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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에 위치한 안산에 오르다.

  • 등록일
    2004/09/02 00:27
  • 수정일
    2004/09/02 00:27

서대문에 위치해 있는 안산에 오늘 올라갔습니다.

참 서울 경치를 산 위에서 내려보니 좋더군요. 아는 이가 이 근처에 살아서 자전거를 타고 아는 사람의 집에 들려 집구경하고 그 다음 서대문 안산에 올랐습니다.

 

안산은 독립문방향에서 홍제동을 넘어가는 무악재를 기준으로 하였을때 왼쪽편에 위치한 산이 안산이고, 오른쪽이 인왕산의 줄기가 맥을 닿고 있는 산입니다.

 

산 오르기가 편한게 동네 야산을 오르는 기분입니다.(내가 아는 이는 산 정상부근 근처에서 살고 있어서 그리 높지 아는 이의 집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안산을 갈 수 있는 길이 보입니다.(잘 찾아야 합니다.) 



이 산에 동네 주민이 운동을 하러 많이 오는지 헬스 기구도 있고, 운동을 할 수 있는 여러 편의 시설이 있어서 참 이 동네 사라는 사람들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사는 동네 야산만 해도 이러한 편의시설은 없는데.... 그런데 불광천에 이 못지 않은 좋은 곳이 있으니 이것으로 만족해야죠.... 히히^^

 

안산에 오르면서 서울 방위를 위해 애쓰고 있는 국군장병들의 근무초소도 볼 수 있었습니다.(이 놈의 나라는 산 경치가 좋은 곳에 꼭 군부대를 주둔시켜 산의 맥을 끊고 있는 것에 잠시 울분을 삼켜봄.) 국가가 자신의 영토라고 마구 자연을 훼손시켜가면서 군부대를 주둔시켜서 혈세를 낭비하는 형태를 보니 속에서 열이 타올랐음... 그러나 어쩌라 내가 이나라 통치자가 아니라서 아니꼬와도 참아야쥐.... 뭐 내가 용가리 통뼈도 아니니 어쩌라....

 

안산은 비교적 산세가 험하지 않은 능선으로 되어 있더군요. 안산 초입구에 올라오기까지 조금은 동네 비탈 길을 걸어야 하는 것 이외에는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통나무 계단을 따라서 올가다 숨이 조금 차면 평지가 나오고 평지를 걸으면서 지루하다 시프면 암석바위가 튀어나와서 산 자체가 자신의 미적 자태를 뽐내는 그런 산입니다.

 

독립문이나 서대문 감리교신학대에서 주택가를 끼고 돌다가 서대문 동부 푸르지오 아파트 공사 현장에 산 초입 입구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그리고 신촌에서 간다면 봉화사를 거쳐서 오를 수 있으니 신촌 봉화사 입구까지가는 마을버스를 타시고 안산 약수터를 거쳐 전망대(전망대에 오르면 서울 삼각산-북한산, 도봉산, 수락산-은 물론 인왕산, 관악산, 63빌딩, 성산대교 부근 분수, 한강과 종로, 강남일대를 훤히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남산보다 경치가 빼어나니 등산 좋아하시는 분은 꼭 한번 가보시기를... 신촌에서 봉화사입구에서 올라가면 됨. 등산을 못해도 산에 오르는데 문제 없음. 안산 약수터에서 한 10분 정도 대략 250M 올라가면 됨. 봉화사에서 안산약수까지는 한 20분 정도 대략 500M 걸으면 됨. 경사가 완만해서 초보산행자도 그리 어려움 없을 것임. 넉넉잡고 40분이면 서울의 절경을 보게 될 것임.... 봉화사 三天志殿의 부처님 좌상의 웅대함을 볼 수 있음.... 그리고 연꽃과 오래된 고목들이 산사 입구를 장식하고 있으니 여기서 奉華寺(한자는 다를 수 있음)를 구경하고 물 한 모금 축이고, 안산 약수터를 가면 됨... 전망대에 경치 끝내줌... 그리고 내려와서 신촌에서 맥주한잔....캬 신선이 따로 없다....강추함.)에 오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데이트 코스로도 좋을 것 같습니다. 산세가 그리 험하지 않으니 한번 가보셔요... 오늘 가을 날씨라서 참으로 서울 전경이 이리도 평온한 서울을 바라보게 됩니다. 산에서 바라보는 서울 늘 도시 한복판의 즐비한 건물 숲만 걷다가 산에서 서울 전경을 보니 서울도 꽤 녹지가 많은 곳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다만 예전 달동네(백선생님이 EBS 11시 정아무개 대담에 나와서 자신이 만들어낸 언어라고 하시더군요.)들은 온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빌라군락과 아파트 흉물이 번듯이 서 있더군요. 그리고 신촌 방향에 세브란스 병원 돈벌이에 미친 그 연세대 재단의 전횡을 여지없이 들어내더군요. 흉물이 서울의 빼어난 경치를 망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밑 독립문에 위치한 구 서대문형무소 자리를 보면서 그 자리에서 순국한 애국지사에 대한 애도도 할 수 있답니다. 참 많은 것을 산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안산에 올라오니 백무산 시인의 시 "숲으로 간다" 싯구가 생각나더군요. 산에 올라본 사람이라면 세상이 이리도 하찮음을 비웃듯 조롱하는 싯구에서 아웅다웅 싸우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에 대해 한번 반성하는 계기가 됩니다. 산은 늘 우리를 지켜보면서 내려다 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비가 바람이 몰아치고 시간이 흐름에도 변함없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산의 기상에 우리는 개발이라는 미명으로 그 산을 내팽겨 치기 전까지는....

 

안산 전망대 바로옆 군부대의 레이더 기지 비스무리한 건물을 보면서 또한번 가슴이 솟구쳐 올랐고.... 그 솟구치는 가슴을 달래며 전망대에서 내려와 안산 약수터로 갔습니다. 산 꼭대기에 위치한 약수터인지 약수물 맛이 좋더군요... 물통이라도 가져왔으면 물을 길러 갔을 텐데... 아쉬움이 들더군요.

 

아쉬움을 뒤로하고 안산약수터에서 봉화사로 내려갔답니다.

봉화사는 조계종의 사찰과 다르게 웅장함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삼천지존을 보면서 불교의 이치와 법도가 민중에게 멀어지고 있음을 느끼며 안타까움이 들었습니다. 불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의 이치는 민중을 구제하고 더 낳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깨달음의 진리이거늘... 사찰은 민중을 신앙과 종교라는 이치로 성전을 쌓고 있음에 분노가 들더군요, 삼천지전을 보면서 이 불당을 짖기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노동의 대가가 들어갔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삼천지전 불당의 부처좌상에서 민중의 고뇌어린 고통을 느끼고 왔습니다.

