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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하고 행동하라~ 과학기술은 투쟁을 원한다

[과학기술과 사회주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과학기술 발전은 어렵다

뉴턴, 다윈, 아인슈타인에 이어, 사람을 달에 보낸 지도 벌써 40년이 지났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아직도 세계 인구의 1/7이 만성적 영양실조로 고통을 격고 있으며, 기아로 고통 받는 사람은 60만이 넘고 있다. 식량 문제를 해결한다고 내놓은 유전자 변형작물은 오히려 농민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고 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약 420억 평(경작지의 약 54%)에서 3천 4백5십만 톤의 유전자 변형 콩(전체 곡류의 50%)을 생산하고 있다. 유전자 변형 작물의 위험성은 논외로 하더라도 여전히 3천8백만의 인구 중에서 2천만의 사람들이 최저생계 이하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6백만 명의 사람들이 가난에 의해 극단적 기아에 고통 받고 있으며, 매일 55명의 아이들, 35명의 성인과 15명의 노인들이 기아관련 원인으로 죽어가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 세계 식량 생산량은 소비량보다 1.5배나 많다

제약 산업
신종플루나 AIDS 치료제의 부족에서 보듯이, 자본주의 사회는 필요한 의약품 배분의 무능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제약 회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약을 개발 하지 않거나 비싼 가격을 요구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AIDS 환자들이 생명 유지에 필요한 퓨제온을 먹기 위해서 연간 2200만원~3000만원이 필요하다. 제약 회사는 신약을 개발에 투자된 연구비가 많고 생산과정이 매우 복잡해서 어쩔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근거들을 전혀 공개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AIDS 환자는 소비자일 뿐이다. 연구 방향도 이익이 발생하는 방향으로 왜곡시킨다. 자본가 입장에서는 환자들이 건강을 되찾는 것보다 지속적으로 약을 먹는 상태로 유지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치료제보다는 환자들이 항시 복용해야 하는 항레트로바이러스(ARV)라는 약품 연구에 치중하고 있다.

2007년에는 암분야에서 획기적인 연구 성과가 발표되었다. 지금까지 의학계에서 손상된 미토콘드리아는 회복이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는데, 디클로로아세테이트(DCA) 분자가 암 세포 증식과정에서 손상된 미토콘드리아를 회복시킨다는 획기적인 연구 결과였다. 그런데 DCA는 특허가 되어있지도 또 특허로 독점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래서 제약회사는 DCA연구를 무시하고 있다. 연구자들은 현재(2009년 8월)까지 어떤 기업으로 부터도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기타 사업들
자본주의는 전자/기계/소프트웨어 분야에서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 분야에서 발전은 그리 길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주도권이 산업자본가에서 금융자본가로 넘어 갔다는 이유도 있고, 비용 및 비효율성 또한 만만치 않게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금융자본가들 구미에 맞게 단기 이익에 집착하게 되고, 개발 보다는 시간과 비용이 적게 드는 특허권이나 M&A로 수익을 내려고 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특허나 기업비밀 보호에 더욱 열을 올리게 한다. 개별 기업들은 이미 개발된 기술이 있고, 쉽게 구현할 수 있어도 다시 엄청난 연구 자금을 투입해서 기존 특허를 회피하는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또 ‘기업 비밀’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기술을 개발한 노동자는 물론이고 전체 노동자를 산업스파이로 간주하면서,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각 노동자들의 컴퓨터 마다 보안프로그램이 깔리고, CCTV나 RFID, 엑티브 벳지 등 이중 삼중으로 감시 기술이 적용되고 있다. 심지어 출근 퇴근시 마치 비행기 탑승장과 같은 x-ray 투신기를 통과하기도 한다. 그것도 모자로 같은 업종끼리 이직을 금하는 법까지 만들어 놓았다

지금까지는 자본주의 사회가 눈부신 과학기술의 성과를 이루어 냈을 지도 모른다.(물론 그 성과를 논할 때 환경문제까지 포함해야한다) 그렇지만 현재는 중복투자가 증가하고 노동자 통재하기 위한 비용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그들의 비용에는 경쟁에서 밀려 실업자, 비정규직으로 전락한 노동자들의 기회비용과 그동안 노동자들이 받아온 각종 교육과 생활비는 물론이고 경쟁에서 패한 기업들의 비용들은 빠져있다. 아무튼 점점 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과학기술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리눅스 공동체를 창시한 스톨만은 특허를 피해가며 개발하는 엔지니어를 지뢰밭을 통과하는 일반인으로 묘사하며 기술개발 시 답답함을 표현한 바 있다. 과학기술은 진보를 원한다.

상상하라~
과학기술은 진보를 원한다
해결책을 상상하기란 그리 어렵지가 않다. 전체 노동자민중의 협업체제의 부활이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과학기술의 발전은 결과물을 서로 공유하고, ‘동료심사’를 통해 검증하는 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 마이크로 소프트를 공포에 떨게 한 리눅스 공동체 역시 좋은 사례를 제공한다. 지역과 시간차에 대한 걸림돌은 이미 정보통신기술로써 사라져 버렸다. 혹자는 무임승차와 보상(동기부여) 문제(공유지의 비극)를 제기할 지도 모른다. 아직도 특허 독점과 경쟁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에 여전히 효율적이라 주장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시각은 모든 문제의 해결책을 “분배”로만 보는 좁은 시각에서 비롯된다.

분배의 문제만 보면 어떻게 또 무엇을 생산할 것인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생산된 것을 어떻게 나눌지 만을 생각한다. 여기에다 개별 민족(국가), 개별 기업 혹은 개개인을 파편화시켜 놓으면, 그들이 볼 수 있는 것은 한정된 파이와 이 파이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만이 보인다. 눈앞에는 ‘야만’만이 존재한다.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도 정규직과 정규직, 정규직과 비정규직(내국인과 외국인), 여성과 남성, 모두 투쟁의 대상으로 보인다. 경찰과 군대가 필요하고 국가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무임승차하는 자는 더 꼴 보기 싫어진다. 해결책은 공유지를 사유화하고 무임승차를 법적, 물리적으로 차단하고, 전체 파이를 키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노동자들에게는 자본가들 혹은 공장 관료들(혹은 국가 관료들)의 지시에 따라 열심히 일만하는 것이 유일한 대안일 뿐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노동자들이 무엇을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를 참여하고 결정할 수 있다면 보상 문제와 관료주의 문제는 논의의 대상이지 내재된 문제가 아니게 된다. 또 동기 부여는 보상으로만 해결되지 않는다. 교환을 목적으로 생산하는 사회가 아닌, “필요에 의한 생산”이 주가 되는 사회에서는 “필요” 충족, 그 자체로서 훌륭한 동기가 된다. 물론 개인이 필요한 것을 각자 생산하자는 것은 아니다. 이때 개인과 전체(집단)간의 문제가 발생 수 있는데, 이때 민주적 논의과정은 개인과 집단을 변증법적으로 묶어줄 수 있을 것이다.

