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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불량거래-§8 첫 문장

(§ 8) 의식은 결국 {시시포스의 되풀이/반복을} 필연적으로[1]재개하여 그 모든 과정을 처음과 똑같이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통과하게 된다. [길과 굴려야하는 돌은 똑같은데] 근데 뭔가 첫번째와 달라진 것이 있다.[2]



[1]왜 필연적이지? 의식이 시시포스처럼 무슨 벌을 받는다는 말인가? 시시포스가 산꼭대기에서 다시 산밑으로 내려가지 않고 “깔려면 까”라고 개길 수가 없단 말인가? 아니면 의식이 밑으로 내려가야 하는 어떤 다른 필연성이 있단 말인가? 파란 하늘이 “천국”과 겹치지 않고, 단순하게, 파란하늘로만 보일 수 없단 말인가? 의식이 파란 하늘을 파란 하늘로만 보는 것이 힘들어서 아니면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 비틀즈가  “Imagine there is no heaven … above us only sky.”라고 노래했던가? „Sysiphos“가 „sophos/지혜로운“의 비교급이라면 „다른 사람보다 더 지혜로운“이란 의미이고, 호메로스는 여기다 한술 더 떠서 시시포스를 세상에서 가장 영리한 사람으로 친다. 시시포스가 저지른 죄를 보면 신들을 엿 먹였던 죄밖에 없고 그 중 가장 큰 죄는 신이 인간을 다스리는 가장 큰 무기인 „죽음“에 족쇄를 채우고 다시는 죽이지 못하게 했다는 것인데, 달리 표현하면 삶을 겁내지 않고 만끽한 죄를 지은 것이다. 돌을 반복해서 굴려올리는 시시포스를 영웅화할 수도 있겠지만 자본주의체제하 노동자의 일상생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추상적인 노동의 반복으로 자본을 키우는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자의 모습이 아닌가 한다. 이런 노동이 필연인가? 노동자해방과 함께 노동해방은?

[2]뭐가 달라졌단 말인가? 시시포스가 산꼭대기에서 산밑으로 내려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 탓이요 내 탓이요” (mea culpa)했을까? 한스 마그누스 엔쩬스베르거(Hans Magnus Enzensberger)의1957년 시 “Anweisung an Sisyphos”가 생각난다.

 

anweisung an sisyphos

was du tust, ist aussichtslos. gut:
du hast es begriffen, gib es zu,
aber finde dich nicht damit ab,
mann mit dem stein. niemand
dankt dir; kreidestriche,
der regen leckt sie gelangweilt auf,
markieren den tod. freu dich nicht
zu früh, das aussichtslose
ist keine karriere. mit eigener
tragik duzen sich wechselbälge,
vogelscheuchen, auguren. schweig,
sprich mit der sonne ein wort,
während der stein rollt, aber
lab dich an deiner ohnmacht nicht,
sondern vermehre um einen zentner
den zorn in der welt, um ein gran.
es herrscht ein mangel an männern,
das aussichtslose tuend stumm,
ausraufend wie gras die hoffnung,
ihr gelächter, die zukunft, rollend
rollend ihren zorn auf die berge.

 

 

시시포스야 이렇게 해.

네가 하는 일은 가망이 없어. 정말 그래.
알아 먹었지, 그렇다고 해 응?
하지만 물러서지 마,
넌 짱돌을 든 남자야. 아무도
너에게 고맙다고 하지 않아. {아스팔트에} 분필로 그은 선{만}이,
지루하게 내리는 비가 그것을 핥아 먹는 가운데,
{네가} 죽어 쓰러진 자리를 표시하게{될 텐데.} 서둘러
좋아하지 마. 가망 없는 일이
장원급제의 길이 아니야. {그건 별볼일 없는} 자기
비참을 들고서 맞장구 치는 찌질이들이 하는 짓이야,
허수아비, 점쟁이들이. 넌 침묵을 지키고,
태양과 한마디 나눠,
바위가 밑으로 구르는 동안. 하지만
네가 무력(無力)하다는 허탈감에 빠지지 마,
그 보다 이 세상에 분노를 한 가마니 더해,
그게 안 되면 쌀 한 톨의 분노라도.
남자들이 부족해,
가망 없는 일을 하면서 말없이,
{모든} 희망을 잡초처럼 뽑아 던져버리고,
미래란 것을 폭소로 대하면서, 굴려
굴려 분노를 산꼭대기로 올리는 남자들이.