 

봉화사 大雄殿은 삼천지전의 웅잠함에 비해 초라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봉화사라는 현판에서의 초라함... 이것이 태고종의 불교 교리인지... 의심이 들었습니다. 민중 구제 사상인 불교가 성전으로 거듭나고 있음에 안타까움이 들었습니다. 나무아비타불(원효는 이 여섯 구절의 진리를 깨닫고 경전을 통한 깨달음보다 민중이 작은 의미에서 깨달음을 얻고 득도할 수 있다는 진리를 묘지안에 해골물에서 찾았는데.... 10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우리 중생들은 아직도 이 깨달음보다는 성전을 쌓고 보시를 하면 득도할 수 있다는 거짓 깨달음을 통한 구제에 온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모습 속에서 부처의 진리를 죽었음을 느꼈습니다.)이라는 민중에서 경전의 어려움보다는 깨달음의 득도를 전파하였건만.... 현 중생은 1000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이 깨달음에 대한 이치를 깨닫지 못함이 안타까움으로 남았습니다. 나무아비타불...

 

봉화사를 둘러보고 입구로 내려와 성황당 같은 나무그루 밑 오래된 연못에서 비단잉어들의 유유한 자태를 보고 봉화사를 내려왔습니다.

 

봉화사에서 내려와 금화터널방면으로 다시 올라가 안산 전망대 방면으로 다시금 올라갔습니다. 안산 전망대 방면으로 내려간 이유는 다름 아닌 내가 아닌 이의 집을 가기 위해서 였습니다. 산길은 하나로 통한다는 작은 진리에서 길을 모르는 나는 그냥 무작정  걸어서 안산 전망대 부근 근처에 도착하여 왔던 길을 따라 다시금 내가 아는 이의 집으로 향하였습니다.

 

그런데 길을 잘못 드러서인지 왔던 길과는 약간 다른 길로 가서 내려왔답니다. 산길을 헤매고 다녔던 우리는 시장기를 때우기 위해 감리교신학대 부근의 순대국집에서 순대국을 먹었답니다. 

 

순대국 먹은게 다냐구요,... 아니오 우리는 BBQ 치킨집에서 후라이드 치킨 거금 11000원 짜리를 사서 맥주와 소주를 마셨답니다.

 

오늘 간장의 나들이는 이러했답니다. 참 안산 전망대에서 세상의 하찮음을 느낄 수 있었답니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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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도정일]「젊은 시인들을 위하여」

  • 등록일
    2004/09/01 12:03
  • 수정일
    2004/09/01 12:03
     ■평론■
     
                                          문학의 숲, 시의 길 
                                    - 젊은 시인들을 위하여 -
     
     
                                                                                                         도 정 일 
                                                                 1 
      
인문교육의 위기가 문학의 생산과 수용에 필요한 훈련된 문화인구를 길러내는 데 극히 적대적인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한  이즈음에도, 해마다 일간지 <신춘문예>에 많은 문학도들이 작품을 보내고 그 가운데  일정수의 신인들이 작가, 시인, 평론가로 <등단>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신인들은 도대체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문학 수업을 받은 것일까?   
      
문학은 이미 그 자체로 세계적 인문문화의 한 강대한 전통이자 제도이기 때문에 문학의 길에 들어서는 사람이 반드시 정규 교육을 받아야만 유능한 창작자로 성장하는 것도 아니다. 세계문학의 오랜 전통에서 보면 자고로 문학만큼 정규 교육의 테두리 바깥에 설 수 있었던 문화적 실천도 드물다.  정규 교육에 부과되는 규칙성의 지배를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아니 오히려 그런 규칙성의 권역 바깥에 서고자 함으로써, 문학은 문학일 수 있었다고 말해도 된다. 문학은 문학을 생산하고 문학 창작자를 길러낸다.  문학이 이미 그 자체로 <제도>인 것은 이처럼 문학이 정규 교육제도의 바깥에서도 제 스스로 문학 생산자/수용자를 재생산하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진 문학도들은 어쩌면 정규 교육의 문 밖에서 문학 자체의 전통에 기대어,  혹은 공교육제도의 기능주의 테두리 안에서도 문학이라는 별개 전통에  끊임없이 안내되고 그 유혹에 이끌려,  제 각각 외로운 문학수업을 진행해온 사람들인지 모른다. 


고등학교와 대학에서의 인문교육이 부실성의 극점에 도달하고 인문문학적 가치가 위기의 절정을 맞고 있는 지금  문학이라는 형태의 창조성에 헌신 코자 하는 사람들이 해마다 줄지어 등장한다는 것은 반가우면서도 놀라운 일이다. 시인 황지우의 시에 나오는 한 화자는 어째서 이 시원찮은 세계에서도 그럴듯한 여자들은 계속 나타나는 것일까라며  신기해 한 적이 있다. 이 시원찮은 세계에서도 시인들은 어째서 작년의 각설이마냥 죽지 않고 계속 나타나는가. 
      
시인들을 계속 나타나게 하는 이상한 숲,비너스의 계곡처럼 검고 깊은 그 숲을 우리는 <문학의 숲>이라 부를 수 있다.하이데거의 말대로 철학의 길이 <철학의 숲> 속에 있다면, 문학의 길은 문학의 숲 안에 있다. 그 숲의 다른 이름은 <전통>이며,  이 전통은 그 내부에 어떤 언술 형식을 특별히 <문학적 언술>이라 불릴 수 있게 하는 일련의 어법, 규약, 관습들을 갖고 있다.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문학을 문학이게 하는 조건은 무엇인가"라든가,  문학적 언술을 특별히 "문학적"이게 하는 담론의 성질은 무엇인가 등등의 문제는 아직도 뜨거운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문학을 문학이게 하는 어떤  특수한 성질이 있다면 거기 <문학성>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는 쉬운 일이지만  문학 담론 또는  문학적 언술이 그런 "고유의" 성질을 갖고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인가("꺼내 놔봐라")라는 문제가 이론의 층위에서 쟁점화할 때에는 어떤 손쉬운 논의도 허용되지 않는다. 이런 이론적 쟁점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문학성>이라는 용어를 쓸 때 충분히 조심하고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점을 환기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문학의 숲을 말하고 문학적 언술을 특별히 문학적이게 하는 어법,규약,관습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어법, 규약, 관습이 불변의 고유자질이 아니라 오랜 기간을 두고 형성되어온  <역사적 구성물>이기 때문이다.  역사적 구성물은 본질론적 실체도 형이상학적 불변성의 자질도 아니다. 그것은 가변적 규약이고 관습이며 특정의 언어 사용법에 붙여지는 분류학적 명칭으로서의 <어법>이다. 이것들이 문학의 숲, 문학의 전통을 이룬다.  시인 엘리엇은 이 전통에 대한 의식을 가리켜 시인의 <역사의식>이라 부르고  "25세가 넘어서도 계속 시를 쓰려는 사람은 그 역사의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 일이 있다. 물론 엘리엇의 <역사의식>은 특별히  유럽 문학의 전통에 대한 숙지를 의미한 것이지만 이 제한을 풀 경우 "전통의 숙지"는 세계 문학의 숲을 이루어 온 역사적 어법, 규약, 관습에 대한 지식을 의미할 수 있다. 
      