공유지는 무조건 황폐해 진다는 ‘공유지의 비극’의 문제는 사실 조작된 것이다. 완전히 격리된 ‘이기적인’ 개인들에게 공유지를 맡긴다면 공유지의 비극이 있을 것이지만, 공동으로 참여하고 계획하는 그런 공유지라면 공유지의 비극이 생길 여지가 없다. 사실 공유지의 문제는 자본주의사회에서 무임승차를 일삼는 부동산 부자들과 금융 자본가, 더 나아가 자본가 전체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일 뿐이다.

이제 상상하자. 그리고 행동하자. 지금! 우리들이 상상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공장과 연구소에서 생산의 계획단계부터 참여하는 민주화 투쟁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굶어 죽지 않을 권리가 있는 사회(사회적 임금)”를 위한 투쟁 역시 강조하고 싶다. 이는 공유지를 더욱 살찌우는 원천이 될 것이다.
 

김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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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에서 주인을 반역하는 골렘 찾기

[과학기술과 사회주의]

“억압을 정당화하는 모든 과학 이론은 잘못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지구중심설
2000년 전 사람들에게 평평한 바다와 땅에 살면서 지구가 둥글다고 생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뛰어난 수학자이자 종교 교주이기도 한 피타고라스는 물체의 가장 완전한 형태를 ‘구’라고 믿었기 때문에, 지구와 모든 천체가 둥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주장은 200년 후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증명되었다. 그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지구 외부로 나갈 필요까지 없었다. 수평선을 넘어 배가 돛대부터 보인다는 점, 북극성 고도가 지역마다 차이가 난다는 점, 그리고 월식 때 달에 비친 둥근 지구 그림자는 좋은 자료가 되었다. 그는 하지 때 두 도시 사이에 비친 태양의 그림자 길이로 지구 반경까지 계산했는데 이 값은 요즘 계산한 값에 비해 오차가 15% 정도 밖에 나지 않는다. (당시 한국은 청동기 시대였다).
물론 그의 우주론은 당시 시대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인간은 존엄한 존재이기에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되며, 달 위 하늘나라는 영원하며 완벽한 아름다운 신의 영역이었다. 당시에도 아리스타르코스라는 천문학자는 태양중심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구 중심설은 기원후 2세기, 위대한 수학자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수학적 토대를 마련하면서 더욱 견고한 이론으로 정립되었다. 지구중심설은 ‘과학과 수학’에 힘입어 2000년이나 지속되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전환
14-15세기부터 유럽은 봉건적 착취로 인해 농민의 봉기가 만연했고, 역병까지 겹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지배세력은 농민층에 대한 수탈을 더욱 강화했고, 경제 위기는 심화되었다. 이에 일부 귀족들은 생산자의 잉여를 직접 빼앗는 이전의 방식대신 해외 시장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은 해상무역을 원활하게 진행하기에 너무나 부정확했다.
16세기, 코페르니쿠스는 태양과 지구의 위치를 바꿈으로써(이것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부른다) 프톨레마이오스의 복잡한 수식을 간단하면서도 정확한 수식으로 바꿀 수 있었다. 평생을 로마 교황청의 사제로 살다간 코페르니쿠스는 부활절이나 성모승천절 등과 같은 교회 제례 날짜를 정확하게 맞추기 위해 연구 했다. 그러나 그 연구는 귀족들이 더욱 필요했고, 그들의 이익에 잘 복무했다.
코페르니쿠스도 천체 운동이 원이어야 한다는 옛 그리스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못했다. 17세기 케플러는 티코 브라헤의 방대한 측정 결과를 바탕으로 원운동을 타원으로 바꾸었고, 질서 정연한 3가지 법칙을 이끌어 내었다. 뒤이은 뉴턴의 등장으로 2000년간 이어온 아리스토텔레스 우주론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뉴턴과학의 최대 수혜자-자본가계급
1664년, 뉴턴이 가장 몰두했던 연구는 달이나 행성을 원 또는 타원궤도로 움직이게 하는 힘이 무엇인가라는 것이었다. 뉴턴은 달의 운동을 지상의 높은 산에서 수평으로 발사한 포탄의 운동에 비유했다. 포탄을 수평으로 발사하면 포물선을 그리면서 땅에 떨어진다. 더 큰 속력으로 포탄을 발사한다면 곡선은 완만해 지면서 더 먼 거리에 떨어질 것이고, 만약 충분히 큰 속력으로 포탄을 발사하면 지구 위를 도는 달과 같이 무한히 지구 위를 돌게 될 것이다. 결국 뉴턴은 이러한 생각을 확장해서 사과를 떨어지게 하는 원리와 달(지구)이(가) 지구(태양) 주위를 도는 원리가 다르지 않다는 사실(만류인력)을 발견했다.
당시는 상업 자본과 제조업이 발달하면서 해상 수송 증가했다. 뉴턴이전에는 먼 바다에서 배의 위치를 확인할 수 없었기에 연안을 따라서 운행하였다. 뉴턴의 성과에 가장 많은 혜택을 받은 사람은 자본가 계급이었다. 상업자본은 배의 속도의 증가, 적재능력 및 항해능력 그리고 운하와 수문의 건설의 문제를, 군수자본은 화기의 최소중량, 안정성 그리고 탄환궤도에 관한 기술적 문제, 광산 자본은 광석인양, 갱도의 환기, 배수 및 펌프, 송풍 그리고 광석선별에 관한 기술적 문제를 뉴턴의 이론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뉴턴의 이론으로 지구와 우주에서 신이 개입할 틈이 없어져 버렸다. 그러나 독실한 신자인 뉴턴은 달이 지구를 돌게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처음에는 에너지(최초 충격)를 줘야 하는데, 이때 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아무튼 뉴턴이후 신은 모든 민중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부지런한 신’에서 최초 충격만 주는 ‘게으른 신’으로 바뀌었다.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과학에서 신이 빠지면서 ‘감정(성)’도 빠져 버린 것이다.
감정(성)이 빠져 버린 과학의 결과가 가장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은 바로 1926년 미국에서 발생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우생학을 기초로 단종 법안이 제정되었는데, 이는 정신박약아, 불구자, 유전적 질병을 가진 사람들에게 강제 불임수술을 시행하는 법이었다. 이 법이 시행되는 동안(1926-1935) 캘리포니아 주에서만 유전병, 신체부자유인, 정신박약아들 9931명을 강제로 단종 시켰다. 또 1941년 원자폭탄 개발을 목적으로 시작한 맨해튼 프로젝트로 자본주의 전쟁은 종식되었지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어 60만 명이 희생되었다.
이렇듯 과학기술도 사회관계가 깊숙이 관여하고 있고, 과학자 자신도 그 관계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말하자만 현대 과학이론도 지식 성장의 역사에서 한 단계로 결코 완벽하지 않으며, 동시에 서구 자본가 계급에 속박된 창조물인 것이다. 자본가는 과학 기술이 그들의 이익과 권력 추구에 필요한지를 묻고, 지금까지 발전된 과학 기술을 적절하게 활용하고, 필요한 것을 요청하기도 한다. 때로는 그들의 사상에 순응할 수 있는 적절한 이데올로기도 찾아낸다.

