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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병원지부노조 가맹 논란 마무리

손을 내밀어 우리님의 [정치적인, 아주 정치적인...] 에 관련된 글.

오늘 연맹 중집위는

아침 10시 20분부터 저녁 6시 20분까지 이어졌고,

그 마지막 안건이 서울대지부노조 가맹의 건이었다.

 

4월 13일의 중집위 이후

틈만 나면 논쟁하고 토론했던 주제였기에

오늘 약 3시간 동안의 마지막 토론은

다시금 찬반 양론이 여전하다는 것을 거듭 확인했지만

팽팽한 긴장 속에서도 끝을 향해 달리기는 했다.

 

아직은 끝이 아니라 도리어 멀고 험한 길의 시작이기에

하고 싶은 말은 일단 넘겨두고,

회의의 결정사항만 여기에 우선 남긴다.

 

 

 



                     서울대병원지부노조 가맹요청에 관한

공공연맹 중앙집행위원회의 입장과 결정사항



1. 우리 연맹은 서울대병원지부노조 가맹승인과 관련한 사항을 처리함에 있어 최선의 방안은 서울대병원지부노조와 보건의료노조가 그 동안의 갈등을 서로 치유하고 함께 하는 것이라는데 의견을 같이 하며 앞으로도 이런 노력이 계속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2. 그러나 현재의 조건상 이러한 결합이 당장 이루어지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되는 상황에서 우리연맹은 현장조합원의 생존권과 서울대병원지부노조의 어려움을 감안할 때 함께하는 상급단체가 필요하다는 측면에서 서울대병원지부노조 2,200 조합원의 결의와 우리연맹의 규약에 의거 가맹을 승인한다.


3. 그러나 우리연맹은 1번에서 천명한 원칙의 실현을 위하여 마지막으로 연맹이 나서서 중재노력을 할 것이며 이를 위해 수석부위원장을 단장으로 하여 중집위원으로 구성된 중재단을 구성하고  보건의료노조, 서울대병원지부노조, 공공연맹 간의 간담회를 개최한다. 이 중재단은 6월 20일까지 활동시한을 정해 활동하게 되고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화해와 조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서울대병원지부노조가 최종적으로 6월20일 18시부로 가맹된 것으로 처리한다. 따라서 서울대병원지부노조의 가맹과 관련된 심의안건은 차기 중집위에서는 심의사항이 아닌 보고사항으로 처리한다.


4. 만약, 중재단의 노력이 실패하고 서울대병원지부노조의 가맹이 승인되었다하더라도 혹여 다른 병원사업장노조의 가맹신청이 있을 경우에는 우리연맹은 보건의료노조 산별교섭의 원만한 진행과 2005년 보건의료노조의 투쟁을 위해 보건의료노조의 2005년도 산별교섭이 완결되는 시기까지는 가맹심의를 유보한다.


5. 그러나 이 기간의 유보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조건의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똑같은 경우가 반복된다면 서울대병원지부노조건을 처리함에 있어 이미 겪었던 조직내 갈등을 반복하지 않기 위하여 다른 병원사업장노조의 가맹신청에 대해서는 동건 처리의 관례를 따라 논란없이 가맹승인으로 처리한다.


6. 우리 연맹은 보건의료노조가 이러한 우리의 노력과 신중한 결정에 대해 깊은 이해가 있기를 바라며 이후 서울대병원지부노조의 가맹이 설사 승인된다 하더라도 향후 서울대병원지부와의 갈등을 치유하고 하나가 되려는 노력이 계속되기를 기대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 연맹의 역할이 필요하다면 함께 할 것이며 이러한 결정으로 양 조직간에 불필요한 갈등과 논란이 일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7. 가맹결정을 신속히 하지 못하여 매우 큰 어려움을 겪게 된 서울대병원지부노조와 2,200 조합원께서도 우리 연맹의 어려운 처지를 십분 이해하여 주기를 기대하며, 아울러 연맹 내외에서 연맹을 걱정해온 많은 동지들에게 공공연맹이 향후 노동운동의 원칙을 지키면서 보다 큰 틀로 통합해 갈 것을 약속한다.


2005. 6. 8


전국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동조합연맹 중앙집행위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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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단일세

민주노총은 20일부터 총파업한다고 내일 중집위 안건을 준비하고 있고

우리 연맹은 내일 중집위에서 서울대병원지부노조 건을 처리해야 하고

휴일이고 평일이고 가릴 것 없이 정신없는 날들인데

동지고 친구들이고 안부 인사 보낼 여유도 없는데

설상가상

추천블로그에 이 집이 자리를 잡았으니

이를 어쩌나 이 일을 어쩌나-

당분간 틈만 나면 달려와서

게을렀던 시간들을 반성하고

지나다가 들린 이웃들 쓸쓸하게 하지 말아야지.

 

첨 오신 분들,

살맛나는 세상을 그리거나 만들고자 일상으로 싸우는 동지들,

모두 반갑습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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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안전보건교육

이런저런 교육을 다 받았지만, 

노동안전보건교육은 좀처럼 인연이 없었다.

