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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빈곤에 시달리는 '엄마 노동자'

  • 등록일
    2005/01/13 15:02
  • 수정일
    2005/01/13 15:02
노무현 시대의 레미제라블… 고연령 여성노동자 이정은 기자 leeche2001@hotmail.com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어깨를 축 늘어뜨린 남편을 조용히 따라 걷던 아내가 갑자기 노래를 부른다. 아들은 '원더풀 원더풀 아빠의 청춘'을 예찬하고, 친구는 '거치른 벌판으로 달려가자'며 재롱을 피운다. 2004년 한 해 광고계는 '고개 숙인 아버지를 살려내자'는 이른바 '아빠 마케팅'으로 쏠쏠한 재미를 봤다. 교보생명의 '마음에 힘이 되는 시하나, 노래 하나' 시리즈는 아빠를 응원하는 아들, 친구, 아내의 노래자락에 힘입어 2004 대한민국광고대상을 거머쥐기까지 했다.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면서 '시대의 거울'이라는 광고계는 '아빠 편 응원하기'에 '올인'하는 모양새다. 그런데 도무지 엄마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엄마는 어디 있을까. 아빠가 그렇게 힘들다는데 엄마들은 그저 캔디 노래만 부르며 살고 있는 것일까.


57세의 김연자씨는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다. 아니 "울고 앉아 있을 시간이 어딨냐"고 되묻는다. 두 아이를 둔 평벙한 가정주부였던 김씨는 서너 해전 남편이 실직한 후 "정말 닥치는 대로 일자리를 구하러 뛰어다"니는 처지로 전락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김씨는 매일 새벽마다 시장에 나가 일거리를 구해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 수 있는 일용직 노동자였다. "아침에 시장에 가면 그날그날 일을 준다고. 앉아서 비닐만 붙이는 건데, 요즘엔 불경기라고 일자리가 많이 줄었어. 그 나마도 젊은 사람들이 모여드니까… 나는 밀려난 거지 뭐." 비닐 붙이기, 목재소, 식당 등 일용직 일자리를 전전했다는 그는 지금은 한 대학에서 청소를 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같이 나이 먹은 사람들이 어디서 뭘 하겠어. 평생 살림만 했으니 뭐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맨 청소나 빨래 같은 거 하는 거지." 그는 연신 마른손을 비벼댔다. 한낮이었지만 역시 겨울답게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다. 한창 학교에서 일을 할 시간, 김연자씨는 오전 일을 마치고 비정규직 집회가 한창인 여의도 아스팔트 위에 앉아 있었다. 민주노총의 총파업 일정보다 이틀 앞선 11월 24일, 연단에 선 비정규노조 간부들은 "비정규직 개악 안이 철회될 때까지 투쟁을 계속할 것"을 다짐하고 있었다. 김연자씨는 기자의 질문에 답하는 순간에도 무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노조 간부들의 삭발식이 진행될 때는 눈가에 눈물이 그렁 맺혔고, 스피커에서 단결투쟁가가 흘러나오자 박자에 맞춰 팔뚝질이 아닌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가 이 날 집회에 참석한 이유는 단 하나. "지금 하는 일이라도 안정적으로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전하기 위해서다. 오전 6시부터 오후 4시까지 대학 내 교수실, 강의실 등을 돌아다니며 청소하는 게 김씨의 '지금 하는 일'이란다. 김씨의 설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위에 있던 동료들이 출근 시간을 "5시" "5시"라고 정정한다. "학생들이 오기 전에 강의실을 다 치우라고 하는데 6시부터 시작하면 다 할 수가 없거든. 그래서 아줌마들이 미리 5시쯤 와서 청소를 한다고. 한 사람이 강의실 6개를 맡아 치우거든. 학생들이 다 수업 들어가면 그때부터 교수실, 화장실, 복도를 치우는 거지." 요즘 김연자씨는 하루에 10시간, 아니 11시간을 추위와 싸우고 있다. 한번 허리를 펼 여유도 없이 일을 해 버는 돈은 한 달 66만원. 그나마 노조라는 것에 가입하고 나서 몇 만원이 더 오른 것이라며 "아줌마들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어 참 고맙다"고 짧게 덧붙였다. 김연자씨는 월급을 공개하며 "반찬값이라도 벌려고 하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집안에서 그는 "이 일자리를 잃으면 생계가 막막"한 가장이었다. 