과학기술에서 골렘 찾기
지금까지만 보더라도 혁명을 생각하는 사회주의자들이 과학(기술)에 대한 프로그램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우선 자본주의 하에서 과학(기술)이 이데올로기적, 제도적 속박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밝혀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여기에 과학적 ‘이성’에 감정(성)을 종합한다면 더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좌파 과학자 리차드레빈스는 그 구별법으로 다음과 같은 간단한 작업가설(역주- 여러 가지 얻은 실험결과를 기초로 하여 다음의 실험계획을 세우기 위한 잠정적인 가설)을 제안하고 있다. “억압에 관대하고, 정당화하며 그 억압을 증진시키는 모든 과학 이론은 잘못되었다”
그리고 과학기술에는 영원한 ‘객관적’ 법칙은 없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뉴턴의 법칙도 엄밀하게 말하면 인간적인 개념 즉 역사적으로 한계가 있으며, 현재까지의 구체적인 결과들을 종합해서 일반적인 개념으로 추상화한 경향성일 뿐이라는 것이다. 더 확장해서 사회와 자연, 사람들의 사고방식 모두에 적용된다는 변증법에도 “객관적”인 법칙은 없으며, 단지 대립물의 상호 침투에서 발생되는 일반적인 경향성(잠재성)들을 단순화(추상화) 한 것을 “법칙”으로 부르는 것이다. 역시 영원불멸의 ‘과학적’ 사회주의는 존재하지 않는 관념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과학기술에서 괴물을 찾아야 한다. 맑스는 과학의 기원에 자본주의 사회 관계, 특히 노동과정이 깊숙이 관여해 있음을 인정했지만, 과학 기술은 이들 관계의 발현, 그 이상일 수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자본이 생산 과정 내에 과학 기술적 진보를 도입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괴물 골렘(GOLEM)을 창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골렘은 특정한 상황에서 주인을 공격할 수 있는 괴물이다. 주인이란 자본가일 수도 있고 인간 전체일 수도 있다. 코페르니쿠스의 과학과 뉴턴의 과학은 중세적 귀족들을 공격하는 괴물 골렘이겠지만 자본가들에게는 수호신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자본주의 속에서 나왔지만 자본가들에게 괴물 골렘이 되는(되게 하는) 과학기술은 존재할 것이다.
 

김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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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 산티아고 아이들


고통받으며 투쟁하고 사랑하며 노래하는 것이 내 몫이었다.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아픔을 세상에 나눠주는 것이 내 몫이었다. 빵도 맛보고 피도 맛보았다. 시인이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눈물에서 입맞춤에 이르기까지, 고독에서 민중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이 내 시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 나는 시를 위해 살아왔고, 시는 내 투쟁의 밑거름 이었다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 본문 중에서) - 파블로 네루다
칠레 산티아고 공원에서 만난 아이들입니다. 노래 봉사를 하고 다니는 듯 했어요 노래를 얼마나 예쁘게 잘 하던지 하늘에서 내려온 아이들 같았지요 그저 조용히 공원를 돌며 사람들앞에서서 밝은 목소리로 노래를 하고 사탕도 나눠주고......,  그리고 다음날 시인 파블로 네루다를 만나러 갔습니다.

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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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마음을 좋아하는 글로리아


 

“2년 전에는 후원의 밤을 했습니다. 작년부터 회원의 밤을 합니다. 후원의 밤을 기대하다가 후원이 끊기면 우리 살 길이 막막하지만, 회원의 밤은 누군가의 도움이 아니라 우리가 살길을 찾아 우리 회원들이 모여 함께 힘을 모으는 것입니다”
10월 13일 오산이주노동자센터 회원의 밤에서 장창원 목사가 한 인사말이다. TV에도 거리에도 기부를 선동해대는 계절에, 거기다 정부는 기부가 빈부격차를 해소할 대안이라 사기치는 시대에 일침을 놓는 속시원한 이야기다. 글로리아씨도 이런 마음으로 오산이주노동자센터에 자원 봉사를 하고 있다. 뭐 대충 넘어가도 되지만 계속 ‘봉사’란 말이 나와 넌지시 이런 이야기를 던졌다.
“내 생각에는요, 돈있고 힘있는 사람들이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게 착한 일을 하는 척 보여주는 것이 ‘봉사’인 거 같아요. 우리는 진짜로 서로 돕자고 하는 일이니까 ‘봉사’ 보다는 ‘활동’이란 말이 좋은 거 같은데...”
“아니에요, 난 봉사하는 거에요. 활동을 하면 페이를 받아야 되는데, 난 어려워서 못해요”
“아, 그런 뜻이군요. 하하하”
대화가 이런 식으로 깔끔하지 않았다. 저 대화는 요점정리라 보면 되겠고, 실제로는 서너배 더 길었다. 어떤 부분에서는 요점 정리를 포기해야 할 정도였다. 뒤에 인용하는 대화는 대부분 요점정리로 읽으면 되겠다. 어쨌든 30여분의 대화 뒤에 잠시 쉬자고 말했다.
“내가 글로리아씨 이야기를 알아듣기 힘들어서 미안해요”
“왜 힘들어요?”
“머리가 나빠서겠죠”
“하하 한국 남자들 머리 나쁜 거 맞아요”
“푸하하하, 맞아요, 한국 남자들 머리 나빠요”
이 대목은 그대로 옮긴 것이다. 그러니까 짧고 쉬운 대화는 꽤 잘 통했다.

