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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랑스노냉 거리, 1834년 4월 15일_도미에 작


<트랑스노냉 거리, 1834년 4월 15일>1834년/석판화

 

프랑스7월혁명을 배경으로 탄생한 도미에의 <트랑스노냉 거리, 1834년 4월 15일>는 신문의 기사만을 기반으로 그려진 석판화이다. 그림의 중앙에 시선을 멈추게 되면 어른밑에 깔려 죽은건지, 군인에 의해 살해당한건지 모르겠지만 피를 흘리며 죽은 애기가 있다. 그림은 정적이지만 앞뒤의 상황을 알고나면 그림의 잔혹함에 온 신경이 쭈삣서며 눈의 동공이 커질 뿐 말로는 어떤 표현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해진다. 할말이 많음에도 오히려 할말이 생각나지 않게 되는 모순된 상황이 발생하는 거다.

 

2004년 12월. 여전히 많은 한국의 아이들이 가난 때문에 굶주리고 있다.
최저생계비로는 최저 생활이 힘든 오늘날, 빵이 커졌음에도 아직 빵의 크기를 키우자고 하는 사회에 따끔하게 충고하는 경제학자의 말을 정부나 가진자들은 귀기울여 듣기라도 할 것인가.


100만의 실업자가 양산되고 있지만 그들에게 일자리를 줄 수 있는 가능 수요는 없는건지 못 만드는건지...삼성은 이제 세계적인 기업이 되었고 휴대폰 매출실적 모토롤라를 뛰어넘고 2위를 꿰찼다. 이번 달 월급이 나올지에 급급한 샐러리맨들이 있는 반면 하반기 풍부한 인센티브를 목빠져라 기다리는 대기업 특혜자들도 있다. 알려진 사실이지만 사무직에도 빈익빈 부익부가 심각하다. 하지만 정규직이라는 것만으로도 배부른 투정일 뿐. 비온 뒤로 한껏 쌀쌀한 날씨에 아직도 높은 타워크레인에서 기본생존권을 외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있다.
가진자들의 씀씀이는 선진국 여느 부자에 못지 않다고 그러니 희망을 가져보라 큰소리로 그들만의 희망을 얘기하는 CEO. 그런 기사를 버젓이 싣고도 비정규직 노동자의 기사는 귀퉁이에 보일 듯 말 듯 싣는 우리의 언론.


볼리바리안 혁명을 담은 다큐가 주는 흥분은 아직도 유효하고 우리의 현재를 담을 그릇은 카메라가 되어야 하는건지 미디어의 역할이 진정 무엇을 얘기해야 하는 것인가를 고민하다 도미에의 그림들을 한번 더 뒤적이게 된다.
가지지 못한 이들에 대한 억압은 시대를 초월하는데...
함께 행복할 세상은 올 것인가.


 



7월혁명 이후 경제는 여전히 어려웠다.

