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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김소월] 접동새

  • 등록일
    2004/08/30 01:59
  • 수정일
    2004/08/30 01:59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진두강 앞마을에

와서 웁니다

 

옛날, 우리나라

먼 뒷쪽의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의붓어미 시샘에 죽었습니다.



누나라고 불러보랴

오오 불설워

시새움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

 

아홉이나 남아 되던 오랩동생을

죽어서도 못 잊어 차마 못 잊어

야삼경 날 다 자는 밤이 깊으면

이산 저산 옮아가며 슬피 웁니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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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검정 고무신 지붕으로 날다.

  • 등록일
    2004/08/30 01:33
  • 수정일
    2004/08/30 01:33

어렸을 적 시골에 살았다면 검정 고무신을 신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도 어릴적 그 질기고도 질긴 검정 고무신을 신었다. 이 검정 고무신은 정말 만능 신발이였다.

물가에가면 그 신발은 배가 되거나 물고기를 잡는 도구로 사용하였으며, 산에 가면 고무신은 과일을 담는 그릇의 용도로 사용하거나 벌 또는 곤충은 잡는 도구로 사용하였고, 운동을 할때는 만능 스포츠화였다.

 

이렇듯 다용도로 사용하는 검정 고무신은 결코 쉽게 자신의 최우를 우리들에게 선사하지 않았다.

아직도 기억난다 타이어표 검정 고무신.... 질기기로 정평난 검정 고무신이었다. 한번 사면 거의 1년을 신고도 바닥을 들어내지 않는 이 고무신은 정말 생명력이 끊질겼다.

 

이 생명력을 끝내기위해 갖은 노력을 다해보지만 내 어린 시절 능력으론 이 검정 고무신과의 인연을 끝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참 악연도 이런 악연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검정 고무신의 생명력에 난 순응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앞집 녀석이 학교를 가는데 그전과 다른색의 고무신을 신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도 시골에서 유명상표로 통하는 국제상사에서 만든 왕자표 흰고무신..... 신작로를 따라 학교를 걷고 있는 나에게 그 고무신은 마치 황금신발과 같은 서광을 비추면서 나타난 것이 아닌가??? 난 이 고무신이 왕자표인지 아닌지 부터 확인할 요량으로 앞집 녀석에게 다가가 온갖 구라를 쳐가면서 검정 고무신의 상표를 보여줄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그녀석은 아버지가 거금 3000원(당시 검정 고무신은 내가 알기로 장터에서 600-800원대 였다.)을 주고 장에서 사다주었다 나에게 자랑하면서 있다가 학교에 가면 보여준다고 나에게 그 흰 고무신의 상표를 보여주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흰고무신에 대한 자랑....부러움에 몸이 소스라쳤다.(시골에서 산 나의 또래 그 당시 아이였다면 흰 고무신에 대한 부러움(지금의 나이키, 아이다스, 아식스, 푸마 등의 스포츠 유명상표)은 현재 메이커와 비교가 안된다. 촌놈이 무엇을 바라랴 새로운 것에 대한 점유욕은 인간의 기본욕구가 아닌가.)

 

나는 사실 흰 고무신을 무진장 신고 싶었다. 이에 나는 그 녀석의 자랑을 듣다가 부러운 나머지 학교가던 길을 방향을 180도 바꿔 집 방향으로 돌아갔다. 집에 가니 집에 부모님은 없었고, 키우던 닭과 돼지가 있었다. 그래서 부모를 찾아 동네한바퀴.... 밭에서 일하는 부모를 발견.... 가방을 내동댕이 치고 학교안가 나도 흰고무신 사줘 땡깡을 부렸다. 그러나 나에게 돌아오는 건 아버지가 들고 있던 삽자루와 어머니가 들고 있던 호미대가리였다. 학교가서 공부하라고 이렇게 뼈빠지게 일하고 있는 부모에게 가던 학교를 가지않은 것도 용납이 안되는데 그 마당에 흰 고무신 타령을 하고 있으니 부모는 기가 막힐 노릇이였다.