한국의 느낌
글로리아씨는 필리핀에서 교회를 통해 남편과 만났다. 결혼 과정이 무척 어려웠던 모양이다. 남편의 직장에서 가능한 휴가 기간과 글로리아씨의 사정이 잘 안 맞았는데, 거기다 관료적인 사람들을 여러 차례 거쳐서 남편과 일정을 조율한 듯 싶다. 자세히 알 순 없지만 우역곡절 끝에 1996년도에 필리핀에서 결혼을 하고 한국에 왔다.
한국의 가을이 참 좋았다. 느낌이 너무 복잡했지만, 그래도 뭐가 좋은지 좋았고, 조용하고 멋졌다고 회상한다. 처음에 힘들었던 것은 음식이었다. 한국 음식에는 비린내가 심해서 시어머니가 맛난 음식을 잔뜩 해 놓아도 잘 안 먹었다. 지금은 한국 음식을 너무 좋아한다. 필리핀 음식은 너무 달단다. 아직 음식을 잘 못해서 남편에게 부끄럽다는데, 닭도리탕, 닭조림, 김치찌개, 된장찌개, 콩나물국, 갈비찜, 나물볶음 등을 할 줄 알고, 나물무침, 야식, 떡이 너무너무 어렵다.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과일샐러드다.
“어떤 과일샐러드에요? 드레싱은?”
“생선이나 오징어 넣어서 이것 저것 야채 넣고 통깨 뿌려 초고추장으로 버무린거요”
“하하 나도 그거 아주 좋아해요. 근데 그건 회무침인데”
한국 음식 특히 회무침을 좋아하는 글로리아씨는 필리핀 음식 중에는 5월에 나는 과일들이 너무 그립다. 필리핀에서는 과일을 사먹기 보다는 나무에 올라가서 따서 바로 먹는다고 한다. 싱싱함이란 표현은 없었지만, 말이 잘 안통해서 그랬는지, 글로리아씨 표정과 말투에서 그 과일들의 싱싱함에 입맛을 다시는 듯 했다. 과일 따다가 종종 다치는 사람도 있단다. 한국에선 돈이 들고 필리핀에선 용기가 필요한 것인가?
“아, 한국에서 과일 따먹다가 경찰에 잡혀가는 경우 있으니까 조심하셔야 돼요”
“아, 그건 알아요, 전에 남편이 아들에게 남의 과일 따먹으면 안된다고 가르쳐 줬어요”
그 외에 한국에 특별히 인상 깊은 것은 결혼식의 예쁜 신부란다. 글로리아씨는 비싸고 화려한 치장에 친구들 다 모인 결혼식이 너무 보기 좋다며 한마디 덧붙인다.
“한국엔 공주들이 많아요. 왕자들이 많아요. 하하”
글로리아씨는 13년간 여전히 한국에 적응 중이다.

슬픔과 위기
2005년에 아주 슬픈 일을 겪었다. 첫 아들이 강에 빠져 죽었다. 많은 이주여성들이 겪는 문제라는데, 엄마와 아기 사이에 이야기가 잘 안 통하는 문제가 있었다. 그 때문에 이 슬픈 일에 크게 자책했던 모양이다. 남편과도 많이 힘들었다. 두 사람이 싸우고 남편이 나가는 일도 있었다. 지금은 글로리아씨가 더 말이 많고 목소리가 커서 그럴 일은 없다.
그리고 둘째 아들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한국말 공부가 가장 크다. 첫 아들을 떠나 보내기 전보다 훨씬 열심히 공부했다. 그런데 역사 공부는 정말 싫다. 왜 그러냐니까, 필리핀의 역사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고통스러웠던 슬픈 이야기라서 싫단다. 한국도 그건 마찬가지라서 역사 공부가 싫다. 대화 중에 역사 뿐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어렵고 생각하기 싫다는 이유로 다른 화제로 돌리곤 했다.
오산이주노동자센터에 나오며 다른 이주민들과 만나며 글씨와 말이 따라따로라서 너무 어렵고 힘들다고 한다. 이럴 때 나라마다 친절한 사람이 있어야 서로 대화가 가능해진다며, 그 친절한 사람의 마음을 ‘넓은 마음’이라 표현했다. ‘넓은 마음’은 글로리아씨가 어떤 어려움을 푸는 가장 중요한 열쇠 같았다.
남편과 필리핀 부모님과 관계가 걱정인데, 말이 안 통하니 서로 연락도 안하고 사랑을 전하지 않아 글로리아씨 가슴이 몹시 아프다. 한국 사람들이 이해하는 마음으로 조금만 더 사랑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 마음도 ‘넓은 마음’이라 그랬다. 남편이 조금 더 넓은 마음으로 필리핀 부모님께 사랑을 전하길 바란다.

