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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아까, 연맹 상조회 게시판에 올린 글을 조금 손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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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기노조 전임을 시작하기 직전, 95년 여름 휴가를 제대로 보냈지요.

 

그게 벌써 10년 전이구나,

아내와 네살바기 가문비를 데리고 섬진강에서 야영도 하고

두루두루 전국을 돌아서는 안동 하회마을에 가서 모기장 치고 잠도 자고

얼마 전에 임원, 사무처 수련회 갔던

정선 근처 강가에서 천연기념물로 매운탕도 끓여먹고

그러고서는 입 싹 씻었지요.

내 사전에 휴가는 없다...ㅋㅋㅋ

 

과기노조 위원장 맡고서 여러해 대충 보내다가

2000년 여름에 풀 타임으로 휴가를 냈더니

날세동 왈,

위원장 진짜로 그만 두기는 할려나보네...

 

그러고서 여차저차 세월을 보내고

2002년에 다시 과기노조 위원장을 맡았네요.

 

작년 여름에는,

어차피 바쁜데 위원장 임기는 12월 17일에 끝나니까

그 후로 연말까지 널널하게 쉬면 되지 모...

이러고서 휴가 없이 대충 넘겼는데

그 12월이 되어도 임원 입후보자가 나타나지 않아서 그냥 12월 31일까지

위원장 임무를 수행했지요

(그것도 12월 31일조차 대구에 가서 교섭하고 가까스로 타결짓고...)

 

지난 1월 2일부터(하필이면 1월 1일이 일요일이었던가...)

곧장 연맹으로 와서 반년을 개겼네요.

 

해마다 이맘때면 강릉 처가에서 가족모임이 있어요.

어지간하면 대충 주말을 이용하곤 했었는데

올해는 에라 모르겠다, 휴가로 죽치자 해서

여기 여러날 머물 작정입니다.

 

어젯밤에는 오자마자 처남하고 늦도록 술 마시고

오늘은 바닷가에서 아이들과 손잡고 파도타기도 하고 사진도 찍고

오후에는 소금강 근처에 가서 계곡물에 발담그고 소주 술술 마시고

밤에는 다시 처남과 동서들 모두 일찌감치 잠에 취하게 만들고...ㅉㅉ

 

파업이며 투쟁이며

돌아가는 품새가 바닷바람 쐬면서 시간만 죽여서는 안될 것 같지만

미안한 마음 바람에 띄워 보내면서 며칠 개겨 보겠습니당.

 

혹시라도 마음이 들뜨면

유모모 동지가 띄운 영화 번개라도 함께 하려고 해보겠습니다만,

지금부터 무려 100시간 이상 남은 미래일을 어찌 알겠습니까?^^

 

다들 잘 지내소서~~

 

-강릉 송정동의 피씨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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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의 추억

많은 사람들의 상처에 대해 들어 왔다.

단 한번이라도 상처를 얘기하는 것은 고통스럽다.

상처가 깊은 사람은

절대로 자신의 상처에 대해 쉽게 말하지 않는다.

입만 열면 상처의 아픔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은

기실 상처를 사랑스럽게 껴안고 추억하는 것이다.

상처에 관한 이같은 반응은

그가 수다쟁이거나 과묵하거나 별다른 차이가 없다.

 

-이것은 나의 편견일까,

 어젯밤 늦게

 머리엔 하얀 붕대를 둘둘 감고

 온몸은 백병전을 치른 듯 벌겋게 피칠갑을 하고

 병원 응급실 침대에 걸터앉은 한 동지가 있었다.

 아침에 그와 통화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응급처치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도

 전화통화에서도

 그는 누구와 술마셨는지

 누가 자신의 머리를 그렇게 깨버렸는지

 말하지 않는다.

 몸의 큰 상처이든

 마음의 깊은 상처이든

 상처를 즉시 나누는 것은 힘든 일이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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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모처럼 과기노조에 가서 술 마셨다.

 

중국집에서 고량주를 물처럼 마시고

 

2차에서는 생맥주를 마시는데 한 동지가 소주를 콸콸 타 주었다.

 

아주 취해서 3차로 갔고

 

아침에 겨우 출근했다.

