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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9

1. 유럽연합-터키 난민 송환 합의


관련 내용은 여기 참조


이 합의 관련 필자가 주목하고 싶은 점은 그리스와 터키를 선명한 선으로 가를 수 없다는 것.

 

난민의 [독일행] 발칸루트 봉쇄보단 그리스가 유럽연합 외부 경계선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는 비판이 더 자자했었다. 지도를 보자. 그게 지리적으로 가능한지.

 

 

http://plansetguides.free.fr/guides/grece/greece_map.gif

 

 

이번 합의는 그리스와 터키 간의 경계선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한 것 같다.

 

유럽의 “외재적 정체성”(레미 브라크, 유럽. 외재적 정체성, 1993/Remi Braque, Europa. Eine exzentrische Identität, 1993)의 구성 요소의 하나가 되는 그리스의 문화권은 에게 해를 넘어 소아시아를 포함했었다. 이 문화권은 오스만 제국까지 그 맥을 이어갔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그리스가 [국수주의] 땅따먹기를 시도함으로써 단절되었다. 근대 국민국가를 건설한 터키의 반격으로 터키에 살고 있었던 그리스인들이 터키 본토에서 다 추방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터키 문화권의 맥이 살아있었을까?  


이번 합의로 유럽연합의 외부 경계선이 터키까지 확장되었다고 할 순 없지만, 한때 동결된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 과정이 재개된 건 사실이다.

 

터키는 유럽연합의 요구에 '열심히 숙제를 다했지만' "선처 받는 동반자 관계"("privilegierte Partnerschaft"-메르켈) 이상이 될 수 없다는 걸 인지하고 다부톨루가 창안한 "전략적 깊이"라는 구상 아래 아랍권의 헤게몬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 "전략적 깊이" 구상이 빗나간 현재 다시 유럽연합에 접근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린 것 같다.

 


2. 전 독일외무상 베스터벨레 별세 (관련 기사)

 

정치인들은 공론의 일부다. 시대의 흐름을 가르는 혹은 종합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할까? 그들의 죽음이 하나의 사실로 다가올 뿐 별다른 감정을 야기하지는 않는다.

 

베스터벨레의 별세는 좀 다르다. 사람이라면 다 백혈병과의 투쟁에서 이기라는 응원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가? 연민의 정인가?

 

항상 시끌벅적 '나'를 내세웠던 베스터벨레가 투병 중 공중에 내보였던 모습은 자기 안으로 들어가 상대를 배려하는 조용한 모습.    

 

남편을 위해서 책을 썼다는 말, 동성애자들의 결혼이 "이등결혼생활"("Ehe zweiter Klasse", 슈피겔 인터뷰)이 아니라는 말, 깊은 내면이 있는 동반의 삶이라는 말 등 삶이 취할 수 있는 모습을 적극적으로, 긍정적으로 살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더욱 애도의 마음이 깊어졌는지 모르겠다.

 

단지 '등록된 동반자'란 지위밖에 부여되지 않은 동성애 커플이지만 메르켈 총리는  "[베스터벨레의] 남편과 유가족에게 애도를 표한다" 한다. 거침없이 "남편"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남편'의 삶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 베스테벨레의 별세를 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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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8

인공지능 안 무서워...

 

독일 로보컵 축구경기 2016년

 

 Zeitonline: "호나우도 로봇은 아직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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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뢰더의 '마이웨이'를 메르켈도 주문할까?

독일은 총리, 대통령, 그리고 국방장관이 이임할 경우 Grosser Zapfenstreich란 의전 행사로 당사자의 '편히 쉼'을 기원한다. 이 행사는 밤에 횃불을 들고 기립한 연방군 의장대와 군악단의 연주로 거행된다. 아무런 말이 없이 진행되는 이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당사자가 선곡한 노래의 연주.