12월 13일 오산이주노동자센터 회원의 밤. 지역아동센터 다솜공부방 아이들의 춤공연에 사진을 찍으러 무대 앞으로 모인 엄마들. 오른쪽 끝이 글로리아



시선에 대한 의식
글로리아씨가 가족과 오산이주노동자센터 말고는 대화 주제를 넓히지 않아 자세히 이야기를 듣진 못했다. 어렵게 어렵게 물어, 길가는 모르는 사람들이 글로리아씨를 보는 시선이 어떤지에 대해, 명료한 답이 나왔다. “싫어요” 일종의 유도질문이었던 걸 인정하지만, 그 대답은 강하게 남는다.
다문화 가정을 둘러싼 사회적 문제는 많다고 하면서 그 예로 술문화 하나만 들었다. 어쨌든 글로리아씨는 이런 문제를 빨리빨리 해결하도록 많은 교육 프로그램들이 갖춰지길 바라고 있다. 필리핀에서는 사소한 교육 프로그램이라도 모두 유료인데, 한국엔 무료 프로그램이 많다는 말도 했는데, 이 대목에서 무료 프로그램에 적극성을 띠는 자세는 살짝 웃게 만드는 꽤 익숙한 모습이다. 글로리아씨가 가끔 구분하기도 하지만, 분명히 자기도 한국 사람이라고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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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밟힌 꿈과 희망, 다국적 밴드 스탑크랙다운


연영석의 노래 코리안드림을 듣노라면, 내가 제국의 시민이 된 느낌이 든다. 부끄러워 어디론가 숨고 싶다. 한번은 이런 생각을 했다. 스탑크랙다운 밴드가 이 노래를 부른다면, 부끄러움 보다는 심각한 고통에 빠지지 않을까? 이 노래와 가사가 비슷한 스탑크랙다운 밴드의 노래가 있다.
오늘은 나의 월급날 가슴이 두근두근 합니다 한참동안 받지 못했던 월급을 돌려준데요 나의 소중한 가족들 사랑하는 부모님 이제는 나의 손으로 행복하게 해줄게요 오 사장님 안녕하세요 오 사모님 내 월급을 주세요 나의 꿈과 희망이 담긴 조그맣고 소중한 내 월급 얼마 전 하얀 봉투 들고 퇴근했던 동료들 내 어깨를 두드리며 걱정 말라고 말하지 자정 시간이 넘어야 나의 일이 끝나네 봉투 없는 내 월급 오늘도 보이지 않네 나에겐 좋은 날이 언제 올는지 오 사장님 이러지 마세요 그 동안 밀린 내 월급을 주세요 날 욕 한건 참을 수 있어요 내 월급만은 돌려주세요 돌려줘.
이 노래 월급날은 첫 가사처럼 가슴이 두근두근 경쾌한 노래다. 그러나 뒤의 가사는 납득하기 힘든 현실의 고통이지만 여전히 경쾌하게 이어진다. 찌릿하다. 스탑크랙다운의 보컬 미누는 18년 동안 한국에 살았지만, 그의 억양에는 어색한 구석이 남아있다. 모르고 들어도 이 노래는 이주민이 부른 노래란 걸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중간에 사장님 사모님께 간청하는 부분이 자존심 상한다기 보다는 왠지 이해가 된다. 그래서 슬프다.
연영석의 코리안드림은 이주노동자의 마음을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노래다. 그래서 무척 강하게 절규하는 노래다. 스탑크랙다운의 월급날은 이주노동자의 마음이 심하게 다치기 전, 그러니까 꿈과 희망이 심하게 짓밟히기 전에, 마지막 남은 꿈과 희망에 기대를 거는 착하면서도 불안한 노래다. 이들이 꿈과 희망을 놓치 않으려 하지만, 그 불안함은 이미 오래 전에 실현되었고, ‘친구여 잘 가시오’란 노래는 억울하게 죽은 이주노동자 동지들의 명복을 빌고 있다. 꿈과 희망을 가진 이주노동자는 결국 절망하게 되고, 쫓겨나거나 죽임을 당한다. 그 악순환의 과정이 모두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스탑크랙다운의 음악이 바로 그렇게 돌아가는 이주노동자 일상의 노래들이다. 
보컬 미누가 지난 10월 8일 아침 출근길에 출입국관리소에 표적단속되었고, 얼마 뒤 강제추방 당했다. 미누는 이주민과 한국인들이 서로 잘 소통하길 바라는 마음에 노래를 했고, 영상활동을 했다. 그의 꿈과 희망은 이주민과 한국인들의 평화로운 소통이었다. 그러나 꿈과 희망은 여지없이 짓밟히고 말았다. 그런 나쁜 일이 벌어지는 것을 누구나 경계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런 나쁜 일은 벌어질 것 또한 모르지 않았다. 역시 한국은 그들의 꿈과 희망을 짓밟았다. 그래도 스탑크랙다운은 6주년을 맞았고, 미누는 밝고 희망찬 축하메세지를 멀리서 보내오기도 했다. 그들은 이미 나쁜 일이 벌어질 것을 알았던 만큼, 그 뒤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가난이 싫어서 고향을 등지고 나홀로 돈벌러 나왔어 돈 많이 벌어서 가족을 돌보고 내 꿈도 돌보고 싶었지 때리지 마세요 욕하지 마세요 내돈을 돌려 주세요 내몸이 아파 머리가 아파 여기서 도망치고파 차가운 시선 난 그냥 일하지 난 그냥 일하고 싶을 뿐 백인도 아냐 흑인도 아냐 난 근냥 일하는 사람 나 온지 10년 내 몸이 아파 병들어 버린 몸뚱이 그래도 또다시 더럽고 힘든 일 내일은 불법체류자 코리안 코리안 드림 코리안 코리안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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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하게 웃는 영화, 로니를 찾아서

