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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 남성의 눈길-대칭에서 비대칭으로 가는 역사

웨덜리님의 [비공식 연인들의 은밀한 사랑 -프라고나르<그네> 델리스파이스<고백>] 에 관련된 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의<그네>, 재미있는 그림이다. 박희수님의 그림 뒤에 숨겨진 이야기도 재미있다. 근데 그보다 그림 표면에 나타나 있는 ‘담론’이 더 재미있다.

 

이 그림의 소재는sexuality와 성차(sexual difference)다. 그리고 회화에서 나타나는 sexuality와 성차는 눈길로 표현된다.

 

중세이후sexuality와 성차를 소재로 하는 회화의 역사를 보면 남성의 [알]몸은 점차 사라져 결국 여성의 [알]몸만 남게 되고, 성차가 없었던 눈길이 오로지 남성의 눈길로만 남게 되는 남성과 여성간 비대칭을 이루는 눈길의 역사인 것 같다. 남성이 [알]몸으로 서술되는 경우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남성이 알몸으로 그려지는 경우는 sexuality를 욕망하는 눈길의 대상이 아니라 아무것에도 기대지 않고 홀로 우뚝 서있는 ‘남성적인 것’을 그린 것이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의(Valerius Maximus) 여러 권으로 엮어진 “기념할 만한 일들과 말들”(Factorum Dictorumque Memorabilium)이란 책을 보면 중세에서 남성과 여성이 발가벗고 함께 대중목욕탕에서 목욕하는 장면들이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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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눈길은 밖으로 향하지 않고, 또 밖에 있는 눈길이 그림 안에 있은 눈길을 마주하거나 아니면 그림 안의 눈길에 들어가 대상을 바라보는 상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림 안에 어울려 있은 남성과 여성이 서로 눈길을 주고받는 ‘대칭의 눈길’ 밖에 없다.

 

한스 복1세(der Ältere)의 그림 “로이크의 [대중]목욕탕”(Das Bad zu Leuk, 1597)에는 대칭의 구도가 흩트러져 있지만 그래도 아직 외부의 눈길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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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중세를 넘어 근대로 들어오면서 대칭의 눈길의 점차 비대칭의 눈길로 바뀐다. 이런 조짐은 루카스 크라나흐 1세(der Ältere)의 “청춘의 샘”(Jungbrummen, 1546)에서 역력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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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에서 알몸으로 목욕하는 사람들은 이제 단지 여성들일 뿐이다. 청춘의 샘에서 젊음을 회복한 여성들을 남성들이 맞이하는 장면이다. 남성과 여성이 나누던 눈길이 남성의 눈길로만 이동하고 있다.

 

이런 눈길의 비대칭화 프로세스는 골이 점점 더 깊어져서 남성은 그림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알렉상드르 카바넬의 그림 “비너스의 탄생”(1863)은 이런 과정의 한 대목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림 안에는 여성만 알몸으로 남아있고 여성은 그림 안에서 밖에서 쳐다보는 남성의 눈길에 대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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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대칭 눈길 역사의 끝에 가면 여성은 주체성, 즉 자기눈길을 완전히 상실하고 오직 사물화/타자화된 대상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1981년에 사망한 라캉이 생전에 아무도 모르게 소유했다는 구스타브 쿠베르의 그림 „세상의 기원“(1866)은 여성과 남성간 절대화된 비대칭의 눈길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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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오노레 프라나고르의 그림<그네>에 묘사되는 눈길은 대칭과 절대 비대칭 중간에 있는 것 같다. 중세 대중목욕탕에서와 같이 서로 마주하면서 눈길을 나주고 있지는 않다. 남성의 눈길은 여성의 sexuality/음부를 훔쳐보는, 여성의 몸을 장악하려는 ‚눈의 쿠데타’(coup d’oeil)이고 여성의 눈길은 이런 남성의 눈길을 즐기는 것 같다. 이 엇갈리는 눈길에 남성의 쾌감을 즐기는 주체가 여성이 될 수 있는 가능성도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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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불량거래-§3 중중부

이와 같은 일개의 독립체(Eigenschaft)가 정립됨과 동시에 {중세 독일 땅에 수많은 “Eigenschaft”가 널려있었던 것과 같이} 다수의 이런 독립체들이 정립된다. 이때 이들은 {부정 운동을 하는 감각적 확신이 meinen하는} 서로 부정하는 관계에 있다. {그러나 감각적 확신의 언사/지시행위의 결과를 보면} 이 모든 독립체들이 [아무런 접힘/주름이 없는] 보편이라는 단순성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엄밀하게 따지자면[1] {대타존재적인} 규정이[2] 하나 더 추가되어야만 {단일체를 넘어서 진정한} 독립체가 되는, {그런데 아직 즉자존재적인 규정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타자와 관계하지 않는 단일체일 뿐이지 다른 단일체와 경계를 이루는 독립체가 아닌} 이런 규정성들은[3] 각기 자기와만 관계하고[4] 서로 무관하고[5], 홀로[6] 다른 이로부터 자유롭게[7]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단순한/아무런 접힘이 없이 자기동일을 유지하는 보편성도 역시 그 안에 포함된 {즉자존재적으로만 규정된 단일체란} 규정성들과도 구별되고 그들에 얽매어 있지 않다[8]. 이 보편성은 순수한 자기자신과[만]의 관계함[9], 달리 표현하면 이와 같은 [즉자존재적으로만 규정된] 규정성들이 모두 함께 널려있는 매체다. 그래서 이런 규정성들은 아무런 접힘이 없는/단순한 통일체인 보편성 안에서 {자기한계를 모르기 때문에 오직 자기만을 이 보편성 안에서 두루 펼쳐 몽땅 자기 것으로 찬탈하는 식으로} 제각기 두루 속속들이 꽉 차있지만[10] 서로 접촉하는 법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참여하는 보편성이란 순수한 자기자신과의 관계함일 뿐이기 때문에 그 안에 서로 무관하게 각기 홀로 있기 때문이다.



[1] 원문 <eigentlich>

[2]원문<Bestimmung>. 헤겔사전, 이신철 역, 49쪽 참조

[3]원문<Bestimmtheiten>. 같은 책 같은 곳 참조

[4]원문<auf sich selbst>

[5]원문<gleichgültig gegeneinander>

[6]원문<für sich>

[7]원문<frei von der andern>

[8]원문<unterschieden und frei>

[9]원문<das reine Sichaufsichbeziehen>

[10]원문<durchdring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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