 

그날 나는 학교를 파하고 난후 동네가 떠내려가도록 곡소리 나게 뭇매를 맞았다. 다시는 가방을 내동댕이 치지 않는다는 확약을 받고서야 어머니의 몸둥이(소나무 자루)가 춤을 멈추었다.  어머니의 매가 전부가 아니었다. 어머니의 매에 이어 큰형에게 콧물이 나올 정도로 욕을 얻어먹었다. 그리고 누나에게 가슴 사뭇치는 말도 들었다. 장장 4시간에 걸친 이 시간은 나에게 있어 지옥에서 보낸 하루 추억이라고나 할까.... 정말 아픔과 두려움의 시간이였다. 그러나 내가 이로인해 흰 고무신에 대한 집착을 버렸나고.... 아니올시다. 나는 방법을 달리하여 흰 고무신 얻기 아니 사주기 작전에 돌입하였다.

 

내가 주로 시골에서 담당하던 일은 닭과 돼지 밥을 주는 일이였다. 그리고 산 언덕배기 텃밭을 가꾸는 일이였다. 나는 부모님이 나에게 전적으로 맏겨논 부역을 거부하였다. 물론 흰 고무신을 사달라고 조르지는 않으면서.... 요즘 공부가 워낙 많아서 못하겠다고.... 공부한다면 다른 일은 몰라도 이해 하시는 부모님인지라 일정 정도 멱혔다. 그래서 나는 일을 안하면서 흰 고무신을 어떻게 부모로부터 얻을 수 있을까? 고심에 빠졌다. 그럼과 동시에 그 닭과 돼지도 나의 고심에 동참하였는지... 살이 도통 오르지 않았다. 닭아 돼지야 미안타......

 

그러던중 난 기발한 생각을 하게되었다. 고무신을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을까?하는 생각까지 나의 생각은 닫았던 것이다. 이에 난 형 몰래 검정 고무신을 없애기 위한 방법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늘 수업시간 이외에 늘 나를 감시하듯 마크하는 형과 누나의 시선을 피하기 어려웠다.

 

내 생각이 실천하기 위해서 우선 형과 누나의 시선을 피해야 했다. 이에 난 친구집에 놀러간다는 핑계를 대고 뒷산으로 무작정 달려갔다. 그리고 무엇을 했냐고.... 난 내 검정 고무신을 땅속깊숙이 묻어 버렸다. 내 검정 고무신이여 영영 안녕하면서 매장을 하였다. 그리고 위풍 당당하게 집으로 왔다.

 

형은 나의 발을 보더니 신발은 어디갔냐고 했다. 이에 난 고무신이 놀다가 없어졌다고 둘러댔다. 조금 있다가 형의 보고를 받고 일을 마치고 온 아버지가 나에게 신발을 어쨌냐고 물었다. 나는 이에 고무신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이를 믿지 않은 눈초리로 너 혹시 검정고무신 엿이나 아이스께끼로 바꿔 먹지 않았냐고 추궁을 하였다. 난 계속해서 놀고 있는데 검정 고무신이 없어졌다고 농을 쭈욱 폈다. 그러나 아버지의 추궁하면서 나의 말을 믿어주질 않았다. 난 고심하는 척하다가 말을 하였다. 아차!! 잠시 생각해 보니께 없어진게 아니라 마을회관 앞에서 축구를 하나가 검정고무신이 벗겨져 하늘로 높이 날아갔는데 안보인다고 하였다. 이에 집안은 네 고무신 찾기 위한 대대적 수색작업이 벌어졌다. 형과 누나 그리고 동생들은 내 검정 고무신을 찾기 위해 동네 지붕이란 지붕은 죄다 찾아보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집안이 동네 지붕을 구석구석 찾았지만 날씨가 밤인지라 이를 찾는 것이 어려웠다. 이에 아버지는 일단 신발은 내일 아침 일찍 찾아보자고 하였고, 나의 추궁또 끝났다.

 

나의 작전을 실패로 돌아갔다는 판단이 머리에서 번득였다. 나는 방에 들어와 잠을 자지 못하고 동생들과 형이 잠들기를 마냥 기달렸다. 그리고 가슴졸이며, 밤 정오가 넘어서 산으로 향하였다. 산길을 그냥 걸으면 무섭겠으나 그 때는 오로지 검정 고무신을 내가 말한 지붕으로 올려놓아야 한다는 생각에 전념하여서인지 검정고무신이 매장된 장소를 찾기위해 겁없이 올라갔다.