<한국체육관 개관 10주년 기념 국가대표 초청 시범대회>라 쓴 현수막을 다는 인부에게 김관장은 “오른쪽 오른쪽 아 거 오른쪽도 몰라요?” 그런다. 김관장 옆의 사범 하는 말, “저기서 보면 저기가 오른쪽 맞지. 자존심은 강해서 빡빡 우겨요 빡빡” 김관장은 자존심 강한 남자다. 거기다 한국체육관이란 태권도장 관장이다. 그래도 사범이 알로 본다. 그런 남자다보니, “외국놈들 땜에 뒤숭숭하니 소주나 한잔하자”는 짱께 사장 말에 꾀여 얼떨결에 자율방범대 대장 완장을 찬다. 별로 할일은 없고 짱깨 사장과 오락실 사장이랑 소주나 한잔 하다가 별거 아닌 술자리 시비에 껴들어 태권도 관장 가오 상하게 눈탱이 밤탱이 된다. 그리하여 잠자리 라이방을 끼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노란 완장에 빨간 경광등까지 들고 보니 가오 제대로 나왔다. 가오부린 김에 이주민 노점 한번 깨부숴 주고, 몸 좀 풀었다고 노래방에서 도우미랑 신나게 논다. 거기서 지역유지가 시범대회 잘 하라며 봉투를 찔러주는데, 이거 작은 돈 아니다. 오랜만에 마누라에게 큰 소리도 친다.
드디어 시범대회 날. 아이들 시연, 송판 격파, 대리석 격파, 호신술 시연까지 다 마친 김관장 열화와 같은 박수에 마무리 인사하는데, 느닷없이 “저기요, 잠깐만요”하며 이주민이 결투 신청을 한다. 전에 돈 찔러 준 동네 유지가 “김관장 한번 해봐. 여기가 어디라고 뛰어들어 겁도 없이” 하며 응원하고, 김관장 “그럼 좋습니다. 다쳐도 책임지지 않습니다”하고 결투를 받아들인다. 동네 유지, “거 김관장 쇼를 알아 쇼를. 저렇게까지 철저하게 준비하고 말야. 으하하하” 김관장 멋진 발차기로 공중을 날았는데, 로니란 이주민 주먹에 맞고 뚝 떨어진다. 오 마이 갓. 다시 눈탱이 밤탱이 된 것이다.
자존심 강한 태권도 관장 김관장 3일간 이불 속에 있다가, 로니를 찾아 나선다. 짱깨집 갔더니, “그냥 조용히 술이나 한잔하고 가소” 소리 듣고, 오락실 갔더니 동전 주며, “오락이나 하지” 소리 듣는다. 자존심 강하던 김관장 동네 천덕꾸러기 신세됐다. 마누라 다시 일 나가고, 놀이방 가서 딸 찾아오는데,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래도 로니를 포기하지 않고 사립탐정 흉내 내다가 “로니 항상 웃고 참 착한 사람인데 요즘 안보여 걱정”이란 소리를 듣고 똥씹은 표정이다. 하여간 어렵게 잡은 단서를 쫓다가 로니와 함께 왔던 뚜힌을 만난다. 불쌍한 뚜힌 열나게 터졌다. 그러나 뚜힌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방글라데시 사람이다. 엄청 터지고도 김관장한테 앵긴다. 거처가 불분명한 뚜힌은 김관장 체육관에 얹혀 살겠다는 속셈이었다. 김관장 이새끼 저새끼 하며 아무리 때리고 협박해도 뚜힌 굴하지 않고 앵긴다. 뚜힌도 “야 새끼야 너도 호랑이띠라매? 나도 호랑이띠야” 하며 맞먹는다. 김관장이 확인해 보니 자기는 74 호랑이, 뚜힌은 86 호랑이다. 뻔뻔한 뚜힌 “그래서 뭐?” 그래서 이새끼 저새끼하는 친구가 되고 거나하게 취해 방글라데시 식당에 간다. 영화에서 좋은 일 있으면 나쁜 일 따른다고. 예전에 잡자리 라이방끼고 때린 이주민 노점상 거기서 만난 것이다. 한국체육관 김관장 또 작살난다. 
이제 로니는 때려치고 그날 그 빡빡머리 추적에 나서는 김관장. 한번 해 봤다고 탐정질 이제 도가 텄다. 빡빡머리 미행하다 노래방 들어간 김에 출입국관리소에 꼰지른다. 신고전화하는 중에 어마 자기 띠동갑 친구 뚜힌이 들어가는 것을 못 본다. 아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뚜힌 2층에서 뛰어 다리 부러지고, 끝내 강제출국. 
원생 다 떨어진 한국체육관 정리한 김관장, 화사하게 하얀 남방에 청바지 입고 방글라데시 오지를 탐험하다 어느 작은 농장 허름한 건물 앞에 선다. 어두운 실내에서 문이 열리고 역광 속에서 환하게 웃는 김관장. 잘생긴 배우 유준상이 영화 내내 악전고투하며 똥씹은 표정이었는데, 이 마지막 장면에서 정말 해맑은 웃음을 보여준다. 오래오래 남는 장면이다. 그렇게 따라 웃었다.
이주민을 보는 정주민의 고까운 시선을 참 세세하게 표현한 영화다. 난 의식적으로 다른 문화에 호의의 웃음을 보이려 노력했다. 그러나 유준상의 그런 웃음은 아니었다. 그래도 어떻게 웃으면 그렇게 환해지는지 대충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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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국회를 닫아라

 

[논평]

한나라당이 국회 상임위원장을 다수당에서 모두 맡도록 하는 국회법 개정안을 이달 중에 발의키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한나라당 국회선진화특별위원회에서 연구하게 될 것이라고 하니 여하튼 ‘선진화’라는 이름으로 역사를 뒤로 돌리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지금 MB정권은 어찌됐든 지난 20년간 진전되어왔던 정치적 민주화를 후퇴시키면서 법위에 군림하는 권력을 만들려하고 있다. 지난 상반기에는 검찰을 동원해 언론을 장악했고 국회는 다수당의 횡포 앞에 무기력해졌고 민주주의는 권력을 가진 자의 소유물로 전락해버렸다.
최근 철도파업은 어떤가. 법이 정한대로 합법파업을 해도 불법파업으로 규정되는 것은 정권의 마음이다.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사람들의 권위 따윈 전혀 필요가 없다. 공무원노조 역시 마찬가지다. 기존 법을 바꿔서라도 공무원노조활동을 허용치 않겠다는 발상은 바로 법은 바로 권력의 가진 자에 의해 마음대로 바뀐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러다보니 한 사회에서 법이 갖는 권위는 이제 별로 없어 보인다. 정권이 말하는 법과 원칙은 구성원들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범이라고 생각하기는커녕 이명박정권의 권력남용쯤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 현 실태다.
상황이 이런데도 한나라당은 이제 국회를 무용지물로 만들려는 법을 상정한다고 하니 무덤을 스스로 파고 있는 꼴이다. 가뜩이나 일반 서민들은 국회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지난 2008년 촛불은 ‘위임정치’, ‘대리민주주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 아니었던가. 이후에도 국회는 MB정권의 반민중적 독주를 막지 못했고 반대로 정권의 거수기로 전락해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여기다 다수당이 상임위원장을 독식하겠다고 하니 이쯤 되면 국회 무용론이 급격하게 확산될 것이다.
차라리 국회를 닫아라. 그리고 국회 내 정치를 넘어서 MB정권과 노동자민중 사이의 정면대결을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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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치기 소년들의 동원령

