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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 이야기....

  • 등록일
    2004/09/02 03:53
  • 수정일
    2004/09/02 03:53

시골에서는 TV가 없어 전설의 고향은 볼 수 없었지만, 할머니들로 부터 듣던 옛날 이야기가 있어서 지루함이 없는 여름방학을 유년시절에 보낸 기억이 난다.

 

시골 할머니들은 이야기 보따리 장수였다. 아이들은 할머니들에게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면 할머니는 잠시 머뭇거렸다가 이내 이야기를 토해낸다. 참신기하다. 할머니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보따리 장수의 봇짐처럼 계속해서 터저나온다. 우리는 이런 할머니 말에 귀를 쫑긋거리며 이야기를 듣는다. 참 행복했던 시간이다.

 

여름 저녁이면 어김없이 마을 아이들은 동네에 있는 문중집에 모여서 짚을 테워가며 모기불을 지피고, 밭에서 금방타온 참외와 수박을 먹으면서 동네 할머니로 부터 이야기를 듣는다. 이야기의 백미는 뭐니뭐니 해도 도깨비 이야기이다.

 

무서우면서도 참으로 기대되는 이야기이다.

이야기가 절정에 다달아 무서운 느낌이 들면 귀를 막아보지만 이내 궁금증으로 귀를 막았던 손은 풀리고, 할머니의 이야기를 가슴졸이며 듣는다.

참으로 무서우면서도 재미난 이야기이다. 동화책에서 나오는 이야기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이야기 여름밤 별들과 모기불의 조화 속에서 듣는 귀신이야기는 오금을 절이지만 무서움 속에 소박함이 깃들여져 있어서 참 재미났던 기억이 난다.

 

여름밤 참 무덥지만 이야기가 있고, 마을 어른신들과 아이들이 정겹게 뛰어노는 여유로움이 있어서 참 좋았다.

 

시골에 이젠느 이야기를 들을만한 아이들이 없다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내가 들은 도깨비 이야기를 함 소개해 보고자 한다.



시골 농사일을 하는 아주 젊은 장성한 사내가 있었다.

이 사내는 농사일은 잘하나 늘 술을 즐겨먹는 터라 농사일을 파하면 마을 읍내로 나가서 얼큰하게 취해 오는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던 어느날 이 젊은이는 어김없이 술이 얼큰히 취해서 마을 길을 들어오는데, 웬 빗자루 한자루가 길 한복판에 있는게 아닌가? 이에 술이 얼큰히 취한 젊은이는 빗자루가 가는 길에 누워져 길을 막고 있어 빗자루를 길 옆 개천가로 던저 버리고 만다.

 

이 빗자루는 도깨비가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숨어 있던 도깨비의 변신된 모습이었다. 개천가로 내버려진 빗자루 아니 도깨비는 자신을 내던진 것에 분노를 하지만 사람의 눈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화가 났지만 화를 풀고 그냥 그 젊은이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청년은 빗자루를 내던지후 무슨 영문인지 도통 그자리를 뜨질 않고 노상방뇨를 한 후 그 자리에 철퍼덩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밤에 활동하는 도깨비는 이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었다. 시간이 삼경이 되어가도 청년이 그 자리를 떠나지 앉아 도깨비는 묘안을 내오기로 하였다.

 

도깨비는 청년을 놀래기 위해서 호랑이로 변신하여 청년을 놀래킬 요량으로 호랑이 울음을 내면서 청년을 소리로 위협하였다. 그러나 청년은 술이 만취해 있어서 호랑이 소리를 듣지 못하고 그냥 그자리에 돌부처 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던가.... 이에 도깨비는 다시 여우(우리시골에서 전설에서는 여우는 처녀 귀신과 동일하게 무서움의 대상이다.)로 변신하여 청년을 혼내키지만 청년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여러방법을 써보 청년이 움직이지 않자 도깨비는 곰곰히 생각에 잡겹다. 마지막 수단을 강구하게 된다. 도깨비는 마지막 수단으로 장수로 변신한 것이다. 장수로 변한 도깨비는 청년에게 가서 술에 취한 청년이 집에 갈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청년은 술에 만취한 나머지 그 자리를 틀 수 없는 상태였다. 이에 도깨비는 술 취한 청년에게 만취했지만 내기를 권유하였다.

 

자신과 씨름을 해서 이기면 자신이 갖고 있는 보물을 내어주고, 청년이 평생 마실 수 있는 술을 주겠다고, 청년은 술에 만취하였지만 보물보다는 평생 마실 술을 준다는 말에 번득이며 도깨비의 청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도깨비와 씨름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청년도 농사일로 다져진 몸이라 술이 만취하였다 하여도 힘은 장사 못지않는 괴력을 발휘하였다. 이에 도깨비와 청년은 시간이 계속 흐르는데도 계속하여 승부를 보지 못하고 서로 힘을 쓰면서 서로 이기려고 안간힘을 썼다.

