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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25 전국노동자대회 특보

정말 이기는 싸움 한번 하자

쌍용차, 용산참사 모두 자본과 정권을 향한 싸움이다

  

이명박정권의 폭력성과 악랄함을 그대로 보여준 용산철거민 학살. 이에 맞서 투쟁하고 있는 용산범대위 김태연 상황실장을 만났다. 그는 지난 3월 20일 연행돼 100일간 구속돼 있다가 얼마 전 선고공판을 남기고 석방됐다. 

 

용산투쟁이 다시 불붙고 있다.

 

용산참사가 일어난 지 6개월이다. 유가족도, 범대위도 이대로 계속 갈 수 없다는 판단을 했다. 그래서 범대위는 투쟁을 정비해서 제대로 한번 붙어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유가족들도 시신을 메고 청와대로 가겠다는 결정을 했다. 7월 20일 용산참사 반년을 계기로 천구투쟁에 돌입했다. 시신을 모시고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냉동탑차도 샀다. 20일 투쟁에서 이뤄내지 못했지만 순천향병원을 폐쇄하고 용산현장으로 영안실을 옮기기로 결정했다. 천구 투쟁은 다시 한다. 원래 7월말에 하기로 했는데 투쟁이 많아서 다음 주 이후로 시기를 조정하고 있다.  

 

천구투쟁과 더불어 용산 4구역 철거민투쟁도 다시 시작됐다. 용산투쟁을 하면서 진상규명이 초점이 됐다. 그러다보니 5분의 열사들이 투쟁하게 된 이유였던 4구역 재개발과 생존권 문제는 상대적으로 부각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용산 4구역 철거민들이 시청 앞 농성투쟁에 돌입했다. 현재 13가구가 남아 있는데 대부분 노령의 여성들이다. 

  

협상은 전혀 진행되지 않는 건가?

 

범대위는 정부와 한번도 협상한 적이 없다. 하지만 야4당 공동위원회나 종교계에서는 협상 창구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청와대쪽에서는 얼마 전까지 ‘가만히 두면 제풀에 지쳐 고사될 것’으로 판단했다. 절대 수용할 수 없다는 생각이겠지. 그런데 이명박정권의 바램대로 투쟁의 불씨가 꺼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불붙고 있다. 특히 6월이 넘어서면서 종교계가 적극적으로 가세하고 있다. 투쟁의 전열도 어느 정도 정비되고 있다. 그냥 지치게 두겠다는 기조로만 버티기 어려울 것이다. 일부에서 장례 치루는 문제로 접근하는 경우도 있는데 옳지 않다. 열사들이 망루에 올라갈 때 요구가 있었다. 바로 4구역 재개발문제다. 개발 자본들이 폭력적으로 재개발을 강행하면서 세입자들의 생존을 무참히 짓밟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로 열사의 뜻이고 포기할 수 없는 요구다. 

  

종교계의 결합이 두드러지고 있다. 그에 반해 제정치사회단체들의 결합은 약화됐다는 평가다.

  

전적으로 맞는 얘기다. 나와보니 실제 투쟁에 결합하고 있는 곳은 몇 조직으로 한정되어 있더라.

 

용산투쟁은 민주주의를 지키는 투쟁이자 건설자본의 폭력적인 수탈에 맞서는 투쟁이다. 이명박정권 출범이후 너도나도 민주주의를 말한다. 특히 반민주전선을 구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세다. 그렇다면 용산투쟁은 단연코 민주주의 투쟁의 핵심이다. 하지만 목소리를 내는 만큼 제대로 투쟁하고 있지 못하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면 적극적으로 해야 하지 않나. 어제 미디업 통과됐는데 한국 민주주의 투쟁에서 매우 중요한 투쟁이다. 하지만 용산투쟁 역시 중요하다. 가장 폭력적이고 비민주적인 무참한 학살은 방치되는데 민주주의 지키는 투쟁이 가능한가.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모든 역량을 모아서 이 투쟁을 해야 한다. 

