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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1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 4- 한스 위르겐 크랄

[출처: www.krahlstudien.de/texte/bemerkungen.htm]

 

자본론과 헤겔의 본질논리학의 관계에 대한[몇 가지] 지적 (Bemerkungen zum Verhältnis von Kapital und Hegelscher Wesenslogik)

(aus: Aktualität und Folgen der Philosophie Hegels, Hrsg. O. Negt, Suhrkamp 1970)

 

마르크스 정치경제학비판의 기본개념이 되고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에 가장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생산물의 상품형식은 헤겔의 본질과 현상의 변증법 없이는 설명되지 않는다. 레닌이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상품이란 개념은 마르크스 시스템비판의 가장 추상적인 개념으로서 그 시스템비판의 출발점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생산물의 상품형식은 헤겔 본질논리학의 모든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헤겔 논리학의 범주들을 형이상학적 맥락에서 풀어내어 정치경제학에 옮겨놓은 것이 바로 정치경제학비판의 핵심이라고 한다. 마르크스를 따르자면 헤겔 논리학은 자본이 하는 자기운동의 코스프레다. 마르크스는 본질과 현상의 차이를 그의 비판이 기대고 있는 전형으로 삼았다. 그리고 나서 가치범주에서 다시 가치와 교환가치를 구별하고 교환가치를 가치의 현상형식이라고 명한다. 이 점을 전통 경제학자들은 이해하지 못했고,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물화는 고사하고[이를 바탕으로 하여 순차적으로 나타나는] 허위의식, 물신화, 신비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비판이 기대고 있는 전형으로서의 본질과 현상의 변증법에  과학Wissenschaft으로 등장하려는 학문Wissenschaft의 자기이해가 달려있다. 이것은 생시몽에서 콩트를 망라한 일명 실증주의를 겨냥하는 프로그램이고 오늘날의 현대 실증주의자들에게도 적중하는 프로그램이다. 헤겔 논리학의 학습은 근본적으로 따지자면 마르크의 정치경제학비판에 시간적으로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전제되는 것이다.

존재는 곧 있다는 것이고, 있다는 면에서 존재는 가상이다. 구체적인 자연은 단지 이념의 타자존재, 즉 이념의 외화다. 현존하는 것은 자기가 정신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정신, 달리 표현하면 자기가 가상인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가상이다. 존재는 자기가 가상임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가상이다. 반성으로서의 본질은 반면 자기가 가상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가상이다. 반성은 자기를 아는 가상이다. 이와 같은 한도 내에서 존재는 스스로 자신을 지양하고, 말하자면 그의 물질적 중력을 상실한 것이다. 존재는 이렇게 순수한 사상이 된다.

마르크의 혁명이론 형식은 그의 관념주의 비판에 기반하는데 그 관념주의 비판에는 둘 갈래 축[Momente]이 있다: 인식론적인 관념주의 비판과 추상이라는 개념의 수용이다.

초기 저서에서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흐 테제에서 두드러지게 서술되었듯이 원칙적인 관념주의 비판을 전개한다. 요지는 포이에르바흐의 유물론 역시 아직 전통적인 유물론의 결함을 안고있다는 것이다. 즉 현실Realität을 주체적인 실천이란 관점, 즉 인간의 행위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고, 어디까지나 객체의 관점아래, 관조, 즉 그저 감각적인 것의 관점아래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여기서 지적하는 것은 데모크리크 이후 전수되어온 전통적인 유물론이 관념주의와 대립되게 물질적인 현실을 실재하는 것Wirklichkeit으로 인정하고 이념을 본래적인 실재로 추대하지 않지만 물질적인 현실을 단지 관조라는 측면에서 바라보는 한 아직 관념주의 전통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것이라는 점이다. 전통적인 유물론은 물질적인 현실과 관계하는데 있어서 이론적으로 바라보는kontemplativ한 태도를 취한다. 그는 현실을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꿰뚫어보지 못하기 때문에 현실은 그 앞에 바뀔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관념주의 비판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런 태도는 노예를 두는 사회 아니면 농노사회에서 불거지는 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사회형식의 생산자는 자신을 생산자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1)하나는 생산수단이 대체적으로 토착적인naturwüchsig 공동체의 구성요소로만 드러나고 인간의 생산물로 자명해지기 않기 때문이고2) 다른 하나는 토지소유를 근간으로 하는 사회조직형식에서 노예와 농노는 자유로운 임노동자와는 달리 노예주 혹은 봉건영주에 육신 혼 할 것 없이 몽땅 속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을 오로지 객체로 이해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다시 유물적인 현실이 생산물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철학하는 주인의 의식에[그대로] 반영된다.