[김영수의 세상뒤집기]

사람들은 대부분 거짓말을 싫어하면서도 한다. 부모들은 자식들에겐 거짓말이야말로 가장 큰 잘못이라고 가르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거짓말에 익숙하다. 가끔은 전체를 위해 ‘선한’ 거짓말을 하는데 그게 무슨 대수냐고 말한다. 특히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더욱 그러하다. 아이들은 기성세대들의 크고 작은 거짓말에 불쌍하게 목숨을 잃는 양의 신세로 전락한다. 시험 삼아 거짓말을 했다가 정작 늑대가 왔을 때는 사람들을 동원하지 못해 양들을 잃어버리고 쫓겨나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살아야만 했던 양치기 소년. 후보 시절에 일제고사를 거부하고 학교의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목소리 높여 외치던 소위 진보 교육감조차 양치기 소년으로 변했다.
이명박 정권은 일제고사라는 ‘시험 동원령’으로 모든 학생과 학부모들을 일제시대의 ‘전시 동원령’과 유사하게 동원하고 있다. 일제고사를 거부하는 선생님들은 징계를 받아야 하고, 시험을 거부하는 학생들은 무단결석으로 처리된다. 그 진보 교육감은 ‘시험 동원령’만이 아니라 최근엔 면담을 요청하는 사람들에게 ‘경찰 동원령’까지 내렸다. 자본주의 교육정책의 파발마만이 학생과 학부모들의 몸과 마음을 짓밟으면서 내달리고 있다.
물론 자본주의 교육은 기본적으로 체제에 순응하면서 자본의 돈벌이에 동원할 수 있는 사람들만을 양성하려 한다. 1994년 자본의 세계화 전략에 부합하는 제7차 교육과정이 수립된 이후, 학생들은 세계의 언어와 전쟁하는 병사로, 자본의 경쟁력이라는 ‘교육의 꽃’을 일구는 예비 노동자로 동원되었다. 이전 정권들도 마찬가지였다. 학생과 학부모들은 최소한 배를 곯지 않으면서 살수 있다는 교육정책의 메시지 앞에 경쟁과 살육의 전쟁터에 나가야만 한다. 그 터는 바로 일제고사 시험장이거나 수능 시험장이다. 이제는 오로지 시험 결과로 개인과 학교를 등급화하거나 서열화하는 교육정책이 전면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특히 서울 지역의 경우, 학생과 학부모들은 보다 높은 서열과 등급의 학교까지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학교선택제도’ 앞에서 등급화와 서열화의 모든 책임을 스스로 떠안아야만 하는 상황이다. 이 양치기 소년들의 ‘책임을 떠넘기는 능력’이 참으로 대단하다.
자본주의 체제는 학력을 추구해야 할 교육의 본질적 기능을 실용주의적인 돈의 욕망으로 변질시켰다. 학력이란 사물과 상황을 보다 과학적으로 인지하고 분석할 수 있는 힘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데올로기적으로 포섭하는 자본주의 교육정책의 능력 때문에 학력을 시험능력으로 오해한다. 그 중심에 양치기 소년들이 있다.
그래서 국가 아니 지구의 천년지대계를 위해서라도 후세대들의 학력을 키울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우선 지식의 전달만을 위해 존재하는 현행 교과목의 형식과 내용을 폐지해 새롭게 재구성해야 한다. 교육방식도 물론 학력을 키우기 위한 차원으로 개선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일제고사만 보지 않는다고 해서 학생들의 학력이 강화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종합대학교뿐만 아니라 종합적인 전문대학을 해체하는 방안이다. 대학교육기관은 전국에 하나면 족하다. 그 기관은 전문적인 영역별 단과대학체제로 전국에 배치되어 운영되고, 학생과 학부모들은 자신의 적성과 관심에 맞는 단과대학에 무시험으로 입학하는 것이다. 대학에 입학한 학생은 자신의 관심과 적성을 극대화하는 차원에서 공부하면 된다. 교육은 자본의 돈벌이에 부적합한 사람들을 만들거나 은연중에 평등의식을 강화·조장시킨다는 자본의 두려움과 그 동안 학교를 매개로 돈벌이가 취약해졌다는 사립학교 재단의 탐욕을 넘어서서, 진정한 삶의 행복을 일상생활에서 추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넘쳐 흘러나는 세상을 만드는 수단으로 존재해야 한다.

김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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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신종플루 문제와 용산참사 해법은 다르지 않다

결국 예상했던 대로 북한도 신종플루를 피해갈 수 없게 되었다. 예전부터 북한에서는 의약품과 의료시설 등이 부족하고, 위생상태도 엉망이라서 수인성 전염병이 자주 발생했기 때문에 신종플루가 한바탕 기승을 부릴 것이라고 생각 했었다.
그런데 지난 12월 9일 북한이 신종플루 환자 발생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하였다. 지난 여름 이후 북한에서 신종플루가 빠르게 전염되고 있다고 알려졌지만, 공식 확인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북한의 이날 신종플루 환자발생 보도는 전날인 12월 8일 이명박이 국무회의에서 북에 신종플루 치료제인 타미플루 등 지원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한 직후 나온 것이어서 주목된다.

소문보다 심각해 보이는 실제 상황
현재 북한의 신종플루 환자 실태에 대해서 제대로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한 9명의 확진환자, 세계보건기구(WHO) 평양사무소에서의 확진환자만 있고 사망자가 없다는 언급 등이 공개적으로 알려진 상황이며, 반면 대북인권단체인 ‘좋은벗들’이 북한의 내부소식통을 인용해 12월 7일 현재 신의주지역과 평안남도 평성 등에서 4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전했다.
이러한 정황을 종합하면 북한에서 신종플루 환자가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으며 사망한 사람들은 발표된 숫자보다 2배 이상 더 많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신종플루로 인하여 각급학교들이 한 달 앞당겨 겨울방학에 들어간 것은 확실하다. 실제 보건성과 교육성에서는 신의주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매일 독감 환자가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는 1호 보고에 따라, 지난 12월 4일 전국 학교에 방학령을 내린 바 있다.