 

휴가라도 냈으면 했지만 오늘은 중집위가 있는 날이다.

 

사무실에 있는 다시마를 뜨거운 물에 우려서

 

회의하면서 틈틈이 마신다.

 

속이 확 풀린다.

 

정회 시간에 통다시마를 가위로 잘라서

 

내 책상 앞 테이블 위에 두었다.

 

나같은 사람 있으면 다시마차를 만들어 마시라고.

 

회의가 다시 시작될 시간이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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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yang을 추모함

"자유혼(하종강), 가문비(이성우) 등 아직도 전혀 굴하지 않고 80년대에 하던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을 묵묵히 계속하고 있는 감동적인 분들을 만날 수 있던 것도 큰 기쁨이었다. 나는 그들을 볼 때 마다 내 자신을 가다듬는다. 저런 분들이 있는 한 우리의 젊은 시절의 자유와 평등의 꿈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그들은 나의 타락을 막는 마음의 양심 나의 제미니 크리킷이다."

 

98년 11월엔가 양신규, 아니 skyang이 게시판에 쓴 글 중의 일부이다. 그의 돌연한 죽음 소식에 옛날 게시판을 들추다가 발견했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가는 길은 달랐지만, 나는 그의 죽음 앞에서 부끄럽기만 하다. 오늘 그는 전주의 어떤 묘지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거기 가보지도 못하고, 서울로 가고 오는 길에 그를 생각하며 짧은 글 하나 떠올렸다.


내가 일생에
당신만한 열정과 에너지를 일에 쓰고 나야만
죽는 것이 허락된다면
내 수명은 한 이백년으로도 모자랄 것입니다

내가 일생에
당신만한 관심과 배려로
사람들을 사랑하고 사람들과 소통하고 난 뒤에야
또한 죽은 것이 허락된다면
내 수명은 한 오백년으로도 모자랄 것입니다

삶과 죽음,
기회와 상실의 시간들 모두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똑같은 부피와 질량으로 주어져 있을지라도

당신만큼 문밖의 깊은 고독과 절망에 몸부림쳐야만
내게 죽음이 허락될 수 있다면
나는 영원히 죽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꿈이든지 생시든지
오늘 밤 당신이 우리에게 오십시오


와서 슬픔의 노래들은 다 걷어 치우고
우리 젊은 시절 자유와 평등의 꿈과 노래
다시 함께 힘차게 불러 보자구요
그 세상 향해서 산자와 죽은자 모두 함께 가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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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자살 소식

지난 주 토요일(16일) 보스톤의 MIT 교정에서

한 사람의 장례식이 있었다고,

그리고 한국에서의 추도식이 내일 오후 4시에 전주에서 있다고,

오래된 벗이 오늘 저녁 내게 알려주었다.

 

나는 그를 10년전쯤 나우누리에서 처음 만났고

(같은 또래인 우리는 만나기 전에도 많은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는데)

지난 2000년 6월의 어느 주말에

대전에서 만나서 마구마구 낮술을 퍼마셨고

그리고는 끝이었다.

미국의 연방준비위원회 그린스펀 의장이 그의 논문을 인용할 정도로

그는 뛰어난 학자였지만,

온라인에서나 오프라인에서나 나와 대화를 나눌 때

진실로 세상을 바꾸는 것은 노동자라면서 격려하곤 했다.

(하지만 그는 사실 노동자편은 아니었다...)

 

뭐라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에 대해서 궁금한 사람들이 있다면

하종강의 노동과 꿈(http://www.hadream.com)에 가 보면 되겠다.

거기에 올라온 글 중에서

그가 죽기 전의 심경을 옆에서 함께 나누었던

또다른 벗의 글 하나를 여기에 덧붙인다.

 

내일 나는

서울에서 대학생들을 상대로 강연을 하나 맡았고

저녁까지 일정이 잡혀있기 때문에

전주에는 안타깝지만 갈 수가 없다.

 

그에 대한 추도사를 쓰고 싶지만

지금같이 먹먹한 느낌으로는 아무 것도 쓰지 못하겠다.

우선은 짧게,

그의 명복을 빈다.

 



신규의 최근 심경                                                        July 20, 2005.

