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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중독되다

살려주어요. 미치겠따.

내일오전에 디자인미팅이 있는데 현재시각 새벽2시17분까지 미완성...흐흐흐

그런데 난 아직 요기 있따.

 

특히 시일이 급한 오늘같은 시기에 왜이리 웃낀거야 다덜!

진보네 블로거들은 모두 책임 있따!! 피해보상이라도 하라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다..흑흑흑흑...

 

오늘 요기서 정신을 못차린 시발점은 달군땜이다!

달군의 <용산에서 여자만나기>의 댓글향연..동참하고 말았다. 안할 수 엄슬만큼

잼나보였으니까..

잠깐 포로샵을 끄적이다...또 여기저기 기웃기웃하다..

neoscrum의 경상도 사투리가 얽힌 글에, 댓글까지..오늘 난 네오땜에 의자에서

몇번이나 쓰러졌다. 배꼽이 빠질 뻔했다. 화장실 들락하면서도 싱크대앞으로 갈때도 실실댔따.

네오가 감기만화를 올릴때부터 눈치챘어야 하는데..이번 감기가 개그능력을 업그레이드

해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분맹...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행인님..다중이야..다중이...

 

~_____________________~

@__@

 

배꼽빠져라 웃다 눈이 괭해졌다. 뻥뻥뚫린 포로샵그림들을 보면서...

지금도 작업은 안하고 모니터앞에서 계속 실실대고 있다.

넘 잼나서...그러면서 다시 운다..이걸 언제 끝낼것이여~~ㅠ__ㅠ

 

블로그 중독 1차 시기...이 시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면 나의 영혼이 진보네블로그

이곳저곳을 떠돌것이다...안돼...아~~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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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를 취향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

* 이 글은 사슴벌레님의 [난 언제 들키게 될까]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취향를 취향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여성으로서 닫힌 한국사회를 살아가려면 싸우며 부셔야 할 것들이 항시적으로 존재한다.
대학교3학년 동문회에서 생긴 일이다.(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다..하~)
고향 친구들과 재경동문회라는 것을 빌미로 남녀가 정기적으로 만남을 가지던 시기였다.
그런 모임은 주로 젊은 청춘남여가 동향이라는 또는 다른꺼리의 핑계로 자연스럽게 만남을 가지는 것 이상아니다…모 친목도모라는 건 겉으로 내세우는 형식적 치장일 뿐..여하간…그때는 아무래도 좋았다. 나 또한 멋진 선배들을 만나고 귀여운? 동기, 후배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으니..^^
대학3학년 여름즈음, 호기심에 담배를 시작했다.
대학1학년 들어왔을 때 실기실 저쪽 귀퉁이에서 2~3명의 재수삼수언니들이(참고로 우리과는 80명정원에 현역반 재수삼,사수생이 반이었다, 최고령은 32살 아저씨~)모여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내게 충격과 동시에 모든 의식과 사고의 전환이 된 계기였다.
여자도(“가” 아니다. 조사하나는 엄청 차이가 있다) 담배를 피우는구나.. 그게 과연 가능한건가? 얼마나 순진한 대학1년생이었던지…난 경상도에서도 젤루 보수적이라는 도시 안동에서 올라온 순진무구의 모든면에서 무지한 여성일 뿐이었다.
어찌나 꽉 막혔었던지…그렇게 보고 배웠을 뿐이었다.
대학4년은 나에게 새로운 세계로의 경험이었고, 완전히 다른 인간으로 거듭나는 인공의 자궁이었다.
담배를 배우고 한창 맛을 들여가던 시기.
동문회내에서도 동기친구들과의 모임만 따로 가지던 날이었다.
1차, 2차..술의 취기가 약간씩 몸에 배어있던 지라 난 머릿속으로 계산에 들어갔다.
동기에, 술에, 친분정도에..이 정도의 분위기면 친구들에게 커밍아웃?을 해야겠다.
그러고는 양쪽의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담배를 베어물었다.
그 모습을 보자말자 바로 앞의 친구(당근 남자지) 왈 “아니!! 어떻게 여자가 담배를 피워?” 그러고는 담배를 뺐어버린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당황해하고는…정신차리고..
“내 건강을 위해서라면 이해하겠다.하지만 그게 아니라 단지 내가 여성이어서 담배를 피워선 안된다면 넌 나쁜 놈이다!” 후자란다. 어이가 없어서 할말이 없었다.
논쟁(쌈이었겠지? 흐흐흐)을 한 5분, 아니 10분정도는 했나보다. 우씨..도저히 말이 먹히지 않는다. 분위기 나빠질까봐 그 자리를 피해버렸다.
나를 따라온 친구녀석이 난 이해하니 바래다 주고싶다…누구랑 같이 움직이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정중히 거절하고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랬다. 울었다. 얼마나 속이 상했던지..억울하고..밉고…지는 담배피워도 되고 나는 안되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래도 어느정도 지적수준에 사회적으로 관습화된 관념정도는 깨부실만한 아량?정도는 가지고 있을 줄 알았는데…친구가 너무나도 커다랗고 견고한 벽으로 느껴지면서 난 당황하고 한편으로는 슬펐다…그의 옹졸함에..그의 편협함에…그를 이해시킬 방법을 모르겠기에…
그 사건이 있는 1년인가 후에 그녀석은 정중히 나에게 사과를 했다.
여성학이라는 것도 배우고 나름의 의식을 깨쳐가면서 여성이 담배피는 것이 문제될만한 꺼리가 아니란 걸 알았고 자신의 행동이 잘못된 거라는 걸 깨달았다는 거였다.
그의 사과를 받아들였고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며 둘은 웃을 수 있다.
한국여성이 길거리에서 담배피는 것은 경범죄에 속한다고 한다.
지붕이 없는 곳에서 여성이 담배를 피우는건 죄라는데…믿거나 말거나…
웃을 뿐이다.
하지만 웃기만 하기에는 억울하게 당하는 경우가 아직도 여전히 잔존한다.
호주에 있을 때 자유로움과 물밀듯이 밀려오는 행복감을 느꼈던 건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며 돌아다니는 거였다. 그들은 실내에서 담배 피는게 오히려 불법이다. 그리고 여성이 거리에서 담배피는 것이 희귀한 풍경이 아닌지라 누구하나 거들떠 볼일이 아니다. 조그마한 동양여성이어서면 몰라도..^^
하지만… 한국의 중심가에서 여성이 담배를 피며 돌아다닐 수 있는가?
가능하다. 빰을 내놓고는 말다..ㅋㅋ..모르겠따..혹시 경찰이 잡아가진 않을까?
몇 년전 서울역앞에서 노동자대회 시위가 있었다. 시위인파속에 묻혀 서울의 중심가에서 담배를 베어물었을 때(ㅋㅋ 사실 부끄럽지만 시위나갈때마다 길거리행진때는 꼭 담배를 피웠던거 같다. 그때 아니면 길거리서 어찌 감히? 담배를 피겠는가...흐흠..) 저쪽 어딘가에서 시위를 구경하는 중년 아저씨의 시선이 느껴졌다. 순간 누군가가 길거리에서 담배피다 뺨맞았다는 얘기가 머리를 스쳐갔다…그 아저씨와 좀더 떨어지게 멀리 피해 걸어가는 나를 보면서 ‘내가 왜 이래야하는거지? 언제까지?’
미례씨가 댓글로 한가위 가사노동으로 아주버님께 잔소리?를 들으며 “몇 년동안 이렇게 살아야 할까요?” 그 말과 일맥상통한다.
요즘 홍대앞 반경1킬로내에서 통쾌한 풍경은 담배피는 여성들을 가끔 만난다는 것이다.(아직도 1킬로라는 벽이 잔존해있지만...)

