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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독일 대통령 가우크 연설 - 기억의 그림자

원문

 

내일모레면 유럽에서 2차대전이, 독일이 시작한 살인적인 공포가 종결된지 70년이 되는 날입니다.

우리 대륙을 잿더미로 만든 전쟁이 마침내 종결되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유럽 유대인이 살해되었습니다.

이 전쟁의 과정에서 수백만의 병사와 민간인이 죽었습니다.

이 전쟁에 이어 다수의 국가에서 수백만이 고향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이 전쟁의 결과로 유럽이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독일이 반세기동안 분단되었습니다.


 

이 전쟁은 서방 연합군과 소련연방이 함께 독일을 항복하게끔 쥐어짬과 동시에 나치독재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비로소 종결되었습니다. 독일에서 살고 있는 우리 후세는 서구과 동구의 지난날의 적국의 희생가득한 이 투쟁에 감사해야 할 이유밖에 없습니다. 저 투쟁이 우리가 오늘날 독일에서 자유와 존엄을 누리며 살게 해주었습니다.

 

여기 홀테-슈투겐브록(Holte-Stukenbrock) 성에서 이 시간 이 전쟁의 가장 큰 범죄에 속하는 한 사건을 기억합니다. [소련연방의] 적군(赤軍) 수백만명이 독일 포로수용소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병들어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들은 굶어 죽었습니다. 그들은 살해되었습니다. 전시국제법과 국제사회의 협약에 따라 독일군의 보호를 받아야 했던 수백만의 전쟁포로가 [이렇게 생명을 빼았겼습니다.]

 

그들은 먼길을 []발로 걷도 또 걷도록 강제되었습니다. 그들은 텅 트인 화물차로 이송되었습니다. 그들은 수용소 혹은 집합소라 불리는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한 그곳엔 거의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몸을 누일 곳이 없었습니다. 먹을 것이 부족했습니다. 위생시설이 전무했습니다. 진료가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몸을 누일 자리로] 흙구덩이를 파야 했습니다. 주변에 있는 것을 긁어모아(notdürftig) 판자집을 지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든 살아 남으려고 절망하는 가운데 온갖 시도를 다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은(dann) 강제노동에 집단적으로 투입되었습니다. 쇠약해지고 굶주려 지친 몸에 그들은 비번히 이 강제노동에서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불과 몇백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 곳에 포로수용소 “스탈락 326 젠네” (Stalag 326 Senne, [StalagStammlager/‘줄기’수용소의 준말])가 있었습니다. 31만명 이상의 포로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대다수가 여기서 생명을 빼았겼습니다. 수만이 여기에 묻혀 있습니다.

 

숫자들이 [우리에게] 하는 말은 무엇일까요? 근소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숫자들은 최소한 독일 포로가 된 소련병사들이 당해야 했던 공포와 무자비한 다루기에 대한 대략적인 상상을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530만명 이상이었던 소련 포로 중 분명 절반 이상이 생명을 빼았겼습니다. 수백만의 운명, 이름, 삶의 이야기. 러시아사람, 우크라이나 사람, 키르기스탄 사람, 조지아[그루지야] 사람, 우스베키스탄 사람, 투르크메니스탄 사람 등 이들은 소련연방의 민족의 구성원이었습니다.

 