우울증이라는 병은 통계를 보면, 85%정도는 약을 먹어서 치료가 된다고 한다.  여기서 약을 먹어서 치료한다는 뜻은 꼭 약을 안먹어도 되게 낫는다는 뜻이라기 보다 약을 계속 먹는 걸로 전제하고 보통 사람으로 살 수 있도록 한다는 뜻이다.  

그의 우울증은 그 당시 보스턴에서 같이 지내던 친구들의 얘기를 종합해보면 이미 1990년 대 말 엠아티에서 학생으로 있을 때부터 였던 것 같다.  그는 이미 경영학 석사과정을 끝낼 때, 아주 주목할만한 논문을 썼고 (그의 지도교수 말로는 the most profound master’s degree thesis), 그 논문이 박사과정의 논문이 된 것 인데, 박사과정을 끝내는데, 다시 5년이 걸렸다.  2-3년만에 끝냈을 수 있을만큼, 그는 이미 논문이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도, 5년이나 걸려서 박사과정을 끝냈는데, 이건 우울증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의 지도교수가 이미 그가 졸업하기 이전인 90년대 말에 그에게 정신과 의사를 찾아보고 약물치료를 받을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그가 치료를 받고 우울증에서 벗어나야겠다고 내게 도움을 청했던 것은 2002년 1월이었다.  그 이후  약 1년 6개월정도 정신과 상담을 받고 항우울제 약을 먹고 상당히 상태가 좋아졌었다.  그 당시 장국영의 자살에 대해서, 우울증 환자가 옆에 있으면 도와주어야 한다고 한겨레에 글을 쓰기도 했었다.  2003년 가을 이후에 약을 먹기도 하고 안먹기도 하는 걸 몇 번 거친 후에, 본인이 더 이상 약을 안먹기로 결정하고, 약을 전혀 먹지 않은 지 아마도 8개월 정도만에 자살을 한 것 같다.  

왜 그는 죽기로 마음을 먹었을까.  예를 들면, 직장에서의 스트레스가 너무 커서 그 스트레스를 견딜 수 없었다던가, 혹은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서 너무나 외로웠다던가, 혹은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던가…하는 일은 없었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직장의 경우, 신규는 2003년까지 대단히 왕성한 연구활동을 했었다.  ICIS (International Conference Information System)이라는 Information Technology field에서는 상당히 권위있는 학회에서 6개의 페이퍼를 발표하는 신기록을 세웠다.  그 학회는 한 사람이 4개 이상의 페이퍼를 발표할 수 없도록 하고 있어, 신규는 4개의 페이퍼에만 이름을 넣고, 2개의 페이퍼는 본인의 이름을 넣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것은 뉴욕대학교 박사과정 1학년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낳은 기록인데, 뉴욕대 신기록일뿐아니라, 어느 학교라 해도, 깨지기 어려운 기록일거라고 생각이 된다.  대체로, 이렇게 컨퍼런스에서 발표한 논문들은 저널에 발표하는 순서를 밟는데, 그는 그걸 하지 않았다.  우울증때문이었기도 했을테고, 이미 새로운 아이디어가 아닌 것을 저널에 발표하느라고 시간을 쓰는 것을 그의 성격으로는 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우울증이 깊어진 2005년 초에는 이미 직장에 사직의사를 밝히고, 사표를 전한 채, 연구활동을 중단했었다.  당시 신규를 매우 인정하고 아끼던 그의 직장 상사인 MIT의 Erik Bryonolfsson교수는 사표 수리를 해주지 않고 신규가 우울증 치료를 받기를 계속적으로 권유했었다.  뿐만 아니라, 거의 지난 반년동안 아무런 연구활동을 하지 않았던 신규에게, 본인만 원하면, 또 다시 계약을 갱신해서 엠아티에서 연구 교수로 있어줄 것을 권유하기도 했었다.   물론 본인은 원하지 않았었다.