 

추가자료: 홍세화가 당원에게 드리는 글

 

2012.2.17

 

여러분이 <진보신당>입니다
13000개의 바위를 밀어 올리는 이 시대의 시지프스들에게 띄우는 편지
 
 
“시 지프스가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이 돌아오는 동안이고 멈춰 있는 동안이다. 바로 바위 곁에 있는 기진맥진한 얼굴은 이미 바위 그 자체인 것이다! 나는 이 사람이 무거운, 그러나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끝도 알지 못하는 고뇌를 향하여 다시 내려가는 것을 본다. 그의 고통처럼 어김없이 되돌아오는 휴식 시간, 이 시간은 의식意識의 시간이다. 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신들의 소굴로 차츰차츰 빠져 들어가는 순간마다, 그는 자기의 운명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바위보다 더 강하다.”
―알베르 까뮈, 《시지프스의 신화》 중에서
 

뒤늦은 새해편지
 
당원 동지 여러분.
 
 설 연휴가 지난 지도 오래고, 2월도 중순을 넘어가고 있으니 새해인사를 전하기엔 새삼스런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본디는 ‘신년사’라는 걸 통해 동지 여러분께도 말씀을 건넬 계획이었습니다. 오래된 관행도 그렇고, 새해의 첫걸음을 응원하고 희망어린 비전을 제시하는 게 마땅한 도리라는 사람들의 권고도 있었지요. 어느 해인들 그렇지 않은 때가 있었겠습니까만, 너나할 것 없이 강조하는 2012년의 중요성 때문에 더욱 그것을 피할 수 없는 숙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러나 솔직히 저는 신년사라는 말이 싫었습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순간 과장되고 거짓된 말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무렵, 이른 아침 집을 나와 경의선 기차역까지 걷는 동안 문득 신년사를 편지글로 고쳐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밤 에 쓴 편지를 아침에 다시 읽지 말라”고 어느 시인이 말한 적이 있지요. 결국은 못 부치게 될 테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 경구를 이번에는 잊기로 했습니다. 그것이 절망이든 희망이든, 저는 제 속에 깃든 진심을 차라리 드러내는 쪽을 선택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늦은 밤에 쓴 이 편지를 아침에 읽지 않은 채 여러분께 곧장 띄웁니다.
 
시지프스를 떠올리다
 
모 든 사람이 행복하거나 그 반대인 시대는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최근 20년 동안 너도나도 ‘위기의 시대’를 입에 올리지만, 하나의 위기가 지나고 나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의 범주는 급속히 좁아지고 불행을 감내해야할 사람들의 그것은 같은 속도로 확대되어왔습니다. 23년 만에 영구 귀국한 2002년 1월로부터 지난 10년 동안 그 격차라는 것이 이 정도까지였나 하는 점을, 고백컨대 저는 최근에서야 비로소 깊이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지난해 11월 당대표가 되고 나서 3개월 동안 저의 일상을 중요하게 차지한 것은 불안정 노동이라 부르는 비정규 노동자들, 정리해고된 노동자들의 투쟁 집회 현장을 찾아가는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이 3개월 동안 다닌 곳이 지난 10년 동안 갔던 곳보다 많지 않을까 싶네요. 그냥 다닌 게 아니었습니다.  발언 순서를 기다리면서는 왜 그리 긴장되는지, 또 마이크 앞에서는 다른 분들처럼 큰 목소리로 자신 있게 외치지 못하고 자꾸만 허둥대는 자신이 또 얼마나 어색하게 느껴지는지...
 