인터뷰 말미 그가 가만이 되물었다. "우리가 정규직인가 뭔가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아예 없는 것이냐"고. "불공평한 것 아니냐" '아줌마 구함' 공고가 작게 나붙은 한 식당. 가게문을 조심스레 밀고 들어 온 한 여성이 주인에게 이것저것을 묻고 꾸벅 인사를 하더니 금새 나간다. 일자리를 구하려는 모양이었다. "여기 식당에 자리가 있다고 해서 들어 가봤죠. 요즘에는 식당 일자리도 얼마나 구하기 힘들다고요. 연락 준다고 하니까 기다려 보는 거죠." 최숙희(가명·55)씨는 벌써 십 년 가까이 이렇게 일자리를 구해왔다. 어느 정도 노하우가 생길 만도 한데 아직도 일자리를 구하는 건 참 힘들다. "식당 일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라 경력이 있다고 돈을 더 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른 직장에 비해 이런 식당이 "일 구하기는 그나마 쉬운 편"이라고 한다. 주로 야채를 다듬고, 설거지를 하고, 음식을 나르는데 월급은 평균 70만원 정도라고 짧게 일렀다. "힘들지 않느냐"고 괜한 질문을 던졌더니, 최숙희씨는 학교에서 급식 일을 하는 것 보단 백 배 낫다고 혀를 내둘렀다. 최씨는 지난 2년 간 한 중학교 급식실에서 주방 보조로 일을 했단다. "식당 일은 너무 늦게 끝나(평균 오후 9시) 아이들을 돌볼 수 없어 힘들었는데 급식은 일찍 끝나서 좋았다"고 했다. 최숙희씨는 오전 8시부터 오후 3시까지 1200여 명에 이르는 학생들의 점심을 준비했다. 그리고 시간당 3700원을 받았다. 매달 40∼50만원 정도가 고정적인 수입이었다. 그나마도 주말이나 방학 때는 소득이 없어 "먹고살기 참 힘들구나" 생각이 들었다. 최씨는 "선생님들은 방학 때도 월급을 주는데 왜 우리는 그런 게 없는 지 모르겠다"며 "불공평한 것 아니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학교나 용역 회사측에 내놓고 물어본 적은 없다고 했다. 몸이 불편해 하루 쉬는 것도 눈치가 보이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학교에서야 아쉬울 게 없잖아. 내가 나가면 또 다른 아줌마를 쓰면 되는 거니까. 힘든 사람이 나가야지. 그래도 그 급식 일이란 게 얼마나 힘든 지 몰라. 밥솥은 또 얼마나 무거운지. 아줌마 몇 명이서 들어 나르기엔 정말 무겁다고. 겨울엔 좀 낫지만 여름엔 또 얼마나 덥다고. 설거지 할 땐 무조건 뜨거운 물로 하라고 하지, 밥솥에서는 김은 계속 나오지 겨울이라도 조리실 안에서 일하다 보면 땀이 줄줄 날 정도야. 난 그 일하면서 골병 다 들었어." 최숙희씨는 가정 형편 때문에도 일을 하지만, 사실 수년 전 다단계 사업에 빠져들어 곤욕을 치른 경험이 있었다. 그는 내내 "내가 너무 순진했다"고 반복했다. 몇 번 교육을 받아보니 금새 돈을 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100만원을 넣으면 200만원이 돼서 나올 거라고 철썩 같이 믿었는데 얼마후 정신을 차려보니 그에게 남겨진 것은 1000만원 가량의 빛뿐이었다. "사회생활의 경험이 없어서, 또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다보니 그런 일도 있었다"며 말을 줄인다. 김연자씨나 최숙희씨는 공통적으로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잘 살진 못했지만 남부러울 것 없는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의 여파로 남편들이 일자리를 잃고 주 수입원이 끊기면서 노동시장에 뛰어 들게 되었다. 한 통계에 의하면 이들처럼 임시·일용직을 전전하는 여성 가구주 중 무려 61.3%가 100만원 미만의 소득으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는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류정순, '여성과 빈곤' 2004). 외환위기 이후 여성 가구주의 폭발적인 증가와 이에 반비례하는 노동조건의 악화는 여성의 빈곤화는 물론 한국의 빈곤계층이 확대되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통계청의 '가구소비실태조사' 결과, 1980년 15.1%였던 여성 가구주 비율은 1990년 15.7%에서 2000년 18.5%로 증가한 것으로 드러났다. 문제는 같은 기간, 여성가구주의 빈곤율이 8.3%에서 16.9%로 두 배 이상 뛰어 올랐다는 것이다. 석재은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여성가구주가 증가하는 동시에 여성 가구주 중 빈곤 여성가구주의 비중이 커진다는 것은 빈곤의 여성화를 보여주는 중요 지표"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남성가구주 가구의 경우 빈곤율이 경제위기 이전 수준으로 거의 회복된 것으로 드러난 반면, 여성가구주 가구의 경우 경제위기 이전보다 거의 3% 높은 빈곤율을 보이고 있다. 