서구연합군 전쟁포로의 상황은 어땠는지 살펴보면 엄청난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서방연합군 포로 중 약 3%가 포로수용소에서 죽었습니다. 서구에서와는 달리 동구에서의 전쟁은 나치 정권이 애초부터 세계관의 전쟁, [특정 인종을] 다 죽이고 [재생할 수 없게] 뿌리는 뽑는 전쟁으로 (Vernichtungs- und Ausrottungskrieg) 계획했습니다. 이렇게 계획된 전쟁은 계획에 멈추지 않고 계획대로 진행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레닌그라드를 떠올려 봅시다. 수백만의 이 도시를 굶겨 죽일 목적으로 수년간 포위망으로 에워쌌습니다. 모든 점령지에서의 민간인에 대한 잔인성을 떠올려 봅시다. 그러나 특히 러시아에서, 매우 우별나게 거기서 그랬습니다. 이것은 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그리고 히틀러의 명시적인 명령아래 자행되었습니다. 독일군(Wehrmacht)은 이 명령을 기꺼이 이행했습니다. 합참의장 할더(Halder)19415월 이렇게 요구했습니다. “우리는 [아타를 뛰어넘에] 군인간에 우애가 있다는 입장을 버려야 한다. 공산주의자는 전에도, 후에도 동료가 아니다.” 차후 이 요구에 부합하게 포로들이 다루어졌습니다. 이것은 전 소련연방 민족들의 지울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중략]


 

독일인으로서의 우리는 먼저 독일의 죄(Schuld)와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이의 연장선에서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독일군(Deutsche Wehrmacht)의 책임하에 사망한 수백만의 죽음이 “2차 대전에서의 가장 큰 독일 범죄의 하나”라는 입장을 견지하는 것입니다. 전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늦어도 지금에 와있는 우리는 앎니다. 독일군 역시 [전쟁 일상을 넘어서는] 보다 심각한, 그리고 [해서는 절대 안되는] 극심한 범죄를 자행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Auch die Wehrmacht hat sich schwerer und schwerster Verbrechen schuldig gemacht.).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이와 같은 소련 포로의 참담한 운명이 독일에서 전혀 [사태의 중차대한 성격에] 부합하게 의식의 대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종의 기억의 그림자(in einem Erinnerungsschatten)[갇혀] 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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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지중해 난민선처럼… 아무도 구하려 하지 않는 한국의 난민들

[한국일보]

 

지중해 난민선처럼… 아무도 구하려 하지 않는 한국의 난민들
세계는 지금

 

지중해서 올 상반기 최소 1,500명 사망
한국, 21년간 9,539명 난민 신청
시리아 난민 인도적 체류 허용했지만
한국 떠나 伊 가려다 난민선 참변

 

지중해 난민선의 난민들

 

지난달 18일 난민들을 가득 태우고 리비아를 출발한 어선이 침몰한 참사가 있었다. 최소 700명 이상이 사망했다는 보도도 있고, 어선 하부에 100명이 더 타고 있었음을 목격했다는 보도까지 있는데 구조된 사람들은 극소수다. 수많은 사람들이 눈앞에서 산 채로 수장(水葬)된 충격적인 참사에 세계의 시선이 쏠렸다. 유럽연합(EU)은 “난민들의 참사를 방지하는 것은 EU의 도덕적인 의무”라며 10개항의 행동계획을 황급히발표하고, 난민선의 주된 기항지인 리비아의 내전 사태 해결을 위해 군사작전까지 고
려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같은 국제적 호들갑은 새삼스럽다. 이미 올 상반기에만 최소 1,500여명의 난민들이 지중해에서 목숨을 잃었다. 2000년부터 현재까지 그렇게 수장된 난민들이 약 2만2,000여명에 달한다는 통계까지 있다. 에리트레아 시리아 이집트 이라크 리비아 등 각국에서 박해의 위험을 피해 인신매매 조직에 몸을 맡기고 98%의 도착 생존률에 목숨을 걸고 유럽을 향해 필사적인 탈출을 시도하던 난민 중 많은 사람들이 지중해에서 수장되어 왔다.