대학시절 캠퍼스내 벤치에서 여성은 뒤돌아서 담배를 피웠다. 하~ 격세지감을 느낀다. 그리고 짜릿함을 느낀다. 그녀들에겐 그럴 권리가 있다. 너무나 당연한…
흡연은 취향일 뿐이다.
그런데 취향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 사회는 무언가?
언제까지 여성은 이렇게 억울해야 하는건가? 회사를 다니는 여성에게 담배피운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인사고과에 마이너스로 반영된다.

외국계회사에서 마켓팅이라는 잘나가는 부서에서 일하는 유부녀친구, 우리나라에서 내노라하는

최고의 상업빌딩(? Star tower)으로 이사가면서 회사에서는 담배도 안핀다..못피는걸꺼다..

그나마 그전 회사에서는 화장실에서라도 피웠는데 그 곳에서는 시선이 아무래도 더 부담스럽단

다. 좀더 권위적이고 좀더 잘 갖추어진 권력앞에서는 여자가 더 움츠러들 수 밖에 없는 것이

지금 한국 여성의 현위치인 것이다. 옘병할...그전 글에서도 썼듯이 최근다녔던 20층되는 울빌딩

서도 드러내놓고 담배피는 여성은 꼴랑3명였다. 담배피는 그녀들은 어디로 갔을까? 으으으...

하지만 이런 불평등한 사건, 벽들로부터 머리썩히면 나만 손해다. 나만 바보된다.

가벼운 위트로 웃어 넘겨야 한다....
나 또한 가족에게는 담배에 대한 커밍아웃을 하지 못했었다.(지금은 건강상의 이유로 담배를 끊은지 3년째다) 싸우기 싫어서 말다. 싸움이 하루로 끝나는게 아니라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 같은 두려움에 말다.
여성은 일상적인 투사가 되어야 한다.
돌처럼 굳어버린 그들의 머리를 어떻게 깨부술까?
딸들의 반란을 꿈꾼다.

 

>>사족
ㅠ_______________ㅠ
낼까지 나와야 할 작업이 한둘이 아닌데도 난 아직 이곳에 있구나..어쩔꺼나

 

또하나...트랩백을 걸었을 때 링크된 글의 제목을 고치면 원본글의 제목, 블로그main 포스트

리스트의 제목도 바뀌었으면~~진보네에 바라는 자그마한 희망~가능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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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놀이

 

그리자놀이

 

사물

그림자

 

주체

객체

 

진짜

가짜

 

진실

거짓

 

빛에 의해서 그림자 탄생하다.

그러나 그림자의 근원인 사물이 없다면 그림자 존재가능한가?

동전의 양면...원인과 결과...

 

여기서부터 시작해야겠다.

200410020232

 

>>사족

텍스트는 작업을 시작해보려는 강한의지의 발산으로 슬로건같은거다..허허 별걸 다한다..

...그리고 사진은 뭔가 구체화된 형상으로 보여주고 싶다는 엉뚱한 욕심때문에 찾아올린건데...

오른쪽귀퉁이.. 어둠속에서 뭔가 보인다.

안경에 비친 상대방의 그림자이다. 왠지 "그림자놀이"와 어울린다....

사실은 술마시다 꼬장 부리는 장면인데..앞뒤 상황들을 잘라버리니

약간의 흥미로운 장면으로 변신.....쩝...보고싶네..저 인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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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의 미술세계

동시변조:감미로움과 숭고함을 위한 디지털 가상실험

백남준&노만 발라드/2000년/로뎅갤러리

 

백남준 화집을 뒤적이다 오랜만에 감흥이 밀려온다.

그걸 같이 느껴야 한다.

 

2000년 그의 개인전이 로뎅갤러리와 호암갤러리 두곳에서 동시에 전시되었다.

백남준은 책에서나 봐오던 작가였다.

한국작가로서 유명세를 탄 유일한 미술가..비디오미술가, 로봇TV.. 그 정도의 기본적

지식과 무심함으로 전시장에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전시장에 발을 디딤과 동시에...난 그에게 매료될 수 밖에 없었다.

지금이야 설치미술이 주류미술로 자리잡아 입체적 작업에 대한 거부감이라든가 생소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 대학을 다녔던 당시 설치미술이란 초기 생성기정도였고

나또한 평면이 아닌 입체, 캔버스와 물감이 아닌 다양한 재료들에 매료되어 붓을 꺽고

새로운 재질들을 찾아 실험하던 때었다. 설치미술이 주류로 등장할 것이라는 예감은 적중했고

난 지금 그 작품들을 감상하는 입장에만 있으니...씁쓸할 따름이다.

여튼...

설치미술, 그 이전에 비디오미술이 있었고 더 이전에 플럭서스, 아방가르드 미술, 다다이즘의

뒤샹이 있었다. 남자변기를 전시하면서 미술계의 파문을 일으켰고...그 이후 독일의

프랑크프르트에서는 몇명의 작당들이 모여 피아노를 연주하지 않고 때려부시는 등의

퍼포먼스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 작당들 중에는 백남준이 있었다.

과선후배들이 독일로 공부하러 몰려가는 이유중에 하나가 백남준때문이라면?

많았다..지금도 독일에 수두룩 빡빡...^^

 

TV정원을 보면서 황홀했다.

미디어의 차가움보다는 빛과 칼라의 움직임이 오히려 포근함을 주었다면?

그랬다. 21세기 미디어의 홍수속에 살아가는 현대인의 노스텔지어처럼 보였다.

그곳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행복을 느꼈다면 난 어쩔수없이 미디어에 길들여진

세속인이고 전체화된 기계속의 초라한 너트가 될지언정...황홀했다.

또 맛볼 수 있다면 간이라도 내놓겠구만..ㅎㅎ

백남준미술관 추진위원회가 국내에서 추진중이라 하니 모...기대해야지..

참!! 가끔 빌딩로비에서 백남준 작품을 볼 기회가 있지만 상시적으로 전시하는 것이

아닌 경우가 다반사여서 맥빠질떄가 많았다.

그런데 얼마전 삼성동 포스코 빌딩앞을 지나는데 건물안에서 반짝반짝하는 무엇이

내눈에 띈것이다. 낮에는 몰랐는데 밤이 되니 빛나는 작품들때문이었다.

황홀경에 한참을 서있었다. 기회되면 저녁무렵 포스코앞을 또 서성이고 싶네...^^

 

글 맨아래는 백남준의 작업실을 훔쳐볼 수 있는 기회가 있슴돠~


3원소/2000/로뎅갤러리


3원소

 

밤이 되면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포스코빌딩에 설치된 작품은 요거...큰 그림이 엄따..우씨..