이와 똑 같은 지적이 감각적인 직관의 자리에 이념을 갖다 놓는setzen 전통적인 관념주의에도 적용된다. 포이에르바흐 테제1번에서 마르크스가 지적하는 것은 전통적인 유물론에 대립하여 부르주아-신시대 관념주의는 행위라는 면, 즉 실천이란 것을 찾아냈으나 그 실천을 인간의 감각적인 행위로 전개하지는 않았다. 부르주아는 정통 봉건영주와 달리 생산에 관여verstrickt하게 되었지만, 그러나[직접 그런 것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단지 순환에[상품의 유통에] 관여하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래서] 부르주아는 노동을 인간과 자연간의 구체적인 물질대사Stoffwechsel로 파악하지 못하고 어디까지나 순수한 정신 노동으로, 물질대사가 추상된 추상적인 노동으로 밖에 파악하지 못한다. 결과 임노동자의 구체적이고 육체적인 노동을 거두어 들이고diskreditiert 정신노동[만을] 실재하는 노동으로 내 놓게 되었다. 여기서는 봉건성과는 달리 생산수단 자체가 생산물이 되었고, 그리고 자유로운 노동자가 자본가와 맺는 관계가 노예 또는 농도와 같이[전]인간적인 관계를 맺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유로운 계약으로 규정되는 관계로 나타나기 때문에 생산의 원리는 인식되었다.

[이렇게] 생산수단과 자유롭게[이동하는] 노동자간 분리되어 그 결과 이런 식으로 비로서 물질로부터 추상된 순수한 주관성reine Subjektivität, 자연으로부터 추상된 생산력으로서의 순수한 노동reine Arbeit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되었다. 정신노동의 개념(독일 관념주의가 말하는 개념의 활동Tätigkeit des Begriffs)은 한편 자유롭게 이동하는 노동자를 이상화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율적인 개별자본가를 Unternehmerperson 이상화한 것이다.

전통적인 유물론은, 물론 그것이 물질적 현실을 유일한 현실로 인정하는 것을 내포하지만 사회적인 객관성에Objektivität 대해서는 수동적인 개념을 갖고 있다. 사회적 객관성을 생산된 것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객관성에 대한 이런 개념이 마르크스에 이르러서는 정신노동이라는 개념과 종합되어 사회적인 객관성이 능동적으로 생산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와 같은 단지 철학 내재적인 바탕에만 근거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포이에르바흐의 실천개념과 현실적인 계급투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이행된 물질성과 이상성의 종합, 정신노동과 생산되지 않는 객체의 종합을 근거로 하여 마르크스는 역사유물론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에 속하는 개념을 획득한다. 즉 구체적인 노동이라는 개념이다.

헤겔에게는 인간이 그 위에서 그를 지배하는 의식의 꼭두각씨일 뿐이나 마르크스는 인식이 유한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술어와 성질이라고 한다. 이것은 마르크스가 초기저서에서 헤겔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비판하는데 앞서 전제하는 것이며 헤겔을 뒤집는 것이다. 이런 비판을 바탕으로 하여 마르크스는 다시 헤겔의 본질논리학을 수용한다. 인간 위에서 인간을 지배하는 형이상학적인 의식은 가상에 속하지만, 현실성을 갖는 가상이다realer Schein. 즉 자본이다. 자본은 정신현상학이 현존하는 모습이다(Das Kapital ist die daseiende Phänomenologie des Geistes.) 자본은 현실적인 형이상학이다. 자본은 현실적인 사물구조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가상이지만[현실적인 가상으로서]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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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1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 4-파울 첼란 <편도 씨를 세어라>