 

도깨비인 장수와 젊은 청년은 계속해도 승부수가 나지 않았다. 서로 진땀을 흘리면서 서로 팽팽하게 허리를 부여잡을 뿐 도저히 승부가 나질 않았다. 그러기를 몇시간이 흐른후 첫닭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갑자기 같이 힘겨루기를 하던 장수는 펑 하더니 사그러 들더니 사라지고 마는 것이 아닌가? 청년은 이 소리에 놀라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일어나보니 장수는 온데간데 없고 앞에는 피뭊은 빗자루 한자루가 보이는 것이 아닌가? 청년은 놀라 소스라쳐 마을로 주랭낭을 쳤고, 이 일을 촌장에게 말했다.

 

청년을 이야기를 들은 촌장은 깜짝놀라더니 젊은 청년에게 저승사자에게 잡혀갈뻔하였다고 청년에게 말하고는 그 빚자루가 있는 자리로 같이 가자고 말했다. 두려움이 들었던 청년은 촌장의 말에 따라 그 빚자루가 있는 곳으로 촌장과 마을 주민 몇몇과 함께 같다.

 

청년이 본 빗자루를 유심히 살펴보니 그 빗자루에는 피자국이 있었다. 이에 촌장은 이 피로 인해 도깨비가 이 빗자루에 깃들었던 것 같다며.... 이 빗자루를 태우기로 하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빗자루를 태웠다. 촌장은 태우고 난 후 도깨비가 분노하여 도깨비불로 마을을 습격할 것을 두려워하여, 태운 빗자루를 정성드려 수집한 후 제를 지내고, 도깨비가 이 마을에 나타가지 말 것을 청하였다.

 

풍성한 제를 지내지 않으면 도깨비의 진노가 마을에 미쳐 한해 농사를 미치는 일이 다반사였던 터라 도깨비불이 나타나지 말게 해달라고 도깨비에게 빌고, 산신에게 빌었다. 정중한 제를 지낸 후 마을 청년에게 10일간 금주령을 내렸다. 금주령을 어기면 도깨비 나타나 마을을 어지롭힌다고 대부분 도깨비가 깃든 물건은 태운후 그 당사자가 이 도깨비와의 약조를 지키기 위한 방안으로 금욕과 금주를 한다. 그러나 청년은 술 없이는 못사는 사람인지라 촌장의 말을 어기고 그만 술을 마시고 만것이다.

 

촌장의 말을 어겨도 별 탈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청년은 그만 술을 마시고 말았다.

술을 먹고 나온후 청년은 마을로 몰려오는 한무리의 도깨비불을 목도하게 된다. 도깨비불이 나타난 것을 촌장에게 알리자 촌장은 청년에게 약조를 어기면 큰 재앙이 온다고 하지 않았냐며 청년을 크게 꾸지람하고 마을 주민들에게 집에 있는 모든 팥을 가지고 나올 것을 권유하였다. 도깨비는 팥을 제일 싫어하기에 도깨비불로 부터 마을을 수호하기 위한 촌장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팥으로 마을을 둘러싸자 도깨비불은 마을 주변만을 배외할 뿐 마을에 들어와 행패를 부리지 못하였다.

 

이렇게 수시간이 흘러서야 첫닭이 울음을 터트리자 도깨비불은 사라져 마을부락을 지킬 수 있었다.

 

이로 인해 마을에는 도깨비들과 화친을 맺기 위해 마을 주민들이 아무리 도깨비를 노여워하게 해도 봐주라고 매년 5월 단오가 있기전 시제를 지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만약 청년이 도깨비와 씨름을 하여 졌다면 청년은 약속한것은 없지만, 도깨비와 내기만 한것으로 혼령을 빼앗기는데 도깨비와 씨름에서 지지 않아서 혼령은 빼앗기지 않았고, 청년이 약조를 어겨 마을이 위기에 처해지자 팥으로 마을의 위협을 막았다는것에 유래하여 동지팥죽을 쒀먹는다고 한다.

 

시덥지만 내가 들은 이야기를 조금 각색하여 써봄.... 재미 없었다면 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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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음악] 트로피칼리아

  • 등록일
    2004/09/02 01:58
  • 수정일
    2004/09/02 01:58

Tropicalismo 또는 Tropicalista라고 불리우는  노래운동은 브라질에서 60년대 말에 일어난 노래 운동입니다. 당시 브라질은 군사 독재 정권이 있었고, 이를 젊은 가수들이 노래를 통해서 비판하였지요.