 

7월 20일 용산학살 반년 범국민 추모대회. 용산범대위 조희주 공동대표는 이날 제대로 못한 천구투쟁을 곧 강행할 것을 밝히며, 용산투쟁의 참가자들이 유족을 돕는 게 아니라 유족의 마음으로 강력한 대정부 투쟁을 벌이자고 했다

 

용산투쟁도 있지만 쌍용차, 미디어법-비정규법 개별투쟁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연대는 점점 약해지는 것 같다.

 

그래도 용산은 종교계까지 결합한다. 하지만 쌍용차 투쟁은 정말 문제다. 갈수록 연대는 약화되고 있다. 일차적으로는 노동내부의 문제다. 민주노총이 최악의 상태고 선두에서 투쟁을 지휘해야 할 금속노조가 전면에 서지 못하고 있다. 노동자 내부의 연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소리다. 그러다보니 힘 있고 광범위한 연대전선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쌍용차 노조간부 부인의 자결소식을 접하면서 용산범대위는 유가족들과 함께 병원과 촛불집회에 참석했다. 쌍용차 가대위도 용산에 왔었다. 특히 제2의 용산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다는 우려가 높다. 어제는 유가족들과 천주교 사제단이 평택에서 기자회견과 미사를 진행했다. 이명박정권의 폭력에 맞선 연대를 확장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곳곳에서 투쟁이 벌어지고 있고 이명박 퇴진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제대로 된 퇴진투쟁을 해야 하지 않나. 아마도 용산이 그 중심에 있을 것이다. 

 

지금껏 노동운동을 하지 않았나. 용산투쟁에 결합하면서 다른 경험을 하고 있는 거 같다.

 

26년 동안 노동운동을 했다. 전노협부터 민주노총 준비위, 그리고 3년 전까지 민주노총에서 일했다. 그런 사람이 상황실장으로 있으니 전철연 동지들도 물어본다. 글쎄,(웃음) 용산투쟁이 철거민투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철거민들이 상대하는 것은 다 자본이다. 삼성, 포스코 등 다 거대한 건설자본들과 치열하게 투쟁한다. 노동자들은 착취를 당한다면 철거민들은 아주 폭력적인 방식으로 수탈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싸우고 있는 상대가 똑같다. 다른 점이 있다면 철거민들은 노동자들보다 훨씬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진짜 목숨 걸고 투쟁한다. 최근 노동자투쟁이 어렵다고 하는데 우리도 돌이켜봐야 할 것 같다.  

 

앞으로도 용산에 계시겠네요. 

 

용산투쟁에서 정말 이기는 투쟁의 전형을 만들어봐야 하지 않나. 이게 나만의 희망은 아닐 것이다. 이 투쟁을 이겨야 돌파구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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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살인적 재개발을 멈추고 생존권을 보장하는 순환식 재개발을 요구한다 

 


 

 

유가족들은 아직도 상복을 벗지 못하고 검찰청으로, 서울시경으로, 시청으로 영정을 들고 투쟁하고 있다. 최근 시국선언이 이어지면서 종교계가 천막을 치고 정치인들이 용산을 찾는다. 다시 용산참사를 이야기하며 ‘장례도 치르지 못한 용산’이 언론에 다시 오르내린다. 그렇다. 장례도 치르지 못했다. 하지만 유가족과 철거민들은 장례를 치르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참사의 진상규명과 살인적인 재개발 중단과 생존권을 요구하는 것이다. 

 


 

 

용산참사 현장에 그려진 벽화


 

 

 

순환식 재개발을 요구하는 이유 

 

재개발이라 해도 주민의 요구에 의해 이루어지는 재개발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보니 그 동네 사람들의 생활수준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돈 되는 큰 평수의 높고 화려한 아파트가 들어서다보니, 동네 주민의 재입주율은 낮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서울에서의 평균 재입주율은 20%를 조금 넘을 뿐이고 나머지는 평수를 늘리려는 욕망덩어리들의 몫이다. 하물며 세입자는 꿈도 못 꿀 일이니 ‘영구임대주택’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재개발 바람이라도 불면 이미 그 동네에 땅이나 집을 사둔 외지 사람들은 물론이고 제법  번쩍이는 집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야, 재개발 기간 동안 임시로 살만한 거처를 구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재개발이 끝나고 입주조차 쉽지 않은, 가진 것이라고는 조그만 집 한 개 달랑 지니고 있는 가옥주는 물론이고 세입자가 임시거처를 구하기란 그야말로 만만찮은 일이다. 그래서 재입주할 때까지 임시거처로 ‘가이주단지’를 요구하게 된다. 