이 지식은 흔히  "문학적 능력"이라 불리는데,  까닭은 그 능력이 문학의 생산과 수용에 필요한 능력을 상당 부분 결정하기 때문이다. 문학의 길이 문학의 숲에 있고 시인이 그 숲에서 길러진다는 것은 그곳이 문학적 능력의 함양 공간이라는 의미이다.  시인, 작가만이 거기서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독자도 거기서 길러진다.  예건대 문학적 능력이 모자라거나 문학의 숲에 들어가본 일이 없는 사람은  시를 잘 읽지 못하고 읽어도 어떤 시가  좋은 시인가를 잘 판별하지 못한다. 
      
해마다  <신춘문예> 제도를 통해 등장한 우리의 젊은 시인들 가운데 25세 이후까지도 시를 계속 쓰는 사람은 도대체 몇 퍼센트나 되는가,  시 쓰기를 그만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 이런 질문들에 답해줄 <문학사회학>은 이땅에 존재하지 않는다. 시인은 젊은 날의 어느 한 순간 어떤 관문을 통과했다고 해서 평생 시인인 것은 아니다.  죽는 날까지 시를 쓰는 사람만이 시인이다.  실증적 연구가 없어 함부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시인으로서의 공식 등단과 함께 소멸하는 시인들이 많고,  이 좌절의 원인을 추측하게 하는 사회적 요인들도 많다. 그러나 시인으로 출발했다가 이내 시정인으로 돌아서는 많은 사람들,  시인으로 행세는 하면서도  시다운 시 한줄 써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경우  그 좌절과 시적 빈곤의 원인이  반드시 사회적 요인들에만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시인에게 천국을 주었던 시대는 역사상 존재하지 않는다.  시인이 사는 땅과 시대가 천국이라면  시를 쓸 이유도 없지 않은가. 
      
내가 보기로는,  젊은 날 시인으로 나타났다가 조만간 사라져버리는 사람 들의 그 "실종"은  외적 요인들 못지않게  내적인 요인에 기인하는 것 같다. 내적 요인이란 말할 것도 없이 문학수업의 빈곤이다.   물론 이 빈곤 역시 외적 요인에 연결되어 있다.  지금 이 땅의 공교육 환경은 문학수업에 완벽하게 적대적이다.  특히 문학적 감성의 계발에 결정적 영향을 줄 수 있는 중고등학교에서의 <문학교육>은 사실상 실종상태이고 교육까지는 안 가더라도 문학의 숲을 들락거릴 수 있도록 숨통을 열어두는 일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문학지망자들이 공교육의 장 밖으로 아주 뛰어 나오지 않는 한  그들이 문학의 숲에 빠져 있을 수 있는 시간은  거의 없 다.   
      
그러나 이런 환경으로부터 초래되는 문학수업의 빈곤에 대한 궁극적 책임은 문학지망자 그 자신에게 있다. 적대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가 문학을 하기로 한 이상  그 환경을 극복하는 것은  그의 일이고 책임이기 때문이다. "당신 시가 왜 이래?"라는 질문 앞에서는  "환경이 나빴다"가 변명이 되지 않는다. 문학수업의 빈곤이 내적 요인이 되고 책임사항이 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문학을 하는 데는 감성이 큰 몫을 차지하지만 문학은 감성만으로 되지 않는다.  엘리엇이 역사 의식을 강조한 것이나 문학수업의 중요성이 자고로 강조되어온 까닭도 거기에 있다.  랭보처럼 일찌감치 어린 나이에 시를 쓰고  젊어서 떠돌다 죽어버리는 사람도 없지 않지만, 적어도 나이 25세 이후까지 시를 쓰려는 사람들은 자기 문학의 <장수 프로그램>을 스스로 짜고 문학의 숲에서 긴 호흡을 위한 자기 연마와 <수업시 대>를 계속하지 않으면 안된다. 문학의 숲,그 전통의 힘은 그래서 중요하 다.
     
     
                                                                       2 
      
      
전통을 강조한다는 것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전통주의자, 문화 보수론자, 반동으로 몰리기 꼭 좋은 노선을 선택하는 일 같아 보인다. 그러나 오늘날 젊은 문학지망자들이 다시 전통의 힘에 눈 돌려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첫째, 전통이 지금처럼 홀대되고 무시 당한 때가 없었기 때문이고 둘째, 전통적인 것으로부터의 부단한 이탈과 기존의 규약/관습에 대한 끊임없는 위반이 바로 문학의 전통이기 때문이다.  전통의 홀대가 시류라면 시인은 이 시류를 따를 이유가 없다. 시인은 언제나 자기 시대의 거역자이고 대중화한 이데올로기로부터의 이탈자이며  지배적 에피스테메(인식틀) 속에서도 그 인식틀을 비판적으로 객관화하는 국외자이다.   이것이  문학의 힘이고 기능이며 그 전통이자 방법론이다. 역설적으로, 시인은 전통적인 것으로부터 이반하는 그 순간에 이미 문학의 전통 속에 있다.  옛 것의 신성화를 기도할 때 보수적 전통론자가 탄생한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말했듯 문학의 전통은 불변의 것도 불가수정의 것도 아닌 역사적 구성 물이며, 이 구성물은 언제나  새로운 이탈과 위반에 의해 수정, 보강, 확대된다. 이 의미의 전통은 옛것만을 지키기위한 전통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가능하게 하려는 전통이다. 
      
95년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젊은 문학도들을 향해 우리는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어야 하는가? 금년 여러 신문이 당선작으로 뽑은 시들에게서 거의 하나같이 발견되는 것은 문학수업의 빈곤을 절감케 하는 영양실조와 기술 결핍, 위반다운 위반의 부재이기 때문이다.  영양실조란  시가 내적 비전, 힘, 절실성을 갖지 못해 추수 끝 빈들의 낡은 허수아비처럼 간신히 흔들거리며 서 있는,  더구나 서 있을 이유조차 모르면서  그냥 <시>라는 이름 하나로 버티어보는 창백한 타성을 말한다. 신진 시인들의 시가 낡고 빈 허수아비의 몰골로 간신히 흔들거리며  타성의 힘으로 버티고 있는 모양은 신인다운 패기의 시를 만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탄생의 순간에 이미 기진맥진한 조산아를 보듯 사람을 안쓰럽게 한다. 
      