2013년 10월 3일 람페두사 섬 인근 바다에서 360여명이 탑승한 난민선의 침몰 이후 개시된 난민 구조를 위한 이탈리아의 마레 노스트룸 작전은 예산문제로 1년 만에 슬그머니 중지되었다. 난민이 유럽의 영토를 밟을 경우 지게 되는 난민심사의 부담을 피하기 위해 바다에서 난민선을 출발지로 되돌려 보내는 암묵적 관행들도 여전히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된다. 최초 도착국가에서만 난민심사를 개시하는 유럽의 더블린 규칙으로 인해 아프리카발 난민들의 난민심사 부담이 유럽의 남방경계를 이루는 해안국 이탈리아, 그리스에만 가중되는 해묵은 문제도 각 당사국의 책임 떠넘기식 줄다리기로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번 참사 이후에도 여러 대책들이 논의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별다른 변화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미 각 국가들은 책임을 회피한 채 선장과 일등항해사에게만 모든 비난을 집중시켜 형사책임을 묻는 전형적인 형국이 펼쳐지고 있다. 우리들에게도 섬뜩하게 익숙한 풍경이 아닌가.
 

 

속하지 못한 채 사멸하는 한국의 난민들

 

지중해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난민 참극은 과연 세계를 반 바퀴 돈 한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목숨 걸고 유럽행 난민선을 타다가 경계에서 수장되고 있는 난민들처럼, 목숨을 걸고 한국으로 들어와 난민으로 인정받기 위해 피신하려다가 쫓겨나거나, 불안정한 삶을 이어가다 사멸하고 있는 난민들이 이곳에도 있다. 아무도 난민들을 진정으로 구하려 들지 않고 있다는 점은 잔인할 정도로동일하다.

 

아시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독립적 법제인 난민법의 제정 및 시행, 일부 난민신청자들의 생활지원을 도맡는 출입국외국인지원센터의 건립 및 운영 등을 보면 일견 제도 자체는 발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내전종료 때까지 시리아 난민신청자들에게 한시적으로 인도적 견지에서 체류를 허용키로 한 한국정부의 조치는 난민에 대한 국제적 책임분담을 논의하는 여러 테이블에서 한국 정부의 체면을 그나마 세우는 홍보거리가 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게 화려하지만은 않다.

 

한국에 도착한 대부분의 난민들은 입국을 거부당하고 한국 국경 밖으로 쫓겨난다. 1994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21년 동안 약 9,539명의 난민들이 본국으로 송환될 경우 박해의 위험을 피할 수 없다며 한국정부에 난민신청을 했다. 지난 한 해 난민신청자만 하더라도 2,896명에 이르러 총 21년 동안의 난민신청자의 30%에 달할 정도로 증가하고 있다. 분쟁 급증으로 난민이 증가하고 있는 세계적 추세가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반면 21년 간 한국정부에 의해 난민으로 인정된 사람들은 500명도 되지 않는다. 100명 중 95명이 돌려보내진다. 입국허가를 받기 전 공항에서 난민신청을 하면 그 중의 반은 사전심사를 통과하지 못해 난민심사의 기회조차 받지 못하고 공항에서 구금되어 처절히 버티다가 결국 비행기에 태워져 쫓겨난다.


난민법 시행 전에는 난민심사를 기다리는 동안 취업을 할 수도 없었고 생계비 지원도 없어 굶지 않기 위해 일했던 것뿐인데도 불법취업이라며 구금됐다. 체류기간이 지나서 난민신청을 한 난민들은 외국인보호소에서 난민심사가 종료될 때까지 종기(終期)조차 알지 못한 채 2, 3년 이상의 장기구금을 감내해야 한다. 엄청나게 뚫기 어려운 심사단계가 있지만, 사실 누가 난민으로 인정될 수 있는지 기준도 명확하지 않다. 난민지위에 관한 국제규범인 1951년 난민협약의 협약  상 요건에 충분히 해당되는 사람
들조차 불명확한 기준과 체류관리에 초점을 둔 잘못된 난민심사로 인해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어 한층 더 어려운 행정소송에 실낱 같은 희망을 걸었다가 대부분 쫓겨난다.


만약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시혜적으로 인정하는 인도적 체류지위를 받으면 과연 그들은 한국에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이 또한 보장할 수 없다. 시리아 난민신청자들에게 일률적으로 인도적 체류지위를 부여하면서 이에 해당하는 사람이 지난해 기준 716명이 되어 난민 인정자보다 더 많아졌는데, 이 자체가 우리나라의 난민 절차의 문제점을 보여준다. 더욱이 그들에 대한 제도적 보호는 완전한 공백상태다.