이 운동은 Caetano  Veloso(까에따누 벨로주?)와  Gilberto Gil(지우베르투 지우?.. 발음엔 자신이 없군요) 이 두 사람이 이끌었습니다. 둘다 작사, 작곡, 연주, 편곡 등 음악의 전 방면에  능한 가수들이었습니다. 이들은 1967년  "Tropicalia" 라는 앨범을 내놓음으로써 기성 음악계에  도전을 하였습니다. 전세대 가수들이 보사노바를 주로 한, 듣기 좋은 음악을 만든 반면, 이들은  당시 영미 록과 비슷한 스타일로 전기 악기들을 도입해서 획기적인  음악을 했지요. 록큰롤 뿐 아니라, 전통 브라질 음악, 카리브 음악,  등등 광범위한 장르들을 격력한 내용의 가사와 혼합시켜서 당시 사회를 비판했고, 곧  젊은 이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읍니다. 전기기타와 오르간 소리가  크게 울리는 이들의  음악을 두고 기성세대들은 반브라질 적이라고 비난하기도 했지요.  들어보면 꼭 초기  산울림 노래 같기도 하고, 아무튼 고운 발라드 쪽하고는 거리가 멀더군요. 다소 전위적입니다.



Caetano Veloso는, 흔히 MPB(Musica  popular brazileira)라고 일반적으로 표기 되는 브라질 대중  음악계에서는 이 운동으로  혁명을 일으켰다고들 합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양성연애자라서 데이빗 보위처럼 화장하고 여자옷 입은체로 무대에 나와서 노래하기도 하는등, 60년대 말  브라질 음악계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고 하는 군요. 그를  MPB계의 존 레론이니, 밥  딜런이니 하고 비유하기도 합니다.


 Gilberto Gil는 Dorival Caimmy, 지미 헨드릭스 등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무엇보다도 뛰어난 보칼이 두드러집니다. 엠티비 언플러그드에 나온 걸 봤는데 보통이 아니더군요. 인터넷에서는 http://www.gilbertogil.com.br에 가면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위의 두 사람을 선두로 해서, Gal Costa, Maria Bethania 등 쟁쟁한 가수들이 여기에 참여를 했습니다. 이들의 영향력과 인기가 커지자, 이를 두려워한 군사정권은 Caetano와 Gil을 2달 동안 감옥살이를 하도록 했고, 그후 4달 동안 가택 연금을 하였습니다. 급기야 이 두 사람은 1969년 런던으로 망명을 가게 되어 그곳 에서 2년을 보냅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두사람은 영어로 노래를 썩 잘합니다.


그래서 이 운동의 수명은 1967-1969년으로 아주 짧지만 그 파장은 MPB에 크게 남아서 다른 음악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고 이 시기엔 브라질 말고도 영미 록, 꾸바 등지에도 명곡이 쏟아져 나왔지요. 저도 80년대 이전 노래들이 더 맘에 듭니다. 나이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아마 그당시에 지구를 감싸고 있는 어떤기가 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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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의 맺음이란....

  • 등록일
    2004/09/01 04:19
  • 수정일
    2004/09/01 04:19

월요일 귀한 이를 만났다.

일년동안 연락이 두절되어 만나지 못한 이를 만났다.

이 블로그에서 나의 소식을 접하고, 나에게 연락을 하였던 것이다. 참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는 우리집에 찾아왔다. 그냥 빈손으로 오지 않고 돼지고지 삼겹살 4근을 사가지고 왔다.

 

그래서 우리는 돼지고기 삼겹살을 구워먹으면서 기간 살았던 이야기를 하였다.

궁금했는데.... 잘 살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인연이 되는 사람은 언젠가는 반드시 만난다는 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경제적 어려움이 해결 되지 않을 것 같아서 마음 한구석이 싸하였다. 만나는 이들이 잘 살았으면 하는 바램이지만, 이 자본주의 세계에서 자신의 의지가 아무리 투철하다 한들 무엇하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경제적으로 부자유스러운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왜 내 주변에는 잘 사는 사람들이 없는 것인지.... 로또나 당첨되어 벼락졸부가 된다면 이들에게 금전적 지원을 해줄 수 있으련만... 로또는 나를 선택하지 않는다. 오 신이시여.... 왜 나에겐 로또의 행운을 주시지 않으시오니까.... 제발 로또는 차치하고서라도 신용카드 복권이라도 당첨되게 해주옵소서.... 체크카드도 더불어서.....

 

경제적으로 그나마 궁핍하지 않는 나로서는 뭐 혼자 살기는 부족함이 없으나 남을 도와줄 정도로 경제적 여유는 없다. 돈 만 있었다면.... 내가 무엇이든 도와줄 수 있겠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든다. 돈 많은 졸부에 되어 어려운 이들을 도와줄 상상만을 잠시 해보았다.