< 배고픔은 그리움이거나 슬픔이다 >(중앙일보), < 이런 세상 어떠세요 > (동아일보)등의 시는 시 자체의 영양부실을 통해 <배고픔>과 <빈곤>을 절감케 한다. 스스로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시는 배고픔의 세상에 대한 시적 표현이 되는가? 아니다. 이 종류의 무매개성은 사회학적 징후일 수는 있어도  "배고픔" 또는 "이런 세상"에 대한 시적 변환으로  대접하기 어렵다. 배고픔을 노래할 때에도 그 스스로는 내적 비전의 절실성과 풍요로운 상상력을 지녀야 하는 것이 시의 운명이다.  < 자전거에 대하여 >(세계일보)도 시의 이같은 운명에 대한 사색이 모자라고  왜 시를 써야 하는가에 대한 절실성의 체험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역시 빈곤을 면치 못한다. 
      
기술결핍이란  언어의 시적 사용법에 대한  수업과  연마의 부족을  말한다. <문학만의 언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언어의 "문학적 사용법"은 존재하고 이 사용법에 통상적으로 붙여지는 이름이 문학적 언어  또는 시적 언어라는 것이며 언어의 시적 사용법, 그 수사적 능력을 가리켜 <기술>이라 한다. 시는 기술만으로 되지 않지만 기술 없이는 시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앞서  <어법>이라 칭한 것은 주로 이  수사적 기술을  의미한다. 수사적 기술은 놀랍고 새로운 이미지의 언어적 제시, 낡고 친근한 세계를 깨부수는 이상한 형상화,  신선한 비유언어에 의한 간접화의 기술이다. 수사적 기술이 극히 중요한 까닭은 시가 무엇보다도 <언어에 의한 세계의 변환>이고 이 변환을 어법의 차원에서 수행하는 것이 수사적 기술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배가 고파 식탁에 앉아 노트북 파워를 넣는다.  냉장고를 열고
       우유 식빵을 꺼낸다. 우유와 땅콩 버터를 꺼낸다. 키보드를 두
       드려 본다.  영균영호영수영식영철영민영석영광지수민수현수정
       수진수영종...깜빡이는 커서,  깜빡이는 그리움...우유 식빵에
       땅콩 버터를 바른다.
       
        (중략)
       
       녹아버린 땅콩 버터 때문에 배가 고프다.
       내가 배고픈지 땅콩 버터가 배가 고픈지 분간할 수 없는데,
       식구들이 잠든 여름 밤, 녹아버린 땅콩 버터를 바라보며 느끼

       는 허기는 슬픔이거나 그리움이다.
                 
                        - < 배고픔은 그리움이거나 슬픔이다 > 부분 
        
라는 대목은 (이 부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체가 그러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도 이미지의 시적 제시나 간접적 형상화가 아니며  따라서 그것이 성취하는 것은 놀라움이 아니라 산문적 진부성이다. 이 시인은 이를테면 "배가 고파 식탁에 앉아 노트북 파워를 넣는다"거나 "우유 식빵에 땅콩 버터를 바른다" 혹은  "녹아버린 땅콩 버터 때문에 배가 고프다" 등의 진술이 어째서 시적 진술로서의 자격을 상실하는지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이런 류의 진술을 다른 형태의 진술로 <바꾸고자> 할 때 시가 탄생한다. 춤이 보행(步行)을 모태로 하듯 시도 산문을 모태로 삼지만 시는 언제나 산문적 진술(혹은 산문적 세계)의 변환이기 때문에 시이고  이 변환된 진술로서의 시적 언술은 산문적 언술과 다르다. 춤이 보행에서 나오면서도 이미 보행이 아니듯이. "내가 배고픈지 땅콩 버터가 배가 고픈지 분간할 수 없는데" 같은 대목도  신진 시인이라면 결코 흉내낼 필요 없는 진부한 표현이다. 이번 신춘시에서 비교적 나은 편에 속하는 < 漁盛田의 봄 >(경향 신문)에서도
     
         강이 얼 때부터 녹기 시작할 때까지 마을은 고요하다
         나는 고요하다
         고요가 고혹적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같은 대목은  시적 언술형식에 대한 인식과  어법 연마의 부족을  드러낸다. 시는 그 자체로 표현이지 "표현하고 싶다"고 진술하는 것이 아니다. "고기들이 많이 사는 강,사람들은 이 마을을 漁盛田이라 한다 / 바다는 바다 사람들의 밭이라면 강은 고기들의 밭이다"라는 구절도 얼마든지 많은, 그리고 더 나을 수 있는, 시적 표현의 가능성들을 희생시키고 있다. <목재소에서>(조선일보)의 시인도 자기 시가 더 치밀한 형상화의 수준에 이르러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특히 이 시인은 "짙은" "하얗게" "말갛게" 등의  낡은 형용사 사용이 시의 어법 수준에 못 미치는 것일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가령
     
         고향을 그리는 생목들의 짙은 향내
         마당 가득 흩어지면
         가슴 속 겹겹이 쌓인 그리움의 나이테
         사방으로 나동그라진다 
      
같은 대목에서  " 고향을 그리는 생목들의 짙은 향내 / 마당 가득 흩어지면 "이라는 설명조 묘사는  이 신진 시인만이 아니라 기성 시인들도 좀체 벗어나지 못하는,  그래서 한국시의 고질적 미숙성이 되어 있는 표현방식이다. "고향을 그리는 생목들의"는 세번째 행에 나오는  "그리움"의 신선도를 미리 반감시킬 뿐 아니라 "향내"를 수식하기 위해  이처럼 단조로운 산문적 어구를 쓴다는 것 자체가 문제이다.   또 시가 "향내"를 표현하기 위해 "짙은 향내"라고 쓸 경우도 있을 수 있지만 "짙은"이라는 산문적 형용사가 쓰이는 순간  이미 그 향내는 죽어버려  짙지 않은 것이 될 수 있다. 형용사나 긴 수식어구로 표현될 것들을 형용사로 나타내지 않고 이미 지화하는 것, 그것이 시의 어법이고 기술이다.  에즈라 파운드는 젊은 시인들에게 "형용사를 쓰지 말라"고 충고한 적이 있다. 시적 형상화는 이미 그 자체로 형용이며, 형용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이미지이다.  물론 파운드의 충고를 형용사의 전면 제거 요구로 받아들일 것까지는 없다.   다만 우리 젊은 시인들이 알아야 할 것은 형용사의 적절한 절제가 시의 긴요한 요청이라는 점이다. 
      