비디오깔데기

 


프로젝션 스크린/2000/로뎅갤러리

 

 

<백남준과 멀티미디어>

정용도/백남준미술관 건립추진팀 학예연구원

 

들어가는 말
백남준으로 인해 20세기 세계 미술의 역사에서 비디오와 TV가 예술작품의 매체로 편입되었고, 예술작품 창조의 중요한 도구이자 재료가 되었다. 그리고 현대미술의 멀티미디어 아트, 뉴미디어 아트 논의의 시발점에 언제나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가 존재한다. 

 

I. 예술작품의 새로운 조건들
백남준은 동경대학교에서 미학과 현대음악을 공부했다. 그의 예술적 경향이 음악에서 시각예술로 변화하는 것은 1958년 콜론(Cologne) 대학에서 존 케이지(John Cage)를 만나고 나서 시작되었다. 현대음악의 거장으로 무조음악의 창시자 쉔베르그(Arnlold Shoenberg)의 제자인 존 케이지는 1950년대에 동양철학의 선불교를 공부하면서 우연성(chance; 찰나)의 개념을 그의 음악의 대주제로 도입하였다. 그는 선을 그의 음악이론을 정립하는 도구로 이용하였는데, 그에게 음악은 어떤 인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받은 인상을 지워버리는 불교적인 그런 것이 되었다. 결국 존 케이지는 소음일지라도 모든 소리가 동등한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는 백남준이 그의 비디오 작품에서 TV속의 이미지를 조합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었다. 즉 백남준 작품의 영상 이미지들은 전통미술에서 볼 수 있는 완성된(defined) 이미지 혹은 영화와 같은 전통적인 영상 작품들의 속성인 완결된 이야기가 관객들에게 주는 결정적인 인상이 아니라 계속 진행적인 가변적 상황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관객들은 그의 작품을 통해 어떤 고정된 강한 인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과 과정으로서의 이미지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케이지의 우연성 개념이 백남준에게는 이미지의 우연성과 이미지들의 우연한 조합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백남준의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이전에 백남준 작품의 기반이 되는 미학적 배경과 기술적 발전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선 현대미술의 본격적인 출발점은 프랑스 작가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으로부터 기원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뒤샹은 3가지 점에서 현대미술에 중요한 방향성을 제시했다. 첫 번째는 일상 오브제의 도입을 통해 그동안의 예술이 향유하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19세기까지의 전통 미술이 대부분 사회적 권력 계층의 고급 취미(taste)를 대변하는 미술이었다면 뒤샹의 미술은 그런 고급 취미를 거부하며 일반 민중의 일상적 삶에 예술적 상징성과 역할을 부여했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found object(남성소변기, 부삽, 자전거 바퀴 등 우리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용도 폐기된 물건들)는 현재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현대미술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을 내포하는 상징적 지표이기도 하다. 이런 뒤샹의 시도 이후 20세기 현대미술에서 나타나는 일상으로의 복귀는 우리 일반인들이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권리와 의식의 지평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기술매체는 기술매체들은 20세기 이전의 예술처럼 우리의 존재를 숨막히게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마치 기술은 우리 인간들에게 마치 신화처럼 군림한다. 그러나 기술이 발전하면서 그동안 분리되어 이용되어왔던 매체들이 하나의 매체로 통합되어 가는 과정에 있고, 이것을 가장 잘 대변해주는 용어는 멀티미디어다. 멀티미디어는 그동안 각각 단일 매체에 의해 재현되어(represent) 왔던 이미지, 사운드, 텍스트의 세 요소가 하드디스크나 다른 기술매체를 통해 하나의 통합된 형식으로 재현되는 것을 말하는데, 이런 통합과정을 통해 기술은 다시 우리 인간의 삶 속으로 복귀하게 된다. 그리고 기계적인 신호를 통해 정보를 전달하는 아날로그와 기술적인 코드 시스템을 통해 정보를 전달하는 디지털과의 차이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것은 멀티미디어의 범주에서 볼 때 다른 문제가 된다. 백남준의 작품은 멀티미디어 작품의 가장 기초가 되는 작품이고, 그는 멀티미디어 아트를 통해 이 세계가 예술적으로 하나의 커뮤니티로 재탄생할 수 있는 그런 꿈을 보여주었다.

백남준의 오브제 작품은 크게 3가지 범주로 묶어볼 수 있다. 우선 초기 60년대 작품에서 그는 시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1960년대 TV-Clock(1963), Moon is the Oldest TV(1965) 등의 작품들에서 백남준은 그동안 미술의 대주제였던 공간적인 구성(composition)의 문제를 시간성(temporality)의 문제로 전환시킨다. 즉 그는 이런 작품들을 통해 미술의 대주제를 시간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그리고 1970년대 TV-Buddha(1973) 등의 작품을 통해 백남준은 이미지의 문제를 다룬다. 카메라에 의해 TV 속에 나타난 자신의 이미지를 바라보며 앉아있는 부처와 TV 속의 부처 이미지와는 어떤 관계가 설정된다. 그 관계는 부처의 가르침 “空卽是色 色卽是空”의 논리를 응용한다면 이미지의 비존재성과 물리적인(physical) 실제 부처는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이 두 존재 사이에 남는 것은 결국 두 존재가 지향하는 의식의 장(field)일 뿐이다. 이 작품이 만들어내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환경, 삶의 장소에 대한 의미와 무의미 - 위계적인 질서는 없고 단지 뒤섞여 있을 뿐인 - 의 복합적인 상황이다. 그러므로 모든 소리가 동등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케이지의 신념처럼 그리고 뒤샹(Marcel Duchamp)의 모든 물건들이 예술작품의 재료가 될 수 있다는 작가적인 행위처럼 백남준에게도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모든 상황 자체가 예술일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1970-80년대 TV 위에 화초를 놓고 그것을 카메라로 비추어 TV화면의 이미지로 나타나게 한 Real Plant/Live Plant(1978), 한대의 TV에 물고기 어항을 만들고 그 어항을 카메라로 비추어 옆에 놓여있는 TV에 이미지를 나타나게 한 Real Fish/Live Fish(1982) 등의 작품은 TV의 탄생과 관련된 정보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정보는 예술작품과 달리 시간이 지나면 그 가치를 잃는다. 그러나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회화 조각 같은 예술작품은 시간이 갈수록 그 가치를 더해간다. 이런 ’80년대 작품에서 백남준이 다루는 주제는 모순을 내포한 듯 보이지만 실제적으로는 현대미술의 딜레마인 경제적 가치의 문제와 더불어 의미부여의 가치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의미가 부여되는 정보는 경제적인 가치가 더욱 커지는 것이고 다양한 해석과 응용이 가능한 정보는 말할 것도 없이 가장 중요한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게 된다.

백남준이 그의 작품을 통해 제기한 시간, 이미지, 정보 이 세 가지 화두는 현대 멀티미디어 아트에서 작품의 성격을 좌우하는 가장 기본적인 구조틀(framework)이 된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그는 우리에게 앞으로의 미술이 그동안 인간이 창조한 문명의 모든 가치들을 종합하는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화두이자 비전을 제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작품 중에서 현재의 우리 삶과 관련하여 더욱 시대를 통찰하고 또한 미래를 관통하는 작품들은 1973년의 Global Groove, 1984년의 Good Morning, Mr. Orwell 등 TV와 인공위성을 통해 생중계되었던 영상작품들이다. 그의 전자고속도로 개념을 이처럼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작품들은 현재 우리가 인터넷을 통해 서로 이미지와 사운드 정보를 자유롭게 주고받는 상황을 예감할 수 있게 한다. 이런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가상현실 개념을 생각해볼 수 있다.

