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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에 대해

이 글은 행인님의 [하울의 성이 멈췄을 때] 에 관련된 글입니다.

 

영화와는 그닥 직접적 연관성이 떨어지지만...그래두 직업병발동하는게지..

미학에 대해 전문적으로 끄적이기 보다는 경험적 사견을 토대로...



아름다움에 대해 얘길 꺼내본다....

 

하울
머리색깔하나에 자신의 존재가치를 들먹이는 건 분명 오바질이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가지고 있는 외적 아름다움에 대한 가치부여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인 듯하여 속이 메슥거렸다거나 찝찝한 뒷맛은 동일하다.


저패니메이션의 대부 미야자키 하야오


자기는 거울도 안보나?(에고~ 인신공격하려는건 아니지만 쩝...본의 아니게..)... 뚱뗑이 할아버지에 맘좋게 생겼지만 이성적 매력이라고는 없는 볼품없는 아저씨의 외양아니던가ㅠ_ㅠ 못생긴 남자가 이뿐 여자 밝히는 심리적 원리인건지..쩝..
여튼 하야오의 외적 아름다움에 대해 가치운운하는 찬사엔 동의하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마르크스가 아름다움에 현혹되지 말라했거늘


메트로 섹슈얼의 패션아이콘 축구스타 베컴

 

지나친 외적 치장을 선호하지도 않고(내가 젤 싫어하는 미술사조는 로코코, 바로크 양식이다. 돈지랄?처럼 보이는 화려함의 빈껍데기가 난무한 골빈양식이라고 생각한다, 지극히 갠적취향일뿐...), 특히 옷이나 스타일에 신경써서 입은 남성, 특히 요즘 메트로 섹슈얼Metro sexual (케이블에서 소개하는 메트로 섹슈얼 남성들의 라이프스타일 소개 프로 : 싱글즈인서울2)이라는 남성 트랜드에는 심적 거부감이 만만치 않지만 동아TV의 세계적 패션디자이너의 패션쇼프로는 눈이 휘둥그레가지고 본다.
그건 명품이거나 비싸보이는것에 혹해서도 아니고, 자본의 상품메카니즘에 비판적이지 못해서도 아니라 미적감성을 자극하는, 패션도 예술의 경지가 가능하구나 하는 그 놈의 직업병이 발동하기때문이다.
대학시절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색채학 강사선생님이 하던말은 아직까지 유효하다.
가끔 패션쇼장에 들르는데 거기가면 자신의 예술적 감성을 자극한다는 거였지. 그리고 배우는것도 무척 많아서 영감이 풍부해진다는 거였다. 지금 그 말에 90%는 동의한다.
내가 좋아하는 패션디자이너는 크리스찬 디올의 존 갈리아노이다.
그의 옷을 보면 패션은 특정국가에서만 태동한 문화가 아니라 서로간의 문화적 영향을 끼치므로 전통성이라는 토대를 다시 느끼게 하고 타국가의 문화에 대한 적극적 관심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또한 칼라에 대한 자극과 패션에 대한 개념을 뒤집는 발상이다.
옷의 칼라는 옷의 재질에 따라 다양한 색깔의 감정을 드러낸다.
옷은 계급을 드러낸다는 것도 사실이다. 선과 옷감의 재질 실루엣은 역사적, 사회적으로 고정화된 계층을 표현해내는데 일조한다.


여튼 사설이 길어졌는데...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성은 개인적 취향이나 그 취향이라는 것도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그것을 끊임없이 소비하게 부추기는 구조적 상업메카니즘이 존재한다. 또한 “패션은 전략이다”라는 슬로건에 고개를 끄덕이듯 사회생활의 많은 부분 외모로 판단을 당하는 경우는 현대에 일상적이다.
하지만 아름답다는 것은 외적인 것만을 규정하는가. 시각적 아름다움은 시각을 즐겁게 한다. 시각에 민감한 직업의 특성상 아름다움은 곧 창작의 원동력이 될만큼의 근본적 자원이기도 하다.


원시사회의 미술_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아름다움의 기준은 시대적이고 역사적으로 변해왔다.