시가 산문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런 현상은  <산문체 시>의 만연 현상과 함께 적절한 비평적 개입을 요구한다.  산문체 시는 이번 신춘시편들에서도 부쩍 눈에 뜨이고 젊은 시인들 사이에 번지고 있는 한 경향이다. 시가 산문체로 씌어지지 말라는 법은 물론 없다. 그러나 산문체를 사용하는 시인은 그 형식의 선택을 정당화할 이유를 보여주어야 한다. 불행히도 근자에 나타나고 있는 산문체 시들은 어떤 정당한 이유보다는 "편해서"  산문체를 쓰고 있다는 판단을 내리게 한다.  신진 시인들이 알아야 할 사항은 그들이 시적 생애의 어느 순간에 산문형식을 취택하거나 실험해보는 때를 갖는다 하더라도 초장부터 산문형식을 시도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이 형식의 시 쓰기는 아직 문학의 초기에 있는 시인들을 가장 확실하게 타락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시 쓰기란 <편한 길>에 대한 치열한 거부이며,언어의 절제, 감정 통제,표현의 정밀성과 압축, 여백과 내적 운율을 생명으로 하는 시적 언술형식은 그 형식의 차원에서 이미 편한 길에 대한 거부를 선언한다.  형식이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산문과는 달리, 절제된 시 형식은 그 자체로 나태의 거부를 보여주고 정신의 치열성을 증언한다.  이번 신춘시들에서 보이는 긴장감 없는 산문체 형식의 잦은 사용과 진술문장 자체의 산문화 현상은 <산문성으로부터의 세계의 구출>을 주요 기능으로 하는 시의 규약( 이 규약 때문에 시는 언어적 춤이고 음악이다 )에 어긋난다는 점에서  그 문제점이 지적될 필요가 있다. < 좋은 사람들 >과 < 그날엔 >(한국일보) 같은 작품은 안이하고 느슨한 산문체를 쓰고 있는 데다가  강한 통제요소를 결하고 있어 이미지들이 끈 떨어진 여러 개의 연처럼 맥없이 표류한다. 우리의 경우 이런 산문화 현상이 문제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시적 언술형식,  또는 시적 장르 규약으로부터의 새롭고 과감한 이탈이나 위반이 어서가 아니라  이미 있는 기성 시인들의 작품에 대한 추종이고 모방이기 때문이다. 
      
금년도 신춘문예 당선시들을 보며 전반적으로 갖게 되는 의문은  무엇 때문에,  왜 시를 쓰는가라는 질문이  젊은 시인들에게 자기 자신의 선택에 대한 절절하고 가차없는  내적 심문으로 던져지는 일이  적지 않은가라는 점이다. 왜 시를 쓰는가?  시인 되는 길은 출세와 별 관계 없고 돈벌이와도 대체로 먼 거리에 있다.  직업으로서의 시 쓰기는 남들이 잘 선택하지 않는 길, 아무도 좀체 가지 않으려는 길의 선택이다. 시는, 그 말의 한자 표현(詩)이 잘 보여주듯, 언어로 지어진 사원 또는 <언어의 사원>(Temple of Words)이다.  그러나 그 절간을 왜 짓는가? 왜 지어야 하는가? 돈벌이도 되지 않고 장사꾼도 잘 꾀지 않는 그 절간을 짓고,  그것도 "잘" 지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러나 모종의 의문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의 젊은 시인들에게 그 질문이 적어도  한 번 이상은 던져졌을 것이고  장차 지속적 심문이 될것이며 그 질문을 시로 대답하기 위한 긴 도정이 시작되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반드시 하나일 필요가 없고 응답의 방식이 꼭 하나여야 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우리의 얘기가 어차피 문학의 숲과 그 숲의 어법, 규약, 관습에 관한 언급으로 시작된 이상  그 부분에 대한 몇 마디 사족을 달아 시의 길을 생각해보는 것으로 이 글을 끝내고자 한다. 
      
규약과 관습이 일차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물론  보존과 계승의 필요성이 인정된 전통적 요소이다. 그러나 이부분에 대한 오해의 가능성을 막기 위해 다시 밝힌다면, 문학의 전통적 규약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은 "진부하게 말하지 않는다"라는 약속이고,  전통적 관습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위반의 관습>이다.  소설은 소설로, 시는 시로, 비평은 비평의 방식으로 이 규약과 관습을 계승하고 전통으로 보존한다. 그 규약과 관습으로 문학은 모든 굳어진 것, 고착유형으로 정형화된 것, 이분법적 스키마 속에 화석화된 것들을 풀고 되살려 낸다.  세상의 관습을 깨는 이 위반의 관습으로 문학은 세계를 늘 새롭게 하고자 한다.  손쉬운 예로,  시의 어법에서  장미는 그냥 장미가 아니라 "땅속에서 풀려난 요정"(신경림)이고 풀은 풀이 아니라 "땅의 푸른 뿔"(최승호)이다.  랭보나 보들레르의 경우 미역은 "뒷걸음질 치는 익사체"이고 창녀는 "검은 태양"이다.  구태여 이런 이름 바꾸기의 예를 들어보는 것은  우리의 신진 시인들이 문학의 숲에서 무엇부터 배워야 할 것인가를 예시하기 위해서이다. 시인 되려는 사람이 시문학 수업에서 일차적으로 시도할 것은 세상 모든 것들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보는 작업이고  바꿔 말하기,  또는 이상하게 말하기를  연습하는 일이다. 이 어법연습이 새롭게 말하기의 규약과 위반하기의 관습을 익히는 길이다. 장미를 장미라 부르는 것은  세상의 언어적 규약이지만  이 규약을 위반하는 것은 시의 규약이고 관습이다. 이 방식으로 시는 세계를 새롭게 할 뿐 아니라 풍요롭게 하고 새로운 가능성의 현실을 제시한다. 이것이 시의 길이다. 
      
그러나 문학적 위반의 전통이 위반의 어법만으로 지켜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25세를 넘어서도 시를 쓰려는 사람에게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은 위반의 역사적 시각과 비전이며 그 비전의 진리에 대한 믿음이다.  쉬운 예로, 자본주의 질서가 세계를 지배하고 그 문화적 상징체계가 세상을 정의하고 있을 때 시인은 그 질서의 밖에서 (혹은 그 질서 "안"에서도 "바깥" 을 성취하는) 위반의 시각과 비전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고? 세상에 존재했고 존재하는  모든 지배적 질서는  반드시 억압의 체계이기 때문이다. 억압의 체계가 억압하는 것은  다른 질서,  다른 삶의 양식, 다른 가치, 타자성과 타자의 존재이다.  지배질서는 그 질서 이외의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 상상할 수 없는 것으로 규정하여 억압한다. "억압 당하는 자의 편에 서는 것이  문학의 불가피한 운명"이라는 것은  남아공화국 작가 나딘 고디머의 말이다.  미하일 바흐찐은 "타자성에 대한 인식의 정도"가 소설의 "소설성"을 결정한다는 주장을 내고 있다. 고디머가 말한 "문학의 불가피한 운명"은 시의 운명이기도 하며,  바흐찐의 소설성 개념은  그의 동의 여부에 관계 없이 문학 일반의 경우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문학은 현상질서와 가치체계로부터 이탈하고 그것들을 위반함으로써 사람들이 당대의 에피스테메 속에서 잊어버린 이상한 진리를 이상한 방식으로 제시하는 언술양식이다. 이는 시의 양식, 시의 길이기도 하다. 
      