 

이런 사정은 단지 주거만이 아닌 상가 세입자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어딜 가나 철거민들은 영구임대주택과 가이주 단지가 보장되는 ‘순환식 개발’을 요구하고 있다.  

 


 

 

원주민들의 삶을 유린하는 재개발 

 

재개발이 확정되는 그 순간 몸 누일 거처가 사라져버리는 실로 생존의 벼랑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은 격렬하게 저항한다. 하지만 은행 금융으로 시작한 재개발에서 시간이 곧 돈인지라 투기꾼들과 건설자본은 용역과 경찰을 앞세운 무자비한 폭력으로 거주자들을 내몬다. 이것은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 어디에서나 재개발이 진행되는 곳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슬픈 풍경화다. 그래서 주민들의 요구에 따라 이루어지는 재개발이라는 원칙은 깡그리 무시된 채 건설자본과 투기수요에 기초한 도시정비법과, 이에 수반하는 용역의 폭력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경비업법 등이 철거민이 거론하는 악법의 핵심이다. 

 

80년대 후반 철거민운동이 시작된 이래 줄곧 요구해 온 순환식개발은 여전히 제도적으로 외면당하고 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재수 없이 철거민이 된 사람들은 그냥 쫓겨나든지 아니면 버티다 매 맞고 감옥가든지 선택을 해야 할 판이다. 임시상가, 영구임대상가를 보장하는 순환식 개발을 요구하며 용역에 쫓겨 망루에 올랐다가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한 용산 철거민 다섯 분도 같은 경우이다. 하지만 시국선언 어디에도 빠질 수 없는, 천주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에서 애도하고, 단 하루도 언론에서 외면할 수 없는 그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이명박은 여전히 외면하고 있다. 7월 20일이면 여섯 달이 되지만 돌아가신 그들은 여전히 이명박정권에 분노하고 한편으로는 순환식개발을 외치고 있다. 다섯 분이나 돌아가신 여기 용산에서마저 순환식개발을 시행하지 못한다면 재개발은 원주민을 죽음으로 모는 살인일 뿐이다. 

 

이종회 (용산범대위 공동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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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거기 아직 장례 안치뤘어요?

용산참사 유가족 정영신님 (故 이상림 열사 며느리)

1월 20일 용산참사가 벌어진지 140일이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용산은 여전히 아프고 전혀 치유되고 있지 않다. 전 대통령 노무현이라는 스타 정치인을 전국민적으로 애도하고 있을 순간에도, 용산의 철거민들은 계속되는 국가폭력 앞에 분노해야 했다. 용산참사에서 희생된 故 이상림 열사의 며느리 정영신씨를 지난 3일 순천향병원 장례식장에서 만났다. 

지금 문화공간으로 꾸며져 있는 레아호프에서 장사를 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전에는 어땠나요? 

그 자리에서 시부모님이 갈비집을 하셨어요. 저는 강변에서 신랑은 용산에서 노점을 했죠. 부모님들 연로하시고 해서, 2006년에 리모델링을 해서 넷이서 호프집을 열었어요. 빚도 갚고, 전세방이라도 마련해보려고 했죠. 장사가 잘됐어요. 결혼을 미뤘었는데, 장사도 잘되고 하니까 작년에 결혼도 하고. 그때는 정말 좋았죠. 그런데 가게 문 열고 6개월 만에 사업승인이 나더라고요. 그리고 용역들이 들어오고 나더니, 공포분위기가 조성되고 장사가 안되고. 옆에 빈 가게에 냄새나는 것 가져다 놓고. 결혼하지 3~4개월 만에 계속 용역하고 싸웠죠.

용산참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재개발과 철거민의 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사건이었던 것 같습니다. 철거민에 대한 시선은 아직도 곱지 만은 않은 것 같고요. 