편도 씨를 세어라…

 

편도 씨를 세어라,

쓰디쓰고 너를 잠 못 이루게 했던 것을 세어라,

나도 세어 거기에 넣어라:

 

네가 눈을 떴을 때 그리고 아무도 너를 쳐다보지 않았을 때 나는 너의 눈을 찾아 헤맸고,

아무도 모르는 한 가닥 줄을 꼬았고

네가 생각했던 이슬은 그 줄을 따라

그 누구의 마음도 찾지 못한 단창구(短唱句)를 지켜 보호하는  

항아리들로 미끄러지듯 흘러 내려갔다.

 

거기서 비로서 너는 온통 너의 것인 이름으로 들어갔고,

흔들림 없게 발을 내디디고 너에게로 당당하게 걸어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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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1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 3-아도르노 <최소한의 도덕> 54번 뒷부분

정신분석자들이야 타쏘가[1]파괴적인 성격의 소유자라고 진단하고 말겠지만, 그가 바로 그렇게 공주 앞에 서기만 하면 부들부들 떨고, 결국 목전에 있는 것을 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문명의 희생양으로 희생되기 때문에, [남성들이 이렇게 희생되기 때문에 괴테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아델하이드, 클레르헨, 그리고 그레첸의 입은 [음악과 같은/내용과 형식으로 구별되지 않는/그래서 거짓이 있을 수 없는/역사적으로 왜곡되지 않은??] 직관한[2], 억눌림을 당하지 않는 말을[3]한다. 이런 말은 하는 여성은 에던 동산과 같은 패러다이스의 여성처럼 우리 곁에 있게 된다.[4] 괴테가[묘사한] 여성들에게 볼 수 있는 그 눈부신 생기 발랄함은[5]한 발짝 뒤로 물러섬과 [그 눈부심에 휩싸여 그것을 취하거나 거기에 빠지지 않고 대려 그것을] 피함이라는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대가를 치르는 것은 단지 [종이 주인의 딸을 욕망할 수 없다는] 현실질서의 승리 앞에서 굴복하고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거기에 보다 더 많은 것이 담겨져 있다. 돈 후안은 [타쏘에] 완전 대비되는 남성으로서 감각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의 통일의 상징이다. 돈 후안을 보자면 거기엔 감각성이 원리로 파악되어있다고 말한 키에르케고르는 감각성의 비밀에 근접하게 다가서서 그것을 알아보고[6]있다. 감각성의 거센 눈길에는, 그런 눈길에 자성이[7]솟아오르지 않는 한, 바로 위에서 이야기된 이름을 상실한 것[8], 즉 불행을 동반하는 보편성이 찰싹 붙어있고 이런 [불행을 갖다 주고 자초하는] 보편성은 그 것의 음화상[9], 즉 제멋대로 다루고 처리하고 지배하고 행동하는1 사상의 통치권[10] 내부에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하는] 숙명으로 재생산된다.



[1]괴테의<토르콰토 타쏘>에 등장하는 주인공.