세 상에 이리 많은 싸움이 있는데, 세상은 왜 이리 조용한가를 생각하면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이 길고 지루한 싸움의 끝을 대체 누가 가늠이나 할 수 있을까요? 네 번의 겨울을 맞으며 1500일 가까이 싸우고 있는 재능교육 선생님들의 거리농성장을 찾던 날이었습니다. 이 막막하고 외로운 싸움을 목도하고 나오면서 저는 문득 그리스 신화의 시지프스를 떠올렸습니다. 산꼭대기까지 무거운 바위를 끝도 없이 되풀이해서 밀어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은 시지프스. ‘그래서 어쩔 건대?’라는 자본의 비정한 얼굴에 맞서 부르튼 두 손으로 기약 없이 바위를 굴려야 하는 부조리한 운명을 감내해야 하는 이들이 어찌 이분들뿐이겠습니까 마는.
 
그 러다 또 문득 저는 진보신당 당원 동지 여러분을 생각했습니다. 다른 이들이 하루아침에 뒤로 하고 떠난 당을 떠나지 않고 지키고 있는 여러분이 바로 이 시대의 시지프스가 아닌가요? 냉소와 무관심과 외면에도 불구하고 두 팔을 뻗어 당을 지탱하고 다시 산 아래로부터 가파른 산비탈을 기어오르고 있는 우리의 운명이 시지프스의 그것 아닌가요?
1% 대의 지지율, ‘통합’이란 이름표를 단 야당들의 틈바구니에서 소외된 원외정당의 설움, 언론의 외면, 고집불통이란 딱지, 명망 정치가들이 남기고 간 부정적 유산과 상처, 무정한 옛 동지들에게 ‘진보(신)당’이란 이름마저 도용당하는 비애, 이당 저당 가릴 것 없이 ‘좌클릭’이요 진보를 자처하는 현실, 조합원들의 민주적 선택권을 몰수하여 3자통합당에 대한 변형된 배타적 지지방침을 관철시키려는 민노총에 대한 울분……. 기나긴 지난 1년여의 통합논쟁으로 지치고 힘겨워 주저앉은 당원들과 지역당협이 적지 않다는 소식을 듣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왜 여기에 남아있는 것일까요?
 
 

 
자존감自尊感에 대하여
 
당원 동지 여러분.
 
13000 개의, 저마다의 바위를 밀어 올리고 있는 바로 여러분이 이 시대의 시지프스들입니다. 알베르 까뮈처럼,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다”고도, 그러므로 “우리는 행복한 시지프스를 상상해야만 한다”고도 차마 지금은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제가 여러 글에서 했던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어려운 게 아니라, 어려운 길이기에 우리가 가야 한다.” 이 말도 지금은 잠시 유보해 두겠습니다.
 
그 러나 이 말 한마디는 반드시 해두고 싶습니다. 당원 동지 여러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이제 <진보신당>입니다. 우리에겐 13000 개의 진보신당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선 ‘정치적 자존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우리는 자본주의문명 자체의 위기가 눈앞에 전개되는 상황에서 정작 자본주의 이후를 대비해야할 진보정당은 소멸의 위기에 처한 슬픈 역설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여도 야도 ‘좌클릭’이 유행인데 우습게도 왼쪽에 있던 사람들마저 몸은 ‘우클릭’하는 이 역설의 시대를 우리는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요? 몸과 머리가 따로 노는 이 어처구니없는 자기분열의 시대에 그저 목이나 어루만지며 안심하자는 이야기는 물론 아닙니다.
 
정 치 혹은 정당은 자신의 정치적 자존감에 존립합니다. 자존감은 우선 시간과 상황의 변화에 따라 요동치지 않고 자기정체성의 현재와 과거와 미래에 대해 끊임없는 확인하려는 노력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누구인지,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물음을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 질문이 누락된 정당은 누군가의 말장난처럼 ‘가설정당’일 수는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당일 수 없습니다.
 