 

졸부가 되어 있는 나를 꿈꿔 본다. 누가 그랬던가 꿈은 현실의 반대라고.... 나는 졸부는 커녕 빈대로 살아갈 운명인 것 같다. 꿈에서는 늘 무적이지만 현실은 무적하고는 전혀 무관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꿈에서나마 행복하게 살고 있어서 위안을 받고 있다. 잠의 나라에서도 빈대로 살면 정말 괴로울 것이다.

 

그가 와서 마음의 위로를 많이 받았다. 누군가에게 마음의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하다. 나의 하찮은 고민에서 귀와 눈을 대고 이야기를 해주는 모든 사람이 있기다는 것에 난 참 행복한 놈이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그와의 이야기는 주로 살아가는 이야기.... 그리고 진보네 블로그 그리고 만나지 못한 기간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안부를 물었다. 우리집에서 낮부터 소주에 삼겹살... 그리고 부족해서 맥주를 사다가 마셨다. 아이스크림도 함께... 참 맛나게 먹었다. 아직도 먹지 못한 돼지고기가 냉장고에 꽁꽁 얼어있다.

 

배가 부른 우리는 음악을 들었다. 요즘 내가 주로 듣고 있는 카세트 테이프를 들었다. 더더의 4집과 2집과 1집을 듣고, 박기영 1집, 박혜경 4집을 들었다. 참 중저음의 노래에 우린 배부른 속에서 나른함을 느꼈다. 참 간만에 느껴보는 여유였다. 배부르고 등따시고 귀까지 즐거우니 희노애락의 극치가 따로 없었다.

 

몇시간을 우리집에서 보낸 그와 나는 불광천이 흐르는 산책로로 나갔다. 새절역에 인접해 있어 불광천에서 성산대교가 위치한 한강까지는 불과 4.5km만 걸어가면 된다. 한강변에 가지 않으면 월드컵 경기장에서 쉬는 때도 종종 있다. 한강변에 가서 우린 한강물과 성산대교의 네온사인을 보면서 담배를 꼬나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다.

 

그는 비오는 날 한강변에 나오면 좋겠다고,... 다음에 비오는 날 한강에 오자고.... 이런저런 이야기는 못하였지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참 마음이 안락하였다. 달빛은 가을하늘의 청명함에 자태를 뽑내기라도 하듯 왜이리도 곱더냐.... 참 새색기 얼굴 같은 수줍음을 머금은 듯이 빛나고 있는 달빛과 청명한 하늘의 검푸른 하늘 빛은 서울 도시야경과 더불어 절경을 빚어내었다. 참 맑다 고맙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이야기를 하고 우린 서로의 집을 향하기 위해 일어났다.

 

한강변 망원지구로 나가 마을버스에서 담배 한가치를 피우고 그와 조우를 끝마쳤다. 내가 힘들다고 판단되어 직접 찾아와준 그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지는 못했지만 정말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누군가를 위해 이렇게 자신의 시간을 내어주는 이가 그리 흔한 일인가.... 전화로도 위안을 받았는데 직접 찾아 힘내라는 이야기까지 해주고 같이 술한잔 해준 그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월요일 달빛의 화사함 처럼 나의 마음 또한 청명해졌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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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호 타고 서울로 유학오다.

  • 등록일
    2004/09/01 03:00
  • 수정일
    2004/09/01 03:00

초등학교를 깡촌인 전남 영암군 시종면 구산리 1리(원구산) 영산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는 고장에서 살았고, 이 곳 면소재지에 위치해 있는 시종국민학교(지금은 초등학교) 졸업하고 서울로 중학교를 유학 왔다.

 

형이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누나가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어서 나는 광주로 학교를 가지 않고 서울로 상경하였다. 외가집이 서울에 있어서 부모님은 광주보다는 서울이 낮다고 판단하고 서울에서 중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촌놈의 서울상경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부모님 왈 니 중학교 여기서 다니면 농사꾼밖에 못될 것 같으니 서울가서 서울 물좀 먹고 공부좀 하라고 신신당부하며 서울에서 형과 누나와 함께 유학생활을 하였다. 우리는 주로 외가에 늘 주말마다 눈도장 찍으로 가야했고, 외숙모는 우리가 잘 살고 있는지 늘 불시에 검문을 하였다. 그래서 형과 누나 나는 늘 외가의 감시속에서 자취생활을 하였다. 도시락은 외숙모가 종종 저녁에 와서 싸주고 가셨다. 반찬은 떨어질만 하면 외숙모가 갖다 놓아서 먹을 거리는 늘 풍성하였다. 쌀은 집에서 올라오지 과일도 집에서 올라오지... 부족함이 없는 유학생활을 하였던 기억이 난다.

 

촌놈의 상경....



주로 서울에 외가에 방학때 종종 올라왔다. 주로 교통수단은 비둘기호였다.

비둘기호를 타고 여행을 가거나 시골에서 올라와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비둘기호는 통일호와 무궁화호와 다르게 역마다 다 썼다. 그래서 비둘기호는 말 그대로 비둘기집과 같이 시골사람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기차였다.

