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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불량거래-§1

 

(§1)1 대상에 찰싹 붙어있는[1] 확신은 뭔가를 취하는데 있어서 그것을 참으로 취하지 못한다.[2] 왜냐하면, 그가 {망태에} 담게 되는 것은 항상[3] 보편적인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언제나 {장대 끝에 달린} <이것>을 포기하지 않고 취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지각은 자기에 대해서 존재하는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감각적 확신/마음과 달리} 지각은 [이렇게] 온통[4] 보편성의 지배를[5] 받기 때문에 지각 안에서 바로 {논리적으로??}[6] 구별되는 두 갈래의 축도[7] 역시 항상 보편적인 것이다. 즉 <나>라는 것은 항상 보편자로서의 자아이며 <나>가 마주하는 대상은 항상 보편자로서의 대상인 것이다. 지각이란 보편성의 지배를 받는다라는 원리는 {헤겔/우리가 감각적 확신을 관조하는 가운데} {스스로??} 생성되어 헤겔/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지각에 대한 헤겔/우리의 태도는 더 이상 갓 등장하는 감각적 확신에서와 다르다. 거기서 우리는 {애 달래듯} 감각적 확신의 태도를 취하고 그가 말하는 것을 곧이곧데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젠 그런 수용이[8] 아니라 [지각을 관통하는 엄연한] [자기]필연에 따른 수용이[9] 되었다. 이런 [지배로서의] 원리의 발생과 동시에 양대 축이, 감각적 확신의 등장에서는 단지 {우리가 감각적 확신을 쿡쿡 찔러서} 드러나게[10] 한 것이지만, 지각에 와서는 생성된 것으로서 {논리적으로 필연적이고 직접적인 것이 되었다}. 이 양대 축의 하나는 뭔가를 들어올려 보여주는 운동이고, 다른 하나도 역시 동일한 운동인데, 여기서는 운동이 단지[11] {아무리 들여올려 보여주고 보여주어도 아무런 접힘/굽힘/주름이 생기지 않는} 단순한 것으로서의 운동일 뿐이다. 전자가 지각함이고[12] 후자가 지각함이 마주하는[13] 것이다. 대상의 본질을 이루는 것을 염두에 두고 보면 대상은 지각함의 운동과 동일한 것이다.[14] 지각함의 운동은 [지각의 양대] 축을 전개하고 구별하는 것이고 대상은 이 [양대] 축이 하나로 묶여있는 것이다. [지각함은 모르고] 우리만 알고 있지만 본디[15] 지배하는 원리로서의 보편성이 지각에서 꼰대를 세우고 있는 것이고[16], 이 추상에 견주어 보면 지각 안에 구별되는 양대 축, 즉 지각하는 것과 지각되는 것은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다.[17] 그러나 양쪽 다 {그들은 모르고 있지만 사실 보편성을 집행하는 것으로서}[18] 실제로는 보편성, 즉 {맑스가 말한 가치와 비교되는} 본질을 지니고 있으므로 둘 다 꼰대를[19] 세우는 본질이 된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을 모르는 지각 안에서는 양대 축이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관계하기 때문에 이런 대립관계 안에서는 둘 중 하나만이 꼰대일 수밖에 없고, 꼰대와 들러리라는[20] 차이가 이쪽 저쪽으로 나뉘어 질 수밖에 없다. 이중 {변함 없는} 단일한 것으로 규정되는 쪽, 즉 대상이 꼰대가[21] 되고, 이 대상은 지각되든 안되든 이것과 무관하게 임재해 있는[22] 꼰대가 된다. 반면, 지각함은 운동으로서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내구성이 없는] 들러리가 되는 것이다.