영상작품은 예술적인 창조물을 물질적인 매체가 아니라 물질적인 기반을 가지지 않는 매체를 통해 관객들에 전달한다. 가상현실의 가장 핵심적인 특성은 그것이 물질적인 특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은 언어적으로 모순적인 어의(oxymoron)를 가지고 있다. 가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말하고 실제는 우리가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그런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가상현실은 가상적인 것이 우리 인간의 감각기관을 통해 현실과 전혀 다름없이 느낄 수 있는 그런 것이어야만 한다. 현실을 모방한 이미지는 가상현실로서의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 그러므로 가상현실은 예술작품이 작가의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수단인 것처럼 예술적 창조의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20세기 중반 독일의 철학자 벤야민(Walter Benjamin)은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라는 글에서 사진의 발명이후 예술작품의 고유성(authenticity)이 사라지고 작품의 유일무이한 존재성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는 아우라(aura)가 사라졌다고 말한다. 특히 사진으로 인해 전통적인 예술작품이 가지고 있던 제의적인 가치(the ritual value)로부터 전시가치(the exhibition value)로 중요성이 옮겨갔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런 상황을 종합해주는 개념을 여론의 형성이 가능해지는 ‘정치성’이라고 말한다. 즉 새로운 매체의 발명은 새로운 개념의 탄생을 가져오거나, 그동안 존재하고 있었지만 다른 것들과의 의미연관적인 고리를 발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해석될 수 없었던 것들에 새로운 중요성을 부여할 수 있게 해준다는 요지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백남준이 창조한 작품들이 우리의 문화에 새로운 미학적 개념들이 가능하게 하고 또한 인간의 미래를 기존의 시각과는 다른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게 해준다는 면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백남준의 오브제 작품, 영상 작품들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갈 세계에 대한 새로운 가치체계의 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II. 백남준미술관과 뉴미디어 아트의 예술적 비전
경기도 용인에 백남준미술관이 설립된다는 것은 한국에서 태어나 일생을 전세계를 대상으로 자신의 예술적 창조성을 끊임없이 발휘해 왔던 한 작가의 예술적 오디세이를 자신의 고향인 한국 땅에서 정리한다는 면에서 예술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백남준은 1932년 일제 식민지의 한국인으로 태어나 유럽과 미국을 주요 무대로 자신의 예술적 여정을 시작했고 현재 전 세계 미술사 서적의 마지막 장을 장식하고 있는 작가가 되었다. 백남준의 예술적 여정의 특성은 새로움을 향한 끊임없는 항해로 자신의 개별적인 인간적인 가치들을, 즉 한국인으로서의 존재론적, 인식론적 특성을 예술이라는 수단을 통해 글로벌한 차원의 언어로 변화시키고 또한 자기 개인의 생각들을 보편적인 예술언어로 끊임없이 재해석하는 그런 것이었다.

백남준의 예술작품이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 사람들의 인식론적 지평을 끊임없이 넓히는 그런 작업이었다면, 그가 단순히 한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상당한 행운이다. 언어와 사고의 일치라는 다분히 상식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특히 그의 모국어가 한국어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통해 세계의 예술적 언어를 우리 한국의 시각을 통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술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삶 속에서 보고 듣는 수많은 대상들에 대한 해석의 문제로 넘어가면 우리는 그의 작품들을 통해 문화적 상식을 터득할 수도 있는 것이다.

백남준의 작품이 시각문화의 지평과 개념을 변화시키고 또한 넓혀놓았듯이 엄밀한 의미에서 글로벌 스탠다드의 백남준미술관 설립은 우리 한국 미술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백남준미술관이 단지 그의 주요 작품을 한 곳에 모아 놓은 수동적 의미의 미술관(Mausoleum)이 된다면 불가능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하지만 백남준미술관이 젊은 작가들이 그들의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 장소로서 그리고 새로운 뉴미디어 아트의 창조가 가능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작가들을 위한 전문 예술교육이 실현될 수 있는 장소가 된다면 이는 한국 미술의 미래를 위한 최고의 가치 있는 투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백남준미술관이 미술관의 기능은 물론 새로운 예술작품 창조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가장 첨예하게 창조성의 본질과 예술적 비전을 실험하고 또 실현하고 있는 미국의 “MIT 미디어 랩”, 독일의 “ZKM” 같은 전시와 예술교육, 연구를 병행하고 있는 미디어 아트센터의 발전과정과 경험으로부터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어야만 한다. 

 

나가는 말
백남준미술관은 단순히 미술관이 아니라 한국 문화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비전을 제공하는 종합적인 뉴미디어 아트의 연구 장소로서의 정체성을 만들어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백남준미술관의 설립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기전문화예술 2003년 3•4월호>


TV시계/2000/로뎅갤러리

 

백남준 온라인 전시장~

http://www.hoammuseum.org/exhibition/paik2/exb/laser/index.html

 

사족

예술가의 작업실_백남준

대학재학시 작업실도 모 과히 이곳 풍경과 다르지 않아서 너무나 정겹다.

작업실=공구실. ㅋㅋㅋ

예술이나 회화제작과정에 대해 환상은 버려라. 두들기고, 조이고, 붙이고...

이런곳에서 물론 환상적인 작품이 탄생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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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그들만의 세계를 엿보다

남성, 그들만의 세계를 엿보다

 

한가위 관련한 가사노동사례들을 보다 나도 모르게 얼굴에서 웃음이 빙그레…
나이들수록 남성은 여성호르몬이, 여성에겐 남성호르몬의 분비율이 높아진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이사님두분과 상품기획팀장과 술한잔 걸치던 날..
술을 마시게 된 계기는 상기팀과 울팀의 불미스런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소프트웨어그룹장이신 이이사님이 나와 상기팀장을 위한 화해?의 장을 마련한거였다.(고마워요~이사님~)
이유가 어쨌건 그 술자리는 나에게 그들만의 세계를 탐색할 수 있었던 아주아주 잼나는 기회였다. 이사님중 한분은 대학교수님이신데 일년동안의 안식년을 울회사에서 보내고 계신 아주 능력좋은? 교수님이셨다.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기혼이었고 어쩌다 자신들의 결혼생활에 대한 토로로 대화의 주제가 번져가고 있었다. 교수님이 그러셨다. “내 이상형은 절대 지금의 마누라가 아니야!” 나이가 들수록 사모님은 드세지고 자신은 점점 여성화되고 있다고…자기는 여자갔다고…싸움은 언제나 자신의 패배로 돌아오고 2년동안 섹스한번 안하셨다고 조용히 말씀하신다…허? 내가 있다는걸 까먹으신건가? 아님 내가 넘 편하셨던걸까? 난 모른척하면서 속으론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수야 없지..귀를 쫑긋하며 술잔을 들고 술만 마시는 척하고 있었다. ㅎㅎ
후회하고 계시다구..젊은 시절 구미공단의 연구소에서 일했고 아주 좋은 기회를 놓친걸 후회하신다..그게 뭐냐면..구미공단 여공(이 단어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런식의 표현으로 얘기가진행된지라..흐흠..)중에는 아주 예쁘고 참한 여자들이 많았고 그들과의 섬씽도 가끔 있어서 맘만 먹으면 결혼까지 골인할 좋은 기회가 있었다구. 그 좋은 기회를 놓친걸 후회한다구..그게 무슨 소리냐면 여공은 대부분 고등학교 갓 졸업하구 사회로 진출한 10대후반의 꽃다운 청춘이었으며 얼굴들도 예쁘기 그지 없었고 그렇다면 대학졸업자이며 연구소직원인 자신과의 결혼은 신분상승의 기회를 얻는 것이고 그런 여성들은 자신을 하늘과 같이 떠받들어 줄꺼라는 환상을 갖고 계신 거였다. 쉰이 다 되어가시는 교수님의 여성에 대한 환상은 자신의 말을 신처럼 떠받들어 주고 자신에게 무조건 순종하는 여성이었던 거였다. 그런 여성이 있을까마는…그래서 교수님이 더 측은하게 보였다. 아직도 그런 허황한? 꿈을 꾸고 계시다니…정신차리세요! 한마디 던지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래도 고마웠다. 교수님이. 그런 얘기를 자연스럽게 해낼 수 있다는 것에….^^