 

언제든가 방송에서 기차안에서 시암닭이있고, 참기름, 시골할머니와 아낙네들의 개나리 봇짐이 있는 풍경의 광고를 본 기억이 난다. 거의 그랬다. 시골 인심은 서울에 있는 자식들에게 줄 농산물이 가득히 싸가지고 비둘기호를 타고 서울로 상경하는 이들의 모습은 아직도 추억저편 잊혀지지 않는다.

 

비둘기호 장장 12시간을 타고서야 용산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서울에 이때만 해도 대중교통이 그리 좋지 않았다. 지금이야 대중교통이 발달하였고, 자가용이 많아서 흔하게 어디든지 갈 수 있었지만 그 당시만 해도 시골에서 서울로 상경하기 위해서는 일단 우체국에다 물건을 우체국에서 송달하고, 몸만 챙겨가지고 서울로 상경하여야 했다. 우체국을 이용하는 것이 화물운송이 운송수단이였다.

 

비둘기호를 타면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도시에 꿈을 갖고 가출한 형들의 모습, 서울 자식집으로 가는 이들.... 시골 농촌삶으로 도저히 희망이 없어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는 어른들... 그들 모습엔 다들 희망의 포부가 있었다. 나도 서울이라는 곳에 올라가서 성공을 꿈꾸는 사람중에 하나였으니까? 그 당시 순박하였던 것 같다. 비둘기호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면 잠을 자도 시간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부모님이 가방 깊숙한 곳에 넣어준 500원 짜리 지폐(이순신장군과 거북선이 표기된 500원 짜리 지폐...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 당시 나에게 정말 큰 돈이였다. 내가 상경 당신 비둘기호 요금이 2500원 정도 하였으니까...) 몇장을 꺼내어 기차에서 사이다를 사먹었다. 집에서 삶아준 달걀과 감자를 먹으면서 사이다를 마시는 기분이라는 것은 기차여행의 백미였다. 사이다가 비싸서 사이다를 아껴먹었다, 그 당시 냉장고가 막 출시되었던 터라 시골에는 냉장고가 있는 집은 거의 지주정도 되는 집안 아니고서는 냉장고 구입을 엄두에도 못냈다. 그래도 시원하지 않는 사이다를 마시는 것은 참으로 행복하였던 기억이 난다. 달걀과 감자에 사이다를 먹으면서 기차 창밖으로 비치는 시골 풍경을 보면서 서울로 상경하는 것은 참 꿈만 같은 행운이라고 난 생각했다. 그 당시만 해도 국민학교(초등학교_를 졸업한 후 중학교까지 마치면 거의 집안 일 또는 공장일로 도외지로 나가는 일이 다반사였기였기에 집안이 풍족하지 않은 우리집에서 형은 대학생 누나는 고등학교 나는 중학생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의 교육열 이외에는 설명할 수 없다. 비둘기호 창밖을 통해 수 많은 별(지금은 공해로 인해 보이지 않지만... 그때는 기차 창밖으로 무수히 많은 별들이 보였다. 한마디로 쌀가마니로 떨어지는 별들이 보였다. 지금은 지리산 산장이나 설악산 대청봉 산장에서나 봄직한 별을 시골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었고, 서울에서도 시골 보다는 못하지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80년대 초반만 해도 서울에도 공동 우물까가 있었고, 외갓집에 놀러오면 물장수가 물을 길러 파는 것도 보았고, 말을 끌고 연탄을 나르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서울과 시골의 경계를 사람의 많고 적음과 공장이 있고 없음이 경계였지,,,, 시골보다 더럽지는 않았다, 공단지역은 가보지 못해 모르겠지만....)들이 보였고 

 

부모님은 우리를 공부시키기 위해 소를 많이 키우셨다. 난 그런 소 키우는 일이 싫었다. 내가 소 여물을 쓸어야하고 여물을 줘여 하기에 참 싫었다. 내가 서울로 뜨고 이건 내 동생몫이 되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없는 살림에 소(오늘따라 우리집 누렁이가 기억난다. 시골에 상경하여 공부중인 형과 누나 학비를 내던 날이면 어김없이 누렁이 새끼 송아지를 장에 나가 파는 날이다. 누렁이는 음메 음메~~~~ 소리를 내가며 자기 자식이 팔려감은 알고 그 큰 눈동자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모습.... 이 모습은 연중행사였다. 누렁이가 낳은 새끼들은 몇마리 남기고는 거의 팔려나갔다. 매년 자식을 낳고 팔고 하기를 반복 누렁이의 생명탄생은 우리의 공부에 죄다 사용되었다. 참 고마운 우리집 소.... 지금은 죽어 없지만 참 고맙다. 부모님은 형들과 누나 나까지 공부시킨 누렁이를 잡아 먹지 못하고 우리집 뒷산에 뭍었다. 소에 대한 예의였을 것이다. 집안 농사일에 불평불만 없이 기꺼이 자신의 노동력을 주었고, 자신이 생명분신인 자식을 우리에게 기꺼이 헌납하였던 누렁이.... 아니지 우리가 강제로 빼앗은 것이 맞겠지.... 그런 누렁이에 대한 예의였을 것이다.)까지 없었으면 어떻게 형, 누나, 나, 동생까지 대학은 커녕 고등학교 보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누렁이와 부모님에게 그래서 감사한 마음이 든다. 남들보다 먹물을 더 먹게 해주어서....

