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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런가? 뭔가를 대상으로 삼는 지가 정말 첫 대상인가? 뭔가를 대상으로 삼는 지의 힘을 빌려 우리가[철학이] 지를 대상으로 삼는다고 하는데, 이렇게 철학이 대상으로 삼는 지는 이미 <실체적인 삶/substantielles Leben>에서 벗어나온 것이 아닌가? 그래서 원초적이라고 할 수 없지 않는가? 무의지적 기억(mémoire involontaire)이 가능한 것은 감각의 대상이라는 것이 달리 표현할 수가 없어서 감각의 대상이라고 불려질 뿐이지 감각에게 대상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역자는 서설에서 <실체적인 삶>과 거기서 벗어나오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도 생생한 초등학교 입학식에 대한 기억을 예를 들어 설명했다. 덧붙이자면 독일에 온후 한동안 자주 똑 같은 꿈을 꾸었다. 따스하고 밝은 햇살에 기타소리가 맴도는, 어떻게 말로 표현하기 힘든 꿈이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대상이 아니라 대상 안에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사촌 형이 따사로운 봄날 자주 갓난애기를 데리고 뒷동산에 올라가 기타 연습을 했단다. 알고 나선 두 번 다시 그 꿈을 꾸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Mémoire involontaire>에 나타나는 것은 목전에 있는 <das Diese/바로 이것>이 아니다. 그 동기야 마르셀 푸르스트에서 볼 수 있듯이 <das Diese/바로 이것>이 되겠지만, 차 한잔에 곁들어 먹는 <마들렌>이라는 과자에 의해서 솟아오르는 것은 <das Diese/바로 이것>이 아니라 <한 세계/eine ganze Welt>다. 여기에 <직접지>가 <가장 풍부한 인식>으로 보이는 이유가 있다.
헤겔은 이 문단에서 이런 <무의지적 기억>이 가지고 있는 구조를 전개하는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왜 의식에 <무의지적 기억>이 등장하는가 아닌가? 여기서 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는가? <의식>이 능동적인 원리라면, 완전 수동적인 <무의지적 기억>은 의식의 터전에서 자리잡을 수 없지 않는가. 훗셀의 현상학과 함께 프로이드의 심리학에 가서 알아봐야 할 내용인 것 같다.
그래서 철학이 등장하는 지를 향해서 취하는 태도도 문제가 있다. 철학은 <직접지>가 취하는 태도를 취한다고 한다. 그런데 <직접지>가 <태도를 취한다>고 할 수 있을까. <태도>의 의미에는 대상화한다는 의미가 있지 않는가? 역자가 이해한 것과 같이 <직접지>가 대상화 이전의 의식상태라면 <직접지>에게 능동적인 태도는 없는 것 같다. 비교하자면 유아가 태 속에서와 같이 <보살핌>과 <돌봄> 안에 있듯이 <직접지>란 대상 안에 있는 것 같다. 이런 것을 꼭 <지>라고 할 필요도 없겠다.
그리고 철학이 이런 의식을 대상화할 수 있을까? “How can we know the dancer from the dance?” 대상화한다면 대상화된 의식이 취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발전된 의식이, 아니면 온전히 능동적인 원리가 되는 의식이 취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무의지적 기억>이 취하는 “태도”는 아니다. 이런 선상에서 보면 철학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관조/Zusehen>라는 것에 억지와 폭력이 스며있는 것 같다. 이런 요소[Moment]는 <Zusehen>이라는 개념 자체에도 있다. “Sieh zu, dass du das schaffst!” „주변을 잘 보살펴 그것을 달성해라!“ 정도로 번역될 수 있지만 „달성 못하기만 해봐라“란 위협도 스며있다. 철학의 <Zusehen>에는 이런 위협이 스며있는 것 같다. 의식의 형성에 <눈총>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사르트르가 보여주었다.