사실 난 그 자리에서 몇마디도 못하고 듣기만 하는 처지였다.
왜냐…남성들은 얘기의 주제를 자신이 잡지 못하면 상대방에 뒤쳐진다는 이상한 대화의 권력욕?에 대한 강박이 존재하는지 사적인 자리에서도 어떻게든 상대방보다 더 많이 떠든다. 그렇지 않으면 팽당한다. 물론 모든 남성이 그렇다는 것도 아니고 가끔은 여성 또한 비슷한 경우가 있지만 30년이상 남성과의 관계에서 느끼며 얻은 결론 하나가 있다면 바로 이거였다. 그래서 더더욱 남성들과의 자리에서는 의식적으로 대화의 주제를 이끌어가려 노력하거나 아님 어떻게든 대화에서 제외되지 않으려는 내 모습이 익숙하지 않을 떄가 많았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상기팀장 왈 대뜸 “마르크스 이론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오호라…회사동료들과의 마르크스론이라…혹시나 해서 질문 “지지정당은 어딤까?” “열우당이었는데 지금은 열우당보다 민주노동당이란다. 그래서 또 질문했지 “ 진성당원이시겠네요?” “아뇨! 당원은 아직…” 모 그러고는 또 떠든다. 남의 말은 별로 귀기울이지 않는다. 그가 하고자하는 핵심이 무엇이었는지 지금은 가물가물하지만...모 이런 식이다. 마르크스이론과 지지정당간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져 그를 판단해서는 안되겠지만 그에게 마르크스이론은 자신도 한때는 이런 공부했고 내가 이런 사람이다…과시하는 거다..그런 식으로 느껴졌다…그에게 사회과학 이론은 과시용이지 진정성을 가지고 접근할 만한 이론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그런 인간 젤 싫어한다. 그냥 후까시잡느라 화려한 배경처럼 남들이 하는 거 다 해보고 싶은 모 그런 심보. 먹물들의 자기과시용 지식일 뿐 사회구조적 모순을 조금이나마 바꾸려는 의지는 별로 엄따. 나혼자 잘먹고 잘살면 되니까… 넘 부정적으로 그를 바라보는건지 몰라도 잠깐동안이나마 느껴지는 그의 모습은 그런거같다. 그런 인간 정말 싫어한다…지금은 회사에서 팀장에서 그룹장으로 승급했는데 목의 기부스가 장난아니라고 한다..크흐흐 어디가겠어…
여튼 그날은 최고였다. 교수님과 상기팀장은 주거니 받거니 둘만 떠든다. 가끔 그룹장이신 이이사님은 맞장구 쳐주고 대충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난 할말이 없다. 끼어들 분위기도 들수도 엄따. 왜? 내 얘긴 안들으니까..또 공감갈만한 주제가 별로 없어서였다. 그러니 그들의 주제에 끼어들지도 못하겠다. 그래서 소리쳤지. 그건 남성들의 역사임돠! 여성들에게는 기회도 없었어요~ 술취했었나보다…그 자리가 넘 갑갑하니까..나두 듣고만 있기에는 그 인간들이 정말 미웠으니까…지들이 잘나면 얼마나 잘났다고 자신들의 지식을 과시, 치장하냔 말야! 그게 잼있었던지 교수님이 꺼내든 주제가 여성들의 놀이문화와 소통방식에 대한 거였다.
여자들은 남편 회사 보내놓고 자신들만의 수다문화 또는 끼리문화가 있으니 나이들어서도 친구들과 만나 외롭지 않게 산단다. 그런데 중년의 남성은 회사나 경제활동을 그만두게 되면 그때부터 할일이 없어진단다. 하물며 친구들과 만나 산행을 해도 대화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산을 오르기 전에서부터 내려오기까지 했던 대화내용이 딱 한마디란다. 아무말도 안하고 산을 다 내려와서는 “잘가라~” 허걱!
충격이었다. 사적대화에 익숙하지 않은 남성들의 비극이었다.
술자리에서 그렇게 많이 떠들어도 자신의 개인적 주제를 가지고 얘기는 거의 하지 못한다고…주로 역사나 사회, 정치, 경제가 주제다. 그건 자신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과시용이다.
나누기 보다는 주로 자신의 견해만 얘기한다. 대화를 하고 있지만 나누기보다는 일방적 떠들기 이상 아니다…넘 심한가?…
40대이상의 중년남성들을 생각해보면 측은함이 보인다.
소외된건 여성이라는 생각만 하다 그들이 보이기 시작한건 최근 다닌 회사의 이이사님을 보면서 느낀거였다.
사오정이라는 사회현상이 보여주듯 그들은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사적관계에서도 팽당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회사에서 팽당하지 않기 위해 엉덩이 붙이기도 힘들만큼 많은 일들을 소화해내는 그들에게 일없는 자신은 앙코없는 찐빵이 되는거다.
아침9시에 출근해서 밤12시이전에 가면 다행이고 새벽2시3시에 집으로 들어가는 그들은 일요일을 제외한 나머지는 거의 회사에서 세월을 보낸다.
그러다 스트레스는 약간의 취미생활에(경비행기 운전이 취미셨다..바쁘지 않을땐 한달에 두번정도는 비행하러 가신다고..), 술에, 노래방에, 가끔 단란주점에서 해결하고 아주아주 가끔 2차도 나간다고(요건 여자개발자들에게 살짝 들은 얘기)..
여튼 가족과의 관계라곤 있을 수가 없다. 제발 자식들과 일주일에 한시간만이라도 보내셔야 나이들어서 자식들에게 왕따당하지 않으십니다~라고 해봐야 방법을 모르셔서 못하시겠단다. 그럴맘이 별로 없다…그러다 나이들어 마누라에 자식에 퇴직금 던져주고 나면 힘없고 외로운 중년이 되어있을꺼라는 미래의 자신모습이 보이면서도…그들은 한국산업의 중추역할을 해왔지만 앞만 보고 달리다 어느날 달리기를 멈춤과 동시에 모~~든걸 멈추게 되는 외로운 runner처럼 보였다. 측은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찍고 싶다는 생각을 작년 내내 해왔지만 아직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모..좀 다른 얘기지만…화성남자 금성여자에는 잼나는 내용이 있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의 남녀 반응에 대한거다.
남성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만의 동굴로 들어간다. 여성이 왜 그러느냐 재촉하거나 들추려고 하면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켜 더더욱 자신만의 동굴 깊숙이 빠져 든단다. 반면 여성은 나누기를 원한다.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나누고 공유하면서 차츰차츰 해결의 방향을 찾고 마음을 다독인단다.
재밌다.