정 치가 자존감이 아니라 수數나 세勢에 존립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눈에는 흩어지지 않고 남아있는 진보신당 13000 당원들은 불가사의한 존재들로 보일지 모릅니다. ‘끝없는 패배’가 두려운 이들에게 정치적 자존감이란 것은 그저 던져버리고 달아나고픈 거추장스런 시지프스의 바위로 비쳐졌을지 모릅니다. 두 가지의 아주 다른 길이 있는 것입니다. 산꼭대기만을 쳐다보다 바위를 버리고 달려가는 ‘상층연합’의 길이 있는가하면, 바위를 밀어 올릴 때나 바위를 찾기 위해 산 아래를 향해 걸을 때나 묵묵히 자신의 발끝이 향하는 길을 보고 걷는 ‘하층연합’의 길이 있습니다.
 
당 원 동지 여러분 가운데는 제가 당대표가 된 직후 어느 인터뷰 자리에서 했던 말을 기억하는 분이 계실 겁니다. 진보신당 당원들과 저의 힘겨운 노력이 실패한다면 우리는 즉시 ‘하방下放’을 선택하여 새로운 진보정당의 밀알이 되겠다는. 처음부터 패배주의로 시작하느냐는 지적도 없지 않았습니다만, 사실은 이것은 안토니오 그람시의 1926년 <리용 테제>를 떠올리며 했던 말이었습니다.
 
한 때 사회당(PSI) 좌파의 지도자였던 무솔리니의 파시즘의 광풍 앞에서 반半합법적 존재로 탄압받으면서 궤멸의 위기에 처한 이태리 공산당(PCI)은 자국 내에서 당대회를 열지 못하고 프랑스 리용으로 당원들을 소집하지요. 그람시는 이 당대회의 테제에서 5만 당원에게 ‘하방’을 명령합니다. “북부의 노동자와 남부의 농민을 조직하고 그들의 혁명적 동맹을 공고화하라”는 이 테제에 따라 당원들은 민들레 씨앗처럼 공장으로 농촌으로 학교로 퍼져나가 삶의 근거지마다에서 진지를 구축하지요. 그리고 파시즘의 몰락 이후 당은 50만 당원을 가진 서유럽 최대의 대중적 좌파정당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동지 여러분.
 
벌 써부터 머지않아 다가올 4월 총선에서 진보신당이 살아남을 것인가 해산될 것인가를 놓고 말들이 분분합니다. 진보신당의 존재가 자신들의 뒷덜미를 잡는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간절히 희구할지도 모르지요. 여기에 판돈을 걸어야 한다면 아마도 후자 쪽에 수북이 쌓이겠지요.
 
그 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패배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어렵게 존속시키려던 당은 해산되고 우리는 다시 시지프스처럼 산 아래로 무거운 발걸음을 다시 옮겨야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민들레가 뿌리째 뽑혀도 갓 털을 단 씨앗들이 흩어져 큰 숲을 이루듯, 당이 해체되고 진보신당이란 이름이 사라져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13000개의 진보신당으로 남아있다면 머지않은 시간에 13만의, 130만의 진보정당이 출현할 것입니다. 그람시는 감옥에서 병사했지만, 그의 두뇌를 20년 간 작동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호언하던 파시즘 권력은 사라졌어도 그의 《옥중수고》를 우리가 지금 읽고 있습니다.
 
어 떻게 져야 할까요? 아니면 어떻게 이겨야 할까요? “싸움은 승리를 위해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 <시라노>의 유명한 마지막 대사입니다.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 ‘13000개의 진보신당’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가 확신할 수 있다면, 총선이라는 한 번의 전투에서의 승리와 패배는 절대적인 중요성을 갖지 않습니다.
 
