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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에 대한 인간의 가능성

어슐러 K. 르 귄 읽기 1

SF문학에서 최고의 찬사를 받고 있는 르 귄은 1962년부터 최근 2007년까지 70편이 넘는 소설, 시, 산문, 번역서들을 집필했다. 아직 한국에는 이 작품들 중에서 20여 편이 번역됐다. 그 중 내가 읽은 헤인 에큐멘 시리즈와 어스시 시리즈로 ‘르 귄 읽기’를 쓴다는 것은 시건방일지 모르지만, 그 두 시리즈는 심심치 않게 내가 무언가를 말하게끔 부추기고 있다. 그것을 몇 개의 단어로 표현하기엔 부족하지만 억지로 표현하면, 다른 문화의 감수성, 갈등 풀기, 변화 속의 균형 등이다. 먼저 헤인 에큐멘 시리즈로 이글을 시작한다.


문화 또는 문명의 충돌
인류의 과학기술은 우주진출을 이미 시작했다. 아직 알 수 없지만, 곧 외계인과 조우하게 될지 모를 일이다. 이 넓은 우주에 지구에만 생명체가 있다는 믿음은 이제 종교적 맹신으로 치부된다. 수많은 소설과 영화와 드라마에 심심찮게 대중을 심각하게 만드는 외계인과 조우에 대한 기대와 걱정은 인류의 수많은 문명과 문화가 충돌한 경험 때문일 것이다. 자본은 완전히 세계화되어 지구 어느 오지에도 그 영향력을 행사하며 심각한 충돌을 만들고 있다. 그 양상은 다르지만 역사시대 이전부터 좁게는 개인과 개인 사이에 넓게는 공동체들 사이에 충돌해왔다. 한편 충돌의 역사는 서서히 거대한 공동체를 만들며 거대한 공동체 문화를 만들기도 했다. 이상적인 공동체를 향한 인류 정신의 최고 단계를 아직 실현하지는 못했지만, 이미 공산주의라는 상당히 구체적인 이상을 다양한 방법으로 실험했고 여전히 실천하고 있다. 그 변화가 너무나 더디게 보이기도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변화의 방향을 부정할 수는 없다. 염세적인 인간들의 디스토피아식 저주 또한 어느 정도는 좋은 세계를 위한 경고와 계몽의 메세지로 읽을 수 있다. 인류는 어렵지만 서서히 앞으로 나가고 있다고 말하면 막연한 낙관같지만, 대중이 스스로 운명의 주인이 되려는 신념과 노력 또한 우리가 목도하는 현실이다. 
르 귄의 헤인 에큐멘 시리즈는 지금보다 훨씬 앞으로 나간 인류에 대한 상상이다. 그러나 이 상상은 지옥의 현실로부터 출발한다. 르 귄이 살고 있는 지구, 미국, 그리고 자신이 경험한 유럽의 문화, 자신이 공부한 중국의 노자 사상 등이 상상의 재료다. 지금보다 훨씬 앞으로 나간 인류는 어떤 충돌을 경험할까? 개인과 개인의 충돌은 똑같고, 공동체들 간의 충돌은 행성간의 문명 충돌로 표현하고 있다. 행성간 다른 인간 종족의 충돌은 지금까지 인류가 경험한 다른 문화의 차이보다 훨씬 클 것이다. 이 시리즈는 다른 문화와 문명의 충돌을 어떻게 극복하고 소통하는가의 이야기다. 

