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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14

(§14) 감각적 확신은 결국 그가 말하는 [확신이라는] 본질을 대상이 담보하지도 않고 <나>라는 자아가 담보하지 않는다는 것과 함께 그가 말하는 [꼰대로서의] 직접성이 전자나 후자가 존재하는 양식이 아니다라는 것을 경험한다. 왜냐하면, <나>라는 자아가 양자에 다가서서 붙들려고 하는 것은[1][그것을 말로 표현하면] 양자에서 드러나듯이[2]오히려 들러리에 지나지[3]않기 때문이다. 즉 [감각적 확신은 그가 말하는] 대상과 자아가 보편적인 것이라고 경험하게 되는데, 이런 보편성 안에서는 <지금>, <여기>, <나>라고 하는 것이 내가 붙잡고 있다고 생각하는[4]대로 존속하거나 [그런 직접적인 순순한 존재로만] <있지> 않는 것이 된다. {그럼 감각적 확신을 살리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사태가 이렇게 발전하면 우리는 자아에 대립하는 대상이 [확신의 모든] 물증을 담는[5]첫 경우와 <나>라는 자아가 확신의 모든 물증을 담는 다음 경우에서 그랬듯이 더 이상 감각적 확신이 갖는 두개의 축에서 단지 한 축만을 확신을 담보하는 본질로 삼을 수 없고, 이젠 [감각적 확신을 두개의 축으로 구별하여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을 삼가고] 두개의 축이 빈틈없이 밀착되어 하나로 묶여있는 총체를[6]감각적 확신이 말하는 확신의 본질로 삼는 길밖에 없다. 그래서 감각적 확식은 이젠 오로지 하나로 묶여 있는 감각적 확신만이[7]그가 말하는 직접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8]고집하고, 이렇게 앞에서 일어난 모든 대립은 감각적 확신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배제한다.



[1]원문 <meinen>

[2]원문 <an beiden>

[3]원문 <ein Unwesentliches>

[4]원문 <meinen>

[5]원문 <Realität/현실>. §12의 <Beglaubigung/증명>이란 의미로 번역하였다.

[6]원문 <das Ganze der sinnlichen Gewissheit>. 여기서 <das Ganze/총체, 전체>를  독일문학의 가장 오래된 애가(Liebeslied)로 간주되는 시 한편에 기대여 <Geschlossenheit/아무것도 따로 구별되어 빠져 나올 수 없이 갇힌 상태>란 의미로 번역하였다.

 

„Dû bist mîn, ich bin dîn:

Des solt dû gewis sîn.

Dû bist beslozzen in mînem herzen;

Verlorn ist daz slüzzelîn:

Dû muost immer drinne sîn.“

 

(너는 나의 것이고 나는 너의 것이다. 너는 이것을 확신해야 한다. 너는 나의 마음 속에 갇혀있다. {나의 마음은 온통 너 뿐이다.} 내 마음을 열 열쇠는 분실되어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너는 항상 그 안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7]원문 <die ganze sinnliche Gewissheit>. 여기서 <ganz>를 <하나로 묶여있는>으로 번역하였다.

[8]원문 <an ihr als Unmittelbark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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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12, 13

(§12) 이제 감각적 확신이 말하는 확신을 담보하는[1]힘은<나>라는 자아, 즉[목전에 있는 것을] 보고 듣는 나의 직접성 속에 놓여있다. 우리가[애타게] 손을 뻗어 붙잡으려는[2]그때마다의 지금과 그자리 그곳의 여기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3]. 그러나 그들이 사라지는 것을 막고 나서는 힘이 있다. 즉<나>라는 자아가 그들을 꽉 붙들어 잡는 힘이다. <지금은 낮이다>. 그 이유는 내가 낮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는 나무다>라는 확신도 똑 같은 이유에서다. 그러나 감각적 확신은 이와 같은 관계 속에서도 위와 똑 같은 변증법이 그가 하는 행위에서 드러나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이것>의 존재양식을 취하는<나>라는[4]자아가 나무를 보고서<여기는 나무다>라고 주장할 때 똑 같은 존재양식을 취하는 다른<나>라는 자아는 집을 보고서<여기는 나무가 아니라 집이다>라고 주장한다. 어느 쪽이 참말인가 판가름 할 수 없게 양쪽 다 똑같은 것을 증거물로 내놓는다. 즉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 있다는 직접성과 자기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하여 확언할 수 있다는 요지부동한 확신과 단언을 증거물로 내놓는 것이다. 그러나 양자는 병존할 수 없고 한편이 담고있는 것은[5]다른 편에 가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질 수밖에 없다.