 

이번에는 진작부터 내심 시간을 비워두었고,

더구나 직무스트레스와 관련한 내용을 주로 다룬다고 하길래,

제발 사무실 좀 지키라는 주변의 바람을 뒤로 하고(정중히 양해를 구하고^^)

내일까지는 이 교육을 열심히 듣기로 했다.

 

ㅇ. 교육일시: 2005. 5. 31. (화) - 6. 1. (수)

ㅇ. 교육장소: 우이동 봉도수련원

ㅇ. 교육내용:

 

<5/31>

 

13:00 접수, 여는 마당

14:00 1강 산업안전보건위원회란(김신범)

15:00 2강 사업장 내 환경측정이란(곽현석)

16:00 3강 사내 건강검진에 대해(양정옥)

17:00 4강 산재보상 실무(김민)

18:00 저녁밥 먹기

19:00 5강 직무스트레스와 근골격계 질환(백승렬)

20:00 토론(사업장별 노동안전보건 현황과 대응)

        *직무스트레스에 대한 간단한 안내강의(임상혁)

22:00 단결의 시간

 

<6/1>

 

09:00 6강 공공산업 노동자의 직무스트레스(임상혁)

10:00 7강 직무스트레스와 뇌심혈관계 질환, 정신질환(이상윤)

11:00 8강 교대제와 건강문제(임상혁)

12:00 점심밥 먹기

13:00 9강 직무스트레스 평가도구와 질병 진단(임상혁)

14:00 토론결과 발표와 연맹 계획(-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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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하, 후기를 올리지 않았구나, 할 말이 많은데...

 

암튼,5월 20-22일에 있었던 공공연맹 현장간부 합동수련회 셋째날,

족구시합을 마치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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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5월 27일이다

대부분의 동지들이 울산으로 가버린 오후,

노동자교육센터 운영위원회가 있었다.

참 오랜만에 참석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회의에 가면

건강이 부쩍 좋아진 박준성 선생님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서

모처럼 <하종강의 노동과 꿈> 사이트에 갔더니(박선생님의 근황을 미리 살피려고^^)

김태훈 열사에 대한 글이 올라와 있었다.

오라, 그 날 그 순간 그 자리에

박준성 선생님과 나는 함께 있었던 것이다.

(박준성 선생님은 투신 이후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나는 투신하던 광경을 오늘 일처럼 기억하고 있다,

 낮에 회의장에서 만나 둘이서 그런 얘기를 처음으로 나누었다)

그 글과 김태훈 열사의 영정은 덧붙이기로 한다.

 

24일 밤 네오와 미류님을 만난 자리에서

술김에 잠시 떠올리기도 했지만,

하필이면 오늘 그 기억의 조각들을 다시 만났으니,

일체의 감상을 배제하고 무미건조하게 24년 전의 일을

간략하게 되새김질한다.

 

-81년 5월 27일이다.

-1년만에 광주는 다시금 뜨겁고도 치열한 이슈가 되었다.

-아침부터 학교는 학생들과 경찰들 사이에 일진일퇴 공방이 계속되고 있었다.

-당시엔 사복 차림의 경찰들이 잔디밭에 모여앉아 카드놀이도 하고, 그랬다.

-오후의 어느 시간, 모두들 녹초가 되어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다.

-말하자면 소강 국면이었다.

-어디선가 높은 곳에서부터 굵고 분명한 음성이 들렸다.

-전두환 물러가라! 전두환 물러가라! 전두환 물러가라!

-그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는 순간

-도서관 6층에서 지상을 향하여, 한줄기 굵고 선연한 빛줄기가 내려꽂혔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일순 침묵의 순간이 흘렀고

-그 낙하지점으로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 들었다.

-다음 순간, 그 곳을 향해 최루탄이 날아들었고

-잠시 학생들이 흩어진 사이에

-학생회관에 자리잡은 보건진료소에서 들것이 달려나왔고

-그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 몸뚱아리, 그 들것에 실려 나갔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싸움은 다시 시작되었지만 곧 끝났다.

 

-81년 5월 29일이다.

-자취방에서 조금 늦게 나섰다.

-1교시 수업에 약간 늦었다.

-강의실 밖에 학교버스가 두대 서 있고, 교수와 학생들이 실갱이를 벌이고 있다.

-소모임 활동에 열심이던 몇몇의 친구들이 저만치 도망쳐 갔다.

-약화학 교수와 학생담당 학장보 교수가 버스의 맨 앞자리에 앉아 있다.

-나는 맨 뒷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다.

-안양에 있는 유한양행 공장을 견학하러 간다고 했다.

-버스가 후문을 벗어나는 순간, 나는 맨 앞자리로 뛰어나갔다.

-두 교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오늘은 김태훈 선배의 장례식 날입니다. 우리를 학교로 되돌아가게 해주십시오.

-너 뭐야? 학장보 교수의 싸늘한 반응.

-난데없이 수업을 팽개치고 우리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너 영웅되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약화학 교수의 무심한 목소리.

-나는 그 자리에서 통곡을 했다. 나한테서 그렇게 많은 눈물이 쏟아지다니.

-교수들이 이윽고 약속을 했다. 안양까지만 가자. 그리고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가라.

-그렇게 우리는 안양에 갔다가 곧 돌아왔다.