소통을 위한 기술, 과학과 정신
르 귄은 소통을 위한 과학기술로 빛보다 빠르고 거리를 초월한 실시간의 통신기 앤서블을 발명해낸다. 이 과학기술은 행성간 교류와 발전이라는 인류의 진보에 날개를 달아주지만 르 귄은 인간을 과학기술에만 의존하는 존재로 그리지 않는다. 소통을 위한 인간의 정신적 노력으로 언젠가 텔레파시의 능력을 습득하게 만든다. 말과 문자 언어가 가지는 오해와 한계를 지적하며 정신 그대로를 상대에게 전달하는 능력을 상상한 것이다. 이 정신적 노력이야말로 르 귄이 추구하는 소통의 핵심이다.
한편으로 과학과 정신 두 가지 기술은 악용되기도 한다. 그 기술을 지배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정체불명의 존재를 에큐멘의 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빛보다 빠른 물질의 이동 기술은 메세지 통신이 아니라 파괴를 위한 에너지의 이동 또한 가능케 한다. 텔레파시의 능력도 차원 높은 소통이 아니라 약자의 정신지배를 위해 사용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인류의 과학기술의 이용방법은 에큐멘 보다 정체불명의 적에 가깝다. 첨단 과학은 대중을 지배하려는 자본가 계급의 전유물이며, 약소국을 강탈하려는 제국주의의 무기였다. 
다른 종 사이의 소통을 위한 상상은 SF세계의 매우 중요한 요소다. 얼마 전 본 영화 아바타에서는 판도라 행성의 생명체에 ‘교감’을 위한 촉수모양의 감각기관을 상상하고 있었다. 인간의 환경파괴를 막아낸 것은 촉수들로 판도라 행성의 모든 생명체가 교감을 나눠 그 감각기관이 없는 인간을 물리친다는 내용이었다. 아바타에서 말하는 ‘교감’의 촉수기관은 대단히 훌륭한 상상이지만, 그 촉수기관으로 관계를 맺은 사이는 주종관계와 소유관계를 형성했다. 약간만 삐딱하게 보면, 판도라의 종족은 만물을 다 따먹고 군림하는 종족이었다. 헤인 에큐멘 시리즈에 등장했다면 분명히 적이었다.
이 시리즈에 등장하는 에큐멘의 대사들과 주인공들은 다른 문화와 소통을 위해 끝없는 이해와 노력을 아끼지 않고, 희생도 불사하지만, 약자를 지배하려는 적들에 대해서는 두가지 기술을 무기화해 무자비한 공격을 감행한다. 인류 역사 속의 뛰어난 혁명가들을 연상케하는 대목이다.
현실로 돌아와 지금의 양자물리학은 앤서블 같은 기술이 이론적으로 가능함을 증명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앤서블의 실현은 시간문제다. 텔레파시의 능력은 과학적이라기보다 정신의 영역이다. 대중의 열망이라는 거대한 에너지를 귀신같이 악용하는 기업과 정치인들이 있고, 대중의 열망을 직접민주주의로 실현하려는 사회주의자들도 존재한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대중의 열망이 언어와 이미지라는 데이터로만 파악되지는 않는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마음이고 정신이다. 지배가 아니라 소통을 목적으로 눈과 귀를 열고 마음을 여는 것이 텔레파시의 출발이 아닐까?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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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인 에큐멘 시리즈
아주 오랜 옛날 헤인(인류)은 은하 곳곳에 인류의 문명을 전파했다. 그 뒤 각 행성의 인류는 고립된 채 독자적인 문명을 만들어 나갔다.
다시 오랜 시간이 흘러 헤인은 은하 곳곳에 떨어져 있는 인류를 찾아 서로 교류하기 위한 에큐멘이란 행성 연합을 결성한다.

 
로케넌의 세계, 1966년
이 저작은 ‘셈레이의 목걸이’이란 단편의 뒷이야기로 시작한다. 셈레이가 며칠간 우주여행을 했지만, 셈레이가 살던 곳에서는 20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로케넌의 세계’는 셈레이의 여행 때 잠깐 등장했던 에큐먼의 로케넌이 셈레이가 살던 행성을 탐사하며 정체불명의 적과 대결한다. 이 행성은 아직 이름이 없었고, 석기 문화의 두 종족과 청동기 문화의 한 종족이 살고 있었다. 당시 에큐먼은 엔서블이란 통신기를 사용했고, 로케넌이 모험 과정에서 적이 아닌 정체불명의 어떤 존재에게 텔레파시의 능력을 훈련받는다. 로케넌은 적에게서 이 행성을 지켰고, 원주민과 에큐멘은 로케넌의 공로를 기려 이 행성에 ‘로케넌의 세계’란 이름을 붙인다.


