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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이것>의 다른 형식인 <여기>도 사정은 <지금>의 경우와 똑같다. 예를 들어 <여기>는 <나무>라고 하자. 그리고 돌아서보자. 그러면 그 진리는 사라지고, 대려 <여기는 나무가 아니다>라는 반대의 진리로 뒤집히고, <여기는 집이다>라는 진리로 대치된다. 그러나 <여기> 그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런 <여기>는 집, 나무 등등의 사라짐에 딸려 함께 사라지지 않고 그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으로서 집이 되든 나무가 되든 거기에 아무런 쏠림이 없는 무관심한 것이다. 여기서도 역시 <이것>은 매개된 단순성, 달리 표현하면 보편성을 자신의 모습으로 하여 나타난다.
(§10) [감각적 확신은 그가 직접 관계하는 대상이 담고 있는 것을 순수한 존재라고 한다.] 그런데 이제 와보니 감각적 확신이 하는 [언사행위]에서 그가 말하는 대상이 담고 있는 것은 [1]보편성이란 것이 밖으로 드러났다. 때문에 그가 꼰대를 세우고 본질이라고 했던 <순수한 있음>은 이제 더 이상 [감각적 확신이 대상과 직접 관계하는 가운데 집어 찍어 올려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순수한 있음>이 아니다. <순수한 있음>이란 이제 직접적으로서가 아니라, 부정과 매개를 그 중심에 담고 있는[2]<순순한 있음>으로서 감각적 확신의 본질이 된다. 이렇듯 <순수한 있음>은 우리가 사념하는 식이 아니라 아무것도 딸려 있지 않음[3], 달리 표현하면 순수한 보편자라는 규정을 갖는 <있음>인 것이다. {근데 감각적 확신의 구체적인 내용이 우리에게(!) 처음엔 풍성하고 참다운 것으로 보여지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지금>과 <여기>가 공허하고 그들이 담고 있는 <이것>이나 <저것>과 무관한 보편적인 것이 되어버린 마당에 감각적 확신이 진정 담고 있는 것은[4]보편적인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담보하는 것은 우리의 사념일 뿐인가? 아니면 감각적 확신도 그렇게 사념하게 될까?}[5]
(§11) 지와 그 대상이 처음 등장할 때의 관계와 그들이 지금 이 결과에서 갖는 관계를 서로 비교해보자. 양자의 위상이 뒤집혀 버렸다. 처음엔 대상이 감각적 확신의 [자기자리에 우뚝 서있는 꼰대로서의] 본질이라고 했는데, 이젠 대상이 감각적 확신의 들러리가[6]되어버렸다. 왜냐하면, 보편자가 되어버린 마당에 대상은 이젠 더 이상 감각적 확신이 본질로 간주하는 식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감각적 확신은 그가 말하는 본질을 대상의 반대편에서, 즉 지금까지 들러리에[7]지나지 않았던 지에서 건져야[8]할 판이 되었다. 감각적 확신을 담보하는 것은[9]이제 나의 대상으로서의 대상에, 즉 사념에 있게 되었다.[10]<대상이 존재하는 이유는 내가 그것을 알기 때문이다>라는 식이다.[11]이렇게 감각적 확신은 대상에서는 쫓겨났지만 [그러나 아무런 매개가 필요 없는 직접적인 것을 추구하는 본래의 아집을 버리지 않고 이런 아집을 지닌 체] 지 안으로 [할 수 없이] 일보 후퇴하여 들어가게 되었다. 이젠 이렇게 새로운 현실에 처한 감각적 확신이 어떤 체험을[12]우리에게 보여주는지 살펴볼 차례다.
[1]원문 <Wahrheit>
[2]원문 <wesentlich>
[3]원문 <Abstraktion>
[4]원문 <das Wahre>
[5]이 부분의 논리전개, 즉 대화구도를 아직 분명하게 잡아내지 못했다.
[6]원문 <unwesentlich/비본질적인>
[7]원문 <das Unwesentliche/비본질적인>
[8]원문 <vorhanden>
[9]원문 <ihre Wahrheit>
[10]원문 <als meinem Gegenstand, oder im Meinen>. 헤겍은 여기서 동음에 기대에 <내것>과 <사념>을 동선에 놓는다. 역자는 헤겔과 <감각적 확신>간의 다툼에서 <감각적 확신>을 최대한 강하게 하기 위해서 <meinen>에 스며있는 <몸을 기울려 어디에/누구에게 기대다, 사랑하다>란 의미를 살리고 싶다.
[11]호라티우스의 <me dicente>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아름다운 것이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것이다.
[12]원문 <Erfahr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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