이는 경제위기 이전의 2/3 수준으로만 회복된 것"이라며 "여성 빈곤의 고착화 현상이 시작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65세 정희 할머니의 아기 돌보기 더욱 시급한 문제는 시간이 지나 이들의 연령이 높아질 수록 여성의 빈곤 정도가 심화된다는 것이다. 현재 전체 빈곤 여성가구주 중 65세 이상의 여성가구주가 절반에 이르는 53.2%를 차지하고 있다. 1996년의 34.3%에 비해 급증한 수치다. 같은 기간 여성노인가구가 7.2% 증가한 것을 감안하면 여성노인가구주 사이에 빈곤화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심화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이들은 또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한낮, 잠시 햇살이 난 놀이터에 서너살바기 아이 손을 이끈 엄마들이 모여들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모여 놀이기구 타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조금 떨어진 나무 의자에 몇몇 엄마들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30대 초반의 젊은 엄마들 사이에 머리가 희끗한 한 할머니가 눈에 띄었다. 이들은 할머니는 '지우 할머니'라고 불렀다. "친손자처럼 생각하고 보살피면 친손자 아니야." 지우 할머니가 데리고 온 아이는 친손자가 아니라고 했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 몸이라도 뉘일 곳을 찾다가 이 곳 까지 오게됐다"는 할머니는 가정집에 들어가 아이를 봐주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집안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가족들의 이야기를 묻자 지우 할머니는 입을 꼭 다물었다. 지우 할머니의 말을 거들던 정희 할머니(53)도 사정은 별로 다르지 않았다. "가계에 보태려고" 아이 돌보기를 시작한 정희 할머니는 오전 8시부터 오후 7시까지 아이를 본다고 했다. 하루에 무려 11시간 동안 일을 하지만 한 달 수입은 70만원 선. "무엇이 가장 힘드냐"고 묻자 정희 할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를 꺼냈다. "아주 잠깐이었어. 아주 잠깐 한 눈 판 사이에 애가 다리미를 만졌나봐. 종아리에 작게 화상을 입었어. 다리미가 그렇게 뜨겁진 않았지만 그래도 겁이 덜컥 나더라고. 애를 업고 병원에 달려가는데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 병원에서는 나중에 흉터는 안 남는다고 했지만 그래도 얼마나 걱정이 되던지. 치료비? 내 돈으로 다 했지. 애 엄마는 병원비 주겠다고 했는데 내가 싫다고 했어. 내 실수니까. TV보니까 그러데, 6살 미만은 보호자의 책임이라고. 그래도 애 엄마가 착해서 별 말은 없더라고. 고맙지 뭐." 정희 할머니는 좀더 젊었더라면, 좀더 여유가 있다면 인테리어 공부를 해서 전문직에서 일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을 위한 투자가 영 어색하기만 한 정희 할머니는 평생 가사노동은 물론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지우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의 모습이 보였다. 평생 일해 온 이들, 도대체 이들은 노인이 되어서까지 별반 다를 것 없는 빈곤에 시달리고 있는 것일까. "여성의 노동은 주로 가사노동에 국한된다. 사회에서 일을 해도 대부분이 가사에 관련된 임시직, 또는 비정규직이었기 때문에 4대 보험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했다. 따로 돈을 저축하기도 힘들만큼 저임금에 시달려 온 터라 노년을 대비할 겨를도 없었다. 노년에 안정장치가 전혀 없는 것이다. 정규직으로 일을 했다 하더라도 제 몫의 연금을 찾아 쓰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한국 사회는 사별한 남편 연금의 절반 정도를 유족연금으로 남기고 있는데 여성이 이 연금을 타기 위해서는 자신의 연금과 비교해 한 가지만 선택하도록 하고 있다. 대부분 남편의 임금이 높았기 때문에 유족연금을 타게 된다. 평생 자신이 일한 부분에 대한 대가는 한 푼도 건지지 못하는 것이다. 최소한 한국에서는 여성이 일을 하나 안 하나 노후는 똑같이 빈곤할 수 밖에 없다." 유정순 한국빈곤문제연구소 소장은 "남성부양자모델을 중심으로 한 현행 국민연금 제도에서 여성의 노동은 인정되지 않는다"며 여성 노동의 주를 차지하는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에 대한 사회적 재평가가 시급하다고 말한다. 