‘재개발하면 뭔가 좋다’ 생각했는데,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나갈 수 있다는 걸 알았죠. 원주민 다 내쫓고 투기꾼들 들어와서 하는 개발이죠. 주위의 땅은 오히려 오르니. 갈 데가 없어요. 또 용역이 들어오면서 눈으로 보니까 열 받더라고요. 제가 보는 앞에서 시어머니 뺨을 때려요. 신고를 해도 경찰이 와서 “쟤들 건드리지 마세요.”라는 얘기뿐이죠. 그 때부터 제가 더 열심히 따라다니면서 했죠. 억울해서 못나가겠다. 돈 없는 것도 억울한데, 니들한테 맞으면서 도망가는 것은 하지 않겠다. 

참사 이후 5달이 다되어 가네요. 많이 힘드시죠?

좀 많이 답답해요.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고. 하지만 지금까지도 철거민들이 불내서 죽었다고 하고 있고. 불리한 기록은 다 공개하지 않고. 검찰은 법을 무시하고 있는 거거든요. 그날 사건의 본질은 용역과 경찰이 같이 진압을 했잖아요. 누구의 지시로 했는지. 언제부터 철거민들과 대화가 아니라 때려잡으려 했는지. 그런 기록들은 공개를 안하고, 9명의 철거민이 죽였다고 재판을 받고 있는데, 그럼 누가 죽였냐고요. 

얼마 전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세상이 떠들썩했습니다. 영결식 하는 날 가셨다고 들었는데요. 

노무현 전 대통령 장례식에 가서 정말 속상했어요. 우리 이야기는 잊혀지고 있는데, 모든 사람들이 추모하고, 청계가 열리고. 이것도 있는 자가 죽으니까 참 다르다. 우리가 그렇게 소리 지르고 도와달라고, 다시 한 번 뭉쳐달라고 했을 때는 잘 안되었는데. 죽어도 서럽다. 철거민들은 가진 게 없어서 끝내는 그렇게 비참하게 돌아가셨거든요. 우린 진짜 억울한데, 우리는 정부가 아무것도 못하게 막고만 있잖아요. 

이명박 정부가 용산참사범대위 집회 불허는 물론 추모제까지 막고 있습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연행도 되고 구속도 되고 참 어렵게 투쟁을 할 수밖에 없는 것 같은데요. 그런 부분이 또 사람들을 함께 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하구요. 

아무리 지금 당장 힘들고, 공권력이 무섭고, 계란으로 바위 치는 싸움이라는 것을 알지만. 한 사람 한 사람 모이면 계란으로 바위를 깰 수 있어요. 그런데 촛불이든 연대한다는 단위든 정작 정말 저희가 필요할 때 같이 있어줄까하는 의문이 들 때도 있죠. 많이들 이 싸움에 대해 정부랑 싸워서 과연 이길 수 있겠느냐는 판단을 하기 때문에. 하지만 여러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함께 싸우면 이길 수 있어요. 

용산참사에 대해 정당들도 그렇고 얘기는 많은 것 같습니다. 특별법을 추진한다는 얘기도 들리고요. 그래도 아직 많이 부족하죠?

말은 민주당, 민주노동당 용산참사 발의를 하고 상정을 하고…. 그런데 한 번 더 현장에 와서 현장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우리가 왜 아직까지도 경찰들에게 가로막혀서 추모제를 못하는지. 이의제기를 한번이라도 같이 해달라는 거죠. 말로만 제발하지 말고. 액션을 해줘야 되는데. 나보다 어쨌든 힘세잖아요. 국회의원들 오면 전경차도 싹 빠지고. 전경차 빠지면 우리 추모제도 하고, 집회도 하고. 그러면 얼마나 좋겠어요. 길이 열리면 우리도 조금조금 희망이 보이는 거죠. ‘용산참사 용산참사’ 하나의 타이틀 잡고 정치운동 하듯이 하지 말고. 

다행히 다시 용산참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당부하시고 싶은 말씀을 해주세요.

