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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죽거리 잔혹사

하나. 쪽팔리면 그때부터 학교생활 쫑이야.

시커먼 교복을 입은 학생들 사이로 교장의 차가 지나간다. 걸음을 멈추고 일제히 “경례!”를 외치며 젊은 시절을 보내는 1978년도 강남의 말죽거리 고등학생들…

폭력을 이길 수 있는 건 또 다른 폭력뿐.

폭력을 쓰지 않으면 쪽 팔린다. 쪽팔리면 그때부터 학창시절은 쫑난다.

말 않듣는 학생을 향해 선생님은 많은 학생들 앞에서 머리를 치며 “니들 같은 놈 때문에 민주주의가 안되는거야!”라고 외친다.

흐흠…폭력쓰는 선생님 입에서 쏟아지는 대사치고는 너무나 아이러니 하다.

교장은 선생님의 뒤통수를 학생 뒤통수 날리듯 가볍게 내리친다.

폭력은 교육되어지는 거라는 감독의 암시다.

남자들의 세계에서 권력은 곧 폭력을 통해 쟁취된다는 암시다. 

폭력으로 교육되어진 남성들이 만들어가는 이 나라.

폭력의 역사는 남성들의 역사다.

남자들만의 학교. 그들에게 질서는 폭력으로 시작하여 폭력으로 끝난다.

잼나는 건 회사에서 남자사원들에게서 느낀건데 공적인건 물론이고 사적인 자리에서까지 서열을 은연중에 정한다는 것이었다. 딱히 물리적 폭력을 쓴건 아니지만 그건 다분히 인간적 관계에서조차 폭력적 방법이 그들만의 소통방식인 것같아 씁쓸했다.

공유하며 소통하는 것에 익숙한 여성들의 세계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방법이다.

  

두울. 남성다움의 상징. 브루스 리.

쌍절권을 휘드르며 얼굴근육은 약간 오버하며 “아뵤~~”를 외치는 그는 지금보면 권상우에 비해 가슴근육도 볼품없는 약간 촌스런 남성상일 뿐이다.

하지만 그 시절 남성들을 매료시키는 캐릭터의 매력은 어디에 있는걸까?

불의를 보면 참지 않고 1대 다수와의 싸움에도 굴하지 않으며 멋진 발차기와 쌍절권을 휘두르며 나쁜놈들을 향해 강한 기압소리를 내지르는 그는 분명 70~80년대 강한 남성적 아이콘의 대표주자로 손색없다. 

남성적 강함을 드러내면서도 불의에 굴하지 않는 정의를 향한 강한 의지, 그러면서도 여성에게는 한없이 순수한 순진남.

이런 모습들은 지적이며 부드러움의 현대 남성상과는 차별점을 가지는 분명 다른 의미의 남성상이다.

공감하며 들을 수 있는 음악이 있고, 기타한곡 정도는 튕길 줄 알며, 비오는 날 자신은 비를 맞더래도 여친에게 우산을 양보할 줄 알며, 불의를 보면 폭력으로 응대하지 않고 현명하게 피해갈 줄 아는 남자…그런 남자가 난 더 좋다.

나쁜 남자가 매력적이기는 해도 관계맺기가 어렵다면 곤란하지 않을는지?

난 오래오래 남자랑 대화하고 싶다.

 >>사족

이소령의 쌍절권으로 불의를? 평정하는 권상우의 모습이 너무너무 시원해보였던건 나도 모르게 폭력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권상우가 쌍절권을 휘두르며 5~8명을 혼자서 다 무찌르는 모습을 보면서 답답했던 속이 뻥 뚤렸다. 햐~~~ 시원했다.

남자들이 물리적 힘을 키우려는 이유가 이건가 보다.

문대성이 발차기 하나로 금메달을 손에 쥐고있을 때 그가 그렇게 남자답고 멋있어보였다면…흐흐흐흐….

 

. 70~80년대 문화

어코스틱 기타로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하나정도는 튕길 수 있어야 유행에 뒤쳐지지 않을 것 같은 시절, 원나잇 티켓으로 하늘을 찌르는 디스코를 추고, 버스안내양 언니가 어렵게 어렵게 손님을 다태운뒤 “오라이~”를 위치던 그 시절…

그 시절은 그래도 낭만이 있어보인다.

왜일까?

지나간 과거는 모두 아름다워 보이기 때문인가?