유배행성, 1966년
로케넌의 모험 보다 수천 년이 흘러 다른 행성은 배경으로 새로운 종족과 새로운 문명이 어떻게 탄생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에큐멘에서 석기 문화의 어느 행성에 연구그룹이 이주했지만, 앤서블과 우주선을 잃고 고향 행성과 천 년 전에 연락이 끊겨 이주민들은 서서히 소멸해가는 상황이었다. 석기인은 온순한 농경족과 겨울이 되면 남하하는 포악한 수렵족이 있다. 수렵족의 이동은 농경족과 문명족 모두에게 큰 위협이었다. 농경족의 족장 딸과 문명족 지도자의 사랑 때문에 수렵족의 이동에 두 종족간의 공조가 깨져 큰 비극을 맞이한다. 그러나 이 비극을 해쳐나가는 과정에서 문명족과 석기족의 이종교배 가능성이 생긴다. 텔레파시는 다른 두 종족을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환영의 도시, 1967년
‘유배행성’에서 새로운 문명이 탄생한지 다시 수 천 년이 흘러, 이 문명은 옛날 빛의 속도로 나는 우주선의 과학을 복원한다. 그리고 싱이라 불리는 정체불명의 적이 출현한다. 새 문명의 젊은 왕자는 싱에게 쫓겨 테라라 불리는 지구로 오지만 모든 기억과 능력을 상실한다. 테라 또한 싱의 지배를 받고 있다. 싱은 상상을 초월하는 환영으로 인류의 소통을 통제하며 과학기술의 사용을 막고 있다. 젊은 왕자는 테라인의 도움으로 서서히 기억과 능력을 되찾아 싱과 일대 결전을 벌인다. 텔레파시의 발전은 소통능력을 넘어서서 정신을 지배하는 무서운 힘으로까지 발전했다. 두개의 막강한 정신의 대결에서 힘이 아니라 지혜가 승리한다. 노자의 도덕경에 대한 SF식 헌사라 할만하다.


어둠의 왼손, 1969년
에큐멘이 겨울행성과 연맹을 맺는 과정이다. 텔레파시가 등장하지 않고, 앤서블이란 통신기를 행성간 외교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것으로 보아 ‘로케넌의 세계’ 보다 이전의 연대기다. 겨울행성은 매우 추운 행성이라 매우 더디게 문명이 발전하지만 우주진출 직전의 과학의 수준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매우 게으르고 관료적이며 보수적인 가치가 지배적이다. 특이한 점은 이 행성의 종족은 자웅동체고, 생리주기가 되면 하나의 성징이 나타난다. 에큐멘의 사절은 겨울행성의 두 나라 모두에게 환영받지 못하지만, 왕조의 대신 에스트라벤과 사랑과 우정의 친교를 맺으며 끝내 에큐멘과 외교를 성사시킨다. 양성인의 문화를 이분법이 없거나 둔화된 사회로 묘사한 상상력이 빛나는 작품이다. 


빼앗긴 자들, 1974년
에큐멘이 결성되기 직전 우라스와 아나레스라는 쌍둥이 행성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우라스는 자본주의가 최고도로 발전한 사회고, 이에 폭발한 혁명으로 건설된 무정부 사회가 아나레스다. 아나레스는 정신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지만 환경이 황폐해 매우 가난하고, 관료제와 집단주의는 한계 상황에 이르렀다. 아나레스의 물리학자 쉐벡이 두 행성의 교류와 발전을 위해 우라스로 간다. 두 행성으로 갈라진 사회, 각 사회의 장단점들에 대한 실감나는 비교는 냉전시기 미국과 소련의 비교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두 행성 모두에게 외면 받는 독특한 충돌 속에서 쉐벡은 빛의 속도 보다 빠르고 공간의 거리를 초월한 실시간 이동의 기술을 발명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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