위반은 모든 경우에 진리에의 길인가 ? 아니다. 위반을 위한 위반은 진리에의 길도, 진리와 소통하기 위한 방법도 아니다. 시의 경우 위반의 어법이 반드시 세상에 대한 비전과 경건한 믿음에 연결되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위반을 위한 위반은 가장 좋게 보아서 유희이고 나쁘게 말하면 손장난이다. 특히 시에서의 과도한 일탈성,통제되지 않은 비유,이 상성만을 추구하는 언술 등은 시 자체의 존재 이유를 무화시켜 시를 박제화한다. 위반을 위한 위반이 지니는 가장 부정적인 국면은 그것이 삶으로  부터, 세계로부터, 모든 경건성의 추방을 기도한다는 데 있다.  경건성의 도살이 가져오는 것은 세계의 표피화, 경박화, 박제화이다.  스스로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쓰여지는 시도  세계의 박제화에 기여한다.   
      
지금 세계는 매우 빠른 속도로 놀이와 오락에 의한 삶의 표피화를 진행시키고 있고  문학은 이 오락화하는 카지노의 세계로부터 긴 편차를 유지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물론 이 논평들은 금년의 신춘시들과 무관한 것이 아니지만 그 논평의 배후에는 우리 신진 시인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기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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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김지하] 중심의 괴로움

  • 등록일
    2004/09/01 09:27
  • 수정일
    2004/09/01 09:27

봄에

가만 보니

꽃대가 흔들린다

 

흙밑으로 부터

밀고 올라오던 치열한

중심의 힘



꽃피어

퍼지러

사방으로 흩어지려

 

괴롭다

흔들린다

 

나도 흔들린다

 

내일

시골가

비우리라 피우리라

 

--------------------------------------------------

시평

 

김지하 시인은 우리에게 저항과 생명의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저 암울했던, 야만과 광기의 연대인 70, 90년대를 그는 온몸을 저항의 무기로 삼아 관통했던 시인이었다. 그는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가치적 명제가 결코 창백한 지식인을 위한 허사가 아니었음을 치열한 삶과 문학을 통해 증거했던 시인이었다. 당시 그는 직선적 세계관에 충실한 시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담시 "오적"으로 우리 문학사에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필화를 겪고 감옥에서 고행의 수인이 되어 세상과 격리되어 있을 때 우연히 감옥의 창살에 날아온 개가죽나무 씨앗의 발아과정을 지켜보면서 문득 섬광처럼 생명의 위대함을 발견하게 된다. 그 후 그는 직선적 세계관을 버리고 곡선의 미학을 신본하게 된다. 아니다. 이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그는 이미 초기작부터 생명에 대한 의경을 피력해 왔다. "황토"와 같은 시가 그 실례이다. 하지만 시대 상황이 그의 시를 편향되게 읽게 만들었던 것이다. 고정관념이란 때로 진실을 곡해하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감옥 체험에서 우주 생명에 대한 사상을 더욱 확대 심화시켜온 것만은 사실이다. 그의 철학 사상서에 의하면 우주 만물은 모두 영성을 가진 존재로서 자기 완결을 위한 진화의 과정을 겪는다고 한다. 80년대 그의 생명론은 시대에 앞선 예지로 충분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으나 의려 그것이 이유가 되어 일부에서 부당하게 배척받고 폄하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가 앞서 주장했던 생명론은 이제 우리 시대 주요한 지적 패러다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시는 이러한 시인 개인을 비롯한 시대의 변화에 대한 저간의 사정을 함축한 명편이다. 중심에서 이탈하려는 꽃씨, 그 이탈이 없다면 생명은 더 이상 존재하지도 진화 발전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 때의 중심의 괴로움이란 씨앗들 생명 운동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즉 사방으로 퍼지고, 흩어져 나가려는 행위에서 괴로움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 이재무 -

 

                                                      69인의 좋은 시를 찾아서 긍정적인 밥 중에서.........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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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의 맺음이란....

  • 등록일
    2004/09/01 04:19
  • 수정일
    2004/09/01 04:19

월요일 귀한 이를 만났다.

일년동안 연락이 두절되어 만나지 못한 이를 만났다.

이 블로그에서 나의 소식을 접하고, 나에게 연락을 하였던 것이다. 참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는 우리집에 찾아왔다. 그냥 빈손으로 오지 않고 돼지고지 삼겹살 4근을 사가지고 왔다.

 

그래서 우리는 돼지고기 삼겹살을 구워먹으면서 기간 살았던 이야기를 하였다.

궁금했는데.... 잘 살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인연이 되는 사람은 언젠가는 반드시 만난다는 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경제적 어려움이 해결 되지 않을 것 같아서 마음 한구석이 싸하였다. 만나는 이들이 잘 살았으면 하는 바램이지만, 이 자본주의 세계에서 자신의 의지가 아무리 투철하다 한들 무엇하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경제적으로 부자유스러운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왜 내 주변에는 잘 사는 사람들이 없는 것인지.... 로또나 당첨되어 벼락졸부가 된다면 이들에게 금전적 지원을 해줄 수 있으련만... 로또는 나를 선택하지 않는다. 오 신이시여.... 왜 나에겐 로또의 행운을 주시지 않으시오니까.... 제발 로또는 차치하고서라도 신용카드 복권이라도 당첨되게 해주옵소서.... 체크카드도 더불어서.....

 

경제적으로 그나마 궁핍하지 않는 나로서는 뭐 혼자 살기는 부족함이 없으나 남을 도와줄 정도로 경제적 여유는 없다. 돈 만 있었다면.... 내가 무엇이든 도와줄 수 있겠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든다. 돈 많은 졸부에 되어 어려운 이들을 도와줄 상상만을 잠시 해보았다.

 

졸부가 되어 있는 나를 꿈꿔 본다. 누가 그랬던가 꿈은 현실의 반대라고.... 나는 졸부는 커녕 빈대로 살아갈 운명인 것 같다. 꿈에서는 늘 무적이지만 현실은 무적하고는 전혀 무관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꿈에서나마 행복하게 살고 있어서 위안을 받고 있다. 잠의 나라에서도 빈대로 살면 정말 괴로울 것이다.

 

그가 와서 마음의 위로를 많이 받았다. 누군가에게 마음의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하다. 나의 하찮은 고민에서 귀와 눈을 대고 이야기를 해주는 모든 사람이 있기다는 것에 난 참 행복한 놈이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그와의 이야기는 주로 살아가는 이야기.... 그리고 진보네 블로그 그리고 만나지 못한 기간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안부를 물었다. 우리집에서 낮부터 소주에 삼겹살... 그리고 부족해서 맥주를 사다가 마셨다. 아이스크림도 함께... 참 맛나게 먹었다. 아직도 먹지 못한 돼지고기가 냉장고에 꽁꽁 얼어있다.