하 나의 씨앗과 한 알의 밀알에 우주가 있듯이, 여러분이 각각의 존재가 진보신당일 수 있다면 말입니다. 이것이 자존감의 두 번째 비밀입니다. 씨앗과 밀알이 썩어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에서 보듯이, 자존감은 ‘자기다움’에 대한 치열한 물음이자 ‘자기해체’를 무릅쓰는 용기입니다. 이 두 가지는 따로 작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다움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만이 자기해체의 용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새 로운 진보정당을 위한 지난한 진보좌파연석회의의 과정은 바로 이 ‘찾기’와 ‘만들기’의 동시적 진행과정입니다. 우리가 우주를 품고 있는 밀알의 자존감이 있다면 무엇을 주저하고 무엇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이번 임시당대의원대회의 주요 안건 가운데 하나인 사회당과의 통합문제도 그렇습니다. 긴 시간을 자본주의 극복을 위해 분투해온 사회당과의 통합은 총선에서의 유•불리를 따지는 사고로 접근해서는 안 되는 사안입니다. 그것은 정체성이 유사한 이웃 당은 소외시키면서 어제까지 한 지붕 아래 있을 수 없다던 정당과는 입에 침이 마르기도 전에 손을 잡는 정치공학을 끝내고 이제 자존감의 정치를 시작하겠다는 우리의 의지를 보여주는 실천이며, 보다 넓은 진보좌파정당 건설로 나아가는 정치조직의 자기정비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창 당을 모색하는 녹색당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유와 성장과 소비가 미덕인 시대에 이 지배적이고 주류적인 가치와 씨름해온 생태주의자들은 또 다른 시지프스들입니다. 오늘의 신자유주의 교리와 자본의 독재가 강요하는 삶이 결코 ‘올바르지도’ 않고, 앞으로 온전히 ‘가능하지도’ 않은 것이라면 자본주의 극복에 있어 좌파와 녹색은 전략적 동맹관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보 수는 물론이고 진보까지도 사로잡아온 ‘성장의 신화’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우리에게는 과감한 자기해체의 모험과 결단과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녹색과 좌파가 서로의 보완재로 보지 않고 내적 일치를 향해 나아가는 ‘가치의 연대’가 이 시대 한국의 진보좌파 앞에 놓인 가장 중차대한 숙제라고 인식된다면, 우리는 좀 더 담대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겸허하고 섬세한 선거연대를 시도하되, 일시적인 비대칭성이 주는 난관 때문에 비관하지 맙시다. 시간문제일 뿐 ‘녹색좌파’의 새로운 전망은 기어이 우리를 하나 되게 할 것입니다.
 

 
배제된 자들의 서사전략
 
불 과 얼마 전까지 평당원이었던 사람이 당대표의 역할과 업무를 파악하기에도 석 달이라는 시간은 넉넉지 못합니다. 그런 제게 총선과 대선이 있는 이 2012년의 초입은 일찍이 통과해 본 적이 없는, 캄캄한 입을 벌리고 있는 긴 터널의 입구에 서있는 것 같아 현기증이 느껴질 지경입니다.
 
금 융자본주의의 위기에다 이명박 정권의 실정까지 겹쳐 어수선한 정국에서 집권 보수세력의 재집권이 어려워지고 자유주의 야당으로 정권교체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들 이야기합니다. 야당의 총선 승리와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면 2013년 이후의 미래가 밝을 것으로 이야기하는 지식인들도 있지만, 그러나 그이들의 말처럼 그런 상황이 노동자들의 처지에, 진보정당의 미래에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요?
 