[2]원문<angeschaut>. 무슨 말인지 알아먹기 힘들다. 아도르노의<철학자가[사용해야 할] 말에 대한 테제>를 소화해야 할 것 같다. 소화하기 힘들다. 우선8번 테제의 원문을 소개한다. „Das sprachliche Verfahren des Philosophen, abstrakt heute kaum zu benennen, ist jedenfalls einzig dialektisch zu denken. Seiner eigenen Intention sind im gesellschaftlichen Zustande heute keine Worte vorgegeben, und die objektiv vorhandenen Worte der Philosophie sind seinsentleert, für ihn unverbindlich. Der Versuch, neue Gehalte in der alten Sprache verdeutlichend mitzuteilen, krankt an der idealistischen Voraussetzung der Abtrennbarkeit von Form und Inhalt und ist darum sachlich illegitim; verfälscht die Gehalte. Es bleibt ihm keine Hoffnung als die, die Worte so um die neue Wahrheit zu stellen, daß deren bloße Konfiguration die neue Wahrheit ergibt. Dies Verfahren ist nicht zu identifizieren mit der Absicht, neue Wahrheit durch herkömmliche Worte zu »erklären«; die konfigurative Sprache wird vielmehr das explizite Verfahren, das die ungebrochene Dignität von Worten voraussetzt, durchaus zu meiden haben. Gegenüber den herkömmlichen Worten und der sprachlosen subjektiven Intention ist die Konfiguration ein Drittes. Ein Drittes nicht durch Vermittlung. Denn es wird nicht etwa die Intention durch das Mittel der Sprache objektiviert. Sondern es bedeutet konfigurative Sprache ein Drittes als dialektisch verschränkte und explikativ unauflösliche Einheit von Begriff und Sache. Die explikative Unauflöslichkeit solcher Einheit, die sich umfangslogischen Kategorien entzieht, bedingt heute zwingend die radikale Schwierigkeit aller ernsthaften philosophischen Sprache 8. Das sprachliche Verfahren des Philosophen, abstrakt heute kaum zu benennen, ist jedenfalls einzig dialektisch zu denken. Seiner eigenen Intention sind im gesellschaftlichen Zustande heute keine Worte vorgegeben, und die objektiv vorhandenen Worte der Philosophie sind seinsentleert, für ihn unverbindlich. Der Versuch, neue Gehalte in der alten Sprache verdeutlichend mitzuteilen, krankt an der idealistischen Voraussetzung der Abtrennbarkeit von Form und Inhalt und ist darum sachlich illegitim; verfälscht die Gehalte. Es bleibt ihm keine Hoffnung als die, die Worte so um die neue Wahrheit zu stellen, daß deren bloße Konfiguration die neue Wahrheit ergibt. Dies Verfahren ist nicht zu identifizieren mit der Absicht, neue Wahrheit durch herkömmliche Worte zu »erklären«; die konfigurative Sprache wird vielmehr das explizite Verfahren, das die ungebrochene Dignität von Worten voraussetzt, durchaus zu meiden haben. Gegenüber den herkömmlichen Worten und der sprachlosen subjektiven Intention ist die Konfiguration ein Drittes. Ein Drittes nicht durch Vermittlung. Denn es wird nicht etwa die Intention durch das Mittel der Sprache objektiviert. Sondern es bedeutet konfigurative Sprache ein Drittes als dialektisch verschränkte und explikativ unauflösliche Einheit von Begriff und Sache. Die explikative Unauflöslichkeit solcher Einheit, die sich umfangslogischen Kategorien entzieht, bedingt heute zwingend die radikale Schwierigkeit aller ernsthaften philosophischen Sprache.>

[3]<Sprache/언어>를<입이 말하다>로 번역하였다.2

[4]원문<die zum Gleichnis von Urgeschichte sie macht.> 여기서<Gleichnis von Urgeschichte>를<원역사의 비유>라고 하면 뭔가 아닌 것 같다. <Gleichnis>는 신약 복음서에서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뭔가를 직관할 수 있게 우리 곁에 갖다 놓는 것이 아닌가 한다.

[5]원문<Schein des Lebendigen>. 여기서<Schein>은 거짓의 의미로서의 가상이 아니다. 내부로부터 나오는 뭔가 눈부시게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인을 대할 때 그 여인에게서 느끼는 감정이라고 할까? 여기 진보블로그에 <생기 발랄한 민중신학>이라는 제목의 블로거가 떠오른다.

[6]원문<rühren>

[7]원문<Selbstbesinnung>

[8]원문<Anonyme>

[9]원문<Negativ>

[10]원문<Souveränitä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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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원문 "schalten" 불을 껐다 켰다 한다는 말인데, 유대인 수용소에서 쓸모있는 육신과 쓸모없는 육신을 가르는 "Selektionsrampe"에 서서 생과 사를 가르는 짓을 생각하게 만드는 낱말이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2. "der Mund redet wahr" "입이 진실을 말한다". 파울 첼란의 시 "corona"에서 인용.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