 

배가 부른 우리는 음악을 들었다. 요즘 내가 주로 듣고 있는 카세트 테이프를 들었다. 더더의 4집과 2집과 1집을 듣고, 박기영 1집, 박혜경 4집을 들었다. 참 중저음의 노래에 우린 배부른 속에서 나른함을 느꼈다. 참 간만에 느껴보는 여유였다. 배부르고 등따시고 귀까지 즐거우니 희노애락의 극치가 따로 없었다.

 

몇시간을 우리집에서 보낸 그와 나는 불광천이 흐르는 산책로로 나갔다. 새절역에 인접해 있어 불광천에서 성산대교가 위치한 한강까지는 불과 4.5km만 걸어가면 된다. 한강변에 가지 않으면 월드컵 경기장에서 쉬는 때도 종종 있다. 한강변에 가서 우린 한강물과 성산대교의 네온사인을 보면서 담배를 꼬나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다.

 

그는 비오는 날 한강변에 나오면 좋겠다고,... 다음에 비오는 날 한강에 오자고.... 이런저런 이야기는 못하였지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참 마음이 안락하였다. 달빛은 가을하늘의 청명함에 자태를 뽑내기라도 하듯 왜이리도 곱더냐.... 참 새색기 얼굴 같은 수줍음을 머금은 듯이 빛나고 있는 달빛과 청명한 하늘의 검푸른 하늘 빛은 서울 도시야경과 더불어 절경을 빚어내었다. 참 맑다 고맙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이야기를 하고 우린 서로의 집을 향하기 위해 일어났다.

 

한강변 망원지구로 나가 마을버스에서 담배 한가치를 피우고 그와 조우를 끝마쳤다. 내가 힘들다고 판단되어 직접 찾아와준 그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지는 못했지만 정말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누군가를 위해 이렇게 자신의 시간을 내어주는 이가 그리 흔한 일인가.... 전화로도 위안을 받았는데 직접 찾아 힘내라는 이야기까지 해주고 같이 술한잔 해준 그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월요일 달빛의 화사함 처럼 나의 마음 또한 청명해졌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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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호 타고 서울로 유학오다.

  • 등록일
    2004/09/01 03:00
  • 수정일
    2004/09/01 03:00

초등학교를 깡촌인 전남 영암군 시종면 구산리 1리(원구산) 영산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는 고장에서 살았고, 이 곳 면소재지에 위치해 있는 시종국민학교(지금은 초등학교) 졸업하고 서울로 중학교를 유학 왔다.

 

형이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누나가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어서 나는 광주로 학교를 가지 않고 서울로 상경하였다. 외가집이 서울에 있어서 부모님은 광주보다는 서울이 낮다고 판단하고 서울에서 중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촌놈의 서울상경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부모님 왈 니 중학교 여기서 다니면 농사꾼밖에 못될 것 같으니 서울가서 서울 물좀 먹고 공부좀 하라고 신신당부하며 서울에서 형과 누나와 함께 유학생활을 하였다. 우리는 주로 외가에 늘 주말마다 눈도장 찍으로 가야했고, 외숙모는 우리가 잘 살고 있는지 늘 불시에 검문을 하였다. 그래서 형과 누나 나는 늘 외가의 감시속에서 자취생활을 하였다. 도시락은 외숙모가 종종 저녁에 와서 싸주고 가셨다. 반찬은 떨어질만 하면 외숙모가 갖다 놓아서 먹을 거리는 늘 풍성하였다. 쌀은 집에서 올라오지 과일도 집에서 올라오지... 부족함이 없는 유학생활을 하였던 기억이 난다.

 

촌놈의 상경....



주로 서울에 외가에 방학때 종종 올라왔다. 주로 교통수단은 비둘기호였다.

비둘기호를 타고 여행을 가거나 시골에서 올라와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비둘기호는 통일호와 무궁화호와 다르게 역마다 다 썼다. 그래서 비둘기호는 말 그대로 비둘기집과 같이 시골사람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기차였다.

 

언제든가 방송에서 기차안에서 시암닭이있고, 참기름, 시골할머니와 아낙네들의 개나리 봇짐이 있는 풍경의 광고를 본 기억이 난다. 거의 그랬다. 시골 인심은 서울에 있는 자식들에게 줄 농산물이 가득히 싸가지고 비둘기호를 타고 서울로 상경하는 이들의 모습은 아직도 추억저편 잊혀지지 않는다.

 

비둘기호 장장 12시간을 타고서야 용산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서울에 이때만 해도 대중교통이 그리 좋지 않았다. 지금이야 대중교통이 발달하였고, 자가용이 많아서 흔하게 어디든지 갈 수 있었지만 그 당시만 해도 시골에서 서울로 상경하기 위해서는 일단 우체국에다 물건을 우체국에서 송달하고, 몸만 챙겨가지고 서울로 상경하여야 했다. 우체국을 이용하는 것이 화물운송이 운송수단이였다.

 

비둘기호를 타면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도시에 꿈을 갖고 가출한 형들의 모습, 서울 자식집으로 가는 이들.... 시골 농촌삶으로 도저히 희망이 없어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는 어른들... 그들 모습엔 다들 희망의 포부가 있었다. 나도 서울이라는 곳에 올라가서 성공을 꿈꾸는 사람중에 하나였으니까? 그 당시 순박하였던 것 같다. 비둘기호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면 잠을 자도 시간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부모님이 가방 깊숙한 곳에 넣어준 500원 짜리 지폐(이순신장군과 거북선이 표기된 500원 짜리 지폐...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 당시 나에게 정말 큰 돈이였다. 내가 상경 당신 비둘기호 요금이 2500원 정도 하였으니까...) 몇장을 꺼내어 기차에서 사이다를 사먹었다. 집에서 삶아준 달걀과 감자를 먹으면서 사이다를 마시는 기분이라는 것은 기차여행의 백미였다. 사이다가 비싸서 사이다를 아껴먹었다, 그 당시 냉장고가 막 출시되었던 터라 시골에는 냉장고가 있는 집은 거의 지주정도 되는 집안 아니고서는 냉장고 구입을 엄두에도 못냈다. 그래도 시원하지 않는 사이다를 마시는 것은 참으로 행복하였던 기억이 난다. 달걀과 감자에 사이다를 먹으면서 기차 창밖으로 비치는 시골 풍경을 보면서 서울로 상경하는 것은 참 꿈만 같은 행운이라고 난 생각했다. 그 당시만 해도 국민학교(초등학교_를 졸업한 후 중학교까지 마치면 거의 집안 일 또는 공장일로 도외지로 나가는 일이 다반사였기였기에 집안이 풍족하지 않은 우리집에서 형은 대학생 누나는 고등학교 나는 중학생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의 교육열 이외에는 설명할 수 없다. 비둘기호 창밖을 통해 수 많은 별(지금은 공해로 인해 보이지 않지만... 그때는 기차 창밖으로 무수히 많은 별들이 보였다. 한마디로 쌀가마니로 떨어지는 별들이 보였다. 지금은 지리산 산장이나 설악산 대청봉 산장에서나 봄직한 별을 시골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었고, 서울에서도 시골 보다는 못하지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80년대 초반만 해도 서울에도 공동 우물까가 있었고, 외갓집에 놀러오면 물장수가 물을 길러 파는 것도 보았고, 말을 끌고 연탄을 나르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서울과 시골의 경계를 사람의 많고 적음과 공장이 있고 없음이 경계였지,,,, 시골보다 더럽지는 않았다, 공단지역은 가보지 못해 모르겠지만....)들이 보였고 