-학교는 이미 상황이 끝난 다음이었고,

-최루탄 매캐한 교문 안 잔디밭에서 누군가 초라한 우리 모습을 찍었다.

-그 사진 어딘가에 있다.

-아주 평범한 학생이던 나는 그 사건으로 인하여 교수와 학생 모두에게 찍혔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 해 가을 나를 서울을 떠나게 했고, 한학기 쉬게 했다.

-그 다음해부터는 5월만 되면 이른바 요주의 학생들은 교수와 함께 어디론가 여행을 떠났다.

-나도 한번은 집에 가서 좀 쉬라고, 출석 신경쓰지 말고 쉬다가 오라고, 지도교수가 그러길래

-그러겠노라고 하고서 집에 내려갔다가 이내 학교로 돌아간 기억도 있다.

 

그 후로 숱한 죽음의 순간을 목도했거나 죽음 이후를 함께 서러워하면서

나의 20대가 지나갔다.

그것은 내 인생을 궁극적으로 결정해 버렸다.

말하자면, 80년 5월의 광주가 내 인생을 바꿔버린 것이다.

그 시기에 청춘의 한 시기를 보낸 사람이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든지간에 이미 광주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아, 이렇게 말하면 너무 거창하다.

나는 20대 초반의 어느날 우연히 어떤 사건을 마주하였고

그 이후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많은 것을 새롭게 배웠노라고 하자.

 

고 김태훈 열사의 넋을 오늘에 다시 기리며...




 

선생님
  학생들에게 몇 번 <그의 20대>라는 책을 읽고 느낀 소감과 ‘내 20대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구상해보라는 과제를 냈습니다. 열정을 다해 치열하게 살았던 29명의 20대 삶을 짤막짤막하게 정리한 책입니다. 선생님이 추천사를 쓰셨지요.

  학생들이 제출한 과제를 검토하다가 문득 제 20대를 돌아보았습니다. 박정희 유신 독재체제가 유신헌법에 대한 모든 비판을 틀어막으려고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한 1975년부터 전두환 정권의 폭압통치가 계속되던 1984년까지가 제 20대였습니다.

  대학원에서 우리 역사를 공부하던 20대 중반 때 일입니다. 1981년 5월 27일 광주민중항쟁 1주기 주간을 맞아 학생들은 침묵시위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사복형사들과 중무장한 전경들이 학생들을 건물 안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규장각에서 고도서 해제작업을 하던 몇몇 국사학과 대학원생들이 학교 직원 행세를 하면서 도서관 아래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무언가 금새 터질 것 같은 긴장된 분위기습니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러 버릴 것 같은 답답한 공기가 온 몸을 짓누르는 기분이었습니다.  

오후 3시 무렵 도서관 꼭대기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싶었습니다. 건물 아래서는 무슨 소린지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바로 몇 십 미터 저쪽 바닥으로 무슨 물체가 ‘퍽’하고 떨어졌습니다.
  
  도서관 6층에서 경제학과 4학년 김태훈 학생이 “전두환 물러가라” “전두환 물러가라” “전두환 물러가라” 외치고 몸을 던진 것입니다.

  정신없이 몇 걸음 달려가다 규장각 출입문 기둥을 끌어안았습니다. 다리가 후둘후둘 떨려 더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학생들이 몰려들어 울부짖었습니다. 그 위로 전경들이 사과탄을 집어 던졌습니다. 아직 목숨이 붙어있을 지도 모르는 몸체 위에 최루탄 가스 분말이 하얗게 덮였습니다. 저들은 학생들을 쫓아버리고 쓰러진 김태훈의 육신을 빼앗아 갔습니다.

  부들부들 떨며 그 모양을 지켜보아야만 했습니다. 온 몸이 뻗뻗해졌븐디. 그 날 저녁 신림동 술집에서 술병과 술잔을 얼마나 집어 던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술에서 깨어난 뒤에도 도저히 공부할 기분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놈의 세상에서 공부는 해 무엇에 쓰랴 싶었습니다. 공부를 때려치우리라 마음먹고 운동하는 선배들을 찾아가 할 일을 찾았지요. 선배들이 저를 달랬습니다.


   세상을 바꾸려면 공부하는 사람도 필요해. 분통이 터지겠지만 꾹 참고 공부해. 나중에 공부 가지고도 할 일이 많을 거야


  광주에서 ‘꽃잎처럼’ 스러져간 수많은 젊은 넋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본 김태훈의 죽음은 역사와 현실에 대해 한 눈 팔지 말고 더욱 긴장하라는 아픈 채찍이 되었습니다.  

  규장각에서 책을 보다가도 김태훈이 떨어진 자리를 내다보면 오랫동안 가슴이 두근거리곤 하였습니다. 지금도 그 자리가 어디쯤인지 떠 오릅니다.

그 다음 해 3월 막 공해운동을 펼치던 최열 선배 결혼식에서 선생님을 처음 뵈었지요. 고문 후유증이 채 가시지 않은 몸인데도 선생님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꾸짖었습니다.