 

슈뢰더 총리는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웨이'를 선곡했다. 저층 출신으로 총리가 된 의지의 사나이 슈뢰더에게 어울리는 선곡. 어쩌면 '아젠다 2010' 신자유주의 개혁 추진 과정에서 사민당의 분열을 자초하고, 지지기반 확인을 위해서 조기 실시한 총선에서 기민/기사연합 CDU/CSU를 이끄는 메르켈에 패하고 이임하게 된 슈뢰더가 자신의 선택에 대한 해설이었는지 모르겠다.

 

현재 난민정책 봉착을 맞이한 메르켈 총리도 슈뢰더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다. 독일 정치에서 늘 지각변동의 신호를 알렸던 헷센주의 최근 기초단체 선거에서 기존 정당이 후퇴하고 반난민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 AfD가 제3정당의 자리에 올라섰다. 연방 3개 주에서 총선이 있는 2016.3.13 이후 메르켈의 선택은 과연 무엇일까?

 

사민당은 슈뢰더의 '아젠다 2010' 추진 과정에서 20%+α 정당으로 추락했다. 과거 40%+α 정당에서 80년대 초반 반전.반핵.생태계운동 등 신사회운동의 탈사민당 및 녹색당의 창설로 30%선으로 떨어졌다가 '아젠다 2010'를 반대하는 노조 좌파 세력의 탈당 및 신당 창설('노동과 사회 정의를 위한 선거 대안' WASG), 그리고 좌파당 Die Linke로의 통합으로 20%+α 당으로 까지 떨어진 것이다. 2005년 당시 사민당의 아성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총선에서 패하고, 차기 주총리 뤼트거스(Rüttgers)의 “이제 내가 노동자당의 당수다”란 야유를 받으면서 기민당에게 정권을 내주게 되었다. 게다가 연방상원에서 기민/기사연합 CDU/CSU에게 연방상원을 통과해야 하는 모든 법을 저지할 수 있는 2/3 다수를 내주게 되었다. 조기 총선이 불가피해진 것이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2016.3.13 '슈퍼 썬데이'에서 CDU가 40%+α 에서 30%+α 당으로 전락할 전망이다. 메르켈이 이끄는 CDU의 '사민당화'와 함께 메르켈의 난민정책을 반대하는 CDU 지지자들이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주는 당이 없어졌다고 비난하고 신생 반난민 정당 AfD에 몰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파 진영에 발생한 틈에 끼어든 AfD가 한꺼번에 10+α 당으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대연정구도하 연방상원의 구성에야 큰 변동이 없겠지만 CDU/CSU 내부 진통은 아마 더해질 것이다.  CSU가 바이에른주를 독식하는 특이한 연합은 사실 CDU/CSU 오른 쪽에 다른 우파 정당이 발생하는 걸 막는 연합 전략이었다. 이 전략이 먹혀 들어가 과거 이런저런 극우 정당이 창설되었지만 모두 주차원에서 반짝하다가 금방 사라졌다. 그런데 이번 상황은 좀 다르다. AfD가 주에서 보금?자리를 틀고 연방하원까지 진출할 전망이다.

 

이런 정국하 CDU/CSU 연합에 균열이 발생하고 그 차이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다. 아니 CDU내 균열로 번지고 있다. 지지층의 AfD로의 표심 이동을 걱정한 CDU 주총리 후보들은 메르켈 멀리하기 정책으로 전환하고 있는 상황이다. CDU 아성 바덴뷔르템베르크주에서 CDU를 넘어서 제1정당이 될 전망인 녹색당이 메르켈의 난민정책을 적극 지지하는 데에 비춰보면 가히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CDU 후보들이 다 패하면 메르켈 '심판'으로 이어질까? CSU를 이끄는 제호퍼는 아마 그럴 거다. 차기 총리 후부 문제로 까지 번질 것이라고 전망해 본다.

 

메르켈의 선곡도 과연 '마이웨이'일까?