이미 몇 몇 국가에서는 공적연금을 여성 빈곤 완화를 위한 효과적인 정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연구 결과도 등장했다. 석재은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연금수급권이 노동시장에서의 경제활동에 의해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정 내에서의 돌봄노동 기간을 연금기여기간으로 간주하는 연금 크레딧 제도를 도입하거나(독일, 일본 등), 돌봄노동에 대한 사회적 보상제도를 도입하거나(북유럽, 영국, 아일랜드 등)하는 등 무급의 가족 돌봄노동을 사회적 현금보상을 통해 유급 노동으로 전환시키는 정책방안도 궁극적으로 빈곤의 성적격차를 해소하고 '빈곤의 여성화'를 예방할 수 있는 적극적 정책"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가사노동의 사회화 어떻게 가능할까 취재를 위해 마지막으로 만나 본 서금순(47)씨는 일반 가정집을 돌아다니며 가사노동을 돕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파출부라 불렸을 일이지만 지금은 '가정관리사'라는 그럴듯한 명칭도 생겨났다. 서씨는 한 주에 네 집을 돌며 가사노동을 하고 있다. 하루에 4시간 정도씩 일하고 평균 2만 5천 원을 받는다. 가정형편 때문에 학교를 중간에 포기한 둘째 딸을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더 일을 해 돈을 모아야 하지만, 이젠 이 일마저 자리가 많지 않아 걱정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런 서씨에게 얼마 전 "기분 좋은 일이 하나 생겼다." 서금순씨와 같은 가정관리사는 전국에 15만여 명 정도. 이들을 위한 '전국가정관리사협회'가 지난 11월 25일 출범식을 열고 △가사도우미의 전문 직업화 △가사, 간병, 돌봄 노동에 대한 사회적 재평가 △고용보험 등 4대 보험 적용을 위한 제도 개선 등을 선포했다. 이 협회 소속인 서금순씨는 아직은 저녁에 모여 서로의 경험을 주고받으며 위로하는 수준이지만 그 것 만으로도 "집에 가기 싫을 만큼" 재미있고 힘이 된다고 말했다. "협회를 통해 더 많은 일자리를 나눌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또 일하다 다쳤을 때도 정당한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전에는 어디서 치료비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돈이 아까워 아프다는 소리 한 번 못하고 혼자 응급처치를 하고 끝냈는데…. 나 혼자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일을 구하고 할 때는 이런 것들이 가능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다같이 모여서 이야기하다 보니 어쩌면 꿈만 꿔왔던 일들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좋다." 물론 협회가 만들어 졌다고 당장 해결책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같은 일을 하는 노동자들과 만나 이야기하다보니 내가 더 열악한 조건에 처한 것 같아 속상할 때도 있다. 아직까지는 그저 "서로 참으라고 토닥"이는 정도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전문 직업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됐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김경희 한국여성노동자회협의회 총무국장은 "노동시장에 진입하기 어려웠던 주부들이 가정관리사를 통해 일을 시작해 왔지만,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부분 때문에 불이익을 많이 당했었다. 협회가 만들어지면서 가정관리사라는 명칭이 폭넓게 쓰여지고, 더불어 전문적인 교육을 통해 전문직업인으로 거듭날 것으로 기대한다. 물론 이와 함께 사회적 인식을 바꿔나가는 작업도 진행될 것이다." 그는 가사노동의 사회화가 그렇게 돈과 시간이 많이 드는 어려운 일이 아님을 강조했다. "일하는 여성의 직장·가정 양립을 가능하게 함은 물론 더 많은 여성들에게 안정적인 많은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정관리사가 집안 일을 하고 가면 이에 대한 서비스 요금을 지불하는 여성에게 그 요금만큼 세금공제정책을 실시하는 건 어떤가. 일을 하는 여성에게는 가사 부담에서 벗어나 직장·가정 생활을 양립하는데 도움되어 좋고, 가사 일을 하는 가정관리사로서는 더 많은 일자리 확보해 수입이 보장되니 좋아 이중·삼중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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