인도적 체류자에 대한 건강보험가입자격부여를 촉구하는 2014년도 국가인권위의 제도개선권고에 보건복지부는 최근 확실한 논거 없이 불수용 답변을 표명했다. 한국에서 쫓아내진 않겠으나 아프더라도 병원엔 가지 말라는 것이 한국정부의 판단인 셈이다. 건강보험뿐 아니라 그들을 보호할 아무런 제도가 없다. 1년마다 체류연장을 해야하고, 취업자격도 사후적으로만 허가한다, 교육권, 분쟁 속에 헤어진 가족과 결합할 권리 등도 없다. 한국이란 섬에 갇혀있는 그들은 곧장 쫓아내지 않는 것만 해도 감사하며 그냥 버텨야 한다. 인도적 체류자란 신분엔 어떠한 인도적 고려도 담겨 있지 않다.

 

이 모든 난관을 넘어 난민으로 인정받아도 평화롭게 이 땅에서 살기는 어렵다. 난민이란 단어를 들으면 대부분의 시민들은 ‘피난민’이란 이미지를 떠올리며, 언론에서 비춰지는 먼 나라 난민캠프의 고된 생활상 등을 생각할 뿐 난민들이 우리 곁에 살고 있다는 것 자체도 모르고 있다. 정부 역시 난민인정증명서를 내주고, 일정한 사회보장법제들 중 몇 부분에 난민이란 단어를 삽입하는 것으로 책임을 다할 뿐, 난민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실태파악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과거의 경험으로 인한 심리적 외상을 지닌 그들에게 새롭게 놓여진 언어 문화 인종주의와 같은 또 다른 장벽은 한없이 높다. 말 그대로 난민심사라는 한 관문을 통과했을 뿐이다.

 

과연 대한민국은 지중해 난민선보다 나은가.

 

지중해 난민선에 목숨을 건 난민들과 한국이란 국가에 목숨을 건 난민들은 그들에게 평화롭게 부여된 공간이 단 한 평도 없다는 점에서, 또 죽음으로 향하고 있음이 명약관화한 상황에 있음에도 실제로는 아무도 구조하러 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완전히 같다. 지중해의 난민들에게는 유럽의 정부도, 유럽의 시민들도 너무나 멀고, 한국의 난민들에게는 한국의 정부도 한국의 시민들도 너무나 멀다. 한나 아렌트가 말했듯 ‘국민’이 아니기에 ‘권리를 가질 권리’조차 없는 그들은 권리는 물론 돌아갈 수 있는 곳도,
새롭게 몸을 누일 곳도 없이 근대국가의 냉정한 얼굴이 만들어낸 경계 속에서, 어디에도 속하거나, 누구의 곁도 느끼지 못 한 채 한없이 작은 개인의 몸뚱아리로 모든 장벽과 씨름하다 사멸한다.


지난해 3월 시리아 내전을 피해 한국이란 배에 피신한 30대 초반의 한 시리아 남성은 다른 시리아 난민신청자들처럼 난민지위는 불허되고, 소위 인도적 체류지위만을 받았다. 한국사람도 생존하기 어려운 이 땅에서, 아무런 권리도 부여되지 않은 힘겨운 상황 속에 힘겨워하던 그는 지난해 말, 한국이란 배를 버리고 아프리카에서 이탈리아행 난민선에 올랐다. 그에겐 한국보다 난민선이 더 나은 희망을 제공했던 것이다. 연락을 주고받았던 동료들은 그가 탔던 작은 난민선이 좌초돼 그가 지중해에서 소리 없이 목숨을 잃었다는 비보를 접했다. 이번 참사와 달리 보도되지 않았던 그의 비극적 죽음은 무엇을 말하는가. 과연 대한민국은 난민들의 무덤이라는 지중해의 난민선 보다 나은가.