영국 공황의 여파가 다시 프랑스를 덮쳐 구매력은 감퇴하고 생산력도 격감했다. 임금이 왕정 시대의 4분의 1정도도 안 되었다. 게다가 콜레라가 창궐하여 파리에서만 2만 2천명의 시민이 죽었다. 진보적인 세력은 이러한 불행의 이면에는 정부의 무책임이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때 바리케이드의 왕이었던 루이 필립은 왕위에 오르자 태도를 바꾸어 중산 계급의 이익을 옹호했다. 마르크스가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 1848~40>에서 말했듯이, 당시 프랑스를 지배한 것은 금융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왕좌에 앉아 의회에서 제멋대로의 법률들을 제정하였으며, 장관직에서부터 담배 판매소의 말단직까지의 모든 공직들을 배분하였다.”
루이 필립이 프롤레타리아의 선동은 엄격한 법률로 규제하면 할수록 이들은 더욱 완강하게 반항했다. 탄압적인 법률은 단지 반정부적인 행동을 자극할 뿐이었다. 왕에 대한 저항 세력은 좌익만이 아니었다. 1832년 4월, 베리 공작부인이 마르세이유에 상륙하여 루이 필립을 하야시키고 옛 부르봉가의 상속인을 왕으로 세우고자 했으나 실패했고, 그 뒤에도 그런 반란은 계속 시도되었다.
그래서 프랑스는 만성적인 반란 상태에서 해가 뜨고 졌다. 그리고 수많은 비밀결사가 불만의 불길을 붙였다. 노동자의 파업과 폭동이 이어졌다. 리용 시는 한때 노동자에 의해 지배되었으나, 2만명의 정규군에 의해 무참하게 탄압당했다. 그것이 1832년의 파리 폭동으로 이어져 위고가 <레 미제라블>에서 묘사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1834년 정부는 ‘20명 이상의 무단 집회 죄’를 20명 이하로 수정하는 형법 개악을 자행했다. 이에 따라 노동자의 단결권은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거기에 저항하는 격렬한 폭동이 리용의 공장 지대에서 터졌다. 그러나 그 동기는 정치적인 것이라기보다 경제적인 것이었다. 노동자의 임금이 자활이 불가능할 정도로까지 하락했기 때문이었다. 정부는 바로 그러한 파업을 공동 모의로 처벌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노동자들은 바리케이드를 치고 1834년 4월 9일부터 4일 동안 군대와의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리용 폭동은 곧 파리로 번졌다.
그러나 그것은 혼란에 의해 상처만을 남겼다. 반란을 주도한 자유주의 좌파는 과격 분자들을 두려워하여 돌연 태도를 바꾸고 물러섰다. 그래서 혁명이 아니라 단순한 시가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리용에서는 저항이 계속되었으나, 4월14일 바리케이드가 군대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리고 ‘트랑스노냉 거리’의 학살이 이어졌다. 2천여명의 노동자가 전국 각지에서 구속되었고, 정부는 무기 휴대 금지법을 제정하고 군비 확장을 결의했다.

 

도미에의 대작 <트랑스노냉 거리, 1834년 4월 15일>은 상상으로 그린 것이다.
그러나 트랑스노냉 거리의 학살 현장을 생생하게 증거하고 있다. 바로 폭동과 봉기 그리고 바리케이드의 다음날 새벽, 생 마르탱 노동자 거리에서 국왕 군대에 의해 잠을 자던 노동자 일가를 참살한 현장을 묘사한 것이었다. 트랑스노냉 거리의 어느 아파트 위층의 창에서 총을 맞은 국가 경비대 근위병, 국방군이 그 건물에 들어가 그곳의 주민들을 대부분 살해했다. 그렇게 여러 집에서 행해진 살인을 도미에는 하나의 장면에 응축했다.
중앙에 쓰러진 중년의 노동자는 잠옷 차림이다. 그 밑에는 아기가 죽어있다. 피의 홍수 속에 죽어 있는 아기 위에 잠옷을 입은 채 그대로 죽어있는 노동자, 그리고 오른쪽에는 뒤집혀진 의자밑에 그 아버지인 듯한 노인이, 그 반대편 왼쪽에는 노동자의 아내인 듯한 여인이 죽어있다. 밑쳐진 이불과 베개, 그리고 나동그라진 의자가 소란스러웠던 현장의 모습을 직접 전한다. 도미에의 이 극적인 묘사는 트랑스노냉 거리의 학살을 전한 기사를 읽고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은 분노로 불타오른 도미에의 상상력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이 그림은 우리가 앞서 보았던 고야의 <전쟁의 참화>를 연상케 한다. 밝은 부분에 죽어 있는 노동자를 또렷하게 그리면서, 한편으로 그 아내를 단축기법으로 어둡게 그린 바로크적인 명암대비는 매우 회화적이다. 이런 회화적 특징은 그의 석판화중에서도 매우 이례적인 것이다.


보들레르가 평했듯이 이 그림은 단순한 풍자화가 아니라 역사이고 사실이자 놀라운 현실의 재현이었다. 사람들은 이 그림 앞에 장사진을 이루었다. 그러자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한 정부는 즉시 압류 처분을 내렸지만 도미에의 저항은 더욱 강렬하고 날카로워져 수많은 캐리커쳐를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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