용산참사는 어디에 가고 신종플루만 남았는가
문제는 북한의 병원에서는 새로운 치료제가 없기 때문에 급한 대로 중국산 레보사신이라는 항생제를 처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약이 치료에 효과가 있다는 소문이 나서 너도나도 이 약을 찾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신의주에서는 이미 동이 난 상태며, 빈민층에서는 당장 약이 없어 큰 야단이란다. 세계보건기구가 지난 5월에 타미플루를 북한에 제공했음에도 약이 없다는 것은, 환자가 많아서 주민들에게까지는 타미플루가 전달되지 않거나 아니면 평양을 중심으로 고위급들이 독점했기 때문이다.

북한이 이렇게 신종플루 발생 사실을 발 빠르게 확인한 것은 상황이 매우 다급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적 의료 인프라가 극도로 열악한 북한으로서는 대외적 위신만 신경쓰며 방치하다가는 자칫 손쓰기 어려운 곤경에 처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작동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런 위험을 자초하느니 남한과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아서라도 일단 ‘급한 불’부터 끄자는 현실적 판단을 했을 공산이 크다.

다행스럽게도 남한에서는 18일 개성에서 타미플루 등 신종플루 치료제 50만 명분을 제공할 예정이란다. 예전 같으면 복잡한 행정절차로 인해 최소 몇 주에서 몇 달 걸리는데, 이번에는 절차를 간소화해서 북한 주민들의 생명을 소중하게 하는 기이한(?) 현상을 보여주었다.
용산 참사는 벌써 1년이 다되도록 어떠한 반응과 관심이 없고 오히려 탄압으로 일관하면서, 남한 노동자 민중들의 인권을 무참히 짓밟으면서까지 이렇게 발 빠르게 움직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 최근에 북미관계가 탄력을 받으면서 새롭게 전개되는 동북아 정세에 소외를 당하지 않으려는 자구책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이명박 정권의 대북정책과 한미관계가 시종일관 경직성을 보이고 있으며, 일종의 알박기(?)로 인해 오히려 변화하는 동북아 정세에서 소외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현 정권이 인도적인 차원의 접근이라고 반박할 수도 있겠지만 지난 2년 동안의 반민중적·반인간적 탄압의 일관성에 비춰보면 어불성설이다. 용산참사야 말로 현 정권이 만든 신종플루의 최대 희생이다. 이 신종플루가 기승을 부리면서 한국 사회 여기저기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사회적·인간적인 타미플루를 개발해서 공급해 줘야 한다. 결국 용산참사와 북한주민의 신종플루 해법은 전혀 다르지 않은 것이다.
 

배성인(한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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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이 투쟁하지 않아도 될 만큼 좋은 시절이 있었던가요?

[노동운동 혁신하자!]

노동운동을 십 수 년 한 노동자들이면 요즘처럼 답답한 상황을 보면 96-97총파업을 한 번 쯤 떠올리곤 할 것이다. 당시 노동자총파업은 노동법을 개악하려는 자본세력의 야욕을 거꾸러트렸다. 물론 더 잘 투쟁했으면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복수노조, 전임자임금 문제도 해결했을 뿐 아니라 노동운동도 좀 더 높은 위상을 가지고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었으리라는 아쉬움도 있지만 제법 훌륭한 투쟁으로 기억된다.

그 투쟁 이후 10년하고도 두해를 더 보내고 있는 지금까지 민주노총은 한 번도 제대로 된 총파업을 조직해보지 못했다. 조합원은 두 배 가까이 늘었고 자본에 효과적으로 대응 하기위해 산별로의 조직전환도 거의 완료했는데 말이다. 오래된 기억도 아니건만 이번에도 민주노총은 복수노조·전임자임금 문제에서 과거의 실패한 방식을 똑같이 반복하고 있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말이다.
사실 노동운동이 소홀히 했던 촛불투쟁이나 용산투쟁이 사실은 이명박 정권의 노동운동에 대한 공세를 지체시키는 방파제였다. 하지만 그 방파제 역시 전체노동자민중 운동의 힘이 결집되지 못함으로 조금씩 무너지고 있고 특히 노동운동에 대한 이명박정권의 태도는 노동조합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그저 지금 투쟁을 이어나가는 것으로는 막아내기 어렵다. 그런데 그 둑이 무너지고 알몸으로 저들과 마주하고 있는 민주노총의 대응은 정세에 비해 긴장감이 작아 보인다.
총파업을 준비하는데 총연맹의 의지와 결의를 각 산별조직이 적당히 잘라 먹고 또 아래로 내려가며 조직 상태나 집행부의 의지에 맡겨 둠으로써 총파업을 선언하고도 대공장 몇 개가 파업에 들어가느냐 마느냐로 성패를 가름하는 것이 지금까지 총파업이었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지 않는 한 민주노총 총파업 선언은 정권과 자본에게 위협이 되지 못한다.
복수노조·전임자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거듭되고 한국노총이 굴복하자 한국노총 홈페이지는 분노한 조합원들의 글로 북새통을 이룬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 역시 민주노총을 믿지는 않는다. 오히려 한국노총 뒤에 숨어 있다가 뒷북만 친다는 냉정한 평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할 뿐이다.
민주노총이 제대로 된 투쟁전선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각 산업별로 흩어져있는 전선을 단일화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공무원노조, 전교조, 공공부문, 구조조정 등의 문제들을 각 조직의 수준에서 대응할 것이 아니라 정권과 자본에 맞선 총노동의 투쟁으로 전국적 전선을 형성해야 한다.

이번 투쟁에서는 조직의 상태를 핑계로 투쟁에 나서지 않으려는 연맹지도부와 일신의 안위나 챙기고 있는 상층관료들을 조합원들에게 공개해서 물러나게 해보자. 또한 조합원들의 개인주의화 보수화를 탓할 것이 아니라 간부부터 앞장 서 의지를 모아나간다면, 전국 곳곳에서 이명박정권의 ‘노조 없애기’에 맞선 노동자투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만들어나간다면 명실상부한 총파업은 만들어 갈 수 있다.
이번 투쟁을 통해서 그동안 저들에게 빼앗겼던 노동자 권리를 찾아오고, 더 이상 노동자를 배신하는 권력이 발붙일 수 없도록 노동정치를 강화해 나가기를 희망한다.
 

이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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