 

이일 공익법센터 어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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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최소한의 도덕 65.

수염이 열자라도 먹어야 양반이다. – 노동자 특유의 말투들과(Dialekte) 지식인의 말하기를(Schriftsprache) 갈라 서로 맞서게 하는 건 반동적이다. 한가로움은 – 그게 비록 교만과 방약무인으로 물든 한가로움일지라도 – 상류층의 말하기(Rede)에 어느 정도의 자주성과 자제력을 부여한다. 그 때문에 지식인의 말하기는 자기소속의 사회영역인 상류층과 대립하게 된다. 지배자들에게 명령하기를 원하는 지식인의 말하기는 바로 그런 말하기를 [비지배자에 대한] 명령으로 오용하는 지배들에게 반항하고 그들의 이익을 위한 복무를 철회한다. 반면 억압된 자들의 언어는 오로지 지배의 자국으로만 얼룩져 있고, 이런 지배에 의해서 아무런 뒤끝없이 감히 지식인의 말하기를 하는 자유인 모두에게 훼손되지 않고 자율적인 말이 약속하는 올바름(Gerechtigkeit/정의)마저 박탈 당한다. 프롤레타리아의 언어는 배고픔이 받아 쓰게 한 언어다. 가난한 자는 말들을(Worte) 씹고 또 씹어 공복을 채운다. 그는 말들의 객관적 정신에서 사회가 거부하는 영양가 있는(stark) 양식을 기대한다. 씹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그는 있는 말 없는 말을 다 보태어 입에 가득 담아 (den Mund voll nehmen)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이런 식으로 그는 언어에 복수 한다. 그는 지배자들이 사랑하지 못하도록 한 언어의 몸을 욕보이면서 자신에게 가해진 치욕을 무력한 힘으로 되돌린다. 재치있는 즉흥적인 답변과 타고난 기질로 요약될 수 있는 베를린 북부의 [노동자 거주지 베딩의] 사투리나 런던 사투리의 정수라 할지라도 절망스런 상황들을 절망하지 않고 극복하기 위해 적뿐만 아니라 자신마저 비웃고 그럼으로써 세상의 흐름을 정당화하는 한 병들어 있는 건 마찬가지다. 문어체가 계급간의 소외를 성문화한다고 해서 이걸 구어체로의 퇴행으로 철회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더없이 철저한 언어의 객관성의 귀결로 철회될 수 있다. 글쓰기를(Schrift) 자신의 내부로 끌어안는 말하기가(Sprechen) 비로소 인간의 주고받는 말하기(Rede)를 그게 이미 인간적이다란 거지거짓말로부터 해방시킬 것이다.

 

원문:

Kohldampf. - Die Dialekte der Arbeite r gegen die Schriftsprache ausspielen ist reaktionär. Muße, sogar Hochmut und Arroganz hat der Rede der Oberschicht etwas von Unabhängigkeit und Selbstdisziplin verliehen. Dadurch wird sie in Gegensatz zu ihrem eigenen sozialen Bereich gebracht. Sie wendet sich wider die Herren, welche sie zum Befehl mißbrauchen, indem sie ihnen befehlen will, und kündigt ihren Interessen den Dienst. In der Sprache der Unterworfenen aber hat einzig Herrschaft ihren Ausdruck hinterlassen und sie noch der Gerechtigkeit beraubt, die das unverstümmelte, autonome Wort all denen verheißt, die frei genug sind, ohneRancune es zu sagen. Die proletarische Sprache ist vom Hunger diktiert. Der Arme kaut die Worte, um an ihnen sich sattzuessen. Von ihrem objektiven Geist erwartet er die kräftige Nahrung, welche die Gesellschaft ihm verweigert; er nimmt den Mund voll, der nichts zu beißen hat. So rächt er sich an der Sprache. Er schändet den Sprachleib, den sie ihn nicht lieben lassen, und wiederholt mit ohnmächtiger Stärke die Schande, die ihm selber angetan ward. Selbst das Beste der Dialekte des Berliner Nordens oder der Cockneys, Schlagfertigkeit und Mutterwitz, krankt noch daran, daß es, um verzweifelte Situationen ohne Verzweiflung überstehen zu können, mit dem Feind zugleich auch sich selbst verlacht und so dem Weltlauf rechtgibt. Wenn die
Schriftsprache die Entfremdung der Klassen kodifiziert, dann läßt diese nicht durch Regression auf die gesprochene sich widerrufen, sondern nur in der Konsequenz der strengsten sprachlichen Objektivität. Erst das Sprechen, das die Schrift in sich aufhebt, befreit die menschliche Rede von der Lüge, sie sei schon menschl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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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엽 -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