 

서울 생활은 그리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시골에 비해서는 좋았다. 시골 생활보다 안락하게 공부를 할 수 있어서 좋았다. 무엇보다 형이 애지중지해 하는 라디오가 있어서 좋았다. 이 라디오를 들으면서 밤에 공부도 하고 노래도 듣고 참 좋았다. 라디오를 통해서 나는 외국 노래를 접하게 된 계기로 서울로 상경하여 중학생이었던 때였다. 형은 거의 대학생이라서 술먹는 날이 많아서 라디오를 거의 듣지 않았고, 누나는 집에 돈을 보태기 위해 과외를 해서 학교를 파하고 온 집에는 거의 나 혼자 있었다, 간혹 외숙모(외숙모가 오는 날이면 나는 외숙모를 따라서 외식을 하였다. 서울에 뭐 이리도 맛난 것이 많은지... 외숙모는 우리들에게 어머니 존재였던 것으로 기억난다. 어머니는 농사일과 우리 막내 여동생을 낳아서 거의 움직이지 못하였다. 막내여동생과 나와의 나이 차이는 13살차...^^)가 오면 반찬과 도시락 꺼리를 가지고 오시는 날 이외에는 거의 혼자였다.난 라디오가 중학교 1학년때 제일 친한 친구였다. 친구가 생겼어도 라디오와 친구사이는 끝질 못했다. 좋은 노래도 듣고 가슴아픈 사연 많이 들었다. 중학생인 내가 이해하기는 어려운 글들의 사연이 많았는데... 가슴 뭉클함은 이해와는 상관없이 내 가슴을 때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참 라디오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비둘기호를 타지 않고 고속버스를 타면 그 당시는 고속버스에도 안내양 언니가 있었다. 참 예뻣던 것으로 기억난다. 난 주로 광주고속을 타고 내려갔다. 영산포까지는 고속버스를 타고 시종까지는 하루 3번밖에 없는 버스를 타고 읍내에서는 걸어서 집에 갔다. 그래도 집에 내려가면 좋았다, 우리 막내여동생이 있어서도 그렇지만 부모님이 시골에 있을때보다 더 잘 챙겨주셔서 고마웠다. 형과 누나는 자주 내려가지 않았지만 난 부모님 보고 싶다고 형과 누나에게 땡깡을 부려 달에 한번씩은 내려갔던 것으로 기억된다. 부모사랑 제일 많이 받을 나이에 서울에서 공부한답시고 올라왔으니 얼마나 부모님이 보고 싶었으랴... 공부보다 집에 있을 걸.... 내가 올라가기전에 태어난 막내 여동생도 볼 수 있어서 좋았다.(지금은 웬수이지만...) 

 

비둘기호는 나에게 있어서 또다른 추억거리이다. 서울에 처음상경하였을때도 비둘기호를 탔고, 집에 내려갈때도 고속버스보다는 시간이 걸리는 비둘기호를 탔다. 참 좋았던 기억이 난다. 내 또래 어여쁜 여학생들도 볼 수 있었고, 시골의 어르신들의 자식에 대한 내리사랑도 볼 수 있었고, 서울에 성공의 꿈을 갖고 상경하는 이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지금은 고속철도라는 것이 생겨 비둘기호의 12시간 거리는 불과 몇시간으로 단축되었지만, 그 당시 비둘기호에 담겨있던 풍경은 재연해 내지 못하리라.... 비둘기호가 없어지듯 통일호(비둘기호가 담당하던 지역구간 운행을 통일호로 대체되고) 또한 없어진다고 한다. 내가 서울에 올때만 해도 최고급 기차였던 무궁화도는 세월의 흐름에 최고의 자리를 새마을호에 내주고 이제는 고속철에게도 밀려 자신의 자리를 언제까지 보전할 수 있을지 미지수인 기차로 전락하였다. 새마을호도 고속철도도 마찬가지 이겠지... 발전이라는 미명하에서는.....

 

그러나 내 추억에 머물러 있는 비둘기호는 아직도 달리고 있다. 시골내음 진하게 풍기며....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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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식품은 늘 맛있었다.