신규는 더 이상 연구활동을 할 수도 없고, 하기도 싫다고 했다.  왜?  경제학/경영학은 더 이상 희망이 없는 학문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가 하는 실증 경제학 연구는 데이터를 토대로 연구를 해야하는데, 이미 있는 데이터로 할 수 있는 연구는 이미 모두 했고, 정부가 나서서 데이터를 구하는 일을 하는 것이 지금 꼭 해야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것이 없이 지금처럼 연구를 해서는 쓰레기 양산, 종이가 아까운 연구라고 했다.  경영학중에서 Finance 분야가 괜찮은 것은 그 경우 주식가격 데이터를 놓고 연구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가치있는 연구가 될 수도 있다고 했다.  따라서 현재 아카데미아의 지도층들은 종이가 아까운 쓰레기 연구 그만하고, 데이터를 모으는 일, 어떤 데이터를 어떻게 모아야 하는 지를 정부 관계자들에게 설명하고, 설득하는 일을 해야한다고 했다.  다만 현재 신규의 미국 학계내에서의 위치에서는 그런 일을 하기는 어려웠고, 우선 그의 기준으로는 "쓰레기" 논문을 많이 써서 테뉴어를 받는 일을 해야만 했다.  신규는 아주 예전부터, 테뉴어를 받는 것같은 본인의 성공에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일에 대해서 아주 무심했었다.  예를 들면, 노무현 대통령 선거 당시, 후보단일화가 되기 전에, 후보단일화에 관련된 글을 쓰는 일, 이랔 전쟁에 관한 그의 견해를 밝히는 일 등 한국 정치에 관련된 일에 글을 쓰는 데 너무나 많은 시간을 써서, 내가 그거 그만 좀 하고 연구논문 쓰고 테뉴어를 받아야 하지 않냐고 했더니, ‘지금 한국에 전쟁이 날 지도 모르는데, 내가 테뉴어받자고 연구논문쓰고 있을 때냐’고 대답했었다.  

나는 이번 가을에 경영학 박사과정을 진학하기로 결정했는데, 그는 그일을 매우 말렸었다.  그가 말리는 이유는 보통 다른 사람들이 말리는 이유–그 나이에 어떻게 다시 박사과정을 하겠냐 든가, 지금 다니는 좋은 직장을 그만 두는 게 너무 아깝다든가, 그 나이에 졸업하고 직장을 성공적으로 얻은 확률이 얼마나 높겠냐든가 하는 등등의 이유–때문이 전혀 아니었다.  그는 경영학이 희망이 없는 학문, 실망스러운 학문이기 때문에 나의 진학을 만류한다고 했었다.  내가 그동안 해온 학문 – 과학 실험을 하고 그 실험결과를 토대로 새로운 현상을 설명하거나 새로운 센서를 만들어내거나 하는 이공학문-은 정직한 학문,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해도 무언가 학문의 발전에 기여하는 학문이지만, 경영학/경제학의 경우 쓰레기 같은 연구, 종이가 아까운 연구를 하기가 너무 쉽다고 (그는 최근 경제학 저널 1년 치를 가져다 놓고 보면 그 중의 하나 정도 가치있는 연구라고 했다), 그건 리서처가 못나서라기보다 데이터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고 했었다.  그래서, 나처럼 정직한 학문을 10년 넘게 해온 사람이 경영학/경제학의 실상을 보게되면 깊이 실망을 할테고, 그렇게 몇 년 이후에는 나도 자기처럼 우울증에 빠져서 아무것도 못하게 될 지도 모른다고 했다.  내가 ‘너는 나의 양심이야.  네가 이런 얘기를 가끔 해줘서 나도 다른 사람들 연구결과를 들을 때, 이게 세상에 어떻게 공헌을 하는 연구인지 생각하게 돼, 내 연구가 세상에 어떻게 공헌하는지보다, 어떻게 해서 테뉴어를 받는지만 생각하지 않게 해줘’라고 했더니, 웃으면서, ‘그래서 내가 너에게는 악영향을 끼치는 사람인거야, 나처럼 생각하다가는 너도 우울증에 걸릴지도 몰라’라고 했었다.  그게 지난 6월의 일이다.