 

검정고무신을 매장한 곳이 찾기 쉬운곳이라서 금방찾았다,

그리고 검정고무신을 지붕위로 날려보냈다. 검정고무신과 나의 인연은 악연이라는 것을 되뇌이며, 지붕위로 날렸다. 그리고 작전이 실패보다는 내일 있을 불호령을 모면하였다는 안도감에 쥐죽은 듯이 집으로 들어와 잠을 청하였다.

 

아침 아버지는 형, 누나, 동생, 그리고 나보러 학교가기전에 검정 고무신을 찾아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우째 분명 지붕으로 날려버린 고무신이 안보이는 것 아닌가? 분명 어제 지붕위로 날려 안착한 검정 고무신을 확인하고 집으로 들어왔는데.... 검정 고무신이 도깨비 쒸인것인지 다리가 달린 것인지 없었다. 그 집주인에게도 물어보았다. 그러나 그 검정 고무신은 켜녕 지붕에서 무엇하나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우째 이런일이.... 이에 형, 누나, 동생, 나는 찾는 것을 멈추고 집으로 돌아와 고무신이 다리가 달려서 없어졌는지, 하늘로 날개달고 날아간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형들도 이때 나를 거들어 아버지의 불호령을 피할 수 있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도대체 검정 고무신은 어디로 간거야.....

 

아버지는 형에게 돈을 주고 학교가다가 가게에서 신발을 사주라고 돈을 주었다.

난 기대에 부풀어 혹시 아버지가 흰고무신 사주라고 형에게 돈 주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맨발로 신작로를 걸어갔다. 늘 걷지만 앞이 안보이는 그 길이 왜 이리도 가까이 느껴지는지 날아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몸은 왜 이리 가뿐한지.... 그러나 나의 생각은 상상에 머무르고 말았다. 그전보다 질긴 검정고무신을 형이 들고 오는 것이 아닌가?

 

난 결국 이 작전에서 흰 고무신을 승리의 전리품으로 얻지 못하였다. 검정 고무신과의 인연을 나의 필연이라 생각하고 그냥 순응하면서 살아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돈이 없어서 근근덕지게 생활하던 부모님은 아마도 많은 형제들에게 흰 고무신을 사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돈이 없으니 공평하게 다들 검정 고무신을 사주신 것 같다. 누구 하나가 흰 고무신을 신을 수 없었던 시대였으니까...

 

그런데 지붕으로 올린 고무신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난 상상컨데 검정 고무신이 지붕위로 날다 역추진력을 받아 달나라로 날아가지 않았나 그냥 생각해보았답니다. 없어졌다고 하는 것보다는 낳잖아요..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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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는 삶의 무기입니다.

  • 등록일
    2004/08/30 00:20
  • 수정일
    2004/08/30 00:20

일요일 술이 덜깬 몸으로 제일먼저 컴퓨터 앞에 와서 민중가요를 들었습니다.

 

하루종일 민중가요에서 나오는 노래를 들으면서 기간 짧았지만 내가 운동이라는 끈을 부여잡으면서 배웠고 불렀던 노래들을 집안에서 되뇌이며 을퍼보았습니다.

 