아쉬운 건 남성들이 자신만의 세계에만 빠지지 말고 타인과 나누는걸 배워 좀더 풍성한 노후에 대비하는건 어떨까 하는 발칙한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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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광주비엔날레 감상기

2002년 지희와 2박3일을 기약하며 광주로 향했다.

묵어있는 미갱의 싸이에서 다시 퍼왔다.^^고기는 폐허가 된 사막같다..ㅋㅋㅋ

올해도 시간이 허락한다면 광주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희망하면서...

 

 

둘째날, 비엔날레를 보다

Project1 : 멈춤 PAUSE

Project2 : 집행유예 Stay of Execution

Project3 : 저기, 한국의 이산지대 THERE, Sites of Korean Diaspora

Project4 : 접속 Connection

4개의 프로젝트로 구성되다.

 

“길을 찾기 위해 길을 잃는다"


광주비엔날레 큐레이터 성완경씨가 프로젝트1의 주제 <멈춤PAUSE止>에 대해 가장 간략하고 압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국제미술이벤트, 또는 관성에 대한 비판적성찰과 대안모색에 대한 긴급한 환기를 위해 이번 주제를 채택했다고 한다.

 

PAUSE 멈_춤 止
Pause keeps you going on. 멈출 줄 알기 때문에 우리가 계속 존재할 수 있다.
멈_춤은 삶에 대한 불가결한 리듬이다. 멈_춤은 우리 삶에 활기를 불어 넣는다. 특히 동양문화권의 전통속에서 멈_춤은 오묘한 깊이를 갖는 철학적 화두이자 생활정서의 기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동양의 상형글자 _止_는단순한 쉼이나 중단이 아니라 근원에 더 관계된다. 사물의 본질에 회귀하기 위한 추스림 같은 의미를 내포한다…


--성완경 <우리는 멈_춤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 중에서

 

습관적으로 익숙해진 길을 과감히 포기할 수 있을까?
새 길을 가기 위해서 그런 지혜를 이끌어 낼 수 있기를 바란다고 큐레이터는 말한다.
그렇다면 새 길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일상의 습관적 지속에 제동을 걸고 다른 시간, 다른 공간, 다른 속도, 다른 현실을 꿈꾸기 위해서 란다. 그것이 가파른 벼랑과 같은 현실이더래도 새로운 사상, 새로운 제도, 새로운 프로세스를 위해서…

넘 추상적이다.

상상계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닌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것이란다.
프로젝트2와 4는 그러한 주제를 구체화된 작품으로 설명하고 있다.

프로젝트2<집행유예>는 518자유공원내 법정, 영창안에 회화, 사진, 영상 등의 설치물로 제작된 작품들로 꾸려져 있었다.
80년 5월 민주화운동의 역사가 아프게 담긴 518공원이라는 공간안에 주제와 관련된 작품을 설치함으로 주제에 대한 관람객들의 감동을 배가 시키고 역사적의미를 되살린다는 의도가 있는 듯했고 또한 훌륭한 작품들이었다고 볼수 없지만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잊혀져 가는 버려진 공간을 역사적 공간으로 환기시켰다는 측면에서는 성공프로젝트였다고 생각한다.

프로젝트4<접속>은 도심철도 폐선부지를 새롭게 재조명해내는 프로젝트였다.
새로운 공간으로 재탄생시키려는 목적으로 미술작가들 보다는 건축학과 학생들의 공동작품이나 현업건축가들의 대안적 공간제시물들로 꾸려져 있었다.
도시에 대한 상상, 근대 유적의 보존, 대안적이고 유연한 프로세트로서의 도시 행정, 참여성에 의미를 둔 프로젝트로 지역과 공동체의 의미를 묻고, 지역사회와 도시의 실질적 변화를 위한 유연하고 문화적이며 창조적인 행정과정을 촉진하는 일 등을 궁극적 목표로 삼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프로젝트들이 얼마나 현실적 힘을 지니는 진정성이 될까?
예술이 현실을 바꾸는 힘이 될수 있는걸까?
그것이 실현가능한 것일까?
그건 중요하지 않는 걸까?

예술이 사회성을 얼마나 담보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보지만 그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술이 예술 자체로만 얘기되는 작가들을 분명 혐오하지만 예술의 사회참여만이 거대담론으로 얘기되어지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형식과 내용.
이건 창작물 제작 시 두 가지를 적절히 균형을 잡고 가져가야 되는 중요한 요소이다.
내용만을 강조한다면 그건 말뿐인 초라한 생산물이 되는 것이고, 형식에만 방점이 찍힌 작품은 화려한 외양의 껍데기만을 지닌 깡통이 되는 것이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하나를 소개할까한다.

모든면이 거울로 구성된 육면체 설치작으로 거울위로 영상과 음악이 흐른다.

그 방을 들어선 순간 끝없이 떨어지는 심연속으로 빠져드는 황홀감과 어지러움을 느꼈다.

상상해보라. 발밑의 거울은 반복과 반복으로 겹쳐지면서 끝이 보이지 않고 고개를 들면

인간의 내장속에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영상이 위에서 아래서 떄로는 사방체로...

푸후...지금도 어지럽다....관객이 즉각적 반응을 일으키는 설치작품은 아니지만 작품안에

관객이 작품과 상호교감하며 존재하게 유도하는 발상은 설치작품이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세계이다.


모토히코 오다니

9번째 방/2002년

 

모든 작품을 온라인상에서 감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는 요기서..

http://www.kwangjubiennale.org/www2002/05_pds/05_f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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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USION_한혜연


 

한때"ILLUSION"이라는 단어에 한참 얽매어 있었다.
일단 단어의 어감이 넘 좋다.
내가 좋아하는 단어는 이것 말고도 몇개있는데..
empty(이걸 젤루 좋아하지 running on empty 요런 조합도 조아~), Tides turning,

변혁, 투르기....모 또 있나?...

"ILLUSION"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border) 또는 차이(difference)다.
이런 생각을 연상하게 했던 영화가 있었는데 그건 <트윈픽스>의 감독 데이비드
린치의 2001년작<멀홀랜드 드라이브 (Mulholland Drive)>였다.
이 영화를 본지 얼마되지 않았던 시기 한참 그 생각들이 나를 뒤덮고 있었다.
<매트릭스>는 장자의 나비론을 떠올리게 하고, 환상으로 포장하고 있는 현실이론체계를
비판하고..."비정상"과 "정상"의 경계와 차이가 모호해지고...

모 이런 생각들은 풀리지 않는 메비우스의 띠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연관되어 있고
얼개지어져 있다.

