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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 3대 세습

행인님의 [배교(背敎)를 원하는 걸까?] 에 관련된 글.

 

이북3대 세습.

 

물론 말이 안 된다.

 

말이 안 되니까 말을 절제할 수도 있고, 말도 안 된다고 언성을 높일 수가 있겠다.

 

그런데 보편적인 시민사회이념을 받들어 언성을 높이면 어찌하겠다는 것인가? 이북선교라도 하겠다는 말인가? 물론, 언성을 높이는 사람에게 하늘천 했으니까 따지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하늘천하고 그만 두어도 할 말이 없다. 단지 실천적으로 연대하는(!) 국제시민사회이념을 운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면 시민사회가 안 보이는 이북에 국제시민사회이념의 체 게바라라도 보내겠다는 말인가? 이런 의미에서 자칭 진보의 이북 3대 세습에 대한 비판은 북한선교보다 못하다. 이북 3대 세습에 대한 비판이 단지 “진보임을 인정받기 위한 한마디”뿐이라는 역비판이 가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 말도 하지 말란 말인가? 그건 아니다. 단지 실천이 결여된 것은 진보란 이름을 적법하게 걸칠 수 없으니 그냥 내려놓으라는 이야기다.

 

오리엔탈리즘의 핵심은 오리엔트에 오리엔트 양식이 있다는 것보다 서양이 오리엔트를 겉에서 바라보기만 하는 인식형태라는 점이다. 민주노동당이나 이를 비판하는 자칭 진보나 이 오리엔탈리즘에 빠져있다.

 

행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추구하는 것은 “위대한 나라”의 헌법에 명시될 만큼 가시화된 보편적인 이념이다. 통과. 문제는 둘 다 이북에 3대세습을 비판하는/반대하는 이북시민사회를 명시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최소한 왜 그런가 이론이라도 내 놓아야 하지 않는가? 탄압이 심해서, 이북체제와 이북인민이 사이비종교집단과 같이 뭉쳐있어서, 아니면 지하시민사회가 있는데 공개하기 곤란하다든지…

 

내정간섭 배제 논리도 만찬가지다. 내정간섭 배제 논리는 국가간 모든 국가의 주권을 상대화한다는 논리다. 30년 종교전쟁의 결산이다. 요지는 어는 특정 국가가 절대적인 위치에 있지 않다는 점이다. 아직도 유효하지만 “위대한 나라”가 종종 위반하는 국제법이다. 한 국가와 그 시민간의 관계에는 다른 국가가 간섭할 수가 없다. 단지 시민사회만, 그 시민사회가 어떤 국가의 틀 안에 있든지 간섭할 수 있다. 아니 시민사회의 속성상 실천적으로 간섭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앞의 문제와 똑 같은 문제다. 평양에 가서, 아니면 어느 나라 이북대사관 앞에서 1인 데모라도 해야 한다. 아니면 진보란 이름을 내려놓고 비판하면 된다.

 

이런 맥락에서 이북선교를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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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1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 2

이 문단에서 <unmittelbar>가 뭘 의미하는지 보다 정확하게 살펴보자. <unmittelbar>가 이 문단에서 네 번 사용된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같은 선상에서 사용되므로 세 가지로 사용된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엔 <zuerst>란 의미로, 다음엔 <seiend>란 의미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aufnehmend>란 의미로 사용된다. 이 세 가지 낱말들이 모두 <의식>이 주인공이 되는 <정신현상학>이라는 드라마의 1막 1장에 등장하는 <지>를 설명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1막 1장에 의식이 <지>로 등장한다. 의식은 본질적으로  <무엇에 대한 의식/Bewusstsein von etwas>이므로 <나는 무엇을 안다/Wissen von etwas>라는 행위로 나타난다는 말일까? 아무튼 <정신현상학> 드라마에 의식이 취하는 첫 모습은 <지>다. 헤겔은 이 <지>를 <직접지>라고 하고 위의 세 가지 낱말로 설명한다. <나는 무엇을 안다>라는 <지>의 구조를 살펴보면 세 가지 축이[Momente] 구별된다. 지의 주체와 객체, 그리고 이 둘 간의 관계다. <zuerst>는 <맨 처음>이라는 의미로 시간적인 의미이지만 <지>에 위의 세 가지 축이 스며있다는 맥락에서 보면 지의 주체를 설명하고, <seiend>는 지의 대상을, 그리고 <aufnehmend>는 지의 주체와 객체 간의 관계를 설명한다고 할 수 있다. <zuerst>란 의미의 영어 <first>와 독어 <Fürst/영주>의 어원은 같은데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헤겔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떠한 매개에 의하지 않고 [홀로 직접]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seiend>도 역시 아무런 매개에 의하지 않는 <그저 있다>라는  의미다. <aufnehmend>도 이런 주체와 객체간 아무것도 끼어 들 수 없는 그런 관계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보면 이 문단에서 이야기되는 <unmittelbar>는 <직접적인 것이 직접적인 것을 직접적으로 안다>라는 말을 하고 있다. 뭔가 완전히 옹그려져 아무런 구별이 없는 상태다. 꿈꾸는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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