 

 

# 최근 여론 조사 (FAZ, 2016.3.7)

 

바덴-뷔르템베르크

 

 

 

 

 

 

 

 
 
 
 
 
 
 
 
 
 
 
 
 
 
 
 
 
 
 
 
 
 
 
 
 
 
 
 
 
 
 
 
 
 
 
 
 
 
 
 
 
 
 
 
 
 
 
 
 
 
 
 
 
 
 
 
33,5%
녹색당
 
28,5%
CDU
 
12,5%
SPD
 
12,5%
AfD
 
6%
FDP
 
3%
좌파당
 
4%
기타

 

 

 

라인란트-팔츠

 

 

 

 

 

 

 

 

 
 
 
 
 
 
 
 
 
 
 
 
 
 
 
 
 
 
 
 
 
 
 
 
 
 
 
 
 
 
 
 
 
 
 
 
 
 
 
 
 
 
 
 
 
 
 
 
 
 
 
 
 
 
 
 
 
 
 
 
 
 
 
 
 
 
 
35%
SPD
 
35%
CDU
 
9%
AfD
 
7%
녹색당
 
5%
FDP
 
3%
좌파당
 
6%
기타

 

 

작센-안할트

 

 

 

 

 

 

 
 
 
 
 
 
 
 
 
 
 
 
 
 
 
 
 
 
 
 
 
 
 
 
 
 
 
 
 
 
 
 
 
 
 
 
 
 
 
 
 
 
 
 
 
 
 
 
 
 
 
 
 
 
 
 
 
 
 
 
 
 
 
29%
CDU
 
20%
좌파당
 
19%
AfD
 
15,5%
SPD
 
6%
녹색당
 
4%
FDP
 
6,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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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소녀"

Steve McCurry

 

"(사진의) 두 번째 요소는 {관심과 개입의 노력의 연속인} 스투디움을 중단하거나 (혹은 스투디움을 그 음절에 따라 단절할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스투디움의 장을 군주 의식으로 뒤덮을 때처럼) 내가 이 요소를 찾아 나서는 게 아니라, 그 요소가 스스로 마치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사진{사건의} 현장을 떠나 나를 꿰뚫는다. 라틴어에는 뾰족한 도구(un instrument pointu)에 의해서 남겨진 이 상처, 이 찌름, 이 상흔을 가리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점각(點刻)(ponctuation)이란 관념을 반영하고, 또 내가 이야기하는 사진들은 그 작용의 결과에서 마치 {점각침에 의해 뚫린} 미세한 점들과 같고, 때로는 그런 겨우 감지되는 점들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에 나의 {사진에 관한} 생각에 더욱 적합하다. 정확히 말해서 이런 상흔들, 이 상처들은 점들 미세한 뚫림들(des points)이다. 그래서 나는 {스투디움에 임하는 군주의 의식의 평심(平心)을 무너뜨려} 스투디움을 흐트러뜨리는 이 두 번째 요소를 푼크툼(punctum)이라고 부르겠다." (롤랑 바르트, 밝은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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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법

프랑크푸르트 학파 3세대 크르스토프 멘케(Christopf Menke)의 2015.11 출간된 책 <Kritik der Rechte>의 일부를 소개한다. 마르크스의 인용으로 시작해서 레닌 인용으로 끝나는 약 500 쪽 분량의 책이다. 전체 내용을 요약하는, 다소 선언문 성격을 갖는, 집필 후기처럼 첨부된 마지막 부분 <Recht und Gewalt>를 번역시도해서 올린다.       

일러두기:
- () 와 [] 는 저자가 사용. {} 역자 삽입 () 한문/원문 역자 삽입
- Recht가 법(law), 권리(right), 그리고 Rechtsstaat/법치국가에서 볼 수 있듯이 법치의 의미까지 두루 포함하고 있는 관계로 Recht의 번역이 어렵다. Rechte와 같이 '권리'의 의미가 분명하면 쉬운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 Gesetz는 법규로 번역했다.
- Sicherung은 보호 혹은 안전으로 번역했다.
- 주석은 번역하지 않았다.