 

. 잉여인간

“대학을 가지 않으면 잉여인간이야. 잉여인간이 뭔지 알아. 인간 떨거지 되는거야..”

 

대학은 나왔으니 잉여인간은 면제된 듯하지만 난 여전히 잉여인간이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평균인의 반대말은 곧 잉여인간인가보다.

 

다섯. 교육

“인간이 되야지.

서울대 연고대 나오면 뭐하나 고등학교 졸업해도 잘된사람 많다. 인간이 되야지…”

 

모 이런 말 하는 영화속 선생님의 대사를 신뢰할 수 없다. 그건 뉘앙스가 빈정댐때문이다.

자고로 공부잘해야 대접받고 상위 몇등안에 들어야 사람처럼 응대해주는 선생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존재하신다.

입시경쟁만으로도 모잘라 학교마다 서열을 매기자는 움직임이 보수적 교육계와 언론에서 일고 있다는데..

한국사회에서 공교육은 제역할을 하고 있는건가?

 

권상우가 마지막 학교에서 던진 말

"대학민국 학교! 다 *까라 그래!"

 

흐흠....

 

>>사족

권상우 넘 멋찌다!!

그에게는 육체에서 보여지는 강한 남성상과 쿨한 유머를 내뱉는 여유로움,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는 미소년의 남성상. 두가지 매력을 동시에 풍긴다.

물론 아놀드 슈왈츠제네거가 주는 남성적 육체와는 다른, 아담한 근육의 아름다운 선이 느껴지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같은 육체를 지녔다.

 

이미지 연구가 필요한 캐릭터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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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문화 선점하기

"권력"

"권력 선점하기"

 

흐흠....

 

세상을 알아가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나보다.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여러가지를 최근 몇주동안 느끼고 있다.

그리고 다시 나 자신을 재점검해본다.

다시는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일념하에 말이다.

 

회사가 구조조정이라는 명분아래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그 과정이 얼마나 치졸하고 부당하게 진행되는지 겪어보지 못한 난

모...대수롭지 않을 미래였다.

글쎄...그건 자신감과 맞물려 있었고 냉정한 현실부족탓이었다.

 

정리해고 우선순위를 나열해보면...

결혼한 여성

불필요한 부서 및 업무라는 명목하의 업무 수행능력과 무관하게 남성보다는 여성 

그리고 나머지 남성...

 

진짜 책임을 져야 할 이들이 누굴까를 매겨본다.

회사 재정을 어렵게 만든 경영자. 일명 CEO

의사결정권한을 가진 임원 및 간부들.

 

그들은 언제나처럼 건재하다....

 

.......

 

 

 

무기력함을 느낀다.

아무것도 못하고 먼저 빠져나왔지만 그래도 팀원들은 남게 될 줄 알았다. 그러면서 얼마나

안심했던가.

그게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던지. 한치앞도 점치지 못하는 나자신이 야속했다.

그들을 보호할 수 없는 아무힘도 없는 팀장이라는 것을.....

 

 

한국 대기업 30개회사중 5명꼴로 1명이 여성이란다.

예전에 비해 많이 좋아졌다고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아직도 멀었다고 가슴치며

통탄해야 할지 혼란스러기만 하다.

왜냐...아직 대기업을 제외한 나머지 회사들은 여전히 비민주적이고, 남성중심적이다.

아니...대기업또한 껍질을 벗겨보면 여전히...비민주적이고, 남성중심적이다.

여성이 그안에는 아예 없거나, 한치 1년앞의 미래도 보이지 않는 조직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성보다 3~4배로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결과는 불보듯 뻔하다.

여성 임원탄생이 기사꺼리가 되는 한국기업문화내에서는 여전히 말이다.

 

 

지배문화, 남성권력사회에서 여성이 살아남기가 이렇게 힘든가..

아직도 절반의 여성이 넘어야 할 산은 높아보이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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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영화 <우리는 전사가 아니다>

<우리는 전사가 아니다>
감독:박기복

추천의 변:
나는 전사이고 싶지 않다!

현실사회주의가 붕괴하고 자본의 독점이 유력해지면서 우리는
실업자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현실을 살고,일자리를
가진자들의 심리도 언제든지 해고의 가능성을 안고 살아가는
불안한 고용사회, 무한경쟁이라는 미명아래 이어지는 척박한
토양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하루살이 전사인 것이다.