다산(多産)을 의미하는 3등신의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커다란 가슴과 엉덩이만을 강조한 3등신의 돌로 만든 이 조각상은 원시시대 다산, 생식이 아름다움의 최고가치였다는 것으로 해석되며, 중세 근대 그림속에 등장하는 여성상은 손통통, 엉덩이통통한 우유빛의 적당히 살집이 있는 모습들인데 못먹고 생존이 우선하시되던 시대이므로 당연 잘먹고 적당한 풍만함이 여성의 아름다움의 최고기준이었던 것이다.
남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 또한 마찬가지이다.
수렵과 채취에 능한 원시시대에는 육체적으로 강한 남성이 아름답고 여성에게 인기도 짱이었지만 현대에는 어떤가. 육체적 아름다움뿐 아니라 부드러운 미소를 겸비한 꽃미남에 여성들이 열광한다.
아름다움은 드러내는 표현방식도 창작자의 시각에 따라 달라진다.
남성화가들이 미술의 주류를 이루는 지라 누드는 주로 여성의 누드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을 보라.


미켈란젤로/다비드상/대리석조각/1501년~1504년

 

미소년의 누드가 저리도 아름답다는 거. 남성의 육체가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예술작품에서 느끼는거. 그건 놀라움이었다. 미켈란젤로의 성적 취향이 동성애가 아니었다면 미소년의 육체에 대한 아름다움을 각인했었을까? 중세, 근현대 미술의 모델이 대부분 젊은 여성의 누드가 주류를 이루는 건 그리는 이의 시각, 남성화가의 시각에서 유래하는 것 아닌가.


마네/풀밭위의 점심식사/1863년

 

마네의 <풀밭위의 점심식사>는 <올랭피아>와 더불어 당시 샬롱(그림을 전시하는 곳을 지칭)에서는 스캔들을 일으킬만큼 획기적인 소재였다. 대낮 점심을 먹는 야외에서 신사는 점잖게 옷을 갖춰입고 있으나 바로 옆에서 그들과 함께 식사하는 여성은 풍만한 누드의 여성이라는 것. 그리고 그 누드의 아름다운 여성은 보는 관객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다는 거.

이 그림은 남성의 성에 대한 이중성을 벌거벗은 여성의 당당한 시선으로 비판하는 것과 동시에 시대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사실 난 대학실기수업시간 여성모델을 상대로 누드를 그리며 그녀들을 그려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많은 생각들을 했다.
여성의 누드가 왜 아름답다는 거지? 왜 실기과정중에 모델은 여성 누드밖에 없는거지? 모 이런것들... 물론 이유는 명백했다. 남성 전문누드모델의 숫자가 현실적으로 여성보다 작다는 것도 한몫했기도 하고, 남성의 그 멋진? 근육을 제대로 키운 모델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는 상대적 이유들이 학창시절 남성누드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지 못한 거였다.
나중에 약간 아쉬워하며 알게 된 사실 95학번인가서부터 남성모델을 상대로 누드실기가 있었다하니...


여튼 중요하건 누드를 보며 즐기겠다는 변태적? 사고가 아니라 아름다움 들 중 인간의 몸은
최고라는 것. 하지만 헬스로 인한 왕(王)자 근육에, 허리잘룩의 여체만이 아름답다는 건 아니라는 것. 몇해전 김인규 선생님 , 자신의 부부 누드사진을 개인 홈피에 올려 미술선생님으로서의 징계상태까지 갔던 말도 안되는 사건을 기억해보면...
육체적으로, 시각적으로 아름답진 않을 지언정 사랑하는 부부의 진실함은 슈퍼모델의 죽죽빵빵 몸과는 다른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는 것.

 

아름답다는 것은 주관적인 판단이라는 것.
의식화된 주관이건, 객관적 주관이건간에...


선풍기아줌마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우리딸은 참 이뿌지. 젤루 예뻐” 하는 선풍기아줌마의 어머님. 선풍기아줌마의 부풀어진 피부에 사랑을 그득담아 쓰다듬어 내리는 그 "주름진 손"이 내가 보기엔 최근에 느끼는 최고의 아름다움이었다.


SBS 세상에 이런일이에서 사진 가져옴

 

 

헥헥..숨차다..넘 길다...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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