   이 땅의 팔팔하던 수많은 젊은이들은 어찌하여 결혼을 하면 훌륭한 남편과 착한 아내로 전락하느냐


  저도 새파란 나이에 후배나 제자 주례를 서면서 선생님이 하셨던 이 말을 그대로 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말에 기대 남편노릇 아빠노릇 제대로 못하는 저를 변명하기도 합니다. 달팽이 껍질 같은 가정 속에 또아리 틀고 안주하려는 노동자들의 가족이기주의를 꾸짖기도 합니다.

  1984년 2월 석사논문을 내고 8월부터 비정규직 노동자인 대학강사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그와 함께 선배들이 말하던 ‘공부 가지고도 할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은 시집 <젊은 날>에서 이렇게 하셨더군요.

   나는
   일생을
   저 가난의 근원과 싸우리라 하고
  
  제가 작정한 일은 노동자 민중의 역사를 연구하고 그 것을 주인들에게 돌려주는 노동자 민중교육이었습니다. 제가 공부하는 역사가 역사의 주체인 노동자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을 만드는 무기로 쓰여야 한다고 다짐했습니다. 햇수로 따져보니 2002년 올해 19년째입니다. 그 동안 제 뜻으로 그 길에서 벗어난 적은 없었습니다.

  투쟁의 현장에서 새롭게 불려지는 민중가요를 부지런히 따라 불렀습니다. 어느 곳에서든 민중가요를 함께 부를 수 있는 것도 운동성을 잃지 않는 방편이라고 생각했지요. 그 가운데 1980년대를 넘어 1990년대를 지나 지금까지도 끈질기게 불리는 노래가 바로 1982년 만들어진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습니다.

  1981년은 광주민중항쟁을 꼼꼼히 따져가며 새로운 운동을 모색하는 해이기도 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1980년 5월, 그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지’하며 부끄러움과 죄책감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가슴을 쥐어뜯고 있었습니다. 술에 취하면 ‘보고 싶은 얼굴’을 부르며 흐느적거렸습니다.  


  눈을 감고 걸어도 눈을 뜨고 걸어도 보이는 것은 초라한 모습 보고 싶은 얼굴.......


  1982년 2월 광주 지역의 연행 예술 운동패가 노래 굿을 만들었습니다. 시민군 대변인으로 끝까지 도청을 지키다가 5월 27일 새벽 목숨을 잃은 윤상원 열사와 들불 야학을 같이하다 연탄가스 사고로 먼저 숨진 후배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을 준비하였습니다. 영혼결혼식을 위해 만든 노래 굿 ‘넋풀이(빛의 결혼식)’에 ‘임을 위한 행진곡’이 들어있었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면 선생님의 시집 <젊은 날>에 들어 있는 ‘가신 님’ ‘우리들의 합창’ 같은 시들이 떠오릅니다.      


  고개 들면 네 귀퉁이
  팍삭 꺼지는 무덤가
  사랑도 명예도
  흙 한 줌 남김없이
  한평생 달구자던
  피맺힌 통일에의 의지가
  예까지 왔는가 일러주던 그 님아

  동지는 간 데 없고
  푯말은 쓰러졌는데
  장부의 맺힌 이슬
  어디에다 뿌릴꼬

  쇠북은 찢어져
  바람은 증언인양
  일제히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삼천리 휘어감은
  백옥 같은 흰 구름
       ‘가신님’

  .............................

  이제는 가나니
  벗이여 결코 흔들리지 말라
  세상살이 무거운 짐
  허리가 휘어도
  나는 가나니
  벗이여 결코 뿔치지 말라
  우리들의 합창
  구천에 사무치는 우리들의 합창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우리들의 합창
  갈수록 우렁찬 우리들의 합창
      ‘우리들의 합창’


  백기완 선생님!
   저는 20대를, 열정과 격정의 1980년대를, 한 치 흔들림 없이 꼿꼿하게 살지는 못했습니다. 학문과 운동 사이에서 수없이 갈등을 겪으면서 괴로워하고 흔들렸습니다.
 
  20대를 보내고 30대에 접어들었을 때 벼르고 벼르던 지리산을 혼자 종주하고 무등산을 넘어 망월동을 찾았습니다. 지금은 구묘역이 된 광주 5월의 무덤들 앞에 술을 따르고 엎드려 ‘전진하는 5월’을 흐느껴 불렀습니다.


   저기 오네 젊은 넋들 들판 가로질러
   ......
   물러서지 않으리
   사슬 끊고 전진 하는 오월 오늘은  
   물러서지 않으리
  

   한 여름 망월동의 땡볕 아래서 그 동안 참았던 눈물을 펑펑 쏟으며 꺼이꺼이 울었습니다. 목이 쉴 정도로 끝까지 마음껏 울었습니다. 막혔던 가슴의 답답함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다짐을 하며 광주를 떠났습니다.


  그래, 이제 그만 ’광주‘에 대한 자책감에서 벗어나자.
  대신 결코 안주하지 말자.
  편안하게 살지 말자


그리고 1987년 6월항쟁과 7.8.9 노동자 투쟁의 회오리바람은 광주에 대한 회한을 좀 더 쓸어안고 갔습니다.

  선생님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에 들어 전국 200여 개가 넘던 노동자 민중운동 단체들이 노태우정권의 탄압과 운영난으로 빠르게 간판을 내리고 문을 닫았습니다. 동구 사회주의권이 무너지고 사회주의 소련연방이 해체되는 상황도 한 몫 했습니다.