[1]원문 <unmittelbar/직접적인>

[2]이 번역은 <정신현상학>을 구원의 역사로 이해하고자 싶어 하는 마음이 밑바닥에 깔려 있는 번역이다. 역자는 사실 <감각적 확신>을 넘기기 힘들었고 아직도 힘들다. 그래서 읽다가 내팽개쳐 버리곤 했는데. 헤겔에게 야단맞는 <감각적 확신>의 편이였기 때문에 그랬고, 26살 배기 헤겔이 횔덜린에게 헌사한 시 <엘로이시스>를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헤겔한테 개기고 개겨보았고 아직 개기고 있다. 근데 이렇게 개기는 가운데 와 닿는 것이 하나 생겼다. 정신현상학이 단지 의식이 진보하는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 확신>이 손을 뻗어 잡으려고 했던 것을 정말 갖다 주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든 것이다. 불을 못 켜서 밤이면 바느질을 못하는 순이네 엄마의 방에 갖다 주려고 장대(!) 들고 망태(!) 메고 뒷동산에 올라 달을 딴 아이들의 망태에 달이 들어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번엔 정말 달이 들어있나 끝까지 가서 확인할 작정이다. 그리고 그 아이들의 얼굴이 어떤 얼굴일지 궁금하다. 빈자리 없이 주름으로 가득 채워진 사무엘 베케트의 얼굴이겠지만 회의보다 동심이 살아있는 얼굴이었으면 한다. 구원으로서의 역사에 관해서는 진보넷 블로거 김강님의(blog.jinbonet.minjung) 글을 참조하면 좋겠다.

[3]원문 <ihre Wahrheit>

[4]원문 <überhaupt>

[5]원문 <Prinzip/원리>. <Arche>에 기대어 <지배>라고 번역했다. 

[6]원문 <unmittelbar>

[7]원문 <Moment>

[8]원문 <ein erscheinendes Aufnehmen>

[9]원문 <ein notwendiges [Aufnehmen]>

[10]원문 <an ihrer Erscheinung nur herausfallen>

[11]원문 <aber>. 제한의 <그러나>

[12]원문 <das Wahrnehmen>

[13]원문 <Gegenstand>. 기울림체의 의미를 이렇게 번역해 보았다.

[14]<Reflektion des Gegenstandes in sich>?

[15]원문 <für uns oder an sich>

[16]원문 <das Wesen>

[17]맑스의 자본론이 연상된다. 가치(Wert) 차원에서 보면 이쪽 저쪽이 교환하는 동기가 되는 사용가치와 함께 이쪽 저쪽이 비본질적인 것이다.

[18]또다시 맑스가 자본론에서 말한 교환을 참조하면 좋겠다.

[19]원문 <Wesen>

[20]원문 <des Unwesentlichen>

[21]원문 <Wesen>

[22]원문 <We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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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소제목 <사물과 불량거래>에서 <불량거래>의 원문은 <Täuschung/사기, 기만>이다. 어원이 <tauschen/교환하다>와 같다. 그래서 <tauschen/교환하다>에는 <거짓말로 속여서 받아들이게 만들다>라는 의미가 스며있다. 그래서 <불량거래>라고 번역해 보았다. 이 번역이 <지각>에서 이야기되는 것과 맞아 떨어지는지 두고 봐야겠다.텍스트로 돌아가기

정신현상학 감각적 확신 후기(Nachlese)-이삭줍기

요즘엔 곡식을 거두어들인 논밭에서 이삭 줍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낫으로 나락을 베고 보리를 베던 때에는 이삭 줍는 일이 아낙네들과 아이들의 몫이었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좀 재미있었던 것은 고구마를 캐고 난 밭을 다시 한번 샅샅이 파 헤쳐보는 일이었다. 흙에 촉촉한 고구마 큰놈이 하나 나올 때의 기쁨, 그 기쁨을 캐보지 않은 사람이야 알리 없겠지만.

 

감각적 확신을 번역하면서 많이 흘리고 온 것 같고 감춰진 것을 다 캐내지 못하고 온 것 같다. “밭에서 난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에는, 밭 구석구석까지 다 거두어들여서는 안 된다.”라는 야훼의 명령이 생각난다. 나의 무능을 야훼의 명령으로 캄푸라치하고 그냥 가고 싶은데 흘리고 온 것들에 대한 미련이 나의 발목을 붙잡고 밭으로 가게 만든다. 결국 “거두어 들인 다음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서도 안 된다.”라고 야훼의 명령을 거역하고 이삭을 줍고 있다.

 

야훼의 명령은 벌받지 않고 거역할 수 없나 보다. 알맹이 곡물은 보이지 않고 내가 흘리고 온 어설픈 것들만 보인다. 내비두고 그냥 가자. 내가 흘린 것이 알맹이라면 누군가가 거두어들이겠지. 허섭스레기라면 지나가는 바람이 치워버릴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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