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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투쟁의 순간들


 

2월 28일 추모대회. 용산투쟁의 초기엔 많은 사람들이 결합했다.




경찰은 용산관련 모든 집회를 불허하고 폭력진압을 일삼았다. 사진의 눈매가 예사롭지 않은 용산경찰서 수사과장은 집회때마다 악명을 떨치다 나중에 영안실 수배자 3인의 탈출극으로 중징계를 받기도 했다.



 

촛불집회 1주년기념과 용산투쟁이 결합해 서울의 자랑거리인 하이서울페스티발 전야제를 장악했다.



투쟁이 장기화로 접어들며 점점 동력이 떨어져갔고, 경찰의 폭력은 갈수록 심해져 유가족도 고인의 영정도 안전하지 않았다.



대학생 빈활투쟁. 투쟁동력이 떨어지긴 했지만 용산현장에는 끝없이 투쟁의 발길이 이어졌다.



정의구현사제단의 추모미사는 지리멸렬한 투쟁을 이어나가는 큰 힘이 되었다.



힘든 투쟁이지만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에 적극적으로 연대했다. 사진은 “평택 쌍용차노동자들에게 물을”이란 캠페인 영상을 찍는 장면.



용산국민법정.



타결되었다지만 이 투쟁이 끝나지 않음을 강변하는 ‘용산 12월 31일’



촛불미디어센터 레아. 용산투쟁은 다양한 자원활동가들이 많았다. 특히 다양한 장르의 문화예술인들의 결합이 큰 힘이 되었고, 레아 호프는 촛불미디어센터 레아로 재개장해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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