  ‘세상과 대중이 급격하게 바뀌고 있다’는 말이 현실보다 더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운동이 끝났다고 고백하며 보따리 싸들고 떠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먹고사는 일이 절박하여 떠나는 사람들이야 어절 수 없었지만, 자본과 권력의 앞잡이가 된 자들이 웃으며 다가와 악수를 청할 때면 열불이 치솟았습니다.

  그런 날이면 술에 취해 휘청 거리며 밤길을 걷다 이런 노래를 부르며 욕을 해대기도 하였습니다.


   믿는다 믿어라 변치 말자 누가 먼저 말했던가 ~~~ 에라이, 씨발놈들아  


  남아 있던 단체들도 강의를 가보면 서너 사람만 앉아 있는 경우가 자주 있었습니다. 강좌를 준비한 사람들은 더 가슴이 아팠겠지요. 저도 속이 상해 7년 끊었던 담배를 그 즈음 다시 피게 되었습니다.

   1980년대에 제가 역사와 철학을 가지고 강의하던  해방 사회로 가는 길과 상이 과연 맞을까 하는 회의가 밀려들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역사 공부와 노동자 민중교육을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억압과 착취가 사라진 것도 아니었고, 노동자 민중의 고통스런 현실이 바뀌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현실은 역사의 산물이며 결과이므로 현실을 이해하고 바꾸려면 역사의 거울과 등대는 더 필요했습니다.

   남들이 어디로 가든 눈치 볼 것 없이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대로 살아 갈 것이고, 그것이 세상을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역사를 의심할 뿐 아니라 흥미까지 잃고 떠나는 대중을 예전과 같은 방식만 가지고는 불러 앉히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흥미를 느끼게 할 수 있을까, 영상 매체에 익숙한 학생들에게 좀 더 효과 있게 강의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이리저리 고민하였습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는 역사, 느낄 수 있는 역사 교육 방식을 찾아야 했습니다.  역사극도 해보고, 주제를 발표하고 토론하게 하는 방식을 써보기도 하였습니다.

  전체 강좌에 역사가 한두 번 들어 있는 대중교육에서는 또 다른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노래를 불러가며 근현대사를 훑어보기도 하였고, 역사를 좀 더 생생하고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역사기행을 적극 추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저러한 시도 끝에 도달한 방법이 사진 슬라이드, 시. 노래 테이프, 비디오테이프 같은 시청각 매체를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1992년부터 사진기를 들고 슬라이드 사진을 찍으며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수백 번을 넣고 빼고 순서를 바꾸어 가면서 정착한 것이 ‘슬라이드로 보는 노동운동사’입니다.

  광주민중항쟁 부분을 강의할 때 꼭 ‘임을 위한 행진곡’을 소개하곤 합니다. 1982년판 <젊은 날>에는 넣지 못했던 ‘묏비나리(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뛰우는)’의 다음 부분을 목소리 높여 낭송하기도 합니다.


  벗이여
  민중이 배짱에 불을 질러라

  꽹쇠는 갈라쳐 판을 열고
  장고는 몰아쳐 떼를 부르고
  징은 후려쳐 길을 내고
  북은 쌔려쳐 저 분단의 벽
  제국의 불야성, 왕창 쓸어안고 무너져라

  무너져 피에 젖은 대지 위엔
  먼저 간 투사들의 분에 겨운 사연들이
  이슬처럼 맺히고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 들릴지니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구비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갈대마져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산자여 따르라


  선생님 목소리를 흉내내며 소리 높여 외워주곤 했지요.

  IMF 구제 금융 이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광풍이 몰아치면서 노동자 민중의 삶과 운동이 휘청거렸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하는 일이 스스로 보람 있고 사회에서 쓸모 있으며, 누구나 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먹고 살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 모든 사람이 함께 자유롭고 평등하고 평화롭고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해방 공동체에 대한 꿈과 희망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이놈의 세상이 밀어낼수록 더 캄캄한 수렁일지라도 한 발자국만 더 밀어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다가 쓰러지더라도 단 한 치만이라도 더 밀어내보도록 하겠습니다.  (200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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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스크럼, 길 떠남

* NeoScrum님의 [서울 - 뱅쿠버 - 토론토 - 까라까스] 에 관련된 글.

아까 5시에 인천공항을 떠나서

10시간쯤 지나면 뱅쿠버에 도착한다고 했으니

지금쯤 뱅쿠버가 보이는 하늘 어드메쯤 떠 있겠군요.

 

93년, 386SX 모델의 개인용피씨에다가

2400bps 모뎀을 달고는 감개무량해서 통신공간을 헤매다가

하이텔 <바른통신을 위한 모임>에서 네오 동지를 알게 된 이후로

10년여의 나이 차이쯤 아랑곳없이 벌써 13년째 동지로 인연을 이어왔으니

네오 동지가 떠난 날 이 밤에 이런저런 추억에 휩싸이는 것이 무리는 아니겠지요.