  • 등록일
    2004/08/31 16:01
  • 수정일
    2004/08/31 16:01

초등학교 주변에 문방구에 배치되어 있던 불량식품들은 늘 맛있는 간식꺼리 였다.

 

서울 처럼 음식이 즐비하게 있지는 않았지만, 촌에 문방구에도 불량식품은 있었다. 내가 자주 애용하는 불량식품은 쫀득이라고 10cm 자모양에 1, 2, 3, 4, 5, ...10 숫자가 써있었고, 무지개 모양은 아니었지만 색깔 줄 칠해져 있던 쫀득이와 가로 10cm * 세로 1cm 마른 포, 꿀맛 같은 검은 액체(설탕을 녹여서 막는 액체였으리라 지금 생각됨.)가 들어 있는 길쭉한 쫀득이를 좋아하였다. 가격은 5원이였던 것으로 기억난다. 참 맛난 음식이였다.

 

간혹 100번대 까지 있어 뽑기로 번호를 맞추면 큰 설탕 사탕을 주는 뽑기도 했고, 학교앞 자전거 탄 아저씨가 큰 투명한 물통을 가져와 오렌지색 색소 음료를 파는 것도 맛났고, 부모님 몰래 비료포대를 훔쳐서 사먹던 아이스께기도 맛난 음식이였다. 5원만 있었으면 이중에 하나는 맛볼 수 있었다. 참 불량식품은 왜이리도 맛났는지.... 산과 들 그리고 강가에 나가면 먹을 것이 즐비했는데.... 그 당시 처음 접한 맛이여서 그랬으리라 짐작만 해본다.



장터에서 늘 부모님을 쫓아와 먹은 것이 풀빵(일명 국화빵과 같은 종류의 볼품없는 빵,,, 빵이라 하기엔 좀 그렇다. 지금 붕어빵과 같은 종류임.... 크기는 붕어빵의 1/10임.)이 였다. 참 맛나게 먹은 것인데.... 불량식품에 비하면 풀빵은 견줄수 없었다.

 

초등학교에서 유일하게 불량식품을 먹을 수 있는 날은 준비물을 살때 부모님이 학용품사고 잔돈이 남으면 사먹으라는 그 불량식품 참 맛났다. 난 매일매일 준비물이 있어서 불량제품을 사먹었으면 했는데.... 참 쉽지 않은 현실.... 시골이라 가정사정이 여의치 않은 것을 안 선생님은 준비물을 학급에 비치해 놓아(아마 손수 자신의 돈을 떨었을 것이라 생각됨.)서 학용품이 없더라도 학습에 지장이 없도록 배려해주었다. 이러다보니 학용품을 살 일이 별로 없었다. 늘 필요한 물건은 대부분 형과 누나가 사놓았던 터라 나는 형이나 누나가 쓰던 물건을 되물림받아 사용하였다. 우씨 형제가 많은 것도 죄다. 물건을 새것도 아니구 그렇다고 학용품을 사면서 떡고물도 떠러지는 일이 흔한 일이 아니어서 심통을 많이 내었던 기억이 난다. 어쩌랴 늦게 태어난 것이 죄지.....

 

지금은 없어졌는지 있는지 모르지만 거북선이 그려진 구릿 빛 5원짜리 동전은 나에게 있어서 정말 중요한 존재였다. 그 5원만 있으면 난 방과후 학교 파하고 나면 불량식품을 사먹을 수 있는 아주 유용한 돈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골에서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돈이 쉽게 샘솟는 것이 아니다. 밭농사 지어보았자... 도매상인들에게 헐값에 내주고, 운송비 빼면 빠듯하게 생계를 이어가고, 쌀농사도 추곡수매가 끝냐야 일년 결산이 나오기 때문에.... 농번기에는 돈이 씨가 마를 정도이다. 일년벌어서 비축한 돈을 야금야금 쓸수 없는 탓에 일년농사 대부분을 빛으로 지낸다. 간혹 집안 경사나 조사가 있으면 쓰기위해 가가호호 소를 3-4마리를 비축해 놓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 큰형이 서울(그 당시 중학교도 전국구로 모집하여 친척이 광주보다 서울에 많이 있어서 형이 서울중학교로 시험쳐서 들어감. 이것이 화근이지 나도 덩달아 서울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으니.... 나중에 시간되면 12시간 비둘기호 이야기도 써내려가 보겠음.... 비둘기호 타고 영산포역(지금은 금산인가 나주역으로 바뀌었지만)에서 서울로 상경하던 이야기를 해보이겠음... 그리고 고속버스 안내양 누나 이야기도... 중학교때 집에 내려오는 풍경으로 ...)로 중학교를 들어가 학비를 내는 것도 빠듯하다. 나도 초등학교 2학년까지는 학비를 내고 다녔으니까... 지금이야 무상교육이다 하여 초등학교 학비를 내지 않으나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때만 해도 학비가 달달이 냈다. 아직도 기억난다. 누런 봉투(마치 월급봉투) 같은 거를 선생님이 주면 그 봉투에 돈을 담아와 선생님에게 제출하면 선생님이 도장을 찍어주고 부모님께 사인을 받아오라고 하신 말씀..... 조금 늦게 때어날 걸 무상교육의 혜택을 덜 받아 아유 열받아라......... 그러던 터라 부모님은 학비를 내주고 내주거나 집안 큰 일거리가 있으면 쌀을 팔아서 비용을 충당한다. 그리고 감자, 수박, 참외, 배추, 무 농사는 달달이 돈이 필요한 농번기에 용돈 벌이는 된다. 그런 터라 용돈을 받기는 여지간히 어려운 일이다. 간혹 동네에서 큰 일거리가 생기면 도와주고 수고했다고 사먹으라고 주신 5원돈이 전부이다. 