 

 

 

 

 

슈니트케, 폴리포닉 탱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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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구축과 어루만짐 - 호른주자 펠릭스 클리저의 연주 (생 상스 로만체 op. 36 호른, 피아노)

ou_topia님의 [토코트로닉 - 순수이성이 절대 승리해서는 안된다.] 에 관련된 글.

 

 

 

펠릭스 클리저의 음반 "reveries"는 여기서 들어 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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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코트로닉 - 순수이성이 절대 승리해서는 안된다.

ou_topia님의 [fuck you frontex!] 에 관련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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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ck you frontex!

독일 록밴드 토코트로닉(tocotron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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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난민퇴치 작전 “트리톤”(Triton)

... zur Hilfe müßte Herakles kommen ...” (“지원병 헤라클레스가 와야”, 저항의 미학)

 

 

 

철옹성 유럽연합.

 

먹음직스러운 건(우크라이나) 챙기고 구미가 당기지 않은 건 뱉어내는 “우리끼리”의 경계레짐 프론텍스(Frontex). 말 그대로 - Frontières extérieures – 자기 선을 넘어서 남의 공간에서(우크라이나), 혹은 공유의 공간에서(지중해) 경계레짐을 전진배치하여 권력을 남용하는 레짐.

 

람페두사 참사에 대한 반성의 결과로 이탈리아의 난민구조를 우선으로 하는 “우리 [공유의] 바다”(Mare Nostrum) 작전은 잠깐이었다. 매일 400명을 구조해 15만명 이상의 난민을 구조한 “마레 노스트룸”이 난민에게, 밀입국조직에게 (“Schlepper”-난민을 줄줄이 끌고 오는자) 인센티브를 줬단다. 생각과 말이 이렇게 썩을 수도 있다.

 

경계레짐을 강화하여 난민을 격퇴하자! 이게 “마레 노스트룸”을 종결시키고 채택한 “트리톤”(Triton) 작전.

 

그리스 신 트리톤은 나쁜 놈이다. 천상의 족속들과 땅의 거인들의 싸움에서 추접한 짓을 한 놈이다. 그놈이 만든 고동 나팔의 소리는 더럽기 짝이 없었다. 야수(野獸)의 으르렁 거림이었다. 땅의 거인들은 그 놈의 나팔 소리를 듣고서 “인간이 아닌 야수”("inmanis fera”)를 신들이 동원했다고 두려워한 나머지 후퇴하기 시작했고 결국 패했다 (참조, 휘기누스/Hyginus, Astronomica 2, 23). 그런가 하면 선한 사람들을 욕보이는 놈이었다 (참조, 파우자니아스/Pausanias, 그리스 이야기, 9204).

 

한마디로, 프론텍스 “트리톤” 작전은 살아남기 위해서 길을 떠나야만 했던 사람들이 - fato profugus - 야수의 으르렁 거림을 듣고서 지중해에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하는 작전이다. 야수의 싸움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피난길에 오른 사람들을 야수의 으르렁거림으로 마주하는 것이다. 

