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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감각적 확신>은 그가 갖는 구체적 내용 때문에 등장하는 순간[1] 더할 나위 없이 <풍부한> 인식, 아니 그 풍부함이 무한한 인식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 풍부함이 펼쳐지는 시간과 공간은 우리가 아무리 <넘어서고 또 넘어서려고> 해도, 아니면 그 충만한 내용에서 한 조각을 떼내어 이를 <쪼개고 또 쪼개어 들어간다고> 해도 한계에 부딪히는 법이 없다. 뿐만 아니라 감각적 확신은 또한 <가장 참다운 인식>으로 등장한다. 왜냐하면, 대상에서 아직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고 대상을 고스란히 온전한 모습 그대로 마주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기에 감각적 확신은 이런 것인데,] 감각적 확신은 실지로 자신이야말로 더없이 추상적이고 가장 가난한 진리라고 자신을 규정하고[2] 나선다. [그래서] 감각적 확신이 알고 있다고 하는 대상에 관해서 말하는 것은 다음뿐이다: 그것이 <있다>. 감각적 확신이 내놓는 진리는 다만 사물의 <존재>일[3] 뿐이다. 이와 같은 확신 안에 나타나는 의식을 살펴보면 그 역시 단지 순수한 <자아>[4]로만 존재할 뿐이다. 달리 표현하면, 그 확신 안에서는 [자아와 대상의 존재양식이 대등하게 되어 결국, 대상은 집어 찍어 들어올려 보여주는 것[5] 이상이 아닌] 순수한 <이것>이[6]되고, 이와 마찬가지로 <자아>도 [사물화 되어] 단지 [찍어 지적하는] 순수한 <이사람>이[7]되다는 말이다.[8]이런 <이사람>뿐인 자아가 <이것>에 대하여 확신하는 이유는 [통각으로서의] 자아가 의식 안에서 다양한 사유운동을 하는 가운데 자신을 펼쳐나가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사람>으로서의] 자아가 확신하는 <사물>이[9]구별된 성질의 집합체로서 그 안에서 풍부한 관계를 형성하고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는[10], 달리 표현하면 다른 사물과 다방면적으로 관계하기 때문도 아니다. 감각적 확신의 진리는 위와 같은 양면에 매달려 있지 않다. 감각적 확신 안에서는 자아, 대상 할 것 없이 둘 다 다면·다층적인 매개라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다면·다층적으로 관념하고 사유한다는 의미를 갖는 자아도 아니고, 다면·다층적인 성질을 지닌다는 의미로서의 사물도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11] 감각적 확신 안에서는 사물이 <있다>는 것 뿐이다. 그리고 <있기> 때문에 <있을> 뿐이다. 이렇게 <있다>라는 것이 감각적인 지에게는 본질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순수한 <존재>, 달리 표현하면 아무런 주름이[12]없는 직접성이 감각적인 지가 내놓는 <진리>란 것의 다다. 이와 마찬가지로 확신은 대상에 대한 확신으로서, 이때 대상과의 관계는 [덜 떨어진][13] 직접적인 순수한 관계다. 결론적으로[14]의식은 <나>라는 자아다. 더 이상의 것이 아니다. 순수한 <이사람>일 뿐이다. 이런 <개별자>가 순수한 이것, 달리 표현하면 <개별적인 것>을 아는 것이다.
[1]원문 <unmittelbar>
[2]원문 <sich ausgeben>
[3]원문 <Sein der Sache>
[4]원문 <reines Ich>
[5]아도르노의 <Abhub>
[6]원문 <reines Dieses>, 시오랑의 “객체의 이념까지 멀리하는 점까지 나아간 순수한 [상태]”가 연상되기도 한다. (전 글 “encore” 참조)
[7]원문 <reiner Dieser>
[8]데카르트의 <성찰>과 함께 훗셀의 <순수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으로 가기 위한 [예비적] 이념/Ideen zu einer reinen Phänomenologie und phänomenologischen Philosophie>, 특히 제2장 <현상학적 근본고찰/Die phänomenologische Fundamentalbetrachtung>을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원문에는 <Ich>가 두 갈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런 구별을 표현하기 위해서 기우림체를 사용한다. 역자는 기우림체를 < >을 사용하여 번역하였다. 몇 번 언급하였듯이 데카르트의 성찰은 <Cogito res cogitans cogitatum/나는 생각하는 사물로서 대상을 생각한다.>요약될 수 있겠다. <res cogitans>가 바로 사물화된 의식이다. <Cogito>는 통각(Apperzeption)으로서의 의식이 되겠다.
[9]원문 <Sache/사물>. 여기선 그냥 대상이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사물도 자아와 마찬가지로 두 갈래로 구별되어 사용되고 있다. 이 구별을 표현하기 위해서 역시 기우림체가 사용된다.
[10]원문 <eine reiche Beziehung an ihr selbst>. 또 머리 아픈 <an ihr selbst>라는 표현이다.