 

초등학교 입학 후 불량식품과 친구가 되어 정말 군침을 삼키면서 어린 학창시절을 보내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방과후 문방구 불량식품 코너를 물끄러미 처다보고 있는 일이 종종 생각난다. 뒷산과 앞뜰에 나가면 산과실들이 먹을 수 있는데도.... 그 불량식품에 혀의 미각을 빼앗긴 나는 도저히 그 맛을 잊을 수 없었다. 아마도 어린 유년 먹거리가 늘 고정되어 있던 내 미각에 불량식품은 새로운 맛이었을 것이다. 불량식품을 들고 15리(6Km) 길을 걸으면 이도 정말 신난다. 15리 길을 걸으면서 불량식품을 혀로 빨면서 가는 그 길.... 참 행복함에 도취해 걸었던 유년시절이 생각난다. 불량식품을 사먹는 날은 15리 길이 왜 이리도 멋진 것인지.... 하늘에 뭉게구름이 내 불량식품을 탐내지는 않은지.... 상상하면서 걸었다.

 

지금이야 먹거리가 풍성해 아이들이 패스트푸드로 인해 비만화가 심각하다는 언론보도를 접하면서 참 아이들이 도시라는 각박한 공간에서 닭과 돼지처럼 사육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안타까움이 들었다.

 

우리때는 아무리 많이 먹어도 배가 고팠다. 먹은 것이 없어서 아니다. 그만큼 산과 들에게 뛰어놀수 있는 공간이 많았고, 놀이문화가 많았다. 아이들과 소나무에 올라가 치타가 되보기도 하였고, 강가에서 멱감(수영)으며 놀고, 산과 들에서 이리저리 뛰어놀았다. 그리고 농사일은 뭐 이리도 많은지 소 여물줘야지,... 닭과 돼지 밥줘야지..... 놀고 뛰고 일하고 정말 정신없이 자연과 벗삼으로면서 일상생활을 하였다. 지금 초등학생 1학년  아이들에게 학교를 가기 위해 15리(6Km)거리를 걸어가라면 아이들 대부분이 개거품을 물겠지... 그나마 난 학교 친구들중에 그리 멀지 않는 거리를 걸어다녔다. 최고로 멀리 오는 친구는 한 25리(10Km)를 걸어오는 초등학교 같은반 급우가 있었다. 이렇듯 나와 내 동네친구들 그리고 내 연배사람들은 시골에서 이렇게 학교를 다녔다. 읍내나 면 중심에 살지 않는 사람들은 다 이렇게 도보로 학교를 다녔다. 대중교통 수단은 꿈도 꾸지 못하였다. 대중교통 수단이 아예 없었으니까.... 길은 구불구불... 저수지를 지나서 산을 넘고 또 산을 넘고... 개천을 넘어서 도착한 학교... 면 중심은 나에게 신천지 였다.... 신기한게 많았으니까... 깡촌에서 살면 다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깡촌에서 살아도 5일장 날은 정말 분비는 날이다. 먹거리도 풍성하고 그 시골 동네 모든 사람들이 나와서 자신이 직접 재배하거나 채취한 것이나 기른 것들은 교환하고 분주하다. 또 가을운동회는 면 전체민의 축제의 장이다. 하하 재미난 것들이 많았구나 지금은 사라져 버렸지만....

 

불량식품은 나에게 새로운 문화적 충격을 주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불량식품으로 접한 것은 더 큰 면중심으로 내가 진출하면서 새롭게 각인한 맛이고, 읍내로 나가서는 더 큰 것들을 보게되었다. 깡촌의 내가 불량식품을 통해서 세상과 하나둘씩 인연을 맺어갔다.

 

아직도 눈에 아른거린다 문방구에서 군침흘리면서 불량식품을 바라보던 나의 모습이 아직도 또렷히 아른거린다.

 

불량식품을 한번 사먹어 봐야 겠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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