 

바다가 주는 걸 먹고 사는 사람들을 늘 괴롭혔던 자연의 괴팍함을 ‘바다의 늙은이”(할리오스 게론/Halios Geron), 별칭 트리톤으로 상상한 민중의 편엔 헤라글레스, 디오니소스가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헤라클레스여, 언제 저 놈의 목을 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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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 뮌헨 포르투 대파 - 원인 분석

어제 바이에른 뮌헨이 포르투를 6대1로 크게 이기고 UEFA 챔피언스리그 4강에 진출했다.

 

원정 1차전에서 바이에른 뮌헨을 3대1로 꺽은 포르투가 왜 이토록 참패했을까?

 

우여곡절이 많은 축구경기에서 승패의 원인을 논리정연하게 도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축구황제 베겐바우어가 축구는 실수게임(“Fussball ist ein Fehlerspiel.”), 즉 실수하지 않는 팀이 이긴다고 하지 않았던가? 물론, 파워플레이로 실수를 강제할 수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게임에서는 뮌헨 감독 펩 과르디올라가 승리의 원인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1차전에서 포르투는 뮌헨의 취약점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파워플레이를 강행해 뮌헨의 실수를 강제하고 3대1로 이겼다.

 

바이에른 뮌헨의 강점은 프랑크 리베리와 아르연 로벤의 막강한 측면침투력으로 상대방팀 수비진이 아코디온 처럼 죽 늘어져 중앙침투에 노출되는 데 있다. 그러나 이 둘의 부상으로, 게다가 데이비드 알바,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등 뮌헨팀 주축의 부상으로 이런 플레이가 먹혀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펩 과르디올라는 원정 1차전에서 중앙에 침투력이 강한 토마스 뮐러를 배치하고 중앙돌파를 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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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전 포지션)

 

그러나 뮌헨의 중앙침투는 철저히 봉쇄되었다. 부상 선수와 함께 바이에른 뮌헨의 의료진이 패배의 원인으로 거론되는 등 잡음이 있었지만 과르디올라는 패배를 ‘내탓’으로 돌리고 2차전 포지션을 약간 수정했다. 주력을 측면으로 돌리고 중앙수비를 보강했다. 반면, 포르투는 프랑크 리베리와 아르연 로벤이 뛰지 않을 거라는 확실한 지피(知彼)에 안위하고 측면수비를 소홀히 했다. 아니 한단계 더 낮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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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전 홈경기 포지션)

 

베르나트-티아고-괴체 (원정전에서는 베르나트-티아고-레반도프스키)의 좌측 측면침투가 게임 14분에 티아고의 헤딩슛 선골로 이어졌다. 포르투는 취약하다고 생각했던 쪽에서 기습을 당하고선 흔들리기 시작했다. 코너킥을 헤딩슛으로 받아 스코어를 2:0으로 올린 보아텡에 이어 경기 27분에 하피냐-람-뮐러(원정전에서는 하피나-알론소-괴체)로 이어지는 우측 침투의 센터링을 레반도프스키 역시 헤딩슛으로 받아 골을 터뜨렸다. 스코어는 3:0, 뮌헨의 4강 진출이 거의 확정되었다. 측면침투에 정신을 잃은  포르투는 33분에 선수를 교체하여 측면 수비 강화를 도모했지만 혼비백산은 여전해서 중암침투에 의한 어처구니 없는 골까지 허용하게 되었다.          

 

약간의 포지션변화로 인한 에너지흐름의 변화를 포르투는 읽지 못했다. 후반전에가서야 비로소 맞대응했지만 늦었다. 후반전 포르투의 에너지흐름의 변화에 맞대응하기 위해서 과르디올라는 바지가 터지는 것도 모르고 코오칭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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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난민 참사에 대한 독일 제1공영방송 ARD의 타게스테멘(Tagesthemen) 코멘트

인상깊은 코멘트였다. 번역해 본다.