 

 

법과 폭력


법의 사명은 폭력의 제한이다. 폭력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의 특수한 양식이다. 다른 사람을 해치는 양식이다. 이와 달리 법은 서로가 서로에게 주고받는 작용을 평등의 원칙에 따라 조정한다. 그렇다고 해서 서로 간의 폭력이 배제된 것은 아니다. 단지 평등, 즉 권리주체 또는 시민의 지위를 부정하지 않는 침해를 야기하는 작용으로 제한할 뿐이다. (달리 말해서 나를 “해칠” 수 없는 폭력을 야기하는 작용으로 제한하는 것이다.)

그러나, 법은 폭력을 제한함으로써 스스로 폭력적이다. 법이 이러함은 먼저 그 수단에 있다. 폭력으로 위협하고 (그리고 극단적인 상황에서 폭력을 적용하지) 못한다면 법은 폭력의 제한을 관철할 수 없을 것이다. 폭력은 법의 규범적인 질서와 “공생하는”, 상징적인 차원의 유기적인 차원으로의 관계를 매개하는 “기제”다. 규범적인 질서로서의 법은 자신이 일정한 합의의 표출임을 주장해야 한다. 또한 법은 규범적인 질서로서 항상 우려되는 “불합의 위협”을 맞설 수 있어야 한다. 그 때문에 법은 폭력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판정하고 처벌하는 가운데 가해자에게 맞섬으로써 법은 스스로 폭력적이다. 가해자의 (反)가해다.

그러나 법은 자신의 폭력을 이런 {차단기와 같은} 도구적인 역할로 제한할 수 없다. 법은 자신의 폭력을 {반성, 반추하는} 권력이 없다. 여기에 법의 본래적인 폭력 - 폭력의 폭력 – 이 깔려있다. 법적인 폭력의 폭력은 그 비제한성과 비통제성에 있다. 왜냐하면, 법의 폭력은 반복의 강제(Wiederholungszwang {의식 밑으로 밀려난 것이 강제적으로 반복해서 나타나는 현상})에 걸려있기 때문이다. 법은 {과거/gewesen 에서 유래되는} 강제가 본질(Wesen)을 이루기 때문에 반복의 강제를 중단할 수 없다.  법은 - 거론된 바와 같이 - 자신을 비규범적인 것(혹은 자연적인 것)에 反정립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항상 그러듯이 이것을 규범성의 타자로 생산하는 규범성의 형태다. 그래서 법은 - 자신을 정립하는 동시에 자신에게 자신의 타자를 反정립하기 때문에 – 폭력적으로 자신을 자신의 타자에 대항하여 무한정 관철시켜야 한다. “{폭력 제한} 목적이 법으로 등극하는 순간 […] 폭력이 퇴위하지 않고, 오히려 그 폭력이 비로서 [폭력을] 엄밀한 의미로, 즉 직접적으로 법정립적인 폭력으로 만들기“때문에 모든 “법정립”은 […] 권력정립이다.“ 법보존의 모든 행위에 근원적인 법정립의 “반복”이 집행된다. 이런 집행의 목적은 그저 이런저런 법규(Gesetz)의 성문화나 적용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법 자체”의 확증에 있다. 그 근거는 이미 법의 등극을 통치했던 논리에 깔려있다. 법의 등극은 법 외의 것 혹은 법이 아닌 것(Nichtrecht)에 대한 법의 反정립이다. 법이 스스로 법과 법이 아닌 것의 대립을 정립하기 때문에 그 대립에 갇힌 포로로 남게 된다. 그래서 법은 단지 보존하고 규범적인 논리에 따라 집행(verfahren)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신의 권력을 언제나 반복해서, 규범성의 이편에서, 법 외의 것에 반정립해야 한다. 법은 자신의 등극 행위에서 벗어 날 수 없다. 법의 숙명은 저 행위를 무한정 반복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법적 폭력은 “신화적인”(mythisch {의식의 밑에 깔려 대상화되지 않는}) 폭력이다.