<일루젼 ILLUSION> .이 만화의 작가는 "ILLUSION"의 의미를 고민하고 그와 연관지어
스토리를 쏟아낸다.
몇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일 좋았던 부분은 마지막의 "The Heart"이다.
인형이 자신에게 생명과 사랑을 불어넣어준 주인을 위해 살인을 한다는...
인형의 모델이었던 여자가 주인공과 마지막 대면하면서 짓는
은근한 미소는 살인자가 정말 인형이었던가하는 의심을 품게 할정도로 반전을
주는 모티브로 이야기의 전체구조를 다시 생각하게하고 진실이 무엇인지...머리속을

제로로 만들어버리는..그러면서 다시 구축하게 하여 구조화해내는...모든것을 모호하게
만들어 버린다.

흑과 백으로 규정지어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지 깨닫게 하는 순간이다.

이런 방식은 TV시리즈<엑스파일>에서 자주 사용하는 형식으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많은 여운을 남기며 여러가지를 상상하게 하는 것인데 이런 방식은 잘 짜여진
플롯이 아니면 나오기 힘든 이야기 방식이다.
린치의 영화와 ,<엑스파일>,<일루젼 ILLUSION>만화까지 나를 흥분하게 만드는
창작물은 흔하지 않다.

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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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방_마티스 작



 

Henri Emile Benoit Matisse

red-studio

 

방을 꾸미고 났더니 온통 붉은색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마티스그림이 떠올라 띄워보았다~

마티스에 대한 설명은 네이버 지식검색이...

그런데 왜 붉은방으로 변하게 되었는지는 설명할 길이 없다.

생각좀 해봐야 할 듯...흐흠...

 

마티스
Henri Emile Benoit Matisse

스무 살이 넘도록 자신의 천부적 자질을 깨닫지 못하는 위대한 예술가들이 있다. 마티스 역시 그런 예술가 중의 한 사람이다. 유년시절과 청년기를 통해 그는 어떤 형태의 예술에도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앙리 에밀 브누아 마티스는 1869년 12월 31일 밤 9시 북부 프랑스 르카토캉브레지의 외가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지냈다. 앙리 마르탱 고등학교 시절 그림에 소질을 보였는지는 몰라도 마티스가 미술사가 피에르 쿠르디옹에게 1941년에 토로한 바에 따르면, "그 당시에는 그림이 뭔지도 모르고"그렸다고 한다. 법학을 공부하러 파리로 간 마티스는 수업을 청강하고 규정된 변호사 시험을 치러 합격한 뒤 변호사 자격증을 받고 1899년 고향으로 돌아와 마이트르 드리외 법률사무소의 서기로 근무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건강상의 이유로 법률사무소를 잠시 그만두어야 했다. 마티스는 회복기를 보앵에서 보냈다. 그때 마티스는 어머니가 건네준 물감통을 들고 가서 물방앗간과 마을 어귀의 경치를 담은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1891년 이제는 앞날을 결정해야 했다. 아버지가 반대했지만, 그는 법률을 포기하고 파리로 가서 에콜 데 보자르에 등록하였다. 에콜 데 보자르에서 마티스가 주물로 된 고대 조각품을 그리고 있을 때, 학생들의 작품을 검사하고 있던 귀스타브 모로의 주의를 끌게 되어 1895년부터 모로의 화실에서 작업을 하게 된다.
모로의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게 된 이 시기부터 마티스는 확고부동한 정신적 물질적 안정과 여러 재능있는 젊은 화가들을 만나게 되고 위대한 화가로서의 삶이 시작된다.
마티스는 뛰어난 직관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본능적인 충동이나 영감의 원천을 흐려 버리지 않으면서 객관적인 사물을 구상화했다. 그는 부단히 자기의 창작과정을 밝혀나갔으며 자기 예술의 원천, 방법, 목적을 분명히 하기 위해 비범한 지성을 동원하였다. 마티스는 "예술가는 최선의 자아를 오직 그림 속에 쏟아부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경우는 비극일 따름이다. 작가가 분석하고 개발한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내용출처 : [인터넷] http://members.tripod.lycos.co.kr/randi/main-frame.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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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ast, the Present, the Future_오노레 도미에


The Past, the Present, the Future

Daumier, Honore
Plate 349, La Caricature, no. 166, 9 January 1834
Lithograph on heavy white paper; first state of two
21.4 x 19.6 cm
Musee d'Art et d'Histoire, Saint-Denis

 

도미에 작품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생긴건 몇년전 태권이를 통해서였다.

미학과 출신의 그친구는 지금 <십자군 이야기_김태 작>라는 역사풍자만화로

유명해진 놈이다.

한때는 둘이서 가을이면 왠만하다는 전시는 같이 나들이하여 그림에 대한 서로의

평을 나눠가며 즐길만큼 문화적 코드가 잘 맞는 친구중의 하나였다. 

여튼 시사만화에 뜻을 둔 그친구가 좋아하는 작가가 도미에였고 그 친구의 영향으로

소나무 출판사에서 나온 <오노레 도미에>를 통해 그의 풍자만화, 풍자화, 캐리커쳐,

판화 등을 좀더 심도있게 접하는 기회가 되었다.

시사만화하면 아직도 박재동이다.

박재동의 만화를 보기위해 한겨레를 구독한다던 친구도 있었을만큼 한때 박재동의

시사만화는 그 시대를 읽어내는 하나의 잣대가 될만큼 영향력이 대단했었지.

애니메이션으로 외도한 이후 여전히 날카로운 사회적 풍자와 비판의식은 남아있지만

매일 만나는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는건 아쉬움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시가 압축된 언어의 예술이라고 한다면 시사만화는 만화의 시로 비견된다.

한컷의 이미지와 상징,은유로 함축된 텍스트는 그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읽어내는 잣대가 될 수 있다.

도미에는 판화로 유명하지만 19세기 정치와 생활풍자만화로도 유명한 작가이다.

위의 그림은 1834년에 제작된 석판화로 <과거-현재-미래>라는 제목으로

배모양 왕의 얼굴로 모든 변화를 표현한 것이었다.

탐욕스럽고 오만해보이는 왕의 캐리커쳐는 과거에는 부드러웠으나

현재는 권위주의적이고 미래는 더욱 굳어질 것이다라는 중의적 의미로

풍자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듯하다.

기회되면 좀 더 많은 캐리커쳐와 풍자화를 올려보겠다~

 

YES24 리뷰

오노레 도미에 : 만화의 아버지가 그린 근대의 풍경/박홍규/소나무출판사

 

이상구 flypaper@yes24.com

시사 만화가이자 사실주의 화가로도 유명한 오노레 도미에의 평전이 미술을 향한 저자의 세 번째 출구. 다소 낯설긴 하지만 사각의 컷에서 날카로운 필봉을 휘둘렀던 인간 도미에와 그가 만들어 냈던 근대 프랑스의 풍경을 엿볼 수 있다.

오노레 도미에는 1808년 프랑스 남부의 마르세이유에서 태어나 1816년 파리로 온 후 1879년에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파리에서의 생활을 계속한다. 7월 혁명, 제2공화정, 파리꼬뮨 등 프랑스 근대사를 뒤흔들었던 격동의 세기를 한 몸으로 관통해 온 그에게 파리 부르조아의 흥청거림과 퇴폐적인 방탕함은 신문만평을 통한 날카로운 비수의 탄생을 짊어지게 한다.