89년부터 지금까지 배워왔던 노래들 하나하나 들으니 꽤 많은 곡들의 노래를 알고 있더군요. 이 노래도 나와 함께 발전하여 왔나 봅니다. 89년도 힘찬 노동자들의 함성을 느낄 수 있었던 노래와 90년대 초중반의 모색을 위한 노래, 2000년 대중적 접근을 위한 민중가요의 변천을 보면서 노래도 운동과 함께 힘찬거나 서글프거나 대중성을 접근하기 위한 자신의 모색을 하여왔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노래(500곡 정도)를 들으면서 저의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저도 인간인지라 간사한 마음인지라 오락가락하며 다잡아 지지 않더군요. 인천에서 내려와 제가 속한 단체에서 일을 하면서 전 한편의 희망과 한편의 절망을 보았답니다. 해결하기 위한 나의 노력은 열심히 살자였습니다. 그러나 초기 이야기를 하던 동지들은 하나둘 희망과 절망을 되뇌이며 떠나갔습니다. 참 떠나는 그들의 뒷모습에서 안타까움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소박한 마음으로 시작한 이 운동.... 노동자들이 정보 주체가 되어야 입장을 갖고 나의 길을 갔습니다. 나의 주요 고민은 노동정보화를 통하여 상층 운동의 폐단과 노조의 민주적 운영, 노조의 관료화를 현장의 힘으로 분쇄하기 위한 운동을 지향하고자 하였지만 내가 이루어 놓은 것은 하나도 없군요. 앞만보고 달려와서 그런지 내가 속한 곳에 대한 애증이 안타까움으로 시간이 흐르면 흐를 수록 들더군요. 부족한 나를 책망해봅니다. 모르는 것은 배워보지만 이도 쌓여가는 갈증은 풀기에는 해결책이 아니더구요. 더욱더 미궁속으로.... 원칙 없이, 소신없이 운동을 지향해 왔던 저를 책망해 봅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문듯 원칙이라는 놈이 나의 머리를 잡더군요. 그게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겠고..... 아끼고 닦아왔던 곳에 대한 애증 때문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용기를 줄 수 있는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사람들이 주변엔 없더군요. 뭐 졸업 후 정확히 내가 속한 곳이 없어졌고, 선후배들간의 침목모임에 참석하기 싫어서 학교에도 가질 않아 그전 동지들과는 담벼락 쌓고 살아왔으니 뭐 함께 고민해줄 동지들이 어디있겠습니까.... 인과응보죠.

지금 과거가 사뭇치게 그립습니다. 학생운동을 하던 시기는 마음을 다잡아주는 선배, 후배, 동기들이 있어서 무난하게 버텨온 것 같습니다. 그들이 요즘 세삼 보고싶고, 그립더군요. 욕도 얻어 먹고 싶고, 힘내라는 격려도 듣고 싶은데 현조건은 그렇지 못하내요. 부도덕한 저를 책망해야죠. 뒤늦게 고민이 든 운동 원칙이라는 것에 대해서 좀 더 철저해질 수 있었을 텐데....

 

어디론가 정처없이 훌쩍 떠나 그냥 무엇을 하고 살지 고민해볼까 생각하지만, 이도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필요한 용기가 솟구치지 않는 군요. 아마 정처없이 떠나는 것도 용이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 공간에 흔적을 남겨기기 위해 글을 써보았지만 쎃다 지웠다 쎃다 지웠다 몇번을 반복하였습니다. 도통 무슨 소리를 할지 정리가 안되더군요, 주로 쓴글 내용이 저의 괴변이겠지만....

 

잡다한 고민도 지치니까 잊어집디다. 저밀어 오는 가슴의 싸함도 불과 몇시간이 지났다고 가시기 시작하더군요. 이에 나는 일요일 하루종일 노래를 들으면서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보았습니다.

 

노래를 들으니 마음이 평온해 집니다. 노래는 실천의 태이며, 삶의 무기인것 같습니다. 과거의 나의 삶의 흔적을 끌적여 봅니다.

 

. 89년 한양대에서의 전대협 출범식에 고향 친구가 전대 죽창중대 사수조로 참석하였습니다. 출범식에서 친구도 만났습니다. 저학번이 였던 나는 전대협 출범식.... 가슴이 뭉클함을 느꼈습니다.

 

. 89년 동아리방 선배들이 고뇌하며 떠나는 뒷모습을 우두커니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 89년 세상을 알았던 희망과 선배들의 떠남속에서 절망과 운동이라는 것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였습니다.

 

. 90년 후배들을 받았습니다. 후배들을 보면서 새로운 용기가 복돋았습니다. 또한 복학한 선배들이 흩어져 있던 우리를 한곳으로 모았습니다. 절망속에 희망의 시작이었습니다.

 

. 90년 믿었던 복학생 선배들도 떠나갔습니다. 우리는 홀로남겨졌습니다. 그러나 89년도엔 우리 동기들뿐이었지만, 이제는 후배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도 모르는 우리는 이리저리 동분서주하면서 후배들을 다잡아 보았습니다.