이 폭력을 근대의 법은 법과 법이 아닌 것의 대립을 달리 집행함으로써 깨려고 한다. 근대의 법이 법이 아닌 것에 대한 자신의 대립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렇다면 동시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가하는 침해의 폭력을 제한하는 능력을 상실할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그 대립을 자기 성찰의 양식으로 집행할 뿐이다. 법의 자기 성찰은 법이 자신을 법이 아닌 것과의 대립을 이루는 것으로 보는 가운데 법이 아닌 것과의 대립을 법 내부의 것으로 만든 데에 있다. 이렇게 하여 법의 자기 성찰은 권리(Rechte)의 근대적인 형식을 산출한다. 근대적인 형식의 권리는 법의 근본적인 목적(Bestimmung), 즉 폭력의 제한을 폭력, 즉 폭력으로서의 법 자체 에 적용한다. 권리는 법의 법이다 (Die Rechte sind das Recht des Rechts). 권리는 법이 아닌 것(혹은 자연적인 것)을  법문화함으로써 법의 폭력을 제한한다.

이 자기성찰적인 조작(操作)이 또한 시민권/시민법(bürgerliches Recht)의 근거다. 그의 “발생사”(마르크스)다. 이 과정에서 시민법/시민권은 근대 법의 이중적인 폭력 제한을 실현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가하는 폭력의 제한 및 법적 제한이 행사하는 폭력의 제한이다. 다른 사람 뿐만 아니라 법 자체도 침해할 수 없는 모든 사람의 사적인 권리(Ansprüche)를 확정함으로써 그렇게 한 것이다. 이것은 시민법/시민권(bürgerliches Gesetz)에 의해서 이루어 진다. 여기에 시민{사회}의 법치(Gesetzesherrschaft)의 “실질적인 의미”가 있다. 시민법/시민권의 실체적인 의미는 사적인 것의 안전이다. 안전의 의미는 폭력으로부터의 안전이다. 여기서 폭력은 평등의 법으로 정당화되지 않은 모든 (자유 재량의) 사적 공간과 (참여의) 사적 능력에 대한 개입을 의미한다. 시민법/시민권의 기본 프로그램은 사적 권리를 폭력적인 침해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시민법/시민권은 법의 근대적 자기성찰을 실현하려고 한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시민법/시민권의 불공평이 근거한다. 그 불공평의 근거는 안전을 위한 프로그램이다. 시민법의 불공평은 주어진 것으로 전제하는 사적 권리에 법적인 권력을 부여하는데 있다. 법은 이렇게, 다시 말해서 실증주의적으로, 근대적인 자기성찰을 이해한다. 새로운 법이 시민법/시민권의 불공평성을 폐지하기를 원한다면 - 그리고 이것이, 본 바와 같이, 시민법/시민권 형식의 부정을 요구한다면 - 그러면 새로운 법은 부르주아/시민의 기본 프로그램 자체를 공격해야 한다. 새로운 법은 { 시민법/시민권의} 전제, 그 기본 등식을 물리치고 부르주아/시민 형식을 갖춘 법(Gesetz)이 그 “실체적인 의미”(Franz Neumann) 획득하는 전제, 즉 그 기본 등식을 거부해야 한다. 그 전제는 이런 내용이다. 법의 근대적인 자기성찰 - 근대적인 법을 이루는 자기성찰 - 의 의미는 사적 권리의 {법의} 폭력으로부터의 보호와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시민법/시민권상의 폭력으로부터의 보호는 서러 맞물려 있는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다. 보호는 폭력적인 침해로부터의 보호임과 동시에 또한 시민법/시민권이 그 보호를 집행하는 방식에 의해서 변화의 폭력으로부터의 보호다. 있는 것과 주어진 것에 개입하는 변화의 폭력에 반대하는 것이다. 시민법/시민권의 안전은 폭력에 대한 추상적인  항의다. 그 안전은 폭력과 폭력 간의 차이, 즉 침해의 폭력과 변화의 폭력 간의 차이를 도외시한다. 보호가 법문화한 것의 변화를 배제하기 때문에 사적 소유의(des Eigenen) 법적 보호는 있는 것의  보호와 분별되지 않는다. 여기서 안전이라는 시민/부르주아의 기본 프로그램은 전반적으로 反정치적인 프로그램임이 확인된다. 사적 소유의 법적 보호는 그것의 변화를 금하는 것이다. 시민법/시민권은 “실제로는 지배하지 못하는 지배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남아 있는 비정치적 영역들의 내용을 실질적으로(materiell) 두루 관통하고”, 그 “구성 요소들을 뒤집어(revolutionieren) 비판 아래 두는 권력을 체념하기 때문이다.