그가 예전에는 한국의 학문계만 쓰레기같은 연구를 양산한다고 했었는데, 최근에는 미국학문계도 – 한국 학문계보다 낫다고는 해도- 마찬가지로 쓰레기같은 연구만 양산한다고 했다.  한국에 가서 교편을 잡는 건 어떠냐고 말해본 적도 있는데, 그는 그러느니 죽는 게 낫다고 말했었다.  그는 경영학 학문계에서는 더 이상 세상에 기여할 만한 일을 할 것이 없고, 기업에서 하는 일은 적어도 쓰레기가 되는 종이가 아까운 연구를 하지는 않으니 그래도 낫다고 했었다.  그래서 그는2005년 초에는 미국 기업의 직장을 알아보기도 했다.  내가 알기로는 미국 기업에서 직장을 못구했는데, 우울증이 이미 깊어지던 그가 얼마나 열심히 직장을 알아볼 수 있었는지, 과연 인터뷰를 하러 갈 수는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이것이 그가 그래도 살아볼까 하고 마지막으로 노력했던 일이었던 것 같다.

그의 아들에 대한 사랑은 각별했었다.  그의 아들은 미국에서 미국식 경기고등학교인 수재들만 모아놓고 교육하는 공립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자신이 이제 직장을 그만 두면 그 아들의 양육에 대한 생활비를 댈 수도 없고, 그 아들의 비자도 만료가 되면서 더 이상 미국에서 교육을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에 대해서 스스로 무능하다고 느끼는 자책감이 매우 심했었다.  예를 들면,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쓰레기같은 연구만 하는 교수들이라도 적어도 그렇게 해서 자식들 공부는 시키고, 먹여살리지 않냐고, 자기는 정말로 못하겠는 일이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보면 한편 존경하게 된다고 말했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도 않고, 살 수도 없는 사람이지만,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들 보면, 그래서 자식들 다 잘 키울 수 있는 사람들 보면 비난하는 마음이 안생겨, 존경하게 돼’라고 말했다.

그는 우울증이 심해진 최근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지냈었다.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렵고 무섭다고 했다.  자기는 모든 사람들을 실망시켰다고…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해주어야 할 일, 직장 동료로서 해주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하고 있다고.  그에게 전자메일을 보내서 안부를 묻거나 진로를 상담해오는 후배들에게 아무런 답장도 못하는 것에 대해서도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Guilt, Shame, Despair가 자기가 요즘 느끼는 전부라고 했었다.  너무나 하루 하루 사는 것이 고통스럽다고 했다.  아마도 이부분이 우울증 환자가 보통 겪는 심정인 것인 것 같다.

내가 ‘네가 말리든지 말든지 나는 경영학 박사과정에 갈거야.  그거 안해보고 죽으면, 너무나 한이 될 것 같아. I will regret it if I don’t this.’라고 말했더니, 그가 ‘그럼 해야지, 한이 되는 일은 없어야지.  I feel guilt, shame and despair but I don’t have regret.  I have run a good life.  I have done all t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우울증의 심각함을 느끼고, 그를 살려보려고 여러가지 노력을 했었는데, 지난 5월에 그를 잠깐 방문했을 때도, 지난 6월에 잠깐 방문했을 때도, 그는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선택해서 가는 것이라고, ‘네가 나서서 내가 죽고 싶다는데, 두들겨 패서 살릴 생각 하지 말아.’라고 했었다.  내가 주위 모든 사람, 가족들이 만류하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직장을 그만두고 경영학 박사과정을 가는 것과 비교해서, ‘너도 네 인생 네 마음대로 다른 사람이 말려도 굳이 경영학 박사과정에 가는 것 처럼, 나도 내 인생 내 마음대로 하는 거야.  아무리 주위에서 말려도 내 인생은 내가 정해서 끝낼 수도, 살 수도 있는거야.’라고 말했었다.  죽음이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인생의 한 선택일 뿐이라고…

그렇게 그가 갔다.  그는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He changed my life.  He inspired me to be brave, to stand up for what I believe in, to dare to fight what I think wrong, to try what I want for my life, to love who I am, to believe in myself, to be the best that I can be.