 

http://www.ardmediathek.de/tv/Tagesthemen/Eine-Schande-f%C3%BCr-unsere-Politiker-Ei/Das-Erste/Video?documentId=27789890&bcastId=3914&mpage=page.dossier-20721594

 

 

"오늘은 700, 이번주 초에는 400. 절규하면서, 공포에 떨면서, 죽어가는 사람들, 지중해에서. 기막히는 셈과 운명들이다. 이건 유럽의 치욕이다. 시칠리아 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오늘은 몹쓸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내일이 되면 시립 실내체육관에서 난민이 [거주하는 걸 눈뜨고 볼 수 없다는 자들 모두의 치욕이다. 우리 정치가들의 치욕이다, 지난 20년간의 EU 내무부장관들을 선두로 하여. 그리고 누군가가 우리 집의 대문을 있는 힘을 다하여 꽉 닫아 주었다고 혼자서 속으로 기뻐하는 우리 중 아주 많은 사람들의 치욕이다.

 

나도 안다. 우리 유럽이 에리트레야 혹은 나이지리아에서 우리에게 오기를 원하는 자 모두를 수용할 수 없다는 걸. 그러나 생과사의 문제라면 우리는 인간성을 유지해야 한다. 지금까지 난민들은 오로지 호두껍질[처럼 작은 배] 선택 밖에 없다. 이제라도 그들에게 인색하지 말고 합법적이고 안전한 플랜 B를 제공하자. 가령 여기서 대학에 진학하고, 여기서 직업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해주자.

 

보다 긴급한 건 즉시 해양조난구조를 재개하는 것이다. 우리는 절대, 말하자면 사람들이 익사하게 내버려 두어 나머지 사람들이 아예 피난을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억제용으로 사용할 만큼, 냉소적일 수 없다. [이탈리아의 단기 해양조난구조사업, 이른바 mare nostrum의 연장을 거부하는 독일의 논거 - ou] 바로 이런 결정에서 독일은 수치스러운 역할을 했다. 항상 인간적이고 계몽되었다고 자찬하는 우리는 우리의 외곽 경계선에서 무정하고, 잔인하고, 살인적이다. 지중해가 집단무덤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했다. 박수갈채가 있었다. 그러고 나선 아무런 일이 없었다. 절규, 공포, 죽음 밖에 없었다. 지중해에서.

 

[스크립트]

"700 Menschen allein heute - 400 Menschen Anfang der Woche. Schreiend, panisch, sterbend im Mittelmeer. Es sind Zahlen und Schicksale, die sprachlos machen - und sie sind eine Schande für Europa. Für alle, die es heute schlimm finden, was da vor Sizilien passiert, aber morgen bloß keinen Flüchtling in der städtischen Turnhalle sehen wollen. Eine Schande für unsere Politiker, allen voran die EU-Innenminister der letzten 20 Jahre. Und eine Schande für ganz viele von uns, die klammheimlich froh waren, dass da jemand unsere Haustür so fest zudrückte, wie nur möglich.

Auch ich weiss, dass wir in Europa nicht jeden aufnehmen können, der aus Eritrea oder aus Nigeria zu uns kommen möchte. Aber menschlich müssen wir bleiben, wenn es um Leben und Tod geht. Bislang haben die Flüchtlinge nur die Option Nussschale. Bieten wir ihnen endlich großzügig einen legalen und sicheren Plan B, etwa die Möglichkeit hier zu studieren, hier eine Ausbildung zu machen.

Noch drängender ist es jetzt die Seenotrettung wieder zu starten. So zynisch können wir gar nicht sein, Menschen quasi zur Abschreckung ertrinken zu lassen, damit der Rest keine Lust auf Flucht mehr hat. Deutschland hat gerade bei dieser Entscheidung eine unrühmliche Rolle gespielt. Wir, die wir uns immer für menschlich und aufgeklärt halten - an unserer Außengrenze sind wir herzlos, grausam und mörderisch. Das Mittelmeer darf kein Massengrab werden, hat Papst Franziskus kürzlich im Europaparlament gesagt. Es gab viel Applaus - und dann passierte nichts. Außer Schreien, Panik und Sterben im Mittelme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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