많이 와줬으면 좋겠어요. 많이 모였으면 좋겠고. 추모대회도 다시 하고. 미사에도 많이 와서 국민들이 다 알았으면 해요. 지방가면 “아니 거기 아직 장례 안치뤘어요?”라고 해요. 다 잊혀졌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 가슴이 아파요. 용산참사는 철거민들만의 얘기가 아니고, 어느 누구나 있을 수 있는 그런 일이라는 거죠. 노동자들도 마찬가지고. 박종태 열사도 그렇고, 쌍용자동차 노동자들도 그렇고. 그래서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이어가자는 거죠. 나 잡아가면 다른 사람이 하지 않겠어요.

인터뷰 및 정리: 안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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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이 다시 타오른다면, Be the Reds!

촛불이 다시 타오른다면, Be the Reds!

Posted 2009/05/06 06:49
Be the Reds! 2002년, 사람들은 시청광장을 온통 붉은 색으로 물들였고 열린 공간에서의 해방감을 마음껏 누렸다. 이어 2003년 여중생이 시작한 효순이, 미선이를 추모하는 촛불이 시청광장을 메웠다. 자신의 친구들이 미군에 의해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지만, 책임을 묻지도 못하는 정부와 정치적 목소리를 대변하지 못하는 조중동이나 KBS, MBC에 맞서 까페나 싸이월드에 사진을 퍼 나르고 광화문에 촛불을 밝힌 채 직접행동에 돌입하였다. 인터넷을 통한 뉴스의 생산자가 되고 이에 직접행동에 나서는 촛불에 대해, 인터넷시대의 소통과 대중동원의 전형으로 그리고 인터넷시대의 새로운 문화현상으로 거론되곤 했다.
당시에 온라인 행동에 주목한 사람들은 그간 보수언론의 편집되고 가공된 그리하여 왜곡된 정보가 아니라 날정보가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온라인 신문에 주목하며 직접적인 참여가 왜곡된 언론을 변혁하고 대의민주주의 제도를 변혁할 수 있다고 믿었다.
2008년 5월 2일 “광우병소 반대”, “잠 좀 자자, 밥 좀 먹자”라는 손 팻말을 든 학생들의 촛불로 시작해 100만의 촛불이 거리를 메웠고, 광화문 네거리에 아고라의 깃발이 펄럭였다. 그리고 이제는 인터넷신문에 댓글을 달기보다는 스스로 의제를 정하고 스스로의 정치의사를 표현하고 토론하고 이를 직접행동으로 옮기는 온라인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다.
2009년 오늘, 1년 전 어제의 기억을 떠올려본다. 전국 40여 군데서는 여전히 촛불이 타오르고 있다. 그러나 일군의 촛불은 오히려 반이명박전선의 대리주의에 얹혀 두 달에 가까운 민주당 압박 점거투쟁, 그리고 4.29 보선에서 반한나라당 촛불후보라는 기이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일군의 흐름은 민생민주국민회의의 깃발아래 여전히 파탄난 대의제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87년 민중항쟁에 이은 노동자대투쟁은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 기본권의 확장으로 진전됐고 ‘노동해방을 향한 노동자운동’으로, ‘조직’으로 이어져갔다. 그러나 2008년 촛불에서 제기된 먹거리, 교육, 생태, 공공성과 같은 생존권과 기본권에 기초한 요구는 여전히 여의도 의사봉 아래 신음하고 있다. 경제공황의 바가지를 뒤집어쓴 노동자는 거리를 헤매고 있으며 여전히 유지되는 경제 거품아래 신음하는 철거민은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촛불 1년, 촛불이 다시 타오른다면 그 촛불은 여전히 직접민주주의이고 직접행동이며 용산과 실업을 비껴갈 수 없는 생존권과 기본권의 문제를 진전시켜낼 때 의미가 있다.  
이종회



촛불 1년

“권력은” 누구 것인가. 그 진실 게임을 시작하다

5월 31일 동십자로 진출. 청와대로 향한 촛불의 분노

6월 10일. 명박산성. MB식 소통을 뛰어넘으려 하다.

反이명박정권투쟁으로 발전

촛불과 비정규직이 만나다

먹거리에서 출발해 다양한 공공성 의제로 확장

‘촛불’생존의 이유를 되묻는 용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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