반면, 새로운 법은 비정치적인 것의 정치적인 관통과 혁명화을 위한 권력을 원한다. 새로운 법의  대항권리(Gegenrechte)는 {새로운 법의} 변증법적 자기성찰의 집행 형식이기 때문에 사적 소유의 시민/부르주아적 보호가 주어진 것에 부여한 가상(假想)을 해체한다. 새로운 법은 주어진 것을 정당화하는 것에 개입한다. 대항권리는 {주어진 것을} 참작함으로써 변화를 일으킨다. 대항권리는 참작된 {주어진 것의} 분리를 야기한다. 대항권리는 참착된 {주어진} 것의 참다운 모습을 “있는 것의 추한 얼굴”로부터 해방한다. 여기서 대항권리는 폭력을 행사한다. 대항권리는 폭력적이다.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오로지 폭력을 행사하는 법만이 변화를 야기할 수 있다.

그래서 새로운 법은 폭력으로부터, 모든 폭력으로부터 안전하게 하는 시민/부르주아 프로그램을 포기한다. 그러나 바로 새로운 법이 변화의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지금까지의 모든 법이 예속된 („신화적인”) 반복강제를 깬다. 왜냐하면 변화의 폭력으로서의 폭력은 어느 때나 항상 목적의 달성과 함께 퇴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운 법은 스스로 자신을 해체하는 폭력을 갖는 법이다. 폭력 행사와 함께 “바로 […] 소멸하기 시작하는”{필자 주석, 레린, 국가와 혁명} 폭력이다. 새로운 법의 폭력은 해방의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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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헤게몬 독일 - 2

[책소개]

 

헤르프리드 뮌클러(Herfried Münkler)의 “중심부에 선 대국”(Macht in der Mitte), 2015년 출간

 

우선 목차부터

 

 

 

 

0. 서론

 

1. [유럽의] 변방, 내재적 분단선, 그리고 새로운 중심부: 유럽 내 독일 역할

 

- 유럽프로젝트에 내재하는 역설들

- 불분명한 유럽 외부 경계선들

- 유럽에 내재하는 분단.분열선들

- “카롤링어 유럽” [칼 대제가 통치했던 지역 – 프랑스, 베네룩스 3, (서부)독일, (북부)이탈리아]과 유럽 공동체 확장 라운드

- 유럽의 중심부 - 1990년 이후의 독일

- 지정학적 위치, 권력 유형들의 문제, 그리고 유럽에서 미국의 탈개입(disengagement)

 

 

2. 정치 문화적 지리학: 유럽의 외부 경계선들과 유럽 중심부의 문제

 

-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경계선

- 오리엔트 문제와 지중해 연안

- 유럽 [정체성]의 지리적 외재성(Exzentrizität)

- 예루살렘을 구원사적 [중심으로] 상상하는 [유럽] 중심부

- 권력정치로의 전환: 유럽 주변 혹은 그 밖의 대국들(Flügelmächte)에 의한 도전과 중심부의 위기

- 권력정치에서 벌거숭이가 된 중심부의 이상정치(ideenpolitisch) 재장전

- [.] 대립 형성과 중심부의 소멸

- 지정학과 가치공동체(Wertbindung)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중심부

- 1, 2차 대전과 유럽의 지정학적 중심부

- 1945년 이후 “서방”의 지정학적 지도이념들(Leitideen)

- 동서대립의 종말과 유럽의 동쪽 경계선 문제의 재등장

 

 