전투에서 살아남는 자만이 부와 권력을,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철저하고 날카로운 부메랑이 그들의 목을 노리고 있다.

우리는 전사가 아니다

그들은 사회의 이탈자이다.

그들은 소외된 소수이며, 버림받은 -가족이든 타인으로부터든-
객체이다.
자의든 타의든 그들은 현실속 자신의 생활에 만족해하기도,
체념해하기도 한다.

"...점점 꿈을 잃어간다..."

정상인의 생활을 하지 않는 그들에게 삶이란 낙관적이지도,
핑크빛 미래를 꿈꿀 수도 없는 그저 하루하루 끼니떼우기 바쁜
일상일 뿐이다. 하지만...

이 사회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의 머리속 깊숙히 박혀있는 물질에 대한 욕망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부랑인의 한마디는 내가 얼마나 이 사회에 잘 적응된
전사이고자 했는가를 인식시켜준다.

난 전사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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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love is river



 

청춘의 반항과 아웃사이더적인 삐딱함.

그에게서 풍기는 매력이 한껏 드러나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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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영원한 소년 <마르크 샤갈>

몇달전부터 벼르던 전시를 오늘에서야 겨우내 보았다.

 

http://www.chagallkorea.com/

 

달리전에서 기대이하의 실망으로 상심이 컸던 난 샤갈전은 한층 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왜냐면 유명작가의 실재작품을 접할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은 내평생 올까말까하는

귀중한 시간이므로 절대로 놓쳐서는 안되는 것 때문이었다.

 

샤갈은 꿈꾸는 소년이었다.

하얀 수염을 달고 있는 할아버지의 머리에서 그려지는 것들에서 세월의 풍파가

느껴지지 않은건 왜일까?

그건 꿈꾸는 자이기 때문에 가능할꺼다.

 

작가는 자신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을 담고, 자신의 철학을 형상화한다.

 

나이가 들어갈 수록 색채의 감각이 점점 어두워지고 강렬해지는.. 어렴풋이

그에게도 속세의 품새가 느껴지지만 그가 그리는 세상은 여전히 땅에 닿아있기

보다는 하늘에 둥둥 떠다닌다.

 

감동적이었다.

 

그에 그림속에서 살고 싶었다.

그가 그리는 마을은 외로움, 미움, 세상의 부정과 한발짝 떨어져 관조의 세계이다.

날개한쪽 달린 시계와 통통한 닭, 뿔인지 귀인지 구분되지 않는 말....

초가지붕의 집들, 광대, 앙증맞은 초생달까지...

그리고 푸근한 그녀...심지어 그녀의 동그란 가슴은 섹시보다는 귀여움이다.

어떤 것도 뾰족한 건 없다.

어떤 것도 둥글게 둥글게...

그의 선은 하나로 강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고 고리와 고리를 이은 듯 잘게 쪼개져서

연결되어있다.

연결된 선은 화합을 의미하는 듯하다. 포용하고 너그러이 이해하는 사랑을 의미하는 듯하다.

샤갈이 색채의 마술사라고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그는 "꿈꾸는 영원한 소년"이다.

육체는 비록 새하얗게 늙어가지만 마음만은 현실이 아닌 풍요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는

맑은 영혼의 소유자. 샤갈...

그가 부러울 뿐이다.

유명한 화가여서가 아니라 평생을 꿈꾸며 살았던 행복한 인간이었기에 말이다.

 

직장인은 절대로 누릴 수 없는 오후4시라는 환상적인 시간에 현대적이고 세련된 전시장을

거닐면서 나는 오늘 한껏 마음의 풍요로운 여유를 느꼈다.

행복하다....

 

경향신문 이무경기자 lmk@kyunghyang.com〉

마르크 샤갈(1887~1985)은 고향 백러시아의 작은 유태인 마을 비프테스크, 그리고 미국 망명기간(1941~1948)을 제외하고 일생을 보낸 프랑스를 소재로 마술사 같은 환상적 색채를 사용해 자전적인 고백 같은 연인들의 사랑과 종교적 주제를 표현했다.