 

. 91년 후배들과 우리는 떠난 선배들의 몫까지 실천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고, 또 후배들을 받았습니다. 3학년인 저희가 후배들을 지도하는 단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분란의 씨앗이 시작되었습니다. 90학번 후배들과의 분란은 참 지난하면서도 혹독하였습니다. 90학번 후배와의 분리.... 그들은 다른 정파로 우린 CA(제헌의회그룹)에서 다수파 소수파 논쟁에서 소수파로 그리고 민학련에서 후배들과 분립.... 그리고 후배들은 대거 다른 정파로 입장을 정리하고 91학번 후배들은 각각 분화되었습니다.

 

. 91년 강경대열사를 시발로 하여 김귀정 열사로 이어지는 열사정국에서 우린 연세대 세브란스 앞과 서울 방방곡곡을 누볐고, 백병원 침탈을 대비하였으나, 외대 정국무총리 강의 저지를 위한 달걀사건으로 이 정국은 끝으로 치닫고 대대적인 공안탄압 분위기로 돌변,.....

 

. 91년 잊을 수 없는 시청 진격투쟁.... 해방구였다. 이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 92년 동아리를 추수렸습니다.

 

. 92년 총선투쟁의 결합 우리는 또다른 상상을 갖고 후배를 받고 힘차지는 않지만 운동의 끈을 부여잡았습니다. 서울학선투련(학생선거투쟁연합, 이곳에서 선거운동 후원금 모금을 우하여 아침인가 아침햇살인가라는 선전물을 만들었고, 이후엔 민중의 나라라는 책자를 만들었답니다. 민중의 나라는 이후 백선본 투쟁으로 이어지는 기금마련을 위한 주요 책자였습니다.) 깃발 아래 모여서 민중의독자적정치세력화(이하 민독정, 민중당 몇몇 후보와 무소속 지식인 노동자의 위기투합하여 국회의원 출마한 지역에서 92년 국회 총선을 진행함.)를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저는 민중당 소속 민독정을 추진하는 성동갑 김철수 선본의 응봉동 조직 총책으로 참여하였습니다. 매일 아침 응봉역 앞 명암 나눠주기, 이 일이 끝나면 배낭가방에 선거유인물을 넣고, 오전 선전물을 가가호호 배포, 오후 선본에서 불법으로 만든 유인물을 접고 또다시 배포, 이러다 지역 깡패들과 대치를 하면서 몸싸움을 하는가 하면 아니면 경찰에게 붙잡혀서 파출소로 직행.... 주로 옥수동 선본엔 동국대 총학, 동연, 사과대, 공대가 결합하여서 함께 선거투쟁을 진행하였음.... 파출소 직행이 비일비재하다보니 동국대 총학에서는 이를 타개하기 위한 대책으로 파출소에 직접 전화를 걸어 파출소 전소시킨다는 어름장을 놓기도 하였다. 이에 소스라친 경찰서장은 우리들을 호송하는 척하다 자신이 불이익을 받을까 풀어주었다. 그 당시 옥수동과 응봉동은 달동네여서 지금처럼 아파트 흉물이 들어서지 않았다. 참 골목길 달동네의 정겨움과 골목길에서 뛰어노는 어린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그리고 김철수 국회의원 후보의 대중강연회를 위해 그 산동네를 풀통과 유인물을 들고 민중의 나라로 라는 포스터를 전봇대에 풀칠하면서 돌아다녔다. 지금 그 산동네는 없어졌지만 내가 그 당시 선거운동을 하면서 산 꼭대기에 아름답게 꾸며진.... 놀이방(공부방 연합서클과 놀이방 운동을 하는 곳에서 운영하는 놀이방이였다. 이 지역 대부분의 사람들이 맞벌이기에 비싼 돈을 내고 유치원에 보내지 않으면 안되는 조건이었다.) 하나를 발견하였다. 놀이방 담당선생이 나와서 우리에게 수고한다고 아이들이 먹던 다과와 음료수를 따라주면 힘내라는 격려도 받아보았다. 그 여선생 정말 이뻤는데... 