3. 유럽 내의 독일: 중심에서 변방으로, 그리고 다시 중심으로

 

- [신성로마] 제국 나누기와 교회 분열에 대한 간단한 서술

- 중심부 재앙으로서의 30년 전쟁

- 허약한 중심부와 강력한 중심부

- 중심부에 요청되는 것에 실패한 독일

 

4. 중심부에 선 대국: 독일 정치의 새로운 요청과 오래된 취약성

 

- [엘리트] 유럽프로젝트가 [대중] 정치적 문제가 되는 [통합프로세스의 강화가 분열을 낳는] 역설[적인 상황 등장과 EU 분열을 막기 위한] 강력한 중심부 필요성으로 귀결

- 독일이 역사에서 반드시 숙지해야 할 사항

- 미국의 탈개입에 따른 중심부의 [위상에 대한] 새로운 평가

- „중심부에 선 대국”의 안보 정책상의 지도이념들

- 규범 준수와 정치적 지혜

- 중심부의 정치: 자제와 지체 사이에서, 숙고와 연약한 결정력 사이에서

- 독일의 3대 전략적 취약성

- 유럽의 중심부 문제 해결로서의 “다칠 수 있는 헤게몬”(„der verwundbare Hegemon“)

- „중심부에 선 대국”의 양대 과제

- 권력 유형(Machtsorten [마이클 맨의 'sources of social power'에 기댄 개념])의 포트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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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헤게몬 독일 - 1

얼마 전 독일 내무장관 토마스 드 메지에르가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하고 난민 문제를 협상하더니 이제 모로코, 알제리, 튀니스 순방 길에 나섰다.

 

최근 독일 망명 관련 법규를 망라한 이른바 „Asylpaket 2”가 제정되었다. 지난 해 10월에 제정된 망명 패키지 1이 난민 수용 효율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번 제정된 패키지는 난민 줄이기에 초점을 맞췄다. 그 하나가 보다 손쉬운 난민 본국 송환이다.

 

안전 국가로 분류된 모로코, 알제리, 그리고 튀니지와 관련 문제를 협상하기 위해서 독일 내무장관이 순방길에 나선 것이다.

 

 

이상하다.

 

외무부의 영역이 아닌가? 이란 문제, 시리아 내전 문제, 우크라이나 문제 등 동분서주하는 외무장관 슈타인마이어가 역할 분담을 하자고 했나?

 

난민 문제에서 EU와 그 주변국들이 독일 내정의 영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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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제재와 가치법칙

1.

 

중앙일보가 대북제재에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인다. 신속한 보도와 함께 다층.다면적인 사설을 싣는다.

 

그 관심의 근간엔 '한국' 자본의 향로에 대한 걱정이 있다. 

 

"한반도 번영의 새로운 축은 북방에 있다"(중앙일보, 김병연)란 입장의 연장선에서

“북한이 핵 개발에 죽기살기로 매달렸고 또 실질적 핵보유국이 됐음을 인정해야 할 단계에 왔다면 핵문제 해결과

평화협정을 맞바꾸자는 북한의 요구를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는 있겠다. 중국이 버티는 한 북한 괴멸은 현실성

없는 분노의 시나리오다“(중앙일보, 송호근 '우수와 경칩 사이)란 의견이 가능하지 않는가 한다.

 

 

2.

 

안보리 대북제재 결의를 앞둔 뉴욕타임스의 기사에서 가치법칙의 관철을 본다.

 

월스리트저널의 "확실한 쥐어짜기"(„decisive squeeze“)에  뉴욕타임스는 "아시아의 회의"를 거론하면서 

북한이 빠져 나갈 수 있는 '구멍' 둘을 제시한다. 둘 다 제재 대상이 아니다. 하나는 북한 노동력 해외 파견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 자본의 북한내 임가공 강화다.

 

 

3.

 

한국 정부의 '급변침'대북정책은 북.중 관계의 단절을 목적한다. 그러나 가치법칙은 관철된다. 결과 북.중 관계는

더욱 긴밀해 질 수 있다. 

