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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가 탐구를 시작할 때 맨 처음, 달리 표현하면 곧바로 우리 앞에 나타나 우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다른 것이 될 수 없고 오직 <뭔가를 안다>는 지(知)일 수 밖에 없는데[1], 이 지는 <뭔가>를 바로 알아보는, 달리 표현하면 <있는 것>을 아는 직접적인 지일 수 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가 취하는 태도는 직접적인 지의 태도와 다름없고 또 그래야만 하는 것으로서 직접적인 지가 그 대상과의 직접적인 관계 안에서 그 대상을 받아들이듯이 우리도 지에 대하여 그렇게 하면 된다. 즉 우리가 직접 관계하는 가운데 우리 앞에 나타난 직접적인 지에 어떠한 변경도 가하지 않고, 또 그것을 받아들이는데 개념의 운동이[2]개입하지 못하도록 붙잡아두는 것이다.
[1]정말 그런가? 뭔가를 대상으로 삼는 지가 정말 첫 대상인가? 뭔가를 대상으로 삼는 지의 힘을 빌려 우리가[철학이] 지를 대상으로 삼는다고 하는데, 이렇게 철학이 대상으로 삼는 지는 이미 <실체적인 삶/substantielles Leben>에서 벗어나온 것이 아닌가? 그래서 원초적이라고 할 수 없지 않는가? 무의지적 기억(mémoire involontaire)이 가능한 것은 감각의 대상이라는 것이 달리 표현할 수가 없어서 감각의 대상이라고 불려질 뿐이지 감각에게 대상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역자는 서설에서 <실체적인 삶>과 거기서 벗어나오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도 생생한 초등학교 입학식에 대한 기억을 예를 들어 설명했다. 덧붙이자면 독일에 온후 한동안 자주 똑 같은 꿈을 꾸었다. 따스하고 밝은 햇살에 기타소리가 맴도는, 어떻게 말로 표현하기 힘든 꿈이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대상이 아니라 대상 안에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사촌 형이 따사로운 봄날 자주 갓난애기를 데리고 뒷동산에 올라가 기타 연습을 했단다. 알고 나선 두 번 다시 그 꿈을 꾸지 않게 되었다.
[2]원문 <das Begreifen>
<정신현상학> 서설 번역 초안을 마쳤다. 일을 보고 나면 개운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정신현상학> 번역을 시작한 이유는 번역을 하면 좀 꼼꼼히 읽어 내려갈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였다. <정신현상학>의 <사유발자취/Gedankengang>를 <내 힘을 보태 따라가/mitvollziehen> 보겠다는 의지였다.
근데 일이 이상하게 되어버렸다. 많은 부분 <mitvollziehen>을 하지 않고 헤겔 흉내를 내버린 것 같다. 특히 이해가 안된 부분들은 그렇게 넘어간 것 같다. 물론 <mitvollziehen>이 잘 안되어서 헤겔 흉내를 내려고 했겠지만. 그리고 억대 수표를 보고 기가 죽어 동전을 요구하지 못하고 경건한 자세로 취하는 면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헤겔 흉내를 내는 나의 행위를 살펴보니 그 근간에는 번역에 대한 오해가 무의식적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번역을 저자가 만들어 놓은 항아리를 다른 재료로 다시 똑같이 만들어 저자가 말하는 내용을 고스란히 담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번역이란 것이 무슨 일을 하는 것인지 아직 긍정적으로 정확하게 말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이건 아닌 것 같다. 저자가 무슨 항아리를 만들었다는 것조차 틀린 것 같다. 기호, 낱말, 언어에 대한 숙고가 부족해서 이런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사유가 언어라는 매체에서 진행되는 것이라면 언어도 변증법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을 것이고, 그럼 번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변증법적 번역? 이건 어떻게 하는 것일까? 노발리스가 말한 <뮈토스적인 번역/mythische Übersetzung>과 같은 것일까?
“번역에는 세가지 종류가 있는데, 말을 그대로 옮겨 놓은(grammatisch/문법적) 방식, 변형을 주는(verändernd) 방식, 그리고 뮈토스적인(mythisch) 방식이다. 뮈토스적인 번역이 최상스타일의 번역이다. 이런 번역은 개별 예술작품의 순수하고 완성된 성격을 서술한다. 현존하는 예술작품이 아니라 그 이상을 우리 곁에 갖다 논다는 말이다.” (노발리스, 꽃가루 68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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