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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 논쟁에는 ‘국가’와 ‘신뢰’가 아닌 권력만이 존재한다


한나라당의 세종시를 둘러싼 계파간 갈등을 보면 마치 낮술 마시고 취해서 부모도 못 알아보는 빵구똥꼬들만 가득찬 콩가루 집안 임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으면 ‘강도’, ‘여왕 벌’같은 표현을 사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본래 부르주아 정치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 중에 하나가 여야가 아닌 자신들 정당 내부의 계파갈등을 보는 즐거움이다. 서로를 뜯고 씹고 맛보고 즐기는 싸움은 정말 그 어떤 구경거리보다 재미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자신들의 싸움이 가끔씩은 진실을 은폐하는 도구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물론 싸움이 지나치면 진실을 밝히는 유용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이번 세종시 둘러싼 싸움은 진실에 대한 은폐와 폭로가 모두 내포되어 있는 것 같다.
대통령 후보 경선 때부터 서로 감정의 골이 깊어 회복 불능의 상태에까지 이른 이명박과 박근혜 양자는 상대가 만만치 않은 내공의 소유자임을 확인한 상태다. 그래서 갈등이 깊어지면 질수록 서로의 현란한 무공으로 인해 함께 내상이 깊어지면서 동귀어진을 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가 없게 되었다. 물론 극한적인 상황을 염두에 두면 그렇다는 얘기다.
이명박 측이 세종시 수정안에 대한 박근혜의 강력한 반발을 예상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이명박의 아마추어리즘에 의한 판단착 이며 미천한 정세분석 능력 때문일 것이다. 반대로 박근혜의 강력한 반발을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정안을 내세웠을 때는 박근혜를 확실히 배제시키고 주류 지배세력들과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려는 의도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한 가지 명확한 것은 이명박 정권 등장 이후 박근혜의 수도권에서의 지지기반이 지속적으로 낮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명박의 전략적 선택에 의한 결과로서, 박근혜의 입장으로서는 세종시가 이슈로 대두되었을 때 선택할 수밖에 없는 조건에 놓이게 되었다. 즉 세종시가 그녀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세종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밀리면 미래권력에 대한 어떠한 보장도 담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래권력은 현재의 권력이 아니기 때문에 실체가 없는 허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니 다음 대선에서 승리 할 발판을 이번 지방선거에서 마련하지 못 하면 그녀의 권력에 대한 질주본능도 여기서 종말을 고하게 되는 것이다.
정말 웃긴 것은 지배세력 내부 분파의 갈 등에 대중들을 개입시켜 수단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우국충정과 국가경쟁력을 내세우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국민에 대한 신뢰를 내세우고 있지만 이들 모두에 게서는 처음부터 국가나 신뢰를 발견할 수 없었다.
국가가 국민에게 해준 것도 없었고 믿음을 준적도 거의 없었다. 그들에게 국민은 자신의 권력을 뒷받침해주는 동원의 대상일 뿐이다. 그들은 여전히 정치적 레토릭으로 국민들을 우롱하고 욕망을 조작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종시 둘러싼 내부 권력투쟁에 구경꾼이나 방관자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민중운동을 복원시키는 것이다. 민중은 일단 조직되면 그 어떤 권력보다도 거대한 힘을 가지게 된다. 세계 역사는 떨쳐 일어나고, 조직하고, 결합하고, 저항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역사의 방향을 뒤바꾼 민중들의 이야기와 깊이 얽혀 흐르는 것이다. 과거는 기억할 수 있지만 바꿀 수 없고 미래는 기억할 수 없지만 바꿀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배성인 (한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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