‘너 죽고 나면, 내가 어떻게 살 지 걱정안되니?’ 하고 물었더니, ‘너는 워낙 몸도 마음도 튼튼한 사람이니까 걱정 하나도 안돼.” 라고 대답했었다.  자식..너, 그렇게 꼭 가야했니… 세월이 지나면 그를 생각해도 아프지 않을 때가, 눈물이 나지 않을 때가 올거라는 걸, ‘몸도 마음도 튼튼한’ 나는 이 슬픔을 언젠가는 이겨내고 잘 살 거라는 걸 알지만, 오늘은 너무나 너무나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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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회 다녀와서-

<수련회 다녀와서 연맹 상조회 게시판에  쓴 글>

 


출근길

비가 온다


대전,

비 오지 않았다


손수건 펼쳐

머리에 얹고


속절없이

비를 맞는다


연맹 사무처장 신세같다.


#1.

7월 13일, 수련회를 하루 앞둔 날 오후, 사무실에 앉아서 수련회 자료집을 미리 검토하다가 끄적거린 낙서입니다. 제목을 '독백'이라고 붙였습니다. 대전에는 비가 오지 않았는데 서울역에 내리니 비가 오더라, 우산이 준비되지 않은 나는 그냥 비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뭐, 이렇게 뻔한 얘기를 왜 썼냐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헌데, 조직운영에 대한 평가와 개선방안을 놓고 끙끙거리던 나로서는 조직운영을 논하기에 앞서 사무처장으로서의 자아비판이 더 크고 절실한 화두였던 터라,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무시하고 길을 떠난 여행객의 이미지가 어쩌면 내 지난 6개월의 모습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던 것은 꼭 생뚱맞기만 한 것은 아닐 듯합니다.


#2.

세상을 바꿀만한 전망과 철학이 빈곤하고 역량 또한 보잘것 없는 내가 연맹 사무처장으로 나선 이유를 지금 구태여 떠올릴 이유는 없다고 하더라도, 지난 6개월은 반성하고 또 반성할 일로 가득합니다. 일처리는 꼼꼼하지도 철저하지도 않고, 동지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늘 부족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10년 전쯤에 내가 가졌던 장점이라는 게 있었다면 밤새워 일에 매달리던 열정과 사람들에 대한 끝없는 관심, 그리고 무엇이든 일을 만들고 조직하는 것이었다고 한다면(그랬기에 노동조합의 간부로 일할 수 있었겠지요), 위원장이며 본부장이며 당의 지구당 위원장이며, 이른바 감투라는 것들을 자꾸 쓰게 되면서, 하나의 주제에 깊이 천착하기보다는 무수한 현안들에 대한 얕은 이해와 임기응변으로 세월을 먹어치웠고, 시나브로 열정도 패기도 끈기도 집념도 모두 사그라진 느낌입니다.


#3.

연맹의 사무처장이 된 이상 '최종결재권자'로서만 지냈던 과거의 습관들은 모두 지워버려야 했습니다. 정말로 처음 시작하는 마음으로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히고 그것들을 내 새롭고도 건강한 습관으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 먼길을 오고가면서 피곤하다는 이유, 등등을 혼자서 줏어섬기며, 위원장에게 의존하고 임원들에게 기대고 사무처 동지들에게 짐을 떠넘기면서 6개월을 보냈습니다. 특히나, 임원과 임원, 임원과 사무처, 부서와 부서, 사무처와 사무처, 중앙과 지역 사이에서 소통과 갈등 조정 역할을 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한 약속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습니다.


#4.

하루 이상 외박이 예정된 길을 나설 때 책꽂이에서 옛날 책을 꺼내드는 버릇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황지우의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가 그것이었습니다. 99년 5월 3일 과기노조 임익성 동지(과기노조 그만두고 7월 18일부터 원자력연구소에 재입사합니다)의 결혼식에 참가하러 제주도로 가는 길에 샀던 책입니다. 오며 가며 몇번씩 읽고는 여러 군데 밑줄을 쳐 놓았는데, 그 중에 다음 대목이 아주 선연하게 망막에 와 멈췄습니다. 내가 수련회 프로그램 진행하다가 한번 소리내어 읽었던 구절입니다.


"나는 언제나 한계에 있었고

내 자신이 한계이다.

어디엔가 나도 모르고 있었던,

다른 사람들은 뻔히 알면서도 차마 내 앞에선 말하지 않는

불구가 내겐 있었던 거다."