“불어 발음을 잘 못하는 러시아 출신 유태인”이라며 샤갈을 비웃기도 했던 피카소조차도 “마티스 이후 샤갈만이 색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한 유일한 화가이며, 르누아르 이래 샤갈만큼 빛을 잘 파악한 화가는 아무도 없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항상 작품속에 연인 중 한 명이나 팔레트를 들고 있는 화가, 수탉 등으로 자신을 표현한 샤갈은 푸른 색과 빨강, 노랑과 녹색을 주조로 환상적 색채의 하모니를 이루어냈다. 푸른 색은 자유의 상징이면서 유태인으로서 종교적 숭배를 나타내며, 빨강은 유태인에 대한 형제애를 표현하고 땅의 색이기도 하다. 녹색과 노랑은 기쁨과 평화를 나타낸다.

한 시대를 주름잡는 미술사조에 자신을 맡기는 일도 단호히 거부한 샤갈은 파리 유학에서 돌아와 고향 비프테스크 미술학교 교장으로 재직할 당시, 교사의 한 사람이었던 절대주의자(한가지 색으로 전체 화폭을 칠하는 추상주의의 한 사조) 말레비치와도 상당한 갈등을 빚었다. 유태인 극장 패널화 중 ‘음악’ 부분에서 악사의 옷차림이나 배경에 작게 그려놓은 검은 네모와 부채꼴 모양은 말레비치의 추상적 절대주의가 그리 대단할 것 없다는 샤갈의 예술적 자존심에서 빚어진 것이다.

서울시립미술관 10월15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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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의 재료로 만든 기막힌 비빔밥, <화씨 9/11>

최소의 재료로 만든 기막힌 비빔밥, <화씨 9/11>

다큐멘터리 <화씨 9/11>은 어떻게 흥행과 비평, 두 마리 토끼를 잡았나?

<화씨 9/11>은 극영화가 아니다. 마이클 무어 역시 영화감독은 아니다. <화씨 9/11>은 부시 대통령의 가계와 아랍 석유자본의 유착관계를 폭로한 다큐멘터리다. 마이클 무어의 직업도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다큐멘터리 감독은 사회적 표현을 업으로 하는 직업군에서 극영화 감독과 고전적인 저널리스트의 중간에 위치한다. 사실을 전달하는 점에서는 기자에 가깝지만 사실을 내러티브로 구성한다는 점에서는 영화감독에 가깝다. 이 중간자적 위치는 얼핏 ‘사실로 이어지는 내러티브’라는 이상적인 표현양식을 다큐멘터리에 기대해도 좋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불행히도 다큐멘터리는 한번도 지배적인 표현양식으로 등극한 적이 없다. 편집증적 숙련을 겨루는 현대분업사회에서 두 가지 상이한 미덕을 절충한 것은 시장경쟁에서 열성 결합으로 판정나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는 사실의 부담 때문에 극영화처럼 화끈한 상상력을 펼치기 힘들며, 구성의 부담 때문에 파편적 사실을 다루는 고전적인 저널리즘에 비해서는 사실 전달의 효율이 떨어진다. 그러니 어쩌면 다큐멘터리가 표현의 자유 시장에서 배척받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역설이 가능하다. 다큐멘터리가 시장에서 배척받는다는 것은 영리한 자본이 계산해본 결과 ‘영양가 없음’으로 판정났다는 것을 말한다. 대중적 소구의 결여라는 경제적 절망은 한편으로 자본의 영향에서 가장 자유롭다는 정치적 희망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요즘처럼 소수의 이익을 반영하는 자본의 힘으로 서사의 논리가 규정되는 시대에 다큐멘터리의 표현양식은 정치적 실천의 수단으로 그 중요성이 부각될 수 있다. 문제는 생산비용은 높고 소비의 소구력은 낮은 이 표현양식을 갖고 어떻게 시장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즉 ‘정치의 재현’이라는 마케팅 혹은 선전의 방법론이 문제의 핵심이다.

<화씨 9/11>, 다큐멘터리의 정치적 실천과 상업적 소구에 대한 역할 모델

<화씨 9/11>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다. 이 작품은 논픽션 다큐멘터리이지만 칸영화제에서 대상을 받고, 세계적으로 엄청난 흥행 성과를 올리고 있다. 이러한 성과는 마이클 무어라는 인물의 탁월한 재능과 전략 때문이다. 그의 전략은 저널리즘의 논리학에 영화의 수사학을 포개놓음으로써 사실의 재료 맛과 내러티브의 요리 솜씨를 잘 절충해놓는 것이다. 이 글은 <화씨 9/11>을 통해 영화와 고전적 언론이 양분하고 있는 지형에서 다큐멘터리의 정치적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까닭과 그 실천의 방법에 관한 것이다.