 

민주노총 게시판 운영규정을 만들어서

마음에 안든다고 무조건 게시물 삭제부터 하려던 작자들에게서

그나마 자유게시판을 지켜냈던 일,

감시카메라(CCTV) 설치는 사용자의 전속적 권리라고 해석을 내린

유권해석에 열받아서

노동부에 쳐들어가 공무원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댔더니

이 공무원들, 당황하여 도망치거나 혹은 대들거나 했던 진풍경 하며,

이른바 김일성 동영상 문제로 하여

집행부 스스로 민주노총 자유게시판을 폐쇄했을 때

긴박하게 성명서를 조직하고 단병호 위원장께 빨리 열라고 난리를 쳤던

웃지도 못할 기막힌 해프닝 등등,

갖가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그저께 밤에는

하루 종일 이사하느라 힘든 모습으로 일산에서 종로로 달려왔고,

나는 경찰청 앞에서 하루종일 농성하느라 땀 꽤나 흘린 채로

반갑게 삼성타워 뒷골목으로 찾아들어가서

네오 동지가 주는 책 선물도 받고

늦은 밤에 대학로에서 달려온 미류님과 함께

소주 몇잔 정겹게 나누었습니다.

 

우주로 날아가지 않는 다음에야

통신을 통하면 만나지 못할 일도 없는데,

손 마주 잡을 거리에 있다는 것 하고

모니터에 비친 얼굴이나 마이크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를

하릴없이 보거나 듣는 것 하고는

강 건너로 지나는 바람 혹은 새떼들의 풍경처럼

애틋하고 아련한 거리가 있겠지요.

 

어쨋거나,

어렵사리 결심하고 떠난 먼 길,

더 멋지고 더 당당하게 사는 모습 거기서도 생생히 보내 주시고,

혁명을 꿈꾸고 노동자 민중에 대한 믿음을 소중히 안고가는

동지의 한결같은 삶의 자취들이 더욱 풍성해지기를 바랍니다.

 

그저께 밤에 함께 찍은 사진 하나, 여기에 올려 둡니다.

 

네오와 미류님이 함께 찍은 사진은,

샘낼 사람들이 제법 있을 터, 메일로 보내드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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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연맹 현장간부 합동수련회

-날짜: 2005. 5. 20 - 22

-장소: 충주호 리조트

-참석규모: 현장간부 1,100여명

-주요 일정:

 <20일>

입소식, 강연, 교육(영국, 독일, 스웨덴, 호주 등의 산별노조 사례 교육/ 공공서비스 시장화, 사유화 교육/ 비정규포럼), 분과-소산별노조 단위 자체 프로그램

 <21일>

공공산별노조 건설계획과 일정(안) 발표/ 100개조 분임토론/ 조장 모둠토론/ 지역별 모임/ 모둠토론 결과 발표/ 대동한마당과 결의의식/ 뒷풀이)

 <22일>

분과-소산별 대항 족구대회, 기타.

 

연맹 사무처와 현장 간부들이 조직위원회를 구성하여 거의 석달을 준비한 행사가 오늘 시작된다. 비정규악법 저지와 권리보장 입법쟁취 투쟁과 앞으로 이어질 단위노조들의 임단투를 제외하면 상반기의 가장 큰 사업이다.

 

참석규모가 1천명이 넘어가는 큰 행사가 되니까 정말로 장난이 아니다.

-어제 오후에 충주호 리조트에 미리 도착한 진행팀의 숫자가 60여명, 여느 수련회의 전체 참가자 수와 맛먹는다.

-모두 100개의 분임조가 분과별로 소속노조와 상관없이 편성되었고, 숙소는 노조별로 8명씩 140여개 방에 배정되었다. 이걸 일일이 사전에 편성하느라고 조직실장은 여러 날밤을 샜다.

-분과/소산별 자체 프로그램과 교육프로그램을 동시에 진행하기 위해 50-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13개의 강의실이 필요했다. 결국, 콘도 로비까지 강의실로 활용하게 되었다.

-1,100여명이 2박 3일간 종이컵을 사용하는 것을 추산해보니 어마어마했다. 아예 등산용 알루미늄컵을 기념품으로 주고 종이컵은 쓰지 않기로 했다.

-뒷풀이를 위해 소주 8백병, 맥주 80만cc, 돼지 6마리를 준비했다. 1천명이 1천cc의 맥주만 마셔도 무려 100만cc가 되니까, 모자랄 것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어쩔 수 없지.

 

어제 찍어둔 사진 두 장-

 

대강당 앞과 뒷 벽면에 걸린 현수막, 걸개그림, 깃발들이다.


 

덧붙여, 저는요, 수련회 끝나고 22일 밤이 되어야 다시 블로그든 인터넷이든 들어올 수 있겠네요. 모두들 안녕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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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인, 아주 정치적인...

* 손을 내밀어 우리님의 [보건의료노조에 보낼 공문 초안] 에 관련된 글.

서울대병원지부노동조합의 문제에 대한 처리가 6월의 첫 중집위로 늦춰졌다.

 

결코 가볍게 다루어질 사안은 아니지만

생각보다는 오래 끌고 있다.

보이지 않게 팽팽한 긴장이 지속되고

한켠에서는 전쟁이 이미 벌어지고 있다.

 

개인적인 생각이라도 정리하고자 했는데 그마저 한없이 미뤄지고 있다.