다듬고 방향을 주는, zurichten하는 <Zusehen/눈총>아래 의식이 형성되어 간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눈총>은 철학의 대상이 아니라 인류학이 아니면 문학이 다루는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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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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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라는 번역은 앎으로 하시는게 어떨까요. 지, 안다는 것. 우리가[철학이]라고 하셨는데 이 철학이 필로소피인지, 뷔센샤프트인지 가려주시는데 어떨까요. 필로소피라면 철학이 맞고, 뷔센샤프트라면 그냥 학이죠. 헤겔 당시에는 과학이라는 분과학문이 없었죠. 직접지란 결국 무매개적인 앎이란 뜻인데 이때 매개가 없다는 것은 대상을 인식하는 도구가 없다는 뜻이죠. 그런데 왜 직접적인 앎이 가장 풍부한 인식처럼 느껴지느냐 하면 맑스는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결코 전태일의 앎을 알지 못해요. 전태일의 앎은 체험, 즉 몸으로 느낀 거잖아요. 시간이 지나도 불현듯 떠오르는 것. 태도가 대상화라고 볼 수 있을까요. 불을 만지면 앗 뜨거워 이런 태도가 불을 대상화한 것일까요. 맑스는 상품 맨 첫장에서 이렇게 말하죠. "상품은 우선 우리의 외부에 있는 하나의 대상이며, 그 속성들에 의해 인간의 온갖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물건이다. 이 욕망의 성질이 어떠한가," 이것이 대상화 아닐까요.그에 비해, 인식은 깨닫는 것에 가깝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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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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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를 앎이라 함은 한자를 풀어 순수한 우리말을 쓰는 것이니까 내용상 더 이해되게 하는 것이 없네요.2. 철학은 여기서 그냥 의식이 등장하는 무대에서 관중으로 온 사람, 즉 헤겔이란 의미 외에 다름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겠네요.
3. 제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관중이 취하는 태도가 등장하는 의식이 취하는 태도와 똑 같은 태도를 취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에 문제제기를 하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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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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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하지만 독일어에서 Wissenschaft하면 wissen 알다와 schaft가 결합한 것이니 학문보다 오히려 Wissenschaft가 더 쉽게 느껴지죠. 하지만 지, 왠지 한자는 애매하고 생각을 흐릿하게 하는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요. 개념하면 잘 모르겠는데, Begriff하면 begreifen 뭔가 움켜쥔다, 획득한다는 느낌이 있잖아요. 안다는 것도 여러가지 의미가 있죠. 이를테면 제가 아는 교수가 자본 3권을 읽다가 도식이 이상해서 친구한테 전화를 했대요. 그 친구도 교수래요. 친구한테 전화해서 그 몇 페이지 도식 이상하지 않냐고 그랬더니 그 친구가 너 그거 이제 알았어. 나 옛날부터 알고있었는데. 그거 틀려 그러더래요. 그러면 이 두번째 분은 어떻게 알았을까요. 자기가 알아냈을까요. 아니면 그게 틀리다고 누가 설명해줬을까요. 만일 후자라면 그 앎이 같은 것일까요.부가 정보
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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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이 어떤 의미로 <지/앎>란 낱말을 사용하는지 정확하지 않은 것 같네요.독어에는 <안다>는 말이 두 가지로 갈라집니다. 즉 "kennen"과 "wissen"입니다. 비트겐슈타인에 기대어 보면, 즉 어느 낱말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안다는 것에 기대어 보면, "kennen"은 개별적인 x를 아는 것이고, "wissen"은 영미언어철학에서 말하는 "proposition"이란 것을 안다는 것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Ich kenne ihn./나는 그를 안다"라고 할 수는 있지만 "Ich weiss ihn."할 수는 없죠. "Wissen"은 "Ich weiss, dass er klug ist./나는 그가 영리하다는 것을 안다."라는 식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kennen"이란 말은 "봐서 안다"라는 의미가 스며있는 소위 "Präteriopräsens/과거형 현재"에 속하는 낱말이라고 할 수가 있겠네요.