마이클 무어는 저널리스트이다. 그중에서도 20세기 초 미국 언론에서 두드러졌던 추문 폭로가(muckraker)와 비슷하다. 추문 폭로가는 언론이 기업화되면서 정착된 일상적 뉴스 생산 공정에서는 진실 보도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으로 독립적으로 취재를 하던 일종의 프리랜서이다. 이들 대부분은 미국의 대자본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는 시기에 사회주의 사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언론이 보도해야 할 사회적 진실을 자본의 악행에 대한 폭로로 생각했다. 하지만, 기업화된 언론 조직 안에서는 진실보도가 불가능하다고 봤다. 그 까닭은, 첫째는 언론자본이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폭로를 용인하지 않을 것이고, 둘째는 날마다 안정되게 뉴스를 생산하기 위해 관공서 중심의 출입처를 주요 취재원으로 삼는 시스템에서는 진실의 폭로에 소요되는 시간을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이 생각한 것이 조직에서 독립해 독자적으로 취재하고 기고하는 작업 방식이었다. 하지만 한때 맹활약을 했던 추문 폭로가는 언론 조직에 흡수되거나 개인의 사생활을 공격하는 스캔들 폭로가로 변질됐다. 이들이 실패한 가장 큰 요인은 사회구조적 비리에 대한 폭로가 기회비용이 크기 때문에 생계의 수단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대 언론의 뉴스 생산 시스템은 더욱 숨가쁘게 일상화됐다. 기자가 고정된 일상적 취재 업무에서 추문의 폭로를 위해 시간을 따로 할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회의 매개 과정은 더 복잡해졌으며 자본이 행사하는 영향력은 은밀하고 정교해졌다. 언론이 전하는 파편적 사실로는 복잡하게 매개되는 요즘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다. 추문 폭로가가 진정으로 필요한 시점은 요즘이다. 하지만 도대체 누가 이 일을 독자적으로 한단 말인가? 무수한 노력과 기술과 열정을 요구하지만 그에 대한 대가는 가난과 “가만 놔두지 않겠다”는 협박일 게 분명한데.

이 위험부담을 영화라는 미디어는 덜 수 있다. 픽션으로 방어벽을 쌓으면서 어떠한 사회적 폭로도 할 수 있는 것이 영화다. 하지만, 영화는 픽션이라는 성격이 방어벽이 되는 대가로 폭로의 메시지조차 픽션으로 수용될 소지가 있다. ‘달라스’라는 드라마의 수용 과정을 연구한 이안 앵은 논픽션을 수용하는 관객은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는 수용 기제를 동원해 선택적으로 받아들임을 밝혔다. 그런 점에서 영화의 현실 폭로는 그 효과가 아주 없지는 않아도 사실이 아니라는 전제 자체로 절반은 줄어들 공산이 크다.

또 한 가지 영화의 현실 폭로가 갖는 의미작용 과정의 문제는 배우의 육체성이 드리우는 기호학적 과잉이다. 영화는 어떤 의미를 전달하든 궁극적으로 배우라는 인물의 연기를 거친다. 그런데 배우는 단순한 연기자가 아니라 인물 자체가 패티쉬의 대상이다. 배우는 이쁘거나 몸매가 좋거나 분위기가 있거나 차분하거나 그도 아니면 개성이 있거나, 하여간 뭔가 한가락한다. 말하자면, 강한 육체성의 기표들이다. 이들의 육체성을 매개로 어떤 역할을 맡기면 그 역할은 이들의 육체성과 연관되어서 관객에게 각인된다. 시인 열명을 모아놓고 보면 시인처럼 생긴 사람 별로 없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정말 시인처럼 안 생겼다”는 말이 흔히 쓰인다. 미디어가 제시한 시인의 상투적인 아우라를 관객이 꾸준히 받아들여서 시인의 판단 준거가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미디어의 상투형이 쉽사리 현실 판단의 준거로 적용되는 것은, 배우라는 우월한 육체성과 시인이라는 우수한 감수성을 하나로 상상하는 것이 욕망의 보편적 행태이기 때문이다. 곧, 사실은 별도로 존재하는 두 가지 탐나는 추구 대상을 한 대상에 존재했으면 하는 인간 욕망의 효율 추구 심리를 미디어가 시선을 잡기 위해 이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결합은 조화가 아니라 욕망의 M&A, 즉 탐욕이다. 조화는 이질적인 것들은 이질적인 대로 공존하는 상태이다. 어쨌거나 이러한 합병을 통해 도드라지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우수한 자질이 아니라 화면 가득 전시되는 배우의 강한 육체성이다. 그래서 미디어 이미지가 궁극적으로 생산하는 것은 강한 육체성을 갈망하는 결여이다. 이 결여는 욕망의 대상을 강한 육체성으로 고착시키기 때문에 매우 다양한 육체성에 널리 퍼져 있는 인간정신에 대한 통찰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작용한다. 하나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영화미디어의 표현양식은 무수한 소통의 장애물을 대팻밥으로 남긴다.