 

부모님은 우리를 공부시키기 위해 소를 많이 키우셨다. 난 그런 소 키우는 일이 싫었다. 내가 소 여물을 쓸어야하고 여물을 줘여 하기에 참 싫었다. 내가 서울로 뜨고 이건 내 동생몫이 되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없는 살림에 소(오늘따라 우리집 누렁이가 기억난다. 시골에 상경하여 공부중인 형과 누나 학비를 내던 날이면 어김없이 누렁이 새끼 송아지를 장에 나가 파는 날이다. 누렁이는 음메 음메~~~~ 소리를 내가며 자기 자식이 팔려감은 알고 그 큰 눈동자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모습.... 이 모습은 연중행사였다. 누렁이가 낳은 새끼들은 몇마리 남기고는 거의 팔려나갔다. 매년 자식을 낳고 팔고 하기를 반복 누렁이의 생명탄생은 우리의 공부에 죄다 사용되었다. 참 고마운 우리집 소.... 지금은 죽어 없지만 참 고맙다. 부모님은 형들과 누나 나까지 공부시킨 누렁이를 잡아 먹지 못하고 우리집 뒷산에 뭍었다. 소에 대한 예의였을 것이다. 집안 농사일에 불평불만 없이 기꺼이 자신의 노동력을 주었고, 자신이 생명분신인 자식을 우리에게 기꺼이 헌납하였던 누렁이.... 아니지 우리가 강제로 빼앗은 것이 맞겠지.... 그런 누렁이에 대한 예의였을 것이다.)까지 없었으면 어떻게 형, 누나, 나, 동생까지 대학은 커녕 고등학교 보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누렁이와 부모님에게 그래서 감사한 마음이 든다. 남들보다 먹물을 더 먹게 해주어서....

 

서울 생활은 그리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시골에 비해서는 좋았다. 시골 생활보다 안락하게 공부를 할 수 있어서 좋았다. 무엇보다 형이 애지중지해 하는 라디오가 있어서 좋았다. 이 라디오를 들으면서 밤에 공부도 하고 노래도 듣고 참 좋았다. 라디오를 통해서 나는 외국 노래를 접하게 된 계기로 서울로 상경하여 중학생이었던 때였다. 형은 거의 대학생이라서 술먹는 날이 많아서 라디오를 거의 듣지 않았고, 누나는 집에 돈을 보태기 위해 과외를 해서 학교를 파하고 온 집에는 거의 나 혼자 있었다, 간혹 외숙모(외숙모가 오는 날이면 나는 외숙모를 따라서 외식을 하였다. 서울에 뭐 이리도 맛난 것이 많은지... 외숙모는 우리들에게 어머니 존재였던 것으로 기억난다. 어머니는 농사일과 우리 막내 여동생을 낳아서 거의 움직이지 못하였다. 막내여동생과 나와의 나이 차이는 13살차...^^)가 오면 반찬과 도시락 꺼리를 가지고 오시는 날 이외에는 거의 혼자였다.난 라디오가 중학교 1학년때 제일 친한 친구였다. 친구가 생겼어도 라디오와 친구사이는 끝질 못했다. 좋은 노래도 듣고 가슴아픈 사연 많이 들었다. 중학생인 내가 이해하기는 어려운 글들의 사연이 많았는데... 가슴 뭉클함은 이해와는 상관없이 내 가슴을 때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참 라디오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비둘기호를 타지 않고 고속버스를 타면 그 당시는 고속버스에도 안내양 언니가 있었다. 참 예뻣던 것으로 기억난다. 난 주로 광주고속을 타고 내려갔다. 영산포까지는 고속버스를 타고 시종까지는 하루 3번밖에 없는 버스를 타고 읍내에서는 걸어서 집에 갔다. 그래도 집에 내려가면 좋았다, 우리 막내여동생이 있어서도 그렇지만 부모님이 시골에 있을때보다 더 잘 챙겨주셔서 고마웠다. 형과 누나는 자주 내려가지 않았지만 난 부모님 보고 싶다고 형과 누나에게 땡깡을 부려 달에 한번씩은 내려갔던 것으로 기억된다. 부모사랑 제일 많이 받을 나이에 서울에서 공부한답시고 올라왔으니 얼마나 부모님이 보고 싶었으랴... 공부보다 집에 있을 걸.... 내가 올라가기전에 태어난 막내 여동생도 볼 수 있어서 좋았다.(지금은 웬수이지만...) 

 

비둘기호는 나에게 있어서 또다른 추억거리이다. 서울에 처음상경하였을때도 비둘기호를 탔고, 집에 내려갈때도 고속버스보다는 시간이 걸리는 비둘기호를 탔다. 참 좋았던 기억이 난다. 내 또래 어여쁜 여학생들도 볼 수 있었고, 시골의 어르신들의 자식에 대한 내리사랑도 볼 수 있었고, 서울에 성공의 꿈을 갖고 상경하는 이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지금은 고속철도라는 것이 생겨 비둘기호의 12시간 거리는 불과 몇시간으로 단축되었지만, 그 당시 비둘기호에 담겨있던 풍경은 재연해 내지 못하리라.... 비둘기호가 없어지듯 통일호(비둘기호가 담당하던 지역구간 운행을 통일호로 대체되고) 또한 없어진다고 한다. 내가 서울에 올때만 해도 최고급 기차였던 무궁화도는 세월의 흐름에 최고의 자리를 새마을호에 내주고 이제는 고속철에게도 밀려 자신의 자리를 언제까지 보전할 수 있을지 미지수인 기차로 전락하였다. 새마을호도 고속철도도 마찬가지 이겠지... 발전이라는 미명하에서는.....

 

그러나 내 추억에 머물러 있는 비둘기호는 아직도 달리고 있다. 시골내음 진하게 풍기며....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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