 

오늘까지 일단 상황에 대한 정리를 끝내고

다음 주부터는 대중적인 공론의 절차를 진행할 계획이다.

 

자료를 이것저것 검토하다 보니

보건의료노조에 보낸 두번째 공문을 여기 올린다는 것을 잊었다.

 

두번째 공문을 쓰면서

'정치적인, 아주 정치적인 행위'라는 생각이 자꾸 나를 두들겨서,

이 평범한 단어를 사전에서 찾게까지 몰아갔다.

 

정치적(2)으로 풀어갈 수 없는 문제를

그 과정에서 상식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정치적 언술이나 늘어놓는 것은

참으로 고역이다.

정치적

1. 정치에 관한 (것). 정치성을 띤 (건). 예> 정치적 문제, 정치적인 사건.

2. 사무적이 아니고 흥정이나 교섭에 의하는 (것), 예> 정치적 방법, 정치적인 타결

 



날짜: 2005. 5. 13.

수신: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위원장

참조: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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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정규 개악법안 저지! 비정규 권리보장 입법쟁취! 귀 노동조합의 건승과 산별교섭 승리를 기원합니다.

2. 우리 연맹이 귀 노동조합에 보낸 ‘서울대병원지부노동조합의 가맹 요청에 대한 공공연맹의 입장 알림’(공공조직 2005 - 261호, 2005. 4. 15)에 이어, 아래와 같이 우리 연맹의 입장을 다시 한번 알려 드리오니 회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아    래 -

(1) 귀 노동조합은 우리 연맹의 위 공문에 대한 회신을 대신하여 양 조직의 임원 간담회를 열 것을 제안하였고, 이에 따라 지난 5월 4일 오전 9시 전국철도노조 회의실에서 귀 노동조합의 윤영규 위원장과 우리 연맹의 박정규 수석부위원장을 대표로 하여 각 6명의 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임원간담회를 진행하였습니다.

(2) 이 간담회에서 귀 노동조합은 우리 연맹이 서울대학교병원지부노동조합의 가맹신청을 승인하지 말고 충분한 시간을 달라고 요청하였고, 아울러 서울대학교병원지부의 탈퇴가 귀 노동조합의 규약을 위반하였기에 여전히 귀 노동조합의 지부로서 지위가 유지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우리 연맹 뿐만 아니라 여타 어떤 상급단체를 선택해서도 아니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서울대학교병원지부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민주노총에 중재를 요청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 연맹은 귀 노동조합이 서울대학교병원지부와 관계를 정상적으로 회복하기 위한 구체적인 조치를 취해 줄 것을 주문하였고, 5월말까지는 서울대학교병원지부노동조합의 가맹 신청을 처리하지 않고 기다리겠다고 응답하였습니다.

(3) 이러한 사실은 우리 연맹 제10차 중앙집행위원회(2005. 5. 4, 전국철도노조 회의실)에 구두로 보고되었고, 그 이후 귀 노동조합의 중재 요청에 따라 이루어진 총연맹 사무총장과 우리 연맹 위원장과의 면담 결과까지 포함하여 제11차 중앙집행위원회(2005. 5. 11, 한국가스공사 연수원)에서 심의안건으로 다루어졌습니다. 제11차 중앙집행위원회는 귀 노동조합과의 임원간담회 결과와 총연맹의 중재 노력 등을 감안하여 5월말까지 경과를 지켜보고 6월 첫 중앙집행위원회(2005. 6. 8, 예정)에서 서울대학교병원지부노동조합의 가맹 여부를 결정하기로 하였습니다.

(4) 우리 연맹은 여전히 귀 노동조합과 서울대학교병원지부노동조합이 정상적으로 관계를 회복하여 의료공공성 실현과 더 나은 산별협약 쟁취를 위해 하나되어 투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며, 따라서 서울대병원지부노동조합과의 관계를 복원하기 위한 귀 노동조합의 노력이 좋은 결실을 거두기를 바랍니다. 다만, 연맹 규약과 그 동안의 중앙집행위원회의 결정사항에 의거하여 서울대학교병원지부노동조합의 가맹 승인 여부를 무작정 미룰 수도 없다는 것이 우리 연맹의 사정이기도 합니다.

(5) 이러한 상황 인식을 바탕으로 ▷ 귀 노동조합이 서울대학교병원지부와의 관계를 복원하기 위하여 어떤 노력을 진행하여 왔는지 또 그 성과가 어떠한지, ▷ 서울대학교병원지부노동조합의 가맹 신청에 관해 귀 노동조합이 기왕에 밝힌 입장에 더할 것이 있는지, 가급적 6월 3일 이전에 서면으로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귀 노동조합의 답변은 우리 연맹 중앙집행위원회에 원문 그대로 첨부될 것이지만, 별도의 회신이 없을 경우에는 지난 5월 4일 양 조직의 임원간담회에서 귀 노동조합이 밝혔던 내용을 요약하여 자료로 활용할 것입니다.