이 기호학적 과잉의 성격을 규정하는 ‘강한 육체성’은 그 자체가 남루한 육체성에 대한 계급적 차별을 강화하는 일종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 상업영화에서 배우의 사용은 재현의 방법론이 정치적으로 타당한가라는 문제, ‘재현의 정치’와 늘 맞닥뜨린다. 이런 점에서 추문 폭로가가 추구한 사회고발을 매끈한 상업영화가 감행했다면, ‘정치의 재현’은 충실하지만 ‘재현의 정치’에서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최소의 재료로 극대의 효과를 끌어내는 무어식 다큐멘터리

마이클 무어는 이 모든 문제를 적당히 피하고 섞어서 최소한의 재료로 기막힌 비빔밥을 만들어냈다. <화씨 9.11>은 부시 대통령과 중동 석유자본의 유착 관계를 그리면서 애꿎게 희생되는 미국의 가난하고 못배운 젊은이들을 희생자로 내세우면서 그 인과관계를 강조한다. 이 점은 추문 폭로가들이 추구한 ‘자본의 구조적 악행에 대한 고발’에 충실한 설정이다. 그는 이 험난한 폭로를 극영화로 꾸미지 않고 직설적인 사실로 말한다. 그가 과거의 추문 폭로가와 다른 점이 있다면 영상의 가능성을 백프로 활용했다는 것.

그는 영상의 시장 잠재력과 관객에게 재미를 주기 위해 다큐멘터리가 요구하는 사항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시장에서 다큐멘터리가 극영화처럼 유통될 만한 흥미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부시에 대한 공격처럼 센세이셔널한 소재가 아니면 안 된다. 그런데 이러한 소재는 취재가 어렵다. 그는 부시 관련 대목의 상당 부분을 기존의 다양한 미디어가 취재한 영상 자료를 기발한 풍자적 해설로 재구성하는 식으로 취재의 부담을 던다. 영상매체가 화면과 내레이션의 결합으로 의미를 만들어내는 점에 착안해 묵은 자료로 아주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한마디로 <화씨 9.11>은 추문 폭로가의 이상을 저널리즘의 상업뉴스 감각과 영상의 수사학을 통해 최소한의 비용으로 실현했다.

이런 스타일의 다큐멘터리에 대해서는 두 가지 비판을 할 수 있다. 첫째는 부시라는 저명한 인물을 가지고 독자의 시선을 잡으려는 환유의 전략, 혹은 선정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또 하나는 영상 자료의 재편집과 나레이션의 결합 관계에 나타나는 과도한 주관성에 대한 비판이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비판은 저널리즘 행위가 객관성을 실현할 수 있다는 엘리트적 믿음에 근거한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모든 저널리즘 행위는 궁극적으로는 사실 확인이 아니라 하나의 의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점을 인정한다면 무어의 수사학은 자신의 의견을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무구한 효율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나는 고전적인 언론의 객관주의와 다큐멘터리의 미학을 근거로 무어의 수사학을 비판하는 그 지점에 역설적으로 다큐멘터리가 정치적 실천의 전략으로 삼을 만한 아이디어가 있다고 본다. 무어는 취재의 노고를 줄이면서 영상의 요구를 최소한으로 충족시키는, 정치적 실천의 도구로 유용한 다큐멘터리 미학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한국의 사회고발 다큐멘터리는 가해자에 대한 폭로보다 피해자에 대한 휴머니즘적 접근을 선호한다. 이건 한국인이 무어보다 인간적이어서가 아니라 가해자에 대한 공격이 훨씬 명징한 논리적 근거를 필요로 하고, 그러려면 취재가 몇 배나 어렵기 때문이다. 정치적 실천의 효과는 가해자에 대한 공격이 더욱 효과적일 수 있다. 무어적 수사학을 구사하는 공격적인 다큐멘터리 감독이 진정으로 많이 나와야 할 나라는 미국이 아니라 한국이 아닌가 싶다.