이런 차원에서 보자면 "kennen"은 고대희랍어 "eidenai"와 유사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첫 문장 "Pantes anthropoi tou eidenai oregontai physei./모든 사람은 본성적으로 알기를 원한다."을 보면 "eidenai"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eido/나는 본다"라는 동사의 부정형이고, "eido"는 "horao/나는 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라는 동사의 "aorist"과거형으로서 "kennen"과 같이 "과거형 현재적" 의미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살려 위의 문장을 번역하자면 "모든 사람을 본성적으로 뭔가를 옛적에 한번 봤다는 것으로 하기위해서 기를 쓴다." 정도로 번역할 수가 있겠네요. "지/앎"이 이렇게 "눈"에 기대고 있는 것이 하이데거 등에 의해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아무튼 이렇게 보면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어쩌면 "kennen"이 안다고 하는 것을 "wissen"의 수준으로 올려 놓는 것이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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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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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위에서 말씀드린 앎은 능동적 앎(자신이 알아낸 것)과 수동적 앎(누가 가르쳐준 것)을 구분한 것이었는데, 님은 kennen과 wissen의 차이를 말씀하시는군요. 제가 1978년판 Wahrig이 있는데 kennen을 uber das Wesen von jm. od. etwas Bescheid wissen이라고 정의를 했네요. 대상의 존재를 안다는 것인데 이것 역시 고차원적인 앎일 수 있죠. 제가 누군가의 평전을 쓰기 위해 40년간 연구결과 방대한 자료를 조사해서 굉장히 많은 지식을 얻을 수도 있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도 있지만 제가 40년간 그 사람과 같이 산 그의 부인만큼 그 사람을 잘 알까요. 그의 부인은 어쩌면 그 사람도 모르고 있는 그의 마음을 그녀가 더 잘 알수도 있잖아요.부가 정보
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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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래요. 비비고 티각퇴각하면서 알아낸 것과 다른 사람이 가르쳐 주어서 알게 된 것 간에는 차이가 있겠죠. 사대 복음서를 연구하고 또 연구해서 예수를 안다고 할 수가 있겠죠. 문제는 길가다가 예수를 만나도 그가 예수인지 모르고 그냥 지나가는 것이 보통이겠죠. 40년간 옆에서 지켜본 아내는 자기 남편이 죽은 후에도 그가 살아 있다면 이렇게 행동했을 것이다란 것도 알고 있겠죠. 박제한 대상을 아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살아생동해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합니다.부가 정보
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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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제자들과 예수를 보고도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이 문장에 이미 답이 있는데 관심이죠. 타인과 직/간접접으로 교류하려면 관심이 있어야해요. 관심이라는 말은 영어로 interest인데 관심, 흥미라는 뜻 외에도 이익, 이해관계, 이자라는 뜻이 있죠. 그래서 욕망과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암시해요. 누군가에게 관심을 갖게되면 그에게 다가가게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를 이해한것이냐, 오해할 수도 있죠.우리집에 엔도 슈사쿠의 <예수의 생애>가 있는데 엔도가 예수의 일대기를 쓰기 위해 팔레스타인에 가서 조사를 했어요. 그런데 사실을 근거로 쓰면서도 자신의 상상에 기대어 하나의 소설을 완성하죠. 예수는 민중의 지도자면서도 항상 민중에게 배신을 당했다는거에요. 왜냐면 민중은 예수를 오해를 했기 때문에. 자기들이 원하는걸 해주지 않았다고 예수를 미워하는거죠.
그러면 누가 가장 예수를 잘 이해하고 있었느냐. 가롯 유다라고 봐요. 유다는 팔레스타인을 로마에서 해방시키려고 했었고, 예수에게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발견해요. 일단 말을 잘하잖아요. 그리고 예수의 신임을 받아요. 왜냐면 유다가 회계담당이었거든요. 돈관리는 가장 신뢰하는 자에게 맡기잖아요. 그런데 자기가 보니까 아무리 봐도 예수는 권력에 대한 욕망도 없고 비폭력적이고 예수의 실체를 알아내니까 화가 나서 지배자들에게 팔아먹어요. 아주 헐값에. 그런데 왜 자살을 하느냐. 예수도 자신의 존재의 일부니까요. 예수도 무능력하지만 자기도 무능력하긴 매한가지고.
아무튼 소설이지만 재미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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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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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예수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가는 잘 모르겠어요. 치치님이 위에서 지적하신 “kennen”의 의미, 즉 “ueber das Wesen von jm. Wissen/누구의 본성을 알다”를 여기에 적용해서 살펴보면 상황은 이런 것 같네요. 어떤 사람에게 실망하면 독어에서 “Ich dachte, ich kenne ihn.”이란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를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이야기죠. 즉 그 사람의 본성을 알기 때문에 그가 그 본성에 따라 이런 행동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행동과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본성이 어긋난다는 이야기죠. 여기서 인식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두 가지죠. 본성을 잘못 알았다고 인식하고 생각을 수정하는 것이고, 본성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고 고집하면서 그 본성에 기대어 행위를 비판할 수가 있겠죠. 유다가 어느쪽에 속하는지 구별이 잘 안되네요. 정확한 것은 본성을 제대로 알고 있다고 고집하는 편이 문제를 쉽게 해결하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드네요.부가 정보
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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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안다고 생각했는데는 거의 대부분 그에 대해 오해를 한 경우입니다. 그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이 그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오해이거나 자신이 그에 대한 환상을 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를 안다고 생각했는데 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자신의 잘못인데 그에 대한 실망을 표현하는것 아닐까요. 그가 나를 속였다면, 차라리 다르게 말하지 않을까요. 그는 위선자이거나 거짓말쟁이라고. 안다는 것도 그의 실체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의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는 것일 수 있잖아요. 하지만 오랫동안 알고 지내도 나는 그를 알아, 이렇게밖에는 표현할 수 없잖아요.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