(6) 덧붙여, 우리 연맹은 서울대학교병원지부노동조합의 가맹 승인 여부를 놓고 귀 노동조합과 오랜 기간 형성해온 신뢰와 연대의 정신을 해칠 만큼 과도하게 논란이 진행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귀 노동조합의 의견과 서울대학교병원지부노동조합의 입장, 그리고 우리 연맹 조합원들과 중앙집행위원들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민주노조운동의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 결정에 도달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지만, 귀 노동조합 또한 우리 연맹의 어려운 입장을 충분히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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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이 싫어

뭐, 푸념이나 넋두리하는 거 아니구요-

블로그가 너무 적적한 것 같아서 흔적이나 남기는 것이지요.

 

월요일 새벽 3시 50분에 일어났걸랑요,

각설하고 중략하고

가방 매고

반찬 한보따리에다가 밥 한그릇 들고

연맹 사무실에 왔더니 어느새 아침 8시.

 

임원회의는 그래도 일찍 끝났어요.

9시 40분밖에 안되었지요.

 

10시에 시작하기로 되어 있는 임원-사무처 회의는

복사기가 조금 말썽을 부려 10시 30분이 되어서야 시작했구요,

점심도 안먹고 2시까지 내달렸는데, 밥 굶긴다고 원성이 자자했지요.

 

도시락 까먹고

평소에는 그냥 지나치던

3시 20분부터 조직실 점검회의하는데 참관했어요.

근데 이게 7시 30분이나 되어서 끝났답니다.

 

5시부터 수련회 조직위원회 기획팀 회의가 있기로 했지만

모든 회의가 끝난 다음으로 미루고,

낮에 미처 끝내지 못한

임원-사무처의 산별노조 건설 방침에 관한 토론은

7시에 속개하기로 했었는데 덩달아 8시로 늦춰졌네요.

 

그 사이에

잠깐 떡라면과 김밥으로 저녁밥을 해치웠고,

8시부터 시작한 산별 토론은

팽팽한 긴장과 짜증이 적당히 섞여 재미있기만 했는데

그게 밤 11시 30분까지 그냥 가버렸구요.

 

조직실 회의에 밀려 못했던 수련회 기획팀 회의는

11시 30분이 되어서야 간신히 시작할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늦은 시간이라서 30분만에 금세 끝냈지요.

도대체 회의를 몇 개나 해치운 거야?

 

12시부터는

맥주 한잔 마셨어요.

무의도인지 어딘지 섬으로 교육을 가신

위원장 동지를 빼고는 임원 7명이 모두 모였고,

새벽 2시까지 술이 술술 잘 넘어가더라구요.

 

이제는 좀 쉴 수 있나 했더니

요즘 사람들은 노래방을 왜 이리도 좋아하는지

옆에서 박수 치다가 고래고래 고함도 지르다가

남아 있던 사람들에게 장단 맞추다 보니까

새벽 3시 반이 지나고 있더라구요.

 

살다 보면

24시간을 이렇게 뜬 눈으로 보내기도 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도

하고 싶지 않은 말도

그 사이에 차곡차곡 쌓이기도 하는 법,

아직도 나머지 일을 하고 있는

동지가 있는 사무실에 돌아오니

아까 가볍게 마신 맥주 몇 잔이 문득 아쉬워...

 

가만히 사방을 살핍니다.

월요일이 또 이렇게 도망가 버렸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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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성 선생님 혹은 동지 근황

휴일 전날이라서 기차표가 모두 매진되어서

용산역에 가서 호남선 기차를 타고 오는데

낯선 전화번호가 찍히면서 전화가 왔다.

-박준성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환하게 웃으며 전하셨다.

반갑고 기쁜 소식일 수밖에...

 

그래서

흔적만 남긴다.

아래 내용은 박선생님이 직접

하종강의 노동과 꿈에 남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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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 후에 봅시다"
암 환자들이 가장 듣고 싶어하는 말입니다.
재작년  11월 14일 성동주민병원에서 암이 의심되니까
정밀진단을 받아보라는 말을 들은 뒤  
1년 반만에 이 말을 들었습니다.
'전이가 됐던 것이라 조심스럽긴 하지만'이라는
단서가 붙고,
몇 년 동안 재발이 없어야 '완치' 판정을 받겠지만,
휴~~ 일단 안심이 됩니다.
그동안 걱정해주시고 도와주신 분들께
두루 감사인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2003
11.14 : 성동주민병원 건강검진, '암 의심' 정밀검사
11.21 : 성동주민병원, 큰 병원가서 정밀검사 요
11.25 : 아산중앙병원, 정밀검사
12.10 : 검사 결과 '암 가능성'
12.22 : 1차 입원(~2004.1.1), 조직 검사, 간암 판정, 1차 간 색전술

2004
01.01 : 1차 입원 퇴원
01.30-02.01 : 실상사 자연의학 강좌, 간암 처방
02.24-02.29  : 2차 입원, 2차 간 색전술
04.19-04.25  : 3차 입원, 3차 간 색전술, 임파선 전이 통보
04. 27 : 임파선 방사선 모의 치료
04.28-06.02 : 방사선 치료 24회
07.28 : 춘천 생기마을, 제1회 건강수련회 참가, 음식 처방(->현재)
12.31 : 녹색 대학 건강단식(~2005. 01.03)

2005
05.04 : '6개월 후 검사.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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