남재일/ 고려대 강사 commat@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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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갱소장 비디오테이프 목록 v1.0

<극영화>
1. 2019 블레이드 러너
2. 4월 이야기
3. 400번의 구타
4. 8월의 크리스마스
5. 가위손
6. 간장선생
7. 거미여인의 키스
8. 결혼피로연
9. 고양이와 개의 진실
10. 굿 윌 헌팅
11. 길버트 그레이프
12. 그녀를 보기만해도 알 수 있는 것
13.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14. 내 책상 위의 천사
15. 네 멋대로 해라
16.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17. 노마진 앤 마릴린
18. 뉴욕 스토리
19. 데드맨
20. 도플갱어
21. 동사서독
22.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23. 디바
24. 러브레터
25. 런어웨이 브라이드
26. 레드
27. 레옹
28. 리버 피닉스의 콜 잇 러브
29. 리버 피닉스 KGB의 아들
30. 리플리
31. 매트릭스1, 2(리로디드)
32. 메멘토
33. 메이드 인 홍콩
34. 미나
35. 미션 투 마스
36.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37.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38. 볼륨을 높여라
39. 부에나비스타 쇼셜클럽
40. 블루
41. 비디오 드롬
42. 비정성시 (상하)
43. 비포 더 레인
44. 비포 선라이즈
45. 브리짓 존스의 일기
46. 섹스 거짓말 비디오 테이프
47. 쎄븐
48. 스네이크 아이
49. 스니커즈
50. 스모크
51. 슬레이어
52. 식스센스
53. 슬리피 할로우
54. 아름다운 청춘
55. 아메리칸 뷰티
56. 아비정전
57. 아이다호
58. 아이즈 와이드 샷
59. 알파빌
60. 야곱의 사다리
61.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62. 에어리언 2, 3
63. 와호장룡
64. 완령옥 (상하)
65. 올란도
66. 저수지의 개들
67. 전망 좋은 방
68. 정글피버
69. 존 말코비치되기
70. 좋은 친구들 (상하)
71.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72. 죽은 시인의 사회 (상하)
73. 중경삼림
74. 쥴 앤 짐
75. 증오
76. 첨밀밀
77. 카케무사 (상하)
78. 크라잉게임
79. 크레쉬
80. 택시 드라이버
81. 텔마와 루이스
82. 트레인스포팅
83. 파고
84. 파니핑크
85. 파인딩 포레스트
86. 퍼펙트 월드
87. 펄프픽션
88. 피아니스트를 쏴라
89. 프랑스여인
90. 플레이어
91. 하얀궁전
92. 한나와 그 자매들
93. 화양연화
94. 화이트스콜
95.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96. 해피 투게더
97. 허공에의 질주
98.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
99. X파일(극장판)
100. 반지의 제왕1,2
101. 바닐라 스카이
102. 폴락
103. 쉘위댄스
104. 아이다호(무삭제판)
105. 인사이더1,2
106. 도그빌


<애니메이션>
1. 에반게리온
2. 토이스토리 2
3. 나무를 심은 사람
4. 웰레스와 그로밋
5. 프리데릭 벡 베스트 콜렉션
6. 호빵맨 (상하)


<다큐멘터리>
1. 호주제 폐지 (평등가족으로 가는 길)
2. 낙선
3. 나는 행복하다
4. 동강은 흐른다
5. 꼭 한걸음씩
6. 한사람
7. 친구
8. 인간의 시간_미술:강미경
9. 4월9일_미술:강미경
10. 해고자
11. 세발까마귀
12. 또 하나의 세상
13. 기차길 옆 공부방
14. 보이지 않는 창살
15. 우리는 전사가 아니다
16. 명멸하는 불빛
17. 떠나는 농민들, 아기낙타
18. 22일간의 고백
19. 상계동 올림픽
20. 일어서는 사람들
21. 송환
22.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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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 예술가로 살기

으음...

 

예술가의 현대적 의미....

 

나도 한때는 순수하게 예술가로 살고 싶었다.

회사생활 몇년동안 예술가적 삶에서 어영부영 멀어졌고 생활패턴, 하는 일뿐 아니라

생각하는 모든 것들까지 난 평균인에 편입하고자 노력했다.