사람에 대한 평가와 비판이라는 것이 '모두가 다 알더라도 정작 당사자만 모르는 것(불구)'을 정직하게 말해주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것이 곧 동지애요, 올바른 비판이며, 사람을 바꾸는 운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습니다. 99년에 밑줄칠 때에도 약간은 그런 생각을 했을텐데, 이번처럼 절절하게 느끼지 못했던지 기억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차마 내 앞에선 말하지 않는 것'을 그 사람들이 꼭 얘기해주어야만 자신의 한계와 문제를 인식하게 되는 것은 물론 아닐 것입니다. 관성화되지 않고 진지하게 되풀이하는 자기 성찰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갖고 있는 '불구'를 인식할 수 있고, 그것은 곧 그 '불구'를 이겨낼 수 있는 계기요 힘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나 아닌 다른 동지들의 장점을 하나씩 살피며 고개를 끄덕이다 보면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5.

지난 6개월동안 동지들에게 많은 것을 빚졌습니다(그것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일일이 열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나 자신도 많이 성장했으리라 믿습니다만, 아직은 멀었습니다. 그러나 임기 2년의 1/4이 벌써 지났고, 더 이상 태생적이거나 외생적인 내 한계만 둘러대며 내가 잘하지 못한 일을 무마할 수는 없습니다. 더 이상 크고 작은 실수들을 연맹 초년생이라는 이유로 너그럽게 넘길 일도 아닙니다. 끝내 내 한계를 뛰어넘지는 못하더라도 조금 더 애쓰고 더 힘껏 살겠습니다. 사무처장으로서의 역할을 더 잘해서 얻는 기쁨이 수련회에서 동지들이 먹을 음식들을 장만하는 즐거움 못지 않게 크게 될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6.

임기를 시작하기 직전 어떤 모임에서 내가 여러 동지들에게 했던 말을 간추려서 메모해둔 것이 생각이 나서 여기에 덧붙입니다. 아무래도, 나의 '불구'를 가리켜 충고하라고 동지들을 다그치기보다는 내가 보고 느끼는 동지들의 '불구'에 대해 먼저 솔직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가장 신경쓰는 것은 소통의 문제이다.

임원과 임원, 임원과 사무처, 사무처와 사무처 사이에서

서로간의 원활한 소통을 돕고 일을 적절하게 나누는 것이

사무처장의 몫이다.


과기노조 위원장 노릇을 하면서 참 많이 얘기했던 것 같다.

언제든지 조직에 대해 나에 대해 가차없이 비판하고

충고해 달라고. 그러나 아무도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왜 그럴까 곰곰히 생각해 봤더니

내 생각을 솔직하고 충분하게 밝히지 않은 상태에서

남들한테 비판만 하라고 주문하는 것이 문제였다.

도대체 저 놈의 속내를 알아야

내 맘도 털어놓을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

그냥, 내 맘 열고 있으니 니 맘을 드러내라, 이건 아니다.


그러니 자신의 생각을 먼저 말하자.

그래야 소통이 활발해지고 호흡을 맞출 수 있다.

나도 좀 더 열심히 노력하겠다. 도와 주라."


#7.

"아무리 후한 점수를 주어도

자기 평가에서 낙제점을 면할 길 없어

반성문을 굴비처럼 엮어서는

먼 길 떠납니다.

가서

신랄하게 혼나고

자아비판도 혹독하게 하고

혼나고도 신이 나서

폴짝 폴짝 뛰면서 돌아오렵니다.

아직 올해의 절반은 남아 있으니까요."


수련회 가는 날 아침에 남긴 글의 일부입니다. 동지들 저마다 느끼고 생각한 것은 제가끔 다르겠지만, 나는 이런 마음으로 가고 왔습니다. 좀 더 신랄하고 혹독한 비판은 손동신 동지의 말처럼 평소의 생활 속에서 틈틈이 하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만, 서로가 일에만 치여서 살다보면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내가 살고 투쟁하는 이유와 의미를 놓치지 않도록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습니다. 뜬금없이, 오래 전에 사람들 앞에서 분위기 잡겠다고 써먹었던 노래와 율동 하나 생각나네요. 개구리 한마리가/ 장독 위에서/ 폴짝폴짝 뛰다가/ 넘어졌어요/ 머리가 깨져서/ 잉잉 울다가/ 엄마한테 달려 갔어요/ (헤이 헤이) / 엄마 하는 말/ 장독 위에서/ 폴짝폴짝 뛰니까 머리가 깨지지- ^-------^


