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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과 하루>_영원한 하루, 내일

<영원과 하루>
감독 테오 앙겔로플로스

이미지는 씨네21에서 퍼옴.

 

영원한 하루, 내일

철학적 제목에서부터 감독의 영화이력까지..어려운 영화로 생각되어 잠시 주춤하다.. 결국엔 보게 되다.
테오 앙겔로플로스 영화스타일은 영화의 내용을 이해하기가 익숙하지 않고 그래서 보기도 꺼려진다. 영화의 배경인 그리스의 역사적맥락을 이해하지 못해서인지 연극적 요소가 가미된 영화형식이 익숙하지 않은건지 잘 모르겠다. 타르코프스키와 앙겔로플로스 영화는 기피대상이었다.
최근엔 영화 취향이 많이 선회하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보려고 노력중이고 그러다보니 취향도 변하게 되나보다. 좋다. 그만큼 다양한 시각을 수용할 수 있는 정서적 여유가 가능해지고 그러다보면 세상을 포용하는 시야까지 더불어 넓어지는 기분이다. 나이드는건 이래서 좋다.
각설하고(스포일러성 짙음ㅠ_ㅠ 내용을 알아도 별 문제될만한 영화는 아닐듯하지만)...

 

 

영원한 하루는 내일이다.
하지만 그에게 내일은 없다.

고국의 시어가 그에겐 없다.
그는 외롭다.
사랑하는 이가 그리운거다.


중산층으로 평안하게 잘사는 듯한 딸, 하지만 그녀와의 대화는 마주보며 얘기하지만 서로 다른 주제를 얘기하며 어설프게 엇갈리기만 한다. 요양원에서는 자식도 알아보지 못하는 노모가 어릴적 그를 부르듯 “알렉산더~알렉산더~” 다정하기만 하시다.
그만의 상상속에서 아직도 살아숨쉬는 그의 부인. 그는 그녀가 그립다.
그녀가 원할때는 가까이에 있어주지 못하고 외국의 시어들을 찾아 떠돌기만 했었기에 더더욱 그녀가 그리운 건지도 모른다. 더 애틋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곁에 없다.


 

그러다 길거리에서 소년을 만나다.
군인들에게 모든걸 빼앗긴 알바니아 소년, 소년은 갈곳이 없고 그는 내일이면 여행을 떠나야 한다. 소년과의 여행이 시작되고 그들의 여정은 우정으로 맺어진다.
소년에겐 아이의 앳됨은 보이나 현실의 처절함과 잔혹함을 일찍 알게 된 탓인지 그의 외로움을 따뜻한 마음으로 보듬어주고 이해하는 어른스러움이 있다. 결국 그에게 고국의 시어를 찾아주는건 소년이다.

 

작은 꽃 (코르풀라무 korfulamu)
이방인 (제니티스 xenitis)
시간이 다 되었다 (아르가티니 argathini)

 

소년이 찾아준 시어다.
외국을 여행하며 시어를 찾았지만 정작 자신의 나라 언어는 찾지 못했던 노령의 시인.
그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야 살뜻이 돌보지 못한 가족의 사랑이 보이고, 조국의 시어를 찾지못한 자책감에 휩싸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가족들은 끊임없이 그를 돌봐주었고 사랑으로 조용히 지켜보았다. 청년들은 그의 시어로 한 시대를 살아갔다고 존경의 눈빛을 보낸다. 그리고 소년에게서 고국의 시어를 되찾았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버스정류장의 이름과 승객들의 행위이다.
‘고전역’에서 타는 시인(이름은 까먹었다)과의 조우, 시뻘건 깃발을 휘날리며 씩씩하게 타는 젊은 과격파 청년(그렇게 보인다..그런데 왜인지 모르지만 나중에는 잠자고 있더라), 다투는 연인, 클래식을 연주하는 악사들...
버스에서의 그들과 만남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와닿지 않았다. 현실적이지 않아서 생소했고 읽히지 않아서 어색했던….그래서 앙겔로플로스의 영화는 아직 어렵게 와닿는거..
시어를 찾는 시인에게 철학적이고 역사적 사건들을 연극적 형식으로 나열하는 것 같았지만..모 알수엄따…키노라는 잡지가 발간되었다면 그나마 도움이 되었겠지만 이런 영화를 분석하고 뜯어보기를 하는 잡지는 없는듯...쩝...