 

예술가로 살아가기가 현대에 얼마나 힘든가?

독일에서 회화공부하고 있는 과언니는 유명해지려면 자기홍보능력이 뛰어나야 한다고

성토했다.

그녀 또한 37살의 나이에 자신의 경제적 능력이 독립적이지도 않고, 타국에서

5평 남짓의 공간에서 한달한달 최소의 돈으로 생활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꿈꾸는 삶을 살고 있다.

자신을 과대포장하지 않고 성실히 작업하는 작가로 남고 싶어한다.

로비로 자신을 알려 작품을 알리고 싶어하지 않고, 교수에게 아부하여

버젓한 자리를 얻으려 하지 않는다.

힘든 과정이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녀뿐 아니라 이 시대의 예술가들은 자신의 예술세계를 표출한 공간인 작업실도 없고,

주변인들로부터도 사회성결여로 이방인화 되어간다.

그건 자기자신과의 끊임없는 싸움뿐 아니라

생존의 위협과도 싸워내야 하는 이중고이다.

 

MBC2580에서 같은 학교를 다녔던 작가가 나와 퍼포먼스를 하더라.

몇달남지 않는 작업실계약이 완료되면 어떻게 할거냐는 기자의 질문에

"...서글퍼지네.."라고 조용히 내뱉는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야만하는 예술가의 삶이란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잘 알기에 나 또한 일찌감치 다른삶을 살고자 노력했고

그렇게 살아왔다.

꿈꾸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삶이 아름답지만 난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평균인으로서는 자격미달이다.

아니 편입할 수 없다는 것이 더 맞겠다.

누군가를 자꾸 밀어내야 내가 살고, 누군가를 자꾸 짓밟아야 내가 우뚝설 수 있는

서바이벌 게임.

회사생활 몇년 동안 누군가를 밀어내지도 짓밟지도 못했더니 내가 밀리더라..ㅋㅋ

그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그게 현실이 되었을 때 정신이 아찔해진다.

 

난 냉험한 현실에서도 꿈꾸고 있었던 어설픈 평균인이라는 것을.. 

 

 

남보다 돈을 많이 벌겠다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꿈을 표출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이나마

필요해 하는 그들을 보면서 눈물이 났다.

 

 

이 시대 새로운 의미의 고호적 삶.

그들이 죽는날까지 꿈꾸며 살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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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시작해버렸네

진보네 친구들이 블로그라는 사이트를 오픈한다고 했을때

블로그가 모야? 그랬다.

 

지희의 정성어린 설명도 소용엄따.

잘 모르겠다.

 

하지만 글을 쓸 수 있다는 것과 이미지를 배경에 깔수 있다는 정도는 알게

되었고 그건 기쁜일이다.

 

진보블로그를 돌다 "평균인"이라는 주제에 대해 생각해본다.

 

회사생활을 4년정도 하면서

무의식중에 주변의 많은 평균인들과 닮아가려 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며 약간의 경악과 안도를 한다.

 

경악은 나에게도 평균에 들고 싶어하는 남들과 다르면 불안해 하는

안정심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 떄문이었고, 안도는 경악하는 나자신을 보며

객관적으로 나를 판단하고 끊임없이 고민하는 그래서 평균인의

시각만이 아닌 다양함을 인정 할 줄 아는 나자신에게 대견했기 때문이었다.

 

ㅎㅎ

 

요즘 사실 힘들다.

회사를 때려치고 싶어도 실패자라는 낙인으로 매도당할까봐.

나 스스로 아니라고 그렇지 않다고 꿋꿋하게 살아갈 자신이

조금은 부족할 것같아서 이다.

회사를 떄려싶은 이유가 딱히 정당한가에 대한 답변도 잘모르겠기 때문이기도 하다.

 

작년 나 자신을 스스로 성공한 인물이라 평했다.

그건 오만하고 근시안적인 평가였다.

 

정신차리자!

 

어떻게 살아야 후회하지 않는 삶이 될까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30대는 견실함으로 가득차야 40대에 후회하지 않는다지만 그건 잘 모르겠다.

인생에서 완벽한 만족감이란 있을 수 없을 건데...

 

욕심때문이라면 버리고 싶고 그게 아닌 다른 이유라면 그 이유라도 알고

싶다.

끊임없는 질문과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인 인생이 정말 힘들다.

힘들지 않을 때가 올까?

20대에 방황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실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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