[11]원문 <:>
[12]원문 <einfach/단순한>. 역자는 들뢰즈의 <le pli/주름>에 기대어 번역하였다.
[13]덜 떨어진 갓난애기인가 아니면 모든 것에 회의적인 노인네의 의식인가?
[14]원문 <:>
§2를 한번 더 살펴보자.
<정신현상학>이란 드라마를 보러 오는 우리 구경꾼은 <직접지unmittelbares Wissen>가 1막 1장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을 알고있다.
역자는 이 <직접지>를 주객의 구별이 없는 <꿈 같은 상태>로 이해했다.
근데 §2로 넘어가면서 뭔가 달라진 것 같다. 원문을 살펴보자.
„Der konkrete Inhalt der sinnlichen Gewißheit läßt sie unmittelbar als die reichste Erkenntnis, ja als eine Erkenntnis von unendlichem Reichtum erscheinen, [...]. Sie erscheint außerdem als die wahrhafteste [...].”
역자는 §2를 처음에 이렇게 이해했다. 무대에 등장하는 <직접지>를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이 어린아이가 자랑 삼아 내놓는 것이 따져보면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식으로 이해했다.
근데 이건 뭔가 잘못된 것 같다. 아니 잘못되었다기보다는 덜 익은 생각으로 번역을 한 것 같다. 질문은 하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다. 몇 가지 질문을 정리해 본다.
1.
우선 눈에 띄는 것은, §1에서 §2로 넘어가면서 아무런 구별이 없었던 <직접지>에 구별이 생긴다. <구체적 내용konkreter Inhalt>과 <감각적 확신 sinnliche Gewissheit>이 그것이다. 왜 이런 구별이 생기는가? <등장erscheinen>하기 때문에? 뭔가 석연치 않다.
2.
<erscheinen>하면 <무엇이> <누구에게> 등장하는가라는 질문을 해야 할 것이다. 극장이라는 기본구도를 염두에 두어야 했었는데 역자는 처음에 이 점을 간과했다.
<무엇>의 문제는 §1에서 해결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근데 뭔가 석연치 않다. §2의 주인공은 <감각적 확신>이 아닌가? <직접지>가 왜 <감각적 확신>으로 둔갑했는가?
<누구에게>라는 문제는 더 헷갈리게 만든다. <직접지>가 철학=헤겔=구경꾼에게 나타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기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은 <감각적 확신>이 뭘 모르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구경꾼인 우리에게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럼 <감각적 확신>에게도 자신이 <구체적인 내용>으로 나타나는가?
원문을 살펴보자.
„Diese Gewißheit aber gibt in der Tat sich selbst als die abstrakteste und ärmste Wahrheit aus.“
역자는 처음에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감각적 확신은 이런 <확신>을 내세우면서 자신이 진리라고 하지만 사실 이런 확신이야말로 자신을 더없이 추상적이고 빈곤하기 짝이 없는 진리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철학=헤겔=우리가 이런 판결을 내리고 있다.
그런데 원문은 앞에서 제기한 질문에 기대여 완전히 거꾸로 이해할 수도 있다. <직접지>에 <구체적인 내용>이 있다고 보는 것은 철학=헤겔=우리고, 자신은 추상적이고 텅 비어있다고 신분증을 제시하면서(sich ausgeben) 말하는 쪽은 대려 <감각적 확신>이 된다.
이렇게 해 놓고 보면 등장하는 주인공이 천진난만한 어린아이가 아니라 떠돌아다니면서 세상만사를 다 본 노인네다. 이 노인네에 한겨울 담요를 뒤집어쓰고 벽난로 앞에서 „cogito“하는 데카르트가 겹치고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에밀 시오랑(E. Cioran)이[1] 겹친다.
직접적이기는커녕 엄청난 반성을 한 지가 무대에 등장하고 있다.
[1]“Il existe une connaissance qui enlève poids et portée à ce qu'on fait: pour elle, tout est privé de fondement, sauf elle-même. Pure au point d'abhorrer jusqu'à l'idée d'objet, elle traduit ce savoir extrême selon lequel commettre ou ne pas commettre un acte c'est tout un et qui s'accompagne d'une satisfaction extrême elle aussi : celle de pouvoir répéter, en chaque rencontre, qu'aucun geste qu'on exécute ne vaut qu'on y adhère, que rien n'est rehaussé par quelque trace de substance, que la « réalité » est du ressort de l'insensé. Une telle connaissance mériterait d'être appelée posthume : elle s'opère comme si le connaissant était vivant et non vivant, être et souvenir d'être. « C'est déjà du passé », dit-il de tout ce qu'il accomplit, dans l'instant même de l'acte, qui de la sorte est à jamais destitué deprésent.” (출처: De l'inconvénient d'être né. 태어나 있다는 것의 모순[l'inconvénient/불편을 모순으로 번역했다], 3번째 단장;www.scribd.com/.../Cioran-De-l-inconvenient-d-etre-ne-Syllogismes-de-l-amertume-textes-integraux, 강조 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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