 

한국의 개성공단 포기와 중국의 '개성공단' 확장이 대조를 이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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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를 깍는" 박근혜, 쿼바디스? - 6

1.

 

"우수와 경칩 사이"(중앙일보, 송호근)를 걷다가

 

"사드 문제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조선일보, 양상훈)는 인식에 눈이 뜨이는가 했더니

 

"사드는 결국 미-중 협상용이란 말인가"(동아일보, 사설)라는 회의에 빠지고

 

"한국, 미중의 '바둑돌'"(동아일보, 박제균)이 된 신세를 한탄하면서

 

엉뚱한 곳에 칼을 들이대고 있다.

 

 

2.

 

생활환경이 복잡해졌다. 다양한 스팩을 쌓으라고 한다. 적응하려면.

 

국가와 국가를 횡단하는 생산과 소비의 초국적인 조직에 국제 관계도 복잡해졌다.

 

정부도 다양한 스팩이 필요해졌다.

 

 

3.

 

“이것 아니면 저것”을 국정 원리로 삼았다.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했다.

 

씩씩하고 과감하게 보였다.

 

 

내정(內政)에서 짭짤하게 한몫한 원리였다.

 

국제 관계에도 적용했다.

 

 

4.

 

국제 관계를 군사적 관계로 축소했다.

 

무지의 결과다.

 

"경제적, 사상적, 군사적, 그리고 정치적 파워의 조합"(마이클 맨)의 복합성을 '군사 파워'로 단순하게 했다.

 

개성공단을 버렸다.

 

'한류'를 버렸다.

 

'경제대국' 한국도 버렸다.

 

'햇볕정책'도 버렸다.

 

그리고 '바둑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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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를 깍는" 박근혜, 쿼바디스? - 5

1.

세상 만사를 인과성에 끼워 맞추는 경향은 아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흄, 비트겐슈타인에도 불구하고.

세상 만사에 종종 문학 작품이 이해의 열쇠가 된다.

루이스 캐럴의 <스나크 사냥>이 그런 문학 작품이다.


2.

대북 관계가 계류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개성공단 전면 중단 조치 및 관련 국정 연설 이후 침묵하고 있다.

혹자는 수십 년 전으로 후퇴했다고 한다.

혹자는 판을 새로 짠 것이라고 한다.


3.

혹시 보우스피릿과 방향타가 꼬인 게 아닐까?

국가 또는 국정이 종종 범선에 비교된다. 알레고리일 수도 있다.

항해에서 추진력은 중요하다. 복원력도 중요하다. 도착지를 놓치지 않는 건 말할 나위 없고.  

이런 것 못지 않게 중요한 건 바람의 방향, 물살, 파도, 해저 지반 등 주변 환경을

실시간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이다.

 

4.

뱃머리(bow)의 보우스피릿 혹은 집붐(jib boom)에 달려 있는 돛은 실시간 방향 조정을 지원한다.  

배가 바람을 잘 탈 수 있게 해준다.  

이런 돛이 전면 폐기됐다.

“내가 세 번 말한 건 사실이다”는 '원칙'을 확인하고 '직진'을 명령했다.

“What I tell you tree times is true.“

그리고 뱃머리 보우스피릿을 엉뚱한 데다 달았다.

배꼬리 방향타에 달았다.

„The bowsprit got mixed with the rudder sometimes.“

배가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후퇴했다.

 

5.

왜 이런 일이?

“그건 아닌데”(„remonstrance“)가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문가의 눈물 어린 지적에 „Naval Code“와 “Admiralty Instructions“만 들이대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이다.

“No one shall speak to the Man at the Helm.“

„And the Man at the Helm shall speak to no one.“

고집 불통 때문이다.


6.

주기적인 점검이 있어서 다행이다. 선장 Bellman을 갈아 치우고 보우스피릿을 제자리에 붙이면 된다.  

근데 선원이 Bellman, Broker, Banker 등등 다 'B'로 시작하는 사람들이다.

선원이 '진박'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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