19세기의 프랑스 작가 샹플뢰리는 "만화란 평소에는 고양이처럼 잠들었다가 아무리 작은 정치적 동요에도 반응하여 그 푸른 눈을 번쩍 뜬다"고 말했다. 일본 현대만화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데츠카 오사무는 "만화는 어디까지나 아이러니와 풍자, 경고, 비판이 없으면 안된다. 그것이 없는 것은 그냥 그림이지 만화가 아니다"라고 같은 견해를 드러낸 바 있다.

도미에의 작품은 만화다운 만화, 만화의 본질에 충실한 본격 만화의 중심축에 위치한다. 19세기의 격동 속에 움츠린 수많은 고양이 중에서도 가장 멀리 튀고 예민하게 반응한 고양이였으며, 그림이 어떻게 만화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가에 대한 오자무의 견해와 일치한 활동성을 보이게 된다.

하지만 도미에의 만화는 단순한 권력비판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주체. 도미에의 사각의 흰 종이에서 제 목소리를 냈던 주체는 지식인도, 현자도, 초인도 아닌 산업혁명과 더불어 시작된 자본주의의 온갖 모순을 몸으로 느끼며 고통받아야만 했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서민들이 우리가 이 시대의 중심임을 외칠 수 있도록 프레임을 빌려 주었던 것이다.

'만화의 아버지가 그린 근대의 풍경'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오노레 도미에』는 도미에의 탄생에서부터 성장기인 10대를 제외하고 6개장으로 분할해, 20대부터 60대까지를 10년의 단위로 기술한다. 저자는 그 시대를 20대의 정치 풍자 만화, 30대의 풍속 풍자 만화, 40대의 혁명화, 50대의 민중화, 60대의 전쟁 풍자 만화로 구분한다. 시대적인 격변과 함께 반응하는 개인의 적나라한 모습이 반영된 것이다.

또한 저자는 책의 말미를 빌어 도미에 이전과 이후의 만화와 풍자화의 역사를 함께 살핀다. 도미에 이전은 <만화, 그 반역의 역사>라는 부제를 할당하고, 도미에 이후는 <위대한 만화가이자 공화주의자인 오노레도미에 잠들다>라는 다소 제의적인 경건함을 동원해 시사 풍자 만화의 아버지 오노레 도미에와 함께 한 역사를 서술한다.

"여러분이 보고 계신 이 책은 소위 전문가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이는 내가 전문가도 아니고 전문가를 위해 쓰지도 않았으며, 도미에가 자신의 만화를 민중을 위해 그렸듯이 나도 민중을 위해 이 책을 썼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도미에나 그 만화에 대한 전문적인 설명은 일체 생략하고 아주 알기 쉽게 쓰고자 노력했다."

책을 엮는 이들의 대부분이 통과의례처럼 사용하는 눈높이 작업에 대한 발언이 거슬리지 않는 이유는 도미에에 대한 저자의 남다른 애정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아카데미즘을 배제하고 만화가로서 한 시대를 살아온 예술사의 증인으로서, 도미에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시도하고 있는 책. 제 눈으로 삶을 보지 못하는 수많은 보수와 진부한 권위를 향한 작지만 힘찬 발언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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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가족이 조아~

흐흠...고향내려온지 첫째날..

한참 리듬이 깨진 상태라 새벽에 늦게까지 투니버스의 "은하철도999(TV장편용)"보고

20세기소년 만화읽다...조카가 뒤척이는 거에 잠깐 깨다 눈붙이다..그러다가 오전 조카가

아침일찍부터(오전7시) 파워레인저 본다고 TV를 켠다.

참고로 조카방에서 잤지모..내방이 있을리가..ㅋㅋ

그래서 조용한 방으로 이동..그러다 눈을 떴더니 오후12시가 조금넘은 20분깨...흐흐..

오랜만에 유부녀 친구와의 약속도 담날로 Cancel하고....ㅎㅎ

어머님과 언니가 제사 준비에 분주하다.

역시나 내 역할은 그냥 조카들과 놀아주는 것...그건 정말 잘한다^^

가끔 나의 정신연령이 아무래도 10대인것 같아 걱정스러울 때도...회사에서 차장입네, 팀장입네 무게 잡고 있는 내 모습을 조카들은 절대로 상상하지 못한다. 나 또한 가끔 그게 내모습이었을까 환상은 아니었을까 의문을 갖기도 한다. AB형의 전형이다. 현실과 상상계를 잘 구분못한다.ㅋㅋ

 

오랫만에 봤으니 조카들을 현혹시킬 뭔가를 해야한다.

약간의 지출이 필요한 때...흐흐

문구점가자고 도착한 늦은 어제저녁부터 조르던 초등학교1년생과 그의 라이벌관계인 6살 동생, 놀러온 초등생친구까지 대동해서 문구점으로 갔다.

초등생둘은 500원짜리 화약총과 300원짜리 화약 하나씩, 6살짜리는 거금 5000원짜리 다발총을 집어들고 문구점을 룰루랄라~나온다..역시 남자놈들이긴 하다.^^;;

입이 심심하니 군것질꺼리까지 풀서비스로 제공..그러고는 집으로 돌아와 ps2겜에, 딱지치기에, 컴퓨터겜에, TV만화에...기타등등 하루 온종일 오락꺼리로 정신없이 보냈다.

간혹 물질적인 것과 친구처럼 놀아주기만 하니 그들에게 난 권위라곤 전혀 부리기 힘든 존재.

날 아주 우습게 본다. 물질의 힘은 그닥 오래가지 않으니..ㅋㅋ 자업자득..

그래도 난 그게 젤루 좋다~

하루가 어찌 이리 짧은 건지~

조카가 하나더 있다.

이제겨우 8개월의 갓난쟁이.

어버버버하는게 웃긴다.

어쩌다 두발걸음 떼는걸 어제 우연히 목도했는데 언니는 난리도 아니다.^^;;

자랑자랑...어찌나 똑똑하다고 칭찬과 자랑이 심한건지..

자식자랑 우리언니도 그렇게 심하게 하게 될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동생커플까지 서울에서 당도하니 제사 거행~

간단하게 치룬 후 삥둘러 앉았다. 밥상이 큰듯했지만 작아보인다. 비좁아서 조카들하고 

자리다툼까지 해야 할 지경. 허허...

동생친구는 다시 고향앞으로 보내고...다시 우리가족까리..늦게 도착한 여동생은 갓난쟁이가

넘 이뿐지 연신 "천사가 따로 없네~넘 이뿌다이뿌나!!"옆에서 엄마는 막내의 기행을 하나하나

다 설명해주시고..형부는 언니에 이어 자식자랑2탄 시작.

"난 첨에 쟤가(6살짜리 조카) 천재인줄 알았어. 어느날 아빠 개미의 종류 대기 놀이하자 

그러길래 야 이놈이 천재구나 가르쳐주지도 않은 개미의 종류까지 알다니..."

참고로 형부와 언니는 둘다 중고등학교 선생님덜..그러는사이 조카가 그러드래

"파란개미! 노란개미...아빠는?"그 이후 상황은 안봐도 비됴.

형부를 비롯하여 할머니, 여동생, 나 그자리에서 바닥에 쓰러졌다. 푸하하하하

 

오늘하루를 이렇게 보냈다.

어찌 이리도 잼나는지? 저놈들 천천히 자라주었으면...애들의 성장은 어찌나 빠른지?

벌써 오빠의 조카인 초등1학년 녀석은 내가 목욕시켜주기가 힘들어질 정도가 되는 듯..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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