 

이렇게 1달간 선거를 보냈다. 이 선거 기간동안 현장노동자 형들을 많이 알 수 있었고, 이 지역 기독사회청년연합에서 결합한 이, 동국대 학생들을 많이 알 수 있었다. 결과는 4000표를 얻었다. 다들 표에 신경을 쓰지 않고 서로 열심히 했다는 격려를 하면서 그 뜨거웠던 선거를 끝을 마쳤다. 그러나 이 선거의 패배는 민중당의 해산을 가져왔다. 참 안타까운 현실이다. 주대환의 진보정치의 이해라는 책자가 내 책장에 꽂혀 있다. 이들의 고민에서 난 선거에 참여한 주체의 일환으로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들중에 이재오, 이우재(이우재는 연세대 학생들이 선거투쟁에 결합한다고 지원온 것을 표 떨어진다고 쫓아낸 것으로 유명세를 탔다.), 김문수가 있었다. 그들은 지금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되어 있다. 참 아이러니하다.

 

. 92년 총선후 6월 진보정치학생연합(진학련)과 진보정치연합(진정련)의 출범.... 우리는 진학련이 출범하면서 냈던 진보와 지성에 글을 탐독하였다. 공개학정조 운동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한총련 개혁을 위한 LCPT(좌파학생회단모임)으로 이어지는 성과를 거뒀다. 진보와 지성에서 주장하는 그들의 규정에서 비합, 반합은 우리가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공안의 규정이며, 이들은 전면적 비합과 반합이 아닌 공개적인 학생운동을 천명하였다. 사회진영에서는 진정연이 이 기치를 내걸고 출범하였다. 이에 좌파에서는 합비합동시건설에 대한 구호가 아닌 실천이 이루어졌다. 우리 진영 또한 92년 말 동국대에서 전국학생정치연합(이하 전학련)을 출범시켰다.

 

. 92년 김영삼 문민정부는 학생운동 탄압의 일환으로 철폐되었던 학사경고제를 부활시킨다. 이로 인하여 무수한 학생운동 활동가들이 활동에 있어 타격을 받게 된다.

 

. 93년 한총련(원래 한총련이아닌 기치는 전총련 건설이었다. 한총련으로 왜 바뀌었는지는 모르겠다.) 개혁적 움직임과 학생운동의 마지막 몸부림이 시작기였다.

 

. 93년 한양대에서 울려퍼진 전노협의 총액임금철폐투쟁은 노동자들의 각성된 힘의 위력을 발휘하였다.

  그리고 나의 군입대....

 

내가 학생운동을 하면서 생가되었던 것을 끌적여 보았다. 무수한 집회 참여가 슬라이드 필름처럼 지나간다. 참 짧았지만 긴 호흡을 가져왔다.

이후와 관련되서는 이후 계기가 되면 한번 떠 써보겠습니다.

 

내가 오늘 노래를 들으면서 회상하던 기억입니다.

참 노래의 힘을 빌어 용기가 솟구쳤으면 합니다. 희망이 보였으면 합니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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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유정고밴드] 또 친구에게

  • 등록일
    2004/08/28 20:08
  • 수정일
    2004/08/28 20:08

mms://211.215.17.148/song/youjunggo band/youjunggoband_1_to friend.asf

 

♪ 또 친구에게 ♪


앞으로 어떻게 살아간건지

어떻게 난 뭐라 할말이 없어

그저 이렇게 살아 갈뿐이라 말했지

 

그러면 어떻게하냐고 묻더군

아주 걱정스런 표정을 짖고

어떻게 길이 안보인다 말할까

 

혹시 알고 있거든 말을 하게

내가 어떻게 살아야 좋을지

혹시 알고 있거든 말을 하게

내가 어떻게 살아야 좋을지

 

차라리 저 빌딩에 불을 지를까

아니면 저 자동차 유릴 깨볼까

아니면 술에 취한채로 헤메다

아무하고나 싸움박질이나 해볼까

 

아니면 세종로 큰 길가에서

옷을 벗고 춤을 추다 미칠까

아니면 벌거벗은 채로 헤메다

아무렇게나 웃음거리나 되볼까

 

혹시 알고 있거든 말을 하게

내가 어떻게 살아야 좋을지

혹시 알고 있거든 말을 하게

내가 어떻게 살아야 좋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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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김영랑] 모란이 피기 까지는

  • 등록일
    2004/08/28 20:01
  • 수정일
    2004/08/28 20:01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여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에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모람이 피기까지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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