzte und es ausschließende>. 알쏭달쏭한 문장이다. 여기서 <Eigenschaft>는 뭐고 또 <Eingenschaft als bestimmte>란 무슨 말인지, 그리고 뭐하고 어떻게 대립하고 배제한다는 말인지 알쏭달쏭하다. 우선 짚고 넘어가자면 성질과 다른 성질이 대립한다는 번역은 분명 오류인 것 같다. 문법상 맞지 않기 때문이다. 성질과 성질이 대립한다고 하려면 <anderem>이 아니라 여성인<Eigenschaft>를 받는 여성형<anderer>나 복수형 <anderen>이 와야 한다. 근데 남성형 <anderem>이 와 있다. 그리고 <anderem>이 다시 중성 <es>로 받아지는 것을 보면 <anderem>은 <gegenständliches Wesen>을 지시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Eigenschaft>가 <gegenständliches Wesen>과 대립한다는 말인데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살펴보자. 현상학적 Epoché를 한 지각이 지각하는 것은 ‘뭔가 하얀 것’이다. ‘뭔가’가 두루뭉실한 공동체가 되겠고 ‘하얀 것’이 첫째 의미로서의 성질(Eigenschaft)이 되겠다. 다음 단계에서는 ‘하얀 것’이 첫째 의미로서의 다른 성질(Eigenschaft)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와 ‘하얀 것’이 종합된 ‘뭔가 하얀 것’이 다른 ‘뭔가 하얀 것’과 대립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보면 이 단계에서의Eigenschaft는 ‘하얀 것’을 의미하는 첫째 성질이 아니라 ‘뭔가 하얀 것’을 다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런 의미의 연장선에서 역자는 앞서 <Eigenschaft als bestimmte>를 페터 블리클레(Peter Blickle)에 기대어, 미흡하지만, 대자적으로 규정된 ‘독립체’로 번역한 적이 있다. 아무튼 헷갈린다. 지각을 다 읽어본 다음 다시 돌아와서 살펴봐야 할 문제인 것 같다.
[12]원문<Bestimmtheit der Eigenschaft>
걱정된다.
한반도에서의 국지전 전면화가 걱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북이 이성을 잃은 “불량국가”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를 보면 집단과 집단간 행동논리가 맞아 떨어지지 않아 전면전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제국주의적 질서에서 헤게몬 집단과 비- 혹은 반-헤게몬 집단간의 모순은 극치로 치달을 수 있다. 아테네와 멜로스 사람들간의 관계가 그러했다. 그러나 동북아시아의 현 6자 구도아래 한반도에 국지전이 전면화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럼 뭐가 걱정되는가?
남은 것은 이북과 이남의 power-political calculus일 뿐이다. 이런 차원에서 MB정권과 김정일-김정운 정권이 죽이 잘 맞는 것 같다.
연평도 사태를 예견한 분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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