#사족

1) 사진 한장 올려놓고 자려 했는데, 사설이 평소 말하는 것 이상으로 길고 두서가 없네요. 어쩝니까, 이런 것도 내 '불구'(이 단어는 좀 불편한 느낌을 주는데, 여러번 썼네요, 상징으로 이해해 주시겠지요?)의 하나라면 '드러내 놓고 씹히기'를 반복해야 고쳐지지 않겠어요?^.^;;

2) 이렇게 떠들어대고서 조금도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또 하루하루를 보낸다면 얼마나 쪽팔리는 일이냐, 하는 생각에 글을 올리는 것이 조금 망설여졌습니다. 헤헤-

3) 2박 3일 동안 함께 하신 분들, 먼길 오고 가신 동지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내 얼굴도 포함된 마지막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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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 한계에 있었고...

나는 언제나 한계에 있었고

 

내 자신이 한계이다.

 

어디엔가 나도 모르고 있었던,

 

다른 사람들은 뻔히 알면서도 차마 내 앞에선 말하지 않는

 

불구가 내겐 있었던 거다.

 

 

"뼈아픈 후회"로 인하여

6년만에 다시 황지우의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를 뽑아

수련회로 오는 가방에 넣었다.

 

토론으로 끝이 없는 일정 속에

졸리면 시 한 편씩 읽어보다가

6년 전에 밑줄 친 한 대목이 유난히 크게 눈에 띄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내 사는 꼴이 매한가지란 얘기렷다.

 

도대체

'다른 사람들은 뻔히 알면서도 차마 내 앞에선 말하지 않는' 그것이

뭐란 말이냐?

 

알듯

모를듯

 

나만의 문제인듯 하고

모두의 문제인듯도 하고.

 

점심시간도 끝났네.

잠이나 좀 자 둘 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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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중

오늘부터 16일까지

강원도 정선으로

임원 사무처(임원, 상설위원장, 지역본부장, 사무처 모두)

상평하계 수련회 갑니다.

 

상평하계?

아, 상반기 평가 하반기 계획-

 

임원과 임원 사이에서

사무처 실과 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임원과 사무처 사이에서

중앙과 지역 사이에서

원활한 소통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연초에 모두에게 약속하고 스스로 다짐했는데

 

아무리 후한 점수를 주어도

자기 평가에서 낙제점을 면할 길 없어

반성문을 굴비처럼 엮어서는

먼 길 떠납니다.

 

가서

신랄하게 혼나고

자아비판도 혹독하게 하고

혼나고도 신이 나서

폴짝 폴짝 뛰면서 돌아오렵니다.

 

아직 올해의 절반은 남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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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백

출근길

비가 온다

 

대전,

비 오지 않았다

 

손수건 펼쳐

머리에 얹고

 

속절없이

비를 맞는다

 

연맹 사무처장 신세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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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우] 뼈아픈 후회

미류님의 [지독한 후회] 에 관련된 글. 

제목 때문인지 내용 때문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미류의 짧은 글을 읽으며

불현듯 황지우가 생각나서

옮겨 본다.

 

언제였더라,

그래, 99년 노동절 집회 끝내고,

한 동지의 결혼식에 참가하기 위해서

제주도에 갔을 때

2박 3일 나는 황지우의 시집과 술만 끼고 살았다.

 

그리고 오래도록

뼈아픈 후회가 내 인생에 있었던가

생각하며 살았다.

 

암튼,

숨가쁘게 바쁜 하루 일과를 잠시 축내며

그 기억을 더듬어 본다.

 

무언 일 있냐고?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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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이동하는 사막 신전;

바람의 기둥이 세운 내실에까지 모래가 몰려와 있고

뿌리째 굴러가고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린다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

神像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내가  自請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한낱 도덕이 시킨 경쟁심;

그것도 파워랄까, 그것마저 없는 자들에겐

희생은 또 얼마나 화려한 것이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의 말을 넣어주는 바람이

떠돌다 지나갈 뿐

나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나를 믿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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