(§13) 이런 완벽한 사라짐 안에서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은[<이것>으로서의 직접적인 자아가 아니라] 보편적인 자아다. 이런 보편적인 자아의 보는 힘이란[6]이 나무나 저 집 등 어떤 특정한 대상에 매달려 있지 않는[이리저리 갈라지지 않는] 단순한 보는 힘이다. 이런 단순한 보는 힘은 이 집, 저 나무 등을 부정하는 힘을 통해서 매개된 것이다. [이렇게 매개되었다고 해서 보편적 자아의 보는 힘이 단순성을 상실하는 것은 아니다.] 보편적 자아의 보는 힘은 이런 매개 안에서도[아무런 굽힘과 쏠림이 없는 까닭에] 거기에 들러리 서는 것, 즉 이 나무, 저 집을[부정하는데 있어서 부정되는 것들에 개의치 않는]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단순한 보는 힘인 것이다.[7] <나>라는 자아는<이것>의 존재양식인[8]<지금>과<여기>와 마찬가지로 단지 보편적인 것일 뿐이다. 내가<나>를 말할 때 개별적인 자아를 염두에 둔다[9]할지라도 상황은<지금>과<여기>에서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나>라는 자아를 말로 표현하면 염두에 두었던 것과 다른 것이 된다. 내가 개별적인 것을 직접적으로 지시하면서<여기 이것>, <지금 이때>라고 말하면, 이때 표현되는 것은  <이것/이때>하고 지시하는 모든 지시행위, 즉 모든<지금>과  모든<여기>와 함께 모든<개별적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가 나를 지시하면서<나>라고 말하는 순간 표현되는 것은 사실<나>라는 모든 자아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가리키면서 말하는<나>라는 자아라는 말은 모두가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사태가 이런데 감각적 확신이 취하는 입장에 서서 이상한 요구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학문에게[바로 목전에 있는 개별적인] <이 물건> 또는<이 사람>을 연역하라고,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구성하라고[10]요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것을 선험적으로 찾아내라는 요구라고도 할 수가 있겠다. 이런 요구를 학문의 시금석으로 하여 학문이 할 수 없는 일을 요구한다면 거꾸로 그들에게 최소한 그 요구가 말하는<이것> 또는<이 자아>가 도대체 어떤<이것>과 어떤<이 자아>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지 말로 다 표현하라고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것을 말로 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1]원문 <Wahrheit>

[2]원문 <meinen/사념하다>

[3]원문 <verschwinden>. <völlig vergehen/완멸(完滅)하다>

[4]원문 <Ich, dieser>

[5]원문 <Wahrheit>

[6]원문 <Sehen>. 아리스토텔레스적인 <Sehkraft/보는 힘>으로 번역하였다.

[7]애당초부터 동시에 직접적이고 매개된 것이라는 말인 것 같다.

[8]원문 <Jetzt, Hier oder Dieses überhaupt>. 역자는 여기서 <oder>를 설명하는 <oder>로 이해하고 번역하였다. 헤겔이 §6에서 개별적인 <이것>의 근본규정으로 <여기>와 <지금>을 제시한 것에 기댄 이해다. 칸트의 내외적 직관형식(Anschauungsform)이 연상되기도 한다.

[9]원문 <meinen>

[10]원문 <konstruie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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