 

그에게 소년은 '작은 꽃'이 아니었을까?

작지만 커다란 사랑과 아름답게 향기를 품은 꽃이 되어준 소년때문에 그는 행복을 느끼지 않았을까? 

 

영원과 같은 하루동안의 소년과의 여정.
그는 외롭지 않았고 잃었던 고국의 시어를 찾았다.


>>사족
나의 내일은 아니지만 노년은 어떤 기분일까?

사회적 성공도 부도 인간의 외로움 앞에서는 부질없는 것.
가족보다는 가까이 숨쉬는 걸 함께 느끼는 사랑하는 이가 존재한다는 것 이상의 것은 없다모 이런건지... 어른들 말씀...효자열보다 악처하나가 낫다...모 이런건가..몰지..
결론이 이상하다 어째?



언어를 통해 세상을 보다


앙겔로풀로스 감독 자신이 자주 인용하는 말 가운데 하이데거가 했다는, 언어야말로 우리의 진짜 신분증명서라는 것이 있다. <영원과 하루>에서 그는 하이데거의 바로 그 명제를 믿는 사람, 즉 언어를 통해 집을 찾으려 하고 언어를 통해 세상으로 난 새로운 창을 열려하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 알렉산더는 19세기의 시인인 디오니소스 솔로모스가 결국 완성하지 못했던 시를 대신 완결시키려 애쓰는 인물이다. 알렉산더의 상상의 여행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곤 하는 솔로모스는 실존했던 그리스 시인으로, 그리스가 당시 발칸반도의 맹주로 군림하던 터키에 저항하던 때에 혁명시를 썼으며 그리스어의 통일에 큰 힘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솔로모스는 어려서 이탈리아에 건너가 공부했기 때문에 스물두살 때 그리스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탈리아어로 시를 쓸 정도였으나 모국어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마을을 돌아다니면 사람들로부터 예전에 듣지 못했던 단어들을 수집했다. 영화 속에서는 솔로모스를 흉내내 알렉산더가 소년으로부터 단어를 ‘사는’ 장면이 나오지만 이렇게 단어를 산다는 것은 순전히 앙겔로풀로스가 지어낸 것이다. 소년은 알렉산더에게 세개의 단어를 가져다주는데, 이 단어들은 영화의 스토리와 주제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소년이 이야기하는 첫 번째 단어인 ‘코르풀라무’(korfulamu)는 엄마 품에서 잘들 때 아이가 갖는 감정을 표현하는 말로, 사랑이나 친밀감을 의미한다. 두 번째로 알렉산더가 소년으로부터 사는 단어는 ‘제니티스’(xenitis)인데, 영혼의 상태와 관계가 있다. 이방인, 그것도 어느 곳에서나 이방인인 사람이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이다. 마지막 단어는 알렉산더와 소년이 헤어질 때 나온다. 영화의 중요한 주제와 관련되는 ‘아르가티니’(argathini)는 원래 “매우 늦은 밤에”라는 뜻으로 ‘시간이 다 되었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 세개의 단어는 알렉산더가 영화 속에서 던지는 중요한 세개의 질문들과 관련된다고 봐도 좋다. “왜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알지 못했을까?”, “왜 나는 망명의 삶을 살았을까?”, “내일은 얼마나 지속되는 걸까?” 앙겔로풀로스는 이런 질문들을 던지는 것이 <영원과 하루>라고 말한다.

 

홍성남/영화평론가


 

기사를 더 보려면~

http://www.cine21.co.kr/kisa/sec-003100100/2004/11/04111616012605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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