예 컨대 세계적 차원의 경제위기가 거대한 파고로 밀려올 때 수구적 보수세력인 새누리당만이 야당인 상황이 우리 사회에 유리할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람시는 파시즘을 가리켜 “사라져가는 옛것을 대체할 새로운 것의 출현이 지체되는 위기 국면에 등장하는, 다양한 병적 징후들” 가운데 하나로 규정한 바 있지요. 과거 어설픈 당근과 가혹한 채찍 사이에서 사회적 격차가 오히려 고착되었던 이른바 ‘민주정부 10년’ 동안처럼 자유주의 정권 주도의 위기관리가 한계에 부딪혔을 때 파쇼적 상황이 도래할 가능성도 있는 것이지요. 거듭 강조하지만, 진보정당은 그러한 상황에 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고 말한 이도 그람시였지요. “선장은 배가 난파되었을 때 자신의 배를 떠난 최후의 사람이 되어야 하며 다른 모든 사람들이 무사하게 된 후에만 배를 떠날 수가 있다”고 말한 이도. 기억들 하시는지요? 여러분께 드리는 첫 인사글 말미에 “두려운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의미 없는 고통”이라고 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제가 인용했던 것을. 부조리한 운명으로 고통 받고 있는 이 시대의 시지프스들을 떠올리며 그때의 그 말을 다시 반추해 봅니다. 고통과 번민에서 곧바로 어떤 의미든 찾고자 하는 것, 이것은 아마도 의미 없는 고통을 하루하루 끝도 없이 이어가야 하는 이들의 삶에 오래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던 지식인적 사고가 지닌 허영 아니었나는 생각에 얼굴이 붉어집니다. 그러면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요?
 
“눈 물은 아래로 흐르고 숟가락은 올라간다”고 했습니다. 천하를 논하는 ‘큰 정치’가 따로 있고, 삶의 고통을 다루는 ‘작은 정치’(혹은 민생 정치라 부르는 것)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큰 정치’에서 말해지는 희망을 위해 목전의 삶의 불행과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면 그것은 다만 거짓일 뿐입니다.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숟가락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아래로 흐르는 눈물을 감추어야 하는 사람들의 생존의 최전선에서, 아래로 전가되는 불행의 크기를 가늠하고 그로부터 정치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 바로 이것이 진보정치여야 한다는 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이것이 자본주의 위기의 시대에 대응하는 ‘아래로부터의 연대전략’입니다.
 
당원 동지 여러분.
 
여 러 경로로 이야기한 바 있지만, 저는 우리 당의 비례대표전략을 <배제된 자들의 서사 전략>이라 이름 붙이고 싶습니다.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억압당하고 묵살되는 것은 물론이고 대기업 노조 중심의 노동조직으로부터도 소외되거나 외면당해온 ‘배제된 노동’을 비례후보의 전면에 내세우고 이들이 만들어온 삶과 사랑과 투쟁의 서사를 무기로 이 시대의 자본권력과 지배이데올로기와 싸우는 것을 이번 총선의 중심전략으로 삼으려 합니다.

그 러나 이번 총선은 진보신당이 맞이했던 다른 어느 때보다 가혹한 조건에서 치르는 선거가 될 것입니다. 명망정치인들이 다 빠져나간 자리에 이제 무명의 척탄병들이 서 있습니다. 초라한가요? 패배가 너무 불 보듯 빤한가요? 이렇게 생각하면 어떻겠습니까? 우리 당의 지역후보가 13000명이라면? 무명의 척탄병들 옆에 13000명이 나누어 선다면? 그렇다면 이번 선거가 이 시대의 난장이들과 시지프스들이 오만한 권력과 물신을 향해 돌멩이들을 쏘아 올리는 싸움의 장, 축제의 장으로 변할 수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으시는지요?
 
여 러분이 <진보신당>입니다. 우리 자신이 지닌 가능성을 미리부터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축소시키지 말아주십시오. 그저 부조리한 운명에 순응하는 존재로 여겨지던 시지프스는 까뮈를 통해 끝없이 패배하면서도 운명에 저항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위대한 존재로 재해석되었습니다. 그가 주목했던 것은 시지프스가 떨어진 바위를 다시 밀어 올리려는 순간이고, 고뇌에 찬 얼굴로 잠시 정지한 시간입니다. 그것은 운명을 응시하는 시간이고 운명을 밀어 올림으로써 운명보다 한 뼘씩 우위에 서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알베르 까뮈로 편지를 시작했으니 그가 《시지프스의 신화》의 첫머리에 쓴 구절로 끝을 맺겠습니다.
 
오! 나의 영혼아,
불멸의 삶을 애써 바라지 말고
가능의 영역을 남김없이 다 살려고 노력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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